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시 | 심사평

 

11회 창비신인시인상에는 총 708명의 신인이 응모했다. 심사위원 3인이 이를 나눠서 검토했고, 각 3~4인을 추천해 11인의 작품을 집중 검토했다. 이들 표제작은 다음과 같다. 「방과」 「맘모스」 「침대를 위한 변명」 「칼」 「레비 스트로스의 청바지」 「홀」 「수족관의 양상」 「노래를 불렀어」 「물결의 말」 「초겨울에 대한 반가사유」 「돼지들」. 심사위원들은 위 작품들을 검토한 후 1013일 회의를 진행했다. 모든 작품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역량을 갖췄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방과」의 당신은 슬그머니 슬픔을 건넨다. 그런데 받아본 즉시 아파서, 혹은 깜짝 놀라서 손을 펼치고 지금 받아든 것이 대체 무엇인가 확인하게 만드는 날카로운 작품이 하나 정도 있으면 어떨까? 「수족관의 양상」의 당신은 반문과 가정과 의심의 화법이 매력적이다. 그런데 표제작에서 그 장점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 「맘모스」의 당신은 가족사 등 다양한 내력을 보여줄 수 있는 역량을 가졌다. 그런데 다양하게 보여줄 때는 각각의 작품이 주는 충격이 더욱 강하고 명료해야 한다. 「칼」의 당신은 앞서와 반대되는 장단점을 지녔다. 배후가 분명하지만 당신이 다루는 가족사는 그간의 시들로 충분히 말해진 것들이다. 만인이 공유한 체험은 참신한 방식으로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 「홀」의 당신은 리듬감있는 매력적 어법의 소유자. 순간과 영원을 포착하는 시인의 눈과 미학적인 아름다움이 장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면에 머물고 있어 공감이 덜하다. 「노래를 불렀어」의 당신은 날 때부터 슬픔의 아이. 하지만 당신이 영원히 아이로만 남을 것 같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니 어법을 한번 바꿔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쉽지는 않겠지만 노력하다 보면 자신의 음역대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넓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최종심에 오른 세 신인. 세 사람 모두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물결의 말」 외 7편을 보낸 장혜령, 「초겨울에 대한 반가사유」 외 5편을 보낸 황유원, 「돼지들」 외 9편을 보낸 이지호. 이들 사이에서 오래 망설였다.

장혜령의 시는 세련된 감각과 이미지가 돋보였다. 언어를 조율하며 사물의 입장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조직되는 시편들은 표면의 아름다움과 깊이의 내구력을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그만큼 모든 시에서 자신의 스타일이 확고히 드러나는 것이 장점이었다.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형식적인 면에서 획일적이고 단조로워 보였다. 취향이 다른 심사위원들 모두의 마음을 얻으려면 최소한 형식적인 변화는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황유원의 시는 손에서 놓기에 안타까운 작품이었다. 특히 뒤에 실린 세편의 시는 아름답고 인상적이었다. 그것들은 언어가 얼마나 음악적일 수 있는지를 최대한으로 실험하고 있었다. ‘여러 종류의 감정’을 싸운드트랙으로 변주해내는 음악적인 언어가 강렬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앞의 세편은 그에 비해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편차가 너무 컸다. 아직 자신의 시를 잘 모르는 것이 아닌가 싶어 아쉬움이 남는다.

