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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은희경 殷熙耕
1959년 전북 고창 출생.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타인에게 말 걸기』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장편소설 『새의 선물』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마이너리그』 『비밀과 거짓말』 『소년을 위로해줘』 등이 있음. silverpaperbox@gmail.com
장편연재 4
태연한 인생
제4부 노래의 세계:
사랑하는 자는 없고 사랑만 있다
1. 요셉의 테마—불행의 열정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뭔지 모르게 방 안 풍경이 어제와 다르다고 느꼈다. 창가의 책상, 그 위에 흐트러진 책과 필기구와 공책 들, 그리고 치우지 않은 위스키병과 유리잔과 구겨진 영수증 따위로 책상 못지않게 어지러운 작은 탁자. 모든 것이 어제와 똑같았다. 좁은 오피스텔 특유의 건조하고 텁텁한 실내 공기 속에 싸구려 가구의 도료 냄새가 떠돌고 있었다. 요셉의 시선은 탁자 앞의 일인용 인조가죽 소파를 스쳐 책과 자료 들이 아무렇게나 쌓인 삼단 책장 쪽으로 갔다. 책장에 기대어진 낡은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는 어제 점심때 이채를 만나러 가기 전 팽개쳐놓은 그대로 랩톱과 보험설계사들의 수필 응모작이 들어 있을 것이다. 맞은편 벽 쪽의 소음이 심한 소형 냉장고와 점화 콕에 불붙을 날이 거의 없는 가스레인지도 언제나처럼 심상했다. 방 안의 물건들 모두가 덮어쓰고 있는 먼지와 무기력함, 임시거처 같은 냉기를 포함해서 평소와 다를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요셉이 가진 전부이면서 넌더리 나도록 지겨운 것들뿐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면서야 요셉은 무엇이 달라졌는지 깨달았다. 구석의 옷걸이에 걸려 있는 검은 양복이었다. 어제 하루 동안 상복이면서 데이트와 생일을 위한 옷이면서 십년 전 여인을 만나러 가는 정장이 될 뻔한 검은 양복. 그것은 요셉의 한계절 옷이 모조리 걸려 있는 스탠드 행거의 맨 위쪽 고리를 힘겹게 붙든 채 한사코 새 옷의 때깔을 내뿜고 있었다. 그 방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진함과 활기였다. 마치 첫 출근한 신입사원이 망해가는 분위기의 사무실에 들어와 어리둥절하고 난감해하는 것 같았다. 새 양복의 그런 처지는 요셉으로 하여금 약간의 피곤함과 책임감을 불러일으켰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아침형 인간의 희망찬 모습을 과장되게 연출하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는 새 양복에게 보란 듯이 두팔을 번쩍 들고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들고 소파에 앉은 다음에는 주말을 맞은 건전한 생활인답게 한주일 동안 일어났던 일을 반성해보기로 했다. 몇가지 수치와 동선만으로 대략 정리가 되었다.
이번주에 요셉은 마음에 들지 않는 여덟개의 까페와, 대부분의 사람들이 끼니마다 밥을 먹는 습관을 이용하여 맛없는 음식을 팔아치우는 다섯개의 식당과, 마음에 들지도 안 들지도 않는 그저 그런 여섯개의 술집에 갔다. 만나야 할 이유를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이안을 만나 도경의 돈을 들여서 배불리 술을 먹여주었고, 경직되고 지루한 기사만을 줄창 써온 때문에 정수리가 휑해진 문학담당 기자의 인터뷰에 우연히 끼어들어 최근 주목받는 소설가 B가 겉멋 들고 약아빠진 작가라는 평소 생각을 확인하게 되었다. 몇년 만에 백화점에 가서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는 점원의 고객사랑에 시달렸으며, 또 J의 상갓집에서 그다지 달가울 것 없는 문단 사람들과 합석하여 죽은 자를 루저로 만들어놓고 동정함으로써 마음의 빚을 청산함과 동시에 남의 불운으로부터 자신들의 평안한 일상을 안전하게 분리해내는 비정하고 위선에 찬 작별방식에 대한 분노로 고통받았지만 결국 그것을 참아내는 데 성공했다. 또한 이십년 넘게 지치지도 않고 결혼이란 상대에게 관심을 갖고 시간을 함께 보내는 아주 따뜻한 동반이며 그런 따뜻함을 다른 사람에게서 구하는 건 부도덕한 일이라고 설파해온 아내의 친절하고도 철저한 무관심 속에 생일을 보냈다. 그리고 아무 감흥 없는 생리적 섹스가 한번이었고 마스터베이션은 없었다. 성인인증을 요구하는 인터넷 사이트에 몇번 접속하긴 했지만 ‘이것이야말로 가장 사랑하는 상대와의 섹스’ 따위의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인간들도 어쩌면 지금 같은 일을 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흥미를 잃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그다지 한 일이 없는 한주일이었다. 휴대전화의 캘린더에 입력해둔 일정도 거의 실행되지 못했다. 젊은작가상 시상식과 문예지 필자모임에 가지 않았고 지역 도서관의 자문회의에도 불참했다. 통장에 새로 입금된 돈은 없었다. 새로 구상한 소설 또한 제자리를 맴돌았다. 무력감에 빠진 작가가 랩톱을 들고 무작정 떠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인데 주인공은 아직까지 짐도 못 꾸리고 책상에 앉아 절망만 되풀이하는 중이었다. 첫 장면이 길어지는 것을 봐서는 장편이 될 수도 있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되지 않으리라는 걸 요셉은 모르지 않았다.
한주일 동안 요셉은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하지 못하거나, 그 두가지 일만을 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불유쾌한 무위와 불발과 반복의 공회전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좌표가 제자리에만 머물러 있었던 건 아니다. 내일이면 류를 만날 것이다. 그리고 이채가 있었다. 이채와 류의 등장이 자신을 어딘가의 언덕으로 데려가 새로운 풍경을 보게 해주리라는 기대 속에 요셉은 오늘따라 유난히 파란 하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거였다. 불현듯 까치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그는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13층에서 내려다보이는 것은 수많은 건물들의 창문과 옥상과 굴뚝, 그리고 온갖 업종의 조잡하고 어지러운 간판들이었다. 처음 집을 보러 왔던 날 부동산 남자가 우려한 대로 그것들은 겹겹이 포개져서 시야를 가로막았다. 바닥을 볼 수 있는 것은 공영주차장뿐이었다. 주말밤이면 커다란 주차장에는 차들이 빈틈없이 빽빽이 들어찼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는 단 한대의 차도 남아 있지 않았다. 토요일 오전의 텅 빈 주차장 바닥을 내려다볼 때마다 요셉은 인간이 그리 쉽게 죽지 않는 존재라는 데에 새삼 경악하곤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음주운전을 하는 걸 고려한다면 주말밤에 더 많은 사람이 차에 치여 죽어야만 이치에 맞기 때문이었다.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차를 움직이는 일이란 난폭한 흉기를 치켜들고 전속력으로 뛰어다니는 것과 비슷했다. 운전대를 조금만 옆으로 돌리거나 브레이크 페달에서 잠깐 발을 떼고 있다가는 순식간에 자신을 포함한 누군가의 목숨을 잃게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보면 세상은 지나치게 안전했다.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금치산자들이 무리를 이루어 좁은 길 위에서 서로 미친 듯이 얽히고 엇갈리며 날뛰고 있는 극단적인 위험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운전자가 목적지에 닿아 태연히 차문을 열고 내리는 것이다. 그렇게나 안전한 세상에서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지는 것은 순전히 ‘혼을 담은 시공’ 때문이라는 게 요셉의 생각이었다. 그런 걸 내세우는 사람들 대부분은 처음부터 혼을 사용할 생각도 없었거니와 설령 사용하려고 해도 아예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사랑이나 돈이나 염치도 마찬가지였다. 갖지 못한 자들일수록 의미를 만드는 데에 집착했다.
