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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 발굴 원고
사팔신(死八臣)과 생팔신(生八臣)
홍명희 洪命憙
고종 25(1888)~1968. 자는 순유(舜兪), 호는 가인(假人·可人)·벽초(碧初)·욕우(欲愚), 필명은 백옥석(白玉石). 본관은 풍산이며 홍범식(洪範植)의 아들로 괴산 출신이다. 일본 타이세이중학(大成中學)을 졸업했고 1919년 3월 괴산에서 만세시위를 주동했다. 1926년 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하고 1927년 신간회를 창립, 부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48년 월북하여 부수상 및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냈다. 저서로 『학창산화(學窓散話)』, 대하역사소설 『임꺽정』 등이 있다.
내가 겨우 국문을 깨쳤을 때 일갓집 부인에게서 『육신전(六臣傳)』이란 단권 책을 얻어다 보고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유응부(兪應孚), 유성원(柳誠源),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란 이름을 기억하여 ‘육신(六臣)이 누구누구?’ 하면 손가락 꼽으며 주워대는 것이 어린 나의 일종 자랑이었다. 그때 이 육신은 사육신(死六臣)이요 이 사육신 외에 또 생육신(生六臣)이 있단 말까지는 들었으나 생육신이 김시습(金時習) 외에 누구누구인지를 알지 못하였다.1) 아마 가르쳐주는 어른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은 나이 마흔이라 생육신의 이름쯤은 알 듯하건만 실상은 누구누구라고 아이들에게 똑똑히 가르쳐줄 만한 자신이 없다.
김시습, 남효온(南孝溫), 조려(趙旅), 성담수(成聃壽),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여섯 사람을 생육신이라고들 하지만, 그것이 꼭 옳은 줄로 생각하지 않는 까닭이다. 김매월당(金梅月堂, 김시습), 남추강(南秋江, 남효온), 조어계(趙漁溪, 조려), 성문두(成文斗, 성담수)가 비록 모두 포의(布衣, 베옷. 벼슬하지 않는 사람을 뜻함)라 할지라도 그 고절(高節, 높은 절개)이 족히 원관란(元觀瀾, 원호), 이경은(李耕隱, 이맹전)같이 생육신이 될 만함은 두말할 것도 없으나 단종 피위(避位) 후에 기관 입산(棄官入山, 벼슬을 버리고 산에 들어감)한 윤혜(尹譓)와, 청맹(靑盲, 장님)이라 가탁(假託, 거짓 핑계를 댐)하고 세조를 섬기지 아니한 기건(奇虔)과, 노산조(魯山朝, 단종) 부제학(副提學) 포인(逋人, 도망자)으로 자처한 조상치(曺尙治)와, 연촌(煙村, 최덕지의 호), 무항(霧巷, 원호의 호)은 “생육신과 비교하여 높다(比六臣較高)”고 후인이 원관란과 같이 치던 최덕지(崔德之)가 모두 생육신에 들 만한 사람이요, 위에 적은 생육신이란 사람들과 함께 팔현사(八賢祠)에 향사(享祀)하던 정보(鄭保)와 권절(權節)은 당연히 생육신에 들 사람이니, 이 중에서 포은(圃隱, 정몽주의 호) 같은 충신의 후손인 까닭으로 겨우 형륙(刑戮)을 면한 정설곡(鄭雪谷)까지 그만두더라도 “단종 때 사육신과 생육신이 있는데 권절은 원호 등과 더불어 생육신이 된다(端宗有死六臣生六臣 公與元昊等爲生六臣)”고 전인(前人)이 판정한 권율정(權栗亭, 권절)은 생육신에서 빼지 못할 사람이다. 들 만한 사람도 빠지고 당연히 들 사람도 빠지되 빼지 못할 사람까지 빠졌으니 조어계 등 서산서원(西山書院)에 배향(配享, 공신의 신주를 사당에 모심)한 사람만 생육신이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아니하다. 혹 후세의 증직·증시(贈職·贈諡, 죽은 뒤 품계와 벼슬, 시호를 내리는 일)를 받은 사람만 생육신이라 한다 말하더라도 수(數)에서 빠진 권율정의 증직이 이조판서요 증시가 충숙(忠肅)이니 율정까지 넣어서 칠신(七臣)이라면 모르되 그렇지 아니한 이상 그 말도 옳을 것 같지 아니하다.