반면 이지호의 시는 현실을 아우르는 탄탄한 서정성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돼지들」 「별의 거울」 등 소도시나 농촌을 배경으로 한 그의 시는 전통적인 서정의 운행을 하면서도 현실에 대한 팽팽한 인식을 놓지 않는다. 운문과 산문을 적절히 교직하여 리듬을 만들어내는 능력 역시 높이 살 만했다. 또한 많은 편수를 투고했음에도 골고루 수준 이상의 성취를 보여준 것이 장점으로 부각되었다. 특히 표제작 「돼지들」에서 나타난 알레고리는 굉장히 묘하고 매력적인 데가 있다. 최근의 시 경향과는 무관하게 자신만의 정공법인 서정성의 힘을 보여준 것도 이 신인에 대한 믿음을 더했다. 꽤 오랫동안 공들인 것이 틀림없는 그의 시세계가 앞으로 더욱 무르익을 것임을 의심치 않기에 이지호를 수상자로 선정했다.

| 강성은 박형준 진은영 |

 

 

 

시 | 수상소감

 

6862

이지호

1970년생. 충남대 식품영양학과 졸업.

 

 

 

오래전 읽은 어느 시 한편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그 시에 등장하는 맨발처럼 멀고 험한 길에 맨발 하나를 내딛습니다. 시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기웃거렸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절망과 함께 머물다 간 날들이었습니다.

 

전에 살던 동네로 가는 길목에 여러채의 돈사가 있었습니다. 피리 부는 사나이를 돼지들이 따라가고 마지막에 제가 따라가는 꿈을 꾼 적이 있었습니다. 살처분 기간 내내 피리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봄이 왔고 돋아나는 풀들의 낮은 시간을 뒤로하고 부유하는 평수로 이사를 했습니다. 더이상 돼지들의 비명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떼어내도 달라붙는 도깨비바늘 같은 것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그래도 기쁜 시절입니다.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이 땅의 시인들께 머리를 숙입니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시집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부족한 시작(詩作)에도 불구하고 제 손을 잡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창비에 큰절 올립니다. 삶이 시 같은 아버지, 소설 같은 엄마, 당신들을 불러봅니다. 저의 근간이며 버팀목이십니다. 아버님, 어머님 존경합니다. 같이 기뻐해주는 가족들 사랑합니다. 이름은 다 부르지 못해도 저를 응원해준 선후배님들, 친구, 동료들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믿어준 수직씨 고마워요. 내 인생 최고의 감동인 윤지, 호윤아 사랑해.

 

제 시에 나와 있는, 앞으로 등장할 풍경과 이야기에도 고마움을 전합니다.

은퇴가 없는 평생의 일거리가 생겼습니다.

 
 

 

 

소설 | 심사평

 

14회 창비신인소설상에는 총 456명이 작품을 보내주었다. 심사위원 5인이 이를 고루 나눠서 검토했고, 각 1~3편을 추천해 총 8(「헤르메스의 선물」 「손가락」 「킹덤」 「곡우의 댄서」 「나는 매일 맥도날드에 간다」 「개의 심장」 「위대한 유산」 「팽—부풀어오르다」)2차심에 올랐다. 심사회의는 1015일에 열렸다.

소설의 구성이나 형식은 대체로 무난한 반면 신인다운 참신함이나 패기가 약하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중평이었다. 최종미의 「나는 매일 맥도날드에 간다」는 ‘편의점’을 무대로 하는 이야기 자체는 익숙한 것이지만 붕괴되어가는 한 가정의 모습과 가장 노릇을 하는 소녀의 빠듯한 일상을 담담하게 그리면서 그 슬픔을 안으로 머금는 자세가 마음에 와닿았다. 그러나 평가에는 비교가 필요악인지라, 8편을 검토하는 가운데 자연히 다른 응모작과 견주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첫인상이 상당부분 퇴색했다.

망자의 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신의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운 김정아의 「헤르메스의 선물」은 단단한 문장에도 불구하고 ‘하계’의 설정이 너무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자기만의 목소리를 기성 작가의 작품에 의탁해서 내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준 황경란의 「킹덤」이나 성희롱 사건에 휘말린 한 시간강사의 사연을 들려주는 박승조의 「개의 심장」은 제시한 소재를 충분히 장악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개를 소재로 인간의 원초적 폭력성을 탐사하는 지용신의 「곡우의 댄서」도 일독에 값하는 작품이었지만 장식적인 멋에 탐닉하는 기색이 너무 강했다.

