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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모리스 블랑쇼 『죽음의 선고』, 그린비 2011
언어를 넘어 흐르는 공동의 음악
박준상 朴俊相
숭실대 철학과 교수 park.joon-sang@ssu.ac.kr
『죽음의 선고』(L’arrêt de mort, 고재정 옮김)는 모리스 블랑쇼의 허구적 글쓰기(소설 또는 이야기récit)들 가운데 하나다. 그의 작품의 경우 픽션이라고 해서 이론적 저작보다 더 번역하기 쉬운 것은 아니며, 또한 독자의 입장에서 확인할 수 있겠지만, 더 읽기 쉬운 것도 아니다. 그의 작품 가운데 픽션은 자국에서도 철학적 시론(試論)보다 덜 읽히고 덜 언급되고 덜 연구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난해하다는 평가를 자주 받아온 한 작가에 다가가기가 얼마나 쉽지 않은지, 얼마나 어려운지 강조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히려 우리의 의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한 우리가 철학적・문학적 지식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블랑쇼의 비평적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허구적 글쓰기에서도 독자가 느낄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데 있다. 그는 전문가나 비평가의 독서를 믿지 않는다고 자주 말했으며, 그의 관점에서 “작품은 작품을 쓰는 자와 작품을 읽는 자 사이의 열린 내밀성(intimité)이 될 때에만 (…) 작품이 된다”(『문학의 공간』). 여기서 내밀성은 작품에 대한 이해나 해석과 무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에 근거하고 있지는 않으며, 오히려 쓰는 자와 읽는 자가 어떤 상황을 공유하는 사건, 양자가 어떤 경험이 펼쳐지는 공간에 함께 들어가는 사건에서 비롯된다.
그 상황, 그 경험의 공간은 물론 언어의 매개로 준비되지만, 언어가 완전히 규정할 수 없고 어떠한 경우라도 언어가 귀결점(결론)이 될 수 없는, 언어 이전 또는 이후의 ‘자연적’ 움직임(인간이 귀속되어 있는 ‘자연’의 움직임)을 감지함으로써만 열린다. 그것은 쓰는 자와 읽는 자가 자연적인, 즉 익명적인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추이를 공동으로 따라감으로써만 열리는 공간이다. 즉 블랑쇼의 표현을 빌리자면 바깥, 언어의 바깥, 따라서 관념과 의식의 바깥, 언어・관념이 고유의 동일화의 힘을 통해 구성해낸 의식적 내면공간의 바깥, 거기에서 의식이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언어 이전 또는 이후의 중성적인 것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삶의 환희이자 고통으로, 죽음의 고통이자 환희로, 정념의 응결로, 간단히, 시간으로) 회귀하면서 관념적 동일화 작용을 무력화하거나 무효로 돌리거나 파괴한다(중성화neutralisation). “공포의 도저한 내밀성.”
『죽음의 선고』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부분의 주인공인 J와 뒷부분에 등장하는 나탈리・콜레트・시몬은 물론 서로 다른 여자들이지만, 화자인 ‘나’에게는 얼굴이 지워진 인물, 근본적으로 비인칭적인 인간으로 나타난다. “그녀의 개성,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며, 그녀에게 그런 것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이는 그녀들이 일반적 의미에서 ‘개성 없고 밋밋한’ 인물이라는 사실도, 반대의 사실도 말해주지 않으며, 만일 ‘개성’이 어떤 사회적・문화적 관점에서 드러나는 변별점이나 차이를 가리키는 단어라면, 다만 ‘나’와 그녀들 사이의 관계가 어떤 개성을 중심으로 형성되기에는 사회로부터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서 사회 이전 또는 이후에 침입하는 것들(예를 들어 J의 치명적인 병과 죽음, ‘나’의 병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예감, 콜레트의 “그 비인칭의 슬픔”, 각자의 고독이자 모두의 고독, 말하자면 사회 내에 있지만 동시에 사회로부터 “세계로부터 추방된 자”의 삶)에 의해 잠식당해 있음을 말해준다. 『죽음의 선고』에서 “공포의 도저한 내밀성”은 어느 가정집의 방, 어느 거리, 샹젤리제 대로, 한 호텔방, 지하철 차량과 같은 그토록 일상적인 장소에 침투하며, 바로 그렇기에 이 세계 또한 바깥이다. “사무치게 슬픈 어떤 일이 그곳, 그 지하철 차량 안에서 그 모든 대낮의 승객들과 함께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지척에, 진정한 불행이 그러하듯, 그토록 소리 없이, 모든 구조의 가능성 저편에, 미지의 상태로 그 무엇도 모습을 드러내게 만들 수 없었던 중대한 불행이 있었다.”(53면)