사육신으로 말하면 생육신과 달라서 남추강이 일찍이 『육신전』을 지은 뒤로 조야 문적(朝野文籍, 조정과 민간의 책)에 일정(一定)된 것이 있으나 그것도 꼭 육신이라 할 것이 아니다. 병자년(1456) 복위 밀모(復位密謀) 사건에 극형을 당한 사람만도 그 수가 백명에 가까우나 대개는 육신(六臣)의 가속으로 육신의 죄에 연좌된 사람이라 수모자(首謀者)로 육신을 들어 말함이 당연한 것 같지만 수모자로서 수에서 빠진 사람이 있으니 이것이 당연치 않은 일이다. 예조판서 권자신(權自愼)은 척신(戚臣, 임금과 성이 다르나 일가인 신하)으로 당시 상왕(上王)이던 단종께 왕래 품달(稟達, 웃어른께 여쭙는 일)한 연락 관계자에 그친다 하여 수모자 수에서 뺀다 하여도 성승(成勝)과 박쟁(朴崝)은 그 수에서 빼지 못할 사람이다. 성승은 유응부와 같이 기회를 잃지 않고 실행하려던 수모자 중에서도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이라 아무리 그 아들 성삼문이 그 밀모의 수괴와 같이 되었다 하여도 아들 까닭으로 수모자 명록(名錄)에서 빠질 사람이 아니고, 박쟁은 성삼문이 신문당할 때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박쟁 등이 동모자(同謀者)라고 자백한 것으로 보아 또한 수모자 명록에서 빠질 사람이 아니니, 이 두 사람이 남추강의 전(傳)에 들지 아니한 것이 도리어 괴이한 일이다. 고인(古人)의 견식이라 혹 이 두 사람이 집현전 문학사(文學士)가 아닌 까닭으로 제외되었는가? 그러면 유충목(兪忠穆, 유응부)도 제외를 당하여야 할 것이고, 혹 엄혹한 형신(刑訊)을 당한 기록이 없는 까닭으로 제외되었는가? 그러면 유충경(柳忠景, 유성원)은 물론 제외를 당하여야 할 것이다. 성총관(成摠管, 성승)을 빼고 유충경을 넣어서 육신이라 한 것이 추강에서 비롯한 일인데 그리 잘된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육신을 성삼문, 유응부,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외에 성승, 박쟁을 더하여 사팔신이라 칭하는 것이 옳은 줄로 생각하고, 생육신도 팔현사 향사 팔인, 즉 김시습, 원호, 권절, 정보,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등을 함께 들어 생팔신이라 개칭하는 것이 오히려 옳은 줄로 생각한다.
사육신·생육신을 사팔신·생팔신으로 고쳐 부르는 것이 옳다고 말하던 끝이니, 그들의 유적인 묘소에 관하여 적어둘 것이 있다.
노량진에 육신묘(六臣墓)라 칭하는 곳이 있으니 구설(舊說)을 종합하여 보면 육신묘라 하여도 분(墳)은 오좌(五座)에 불과했었고 표석으로 보아 최남(最南)이 박씨요 그 뒤가 유씨요 그 뒤가 이씨요 그 뒤가 성씨요 그 뒤 십여보쯤 떨어져 또 성씨이던 것이다. 인조 정묘년(1627) 김포 장릉(章陵, 인조의 아버지인 元宗의 능) 여인(轝引, 임금이 탄 가마를 메고 감) 시에 치도(治道, 길닦이)하느라고 분묘를 평토(平土)하고 표석을 쓰러뜨리어 형적이 없어졌던 것을 효종 경인년(1650)에 취금헌(醉琴軒, 박팽년의 호) 7대손 박숭고(朴崇古)가 다시 봉축(封築)하였고, 숙종 5년(1679)에 예조를 명하여 특히 봉식(封植)하였다.
지봉(芝峯, 이수광의 호)은 박취금헌·성매죽헌(成梅竹軒, 성삼문)·유충목공 삼인의 묘소라고 삼묘(三墓)가 노량에 있다 하였으나, 이것은 전문(傳聞)의 유오(謬誤)인 듯하다.