오전이라 아직 주차장은 텅 비어 있었다. 검은 아스팔트 위에 촘촘히 그어진 하얀 주차선 위를 가로질러 걸어가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핑크색 운동복 차림의 그 뚱뚱한 여자는 구석에 자리를 잡더니 줄넘기를 하기 시작했다. 줄이 바닥을 때리는 매순간 여자의 몸이 힘겹게 허공으로 들어올려지는 것을 바라보던 요셉은 건너편 건물의 옥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감색 유니폼 점퍼를 입은 남자가 거대한 환풍기 옆에 서서 한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금연건물로 둘러싸인 동네에서 흔히 보아온 풍경이었다. 남자는 담배를 빨고 연기를 내뿜고 재를 떠는 동작을 되풀이하는 사이사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멘트 벽 위로 쏟아진 햇살이 튕겨나와 쫓겨난 자의 광대뼈에 음영을 만들고 있었다. 생수병을 기울여 천천히 물을 마시며 요셉은 공영주차장으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검은 바닥에 규칙적으로 그어진 흰 주차선들이 선명했다. 종 우월론자이면서도 인간을 결코 좋아하지 못하는 요셉에게 있어 그것은 누군가 말했듯 모든 행복을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불행이나 무능력을 유일한 열정으로 삼아야 하는 하루분의 빈칸처럼 보였다. 아등바등 잎과 꽃을 피우면서 뻔뻔스럽게 생명력을 구가하는 봄날의 공원이나 그 욕망의 주기에 편승하려는 상춘객들이 눈에 띄지 않도록 서향 집을 택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다.
브런치 메뉴를 주문한 뒤 요셉은 이주일이나 끌었던 심사원고를 꺼냈다. 랩톱의 전원도 연결했다. 샌드위치가 나오기 전까지만 포털 싸이트의 뉴스를 검색해볼 생각이었다. 인기검색어 목록에는 영국인 뮤지션의 죽음이 올라와 있었다. 다음 순간 그날이 만우절이란 사실이 요셉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기사의 출처도 애매했다. 유명인의 사망소식은 만우절 거짓말 중 가장 의심쩍은데도 흥행률이 높았다. 살아 있기만 하다면 누구라도 죽을 수 있고, 누구에게라도 당장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누구의 죽음이든 믿지 못할 소식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흥행의 요소는 그것이 믿어지지 않는 죽음이라는 데 있었다. 어느해에는 독재국가의 절대 권력자였고 또 어느해인가는 아름다운 젊은 여배우나 전설적인 록그룹의 리더 혹은 세계 제일의 부자나 기업가였다. 그들의 죽음이 뜻밖인 것은 애도의 수위 때문이 아니다. 인간이 모두 권력과 명예와 아름다움과 돈, 그리고 그것들이 합해진 힘의 상시적 측면에 무심히 굴복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인류 대부분은 철저히 보수적이라고 요셉은 결론지었다. 뒤집어엎을 생각이 없거나 아예 못하는 사람들이 그럭저럭 간격을 맞추려 애쓰며 움츠리고 사는 게 인생이었다. 미리 패턴을 간파하여 만우절 거짓말에 속아넘어가지 않는 자신 같은 통찰력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검색어에 오른 팝스타는 아내가 좋아하는 가수였다. 아내처럼 상상력 없고 고지식한 사람은 지금쯤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자 요셉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가방 속에 든 우편물이 떠올랐던 것이다. 다른 날도 아닌 만우절에 이혼소장을 보내오다니 당장 전화를 걸어 아내를 야단쳐야만 할 것 같았다. 아내는 지금까지 요셉의 타고난 처복과 통찰력에 의존해서 제법 안정적이고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 요셉이 원하는 한 나머지 인생도 같은 방식으로 사는 게 자신에게 이로운 일이었다. 그리고 그러려면 어떻게든 이혼만은 하지 않는 게 옳은 태도였다.
요셉은 가방을 열고 봉투 안에서 내용물만을 꺼냈다. 아르바이트 점원이 가져온 커피와 에그 샌드위치를 먹으며 그것을 넘겨보기 시작했다. 이혼에 대한 너절한 안내서를 넘기자 요셉이 빈칸을 채워넣어야 한다는 답변서가 나왔다. 요셉은 같은 연배의 작가들이 연애편지를 쓰는 것도 아니고 가정생활의 단란함을 위해 문장력을 사용하는 걸 비웃어왔다. 반장선거에 출마한 자식의 연설문을 쓰던 알뜰한 작가들은 으레 대학입시 전형에 제출할 자기소개서를 거쳐 입사원서까지 대신 써주었다. 그런 사소한 개인적 대필에 비한다면 공문서라는 점에서 한수 위이긴 하지만 요셉은 이혼서류 따위에 단 한글자도 적어넣고 싶지 않았다. 배우자의 의무에 대한 아내의 이의제기에 대답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반대로 머릿속에는 논지가 명확한 정당한 답변이 정밀하고 설득력 강한 문장이 되어 흘러가는데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신념체계가 다른 집단에서 통용되는 서류에 잉크를 묻히는 건 전향서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피고’이자 ‘유책 배우자’로 몰아가는 변호사의 문장 군데군데에서 잠깐씩 요셉의 눈길이 멈추었던 것은 단지 틀린 맞춤법 때문이었다. 자신의 도움 없이 혼자서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아내가 기어이 신뢰가 가지 않는 변호사를 선택하고 말았음을 확인한 요셉은 실속없이 가산을 탕진하고 있는 아내에게 은근히 화가 치밀었다.
요셉의 옆자리에 앉은 젊은 남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영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까페에서 회화 개인지도를 하는 건 익숙한 광경이었다. 재킷 안에 외국 대학의 티셔츠를 받쳐입고 귀걸이를 한 덩치 큰 청년이 선생이고, 한 손으로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긴 채 다른 손으로 요란한 깃털 장식이 매달린 펜을 부지런히 움직여 공책에 뭔가를 적는 여자가 학생이었다. 요셉이 서류를 다시 가방에 집어넣고 보험설계사의 수필원고를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안돼 그들은 정해진 수업을 마친 모양이었다. 한국말이 들려오자 요셉은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유학을 마치고 병역의무 때문에 돌아왔다는 청년은 한국사회에 불만이 많은 것 같았다. 타인에게 너무 무례하다는 거였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몇살이냐, 결혼했냐, 그런 거 실례 아녜요? 친척들 만나는 거 지겨워요. 별걸 다 꼬치꼬치 물어보고 간섭하고 충고를 하더라구요. 그리고 그것도 이상해요. 식당 가서 주문할 때 이모, 언니라고 부르고 상점에 가면 아버님, 어머님 하잖아요. 전국민이 친척이야. 근데 웃기는 건 또 남은 확실히 갈라놓아요. 좁은 엘리베이터 같은 데 함께 있어도 눈도 안 마주쳐요.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문을 쾅 닫아버리고.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퍼블릭 개념이 진짜 없어요. 특히 노인들, 줄 서는 걸 못 봤어. 전철역, 은행, 곧장 창구로 달려가서 무조건 반말이에요. 빨리빨리 하라고 야단까지 치던데요. 그분들 얼굴 보면 조금이라도 뭐가 자기 뜻대로 안될까봐 불안한 것 같아요. 이런 나라에서 단체생활은 정말 지옥일 것 같아.
