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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동아시아 지역문학은 가능한가
일본 전후 문학담론과 아시아적 시각
역사적 상상력과 자본주의적 상상력
안천 安天
토오꾜오대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 박사과정. 일본 현대문학 및 비평 연구. 주요 평론으로 「현대 일본의 새로운 ‘계급’을 둘러싼 지적 지형도」 「가라타니 고진과 현대 일본」 등이 있음. aniooox@gmail.com
한국에서 ‘동아시아문학’이 논의되는 이유 중 하나로 일본소설이 유독 많이 읽힌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중화권 소설까지 읽히게 된다면 한국은 동아시아문학을 논하는 데 가장 유리한 환경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사회에서는 ‘동아시아문학’이 현실성을 띠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편, 일본독자들은 원래 외국소설을 별로 읽지 않는다. 한국이나 중국 소설뿐 아니라 서양소설도 마찬가지다. 물론 서양소설이 한국이나 중국 소설보다는 상대적으로 인기가 있긴 하지만, 일본소설과의 규모 차이는 확연하다. 일반독자에게 외국문학의 위상 자체가 높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일본에서 ‘동아시아문학’은 아직 관념으로서만 존재한다. ‘동아시아문학’ 같은 하나의 문학적 단위가 설정되기 위해서는 그 단위 내에 고유한 공통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동아시아 국가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차이를 보여왔으며 과연 이 차이가 ‘근대화 이전의 공통된 문화유산’이나 ‘비서양권 중 가장 근대화에 성공한 지역’이라는 공통성 혹은 지리적 근접성으로 극복 가능한 것인지는 속단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문학’이라는 관념의 실현 가능성은 물론, 그 당위성에 대해서 필자는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동아시아라는 관점에서 일본의 근현대문학을 논하는 것은 일본만의 맥락 혹은 한국만의 맥락에서는 보이지 않던 사각지대를 가시화하는 의미를 지닐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여기에 있다. 일본의 문학담론은 동아시아에 대해 어떻게 논해왔는가, 만약 논하지 않았다면 왜 침묵했는가, 침묵했다면 그 침묵은 어떠한 형태를 띠었는가. 전후 일본문학을 중점적으로 논하면서 이 질문에 답해보고자 한다.
1. 탈아입구, 대동아 공영권, 냉전하의 근대화
‘아시아’라는 용어는 현재 아시아라 불리는 지역 밖에서 도래한 것으로, ‘서양’이 스스로를 정의하기 위해 도입한 개념이다. 따라서 근대 서양과 충돌하기 전까지 조선, 중국, 일본에는 스스로가 ‘동아시아’에 속한다는 인식이 없었다. ‘우리’는 서양과의 충돌을 통해 비로소 ‘동아시아’라는 자기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는 ‘세계사’라는 서양 중심의 독특한 역사체계에 조선, 중국, 일본이 편입됐음을 의미했다. 애초에 ‘세계사’라는 지적 장치가, 근대화에 이르는 과정을 역사적 필연으로 여기는 세계관을 내면화하는 제도였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아시아’라는 자기인식의 수용은 ‘세계사’라는 위계질서의 주변부에 마련된 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서양에 대한 공포가 커질수록 이 새로운 정체성은 자기긍정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자기 안에서 부정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이를 지양하기 위한 기제로 기능했다. 근대화를 도모하던 시기의 슬로건을 ‘탈아입구(脫亞入歐)’로 삼은 일본이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코모리 요오이찌(小森陽一)는 이러한 일본 근대화의 특징을 ‘자기 식민지화’라고 불렀다.1) 일본이 근대 서양의 가치체계를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후진적 요소를 ‘아시아’라는 개념에 응축시켜, 스스로를 ‘아시아적 가치를 부정하고 이를 서양 중심의 근대적 질서로 재편하는 운동체’로 정의했을 때, 이미 논리상으로는 아시아에 속하는 다른 주변국을 근대화=식민화하는 주체로서의 일본, 즉 제국으로서의 일본을 긍정하는 기본틀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아시아라는 개념을 긍정적으로 갱신하려는 시도 또한 있었다. 1903년, “아시아는 하나다”(Asia is one)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동양의 이상』을 쓴 오까꾸라 텐신(岡倉天心)은 “오늘날 아시아가 할 일은 아시아적 양식을 옹호하고 회복하는 것”2)이라며, 서양이 아닌 아시아의 고유한 적극적 가치를 도출해 아시아 각국이 각성하고 단결할 것을 호소했다.