『新朝鮮』 1927년 2월
「사팔신과 생팔신」을 찾아낸 과정
정해렴 | 현대실학사 대표, 전 창작과비평사 편집장
지난 2004년 늦여름경에 우리 출판계의 대선배인 창조사 최덕교(崔德敎) 사장께서 필생의 편저인 『한국잡지백년』(전3권, 현암사 2004)을 택배로 보내주셨다. 책을 본 김에 여기저기 살피다가 우연히 벽초 홍명희 선생의 「사팔신과 생팔신」이란 글이 월간 『신조선』(조선일보 1927.2.10, 제2305호 부록) 창간호에 발표된 목차를 보고, 책을 잘 받았다는 인사도 여쭐 겸 전화를 드려서 이 글은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씀드리면서 혹시 제목이 ‘사육신과 생육신’이 잘못 표기된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자, 목차를 잘못 베꼈을 리는 없다고 하시면서 다시 알아보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 자료를 구해 보았으면 좋겠다고 청했더니 구할 수 있으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후 오래지 않아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신문기사를 접하자 선생님께 이 자료를 구해 보기를 단념하고 『한국잡지백년』이 출간되었을 때 나온 서평기사를 떠올려 조선일보 이선민 문화부장에게 수소문했더니, 이 『신조선』 소장처를 안내해주었다. 한화그룹에서 운영하는 재단법인 아단문고에 소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로 서소문에 있는 아단문고에 찾아갔더니, 박천홍 학예연구실장이 원자료의 복사는 어려우니 컴퓨터로 입력해주겠다고 하기에 입력 후 이를 원본과 두차례나 대조·교정한 것을 출력해 자료를 지니고 있던 터이다. 제목이 ‘사팔신과 생팔신’이었으며 내용도 사육신과 생육신을 사팔신과 생팔신으로 해야 타당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나는 일찍이 벽초 홍명희의 대하역사소설 『임꺽정』 뒷부분을 발굴하여 『창작과비평』 제73호(1991년 가을호)에 게재한 바 있고, 사계절판 『임꺽정』을 교열하여 정본(定本)을 만든 적이 있었다. 그리고 『벽초 홍명희와 임꺽정의 연구 자료』(사계절 1996)를 교열하기도 했고, 벽초 선생의 큰아들인 홍기문(洪起文)의 글을 수집・정선(精選)하여 『홍기문 조선문화론선집』(김영복·정해렴 편역, 현대실학사 1997)을 간행하기도 했다. 이후 나는 벽초 선생의 글을 추려 ‘벽초 문선’(가제)을 간행할까 하여 편집·교정해두고, 혹시 새 자료가 더 없나 하고 늘 살펴왔던 터이다. 그러니 이 「사팔신과 생팔신」이라는 역사 논설은 내 마음을 설레게 했던 것이다.
‘벽초 문선’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간행을 하지 못했던 터라 「사팔신과 생팔신」 자료를 그냥 놔두었다가, 이제 일단 정리라도 해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현대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한자는 괄호 속에 넣고 이 논설에서 거론한 중요한 용어나 관련 인물의 인명사항을 주석으로 달아 글쓴이의 뜻을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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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현대실학사 정해렴(丁海廉) 대표가 『신조선(新朝鮮)』 창간호(1927년 2월)에서 찾아내 요즘 독자들을 위해 풀어 옮긴 것으로, 본문 뒤에 발굴 과정과 인명 소개를 덧붙였다—편집자.
1) 사육신은 세조 2년(1456)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잡혀 죽은 여섯명의 충신을, 생육신은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것을 보고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여섯명의 신하를 말한다.
인명사항
권자신(權自愼) ?~세조 2(1456). 본관은 안동, 권전(權專)의 아들. 문종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동생. 단종 1년(1453) 동부승지로 있다가 세조가 즉위한 뒤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이 되고, 세조 2년(1456)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성삼문 등과 단종 복위를 도모했다가 발각되어 거열형(車裂刑)을 받았다. 중종 8년(1513) 관직이 복구되고 영월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민(忠愍).
권절(權節) 세종 4(1422)~1494 자는 단조(端操), 호는 율정(栗亭), 시호는 충숙(忠肅), 본관은 안동, 권심(權審)의 아들이다. 세종 29년(1447) 문과에 급제했고 교리(校理)를 지냈다. 생팔신의 한사람이다.
기건(奇虔) ?~세조 6(1460). 호는 청파(靑坡), 시호는 정무(貞武), 본관은 행주. 평안도 관찰사와 판중추원사를 지냈다.