요셉은 청년이 유학기간 동안 그 나라 방식의 민주주의를 경험했고 또 얹혀사는 이방인으로서 그 나라의 시민교육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으리라고 짐작했다. 군입대를 앞둔 불안한 처지라서 한국사회의 부조리한 측면에 한층 더 예민할 것이다. 그리고 청년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여제자의 표정으로 미루어 어쩌면 깃털 달린 볼펜을 꾹꾹 눌러가며 글씨를 받아적는 제자와의 관계를 군입대 때문에 더이상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게 청년이 가진 불만의 결정적인 원인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식당에서 할머니들도 그래요. 여제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청년에게 말했다. 알바하는 친구가 있는데 할아버지보다 할머니 손님들이 더 싫대요. 세명이 와서 이인분 시켜놓고는 주문하자마자 자기 자리만 빨리 안 갖다준다고 화를 낸대요. 물이 차다, 숟가락을 바꿔달라, 불렀는데 바로 안 왔다. 큰 소리로 야단치고. 맞아요. 청년이 맞장구를 쳤다. 남의 말을 일분 이상 듣는 노인을 못 봤어요. 남의 말을 듣지도 않고 화부터 내는데 마지막에는 꼭, 내가 너 같은 자식이 있다, 이러는 거예요. 그게 어쨌다는 거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해가 안 가요. 왜요? 저 우리 아버지 싫어하는데요? 이럴걸 그랬나.
모든 종류의 알려주는 말을 싫어하는 요셉은 잔소리를 거부할 청년의 권리를 지지했다. 청년이 마음에 들었으므로 그가 이해가 안 간다는 점에 대해 좀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요셉이 생각하기로 한국의 노인들은 양손에 근대화와 봉건주의라는 상반된 이데올로기를 쥐고 편의에 따라 그 두가지 중 하나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내밀었다. 눈앞의 이익에만 매달리고 편법과 눈가림으로 목적을 달성하고 속도경쟁을 하고 남과 비교하고 과시적이고 허세를 부리고 빈둥거리는 걸 못 참고 또 행여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까봐 늘 표정이 불만스럽고 경계심에 차 있는 것은 모두 급하게 진행된 산업화와 경제개발에서 얻은 생활의 지혜였다. 그런 한편 그 모든 욕망의 서사를 ‘너 같은 자식’을 둔 가장으로서의 헌신으로 포장하는 게 그들의 알리바이였다. 너 같은 자식이 있다는 말로 타인을 유사 가족의 범주 안에 집어넣는 것은 서열을 매길 수 있기 때문이다. 요셉의 눈에는 노인들이 줄을 안 서는 것은 새치기를 하는 게 아니라 경제개발시대의 국가유공자로서 예우를 받으려는 권리행사로 보였다. 공중도덕을 어기고 남의 권리를 무시함으로써 위풍당당하게 사회정의를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아는 사회정의는 그런 방식으로 질서를 잡아왔기 때문에 무리도 아니었다. 요셉은 그런 것이 노인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근대사의 천박함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 노인들은 한번도 개인이 되어본 적이 없었으며 지금도 단체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더 큰 비극은 뒤늦게 개인의 고유성에 눈떠도 그것을 실현할 방법을 모른다는 거였다. 노인들한테 자기가 젊었을 때 지금 자기 나이의 노인들처럼 뒷방 늙은이로 살라고 하면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제 노인들은 몸에 달라붙는 운동복에 산악자전거를 끌거나 쌘들에 반바지 차림으로 커피를 마시러 까페에 들어온다. 그렇지만 고작 쩌렁쩌렁 큰 소리로 전화를 받고 순서를 무시하고 아르바이트 점원에게 모욕을 주고 다른 손님들에게 공경을 요구할 뿐이었다. 요셉은 요즘처럼 사회가 젊은이한테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한편 모든 면에서 젊음을 의식하며 돌아가는 때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다 노인들의 질투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젊은시절 살아남기 위해 자기 스스로 굴복했던 권위에 대한 권위적인 방식의 복수인 셈이었다.
청년이 화장실에 가느라 자리를 비운 동안 여제자는 거울을 꺼내 입술에 립밤을 발랐다. 잠시 후 자리로 돌아와 앉으며 청년이 투덜댔다. 남자화장실에 청소하는 아줌마들이 불쑥 들어오는 거 진짜 적응 안돼. 사람들이 화장실 더럽게 쓴다고 막 욕을 하더라구요. 나 들으라는 듯이. 왜 내가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욕을 먹어야 하죠? 화장실 쓰는 사람들을 무지 미워하는 것 같아요. 화장실을 아예 아무도 안 쓰면 편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렇게 되면 청소부도 필요 없고 아줌마는 해고일 텐데. 여제자가 웃으며 한마디 했다. 한국에서는 그런 말 하면 싸가지 없다는 소리 들어요.
요셉은 조금 전 우편물을 건네주던 오피스텔의 수위를 떠올리고 있었다. 도경이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십분도 안돼 초강력 접착제를 사용하여 ‘입주자 외 주차 금지’라는 경고 스티커를 붙이곤 하는 수위였다. 새벽에 들어오는 요셉을 불러세워 자정 이후에 들어오고 싶으면 반드시 정문을 이용하라고 훈계를 했다.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마다 뒤따라와 뒷짐을 지고 지켜서 있는가 하면 복도바닥에 니스칠을 하는 날이면 안내방송을 하고 안내문을 붙이는 걸로 모자라 종일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며 각층 복도에서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칠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신발바닥을 깨끗이 하라고 잔소리를 해대는 거였다. 요셉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그의 분노와 탄식이었다. 입주자와 의견충돌이 생기면 그는 없는 사람이라고 무시하지 말라며 핏대를 올렸다가 다음 순간 자신 같은 무식한 사람이 뭘 알겠느냐며 자학적 탄식을 하곤 했다. 그럼으로써 자신보다 돈도 없고 수면시간도 부족하고 친구도 말 한마디 나눌 직장동료도 밥 차려줄 가족도 노후에 용돈을 줄 자식도 없고 축구도 못하고 변비와 불면증에 시달리고 정해진 휴일도 교대근무도 없는 요셉 같은 입주자를 도덕적으로 공격하는 것이다. 그는 감시와 통제처럼 잔소리의 권한이 주어진 일 이외의 업무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기다리던 택배가 주소불명으로 반송돼버렸기에 확인하러 갔던 요셉은 약자를 괴롭히는 가해자가 되어 되돌아와야 했다.
요셉은 약자의 피해의식이 권력이 되는 건 역설적으로 보수적인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남에게 의존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어린아이와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의 부자처럼 되기를 꿈꾸는 가난한 자들은 현재의 이데올로기가 지속되기를 원할 수밖에 없으므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요셉은 또한 가난하다는 이유로 남을 동정하는 것이야말로 돈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물질만능주의라고 생각했다. 무조건 힘없는 자의 편이 되어서 싸우거나 그들을 위로한다며 노골적으로 목청을 높이는 감상적이고 진지한 소설들이 지겨웠다. 요셉의 생각이 맞다면 도덕적이고 정당한 주장일수록 배타적으로 되기 쉬웠고 폭력의 성격을 띠기 일쑤였다. 그것은 노인들의 단체생활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요셉이 포착하고 싶은 것은 그 단체생활에서 혼자 떨어져나온 개인이었다. 요셉은 인간을 표본집단으로만 보는 정신분석이나 진화 생물학 같은 전체주의적이고 패턴화된 진단방식을 멸시했다. 왜곡된 부자관계 때문에 성격이 비뚤어졌다, 둘째아들이라서 우유부단하다, 지나친 성적 금기 때문에 폭력적으로 되었다 등등. 또는 여성은 자기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 조건을 가진 남자에게 반한다, 아이 울음소리가 듣기 싫은 것은 빨리 아이를 돌보게 하기 위해서다 등등. 그런 결정론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못지않게 계급투쟁적인 사고방식에도 피로감을 느꼈던 것이다. 빈부와 상하관계와 계급이 뒤바뀌면서 이루어내는 신분상승과 인생유전의 서사에는 짜증이 났다. 그럼에도 누군가 간파했듯이 대중은 소위 인간적이라는 작가들에게 몰렸다.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 역시 대중처럼 어중간하게 멈추어 불가능과 적당히 타협하며, 혼돈상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조금 전 읽은 보험설계사의 수필만 해도 요셉의 생각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요셉은 다시 심사원고를 집어들고 뒤적였다. 접수번호 165번의 글이었다.