이처럼 근대 일본에서는 아시아를 둘러싸고 배제와 동일화의 역학이 동시에 성립했는데, 일본이 서양을 모델로 삼아 아시아를 근대화=식민화한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한, 사회 내에서의 아시아담론 또한 배제와 침략의 성격이 우세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조선・대만・류우뀨우(瑠球)의 식민지화, 1차대전 등을 거치면서 일본은 꾸준히 서양 제국주의를 모방해갔고, 동시에 ‘세계사’의 중심부에 점점 가까워졌다.
하지만 ‘세계사’의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대외적으로는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과 갈등이 격화되었고, 대내적으로는 식민지 확대로 인해 민족을 초월한 통치 이데올로기의 필요성이 증대됐다. 또한 1차대전 이후 서양에서 유행한 ‘서양문명의 몰락’이라는 화두는 아시아 관련 담론을 활성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때 ‘동아시아’라는 개념을 새로운 맥락 속에 재소환한 일본은, 한계에 다다른 서양 근대문명의 극복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띤 동아시아적 주체를 확립한다는 미명하에 ‘동아시아 협동체’와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운다. 이와 동시에 애초에 침략적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했던 각양각색의 아시아담론들마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하위담론으로 재편되고 만다.
문학담론의 경우, 프롤레타리아문학으로 대표되는 정통 맑스주의나 무정부주의 계열의 작가 및 비평가는 자본주의와 제국주의로부터 모든 인민을 해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므로 자연스레 식민지 해방과 국제적 연대를 내세웠지만, 당국의 혹독한 탄압으로 1930년대에 괴멸한다. 그후 일본 문예비평의 아버지라 불리는 코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를 중심으로 한 ‘문학계(文學界)’ 계열과 야스다 요주로오(保田與重郎)로 대표되는 ‘일본낭만파(日本浪漫派)’가 문학담론을 이끌어가는데, 표현의 자유가 금지된 상황에서 전개된 이들 문학담론에는 정치적 패배주의가 짙게 배어 있었다.
프롤레타리아문학의 붕괴 이후, 문학과 사회의 접점을 재구성하기 위해 ‘사회화된 나’ 등을 논하던 코바야시는 전쟁을 거치며 거의 침묵하게 되고, 야스다는 모든 현상을 탈정치화해 미적 경험으로 환원하는 ‘낭만적 아이러니’ 전략을 구사했다. 야스다는 “낭만주의라는 지점에 입각해 ‘근대적 군국주의’를 비판”3)했다는 점에서 반체제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실제로 당국에 의해 위험인물로 분류됐다. 하지만 그는 전쟁으로 인한 죽음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긍정하는 것을 거부함과 동시에, 그러한 죽음을 탈정치화된 미적 행위로 묘사해 낭만파 특유의 아이러니로 현실을 긍정했다. 이러한 일본낭만파적 사유의 계보를 패전 후에 계승하게 되는 작가가, 『금각사(金閣寺)』 같은 완성도 높은 심미적 소설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한편, 자위대 꾸데따를 호소하며 할복자살을 하는 미시마 유끼오(三島由紀夫)이다.
패전 후 일본의 ‘동아시아’ 인식은 일본사상사 분야의 원로학자 코야스 노부꾸니(子安宣邦)의 다음 한마디로 거칠게 요약할 수 있다. “‘동아시아’란 전후 일본이 적극적인 관계 재구축을 유보해온 아시아 지역이다. 전후 일본에 ‘동아시아’란 지역 개념은 새롭게 구성하지 못해 결국 상실해버린 개념이라 할 수 있다.”4) 이렇게 된 데는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처음에는 아시아를 부정함으로써, 나중에는 아시아를 긍정함으로써 동아시아 침략을 정당화했던 일본이기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아시아를 논하는 것 자체가 어렵게 되고 말았다. 둘째, 2차대전 종결 직후 냉전이 전세계 정치를 과잉결정하게 되면서 일본의 담론지형 또한 냉전논리에 지배받게 되었다.
이 시기 일본문학계에서 주류로 부상한 것은 ‘전후파 문학’과, 비평 분야에서 이를 대변한 ‘근대문학파’였다. 이들은 전쟁에 협력했던 문학 관계자들을 규탄하는 한편, 일본사회가 잘못된 길로 접어든 이유를 철저하지 못했던 근대화에서 찾았다. 이는 이들이 만든 문예지의 제호가 『근대문학(近代文學)』이라는 데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는데, ‘근대적 자아’의 재확립에 무게를 뒀다는 점에서 동시대의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와 친화성이 있었다.