김시습(金時習) 세종 17(1435)~성종 24(1493).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청한자(淸寒子)·벽산(碧山)·췌세옹(贅世翁), 시호는 청간(淸簡), 본관은 강릉이다. 3세에 이미 시를 지었고 5세에 『중용』 『대학』에 통하여 신동으로 이름났다. 세조 1년(1455) 삼각산 중흥사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했다. 1481년 47세에 환속하고,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저술로는 『금오신화(金鰲新話)』 『매월당집』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가 있다.
남효온(南孝溫) 단종 2(1454)~성종 23(1492).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의령으로 남전(南恮)의 아들이다.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고 소릉(昭陵) 복위를 상소했다고 해서 부관참시되었다. 저서로 『추강집』『추강냉화(秋江冷話)』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 『귀신론(鬼神論)』 『육신전(六臣傳)』이 있다.
박숭고(朴崇古) 박팽년의 7대손. 군수를 지냈다 했으나 자세한 것은 미상. 효종 1년(1650) 노량진 사육신묘의 헐어버렸던 분묘의 봉분을 다시 만들었다 한다.
박쟁(朴崝) ?~세조 2(1456). 단종 때 공조참의를 지내고, 세조 때 도총관(都摠管) 등을 역임했다. 성삼문 등과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중 세조 2년(1456) 명나라 사신에 대한 연석(宴席) 때 별운검(別雲劍)으로 입시(入侍)하기로 된 것을 기회로 거사하기로 했으나 별운검 입시가 사전에 취소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고, 김질(金礩)의 밀고로 사형당했다. 병조판서에 추증, 시호는 충강(忠剛). 홍명희는 성승과 함께 사팔신의 한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박팽년(朴彭年) 태종 17(1417)~세조 2(1456).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 시호는 충정(忠正), 본관은 순천으로 박중림(朴仲林)의 아들이다. 세종 16년(1434) 문과에 급제,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형조참판을 지냈으며, 사육신의 한사람이다.
성담수(成聃壽) ?~세조 2(1456).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자는 이수(耳叟), 호는 인재(仁齋)·문두(文斗), 시호는 정숙(靖肅), 본관은 창녕, 성희(成熺)의 아들로 성삼문과 재종간이다. 세종 32년(1450) 진사가 되고 승문원 교리 등을 역임했다.
성삼문(成三問) 태종 18(1418)~세조 2(1456).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자는 근보(謹甫)·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 시호는 충문(忠文), 본관은 창녕, 성승(成勝)의 아들이다. 세종 20년(1438) 문과에 급제, 집현전 학사·수찬 등을 지냈다. 한글 창제에 공이 컸으며, 저서로 『성근보집』이 있다.
성승(成勝) ?~세조 2(1456). 호는 적곡(赤谷), 본관은 창녕. 무과에 급제해 단종 1년(1453)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고, 세조 2년(1456)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명나라 사신의 송별연에 유응부와 함께 운검(雲劍)을 쥐게 되는 기회에 세조를 칼로 베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 했으나 별운검 입시가 취소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숙종 때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 홍명희는 박쟁과 함께 사팔신의 한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원호(元昊) ?~?.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자는 자허(子虛), 호는 무항(霧巷)·관란(觀瀾), 시호는 정간(貞簡), 본관은 원주, 원헌(元憲)의 아들이다. 세종 5년(1423) 문과에 급제, 집현전 직제학을 지냈다. 단종이 죽자 영월에 가서 삼년상을 마쳤고 고향인 원주에 돌아가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 정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유성원(柳誠源) ?~세조 2(1456). 사육신의 한사람. 자는 태초(太初), 호는 낭간(琅玕), 본관은 문화, 유사근(柳士根)의 아들. 세종 26년(1444)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3년 후 문과중시에도 급제했다. 집현전 학사로 정난공신(靖難功臣)을 녹훈하는 교서를 썼으나 성삼문 등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탄로가 나자 자결했다. 영조 때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절의(節義)였다가 충경(忠景)으로 고쳐졌다.
유응부(兪應孚) ?~세조 2(1456).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자는 신지(信之)·선장(善長), 호는 벽량(碧梁), 시호는 충목(忠穆), 본관은 기계이다. 무과에 급제, 평안도 절제사와 동지중추원사를 지냈다.
육신전(六臣傳) 남효온이 성삼문·이개 등 세조 2년(1456)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죽은 육신(六臣)의 전기를 기록한 책.