“어느새 나는 보험 설계사로서의 길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강사 선생님들의 교육을 받을수록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한국사람은 전부 다 옳은 말만 하면 의심을 한다고 한다. 한가지 정도는 틀려줘야 한다. 그러면 그걸 자기가 고쳐주면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나머지 이야기도 믿는다고 한다.”
요셉은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펜을 들어 그 원고 위에 A라고 썼다. 그런 다음 너무 일을 열심히 하는 것 같았으므로 커피를 한잔 더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옆자리 남녀가 일어나면서 흘끗 요셉을 바라보았다. 그 못마땅한 눈빛에서 요셉은 다음번 그들의 회화수업이 오늘 옆자리에서 자기들의 대화를 엿듣던 아저씨에 대한 성토로 끝맺을 수도 있다는 걸 눈치챘다. 요셉도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커피는 다른 까페에 가서 마실 작정이었다. 1회에 한해 리필을 해주는 까페라서 아쉽긴 했지만 심사평을 쓰기 위해서는 새로운 분위기가 필요했다.
요셉이 알고 이안이 모르는 것
십년 동안 요셉은 류와의 재회를 수없이 상상해왔다. 그가 상상했던 어떤 방식과도 거리가 멀었지만 어쨌든 이제 그 시간은 내일로 다가왔다. 어제 이안은 류 앞에서 요셉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자신의 섭외력을 과시하고 또 토요일의 술자리에 요셉이 온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이안의 말대로라면 「위기의 작가들」은 문단의 냉혹한 경쟁과 상업성, 권위주의를 고발하는 영화였다. 요셉을 모델로 한 K교수라는 인물을 통해 진정한 작가의 비전을 제시한다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요셉은 보통의 시시한 영화인가보다 하고 넘겼을지도 모른다. 이안은 출세주의자인 데 지나지 않고 그것을 쉽게 들켜버리는 촌스러운 진지함을 갖고 있었다. 유연성이 없으니 유머가 있을 리 없었다. 가장 나쁜 것은 자기 인생의 서사에 스스로가 사로잡혀 있다는 거였다. 그처럼 자기객관화를 못하는 인간이 영화를 만들어 짧은 시간이나마 웃음을 앗아감으로써 세상에 폐를 끼치는 일을 막아야 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런 일은 가만히 있기만 해도 저절로 해결되는 일이었다. 류의 냉정함에 대해서라면 요셉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안의 씨나리오에 등장하는 K교수가 어떤 인물이든 류에게 요셉을 연상시켰다면 그것은 십년 전 말없이 S시를 떠나버린 이후 류가 요셉의 행적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뜻일 것이다. 이안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이안이 알고 요셉이 모르는 것
이안의 씨나리오는 세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모두 술집이 배경이다. 순수하고 정의로운 청년 영준이 나레이터로 사건을 이끌어간다. 1부에서는 대학교 앞 단골 술집 ‘소설’에서 K교수와 제자들이 술자리를 벌인다. K교수와 여학생들의 관계, 그를 둘러싼 부도덕한 소문들이 암시되면서 갈등이 심화되고 결국 주먹다짐이 벌어진다. 2부는 영화제의 소모임에 참석한 K교수와 팬들이 바닷가 술집에 모여 있는 장면이다. 새 소설을 인정받지 못한 K교수의 장광설이 펼쳐지고 그를 추종하는 여자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어왔음이 폭로된다. 3부는 K교수가 옛 제자들과 해후하는 장면이다. 요셉을 직접 등장시켜야 할 부분은 바로 그 3부이다. 1부와 2부는 씨나리오에 따라 배우들이 연기하지만 3부는 상황극에 가깝다. 분위기 위주로 찍고 대사는 편집으로 끼워맞춘다. 1부와 2부에 등장하는 ‘위기의 작가’의 실제 모델이 요셉이라는 사실도 편집을 통해 효과적으로 부각시킬 생각이다. 술자리에서 요셉은 평소 모습 그대로 욕망에 사로잡힌 위선적이고 권위적인 속물로 행동할 것이다. 궤변을 동원해 자기과시를 하고 여자들에게 수작을 걸다가 옛 여자이기도 한 제자의 소식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카메라는 어떤 식으로든 그 장면을 기록해야 한다. 촬영장소는 ‘급정지 스튜디오’. 이안은 몇가지 씨퀀스를 단계별로 구상해놓고 있었다. C는 처음부터 스태프로 등장한다. C의 제안대로 정연의 모습까지 일단 필름에 담아둘 계획이었다. 중요한 건 1부의 술자리에서 싸움으로 번졌던 요셉에 대한 소문들이 새롭게 화제에 오르도록 유도하는 일이다.
이 계획에는 세가지의 행운이 필요했다. 첫째, 요셉이 그날의 술자리에 나타나야만 한다. 둘째, 카메라를 거부하지 않아야 하며 셋째, 완전히 망가진 모습을 보여줘야만 한다. 요셉이 이혼소송을 앞두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처지라는 건 오래 전부터 제자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영화출연 같은 건 아무런 미끼도 되지 못했다. 남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를 일에 손수 나설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카메라를 거부할 것 또한 당연했다. 테스트라고 속이거나 아니면 카메라를 숨겨서 찍을 수밖에 없다. 어쩌면 단지 타이밍과 기술적 문제일 수도 있다. 그나마 가장 쉬운 것은 세번째였다. 만취한 상태에서 조금만 부추기면 요셉은 속내를 드러낼 것이고 그때 수희 이야기를 꺼내면 어느정도 당황하고 화가 폭발할 게 분명하다. 주먹이라도 휘둘러주면 그림은 더 좋아진다. 어쨌든 이안은 내일의 술자리에 최대한 류를 오래 붙잡아둘 셈이었다. 신인감독을 후원하여 영화사업 진흥에 기여하겠다고 홍보를 요란하게 한 데 비해서 B재단의 지원은 무척 소극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계에 인맥이 없는 이안으로서는 B재단에 매달려야만 했다. 이 기회에 류의 마음을 붙잡지 못하면 영화 촬영은 헛수고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안은 트리트먼트 심사 때 류가 자신에게 높은 점수를 주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2. 에뛰드의 세계—아홉명이 기다리는 한사람
이안의 플롯, <급정지 스튜디오>
골목에 꽃향기가 가득했다. 요셉은 4월 봄밤의 대기 속을 걷고 있었다. 담장 밖으로 뻗어나온 목련나무 가지마다 꽃이 만개하여 마치 축포를 쏘아올린 것 같았다. 불꽃놀이 하는 밤처럼 하늘이 환했다. 언젠가 이런 밤길을 걸어 누군가를 만나러 갔었다는 막연한 기억 속에서 요셉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양복 속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아직 차가웠다. 골목 깊숙한 곳의 술집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급정지 스튜디오’는 작은 술집이었다. 카운터가 한쪽 벽을 거의 차지했다. 주방으로 향한 뒤쪽 벽에는 장식 선반이 있고 앞쪽은 몇권의 책이 꽂힌 낮은 책꽂이로 가려졌다. 카운터에 서서 여섯개의 테이블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설계된 공간이었다. 창가에는 2인석 테이블 두개가 놓였다. 나머지 테이블은 기둥 옆에 세워진 커다란 장식용 자작나무 뒤에 있었다. 요셉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중 카운터와 가까운 쪽의 4인용 테이블 두개를 붙여놓고 술을 마시는 중이었다. 벽에 설치된 LED스크린에서는 오래전 유행했던 외국 록그룹의 뮤직비디오가 돌아가고 있었다. 다른 손님은 없었다.
