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창작과비평』 150호 발간을 기념하여 사회인문학평론상을 제정하고 공모안을 내며 이런저런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창비가 줄곧 관심을 기울여 실천해온 연구와 글쓰기를 연세대 국학연구원 HK사업단과의 공감 아래 사업단의 과제명이기도 한 ‘사회인문학’이라 칭하고 올해 봄호부터 사회인문학 연속기획을 진행해왔지만, 그것이 지향하는 글쓰기가 아직 또렷한 사회적 반향을 획득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한편으로는 문학상보다 한층 광범한 분야의 글을 대상으로 하기에 공모 내용을 알리는 실무도 간단치 않았다. 하지만 31편의 풍성한 응모작은 그런 걱정을 씻어주었고, 이 상 앞에 놓인 길이 밝으리라는 기대를 품게 해주었다.
응모작들의 주제는 몇몇 유형으로 분류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했고, 글쓰기 형식도 전형적인 논문에서부터 개성적인 에쎄이까지 전 범위에 걸쳐 있었다. 심사를 위해서 읽는 것이었지만, 이 다양성 때문에 그 과정은 단조롭지 않았고 심사중이란 것을 아예 잊게 해주는 즐거움도 있었다. 그렇지만 평가의 관점에서 보면, 서로 다른 문장관과 사유방식의 글들을 비교의 선상에 올리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심사위원들이 합의한 기준은 당대 현실과 호흡하려는 의지, 논지의 참신함과 선명함, 그리고 그것을 설득력있게 풀어나가는 논술능력 정도로 요약될 수 있다. 꽤 느슨한 기준이었지만, 그것에 비추어볼 때 대략 6편의 글이 부각되었다.
박말숙의 「열려진 비밀상자: ‘반짝반짝 빛나는’을 통하여 본 TV드라마의 전근대성」은 매우 잘 다듬어진 문화비평이었다. 장황하게 서구이론을 끌어들이는 문화비평이 너무 많은 오늘날, 이렇게 대상에 바짝 다가가 분석해낸 점이 돋보였다. 하지만 드라마 분석의 결과를 사회적 문맥 속에서 해석하는 치밀함이 부족해 아쉬웠다. 이재은의 「골목의 멸종: 헤겔의 고전건축 미학을 중심으로」는 아파트단지가 집과 대로 사이에 난 이행과 소통의 공간인 골목을 파괴함으로써 우리의 ‘정신적 골목’ 또한 위협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예술철학적 고찰이 골목에 대한 예민한 분석을 오히려 방해하는 면이 있었다. 김도민의 「난 당신의 ‘애완동물’이 아니에요: 새로운 주체구성의 문법을 찾아서」는 우리 사회의 변화과정을 문화비평적 언어로 재서술함으로써 시대 진단을 수행하고자 했다. 김도민은 유신시대와 민주화 이후, 그리고 외환위기 이후를 각각 사육의 시대, 야생의 시대, 그리고 애완의 시대로 칭하고 있는데, 이런 도전적 명명과 분석의 재기발랄함에도 각 시대를 정연하게 대조하고 분석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심사위원들이 보기에 당선작에 접근하는 세편의 글은 윤여일의 「사상은 어떻게 가능한가」, 고태경의 「21세기 정치의 조건과 타자성의 귀환」, 황승현의 「달동네 우파를 위한 ‘이중화법’ 특강: 한예슬 우화를 솔개와 백조에게 읽혀야 하는 이유」였다. 윤여일의 경우, 무거운 주제를 매끄러운 글솜씨로 풀어나감으로써 만만찮은 사유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창비 담론 자체를 사상의 관점에서 해명하려는 시도가 충분히 분석적이지 못했다. 고태경의 글은 우리 시대의 정치적 과제와 주체를 해명하려는 야심적인 시도였다. 여러 이질적인 사상을 당대성을 견지하며 조합해내는 솜씨가 돋보였지만, 설정 과제가 한편의 글로 담기에는 다소 버거운 면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황승현은 탤런트 한예슬이 촬영장을 이탈한 사건을 실마리로 우리 사회 우파담론의 핵심 논리를 ‘이중화법’이라는 개념으로 포착해냈다. 단편적인 사례 분석을 전체 사회에 대한 논의로 이끌어가는 면이 뛰어났지만 전체 글의 짜임새에서는 허술한 부분도 엿보였다.
