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논단과 현장

 

D. H. 로런스의 민주주의론

 

 

백낙청 白樂晴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최근 저서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1/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등이 있음. paiknc@snu.ac.kr

 

 

1. 에쎄이 「민주주의」

 

영국의 작가 D. H. 로런스(1885~1930)는 체계적 이론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예술작품 자체가 지니는 사상성을 떠나서, ‘창작’ 아닌 산문들을 보아도 값진 이론적 통찰로 가득하다. 민주주의에 관한 발언도 상당부분 오늘의 문제들과 맞닿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한편으로 로런스 사상의 현재성을 검증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로런스에 기대어 오늘의 민주주의 논의에 기여하고자 한다.

민주주의에 관한 로런스의 관심은 평생 지속되었지만 ‘민주주의’를 제목으로 한편의 에쎄이를 쓴 것은 1919년의 「민주주의」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1) 이 산문은 1919년에 네꼭지로 나뉘어 씌어졌고 그중 1~3장이 당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4개 국어로 간행되던 조그만 잡지 『말』(The Word)에 연재 발표되었다.2) 그러나 일반독자에게는 유고집 『피닉스』3)에 수록될 때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로런스 자신은 소설 『캥거루』(1923)의 작중인물을 통해 이 글의 존재를 상기한 바 있다.4)

근년의 로런스학계에서는 이 글이 주로 ‘타자성’(Otherness), ‘차이’(difference) 등 현대 비평담론의 주요 쟁점을 다룬 점에 주목해왔다.5) 그러나 이들 연구는 로런스 정치사상 자체를 중시하지는 않는 경향이며,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서양의 전통적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사유가 요구된다는 인식도 부족한 것 같다.

「민주주의」는 네장 모두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을 거론하면서 시작하는데, 제1장은 휘트먼의 민주주의 양대 원칙의 하나인 ‘평균적인 것의 법칙’(the Law of Average)6) 곧 ‘평등’ 개념을 비판하는 데 집중된다.

프랑스 대혁명의 ‘자유, 평등, 우애’를 차치하고도, 근대 초기의 자유주의나 이후의 자유민주주의가 모두 ‘평등’을 앞세우지 않되 실은 평등의 이념에 근거했다고 말할 수 있다. 자유주의(liberalism)는 인간을 혈통과 신분에 따라 불평등하게 배치하는 사회에 대한 반발이었고, 이러한 자유주의의 ‘자유’를 대중에게 평등하게 적용할 것을 요구하는 민주주의자들과의 갈등과 절충을 거쳐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가 성립했다. 그런데 이렇게 확산된 자유민주주의의 자유조차 사회적 약자에게는 무용지물이라는 인식에서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좀더 명시적으로 평등을 추구하는 노선이 대두한 것이다. 오늘에 이르면 현존하는 온갖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평등은 정치적 수사와 철학 양쪽에서 모두 하나의 공통된 이상으로 기능한다. ‘한층 불평등한 사회’를 부르짖는 정치인은 없으며, 정치이론에서도 온갖 다른 입장의 철학자들이 어떤 형식의 평등주의든 평등주의를 주장하고 있다.”7) 

바로 이것이야말로 근대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문제점이라는 것이 로런스의 진단이다.

 

사회라든가 민주주의라든가 다른 어떤 정치적 국가나 공동체도 개인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결코 개인을 위해 존재해서도 안되며 단지 ‘평균적인 것’(the Average)을 확립하기 위해 존재한다. (…)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죽은 이상들이다. 저들은민주주의, 사회주의뿐 아니라 국가와 민족인용자 모두 하나같이 국민의 가장 낮은 욕구를 채워주기 위한 인공적 장치일 뿐이다.(66면)

 

그리고 물질생활을 위한 이러한 장치를 이상화하고 ‘평균적인 것’의 다른 이름인 ‘동일성’(One Identity)을 진정한 정체성(identity)으로 오해하는 데서 현대세계의 온갖 혼란과 불행이 야기된다는 것이다.

로런스가 휘트먼의 핵심적 진리라고 재해석한 ‘새로운 민주주의’는 평등과 불평등을 넘어선 곳에서 성립한다.

 

어떤 사물이 그것 자체로 유일한 경우에는 비교가 성립하지 않는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평등하지도 불평등하지도 않다. 내가 어느 다른 사람 앞에 있고 내가 순수한 나 자신일 때 나는 나와 평등한 인간이나 나보다 저급한 인간이나 우월한 인간을 의식하는가? 아니다. 스스로 그 자신인 사람과 함께 서 있고 내가 진정으로 나 자신일 때, 나는 어떤 ‘현존’(Presence)을, ‘다름’(Otherness)의 기이한 실재를 의식할 뿐이다. (…)

따라서, 우리는 ‘민주주의’의 첫번째 위대한 목적을 깨닫는다. 곧, 평등이냐 불평등이냐는 문제가 개입함이 없이 각자가 자연발생적으로 그 자신이 되는 것—남자마다 그 자신이 되고 여자마다 그녀 자신이 되는 것—그리고 아무도 다른 남자의, 또는 다른 여자의 존재를 규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80면)

 

이것이 현존하는 사회적 불평등을 옹호하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위의 인용문에서 “아무도 다른 남자의, 또는 다른 여자의 존재를 규정하려 하지 않는 것”이라는 원칙은 불평등한 외부조건에 의한 ‘규정’도 당연히 배격한다. 실제로 ‘평균적인 것’이 물질생활에서 갖는 그 나름의 의미를 로런스는 인정하고 출발했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평등’과 ‘인간의 권리들’에 대해 최종적으로 정리하려 한다. 사회란 사람들이 함께 사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은 함께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함께 살기 위해서는 어떤 기준, 어떤 물질적 기준이 있어야 한다. 이 대목에서 평균적인 것이 끼어든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사회주의와 근대 민주주의가 끼어든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인간의 평등’, 곧 ‘평균적인 것’에 근거한다. 그리고 평균적인 것이 인류의 진짜 기본적인 물질적 욕구를 대표하는 한에서 이는 충분히 건전하다.(66면, 강조는 원저자)

 

따라서 ‘정신의 평등’ 운운하면서 물질적 불평등을 외면하는 논리를 그는 단호히 배격한다. 소설 『연애하는 여인들』(1920)8장에서 버킨이 허마이어니에게 언성을 높이는 것도 바로 그 문제 때문이다.

