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독자의목소리

 

동아시아문학, 소통과 연대의 중요성

 

겨울호 특집 ‘동아시아 지역문학은 가능한가’를 읽고 ‘동아시아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은 개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최원식과 윤지관이 동아시아문학의 뜻을 살피고 현재 동아시아 지역의 문학 현실을 다루며 지역 문학계의 소통과 연대의 필요성을 이야기한다면, 백지운과 안천은 대만, 한국 그리고 일본 문학사에서 아시아가 어떻게 자리했었는지 실례를 보여준다. 특히 백지운의 「대만 ‘향토문학’의 동아시아적 맥락」은 1980, 90년대 시대적 배경과 함께 한국과 대만의 문학계가 교류했던 경험을 구체적으로 살피는데, 양국이 문학을 통해 만나는 과정을 생동감있게 보여주었다. 동아시아문학이 현재 존재하는 것이 아닌,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필자들 모두 소통과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몇년째 진행중인 동아시아문학포럼을 통해 정기적으로 동아시아 지역의 문학인들이 만나는 것은 매우 뜻깊을 것이다. 특집을 읽고 나서, 거론된 작품 중 국내에서 발간된 소설을 몇권 샀다. 글을 읽는 것으로 동아시아문학을 만드는 데 동참하고 싶었다. 이후에도 동아시아문학이 만들어지는 과정, 동아시아문학을 상상할 수 있는 작품들을 창비가 계속 소개해주었으면 한다.

유다진 jilgang@ifac.or.kr

 

문학이라는 월경(越境)

 

겨울호 특집에 포함된 최원식의 「동아시아문학의 현재/미래」는 하나의 담론으로 부상한 동아시아문학의 지향점을 검토하면서, 이러한 시선으로 21세기초 한국소설을 꼼꼼히 독해한 글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글에서는 “현재”와 “미래”의 ‘사이’(/)에 대한 민감한 이중의 의식이 작동하고 있다. 이 사이기호(/)는 시간적으로 존재하는 단절의 경계선이면서, 현재와 미래의 이분법적 구분 사이에서 식별 불가능한 지점을 지시하는 기호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사이기호야말로 어찌 보면 문학 그 자체에 가장 어울리는 상징이라는 점이다. 현재와 미래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것으로서 문학이란 그 자체로 경계를 지시하면서 그 경계를 넘는 행위다. 이를 재현하듯 이 글에서는 가능태에 대한 지향과 현실태에 대한 검토를 통해, ‘문학이라는 월경’의 난경(難境)과 그 가능성의 이중적 회합을 보여준다. 이때 ‘월경하는 문학작품’의 양상을 기록하는 것은 가능태이자 현실태로서의 동아시아문학에 대한 가장 우회적인 대답인 동시에 핵심을 관통하는 답변이라 할 것이다. ‘미래’라는 시간은 하나의 형질변화가 동반되지 않는 이상, 즉 ‘지금’의 ‘바깥’을 사유하지 않는 이상 도래하지 않는 외부의 시간이듯, ‘동아시아문학’이 하나의 상상적 담론이 아니라 실재의 형태로 드러나는 지점은 오히려 지금 우리의 ‘동아시아문학’이라고 하는 담론에 사로잡히지 않은 전혀 다른 ‘바깥의 문학’이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안’과 ‘밖’만을 논의하다보면 ‘국경을 넘는 일’ 자체의 가능성과 어려움은 오히려 잊어버리기가 쉽다. 창비에서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동아시아문학’ 논의가 점점 정교하게 갖추어나가고 있는 담론들 ‘사이’의 두터운 겹에 긍정적인 기대를 가져볼 이유다.