나름의 장단점이 있는 글을 두고 오랜 논의 끝에 황승현의 글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분석하고자 하는 대상에 직면하여 기존의 이론과 사상에 기대기보다 스스로 사유하고 개념을 창안해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그의 글이 더욱 높은 경지로 발전하기를 기원한다. 끝으로 처음 세상에 선을 뵌 상에 응모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최종심에 올랐지만 아쉽게 밀려난 응모자들에게도 격려의 인사를 보낸다.
| 김종엽 백영서 황정아 |
수상소감
황승현
1976년생. 서울대 경영학과 졸업.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대중문화평론 당선.
이색(李穡)의 「동방사(東方辭)」와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에는 공통된 구절이 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정몽주를 향한 「동방사」나 구한말 조선의 외교 전략을 논한 조선책략 모두 인접한 두 나라의 관계를 보거상의(輔車相依)로 표현한다. 보거상의를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뜻풀이가 명쾌하다. 보(輔)는 수레의 양쪽 변죽에 대는 덧방나무를, 거(車)는 수레바퀴를 뜻한다고 한다. 서로 의지하는 덧방나무와 바퀴처럼 긴밀한 관계를 일컫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거상의가 유래한 좌구명(左丘明)의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살피면, 보거상의는 본래 순망치한(脣亡齒寒)과 대구다. 수레 운운하는 해석이 엉뚱하게 들리는 이유다. 보(輔)는 협보(頰輔, 볼)를, 거(車)는 아거(牙車, 잇몸)를 의미한다. 두 성어를 합쳐 만든 순보상련(脣輔相連)이라는 별도의 성어가 존재한다는 점에서도 이는 명백하다. 보거상의와 순망치한을 붙여놓은 춘추좌전의 그 대목은 ‘볼과 잇몸이 서로 의지하듯 입술이 사라지면 이가 고통스럽다’는 뜻이다. 한자의 다의적 속성을 간과한 채 거(車)의 의미를 관성적으로 판단한 게 문제였던 것이다. 오늘도 보거상의는 정체불명의 뜻풀이를 단 채 사전에 태연히 올라가 있다. 사전의 권위를 등에 업은 기이한 뜻풀이는 이 순간도 각종 서적과 언론을 통해 버젓이 통용되고 있다.
사전에 잘못 적힌 뜻풀이는 고치면 된다. 수정이 거듭될수록 사전의 권위와 신뢰는 도리어 높아진다. 여러차례 수정된 사전은 시행착오를 마다하지 않은 성실한 연구의 궤적이니까.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경전은 어떻게 하는가. 권력과 자본이 권위의 이름으로 써내려간 경전이 우리의 무의식에 이미 새겨져 있는 건 아닌가.
그 경전의 대표적 표제어는 모두 일방적으로 채택된 것들이다. 친북, 종북, 반미, 좌파, 폭력노조, 동성애, 미혼모, 병역거부…… 반국가적, 반사회적, 비도덕적 존재라는 은밀한 뜻풀이를 족쇄처럼 매달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무상급식과 관련하여, 복지는 나라 망치는 짓이라는 또다른 뜻풀이가 등장했다. 우리가 가진 생각들이 사실은 그 경전의 뜻풀이를 암송하는 것에 불과하지는 않은가.
토마스 싸스(T. Szasz)의 말이 기억난다. 정글의 법칙은 ‘먹느냐, 먹히느냐’이고, 인간사회의 법칙은 ‘규정하느냐, 규정되느냐’라던. 누군가는 그 은밀한 뜻풀이를 해체하여 다시 써야 한다. 사전의 뜻풀이를 고치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는 것쯤은 안다. 명시적인 규정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낙인을 깨는 게 더 어려운 법이니까. 그 보이지 않는 경전에 조금이라도 흠집을 내는 데 내 부족한 글이 쓰이기를.
장작더미의 맨 꼭대기에 놓인 장작은 그저 가장 최근에 팬 것일 뿐이다. 조금 새로울지 모른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인정받았을 뿐이란 걸 잘 안다. 그래서 감사하다. 여러모로 미흡한 글에서 애써 가능성을 찾아봐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존재만으로도 위안과 격려가 되는 가족에게 서툰 감사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