 

혹시라도” 하고 마침내 허마이어니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정신에서는 모두 하나라는 것, 정신에서는 평등하다는 것, 모두 형제라는 것을 깨닫기만 한다면—나머지는 문제가 안될 거예요 (…)”

(…) 버킨은 분노에 찬 연설조로 그녀를 몰아세우며 말했다.

“그건 정반대요, 허마이어니, 완전히 거꾸로인 거요. 우리는 정신에서는 모두 다르고 불균등해요. 단지 사회적인 차이들이 우연적인 물질적 여건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지. 말하자면 우리는 추상적으로 또는 수학적으로 평등한 거요. 사람마다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고 눈 두개, 코 하나, 다리 두개가 있소. 숫자상으로 우리는 모두 똑같아요.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순수한 차이가 있을 뿐 평등도 불평등도 문제가 안돼요.”8)

 

사실은 에쎄이 「민주주의」에서 로런스가 자유주의, 공화주의, 보수주의뿐 아니라 사회주의, 볼세비즘, 공산주의 들을 싸잡아서 “모두가 똑같다”(81면)고 단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맑스(K. Marx)와 상통하는 대목이 적지 않다. 예컨대 정부라는 것이 사실상 “대기업가들의 임원회의”(67면)라는 인식은 근대 대의제 국가의 집행기구가 ‘전체 부르주아지의 공동업무를 관리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는 『공산당선언』의 구절을 상기시킨다.9) 더 중요한 것은 평등문제에 대한 두 사람의 입장이 흔히 알려진 것보다 비슷하다는 점이다. 맑스는 계급사회의 불평등 철폐에 앞장섰지만 ‘평등의 왕국’을 이상향으로 삼는 노선에는 극도로 비판적이었다. 그가 꿈꾼 것은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의 전제가 되는 연합(Assoziation, association)’이었고, “맑스에게 언제나 공산주의는 평등의 실현이라기보다 오히려 개성의 실현이었다.”10) 다만 이때 ‘개성’은 로런스의 ‘개별성’에 해당하는 individuality(독일어 Individualität)로 표현되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말 ‘개성’의 통상적 의미에 한층 부합되는 personality(독일어 Persönlichkeit)를 쓰기도 하는데, 「민주주의」 제3~4장에서 양자를 엄격히 구별하는 것과 대조된다. 로런스는 ‘개성’이란 본래의 자아가 아니라 관념화된 자아, “한 인간의 전달 가능한 효과”(75면)라고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어법상의 차이일 수도 있지만, 맑스가 그런 구별에 무심한 것이 로런스가 ‘살아 있는 자아’(the living self)의 개별성을 말할 때의 사유(思惟)에 미달한 까닭인지는 따로 검토해볼 문제다. 아무튼 개성(Persönlichkeit)에 대한 호의나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Entwicklung)’의 강조에서 교양소설(Bildungsroman)의 시대에 성장한 맑스의 교양주의가 엿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2. ‘새로운 민주주의’와 지도자 문제

 

근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나아가 근대(모더니티) 일반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로런스의 민주주의론은 니체(F. Nietzsche)를 상기시키는 면도 많다. 로런스 자신이 평생을 통해 맑스보다 니체를 훨씬 자주 언급하며, 직접적인 영향도 더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로런스가 특출한 개인의 지도력과 사회의 위계질서를 주장하고 나설 때 니체의 초인(Übermensch) 사상이나 다수 약자에 대한 강자지배의 옹호를 연상할 법하다. 그런데 니체 자신도 결코 파시즘의 선구자가 아니려니와, 로런스의 민주주의 비판이 니체와 어느 정도의 공통점을 갖는지는 좀더 자상히 살펴볼 문제다.

「민주주의」에서는 지도자와 추종자의 위계적 관계 문제가 부각되지 않는다. 이는 논의가 ‘평균성’이나 ‘동일성’보다 ‘살아 있는 자아’의 개별성과 독자성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고한 잡지의 급진주의적 성격과도 무관하지 않을지 모른다(RDP, 편자해설 xxx면 참조). 그러나 「민주주의」보다 4년여 전에 로런스는 버트란드 러쎌(Bertrand Russell)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혜를 가진 사람들의 귀족정치가 있어야 하고 대통령이니 민주정치니 하는 것 대신에 통치자, 카이저가 있어야 하오”11)라고 역설한 바 있다. 물론 이것이 로런스의 일관된 입장은 아니지만 그의 정치사상에서 무시 못할 하나의 측면을 드러낸 것은 분명하다.

「민주주의」 다음 해에 집필된 「인민의 교육」에 이르면 사회혁명보다 교육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쪽으로 초점이 이동한다. 그런데 사회에는 계급이 있어야 하고 이에 맞춘 차등교육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라든가, 남자들 간의 동지관계는 “영웅들에 대한 새로운 외경심, 동지들에 대한 새로운 존중심”12)이라는 위계질서를 포함하게 마련이라는 주장은 「민주주의」에 없던 것들이다. 그중 차등교육론과 계급론은 반민주주의론의 원조랄 수 있는 플라톤을 상기시킬 수도 있는데, 로런스가 거의 입만 열면 비판하는 플라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뒤에 다시 논하기로 하고, 동지들 간의 상하관계 문제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남녀의 결혼을 넘어 남자들 사이의 유대가 추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은 『연애하는 여인들』의 결말에도 드러나 있다. 그런데 「인민의 교육」에서 ‘영웅들에 대한 외경심’을 언급한 로런스는 『미국고전문학연구』 중 휘트먼론의 현존하는 두번째 초고본에 해당하는 글(1921~22)에서, 남자들 간의 동지애에는 지도자와 추종자의 상하관계가 필연적이며 각 지도자는 또 자기보다 훌륭한 지도자를 알아보고 추종하여 결국에는 “마지막 지도자, 거룩한 참주(the sacred tyrannus)”13)라는 정점에 도달한다는 주장으로까지 나간다. 이는 1915년 서신의 ‘카이저’론으로 되돌아가는 느낌마저 준다.