19세기 일본이 근대화를 추구할 때 부정했던 것이 전근대적 아시아였던 반면, 근대문학파는 아시아와는 무관하게 ‘근대적 자아’의 재확립을 논했으며, 그 과정에서 전쟁 이전의 일본문학사가 걸어온 궤적만을 문제삼았다. 근대문학파의 대표적 비평가인 히라노 켄(平野謙)은 당국의 체제 옹호를 위해 동원됐던 문학 관계자뿐 아니라 전쟁 직전에 탄압으로 무너진 프롤레타리아문학 또한 정치를 위한 수단으로 문학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유사한 오류에 빠져 있었다며 문학의 과도한 정치화 자체를 비판하고 문학의 자율성을 강조했다.
이들의 문제제기는 ‘정치와 문학 논쟁’을 거쳐 이후 일본의 문학담론을 규정하는 기본 인식틀로 자리잡게 되었다. 주의할 점은 근대문학파가 주장했던 ‘문학의 자율성’이 결코 예술지상주의나 심미주의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본 공산당의 과도한 정치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공산당 계열 작가들과 대립한 것은 사회와 개인이 충돌했을 때 개인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근대적 자아’의 재확립이라는 입장 때문이었다. 이 배후에는 더욱 철저한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면 일본사회가 파씨즘에 휩쓸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서구중심적 역사관이 자리잡고 있었고, 따라서 근대문학파의 시야에 아시아가 들어오지 않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결국 전후 일본의 문학담론에서 ‘동아시아’가 중요한 논의 대상으로 떠오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하겠다.5)
2. 역사적 상상력—오오에의 『만엔원년의 풋볼』
전쟁에 패해 미국의 점령을 당하고, 냉전이 시작된 후에는 안전보장 측면에서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 일본의 ‘자아 찾기’는 자연스레 미국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 이를 가장 진지하게 성찰한 비평가가 에또오 준(江藤淳)이다. 에또오는 『성숙과 상실』(成熟と喪失, 1967)에서 1950년대 중반에 등장한 ‘제3의 신인’들의 소설을 분석하는데, 가문 및 아버지와의 대립과 갈등을 그리던 과거의 소설들과 달리 이들의 작품에서는 패전으로 몰락한 부성을 수치로 여기고 모성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남자주인공이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에또오는 이 현상이, 자신감을 상실한 남편 대신 자기 옆에 있어주는 아들의 성장을 거부하는 엄마와, 미국화로 상징되는 근대화된 낯선 세상에 나가기를 두려워하는 아들이 공모해 만들어낸 ‘성숙을 거부하는 감성’에서 비롯됐다고 보고, 이를 중학생 차원의 감수성이라 비판했다.
나아가 모성과 일본다움의 상징인 자연이 미국적인 근대화의 진행 속에서 파괴되는 현실을 뼈를 깎는 고통으로 느끼면서도 이러한 ‘상실’을 받아들여야 ‘성숙’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사랑스레 품어주던 모성적인 자연이 붕괴된 이상, 낯선 ‘타자’가 있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에또오는 타자와 대면하는 독립된 개인으로 성장할 것을 호소한 점에서 『근대문학』과 유사한 근대주의자로서의 면모를 지녔다.
한편, 그는 전후 일본의 ‘언어공간’이 미국 점령하에서의 검열과 강요된 헌법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도 『근대문학』을 비롯한 전후 비평가들은 거기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며 이들을 비난했다. 흥미로운 것은 에또오가 미국의 검열과 미국이 강요한 헌법을, 전후 일본의 담론공간을 가장 강력하게 규정하고 있는 ‘금기’로 지적하면서도 그의 비판이 미국을 향하는 일은 결코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개인의 독립을 논하는 한편, 미국으로부터의 실질적 독립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아마도 미국 없이는 일본의 존속이 위태롭다는 그 나름의 현실주의적인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에또오의 자기모순은 전후 일본이 얼마나 미국 의존적이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며, 미국에 대한 이러한 과잉의식은 동아시아 관련 담론의 성장을 가로막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타자’와의 윤리적 대면을 논하고, 일본의 아이덴티티 재구성을 문제화하면서 미국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해온 에또오가 동아시아에 관해서는 거의 완벽하게 침묵했다는 사실은 상징적이다.
