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경위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는 지난 9월 8일 모임에서 제13회 백석문학상 예심위원으로 김선우 이장욱 2인을, 본심위원으로 김수이 남진우 이시영 3인을 위촉하고 심사를 진행하였다. 예심에서 심사규정에 따라 최근 2년간 출간된 시집들을 검토한 결과, 총 11권의 시집이 본심에 올라왔다.
김신용 『바자울에 기대다』, 도종환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박형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심보선 『눈앞에 없는 사람』, 유홍준 『저녁의 슬하』, 이홍섭 『터미널』, 조연호 『농경시』, 조용미 『기억의 행성』, 조정권 『고요로의 초대』, 최승자 『물 위에 씌어진』,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가나다 순)
본심은 10월 28일에 진행되었는데, 본심 대상작 모두가 저마다 다채로운 성취와 고른 수준을 보여주고 있어 즐거운 곤혹을 느낄 수 있었다. 심사위원 각자가 우선 추천한 김신용 도종환 심보선 유홍준 조용미 최승자 허수경 시집에 대한 깊은 논의가 오간 끝에 도종환 시집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창비 2011)를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는 시인의 너른 삶에서 길어올린 시적 진실을 능숙하고 진정성 가득한 언어로 펼쳐놓음으로써 흔들림 없는 진심과 더불어 고전적 기품을 지닌 하나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아, 심사위원 전원은 도종환 시인을 제13회 백석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하는 데 기쁘게 합의했다.
심사평
김수이(金壽伊) 문학평론가
한꺼번에 누리기 힘든 부유이며, 즐거운 곤혹이었다. 2011년은 40,50대 중진·중견 시인들의 좋은 시집이 쏟아져나온 해로 기록될 만하다. 저마다의 색채와 향기, 밀도와 깊이로 충일하고 의연한 시집들은 우리 시가 2000년대와 함께 ‘새로운 성장’을 거쳐 ‘드넓은 성숙’의 시간을 맞고 있음을 알게 한다. 지난 몇년이 균열과 무질서의 힘을 신뢰한 ‘또다른 기획’의 시간이었다면, 앞으로 몇년은 그 새로움을 포함한 갖가지 관점들, 세계들, 실천들이 공존하는 ‘더 많은 진화’의 시간이 될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이렇게 많고, 다양하고, 딴딴하고, 오롯한 세계들이라니. 부유함이란 때로 난처한 지경의 동의어임을 실감할 수 있었던 심사였다.
삶에도 마음이 있다면, 그 마음을 허수경만큼 잘 알아채고 이해하는 시인은 많지 않을 것 같다. 허수경은 삶의 마음을 시의 마음으로 고스란히 울어내고 투명하게 빌려다 쓴다. “차가운 해가 뜨거운 발을 굴리”는 비법을, 그 먹먹한 울음을, 처절한 수고를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에서 허수경은, 첫시집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의지가지없는 고독한 마음의 가락으로 노래한다. 이제 그 마음의 고독은 희박해진 모국어의 대기 속에서 더 진하고 가파르다. 시의 감동이 극대화되는 가운데 간혹 정처를 잃은 언어들이 출현하는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최승자의 근래 시들은 정신과 육체의 한 극한까지 나아간 자의 언어이고 노래이며 서사이다. 우리 시의 가장 먼 극지와 오지를 맨발로 걸어가는 자의 전존재를 건 사투이기도 하다. 최승자가 험난했던 여정을 돌아보면서 다른 시간과 공간의 삶을 타진하는 시집 『물 위에 씌어진』은 그녀의 시에 대한 오랜 애정을 확인하게 하면서 지속적인 기다림을 고무한다. 심보선의 『눈앞에 없는 사람』은 시어와 시어, 행과 행, 제목과 본문 등 맥락과 여백의 탄력이 대단하다. 비루한 삶과 세계의 폐부를 저미는 날카롭고 빛나는 칼을 심보선은 수도 없이 갖고 있는 듯하다. 섬세하게 잘 구축된 심보선의 시-세계 속에 언뜻언뜻 드러나는 세련된 쎈티멘털리즘의 징후가 어떻게 정련될지 궁금해진다.