다른 한편 김준현의 「손가락」과 「석류」는 분명 이채를 띠는 이야기였다. 특히 「손가락」의 경우 후반부의 황당하달 정도의 반전은 독자를 어리둥절케 하기에 충분했는데, 되짚어올라가면 그런 어리둥절함도, 소설을 소소한 오락거리쯤으로 치부하는 어떤 치기가 작동한 결과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끝내 버릴 수 없었다. 메씨지에 집착하는 소설만큼 답답한 것도 없지만 메씨지를 가볍게 아는 소설 역시 경박을 면할 길이 없다.

결국 두편이 남아 끝까지 경합을 벌였다. 김종규의 「위대한 유산」과 천정완의 「팽—부풀어오르다」였다. 여러 갈래로 꼬인 간단치 않은 가난한 사연들을 1인칭 화자가 희극적 입담으로 모아들이는 솜씨로 보면 「위대한 유산」이 돋보였고, 독자를 빨아들이는 내면 묘사와 서사의 집중성 면에서는 「팽—부풀어오르다」의 개성이 빛났다. 전자는 서사의 재미에 더해 사실적 전개와 깔끔한 결말 처리에서 흠잡기 어려운 반면 후자는 그런 전개나 말의 운용 면에서는 흠결이 보였지만 그런 흠을 만회하는, 인물의 심리를 파고드는 기세와 이야기의 여백을 ‘여백’으로 남겨둘 줄 아는 절제가 매력적이었다. 이야기를 무리없이 끌고 가면서 제자리에 꼭 마침표를 찍는 「위대한 유산」의 미덕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결국 무난한 솜씨보다는 불안한 개성을 선택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과 2차심까지 올라온 예비 작가들, 경합을 벌이다 아깝게 떨어진 김종규씨께 격려의 말씀을 전한다. 당선자인 천정완씨께는 축하의 인사를 보내면서 앞으로의 정진을 기대한다.

| 정홍수 유희석 윤이형 이기호 천운영 |

 

 

 

 소설 | 수상소감

 

7131

천정완

1981년생.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서사창작과 졸업.

 

 

 

여행을 떠나는 사람처럼, 그동안 했던 다짐들을 하나씩 확인해 주머니에 챙겼다. 이제 작은 방 안을 나와서 늘 꿈꿔오던 방향으로 한걸음 내디뎠다. 앞으로 내가 가게 될 길 초입에 서서 챙겨온 준비물을 확인한다. 지금은 주머니가 두둑하다. 안도와 불안이 동시에 찾아온다. 이 느낌이 너무 소중하다.

 

소설을 통해 우리 삶에 영향을 주는 큰 지점을 함께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거창한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내가 세계를 마주하고 있을 때, 집중하게 되는 것은 아주 잠깐 우리를 스치는 작은 균열이다. 나는 그 틈이 너무 소중하다. 방향이 바뀔 때마다 삶은 흔적을 갖는다. 대부분 스치고 지나는 이름 없는 흔적들이다. 그런 지점을 오래 바라보는 작가가 되고 싶다.

 

감사를 표하고 싶은 분들이 너무 많다. 나의 기원인 부모님, 황지우 선생님, 김경욱 선생님, 연극원 선생님들, 김소연 선생님, 독 식구들, 기회를 주신 창비와 모자라지만 가능성을 발견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아직은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들은 당선 소식, 그래서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나보다 더 넓고 깊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다. 이번에는 내 운이 더 좋았나 보다. 그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소설을 쓸 것이다. 좋은, 소설가가 되겠다는 다짐으로 이 소감문을 마친다.