그러나 출간된 『미국고전문학연구』(1923)의 ‘휘트먼’ 장에서는 ‘거룩한 참주’가 사라지고, 휘트먼의 시 「열린 길의 노래」(Song of the Open Road)를 원용한 ‘열린 길’의 사상으로 이 문제가 한결 원만하게 정리된다.

 

‘열린 길’. 영혼의 위대한 거처는 열린 길이다. 천국도 아니고 낙원도 아니다. ‘저 위’도 아니고, 심지어 ‘이 안’도 아니다. 영혼은 저 위에 있는 것도 이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열린 길을 걸어가는 나그네다.(SCAL 156)

 

영혼이 영혼을 열린 길에서 만나는 진정한 민주주의. (…) 단지 그 자신일 뿐인 상태로 아무런 보탬도 없이 제 발로 걸어서 지나가는 영혼. 그리고 영혼이 시키는 대로 누가 알아보기도 하고 지나쳐 가거나 인사를 건네는 영혼. 위대한 영혼인 경우라면 길에서 숭배를 받을 것이다.

(…) 민주주의. 곧 모두가 열린 길을 걸어가는 영혼 간의 알아봄이요, 위대한 영혼은 산 자들의 공통된 길을 남들과 더불어 걸어서 여행하며 그의 위대함 그대로 보여지는 일. 영혼들의 기쁜 알아봄이요, 위대한 영혼과 한층 더 위대한 영혼들에 대한 더욱 기꺼운 숭배다. 위대한 영혼들이 곧 유일한 부(富)이므로.(SCAL 161)14)

 

자신의 개별성에 충실한 영혼들이 열린 길을 따라 움직이는 이 상태를 로런스는 여전히 ‘민주주의’라 일컫고 있다. 이는 로런스의 정치사상・사회사상・교육사상이 플라톤 ‘공화국’의 고정된 위계질서 및 그 ‘기하학적 평등’15)과 다르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이다. 이 ‘열린 길’의 사상은 「민주주의」에서 휘트먼의 민주주의가 “단지 하나의 정치체제나 통치의 체계가 아니고 심지어 사회체제도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착상하고 새로운 가치들을 정립하려는 시도다. 이상들의 고정되고 자의적인 통제에서 인간을 해방하여 자유로운 자연생동성으로 이끌려는 투쟁이다”(78면)라고 말했을 때 이미 예견된 것인데, 『미국고전문학연구』의 결말에 와서 지도자론과 원만한 조화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를 두고 최근 미국의 어느 논객은 로런스가 엘리뜨 민주주의가 아닌 대중민주주의(popular democracy)의 핵심적 성격을 짚었다고 평가한다.

 

로런스는 또 ‘그의 위대함 그대로 보여지는 위대한 영혼’을 언급하는바, 영혼들 간의 공감 또는 알아봄을 통해 능숙한 지도자들이 평등주의적인 민중 가운데서 일시적 우위에 서는 일을 가능케 함을 암시한다. 이는 중요한 포인트다. 대중민주주의의 비판자들은 곧잘 평등주의자들이 모든 권위를 부정할 따름이라고 비난한다. 사실은 정반대다. 대중민주주의의 실행방식들이 생겨난 것은 지도력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 이들 지도자가 계속 ‘남들과 더불어 걸어서’ 여행하고 근사한 거짓말이나 저들 멋대로 만들어낸 정치적 말을 타고 앞서 달려가지 않도록 적절한 견제와 균형을 수반하는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16)

 

물론 『미국고전문학연구』의 이 논의도 로런스의 ‘최종 입장’으로 내세울 일은 아니다. 민주주의론을 포함해서 그는 끝까지 다양한 모색을 멈추지 않았으며, 『캥거루』나 특히 『날개돋힌 뱀』(The Plumed Serpent, 1926) 같은 세칭 ‘지도자 소설’에서 권위주의적이고 반인도주의적인 정치운동에 호감을 보였다는 비판도 받게 된다. 이는 더 상세한 검토를 요하는 주제지만, 여기서는 몇가지만 짚고 넘어가기로 한다.

첫째, 로런스의 그러한 모색을 파시즘과 연결시키는 것은 무쏠리니(B. Mussolini)나 『날개돋힌 뱀』 속의 ‘꼬르떼스의 기사단’(Knights of Cortes) 등 당대의 파시스트 집단에 대한 로런스의 명백한 부정적 평가에 비춰서도 부당하다. 사실 이런 비난은 로런스의 기본 발상을 오해한 결과다. 1차대전 중 러쎌에게 절대적 통치자를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체제를 설계해보라고 주문할 때부터 그랬지만, 로런스의 목표는 돈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현대세계의 발본적 변혁이었고 다만 노동자계급이 그 과업을 감당하리라는 기대를 버리게 되면서 위로부터의 변혁을 구상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는 ‘열린 길의 사상’과는 어긋나는 노선이지만, 현존하는 사유재산체제를 보존하기 위해 대의정치를 부정하는 파시즘과는 기본적으로 다른 발상인 것이다.