비평가인 에또오와 동반자 관계로 창작활동을 시작한 오오에 켄자부로오(大江健三郞)의 『만엔원년의 풋볼』(万延元年のフットボール, 1967)은 전후 일본이 낳은 최고의 소설 중 하나로, 노벨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이 소설도 동아시아에 대해 과묵한 편이지만, 그 서사구조는 근현대 일본사회에 각인된 동아시아의 흔적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일본 근대사를 논할 수 없음을 우직하게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에또오와 확연한 대비를 이룬다.
이 소설은 두 형제의 이야기다. 미국을 떠돌던 동생 타까시(鷹四)는 어느날 동향 출신 재일조선인 백씨를 만나게 된다. 타까시의 고향마을에서 미국형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백씨는 백년 넘은 고향집을 자신에게 팔지 않겠느냐고 타까시에게 제안한다. 타까시는 이를 계기로 일본으로 돌아와 형 미쯔사부로오(蜜三郎) 부부와 함께 고향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그간 밝혀지지 않았던 집안의 복잡한 내력을 접하게 된다. 여기에 이미 미국을 경유해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형성되고 재일조선인이 계기가 되어 일본의 숨은 과거가 드러나는, 과거사를 둘러싸고 형성된 구도에 대한 알레고리가 엿보인다.
형제는 가족사를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으며 이를 둘러싸고 갈등과 대립을 겪는다. 예를 들면, 패전 직후 고향마을 아래의 조선인마을을 청년들이 습격했을 때 죽은 둘째형에 대한 기억이 서로 다르다. 미쯔사부로오는 둘째형이 패거리 안에서 따돌림당하는 처지였고, 그 때문에 희생된 것이라고 추측한다. 한편, 타까시는 둘째형이 패거리의 리더였고 선봉에 서서 습격을 이끌다 장렬하게 죽었다고 믿는다. 아버지 또한 수수께끼에 가려진 인물이다. 패전 이전에 중국대륙에서 모종의 활동을 하다 귀국한 이후 죽게 되는데,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끝까지 알 수 없다. 가족사 자체가 동아시아와 깊은 관련이 있으면서도 그 전모를 파악할 수 없는 일종의 ‘공백’으로 제시되어 있는 점, 그리고 그 공백이 해석자의 시각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그려진다는 점에서 동아시아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역사적 과제이며 담론투쟁의 공간임이 부각된다.
가족사 해석의 가장 큰 대립은 증조부의 남동생에 관한 것이다. 이 인물은 백년 전의 농민봉기를 선동・지휘했다가 관군에게 쫓기는 몸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미쯔사부로오는 그가 자기 부하들을 버리고 몰래 도망가 이름을 바꾸고 평범한 사람으로 생을 마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동생 타까시는 그가 신념을 견지했고 관군과 맞서 싸우다 죽은 것으로 추측한다.
이런 해석을 바탕으로 타까시는 농민봉기의 주모자이자 패거리의 우두머리였던 가문 내 이단자의 계보에 스스로를 포함하고, 마을청년들을 부추겨 슈퍼마켓 습격을 선동한다. 그 와중에 운전 실수로 젊은 여자를 죽게 해 어려운 상황에 내몰린 타까시에게 미쯔사부로오는 농민봉기 주모자가 도주한 후에 살아남아 평범한 삶을 살았음을 알리고 타까시를 몰아붙인다. 미쯔사부로오와의 격론이 있던 그날 밤, 타까시는 자살한다.
