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중산층의 불안과 정치적 무감성에 대한 분석
●가을호 특집 ‘이명박 이후를 내다보며’를 흥미롭게 읽었다. 제목만 봤을 때는 다소 뻔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다양한 계층의 시선에서 구체적으로 정리된 글들이어서 현 정부 이후의 대안을 여러 각도로 고민해볼 수 있었다. 그중에서 김현미의 「중산층의 욕망과 커지는 불안들」은 가장 관심있게 읽은 글이다. 중산층이 경험하고 있는 불안을 여러가지 위기들로 구체화하고 있어서 그들이 처한 현실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다만 중산층이 사회변혁의 필요성에 가장 둔감한 계층일 수 있다며 이것을 정치적 무감성과 연결시킨 부분은 매끄럽지 않았던 것 같다. 이 글에 따르면 중산층은 사회적 재생산 과정에 적극적인 소비자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적 변화에 더 예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소진된 여성들과 젠더 갈등의 심화’ 부분에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젠더 갈등은 현 시대에 심화된 중산층의 위기라기보다는 오랫동안 이어진 관습, 여성문제와 더 긴밀하게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중산층 담론으로 풀어내기에는 조금 버거운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 글에서 강조하고 있는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는 실제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 더 와닿았던 것 같다. 그것이 어떤 위기이든 국가의 역할과 각 계층의 역할이 적절히 맞물릴 때 비로소 모색의 길이 더 분명하게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전은지 skytalove@gmail.com
지방화와 본토화, 동아시아적 가치를 찾는 작업
●평소부터 동아시아담론에 많은 관심이 있던 터라 한 샤오꿍과 백지운의 대담 「중국문학의 현재, 동아시아문학의 가능성」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동아시아적 가치를 탐구하는 하나의 통로로 비교문학 또는 문학비평은 중요한 연구주제임이 틀림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자리였다. 한 샤오꿍은 북방을 중심으로 구성된 중국문화에 거리를 두고 이른바 ‘지방성’에 주목, 이것이 중국문학의 활력소가 될 것이라 이야기한다. 이런 사유야말로 동아시아문학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대담의 후반부에 나오듯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이른바 ‘뿌리 찾기’라는 것으로 대변되는 ‘본토화(本土化)’ 과정, 즉 자기 자신의 특수성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화와 본토화가 서로 대립된 과정이 아니라 서로를 강화하는 방향이 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대담에서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남북문제 같은 동아시아지역 내 갈등에 대해 당사자인 남북한의 진지한 고민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지적 등은 당장의 문제에 대한 대안 치고는 원론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간의 소통을 가로막는 장벽을 제거하기 위해 동아시아의 정치, 사회, 문화, 역사 등 다양한 방면의 내용을 창비가 계속 소개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임찬혁 chanhyuk49@naver.com
통섭의 ‘통속화’를 경계하며
●통섭(通涉, consilience)의 문제의식은 비단 학문의 세계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는 기업의 세계에서 통섭적 창의성을 구현한 천재로 추앙받고 있다. 19세기에 근대적인 학문체계와 대학구조가 정착한 이래 대학과 기업의 밀접한 상호작용 속에서 현대 자본주의는 전대미문의 성장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대략 1970년대를 기점으로 포드주의적 대량생산과 복지가 결합된 자본축적의 시대가 마감되고, 더욱 유연해진 금융과 디자인, 마케팅, 회계, 법률, 의료 같은 고부가가치 써비스로 무게 중심이 이동된 새로운 자본주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전통적인 대학과 관료주의적 기업은 창조적인 지식생산과 혁신적인 기업활동에 걸림돌일 뿐이라는 신자유주의의 논리만큼 통섭적 문제의식과 외견상 딱 들어맞는 것도 없다.
통섭의 문제의식이 본디 과학적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학문에 대한 태도에 관한 것이라면, 최근 한국사회에서 통용되는 통섭론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준다는 기업의 혁신 문제로 너무 빨리 넘어가고 있다. 기초학문 내에서는 통섭이 제대로 실험조차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인문학의 콘텐츠를 서둘러 첨단기술제품에 구현하는 문제로 곧장 이행하는 추세들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맑스의 비판적 유물론을 근대과학의 추상성과 분절성을 극복하고 인간의 실천을 통해 사물/대상의 개별성을 구현하는 역사적 과학의 복원이라는 관점에서 독해한 가을호 유재건 교수의 「맑스의 비판적 유물론과 ‘단일한 과학’」은 이러한 통섭의 통속화에 적절한 해독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과학은 신제품 생산의 원동력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인간적 삶 그 자체다. 통섭이란 무엇보다도 인간과 자연의 세계에서 도(道)를 추구하는 우리의 태도에 관한 문제제기다.