박인성 clausewize@naver.com

 

이중화법, 싸움의 본질을 가리는 우파의 전법에 대해

 

링 위의 두사람이 싸우고 있다. 상대를 쓰러뜨리려면 두가지 전법을 두루 사용해야 한다. 하나는 자기 힘을 키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를 응원하는 이들이 외려 그에게 야유를 퍼붓게 만드는 것이다. 후자는 상대의 전투의지를 꺾어버릴 뿐 아니라 예비선수들을 내편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다. 제1회 사회인문학평론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황승현의 「달동네 우파를 위한 ‘이중화법’ 특강」은 배우 한예슬이 드라마 촬영장을 이탈한 사건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 우파 담론들이 두번째 전법을 얼마나 교묘하게 구사하는지를 명쾌하게 분석한다. 싸움의 본 무대를 가리는 이중화법은 문제설정을 바꿔치기함으로써 엉뚱한 싸움을 치르도록 만든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싸움은 부자 급식이나 주장하는 얼토당토 좌파들과 가난한 자의 싸움이 되어버리고, 자본과 노동자의 싸움은 ‘귀족’ 노동자와 ‘밑바닥’ 노동자의 싸움이 되어버렸던 예들을 우리는 무수히 겪어왔다. 이렇듯 잘못 설정된 구도의 덫에 걸려들수록 누군가의 권리가 포기되어야 하는 이유를 찾느라 부산해지고, 결국은 모두가 침묵하는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필자는 예리하게 꿰뚫고 있다. 이런 이중화법이 전형적으로 쓰인 현재진행형의 예는 학교폭력과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논쟁이 아닐까 싶다. ‘학생인권이 학교폭력 가해자들에게 날개를 달아준다’는 우파의 논리는 모든 학생의 존엄을 얻어내기 위한 싸움을 ‘무서운 아이들을 방조하는 학생인권조례 지지세력’과 ‘내 아이의 안전’과의 싸움으로 본질을 왜곡한다. 이 글은 명쾌하기 이를 데 없지만, 새로운 통찰을 제시하는 데는 부족해 보인다. ‘귀족 노동자’ 프레임, ‘부자 급식’ 프레임 등에 맞서, 진실의 무대로 논쟁을 옮기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던 이들이 존재한다. 황승현의 다음 특강 주제는 우파들의 이중화법 분석이 아니라 그들의 이중화법에 맞선 대항화법 분석이 되면 좋겠다. 그나저나, 그가 특강을 들려주고 싶다는 ‘달동네 우파’들은 이런 호명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

배경내 hregang@hanmail.net

 

2013년체제의 전망과 과제

 

지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붕괴 직전이다.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정의는 점차 사라져 하나의 ‘전통’으로만 남았다. 청와대는 이명박정부를 가리켜 ‘완벽한 도덕적 정권’이라고 했지만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 반대의 스토리텔링을 찾아 새판을 짜기 위해서는 올해 4월 선거에서 의회권력부터 교체해야 하다. 최근 ‘나꼼수’현상을 불러일으키며 SNS를 중심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는 2040세대는 변화의 한 축을 이룰 것이다. 이제는 단지 정치권력 교체를 넘어, 불신의 시대를 조장하는 구세력을 몰아내 ‘새판’을 짜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겨울호 김기원・정태인・박창기・이남주의 대화는 이런 점을 잘 짚고 있다. 그간 우리의 정신은 황폐해졌지만 치유의 시간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완전한 새판짜기를 통해 민주정부 10년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란다.

안성수 nay2002@daum.net

 

창비의 외래어표기법에 대하여

 

오랜만에 다시 펼친 창비 겨울호에서는 외래어표기법에 대한 문화평이 눈에 띈다. 외국어와 외래어는 엄연히 다르겠지만, 외래어표기의 경우 원음에 가까운 우리말 발음이 있다면 창비의 외래어표기법처럼 적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언어는 사회구성원 간의 약속된 기호이기 때문에 구성원의 의견과 시대의 변화를 도외시하고 오래된 규범을 마냥 준수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정부의 외래어표기법도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며 원음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언어란 고착화되면 나중에 고치기 힘든 법이다. 한편 우리말을 외래어로 표기할 때도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성씨 ‘박’씨의 경우, 영어로 표기할 때 대부분 ‘Bak’으로 하지 않고 ‘Park’으로 표기한다. 우리말 원음을 지키려 하지 않고 영미인의 발음을 너무 의식한 결과이다. 게다가 우리말을 영어가 아닌 다른 외국어로 표기할 때도 문제가 생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성씨 ‘강’을 불어로 옮길 때 ‘Gang’이라고 해야 하는가. 불어에는 비강모음이 있기 때문에 ‘Gan’으로 표기하는 것이 현지발음에 가깝다. 이렇듯 정부가 외래어표기법 규정을 조속히 개정하여 온 국민이 바르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겠다.

아이디 arbreque-sais-j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