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경위
만해문학상 운영위원회는 2011년 6월 14일 회의를 갖고 백낙청 최원식 황현산(문학평론가), 공선옥(소설가)을 제26회 만해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위촉했다. 심사위원회는 등단 10년 이상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이의 최근 3년간의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을 대상으로 하는 만해문학상의 규정에 따라 추천위원(창비의 시와 소설 분야 기획위원)들이 추천한 아래 11권의 저서를 놓고 심사를 진행했다.
김기택 『껌』, 나희덕 『야생사과』, 박시교 『아나키스트에게』, 서정춘 『물방울은 즐겁다』, 유홍준 『저녁의 슬하』, 천양희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이상 시), 권여선 『내 정원의 붉은 열매』, 윤대녕 『대설주의보』, 윤성희 『구경꾼들』(이상 소설), 염무웅 『문학과 시대현실』(평론).
7월 14일 첫번째 모임에서 김기택 시집, 나희덕 시집, 천양희 시집, 권여선 소설집, 윤성희 장편, 염무웅 평론집을 주요 심사대상으로 압축하고 좀더 충분히 검토한 뒤에 다시 모이기로 하였다.
7월 19일 두번째 모임에서는 심사위원 각자가 솔직한 견해를 주고받으며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삶과 시에 대한 경건한 성찰을 오랜 시력(詩歷)의 무르익은 언어로 담아낸 점을 높이 평가해 천양희 시집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를 제26회 만해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데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심사평
공선옥(孔善玉) 소설가
윤대녕의 소설을 읽으면 술 생각이 절로 난다. 어디 먼 데 여행 가서 그의 소설 속 사람들과 함께, 혹은 윤대녕과 함께 술을 마시고 싶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아무리 먼 데 여행을 가도 그의 소설 속 사람들은 여전히 쓸쓸하고 아득하다. 그리고 윤대녕이 그러하다. 아니, 갈수록 그는 이 생의 쓸쓸함 속으로 한없이 침잠해버리기로 작정한 것만 같다. 윤대녕 소설을 읽는 내내 장맛비가 내렸다. 그러면 내내 술생각 나고 내내 쓸쓸했던 것이 그의 소설 때문이 아니라 비 때문이었을까.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윤대녕에서 윤성희 소설로 넘어가는 일은 그래서 내게는 장마로부터의 탈출과 버금가는 일이었다.
윤성희 소설은 햇볕에 잘 말린 이불처럼 뽀송뽀송, 때로 유쾌하고 때로 경쾌하기까지 했다. 윤성희 소설 속 사람들은 호기심 왕성한 소년의 눈매를 닮았다. 그리고 내게는 작가 윤성희가 그러한 것같이 여겨졌다. 그 소년이 조금 더 자라면 어떤 눈매를 가질까. 그는 여전히 호기심 왕성한 ‘구경꾼’으로 살고 있을까.
권여선의 소설을 읽으면 우선 목 안이 칼칼해진다. 그리고 정신이 번쩍 든다. 그의 소설 속 사람들은 그들을 주조해낸 작가를 닮아서 명민하고 예민하며 섬세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나는 권여선 글을 읽다보면 명치가 좀 아프다.
윤대녕과 윤성희와 권여선의 글들을 읽는 내내 궁금했던 것은, 그들 소설 속 사람들이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였다. 윤대녕은 언제쯤 그의 소설 속 사람들의 여행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윤성희의 소설 속 소년은 이제 얼마나 컸을까. 그리고 권여선의 ‘그들’은 언제쯤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나의 궁금함이, 나의 물음이 실은 부질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윤대녕과 윤성희와 권여선이 그러하듯이 나 또한 ‘우리들의 그들’의 건투를, 행운을 비는 것뿐이리라.
염무웅 선생의 평론집 『문학과 시대현실』은 평론집이라기보다 ‘빼어난 작품집’이었다. 평소 평론을 잘 읽지 않던 내게 염선생의 글들은 평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첫 사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적 ‘사정’으로 염선생을 비켜갈 수밖에 없음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천양희 선생의 시는 예나 지금이나 참으로 살갑다. 갈수록 고와지는 천선생의 눈매를 닮은 시집 속에서 때로 장난기 가득한 난만함을 발견하는 일도 즐거운 일이다. 선생의 수상을 마음 깊이 축하드린다.