 

 

 

평론 | 심사평

 

올해 신인평론상 응모작은 양과 질에서 평년 수준에 미치지 못한 느낌이다. 그중에는 심사위원들을 고민에 빠뜨린 몇편의 글도 있었지만 결국 당선작을 내지 못하고 말았다. 올해는 특히 모험적인 테마론보다 안정적인 작가론 형식이 많았고, 상당수 응모작이 문학을 통해 윤리와 정치를 말하는 최근 한국 비평의 강력한 흐름에 속해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한 의미있는 진척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최종심에서 집중 검토한 글은 다음과 같다.

김진홍의 「‘성(聖)-가족’의 복권—김명인론」은 근작시집 『꽃차례』에 나타난 ‘시간’과 ‘사랑’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살핀 글이다. 유려한 문장과 적절한 인용, 섬세한 감식안으로 김명인의 시적 행보가 도달한 지점을 깊숙하게 짚어내는 한편, “‘몸’의 ‘체험’”과 “시의 ‘언어’”를 화두로 삼아 시의 보편적 지평을 사유하는 넓이도 갖추었다. 하지만 글 자체의 높은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정교한 해설 이상의 비평적 기투(企投)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었다.

허윤의 「모른다고 가정된 주체의 탄생—배수아론」은 배수아의 거의 모든 작품을 망라한 의욕적인 작가론이다. 이 글은 전체적인 관점과 부분적인 판단에서 모두 일정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지만, 문제는 그것이 ‘근대적 주체/포스트근대적 자아’ ‘귀환의 서사/이방인 되기’ ‘안다고 가정된/모른다고 가정된’ 같은 익숙한 이분법적 구도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 평가의 산술적인 종합을 넘어선 자신만의 발견적인 독법이 아쉬웠다.

허희의 「잃어가는 청춘을 옹호하며」는 1980년대생 김사과의 ‘분노’와 1970년대생 윤이형의 ‘환상’, 그리고 1960년대생 박민규의 ‘체념’을 이정표로 삼아 최근 한국소설에 나타난 ‘청춘’의 양상을 진단한 글이다. 이 글은 한국문학의 현재와 미래를 진지하게 성찰하면서도 섣부른 일반화나 과도한 도식화에 빠지지 않고 작품 현실의 실제에 충실하려는 미덕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세 작가의 배치에 도식적인 측면이 있고, 작품 분석과 평가의 측면에서 새로움이 부족하며, 논리적 치밀함이나 성찰의 깊이에서도 아쉬움이 남았다.

당선 여부를 놓고 마지막까지 고심한 작품은 문성욱의 「김사과와 마르크스—『미나』의 경우」였다. 지금까지 나온 김사과론의 문제점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돋보이고, 맑스의 물신성(物神性) 논의를 참조한 발상도 의외로 참신하며, 이를 자신의 논지로 끌어들여 밀고나가는 장악력도 상당하다. 그러나 작품 안으로 들어가 섬세하게 살피는 분석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하여 과감한 착상을 설득력있게 논증하는 데는 미치지 못했다고 판단된다. 김사과의 소설이 “한국사회 씨스템의 억압성과 폭력성”의 분열적 반영 또는 “취향과 문화의 층위”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계급투쟁의 형상화 이상이라는 주장을 입증하려면 필자가 제기한 “얕은 인간”과 “무능한 서술자” 문제를 해명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러나 이 글은 김사과의 서술전략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할 지점에서 “이해할 수 없음이라는 사태를 직시”하겠다는 작가의 출발점으로 회귀하며, 이를 다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소설의 윤리라고 옹호하는 논리적 비약을 감수한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소설의 유력한 발생론적 배경 가운데 하나를 재확인할 수 있지만, 김사과 소설의 고유한 문법, 전략의 유효성에 대한 분석과 검증을 만나기는 어렵다. 심사위원들은 논의를 거듭한 끝에 좀더 치밀하고 깊어진 다음 글을 기다려보기로 했다. 응모자 모두에게 감사와 아쉬움을 전하며, 여러분들의 쉼없는 모색과 건필을 기원한다.

| 김영희 진정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