안민석 ahnms123@gmail.com
우리 대학은 몇등일까?
●반값 등록금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의 시위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현재의 등록금 부담은 정말로 엄청나서, 오죽하면 한 개그맨이 ‘등록금, 그거 숨만 쉬고 (편의점서) 바코드만 일 년 찍으면 돼요’라고 대사를 칠 정도다. 이제는 도대체 그 비싼 등록금을 내서 얻는 결과가 무엇인가라고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비싼 비용을 내고 얻는 효용/수익이 무엇인가,라고 말이다. 한데 이런 의구심을 파고들어 자연스럽게 대학의 시장화를 진행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대학의 가격 대비 써비스가 문제라면 시장논리를 적용하여 경쟁을 통해 가격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아직 등록금 부담에 대한 여론 때문에 ‘국립대학의 법인화’ 같은 주변작업만 진행되고 있지만, 영국 같은 곳에서는 이미 본격화되고 있는 모양이다.
「미국대학 우위론을 다시 생각한다」라는 글에서 하워드 홋슨은 영국의 고등교육정책의 핵심이 시장의 힘을 도입하는 것이라며 비판한다. 그는 계량적인 자료들을 통해서 사적 부문의 경쟁이 학문적 수준을 올린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는 것과 오히려 시장경쟁이 가격을 올린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나 건물 신축이 학문적 경쟁력과 무관하며 단지 비용만 상승시킨다는 지적에 공사소음이 몇년째 끊이질 않던 내가 다니는 대학 캠퍼스가 떠올랐다. 하지만 영국의 그것도 명문 옥스퍼드의 교수가 자신의 입장에서 쓴 글이다 보니 한가지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는데, 그가 이른바 세계대학평가라고 할 수 있는 THE-QS지수를 자기 논리의 주된 근거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학평가는 우리 사회에서는 경쟁논리 도입에 오히려 아주 좋은 무기가 되고 있다. 특히나 국제화지수 평가라는 명목하에 억지로 외국인 교원・학생을 유치해야 한다든가 영어강의를 의무화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비용과 부담까지 늘려가면서 말이다. 등록금과 대학교육에 대한 문제제기는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계량화할 수 있는 경제적인 관점으로만 보는 것은 피해야 한다.
조동철 leaveme1@naver.com
소설의 이야기와 영화의 이야기
●놓치는 것 없이 읽으려면 긴장하고 머리를 움직여야 하는 창작과비평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다. 단단하고 굵은 여러 가지 줄들의 엮어짐이 팽팽해서 하루하루 아껴 읽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특히나 매력적인 글은 김혜리 기자의 산문 「줄거리를 묻지 마세요」와 김애란 소설가의 인터뷰였다. 전자는 영화 저널리스트로서, 후자는 소설가로서 ‘서사’에 대해 명쾌한 견해를 제시했다. 수많은 매체로 수많은 이야기들이 혼재하고 쏟아져나오는 이 시대에, 각각 서사에 대한 확고한 소신으로 ‘쓰고’ ‘보면서’ 살아가는 두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김혜리 기자의 글은 서사에 대한 촘촘한 시각을 잘 보여주었다. 씨네마는 분명 이야기가 필요하지만 소설과는 다른, 영화의 특성상 특색 있는 시간의 배치와 쓰임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전부로 해서는 좋은 영화가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 세상에 멋진 영화는 많지만 왜 좋은 영화는 드문지, 그것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시해주었다. 또한 김애란 소설가의 ‘추파를 던지는 마음으로 쓴다’라는 대답에는, 말과 이야기에 천착하여 사려깊게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소설가의 면모가 깃들어 있는 듯했다. 소설의 서사는 영화와 다르고 여타 다른 예술과는 다르다. 차분한 눈으로 언어를 탐닉하며 찬찬히 소설의 서사를 대해야 할 것 같다.
장보배 bobeo101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