둘째, ‘지도자 소설’ 자체를 보더라도 『캥거루』에서 ‘선의의 독재’ 체제를 추구하는 ‘캥거루’의 운동에 쏘머스는 끝내 합류하기를 거부한다. 『날개돋힌 뱀』에서는 토착종교의 부활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라몬, 시프리아노 등의 ‘께쌀꼬아뜰(Quetzalcoatl)운동’에 대한 여주인공 케이트의 태도가 훨씬 모호하지만, 이 운동은 단순한 권위주의가 아니라 탈식민주의와 반자본주의를 겸하는 독특한 성격을 지녔다.17) 셋째로, 로런스 자신이 말년에—물론 이것도 ‘최종 입장’으로 못박을 일은 아니지만—『날개돋힌 뱀』에 대한 어느 지인의 비판을 수긍하면서 ‘영웅’ ‘지도자’ 운운하는 것도 낡은 생각임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기억함직하다.18)

 

 

3. 새로운 사유인가 낯익은 본질주의인가

 

그런데 ‘새로운 민주주의’의 근거가 되는 ‘살아 있는 자아’라든가 ‘자연생동적 창조성’(spontaneous creativity) 등이야말로 인간의 형이상학적 본질을 설정하는 본질주의(essentialism)라는 혐의에는 어떤 반론이 가능할까. 예컨대 “인간의 본성은 자연생동적 창조성과 기계적・물질적 활동 사이에 균형을 잡고 있다. (…) 인간은 본성의 거의 절반이 물질세계에 속해 있고, 자연생동적 본성이 살짝 우위를 점한다”(79면, 강조는 원저자)라는 「민주주의」의 한 대목을 두고 어느 연구자는 로런스가 “인간 본성의 주된 두 요소의 상대적 비중을 계산하고 있다”19)고 비판한다. 이어서 그런 암묵적 계산의 결과는 “자연생동적 창조성 대 기계적・물질적 활동의 비율이 51:49”인 모양이라면서, “‘거의 절반’이라는 문구는 인간을 하나의 폐쇄된 체계로 보는 공간화된 모델을 함축하기도 한다”(같은 책 100면)고 주장한다. 또한 ‘현존하는 다름’(present otherness)이라는 표현도 “자아의 철저히 변환 불가능하고 소통 불가능하며 비교 불가능한 성격을 함축하는 매우 모더니즘적이고 유아론적(唯我論的)인 존재론”(같은 면)을 드러낸다고 한다.

만약에 로런스가 “살아 있는 자아를 관념(idea)으로 만드는 길은 없다”(77면)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인간을 하나의 폐쇄된 체계로 보는 공간화된 모델”을 설정하고 “매우 모더니즘적이고 유아론적(唯我論的)인 존재론”을 수용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명백한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로런스가 “보통 우리가 사고라 부르는 것을 해낼 능력이 부재함”(incapacity for what we ordinarily call thinking)20)을 예시하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될 법하다. 하지만 그렇게 단정하기 전에 로런스가 ‘핵심적 신비’(the central Mystery)와 ‘정의할 수 없는 현존’(indefinable presence)에 대해 하는 말을 일단 경청해보는 방법도 있다.

 

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추상처럼 들린다. 하지만 아니다. 도리어 추상의 완전한 부재다. 핵심적 신비는 일반화된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속에 지닌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영혼 또는 자아다. 그리고 현존은 신비주의적이거나 유령 같은 게 전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앞에 실재하는 인간이 있는 일이다. 우리 앞에 현존하는 하나의 실제 인간이다. 한명의 실제 인간이 육신을 지닌 헤아릴 수 없는 ‘신비’(Mystery)이고 달리 번역될 수 없다는 사실, 이것이야말로 사회생활의 모든 큰 기획이 토대로 삼아야 할 사실이다. 다름이라는 사실 말이다.(78면, 강조는 원저자)

 

이런 주장이 전통적 존재론의 범위 안에서 설명되기 힘든 것은 분명하다. 형이상학의 한 분야를 이루는 존재론은 ‘존재’(being)를 비록 그것이 가장 일반적이고 무규정적인 성격일지라도 ‘존재하는 것’(existent, beings, 존재자)으로 사유하는 작업이다. 그에 반해 로런스는 한 인간이나 사물이 그 참된 독자적 존재를 획득할 때의 ‘being’을 실존(existence)의 영역을 넘어선—「호저(豪豬)의 죽음에 관한 명상」(1925)에서 그가 ‘4차원’이라 부르는—경지로 본다. 그렇다고 형이상학적인 ‘초월적 존재’나 ‘이데아의 세계’도 아니다.

 

‘존재’(being)는 플라톤이 주장하듯이 이데아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정신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실존(existence)이 극치에 이른 형태이고 실존만큼이나 물질적이다. 다만 물질이 갑자기 4차원에 들어서는 것이다.21)

 

「민주주의」에서 “자연생동적 본성이 살짝 우위를 점한다”(79면)고 말한 것도 바로 그런 뜻으로였다.

이런 식의 사유를 받아들이는 일은 서양의 형이상학을 특징지어왔고 근대세계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해온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는 불가(佛家)에서 유무를 초월한 경지를 사유하는 것에 맞먹는 작업을 요한다. 사실 20세기의 서양 철학에서도 하이데거(M. Heidegger)의 ‘존재’(das Sein)나 데리다(J. Derrida)의 ‘차연’(différance)처럼 형이상학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없지 않았다. 예컨대 하이데거가 ‘네모난 동그라미’는 실재할 수 없는 모순이지만 ‘규정된 전적으로 무규정적인 것으로서의 존재’(das Sein als das bestimmte völlig Unbestimmte)라는 모순 속에 놓인 우리의 입지는 “우리가 실답다(wirklich)라 부르는 다른 어느 것보다 실다우며, 개와 고양이, 자동차와 신문보다 훨씬 엄연한 현실이다”22)라고 할 때, 우리는 ‘형이상학적 본질’도 아니고 ‘물질적 실존’도 아니지만 그들보다 훨씬 실감나는 다른 차원을 사유하도록 요구받고 있는 것이다.