그후 이 소설은 백씨가 두 형제의 고향집을 해체하기 위해 인부들을 이끌고 오는 장면에서 클라이맥스에 접어든다. 조선말로 대화하는 대학생 무리가 창고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백년 전에 지어진 이 창고 밑에 사람 한명이 겨우 들어가는 크기의 지하창고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농민봉기의 주모자는 도주해 과거를 잊고 평범한 여생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희생된 동지들의 넋을 기리면서 스스로 감금이라는 벌을 내리고, 다시 일어날지도 모를 봉기를 와신상담 준비하며 지하창고에서 숨어 지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미쯔사부로오는, 첫번째 농민봉기가 있은 지 십여년 후 다시 일어난 봉기를 성공적으로 지휘해 한사람의 희생도 없이 승리로 이끈 수수께끼의 인물이 바로 그였을 것이라는 생각에 다다른다. 미쯔사부로오는 타까시가 자살하고 난 후에야 그의 해석이 옳았음을 인정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산골마을 한 가족사의 전모를 밝히는 데 그들이 알지 못하는 언어를 쓰는 ‘타자’의 개입이 필수불가결했다는 점이다. 지하창고의 발견은 이 소설의 핵심을 이루는 장면인데, 창고건물을 사겠다고 한 사람과 창고를 해체한 사람들 모두 재일조선인이다. 조선인마을 습격 때 주인공들의 둘째형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얘기도 창고 해체의 현장에 있던 백씨를 통해 듣게 된다. 재일조선인으로 상징되는 동아시아와 직접 대면하여 이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한 백여년에 걸친 일본 근대사의 전모는 결코 드러나지 않을 것임을, 이 소설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조선인마을 습격은 패전 직후와, 농민봉기는 메이지유신과 표리관계에 있다. 메이지유신을 신화화하는 논자들은 자력으로 이룬 근대화를 칭송했지만, 그 과정에서 억압받아야 했던 민중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한편, 패전이 가져온 민주주의를 긍정하는 논자들은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가 동시대 한국/북한과 중국/대만에서의 강권적 국가체제에 의해 보장되는 측면이 있었음을, 그리고 이는 전전(戰前) 일본의 제국주의정책과 무관치 않음을 간과했다. 『만엔원년의 풋볼』은 전후의 체제를 성립시킨 패전을 조선인마을 습격에 겹쳐놓고, 메이지유신을 농민봉기와 대비시킴으로써 지배적 역사기술에 가려져 있던 피억압자의 역사가 다시 지배적 역사관을 뒤흔드는 상상력의 회로를 가동시킨다. 공식적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밤하늘에 빛나는 별이라면, 기록되지 않은 채 시간의 지층 속에 쌓여간 피억압자의 역사는 밤하늘의 어둠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피억압자의 역사가 교차하는 순간 어둠 속에 명멸하는 빛을 길잡이 삼아 새로운 별자리(벤야민)를 그리는 역사적 상상력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3. 자본주의적 상상력—하루끼의 편재성/차이성 전략
무라까미 하루끼(村上春樹)는 전후 일본사회의 ‘동아시아 부재’를 보여주는 모범적 사례다. 1990년대 이후 그는 동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작가 중 한명이 되었다. 그는 고독한 개인이 세계로 직결되는 서사 코드를 확립했다. 개인과 세계를 매개하던 중간항인 지역공동체, 사회, 국가 등을 거치지 않고, 즉 일본적 문맥을 뛰어넘어 곧바로 세계와 접속하는 통로를 만든 것이다. 이는 그의 소설이 세계 각국에서 널리 읽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런 서사 코드의 특성을 중시하는 비평가 아즈마 히로끼(東浩紀)는 하루끼를 2000년대 이후 일본에서 회자되고 있는 ‘세까이계(セカイ系)’ 서사 패턴의 선구자로 평하기도 한다.6) 하지만 세까이계는 현대 일본 특유의 창작문법 속에서 개인과 세계가 직결되는 세계를 묘사하고 있으며, 어디까지나 일본사회 내에서 구축된 ‘상상력의 환경’에 기대어 생산되고 유통됐다. 반면 하루끼의 소설작법은 그가 의도적으로 일본적인 것을 배제하는 과정을 거쳐 획득된 것이다.
그는 정통 일본문학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려 애썼고, 그 결과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의 소설은 오히려 미국 현대소설의 중력권 안에 있다. 에또오가 전후 일본의 근대화와 고도성장을 일본적인 것의 상실과 ‘미국화’로 파악했던 것을 상기하면, 일본경제의 절정기에 일본적인 것을 배제하고 이를 미국적인 것으로 대체하려 한 하루끼는 당시 일본이 처한 현실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에또오가 ‘미국화’라 불렀던 운동이 ‘세계화’되면서 하루끼의 감성 또한 ‘세계화’되어갔다. 하루끼 소설의 이러한 무국적성에 주목해 흥미로운 독해를 제시한 젊은 비평가가 후꾸시마 료오따(福嶋亮大)이다. 그는 하루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한다.
