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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중・일 작가가 말하는 동아시아문학
진도 7.0 시대의 문학과 연대
강영숙 姜英淑
1966년 춘천 출생. 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흔들리다』 『날마다 축제』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 『아령 하는 밤』, 장편소설 『리나』 『라이팅 클럽』 등이 있음.
올봄 일본에 지진이 난 직후인 3월 14일, 중국 옌지(延吉)로 갔다. 북간도의 한인 이주촌인 명동촌과 용정을 촬영하는 다큐멘터리 제작팀과 함께였다. 함경북도 회령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오랑캐령을 넘어 용정으로 들어오는 이주민의 이동경로를 영상으로 재현하는 일은 생각보다 흥미로웠다. 중국과 북한 간 국경지대 투먼(圖們), 그곳에서 본 북한과 두만강, 양고기뀀을 구워먹는 내내 활활 타오르던 숯불과 바람이 강하던 국경지대의 스산함이 떠오른다.
지진이 난 지 닷새쯤 되었을 때부터, 중국사람들이 소금을 사재기하기 시작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소금에 방사능 해독효과가 있다고 믿었던, 옌지에 사는 한 중국인 공무원은 저축해놓은 몇년치 월급을 털어 자신이 평생 먹고도 남을 분량의 소금을 사다 집에 쌓아놓았다고 했다. 날씨나 황사, 자연재해가 내 소설의 배경이 된 지는 오래였지만, 그러고 보니 해가 바뀌고 두달 동안 집중해서 쓴 단편소설 세편이 공교롭게도 모두 자연재해나 원전사고, 구제역 같은 사태를 배경으로 했다. 거의 200년 전 독일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설 『칠레의 지진』이 생각났다. 1647년 칠레의 수도 산띠아고에 지진이 몰아친 뒤 살아남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생존의 기쁨으로 환희에 들뜨지만, 이내 도시는 길에서 해산하는 여자들로 가득 차고 교회에서 광장에서 사람들이 인간성 대신 야수성을 갖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들.
2007년 일본에 짧게 머물렀을 때 만났던 분들이 생각나서 몹시 불안했다. 서울에서는 불통이던 전화가 여기서는 연결되었고 팔순이 훌쩍 넘으신 김석범(金石範) 선생은 특유의 제주 사투리와 일본어 억양이 뒤섞인 목소리로 “우리는 아무 일 없다”고 담담히 답하셨다. 선생은 “네가 소설에 지진 얘기를 써서 지진이 온 거 아니냐”며 웃으셨고 문학에 대한 놀라운 열정을 말씀하셨다. 사실 나도 지진을 경험한 적이 있다. 2007년 8월 일본생활 6개월이 끝날 무렵 나가노현의 카루이자와(輕井澤)에 놀러 갔다 토오꾜오로 돌아가는 길에 만났던 니이가따 지진의 여파. 저 멀리서부터 집들이 도미노처럼 차례로 땅에서 분리되듯 뜯어졌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그때 지진규모는 6.8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당도한 지진의 여파는 말로 하기 어려운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토오꾜오의 게스트하우스 텔레비전 화면 위쪽에 매일 떠 있는 지진정보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나까지마 쿄오꼬(中島京子)는 2010년 『작은 집』으로 나오끼상을 받은 작가로, 나는 2009년 미국의 아이오와 국제창작 프로그램에서 그녀를 만났다. 프로그램이 끝난 후 일본으로 돌아간 그녀는 분게이슌주우(文藝春秋)에서 발행하는 『분가꾸까이(文學界)』 2010년 10월호에 ‘다가올 미래 작가들’이라는 특집을 기획, 아이오와에서 만난 작가들 네명의 소설을 번역・소개했다. 그 잡지에 소개된 내 단편소설이 2004년 인도네시아 지진을 배경으로 한 「해안 없는 바다」이다. 그때 일본의 한 신문에 실린 짧은 기사에서는 내 소설을 전통적인 가족관계의 변화를 다룬 작품이라고 했을 뿐 지진 얘기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소설에 쓴 문장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일본사람들은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반드시 한번은 일본열도의 오른쪽이 반쯤은 무너져내리는 지진이 다가온다는 것을 예감하고 산다고 쓴 구절이었다.