도종환의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는 오랫동안 싸우고 덜어내고 비운 흔적들이 “출렁이며 살아 있”는 시집이다. 투사에서 유명 시인에 이르는 도종환의 넓은 삶의 스펙트럼이 충돌하고 혼융되면서 하나의 경지를 이루고 있다. 그 경지는 정직하고 소박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펼쳐놓는 진정성의 다른 이름이다. 진정성은 오해받기 쉬운 덕목이지만(도종환의 시가 그 대표적인 예의 하나일 것이다), 진정성이야말로 도종환의 시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또한 앞으로도 변함없이 기대어왔고 기댈 유일한 언덕일 것이다. 상복(賞福)이 드물었던 시인께 진심으로 축하를 드린다.
남진우(南眞祐) 시인, 문학평론가
이번 심사에 임하면서 개인적으로 지난 일년간 출간된 시집 가운데 가장 에쎈스라고 할 만한 것들을 골라 집중적으로 읽을 수 있었다는 점이 특히 좋았다. 다양한 연령대의 시인들이 쓴 다채로운 경향의 작품들은 우리 시의 현주소를 잘 말해주고 있는 듯이 여겨졌다. 본심에 올려져 검토 대상이 된 시집들은 다같이 일정한 수준을 구비하고 있었고 범상치 않은 상상력과 현실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수상작으로 쉽게 합의된 도종환의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는 서정시의 모범답안이라고 해도 될 다수의 유려한 작품을 품고 있다. 능숙하게 조율된 언어로 삶의 페이소스를 포착해내는 그의 시는 야단스럽지 않게 시대의 상처를 위무하고 일상에 숨은 진실에 눈뜨도록 유도한다. 또한 서두에 실린 표제시가 선보이는 고전적 기품은 시집 전체를 관통해서 삶의 욕됨을 견디면서도 쉽사리 절망이나 환멸에 안주하지 않는 서정적 자아를 비춰주는 후광 역할을 하고 있다.
수상작으로 선정되지는 못했지만 조용미의 『기억의 행성』은 개개 시편에 기울인 시인의 시적 공력을 실감시켜주는 시집이다. 그만큼 그의 언어는 밀도가 있고 시적 구성 역시 소홀함이 없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래서 때로 촘촘함을 넘어 답답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조심스레 해독하듯 읽어가다보면 그윽하면서도 오랜 여운을 맛볼 수 있다. 시인의 탐미적 성향이 빚어낸 기억 속의 여러 풍경은 완강한 자폐적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다.
시란 결국 보잘것없는 언어의 무더기, 그것도 작은 무더기에 지나지 않는다. 수다와 침묵 사이, 시의 짧은 현현(顯現)이 있다. 백석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이 상이 올해 제자리를 찾아갔다고 생각하고 싶다.
이시영(李時英) 시인
심보선의 시는 발랄하다. 시절과 사랑의 우수를 노래하는 서정이 있고 어긋나는 “세계의 심연을 향해 절규”(「시초」)하는 젊음이 있고 무엇보다 말과 함께 저주받은 ‘운명의 중력’을 감당해나갈 기백이 있어 보인다. 그런데 김수영의 시 「반달」을 논하면서 슬쩍 끼워넣은 백낙청의 표현을 빌리면 “그(김수영—필자 주)의 시가 (…) 지나치게 재기발랄하다는 점”이 오히려 약점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심보선 시의 표현들은 도무지 망설임이 없으며 거침없이 질주하여 독자로 하여금 그 행간에 개입할 수 있는 우연한 행복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저귀는 새처럼 끊임없이 ‘자문자답’하며 ‘매혹’을 선사하는 아름다운, 때로는 비탄에 빠진 젊은 영혼을 만난 즐거움은 크다. 「‘나’라는 말」 「매혹」 같은 절정의 서정시와 함께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같은 ‘시민’으로서의 온유하나 강렬한 참여의식의 발언을 만날 수 있는 점도 기뻤다.
도종환의 시는 심보선만큼 어떤 풋풋한 매력을 발산하지 못한, 좀 구태의 시다. 너무 정직하다고 할까, 순진하다고 할까. 나는 자기 작품에 대하여 이처럼 가식(假飾)을 거부하는 진정한 문사(文士)를 본 적이 없다. 말하자면 그의 언어는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진심의 발언이다. 시와 인간을 이처럼 일체화시켜도 괜찮은 것일까 할 정도로 그의 시는 일체의 시적 포즈를 거부하고 “순간을 다투는 어떤 윤리”(김수영), 즉 진실을 향해 직핍한다.