무라까미는 비평가들로부터 탈정치적이고 상업주의적인 작가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무라까미는 정치적 투쟁이 어떠한 의미도 지닐 수 없게 된 시대에, 즉 자유주의적인 자본주의사회에서 살아가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는 시대에 과연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탐구한 작가라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이렇게 생각하면 무라까미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것이다.7)
이렇게 정치적 관점에서의 하루끼 비판을 일단 괄호 안에 넣자고 제안한 후꾸시마는 하루끼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상품이나 음악 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라까미는 일반적으로 ‘균질화’를 가져온다고 알려진 글로벌 자본주의를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같은 ‘사물’(규격품)이 대량으로 유통됨과 동시에, 그것이 장소에 따라 미세하게 다른 의미를 띠게 되는 것—무라까미 하루끼는 사물의 편재성과 차이성을 이용해 주인공이나 독자를 현재 있는 곳에서 다른 장소로 유도해간다.8)
그의 말에 덧붙여보자면, 어느 나라에 가든 맥도날드가 있고, 같은 영화를 볼 수 있으며, 인터넷을 통해 같은 정보를 접할 수 있다(편재성). 이처럼 세계의 대도시는 장소의 고유성을 점점 잃어가지만, 한편으로 사람들은 같은 맥도날드, 같은 영화, 같은 정보를 접하면서도 모두 다른 경험을 한다(차이성). 그 체험들은 각자에게 고유한 것이며, 미세하게 다른 의미를 지닌다. 편재성은, 인간의 기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어디까지나 ‘의미 기억’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사태다. 한편, 그러한 균질화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편재하는 대상들에 대해 자기 고유의 기억을 만들어가게 될 것이다. 후꾸시마가 말하는 차이성이란 이런 ‘에피쏘드 기억’의 차원에서 드러나는 차이성이라 할 수 있다.
후꾸시마는 하루끼가 즐겨 사용하는 것으로 ‘퇴물이 되어가는 물건’과 ‘가까운 과거’를 들고 있다. 하루끼는 자신의 소설 속에 독자 개개인의 기억을 끌어낼 만한 설정이나 무대장치를 흩뿌려놓음으로써, 독자 스스로 자신의 기억에 묻어 있는 감정이나 이야기를 소설세계에 덧씌울 여지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후꾸시마는 ‘자기경험을 투사하기 쉬운 환경’을 독자에게 제공하려는 하루끼의 전략을 읽어냈다. 이는 현대사회의 질적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글쓰기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는 ‘계산 가능성’의 범위를 최대한 확대해나감으로써 세상을 투명하고 예측 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씨스템 설계가 중시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고도정보사회에 사는 개인에게 인과관계 전체의 파악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씨스템의 설계도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계산 가능성뿐 아니라 ‘계산 불가능성’까지 고려한 씨스템 설계가 요구된다. 각 독자들의 에피쏘드 기억이 바로 이 계산 불가능성의 영역이다. 하루끼의 소설에서 후꾸시마가 읽어낸 ‘차이성’은 이 계산 불가능성을 고려한 무대장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무대장치는 글로벌 자본주의체제가 전세계에 퍼뜨려놓은 물건이나 정보 들이기 때문에 기존의 지역적 문화권(예를 들면 동아시아)과는 무관하게, 글로벌리즘의 영향권에 포섭된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라도 잠재적으로 하루끼의 독자가 될 가능성을 내포하게 된다.
2000년대에 들어 일본문학계에서는, 걸출한 비평가 아즈마 히로끼가 구성한 문제틀 안에서 신진세대의 문학・문화비평이 전개되면서 ‘문학’의 개념 자체가 변화했다. 더이상 순문학의 아우라는 기능하지 않게 되었으며, SF・추리・판타지 같은 장르소설이나 당시 일본의 소설 출판시장을 석권하다시피 한 ‘라이트 노블’을 만화・애니메이션・게임과 동등한 차원에서 논하는 젊은 비평가가 새로운 독자를 획득해 사회적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한편, 기존 문학담론은 과거의 ‘문학’ 개념에 커다란 수정을 가하려 하지 않았다. 순문학은 젊은층에게 외면받은 지 오래이며, 높은 소비력을 지닌 노인세대가 이를 지탱하고 있다. 자명한 사실은 ‘문학’이나 ‘소설’이라는 개념 자체가 지니고 있던, 세대를 초월한 공통된 이해의 지평이 붕괴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소설’이라는 같은 단어로 전혀 다른 대상을 가리키고 있다. 시간은 물론 새로운 세대인 전자의 편이다.
그렇다면 신진세대는 더 넓은 지평, 더 깊은 현실인식에 도달한 것일까? 일본사회 안에서만 본다면 그들은 현실을 더 넓은 시야에서, 더 깊은 층위까지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 내부에 한해서이다. 새로운 세대의 사유는 오히려 일본사회에 매몰돼 일본이라는 특수한 문화・정보 생태계 내부에 갇힌 자기언급적 비평담론을 생산하고 있다. 그나마 예외적으로 일본의 외부에 관심을 보이는 신진비평가가 앞서 말한 후꾸시마로, 중국문학 연구자이기도 한 그는 탈이념화・탈역사화된 현재 일본의 젊은 비평가들 중에서 드물게 ‘동아시아’에 주목하고 있다.