백낙청(白樂晴) 문학평론가
천양희 시인은 아름답고 간절한 서정시를 꾸준히 발표해왔다. 바로 그 때문에 익숙한 서정에 머물러 있는 시인으로 오인되기도 한다. 그러나 “간절함이 핏속을 도는 바늘처럼 따갑다”라는 시인 자신의 말대로, 그의 서정은 간단치 않다. 결과적으로 독자를 편안하게 해주는 시라도 그것은 괴로움을 통해 수없이 많은 것을 배우고 버렸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며 도저한 언어의 수련을 거쳐 도달한 성과다.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에서 그의 이런 시세계가 새로운 경지에 다다른 것 같다. 먼저 시집 『너무 많은 입』(2005)과의 사이에 급격한 단절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시인으로 사는 일에 대한 인식은 「그자는 시인이다」에서 보듯이 더욱 처절해졌고 그러면서도 「들」이나 「어제」 같은 시의 달관은 그 언어가 소박하고 평이한 것일수록 남들이 쉽게 흉내낼 수 없는 경지를 이룬다. 이는 「벽과 문」을 비롯한 많은 작품에서 재치있는 말놀이를 진지한 성찰과 결합한다든가 「구름에 깃들여」같이 기발한 이미지의 활달한 구사 속에 삶의 지혜가 스며든 한층 실험적인 작업을 수반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수상작으로 전혀 손색이 없는 시집을 만난 기쁨이 크다.
소설 분야로 국한했다면 나는 권여선의 『내 정원의 붉은 열매』를 골랐을 것이다. 『분홍 리본의 시절』(2007)에서 번뜩이던 그의 냉철하고 신랄한 재기가 여전한 가운데서도 전작에 비해 또다른 진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비판에만 몰입하지 않는 어떤 복합적인 정서 같은 것이 작품집의 매력을 오히려 더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작품세계가 더욱 진전하여 한결 원숙한 성과를 낼 때를 기다려보자는 데에 동료 위원들과 의견을 같이했다.
심사위원들 사이에 천양희 시집 못지않게, 더러는 그 이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은 저서가 염무웅 평론집 『문학과 시대현실』이었고 공동수상의 가능성마저 거론되었다. 나 자신 이 책이 우리 시대 비평문학의 기념비적 성취일 뿐 아니라 특히 요즘의 후배 평론가들이 귀감으로 삼아 마땅한 저술이라는 생각이다. 저자의 논지를 그대로 따르라는 것은 아니고 그의 넓은 식견이나 중후한 문장이야 하루이틀에 따라가기도 힘들 테지만, 자신이 아는 바 느낀 바 그대로 작품과 작가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진술하는 비평태도만은 되도록 많은 후진들이 익혔으면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소망과 상찬의 표현으로 만해문학상을 수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적절할까 하는 대목에서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수상자마저 부질없는 구설에 휘말려 수상의 영예가 영예 아닌 것이 될 위험은 피하는 게 낫겠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최원식(崔元植) 문학평론가
이번 대상작 가운데 단연 주목되는 바는 염무웅 평론집 『문학과 시대현실』이었다. 꽤 두툼한데도 한번 손에 잡으면 그대로 빠져들게 하는 마력을 지닌 글쓰기의 내공이 경이롭다. 다루는 작가와 작품 들의 안과 밖을 섬세하게 점묘하되 그 한계 또한 예리하게 짚어냄으로써 비평의 미덕을 본때있게 보여준 이 평론집은 평론도 문학이라는 깨달음을 새삼 일깨우던 것이다. 더구나 세대적 경계성(境界性)으로 신구 문단을 넘나들면서 체험한 생생한 삽화들이 곳곳에 보석처럼 박혀 있어 메마른 문학사를 구원하고 있으니 금상첨화라 하겠다. 하지만 창비를 대표하는 문학상이 창비를 대표하는 평론가에게 수여되는 일이 누가 될 수 있다는 지적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윤성희의 『구경꾼들』, 첫 장편을 이 정도로 써낸 역량에 감탄하면서도 범속한 현실과 반듯한 문체 사이의 틈이 내내 어른거렸다. 이 의도적인 균열에 유의한 작가의 속내가 짐작되는 바 없지 않지만, 결국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퇴화라는 엉뚱한 생각도 드는 것이다. 권여선 소설집 『내 정원의 붉은 열매』는 최근 작단이 거둔 뛰어난 성취의 하나다. 방을 바꿔버린 채 멀리 달아나버린 현실을 운동의 체험과 마주세워 골똘히 반추하는 그의 작업은 앨쓴 자기치유의 과정이라는 면도 없지 않은데, 진지함이 은연중에 조롱받는 시대에 한눈팔지 않고 자기식의 탐구를 밀어나가는 그가 앞으로 또 어떤 소식을 전해줄지 궁금하다.