요셉이 들어서는 걸 보고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찾으셨어요? 응, 아는 집이야. 요셉은 테이블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재빨리 눈으로 좇았다. 아는 얼굴은 없었다. 이안은 요셉이 이 술집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 C에게 들어 알고 있었으므로 더이상 묻지 않고 미리 정해놓았던 자리의 의자를 뒤로 빼주었다. 이안의 오른쪽 자리였다. 그 앞자리는 비어 있었다.
이안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자리에 앉는 사람들은 모두 넷이었다. 이안이 돌아가며 소개를 했다. 테이블 건너편의 젊은 여자 둘은 B문화재단의 직원과 이안이 찍을 영화의 스크립터였다. 재단 직원은 실크 원피스 위에 유명 브랜드의 카디건을 걸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새틴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은 명품백과 옷과 장신구 모두 자주색으로 색깔을 맞췄는데 립글로스도 유난히 번들거리는 자주색이었다. 그에 비하면 키가 크고 깡마른 스크립터는 무척 수수해 보였다. 짧은 커트머리를 조금 숙인 채 청바지에 두손을 문지르며 인사하는 모습이 수줍음 많은 소년을 연상시켰다. 이안은 대각선 쪽 구석자리에 앉은 C도 스태프라고 인사를 시켰다. C는 가볍게 고개를 숙인 다음 이내 요셉의 시선을 피했다. 요셉의 오른쪽에 앉은 젊은 남자는 이안과 함께 B문화재단의 트리트먼트 공모에 당선된 영화감독이었다. 그는 요셉의 팬이라고 직접 자신을 소개했다. 초판본으로 갖고 있는 요셉의 책 이름을 줄줄이 나열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안 팔려 요셉 자신이 저주받은 걸작으로 여기고 있는 책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가 바로 어제 ‘대단찮은 영화제’라는 행사에서 대상을 받았다고 덧붙인 것은 재단 직원이었다. 관객투표로 결정하는 제목상까지 받은 건 순전히 자신이 표를 던진 덕분이라며 이안도 한마디 했다.
정연이 주방에서 맥주를 날라왔다. 며칠 전 요셉이 왔을 때처럼 머리를 포니 테일로 치켜서 묶고 있었다. 그 바람에 짙은 마스카라와 콧대가 유난히 강조돼 보였는데 요셉이 보기에 재수술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안주 쟁반을 든 이채가 뒤따라 나왔을 때 요셉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이틀 전 이채에게서 토요일이 쉬는 날이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채는 날씬한 스키니진 위에 신축성 좋은 노란색 니트 스웨터를 받쳐입어 가슴의 볼륨을 적당히 드러내고 있었다. 목에 맨 짧은 스카프도 산뜻하고 발랄했다. 선생님, 오셨어요? 이채가 설치동물 같은 귀여운 앞니를 살짝 드러내며 스스럼없이 인사를 건네는 것을 보고 요셉은 자신의 여주인공의 연기력에 다시 한번 만족했다.
팀장님도 곧 오실 거예요. 요셉의 잔에 술을 따르며 이안이 말했다. 자리마다 술잔이 새로 채워지고 대화가 시작되었다. 겉돌고 서먹서먹한 분위기였다. 아는 사람과 처음 보는 사람들이 섞여 있는데다 업무와 친목을 겸한 술자리 특유의 어색함 뒤에 알 수 없는 미묘한 긴장이 감돌았다. 어느순간 이안이 제안했다. 선생님, 시원하게 소맥으로 갈까요? 저기 C가 엄청 잘 말거든요. 일부러 술을 천천히 마시고 있던 요셉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활개를 치는 게 거슬렸지만 지금 이안은 그의 관심대상이 아니었다. 곧 C가 맥주에 소주를 섞어 돌리기 시작했다. 어떠세요? 칼칼하면서도 부드럽게 넘어가고, 비율이 딱 맞죠? 요셉이 술잔을 내려놓자마자 이안이 다시 한잔을 권했다.
다들 하나같이 술을 잘 마셨는데 스크립터만은 예외였다. 그녀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자주 자리를 비웠다. 술자리의 분위기가 조금씩 무르익어가는 동안 스크린에서는 계속해서 외국 록그룹의 공연 실황이 흘러갔다. 음악소리가 큰 편이었지만 줄여달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다들 목소리를 높였다. 요셉과 이안, 젊은 감독이 주로 이야기를 끌어갔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재단 여직원이 수다스러워졌다. 최근 출장을 다녀온 유럽에 이어 자신이 대학생 때 배낭여행한 나라에 대해 갖가지 견문을 늘어놓았다. 이안은 종종 그녀의 말을 끊고는 류에게 전화를 걸어보게 했다. 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란히 앉은 스크립터와 C는 비교적 조용했다. 돌아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가끔씩 자기들끼리 나직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정도였다.
정연과 이채는 창가의 2인석에서 따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건물 밖으로 화장실에 다녀오던 이안이 그 앞에서 발을 멈추더니 이내 둘을 데려와 합석을 시켰다. 정연과 이채가 테이블의 끝자리를 하나씩 차지하자 이안은 요셉 옆의 모서리 쪽으로 옮겨 앉았다. 파티를 연 주인처럼 정연과 마주 보는 자리였다. 테이블에 모인 사람은 이제 여섯에서 여덟이 되었다. 도경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한시간쯤 뒤였다. 선생님, 벌써 가셨어요? 감독하고 아는 사이니까 가자고 할 때는 언제고? 전화기 밖으로 새어나오는 도경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뺏다시피 요셉의 전화기를 가져간 이안은 친절하게 급정지 스튜디오의 위치를 설명해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손에 납작한 가방을 든 도경이 술집에 나타났다. 오늘은 또 어느 학원 학생이세요? 이안이 인사말을 던지자마자 도경은 큰 소리로 깔깔 웃었다. 젊은 감독이 요셉의 오른쪽 옆자리를 양보하며 이채의 옆으로 바짝 붙어 앉았다. 테이블에는 아홉명이 모여 앉게 되었다.
그중에서 그날밤 이안의 계획을 아는 사람은 이안과 이안의 스태프인 여자 스크립터와 C, 정연이었다. 재단 직원은 업무의 연장으로 회의 뒤풀이에 참석했고 김류 팀장을 만나러 B재단에 갔던 젊은 감독은 사무실에서 이안과 마주쳐 술자리에 낀 것뿐이었다. 그날밤 요셉은 요셉대로 원하는 게 있었다. 그리고 그와 상관없이 도경과 이채 역시 그 자리에 끼어들 만한 이유를 갖고 있었다. 각기 생각은 달랐지만 아홉사람 모두가 류를 기다렸다. 스크립터를 빼고는 다들 조금씩 취해 있었다.