후꾸시마는 아즈마가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9)에서 보여주었던, 소설을 둘러싼 ‘상상력의 환경’을 분석하는 비평방식을 보완・발전시켜, 이 방법론을 일본뿐 아니라 중화권의 현대문학 독해에 적용하고 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후꾸시마가 다루는 ‘중화권의 현대문학’은 일본의 라이트 노블에 해당하는, 만화・애니메이션・게임10) 등의 영향하에서 성장한 문학을 지칭하는 것이지 정통 문예지에 실리는 문학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중국이나 대만에서도 일본의 ACG와 한국 드라마의 영향권에서 등장한 가벼운 소설들이 젊은 독자층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성장하고 있다. 한국 드라마라는 새로운 변수가 있긴 하지만 ACG의 요소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소재 측면에서는 일본의 라이트 노블과 중국의 새로운 소설은 거의 동일하다. 따라서 소재가 아닌, 소재를 다루는 방식에서 일본과 중국의 차이를 읽어내는 독해방식을 후꾸시마는 취하게 된다. 결론만 보자면, 일본의 경우는 캐릭터가 가장 중요한 욕망의 대상이고 스토리는 캐릭터를 부각하기 위한 종속적 요소인 반면, 중국에서는 캐릭터나 스토리보다 문체가 욕망의 대상이 되며 따라서 단순히 독서를 즐기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문체를 모방하고 패러디하는 인터넷상에서의 글쓰기 행위로 이어지는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후꾸시마가 자신이 제시한 개념틀과 논리 유형으로 일본, 중국, 대만의 문학을 논할 수 있게 된 것은 일본의 ACG가 중국과 대만의 젊은층 사이에서 ‘상상력의 환경’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즉 동아시아에 일본의 써브컬처 문화가 널리 퍼져 있는 바탕에서 일본의 라이트 노블과 중국이나 대만의 유사한 문학장르를 비교할 수 있게 됐다. 만약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장르가 널리 읽힌다면, 후꾸시마의 분석틀을 변형시켜 한국의 문학현상을 동아시아라는 지평에서 충분히 논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후꾸시마의 분석틀이 유효하고 설득력이 있다면, 이는 문학이 더이상 문학이라는 세계에서 자기완결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따라서 문학의 틀로 읽어낼 수 있는 영역은 앞으로 더욱 줄어갈 것이다. 문학을 아우르는 미디어믹스적인 ‘상상력의 환경’을 포괄적으로 분석하는 지평에 섰을 때, 문학과 다른 장르와의 분절 형태도 비로소 시야에 들어오게 될 것이며, 대중문화의 상호침투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동아시아 권역을 ‘상상력의 환경’이라는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 또한 열리게 될 것이다.11)
4. 맺으며
처음에는 아시아를 부정함으로써 근대국가를 건설하고 나중에는 동아시아의 이름으로 서양 근대와 대립했던 일본은 패전 후 아시아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동아시아’라는 개념은 새롭게 구성되지 못한 채 방기됐던 것이다. 당시 일본의 시야에는 미국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오에의 『만엔원년의 풋볼』은 일본이 미국을 경유해 동아시아에 이르는 길을 보여준 예외적인 걸작이다. 그는 침묵 속에 가려졌던 두 시대에 걸친 피억압자의 역사가 서로 공명하며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통해 동아시아와 일본이 교차하는 역사적 상상력을 형상화했다.
1980년대가 되면서 탈식민주의에 입각한 동아시아의 연대가 일부 문학 관계자들의 과제로 부상하긴 했으나, 동아시아가 아닌 미국을 주시한 하루끼가 널리 읽히게 되었다. 일본적 문맥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하루끼는 미국적 생활양식의 세계화와 함께 자본주의의 특정한 발전단계와 연동해 널리 읽히는 소설가로 입지를 굳혔다. 그는 유독 동아시아권에서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데, 이것이 동아시아가 유사한 발전단계에 있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밝히는 것은 앞으로 동아시아문학을 논하는 데 유의미한 작업이 될 것으로 사료된다.