 

 

4. 정치와 살림

 

로런스 민주주의론에서 이러한 요구가 한층 도전적인 성격을 띠는 것은 ‘4차원’이나 ‘핵심적 신비’에 대한 지적 인식을 촉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회생활의 모든 위대한 기획이 토대로 삼아야 할 사실”의 문제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만 해도 그동안 어렵게 진전시켜온 ‘민주화’가 위기에 처했고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사회생활의 큰 기획’을 새로 짜자는 논의가 활발한데, 과연 로런스의 민주주의론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시대도 장소도 다른데다 그 자신 정치참여의 경험이 태무했던 로런스로부터 한국 민주주의의 앞날을 위한 구체적 지침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반면에 좀더 원론적인 차원에서도 아무 일깨움을 주지 못한다면 그의 민주주의론은 로런스 연구자들이 전공지식으로 탐구하면 족할 분야에 불과할 것이다. 적어도 1987년 이후 한국의 정치와 담론 지형은 세계적 수준의 민주주의론을 수용하고 검증할 기반이 마련되었기에 로런스의 현재성 또한 이곳에서의 검증을 통과할 필요가 있겠기 때문이다.

2008년의 촛불시위 이후로는 더욱이나 그렇다. 어떤 의미로는 최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시위의 선구자가 한국의 촛불군중이었고, ‘촛불’ 때문에 한층 절실해진 국내 정치의 의제들이 곧 세계적인 의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대의제 민주주의와 직접 민주주의의 관계 문제가 그렇고, 대중의 주권행사를 ‘포퓰리즘’으로 낙인찍으며 민주주의와 공화주의가 상충함을 강조하는 보수적 담론 또한 세계적 추세의 일부다. 나아가 인민주권을 확립하고 국가기구의 대표성을 확보하는 것과 본래 의미의 민주주의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주장도 대두했는데,23) 이는 외국의 민주주의 논의에서도 매우 급진적인 담론에 해당한다.

이와 관련해 국내에도 널리 소개되어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랑씨에르에 의한 ‘정치’(politics)와 ‘치안’(police)의 구별이다.24) 보통 우리가 정치라 부르는 것은 주어진 틀 안에서 사회를 관리하고 주민을 다스리는 치안활동에 해당하며, ‘데모스(demos)의 힘’으로 틀 자체를 흔들어서 바꿔내는 행위만이 진정한 의미의 정치라는 것이다. 양자 사이의 괴리 내지 상충이라는 문제를 안고 씨름해온 ‘정치철학’의 세 형태로 랑씨에르는 1) 플라톤의 『공화국』으로 대표되는 ‘원리정치’(archipolitics), 곧 정당한 원리에 입각한 치안행위야말로 올바른 정치이고 이를 흔드는 민주주의는 통제의 대상이라는 입장, 2)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 탁월하게 정리한 ‘초()정치’ 내지 ‘준()정치’(parapolitics), 곧 민주주의적 요구를 현실의 일부로 인정하면서 주어진 상황에 맞춰 그것과 적절한 균형을 잡는 국정운영을 추구하는 입장, 3) 맑스처럼 정치를 진실의 왜곡된 표현인 이데올로기의 영역으로 설정하고 사회의 실질적인 움직임을 통해 그런 정치(및 국가)를 폐기하고자 하는 ‘상위정치’(metapolitics)를 꼽는다.25) 노동계급의 운동 자체는 배제됐던 집단의 주체화라는 ‘민주적 정치’의 성격을 띠지만, ‘모든 계급의 해소’라는 상위정치적 명분은 “원리치안(archipolice)의 가장 급진적 형상”(같은 책 90면)을 등장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사회주의진영의 몰락 이후 위세를 더하게 된 ‘합의 민주주의’(consensus democracy)는 국민여론과 국가경쟁력에 대한 전문가의 과학적 판단을 명분으로 정치를 완전히 배제하려는, 사실상 플라톤적 ‘원리정치’의 저급한 재현에 해당한다고 신랄하게 공격한다.26)

랑씨에르의 이러한 민주주의관은 앞서 잠시 비쳤듯이 휘트먼의 민주주의가 “단지 하나의 정치체제나 통치의 체계가 아니고 심지어 사회체제도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착상하고 새로운 가치들을 정립하려는 시도다. 이상들의 고정되고 자의적인 통제에서 인간을 해방하여 자유로운 자연생동성으로 이끌려는 투쟁이다”라는 「민주주의」의 한 대목과 상통하는 바 있다. 랑씨에르가 평등문제의 제기를 정치의 원동력으로 보면서도 오늘날 민주주의국가로 자처하는 사회들에서 ‘모든 개인들의 예외없는 평등’(the equality of anyone and everyone)이 새로운 삶의 양식을 개척하기는커녕 기존 질서를 절대화하고 인민을 과학적 계산의 대상으로 고정시킨다고 보는 점도(Disagreement 105) 로런스의 근대 민주주의 비판에 부합한다.

다른 한편 ‘치안’에 대한 배려, 그리고 ‘새로운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에서 둘은 입장을 달리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대목들이 랑씨에르 민주주의론의 심각한 문제점이기도 한 것은 아닐까?