나까지마 쿄오꼬는 우리가 ‘음식 사막’이라고 부르던 아이오와의 호텔방에서 작은 전기밥솥 하나로 따끈따끈하고 맛난 밥을 지어주곤 했다. 조금 멀리 외출을 한다고 해봐야 사방이 모두 옥수수밭뿐인 그곳에서 우리는 조금씩 친해졌고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직격탄을 맞은 뉴올리언스를 함께 여행했다. 그곳이 미국이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우리가 일본어나 한국어가 아닌 제3의 언어로 의사소통을 했기 때문일까, 가볍고 솔직한 기분으로 편안하게 만날 수 있었다.
이번 지진 이후 사진가이자 에쎄이스트 후지와라 신야(藤原新也)는 “대지진이 일본에는 축복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무라까미 하루끼(村上春樹)는 “원자로가 일본의 지옥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나까지마 쿄오꼬는 뭐라고 말했을까. 그녀는 아이오와에 있을 때처럼 밝고 명랑한 톤이 아닌 아닌 작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다. 너무 어려운 상황이다”라고 했다.
첫 장편소설 『리나』를 일본의 한 출판사와 계약한 건 2009년이었다. 색깔있는 책을 내는 작은 곳이라고 해서 마음에 들었고, 세계의 여성작가 씨리즈에 속해 다른 나라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출판된다는 것이 더 마음에 들었다. 나는 한국에서 번역 지원금을 받아 책이 출판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간 일본인 번역자와 200여개 가까운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주고받으며 바다를 건너 이루어지는 출판 비즈니스의 어려움을 실감했다. 올가을 출간된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일본의 오랜 불황과 지진피해 속에서 책 출판이 지금 어느 단계에 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추천글을 쓰기로 한 『깨어나라고 인어는 노래한다』의 작가 호시노 토모유끼(星野智幸)가 라틴아메리카 체재 경험 때문에 느긋한 ‘라틴 타임’의 속도로 원고를 쓰고 있다는 것 하나는 짐작할 수 있다. 출간 소식을 기다리면서도 어린 탈북 소녀가 겪는 수난, 쓰레기더미와 폭발사고로 자연재해보다 더 큰 상처를 안게 된다는 내용의 그 소설이 일본의 독자들에게, 아니 나까지마 쿄오꼬에게 또 악몽을 불러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굉장히 우울하다.
옌지에서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토오꾜오 인근의 카마꾸라(鎌倉)에 사는 시인 키도 슈리(城戶朱里) 부부가 서울에 왔다고 해서 만났다. 안부를 묻자 그들은 토오꾜오에서는 밤에 편안히 잘 수가 없었다, 서울에 와 사흘 내내 잔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편안히 잠을 잘 수 없는 도시가 된 토오꾜오의 거리 이곳저곳이 떠올랐고, 점차 수도권으로 확산되고 있는 방사능 공포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나까지마 쿄오꼬와 나는 최근에 이메일을 통해 우리가 이 상황에 대해 작가로서 뭔가 말해야 하지 않을지 의견을 나눴다. 한국도 원전이 안전하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나라고 일본도 이 대재앙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린 몹시 흥분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이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라는 점, 유일한 위험은 어쩌면 자연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라는 점, 그러므로 다가오는 모든 재앙의 근원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칼 구스타프 융의 말처럼 이 모든 일이 바로 우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그녀도 나도 공감하고 있다.
지진 후에 읽은 여러 자료와 기사 중에 「‘어둠’의 사상」이 인상적이었다. 『녹색평론』 2011년 7-8월호에 실린 마쯔시다 류이치(松下龍一)의 글인데, 그는 1960, 70년대에 화력발전소 건설 반대투쟁을 했던 사람이다. 원래 1972년에 발표된 이 글에서 그는 한달에 하룻밤이라도 전기를 끊고 텔레비전 없이 ‘어둠’으로 다가가자고 제안한다. 나까지마 쿄오꼬도 최근 토오꾜오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원전 반대운동에 동참해 페이스북으로 이메일로 일본 내 반대운동의 흐름을 국내외로 전하고 있다. 이런 흐름은 더욱 가속화될 것 같다.
이런 어려운 상황으로 우리에게 더 큰 연대감이 생길 것은 확실하다. 물론 이것이 각자의 문학적 주제가 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나까지마 쿄오꼬는 대지진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녀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토오꾜오에서의 사소한 일상생활을 그려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리고 향후 몇십년 동안 우리는 전보다 훨씬 더 불행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