자본주의를 살아내는 도시 소시민의 굴욕적 사회생태를 예리한 해학으로 부조함으로써 우리 시의 암흑면을 개척한 김기택 시인은 시집 『껌』에서도 용맹정진중이다. 집중성과 완성도가 놀라운 시집이지만 뭔가 징후적 일탈이 출현하기를 기다리고 싶은 심정이다. 천양희 시집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는 시력(詩歷) 반세기가 가까워오는 시인답게 귀가 순해진 지혜로 은은하다. 일상 밖에서가 아니라 일상 안에서, 아니 일상 그 자체를 방편으로 시를 닦는 그는 말하자면 도인이다. 시와 삶과 도의 겸통(兼通)을 실천하는 그의 시적 작업이 한소식으로 들어올려지기를 기원하며 만해문학상 수상작으로 삼는 데 동의했다. 천양희 시인의 수상을 축하한다.
황현산(黃鉉産) 문학평론가
염무웅 평론집 『문학과 시대현실』은 식민지 치하에서부터 최근까지 우리의 문학이 시대현실에 대응하여 하나의 정신사를 형성해온 과정을 깊은 성찰과 촘촘한 언어로 기록한 역저다. 문장은 적확하고 건실하며, 사실과 해석이 맞물리는 지점에서는 시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비평이 제 할일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을 받는 이 시대에 비평가와 이론가 들에게 귀감이 될 이 거작은 그러나 ‘문학 외적’인 사정으로 논의에서 제외되었다.
소설 부문에서는 권여선 소설집 『내 정원의 붉은 열매』와 윤성희 장편소설 『구경꾼들』을 감명깊게 읽었다.
권여선 소설에는 잘 연마된 지성과 예민한 감각이 서로 도와 빚어내는 아름다운 문체가 있다. 늘 알레고리적 의도 하나를 끌어안고 있는 주제들이 지적인 흥분을 자극하고, 그 주제들을 형상화하는 이야기들은 감미로우면서도 우리가 살아온 시대처럼 처연하다. 이 재능은 보다 긴 호흡으로 쓴 ‘타인의 이야기’에서도 빛을 잃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윤성희 장편소설에서는 활달하고 유희적인 글쓰기가 돋보이고, 사실과 환상 사이에서 착시를 일으키기에 충분한 특이한 서술기법이 흥미롭다. 전지적 시선, 그러나 유아적이기에 전지적인 이 시선 뒤에 삭막하고 비통한 현실이 숨어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더욱 성숙한 시선으로 현실과 정면대결을 하더라도 이 유희의 정신이 주눅들지는 않을 것이다.
김기택의 『껌』, 나희덕의 『야생사과』, 천양희의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는 모두 훌륭한 시집이다.
『껌』은 사물을 살펴보는 예민한 시선과 정련된 언어를 기반으로 어느 한곳 흐트러짐 없는 시들을 담고 있다. 시는 그 착상을 늘 지적인 분석으로 시작하고 늘 사개를 맞춰 끝을 맺지만, 그 뒤에는 시인이 드러내놓고 싶어하지 않는 깊은 감정이 깔려 있다. 흔들림 없는 시인들에게는 늘 다음 시집을 기다리게 된다.