이안 전화 한번 더 해봐요.
재단 직원 왜 안 받으시지? 문자 또 보내볼게요.
젊은 감독 여기 찾기가 쉽진 않을 텐데. 선배는 이런 괜찮은 술집을 어떻게 안 거예요? 음악은 좀 아니지만. 저거 언제 적 퀸이야.
정연 바꿔드려요?
젊은 감독 해본 말예요. 술 드세요.
이안이 손가락으로 구석자리의 C를 가리키며 젊은 감독의 질문에 대답했다.
이안 저 친구 땜에 오게 된 거지. 여기서 알바하잖아.
젊은 감독 아, 스태프가 알바하는 집? 나도 안해본 알바가 없지.
젊은 감독이 옆에 앉은 이채에게 몸을 돌리며 물었다.
젊은 감독 여긴 시급 얼마예요? 참,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이채 이이채예요.
정연이 못마땅한 눈길로 이채를 쏘아보았다. 이채는 턱을 앞으로 내밀며 정연을 향해 어깨를 움찔해 보였다.
젊은 감독 이채? 이름 되게 이쁘신데요?
이채가 요셉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채 선생님이 지어주셨어요. 다음에 쓰실 소설 주인공 이름이래요.
이채의 말에 이번에는 도경이 옆자리의 젊은 감독 너머로 흘끗 이채를 바라보았다.
이안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요셉에게 말했다.
이안 다음 작품 혹시 그거 아녜요? 글이 안 써져서 무작정 떠나는 작가 이야기. 포장마차에서 누군가를 만나서 소주를 마시며 예술과 인생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그거 쓰면 갈 데까지 간 거라면서요.
젊은 감독 왜요? 그런 얘기 난 재밌던데. 내가 재능이 있나 없나, 그런 건, 뭘 좀 만들다보면 기본적으로 하는 고민 아녜요?
요셉 재능이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고민이지.
요셉이 젊은 감독을 향해 말했다.
요셉 재능 없는 사람들은 다른 고민에 빠져 있거든. 자기의 뛰어난 재능을 세상이 안 알아준다는 고민 말야. 그런 진지한 고민과 분노 때문에 늘 바쁘지. 혹시 재능이 있어도 시간이 없어서 못 보여줄 거야.
젊은 감독이 크게 웃은 다음 이안에게 물었다.
젊은 감독 선배도 원래 소설 쓰지 않았어요?
이안이 입을 열기 전에 요셉이 먼저 대꾸했다.
요셉 이안은 재능이 있었지. 바로 그게 문제야, 약간의 재능. 그게 있으면 죽어라고 안되는데도 포기를 못하거든. 작은 재능이야말로 신의 가장 큰 저주다, 매컬러스라는 여자가 소설은 별로지만 가끔은 맞는 말도 해.
이안 선생님. 저 소설 딱 한편 쓰고 관뒀는데요.
볼멘소리로 이안이 반박했다. 이안은 요셉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다음 말을 내뱉었다.
이안 판이 하도 환멸스러워서요. 근데, 제 소설 기억 못하세요? 시정마 이야기.
요셉 왜 기억 못하겠어. 그렇게 길었는데.
이안 선생님은 그걸 단편으로 쓰셨더라구요.
도경 선생님, 그거 소설로 쓰셨어요? 언제?
재단 직원 시정마가 뭐예요?
도경과 재단 직원에 이어 정연도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C에게 속삭였다.
정연 언니가 읽어보라고 했던 그 소설 맞지?
이안 그 「다섯 말의 이야기」요. 솔직히 제가 쓴 거랑 비슷해서 깜짝 놀랐어요. 그때 시정마가 과제물이었잖아요. 결말은 수희 거하고 거의 같던데요.
요셉 그랬어?
요셉이 피식 웃었다.
도경 궁금하다. 선생님, 설마 저는 안 나오죠?
도경이 제법 큰 목소리로 앞자리의 재단 직원에게 말했다.
도경 서귀포 종마 목장에 선생님이랑 놀러 갔었거든요. 말이 섹스하는 거 그때 처음 봤어요. 개는 길에서 본 적 있는데.
재단 직원 전 유튜브에서 봤어요.
젊은 감독 그걸 왜 유튜브로 보나. 씨디 하나 빌려줄까?
도경 대체 그런 걸 왜 보는 거예요?
젊은 감독 안 보세요?
이채가 픽, 짧은 웃음을 터뜨리자 정연이 또 한번 동생을 쏘아보
았다.
머릿속을 정리하려는 듯 말없이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이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안 술집에서 진실게임한 얘기는 왜 쓰신 거예요? 프라이버신데 그렇게 써먹어도 돼요? 그리고, 섹스하고 나서 상대에게 돈을 받은 적 있나 없나, 그 질문은 선생님이 꺼내신 거잖아요.
젊은 감독 재밌겠는데? 나도 돈 달라고 해볼까. 그래서, 있대요 없대요?
이안 팬이라면서 소설 안 읽었어?
젊은 감독이 끼어들자 이안이 불쾌한 표정으로 핀잔을 주었다.
이안 선생님 소설에 반드시 나오는 에피그램들 있잖아. 여럿이 모인 술자리에는 반드시 같이 잔 여자가 끼어 있어야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진다, 그 자리에 여자가 셋이면 그중 한명, 다섯명이면 둘 이상은 같이 잔 여자여야 적당한 비율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날밤 누구와 잘까라는 결정을 두고 술자리 내내 흥미와 긴장감을 조성하지만 물론 마지막 선택은 새로운 여자이다, 섹스와 돈의 공통점은 감정의 지불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점이다, 이런 멋진 말들 말야.
젊은 감독 여기 지금 여자 몇명이지? 하나 둘…… 여섯명이네? 그럼 적어도 둘은 돼야 적당한 비율이군.
재단 직원 감독님, 실망이야.
요셉 역시 이안은 문학적 은유를 알아듣는 데 문제가 있군. 소설 안 쓰고 영화판으로 가기 잘했어.
젊은 감독 맞아요, 선생님. 영화는 카메라만 빌려주면 아무나 찍
어요.
요셉이 술잔을 비우고 내려놓자 도경이 빈 잔을 채운 다음 얼른 안주 접시에서 한치회를 집었다. 그걸 본 요셉은 이마를 찡그린 채 술잔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그리고 도경이 한치회를 도로 접시에 내려놓은 뒤에야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셉 모든 관계에서는 거래가 발생하는 법이야. 지불은 돈이든 섹스든 그리고 사랑이든, 각자 자기가 가진 것으로 하게 돼 있고. 거래는 대개 순차적으로 작동해. 누군가를 사랑하면 돈이나 섹스를 주고 싶고 반대로 그걸 주다보면 사랑이 생겨날 수도 있을 테고. 사랑만 갖고 거래하려는 사람이 가끔 있는데 그게 제일 약은 태도지. 돈이나 섹스처럼 가시적이고 솔직하지가 않잖아. 사랑만 갖고 거래하는 사람한테 계속해서 사랑으로만 갚아주면 아마 화를 낼걸. 내 말이 어렵나?
재단 직원 설명 좀 해주세요.
요셉 정의나 도덕, 그런 헛소리에 휘둘리고 있다는 얘기야. 예를 들어 뒷골목 창녀와 빅토리아 씨크릿 같은 속옷 브랜드의 모델을 비교해봐. 그 둘은 본질에서는 똑같아. 직접 몸을 파는 창녀들보다 성적 이미지를 포장해 파는 스타들이 엄청나게 돈을 잘 번다는 차이뿐이지. 섹시한 스타는 선망받는 쎌러브리티이고 술집 여급은 부도덕한 직업여성이다, 그거야말로 직업에 귀천을 두는 태도 아니겠어? 똑같은 이데올로기로 작동되는 시스템인데 말야.