랑씨에르가 ‘정치’와 ‘치안’을 구별하면서 후자를 지나치게 가볍게 보는 경향을 나도 지적한 바 있는데,27) 물론 치안의 수준이나 형태가 그 나름으로 중요함을 그도 인정하기는 한다(“치안은 온갖 좋은 것들을 조달할 수 있고 어느 한 종류의 치안이 다른 종류보다 비할 바 없이 나을 수 있다.” Disgreement 31). 하지만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치안’은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으로는 나라와 공동체의 ‘살림’이다. 대중의 일상적인 삶을 직접적으로 좌우하는 요인임은 물론, 사실 어디까지가 ‘정치’고 어디부터가 ‘치안’인지를 구별하는 일이 결코 간단치 않다. 예컨대 랑씨에르는 한국의 촛불시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만,28) 촛불군중의 위력이 2010년의 62지방선거나 최근의 1026 서울시장보선 같은 대의제 정치(‘치안’)의 영역에서 지속되면서 기존의 틀을 더욱 흔들고 민중의 감수성 변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복합적 현상에 대한 인식은 없는 것 같다. 물론 한국 사정에 밝지도 못한 그가 이 문제를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고 탓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정치’ 대 ‘치안’의 이분법 구도 속에 그러한 인식의 여지가 얼마나 있느냐는 것이다.29)

그에 비해 로런스는 일국의 수상이나 장관들이 나라살림 챙기는 실무자 머슴에 불과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살림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점은 늘 전제하고 있다.30) 아니, 「인민의 교육」에서 그가 초・중등교육을 중심으로 구체적인 국민교육 프로그램을 구상하는 것도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지금 이곳의 살림을 정돈할 필요성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로런스의 그런 구상이 일견 플라톤의 공화국을 연상시키는 바 있음을 앞서 언급했다. 반면에 ‘존재’에 대한 그의 사유가 플라톤에서 출발하는 서양 형이상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성격임도 거론했는데, 「인민의 교육」에 개진된 로런스의 인간관・우주관도 플라톤적인 것과 판이하다.31) 따라서 교육의 내용과 방법에 대한 구상도 당연히 다르다. 플라톤의 주된 관심이 ‘철학자 군주’ 집단의 양성인 데 반해, 로런스는 모두가 초등교육을 함께 받음으로써 공동의 인간적 기반을 지녀야 한다고 하며, 이 시기에 ‘읽기, 쓰기, 셈하기’ 외에 지적인 교육을 하지 말라고 한 것도 우민화(愚民化) 노선이 아니라 “아이를 가만 내버려두기”(leaving the child alone)32)라는 대원칙을 따른 것이다. 내버려두면 아이들은 자기가 알아서 배우게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각자의 ‘삶의 성향’(life-quality)에 따라 장래 역할에 걸맞은 교육과정의 분화를 시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체계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 간에 계급이 반드시 필요하고 차별화가 필요하다. 그런 것 없이는 무정형의 허무(amorphous nothingness)뿐이다”(RDP 11)라는 주장은 어떻게 봐야 할까? 로런스에게 반민주적 공동체주의의 혐의가 전혀 없달 수는 없다. 하지만 지금 같은 계급사회가 아니라면, 사회생활에 ‘체계’와 ‘계급=차등’이 필요하다는 말은 일종의 상식이 아닐까? 더구나 국가가 민중을 ‘통치’하는 기구가 아니라 나라살림을 실무적으로 챙기는 행정기구・관리기구로 변한다고 가정했을 때 그런 업무에서야말로 일정한 지휘체계가 불가피해진다. 나아가 ‘위대한 영혼들이 유일한 부()’가 되는 새로운 민주주의에서도 그 나름의 질서와 지도력이 필요한 것 아닌가?

여기서 우리는 랑씨에르의 민주주의론에서 부딪힌 두번째 문제로 돌아온다. 곧, 그의 민주주의는 기존의 질서를 끊임없이 흔드는 힘일 뿐 대안적인 질서는 ‘치안’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것 같다. 물론 ‘살림’에 대한 로런스의 배려가 결국은 국가의 폐기보다 국가에 의한 다스림을 수긍하는 입장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살 수 있고, 실제로 로런스 자신이 이 문제를 이론적으로 깊이 천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지배를 사물에 대한 관리기능으로 바꾼다는 사상이 한갓 유토피아로 받아들여지기 쉬운 까닭이 바로 민중이 스스로 다스리는 대안적 질서 내지 ‘체계’에 대한 경륜의 부재 때문은 아닌가. 그러한 사회로의 전환을 가능케 하며 그렇게 바뀐 사회가 자유인들의 연합체이면서도 적절한 지도력을 갖추도록 해줄 자기교육의 과정과 질서의 원리를 탐구할 필요가 절실한 것이다.33)

‘열린 길’의 사상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로런스 나름의 답이라 할 것이다. 그러한 사회가 언제 도래할지, 정녕 도래하기나 할지는 장담 못할 일이다. 하지만 그 실현에 대한 의지와 구상을 갖추는 것만으로도, 민주주의가 기존 질서에 대한 끊임없는 교란행위에 불과하고 대중의 살림을 더욱 힘들게 만든다는 비난을 이겨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리라 본다.

 

 

--

1) D. H. Lawrence, “Democracy,” Reflections on the Death of a Porcupine and Other Essays, ed. Michael Herbert, The Cambridge Edition of the Works of D. H. Lawrenc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이하 RDP로 약칭. 「민주주의」에서 인용할 때는 면수만 표시하며, 번역은 모두 필자의 것임). 시의 경우는 만년의 시집 PansiesMore Pansies에 수록된 “Democracy,” “Robot-Democracy,” “Real Democracy,” “Democracy Is Service,” “False Democracy and Real” 등 ‘민주주의’를 제목에 담은 작품이 여럿 있다.

2) RDP의 편자 해설 xxix면 및 xliii면.

3) Phoenix: The Posthumous Papers of D. H. Lawrence, ed. Edward D. McDonald, Heinemann 1936.

4) 소설 제6장에서 흔히 로런스의 자화상으로 간주되는 쏘머즈가 ‘캥거루’라는 별칭을 가진 호주의 정치운동가 벤 쿨리를 처음 만났을 때, “민주주의에 관한 당신의 연속 기고문을 읽었소”라고 쿨리가 말한다(D. H. Lawrence, Kangaroo, Cambridge Edition 1994, ed. Bruce Steele, 제6장 110면).