『야생사과』는 시인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준다. 늘 큰뜻을 염려하며 단정하게 시를 써오던 시인이 이제 자기를 위해서도 시를 쓰기 시작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이 변화는 성공적이지만, 옛날의 시인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겠고, 이 시집에 자주 나타나는 ‘비어 있음’의 표현들에 시선을 모으려면 시간도 필요하겠다.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는 나이가 들수록 언어의 탄력을 더욱 높게 유지하는 한 시인을 보여준다. 언어를 지켜냈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지켰다는 말이 되기도 할 것이다. 이 시집에는 나열의 형식을 지닌 시들이 많다. 이 점은 시인에게 고독한 성찰의 시간이, 또한 자기 다짐의 시간이 그렇게 많고 길었음을 말해준다. 시인에게 고개 숙여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
예심에서 넘어온 작품들을 읽으며,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들의 염려와는 달리 한국문학이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느꼈다. 한 고비를 넘기면 더욱 풍성한 결실이 있을 것이다.
수상소감
세상과 사람 마음을 바꾸는 시
천양희 千良姬
1942년 부산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너무 많은 입』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박두진문학상, 공초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등을 수상했다.
『님의 침묵』이 비밀문서처럼 신성하게 읽혀지던 시절 대학생이던 제가 40여년의 격동을 지난 오늘 만해문학상을 받게 되니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듯 언어의 심장을 움직일 줄 아는 시인이 다시 된 것 같습니다. 시를 쓰는 동안 저는 두가지 말을 뿌리처럼 간직했습니다. 시를 쓰지 않으면 살아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는 말과, 어떤 훌륭한 시인이 있다면 그 시인의 시를 본받을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본받으라는 말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위기의식을 가지고, 끊임없이 부딪치며, 끊임없이 자각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를 향하려는 정신. 이 정신이 만해 시인이 우리에게 남긴 시인의 자세이며 시 정신일 것입니다.
삶은 사는 것으로 저를 증명하지만 시는 삶을 살림으로 저를 증명합니다. 혁명은 세상을 바꾸지만 시는 세상을 바꾸는 사람의 마음을 바꿉니다. 만해 시인이 바로 세상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 사람의 마음을 바꾼 시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해가 만해인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그의 시를 읽고 사랑하기 때문이며, 만해가 만해인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그의 정신을 기리고 본받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해 시인을 생각할 때마다 시의 가치란 오래 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되게 쓰는 데 있다는 그의 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발적 소외와 지독한 고통을 자청해봐야 한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럴 때 저는 시인의 존재방식에 대한 근원적인 모색을 위해 자의식을 가져봅니다. 나는 왜 시를 쓰는가? 시인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이란 시를 위해 가장 의연하게 고독을 이겨내야 하는 존재기 때문입니다. 내 삶에서 시는 단독정부의 수반처럼 무서운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시는 내 정신의 르네쌍스를 맞게 해주고 그렇지 않은 시는 나를 정신의 이방인으로 소외시킵니다. 시는 또 내 마음의 우왕좌왕을 절단내주고, 시간에 맞서는 정신의 긴 투쟁을 하게 합니다. 나에게 시가 주는 가장 큰 의미는 살아 있는 자로서 늘 질문자의 위치에 서게 해주고 작성자의 자리에 서게 해준다는 사실입니다.
시는 욕망이 아니라 존재여야 한다는 말을 생각하면서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속의 시들을 썼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잊지 않았고, 시인의 삶은 시에 의미를 주는 것이며 시인은 자기 주변의 침묵하는 것을 대신해서 말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무엇이 시를 정복하는가 묻는다면 시인들은 아마도 ‘고독’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돌아보니 저도 시를 쓰고 산 46년이란 세월이 바로 나를 정복하고 내 시를 정복한 고독이었습니다. 하늘은 모든 것을 다 가져가고 시라는 희망 하나를 저에게 남겨주었습니다. 앞으로도 그 희망 하나로 그칠 줄 모르고 타는 시의 등불을 켜겠습니다. 살아갈 일에 큰 힘을 보태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창비에 두손 모아 그 고마움에 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