1980년대부터 일본에서는 근대문학의 죽음이 거론되기 시작했고, 근대문학 대신 다양한 장르문학과 라이트 노블이 새로운 비평담론의 장(場)에 부상했다. 그후 이 둘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는 일은 거의 없으며, 지금은 각자의 길을 걷고 있다. 후자의 경우, 그같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의 환경’이 일본 써브컬처 문화에 너무 의존하고 있어, 그러한 문화가 침투한 영역에서만 유효한 담론으로 기능하는 한계를 지닌다. 따라서 동아시아 각국의 청소년층이 즐기는 소비 콘텐츠로서의 소설에 대해 독자적인 독해를 시도하고 있는 후꾸시마의 논의는 일본발 ‘동아시아 문학담론’의 싹이 될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는데, 그 성공 여부 역시 일본 써브컬처 문화의 침투력에 크게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현재 일본의 문학담론에서 ‘동아시아’가 내실있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패전 이전의 일본에는 다양한 동아시아담론이 존재했지만 이들은 제국주의담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전후에 봉인되었고, 이 결정적인 단절로 인해 전후 일본의 문학담론에서 동아시아는 무의식적인 금기가 되었다. 2000년대 들어 동아시아의 문화적 상호침투가 진전되면서 한국과 중국의 소설이 소개되고 있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따라서, 서두에 말했듯 일본에서 ‘동아시아문학’은 아직 관념으로서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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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모리 요오이찌 『포스트콜로니얼』, 송태욱 옮김, 삼인 2002.
2) Kakuzo Okakura, The Ideals of the East with Special Refernce to the Art of Japan, London: John Murray 1903, 240면.
3) 松本健一 『竹内好論』, 岩波書店 2005, 110면.
4) 子安宣邦 『「アジア」はどう語られてきたか—近代日本のオリエンタリズム』, 藤原書店 2003, 102면.
5) 아시아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한 작가와 비평가로 타께다 타이준(武田泰淳)과 타께우찌 요시미(竹内好)가 있다. 타께다와 타께우찌는 토오꾜오제국대학에 재학중이던 1935년에 함께 ‘중국문학연구회’를 만들 정도로 중국문학에 심취해 있었으나, 둘 다 중국의 전쟁터로 끌려갔다. 패전 후 타께다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여러 소설을 발표해 근대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을 상기시켰고, 타께우찌는 자본주의진영뿐 아니라 소련과도 대립을 불사하던 중국의 모습에서 서양적 가치에 저항하는 아시아를 읽어내, 1960년 안보투쟁에서 분출한 일본의 민족주의를 ‘저항하는 아시아’ 속에서 재구성하는 길을 모색했다.
6) 세까이계를 비롯해 1990년대 이후의 일본소설에 대한 담론 및 여기서 미처 논하지 못한 하루끼와 역사의 관계에 대해서는 졸고 「‘소설의 종언’ 이후의 일본소설론: 하스미, 오쓰카, 아즈마」(『문학과사회』 2011년 봄호)를 참조 . 하루끼가 세까이계의 원조라는 아즈마의 주장은 東浩紀, 新海誠, 西島大介 「セカイから、もっと遠くへ」(『波状言論』 16号 2004.9.30)을 참조.
7) 福嶋亮大 『神話が考える』, 青土社 2010, 196면.
8) 같은 책 202면.
9) 東浩紀 『ゲーム的リアリズムの誕生』, 講談社 2007.
10) 후꾸시마에 따르면 중국에서는 이를 줄여 ACG(Animation, Comic, Game)라고 표기한다(福嶋亮大 「チャイニーズ・イノセンス」, 『ユリイカ』 2008年 3月号).
11) 예를 들면, 후꾸시마는 중국판 라이트 노블을 논하면서 작품 자체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독자들의 행위양태를 추적해, 이 장르가 인터넷이라는 의사소통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문체를 매개로 한 독특한 승인욕구 씨스템을 형성하게 됐음을 강조한다. 심지어 특정 작가의 문체를 흉내내기 위한 매뉴얼이 판매될 정도라고 한다. 이처럼 작가와 독자가 공유하는 ‘상상력의 환경’을 가시화하는 작업의 구체적인 선례가 아즈마의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문학동네 2007)이다. 아즈마는 일본의 작가와 독자가 상호참조하는 상상력의 환경으로 ‘데이터베이스’를 논한다. 이러한 작업은 라이트 노블이나 장르소설의 사회적 기능을 가시화하는 효과를 지니며, 이 지평이 동아시아로 확대된다면 ‘써브컬처를 둘러싼 상상력의 환경’이 동아시아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분절되는지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