어이없이 쫓겨난 채 집의
허울을 붙들고 있는 이들에게도
전기도 수돗물도 끊긴 가을은 왔고
탐욕이라고 불러도 좋고
환멸이란 수식어를 붙여도 좋을
폭력적인 한 시대가 긴 그림자로
골목을 둘러싸고 있었다
(…)
비루함과 무기력의 껍질을 벗고
귀뚜라미처럼 더듬이를 허공에 올린 채
이 터질 것 같은 순간에 대해 타전하고 싶었다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시간 말고
천천히 바뀌며 우리 머리 위를 지나가고 있는
또하나의 거대한 시간 쪽을 향해
—「환절기」 부분
이 시집에는 이 작품 말고도 「그해 여름」 「금빛 하늘」 「겨울비」 등으로 이어지는 절박한 ‘타전’의 시들 외에 「젖」 「쏭바」 같은 가슴 뭉클한 절창, 그리고 이순에 가까운 시인이 발견한 의외로운 시적 경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운명 혹은 ‘다른 시간’의 겸허한 수락이다. 위의 시에서도 언뜻 보이지만 「일몰」 「사려니 숲길」 「제일」 등을 거쳐 특히 표제작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이르면 마치 묵시록처럼 인류와 지구의 내일을 예감하는 ‘침묵 앞의 시’로 그의 언어와 리듬은 더욱 팽팽해진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줄 것이다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줄 것이라고 했다! 이 부분이 이번 도종환 시집의 가장 빛나는 대목이다. 그는 이제 저 고지식한 사실적 재현의 시인에서 “지난 세기 우리에게는 육체가 없었다”(「몸에 대한 블라지미르 쏘로킨의 발제」) 같은 ‘세계적 발언’을 할 줄 아는 득의(得意)의 시인으로 성장한 것이다. 고난과 고독, 그리고 아마도 그것을 안 대지가 그를 그렇게 안았을 것이다.
다른 많은 수상후보작들을 물리치고, 나는 이 시인을 기쁘게 수상자로 선택했다.
수상소감
도종환 都鍾煥
1954년 청주에서 태어났다. 1985년 『분단시대』 1집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고두미 마을에서』 『접시꽃 당신』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 『부드러운 직선』 『슬픔의 뿌리』 『해인으로 가는 길』 등이 있으며 신동엽창작상, 정지용문학상, 윤동주상 등을 수상했다.
여러해 전 문인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제가 “나는 본래 낭만주의자였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리얼리스트가 되었어” 하고 말했더니 대학교수인 후배가 “형은 리얼리스트가 아니야. 계몽주의자야, 그것도 애국적 계몽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함께 있던 문인들은 큰 소리로 웃었고, ‘계몽이 뭐가 나쁘냐?’ ‘계몽만 하고 있으면 문학이 되냐?’ 하면서 서로 목청을 높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일찍이 빠블로 네루다는 “리얼리스트가 아닌 시인은 시인이 아니다. 그러나 리얼리스트에 불과한 시인 또한 시인이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저는 지난 시대 리얼리스트로 살았습니다.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다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동안 리얼리스트가 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을 부끄러워한 적이 없습니다.
지난 십년간 저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산속에 칩거하며 지내게 되었습니다. 적막하고 고요한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화엄으로 휘몰아치기 직전이 해인이다”라는 스님의 말이 귓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해인과 화엄이 하나 되는 길, 내게 온 숲의 시간과 사막이 되어가는 세상, 시와 정치, 밀실과 광장, 문학과 삶이 하나 되는 길을 찾고자 했습니다.
‘용산에서 저렇게 빈민들이 불타 죽는데, 어린 여학생들이 먼저 촛불을 드는데, 강이 참혹하게 파헤쳐지고 죽어가는데, 카이스트의 명민한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원전이 터지고 전지구적 환경재앙이 몰려오는 게 눈에 보이는데 우리의 시는 개인의 고통스러운 밀실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탄식을 끝없이 되풀이하고 있어야 하는가?’ 그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계몽에 불과한 시, 리얼리즘에 불과한 시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직도 그 해답을 찾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은 시간을 다 바쳐서 결국 그것을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리얼리스트인 것에 자부심을 가질 것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계시는 칠십대 선배문인들이 여전히 현역이신 것을 저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도 선생님들의 나이가 될 때까지 현역으로 있어야 한다고 몸으로 가르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까지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고자 합니다. 시와 함께 절실하고자 합니다. 지금 선배님들처럼 열정적으로 읽고 공부하고 토론하고 쓰고 사유하고자 합니다. 늘 채워지지 않은 듯, 늘 갈망하며, 우직하게 리얼리스트의 길을 가고자 합니다.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시에 백석의 이름으로 상을 주신 이시영 선생님, 남진우 교수님, 김수이 교수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