윤혜(尹譓) 본관은 남원, 윤림(尹臨)의 손자로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좌랑에 이르렀다(세종 때 문과방목에는 나오지 않음). 단종이 내쫓기자 예조좌랑 벼슬을 버리고 산에 들어갔으며 임종 때 ‘충효’ 두 글자를 써서 아들에게 주었다 한다(『대동야승(大東野乘)』).
이개(李塏) 태종 17(1417)~세조 2(1456). 사육신의 한사람. 자는 청보(淸甫)·백고(伯高), 호는 백옥헌(白玉軒), 본관은 한산, 이색(李穡)의 증손. 세종 18년(1436) 문과에 급제, 1447년 문과중시에도 급제했다. 세조 2년(1456) 직제학(直提學)으로 성삼문 등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탄로가 나자 고문 끝에 죽었다. 시문이 맑고 뛰어났으며 글씨도 잘 썼다. 영조 34년(1758)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시호는 의열(義烈)이었다가 뒤에 충간(忠簡)으로 고쳐졌다.
이맹전(李孟專) 태조 1(1392)~성종 11(1480).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 시호는 정간(靖簡), 이심지(李審之)의 아들이다. 세종 9년(1427) 문과에 급제, 거창현감을 지냈다.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자 벼슬을 사퇴하고 선산에 내려가 김숙자(金叔滋)·김종직 등과 학문을 닦으며 일생을 보내다 89세에 죽었다.
이수광(李睟光) 명종 18(1563)~인조 6(1628). 자는 윤경(潤卿), 호는 지봉(芝峰), 시호는 문간(文簡), 본관은 전주, 이희검(李希儉)의 아들이다. 선조 18년(1585) 문과에 급제, 이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저술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와 서양 문물을 소개함으로써 실학(實學)의 선구자가 되었다. 문집으로 『지봉집』이 있다.
정보(鄭保) 호는 설곡(雪谷), 본관은 연일, 정몽주(鄭夢周)의 손자 정종성(鄭宗城)의 아들이다. 학문이 뛰어나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벼슬은 감찰에 이르렀다. 사육신의 무죄를 주창한 말이 세조에게 알려져 처형당할 뻔하다가 정몽주의 손자임이 밝혀져 단성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죽었다. 숙종 때 이조참의에 추증. 생팔신의 한사람이다.
조려(趙旅) 세종 2(1420)~성종 20(1489).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자는 주옹(主翁), 호는 어계은자(漁溪隱者), 시호는 정절(貞節), 본관은 함안, 조열(趙悅)의 손자이다. 단종 1년(1453) 진사가 되고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독서와 낚시질로 생애를 보냈다. 저서로 『어계집』이 있다.
조상치(曺尙治) 자는 자경(子景), 호는 단고(丹皐)·정재(靜齋), 본관은 창녕, 조신충(曺信忠)의 아들. 세종 1년(1419)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단종 3년(1455) 집현전 부제학이 되었다. 세조가 예조참판에 임명했으나 사퇴하고 ‘노산조 부제학 포인 조상치지묘(魯山朝副提學逋人曺尙治之墓)’라는 묘비를 미리 써 세조의 신하가 아님을 밝히고 외부와의 접촉을 끊었다. 임종 때 자신의 시문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시호는 충정(忠貞).
최덕지(崔德之) 우왕 10(1384)~세조 1(1455). 자는 우수(迂叟), 호는 연촌(烟村)·존양당(存養堂), 본관은 전주, 최담(崔霮)의 아들이다. 태종 5년(1405)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문종 즉위년(1450) 예문관 직제학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팔현사(八賢祠) 생육신의 여섯 사람과 함께 정보와 권절을 더해 모신 사당. 영조 7년(1731) 영월 사육신 사당인 창절사(彰節祠) 안에 세웠다.
하위지(河緯地) 태종 12(1412)~세조 2(1456).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자는 천장(天章)·중장(仲章), 호는 단계(丹溪)·연풍(延風), 시호는 충렬(忠烈), 본관은 진주로 하담(河澹)의 아들이다. 세종 20년(1438)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고, 예조판서를 지냈다. 집현전 교리로 『오례의주(五禮儀註)』 상정에 참여했고, 『역대병요(歷代兵要)』 편찬에 참여했으며 문장가로 이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