5) 예컨대 M. Elizabeth Sargent and Garry Watson, “D. H. Lawrence and the Dialogical Thought: The Strange Reality of Otherness,” College English, Vol. 63 No. 4 (March 2001), 409~36면, 및 Amit Chaudhuri, D. H. Lawrence andDifference (Oxford University Press 2003), 특히 제5장 “Conclusion: LawrencesDifferenceand the Working Class” 참조. 차우두리는 로런스의 ‘차이’ 개념이 지닌 정치적 의미를 강조하며 “노동자계급에 대한 동정이라는 위계질서적 관계보다 ‘타자’와의 노동자계급적 연대”(180면)를 뜻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 돋보인다.

6) 『민주주의의 전망』(Democratic Vistas, 1871)에서 휘트먼 자신이 사용한 표현은 “principle of the average”이다. 그와 상반되면서도 보완적인 또 하나의 원리는 “individuality, the pride and centripetal isolation of a human being in himself-identity-personalism”인데(제2절, http://www.bartleby.com/229/20022.html), 로런스는 제2장 ‘Identity’, 제3장 ‘Personality’, 제4장 ‘Individuality’에서 이 둘째 원리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한다.

7) Malcom Bull, “Levelling Out,” New Left Review 70, July/August 2011, 5면.

8) D. H. Lawrence, Women in Love, Cambridge Edition 1987, ed. David Farmer, Lindeth Vasey and John Worthen, 103면(강조는 원저자).

9) 또한, “미래의 수상은 일종의 집사장이고 상무장관은 큰 규모의 가정 관리인이며 교통장관은 수석 마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모두들 우두머리 하인들이요,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82면)는 발언도 국가의 궁극적 폐기에 대한 맑스, 엥겔스, 레닌 등의 사상과 통하는 지점이다.

10) 유재건 「맑스의 공산주의 사상과 ‘개성’의 문제」, 『코기토』 69(2011.2), 344면. 같은 필자는 일찍이 『창작과비평』 1994년 가을호의 「맑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와 현실적 과학」에서도 “그가 공산주의 목표로서 언제나 ‘자유와 개성과 연대’만을 내세울 뿐 일생동안 ‘평등이란 구호를 깃발에 내걸지 않는 것”(268면)에 주목하면서, 맑스가 『고타강령비판』에서 ‘모든 사회적・정치적 불평등의 제거’라는 조목을 비판하고 이런 막연하고 포괄적인 문구 대신에 “계급차별의 폐지와 더불어 거기서 비롯되는 온갖 사회적・정치적 불평등이 저절로 사라진다고 말했어야만 했다”고 지적한 대목을 인용하기도 했다.

11) Bertrand Russell 앞 1915년 7월 14일(?), The Letters of D. H. Lawrence, Vol. 2, ed. George J. Zytaruk and James T. Boulton, Cambridge Edition 1981, 364면.

12)Education of the People,” RDP 166면. 이 글은 로런스 생전에 아예 발표된 적이 없고 『피닉스』에 처음 실렸다.

13) D. H. Lawrence, 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SCAL로 약칭〕, ed. Ezra Greenspan, Lindeth Vasey and John Worthen, Cambridge Edition 2003, Appendix VXIII. Whitman (1921-22)’, 416면.

14) 이 대목이 분명히 보여주듯이 로런스는 ‘영혼’(soul)이라는 단어를 그리스도교적 또는 정신주의적 의미와 전혀 다르게 사용한다. 그 뜻은 차라리 불교 내지 원불교적인 의미로 영육쌍전(靈肉雙全)한 생활인이자 구도자에 가깝다.

15) 랑씨에르는 플라톤이 이상적 공화국의 위계질서는 각자의 이해타산에 입각한 ‘산술적 평등’을 배격하고 우주와 사물의 (기하학적인) 본래 질서에 부합하는 ‘기하학적 평등’으로 설정했다고 말한다. 랑씨에르 자신은 바로 이런 질서를 뒤흔드는 것이 곧 ‘정치’라는 입장이다. (Jacques Rancière, Disagreement: Politics and Philosophy, tr. Julie Rose,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9, 15면, 63면 등; 원저는 La Mésentente: Politique et Philosophie, 1995)

16) Glen W. Smith, “The Promise of Popular Democracy: Origins,” Dog Canyon 2010년 1월 31일 게시(www.dogcanyon.org/2010/01/31), 2008년 6월 4일 OpenLeft 싸이트에 처음 발표했다고 함.

17) 『캥거루』와 『날개돋힌 뱀』 사이에 씌어진 「힘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Blessed Are the Powerful), 「귀족정치」(Aristocracy) 같은 에쎄이는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안 쓰고 ‘지도자’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지만, 여기서도 지도력이나 귀족다움의 기준은 스스로 얼마나 ‘삶’(life)으로 충만해 있으며 인간세계에 생명의 기운을 얼마나 불어넣어주는가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론과 휘트먼론의 기조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18) “영웅은 시효가 지난 물건이고 인간들의 지도자라는 것도 낡은 소리요. (…) 당신 말이 대체로 옳소. 지도자와 추종자 관계(the leader-cum-follower relationship)는 따분한 이야기요.”(Witter Bynner 앞 1928년 3월 13일자 편지, Letters, Vol. 6, ed. James T. Boulton Margaret H. Boulton and Gerald M. Lacy, 1991, 321면)

19) Jeff Wallace, “51/49: democracy, abstraction and the machine in Lawrence, Deleuze and their reading of Whitman,” in: Howard J. Booth ed., New D. H. Lawrence,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09, 99면.

20) T. S. Eliot, After Strange Gods, Faber & Faber 1933, 63면.