요셉은 이안 쪽으로는 거의 등을 돌린 채 젊은 감독과 재단 직원과 이채를 번갈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안의 목소리가 커
졌다.
이안 인간관계가 다 거래라는 말이네요. 그럼 이런 것도 성립되나요? 제자하고 연애하면서 등록금을 보태주었는데, 헤어지겠다니까 그 돈을 갚으라고 하는 것 말예요. 그것도 공정거래겠네요?
이안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요셉이 말을 이어갔다.
요셉 조슬린 제임스 소설 읽어봤나? 텔레비전의 인기 여자 아나운서가 자기 팬이었던 재벌2세와 결혼하는 이야기지. 어느날 이 신혼부부는 기분전환을 위해 바에 놀러 가거든. 근데 엉덩이를 유난히 흔들면서 서빙을 하는 섹시한 호스티스에게 남편이 계속 눈길을 주는 거야. 아내는 남편과 호스티스 둘 다 천박하다고 비난하지. 그러자 남편이 이렇게 대답해. 그녀는 자기 직업에 충실한 것뿐이야, 당신이 텔레비전 화면에 나와서 대중들에게 눈웃음을 던진 것과 뭐가 다르지?
요셉은 그 신혼부부의 이어지는 대화를 들려주었다. 나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구요! 그래? 내가 본 것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당신 웃음이었어. 그건 처음부터 당신 계획에 있었던 일이잖아. 그녀라고 같은 계획을 갖지 말란 법이 있어?
요셉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우리가 부당한 이데올로기의 거대한 패턴에 굴복하며 살고 있다는 거지.
이안 타락한 인간들의 자기합리화죠. 그런 위선적인 논리를 내세우는 게 바로 위기의 작가라구요. 작가라면 비전을 제시해야 해요. 삶의 구원 같은 거 말예요.
이안이 너무 절박하게 외쳤기 때문에 말을 마치자 좌중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불현듯 스크립터가 담뱃갑을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크립터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으며 젊은 감독이 중얼거렸다.
젊은 감독 다 그냥 피우는데 쟤 혼자 왜 저렇게 들락거려. 얘기 잘 듣다가. 테이프 갈러 가는 타이밍도 아니고.
젊은 감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안이 짜증스러운 투로 재단 직원에게 말했다.
이안 전화 다시 걸어봐요.
재단 직원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던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재단 직원 안 받아요.
젊은 감독 분명 온다고 했는데. 내가 걸어볼까?
순간 이안의 얼굴이 눈에 띄게 벌게졌다.
이안 그 전화를 왜 네가 걸어? 됐어.
요셉 안 온다고 봐야겠군.
요셉의 입에서 나직하게 혼잣말이 새어나왔다.
정연이 주방에서 쟁반을 가져와 빈 술병을 모아 담으며 이안에게 물었다.
정연 술 더 갖고 와요?
이안 위스키도 한병 갖고 와봐요.
재단 직원 맞다. 법인카드, 팀장님이 갖고 있는데. 아, 걱정 마세요. 제가 계산하면 되니까.
정연 살짝 곤란하다. 양주는 편의점 나가서 현금으로 사오거든요.
이안 소맥으로 계속 가. 맥주 말고 소주를 더 갖다줘요.
젊은 감독 저기, 음악 뭐 있어요? 혹시 클래식 같은 건 없나? 축배의 노래, 이런 거?
정연 뮤비가 몇개 안돼서. 오페라도 괜찮으세요? 사장님 혼자 있을 때 듣는 건데. 요새 완전 꽂혔잖아.
마지막 말은 C를 향해 하는 말이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는 정연을 바라보며 C가 피식 웃었다.
C 업종 바꿀 때가 된 거지.
정연이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자 안주 만드는 걸 돕겠다며 C가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정연과 C가 카운터 뒤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이채도 반쯤 남은 술잔을 마저 비운 뒤 몸을 일으켰다.
요셉이 젊은 감독에게 물었다.
요셉 아까, 영화 제목이 뭐라고 했더라?
젊은 감독 아, 그거요. 좀 긴데. 「우리의 옛 맹세를 저버리지만 그때는 진실했으니」예요. 어? 왜 이렇게 입이 막 오그라들지.
요셉 비슷한 시가 있지 않나?
젊은 감독 헉, 죄송합니다. 「낙화유수」1)에서 베꼈어요.
재단 직원 어쩐지. 시였구나. 그때는 진실했으니, 그 다음 구절은 어떻게 돼요?
젊은 감독 넘어가지?
재단 직원이 계속 재촉을 하자 젊은 감독이 머리를 긁적였다.
젊은 감독 네가 죽어도 나는 죽지 않으리라.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거지. 나는 새로운 사랑의 가지에서 머물 뿐이니. 이 잔인에 대해서 아무 죄 없으니, 배가 고파서 너를 좀 먹은 것 갖고 뭘 따지냐, 뭐 그런 시야.
재단 직원 뭐예요. 카사노바라도 되나. 프랑스 서점에 가니까 카사노바가 쓴 책 되게 많던데. 아무튼 제목상에 던진 내 표가 아깝다. 대상만 받아도 되는 건데.
이안 운이 좋았지. 심사위원 중에 둘이 동문이잖아.
재단 직원 왜요? 영화 진짜 골 때리던데. 팀장님도 재밌다고 하시고. 우리 재단 영화는 언제 들어가요?
젊은 감독 이제 곧.
재단 직원 진짜요? 축하해요, 결재 났구나! 실은 예산 깎여서 한두편밖에 지원 못할 거예요. 오늘 그 얘기도 한댔는데 팀장님 진짜 어떻게 된 거지?
재단 직원은 테이블 위의 전화기를 들어 액정화면을 확인한 다음 다시 내려놓았다. 전화기 케이스까지 자주색인 걸 보고 요셉은 그녀가 케이스를 색깔별로 갖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갑자기 젊은 감독이 자신의 전화기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화장실에 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자리의 도경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에는 이안과 요셉과 재단 직원만 남아 각기 생각에 잠긴 채 말없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스크린에는 록그룹이 사라지고 대신 오페라 무대가 등장했다.
잠시 뒤에 스크립터가 자리로 돌아오고 C와 이채가 술과 안주를 차려 들고 나타났다. 도경도 자리로 돌아왔는데 걸음이 약간 비틀거렸다. 맨 나중에 젊은 감독이 전화기를 손에 든 채 테이블로 다가왔다. 바깥 날씨가 차가운지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젊은 감독 난 먼저 좀 일어나야 할 것 같은데? 가서 데이트 좀 해도 되지?
재단 직원이 이안을 향해 시무룩하게 말했다.
재단 직원 우리도 대충 일어나야 하지 않아요?
도경 양주는 어떡하지? 지금 아가씨가 사러 나갔는데.
이채 아줌마가 수표 주시더라구요.
재단 직원 왜요? 제가 계산할 건데.
도경 괜찮아요. 아직도 많아요. 이상하게 돈은 나를 좋아하나봐. 날 막 따라다니네. 제가 조울증이 좀 있거든요. 지난주엔 우울증 주기가 왔는지 갑자기 비관적이 되더라구요. 만사 귀찮아서 아파트 두채를 팔아버렸어요. 그 뒤에 엄청 떨어진 거 있죠. 꼭대기일 때 팔아치웠다고 부동산에서 나한테 큰돈 벌었대요.