분명 『죽음의 선고』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낯설고 접근하기 어려운 어떤 스타일이 있다. 그러나 이 스타일은 단어와 문장들, 나아가 드러난 모든 형식적 특성 위에서 쉽게 눈에 들어오는 종류의 것이 아니고, 단순히 단어와 문장을 읽는 것을 넘어서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어떤 효과를, 몰입 속에서 일종의 ‘음악’처럼 ‘들을’ 수 있을 때에야 감지된다(거기에 이 작품에서 표현들 하나하나에 주시해야 하는 이유가 있으며, 그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분명 온순하고 친절한 책은 아니다). 또한 그 스타일은 어떤 순수하거나 새로운 형식실험에 대한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 전혀 아니고, 중심주제라 할 수 있는 “공포의 도저한 내밀성”이 그야말로 비인칭적인 것, 우리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로부터 따라나온 것이다. 한마디로 그 스타일은 단순히 저자가 스스로 말하기 원했던 것을 선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해서만 요청된 것이다. 그것은, 대부분 하나의 소설을 흥미롭고 박진감있는 이야기로 만들어놓으면서 그에 따라 독자를 이야기의 관객으로 소외시키는 전통적인 소설기법(가령 놀라움을 가져다주는 사건의 배치와 구성, 그리고 개성있는 동시에 예외적이고 전형적인 성격들의 갈등과 조화)을 의도적으로 배격하며, 다만 우리로 하여금 공유할 가능성이 있는 어떤 정념들로 열리게 하고 또한 그것을 만질 수 있게 하는 언어 고유의 움직임을 따라간다.
『죽음의 선고』에서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는, 나아가 문학이라는 사건이 전개되는 무대는 책 속에 있지 않으며, 저자의 의식이나 의도 내에도 있지 않고, 바로 단어를 좇는 독자의 눈의 움직임에 따라 형성된 독자 자신의 내면 속에, 적어도 저자와 독자 사이에 놓여 있으며(작품의 공동구성), 이를 바로 이 작품의 스타일이 증명하고자 한다.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나는 어떤 특별한 것도 놀라운 것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특별함은 내가 멈춘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이제 더이상 내 뜻에 달려 있지 않다.”(45면)
모든 관념적 동일화 작용을 무시하는, 보다 정확히 ‘있음(l’il y a)’ 자체로서, 모든 관념에 포섭되지 않는 차이로서 회귀하는 “공포의 도저한 내밀성”은 바로 모든 의식보다 더 큰 삶-죽음, 삶 배면의 죽음이자 죽음 배면의 삶이 가져다준 내밀성이다. “그렇지만 가장 큰 삶이 그곳에 있다. 내가 만지고 나를 만지는 삶, 다른 삶들과 완벽하게 같은 삶, (…) 이 삶,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다가와서 그리고 죽어가기를. 왜냐하면 이 삶은 그 앞에서 뒷걸음질친 삶을 거짓으로 만들기 때문이다.”(87면) 그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블랑쇼가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서의 죽음(하이데거)에 유보를 표명하면서 강조한 ‘모든 가능성의 불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하이데거적인 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이, 블랑쇼가 『문학의 공간』에서 도스또옙스끼의 악령에 나오는 인물 끼릴로프를 예로 들어 말한 것처럼, 어떤 관념 또는 의지에 삶-죽음을 포섭하려는 시도의 한 형태라면, 불가능성으로서의 죽음은 “뒷걸음치는 삶”으로부터 매순간 돌아서서 죽어감을 받아들이는 데 있다. 그러나 그 받아들임은 동시에 죽음에 대한 ‘수동적’ 저항인데, 삶-죽음의 순간들(결국 우리 모두의 삶의 순간들)에서는 받아들임과 저항이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의 선고』에서 그 받아들임이자 저항은, 흔히 우리가 블랑쇼의 죽음에 대한 사유를 비판하는 바와는 다르게, 그렇게 비관주의적이거나 허무주의적이지 않다. 바로 그것이 이미 죽었다는 판정을 받은 J를 삶으로 되돌려놓기도 하고, 나탈리로 하여금 그 밤의 순간에 ‘나’의 방문을 열게 만들고 거기에 있게 하고 결국 ‘나’를 기다리게 한다. 그러한 움직임들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일어나는 기적이다. “공동의 시간에 대한 한없는 갈망”이 만들어낸 기적이다. 더 나아가 『죽음의 선고』의 저자는 작품 자체로 되돌아와 또다른 기적의, 문학적 기적의 무대를 마련한다. 관념보다 언제나 더 큰, 따라서 언어를 초과하는 공동의 그 내밀성이 언어 안에서 결코 규정되지 않는다면, 저자는 그것을 언어를 통해, 하지만 언어를 넘어서서, 단어들 위로 흘러다니는 음악으로 ‘연주하는’ 것이다. 한 독자가 그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우리는 기적이 아니라고 쉽게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