21)Reflections on the Death of a Porcupine” 〔1925〕, RDP 359면. 로런스는 ‘4차원’을 현대 물리학에서처럼 3차원 공간에 시간의 차원을 추가한 개념으로가 아니라, 당시의 일반적 용법대로 3차원 물질세계를 초월한 별개의 차원이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번역 중 ‘존재’라는 말은 어떤 식으로건 ‘있는 것’을 의미하기 십상이므로 有無의 분별을 무색케 하는 로런스의 being을 번역하는 데 적합한 단어는 아니지만 관행대로 사용했다.

22) Martin Heidegger, Einführung in die Metaphysik 〔1953〕, Max Niemeyer Verlag Tübingen 1966, 59~60면(영역본은 An Introduction to Metaphysics, tr. Ralph Manheim, Anchor Books 1961, 66면).

23) 예컨대 고병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그린비 2011)는 근대 민주주의, 나아가 근대 정치 일반이 ‘주권-인민-대표의 삼각형 구도’를 취하고 있음을 지적하고(47면), “근대 ‘인민=주권’의 완성은 (…) 전체로서 막강한 권력이 만들어진 과정이지만, 동시에 한없이 나약한 개인들이 만들어지는 과정”(68면)인데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대표’의 매개”(69면)이며 “넓은 의미에서 근대 정치는 모두 ‘대의제’(대표제, 표상제)이다. (…) 대의제는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발명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근대 민주주의야말로 대의제의 하나로 등장했다고 해야 한다”(71면)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24) J. Rancière, Disagreement, 제2장 등 참조. 이 구별은 그의 후속저서 The Hatred of Democracy, tr. Steve Corcoran, Verso 2006(원저 La haine de la démocratie, 2005)에서도 견지되며, 『감성의 분할: 미학과 정치』(도서출판b 2008; 원저는 Le Partage du sensible: Esthétique et politique, 2000; 영역본 The Politics of Aesthetics, tr. Gabriel Rockhill, Continuum 2004) 등 그의 미학논의에도 등장하여 국내 평단에서 적잖은 관심을 모았다. 나 자신도 「현대시와 근대성, 그리고 대중의 삶」에서 그 논의에 개입한 바 있다(졸저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창비 2011, 특히 84~85면 참조).

25) Disagreement, 제2장 ‘From Archipolitics to Metapolitics’.

26) Disagreement, 제5장 ‘Democracy or Consensus’와 제6장 ’Politics in its Nihilistic Age’, 및 Hatred of Democracy, 제1장 ‘From Victorious Democracy to Criminal Democracy’, 제4장 ’The Rationality of Hatred’ 등 참조. 랑씨에르는 현대세계에서 플라톤적 공화국에 그나마 근접한 사례는 ‘인민공화국’을 표방하면서도 공공연한 과두정치를 통해 공산주의자들이 노동자를 지배하는 현대중국이라고 본다(J. Rancière, “Communists Without Communism?” in: Costas Douzinas and Slavoj Žek, eds., The Idea of Communism, Verso 2010, 170면).

27) 「현대시와 근대성, 그리고 대중의 삶」 85면.

28) 자크 랑시에르 「민주주의에 맞서는 민주주의」, 아감벤 외 『민주주의는 죽었는가?』, 김상운 외 옮김, 난장 2010, 131~32면.

29) 고병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104~9면의 촛불 논의도 랑씨에르적 이분법에 매여 있다는 인상이다.

30) 예컨대 「민주주의」에서도, “사고파는 일을 제대로 잘하자. (…) 우리는 인간다운 남자 및 여자가 되어 집안을 정돈하자.”(68면) 여기서 set our house in order라는 표현은 구약성경 「이사야」 38장 1절에서 선지자 이사야가 죽음을 앞둔 왕더러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set your house in order)고 한 표현을 따온 것이나 로런스의 취지는 ‘집안(살림)을 제대로 하자’는 뜻임이 분명하다.

31) 이러한 인간관・우주관을 좀더 본격적으로 정리해서 간행한 것이 『무의식의 환상곡』(1922)이다. 이 저서의 현재적 의의에 대해서는 졸고 Nak-chung Paik, “Freud, Nietzsche and Fantasia of the Unconscious,” D. H. Lawrence Studies (Korea) Vol. 12 No. 2 (August 2004) 참조.

32) RDP 139면, 원저자 강조.

33) 이에 관해 나는 ‘지혜의 위계질서’라는 표현을 써서 오해를 자초하기도 했지만(월러스틴과의 대담 「21세기의 시련과 역사적 선택」〔1998〕, 『백낙청회화록』 제4권, 창비 2007, 153~56면), 미래사회의 조직원리・운영원리 문제가 물질적 평등을 이룩한 후에나 천천히 생각할 사안이 아니라 당면한 노력의 긴요한 일부라는 점을 원불교의 ‘지자본위(智者本位)’ 원리를 동원해서 다시 주장한 바 있다(같은 책에 실린 방민호와의 대담 「시대적 전환을 앞둔 한국문학의 문제들」〔1999〕, 221~24면). ‘지자본위’에 관해서는 「정전」 제2편 제3장 2절 ‘지자본위’ 참조. 여기서 “지자는 우자(愚者)를 가르치고 우자는 지자에게 배우는 것이 원칙적으로 당연한 일이니,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배울 것을 구할 때에는 불합리한 차별 제도에 끌릴 것이 아니라 오직 구하는 사람의 목적만 달하자는 것이니라”(『원불교전서』 , 원불교출판사 1995, 22판, 41면)고 하며 그 조목들을 열거한 뒤, “이상의 모든 조목에 해당하는 사람을 근본적으로 차별있게 할 것이 아니라, 구하는 때에 있어서 하자는 것이니라”(같은 책 42면)는 단서를 붙인 점을 눈여겨볼 만하다. 플라톤식의 고정된 현자집단이 지배하는 체제와의 차이가 명백해지며, 로런스 역시 아동들의 근기(根機)에 따라 그들의 진로를 결정해주되 “어떠한 결정도 최종적인 것은 아니도록 한다”(「인민의 교육」, RDP 99면)는 단서를 달았던 것을 상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