젊은 감독 우울증 대박이다.
도경이 취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도경 요즘 그런 일이 자꾸 생기네. 우리 빌라 앞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나봐요. 주민들이 기사랑 파출부들 구청으로 내보내서 시위했잖아요. 일조권 보장하라고. 그거 보상금 곧 나온대요. 다들 목걸이 한개씩 할까 하던데 난 보석 같은 거 별로 취미 없거든요. 나랑 같은 신경과 다니는 사모님은 그림 사는 게 취미인가봐요. 우울증이 도지면 남편이 가서 그림이나 보라고 1, 2억 준다던데. 근데 난 그냥 술 사는 게 취미예요.
젊은 감독이 술잔을 도경의 잔에 부딪치며 유쾌하게 웃었다.
젊은 감독 친하게 지내요. 기념으로 양주 한잔 마시고 일어나야겠네.
정연이 위스키와 잔을 쟁반에 받쳐들고 테이블로 오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술을 내려놓는 정연에게 이채가 속삭였다.
이채 저 여자 잔돈 주지 마.
정연 당연하지.
정연은 중국옷을 입은 남자들이 나와 번갈아가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스크린에 흘낏 눈길을 주었다. 그러나 다들 음악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위스키가 한잔씩 돌아갔다. 단숨에 마셔버린 이안이 위스키병을 끌어다 스스로 잔에 술을 따르며 다짜고짜 요셉에게 물었다.
이안 선생님, 수희 소식 안 궁금하세요?
요셉 글쎄. 잘 있나?
이안 저기 C한테 한번 물어보세요. 수희 친구거든요. C 처음 보세요? C가 선생님하고 인연이 없지도 않은데. 수희 산부인과에도 따라갔고.
C가 고개를 돌리고 나직하게 혼자 중얼거렸다.
C 난 빼달라니까.
이안 수희도 진짜 풀리는 게 없어요. 제일 먼저 등단할 줄 알았는데. 공모전 때 최종심에서 선생님이 그렇게 반대했다면서요.
요셉 내가 심사하면 대개가 다 최하점이지.
이안 동기들 모인다고 연락했다던데 그땐 왜 안 나가셨어요?
요셉 이안도 안 간 모양이지?
이안 아버지 장례 때였으니까요.
요셉 참, 아버지가 사고 겪으셨지. 물인 줄 알고 마셨는데 농약이었다고. 고의는 아니겠지만 어머니가 곤란하셨겠군. 부모님이 사이는 좋으셨어?
이안 그 세대에 좋고 말고가 어딨어요.
남의 일을 갖고 이야기를 멋대로 유추해내는 요셉의 습관을 알고 있는 이안은 그 화제를 끝내고 싶어했다. 요셉은 그렇지 않았다.
요셉 독선적이고 바람도 좀 피우고, 가부장적인 아버지였을 것 같은데. 돌아가신 뒤 아버지한테서 놓여나니 그제서야 조금 용서가 되지 않던가? 위기의 작가 이야기 말고 위기의 아버지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보지그래.
이안 왜요?
요셉 인간의 자유란 부모를 거부하거나 땅에 묻었을 때 시작되는 게 아니야. 부모가 태어나는 순간, 바로 그때 인간의 자유는 이미 죽음의 선고를 받는 것이지. 이건 내 말이 아니고.
이안 선생님은 남의 말 인용 안하면 말을 못하시거든. 그것도 몇가지 안되지만.
요셉은 못 들은 척 계속해서 문장을 인용하여 읊었다.
요셉 자신의 출신을 믿지 못하는 자가 자유이다. 숲속에 떨어진 알에서 태어나는 자가 자유이다. 하늘에서 떨어져 전혀 고마움을 느끼지 않으며 대지로 내려오는 자가 자유이다.
이채 멋있다!
이채가 두 손을 턱 밑에 모으고 작게 박수를 쳤다.
탁자 위에서 젊은 감독의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전화기를 들고 급히 몸을 일으키는 젊은 감독이 빠져나가도록 이채가 길을 터주었다. 요셉이 술잔을 들고 모두에게 술을 권했다. 취기가 오른 목소리였다.
요셉 한잔 마시자구. 죽은 사람은 완전히 보내버리고, 지난 일은 흘러가게 놔두고, 자유롭게.
이안 그럼 안돼죠, 선생님. 복수가 없으면 역사가 옳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가 없잖아요.
요셉 뭐가 옳은 방향인데? 그건 권력을 쥔 놈들이 정하는 거야. 이데올로기의 보편성이란 것 뒤에는 특정 계급의 이익이 숨겨져 있어.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다, 그런 말 몰라? 그 옛날 촌스러운 마르크스도 그건 알았는데.
이안 선생님, 전 말이죠.
이안이 얼굴을 요셉에게 가까이 가져가며 목청을 높였다. 눈이 충혈돼 있었다.
이안 반드시 「위기의 작가들」을 영화로 만들 거예요. 제자 임신시키고 학생 과제물 베껴서 발표하고 등단까지 막고, 한 여자를 완전히 파괴했어요. 그런 위선적이고 타락한 인물에게 복수하는 게 특정 이익인가요? 잘 아시잖아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요셉 그놈의 의미가 다 뭐야. 뭐든 연결 좀 짓지 마. 의미 때문에 관계가 이어지고 플롯이 생겨나고, 결국 인생이 무거워지잖아. 반성도 절대 하지 말아야 해. 그건 지금을 과거랑 연결하는 짓이니까. 다 무슨 관계가 있어? 한때 중요했던 것들 지금 다 쓰레기라구. 환상이 있었지. 더러운 역사를 버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게 바로 우리라는 아름다운 환상.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그 당시의 시간에 복무했을 뿐이야. ‘지나가는 자가 되라.’ 이런 건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소리지만 예수가 말하니까 사람들이 받아 적었는데, 도마복음에 나와. 알아들었어? 그냥 그렇게 흘러가면서 떠돌면 돼. 인생이 실은 아무것도 아니잖아.
이안 아무것도 아닌데 왜 살아요?
요셉 왜가 있어야 하는군. 그럼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서 산다고 해두지.
이안 그건 말장난이구요.
요셉 이안은 아무렇게나 살 수 있어? 아무렇게나 살 만한 배짱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아. 아무렇게나라는 건 이전에는 없었던 방식이지. 그게 그 사람의 고유성이야.
이안 그래요? 근데 선생님은 왜 소설 쓰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요? 인정 못 받는다고 욕하잖아요. 잘나가면 씹고 질투하고. 왜 그러시는데요?
요셉 또 그놈의 왜. 노래나 듣자구. 저 아리아 오랜만에 듣네. 도대체 집에 오디오가 없으니 말야. 1막 끝장면이군.
요셉이 손으로 스크린을 가리키자 모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허름한 옷차림을 한 젊은 여자가 잘생긴 남자를 향해 간절한 표정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여자의 옆에서 쇠약한 노인 하나가 역시 호소하듯 두팔을 쳐들고 여자의 노래를 거들었다. 화답하는 젊은 남자의 노래는 싸늘하고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보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듯했다. 중국옷을 입은 세명의 남자는 젊은 남자를 둘러싸고 따라다니며 조롱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에는 코러스도 가세했다. 모든 배우들이 다투듯이 번갈아가며 목청껏 노래를 불렀고 그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폭풍우가 몰아치듯 감정이 점점 고조되는가 싶더니 한순간 남자가 무대 끝으로 뛰어가 커다란 징을 세번 울리는 것으로 갑자기 막이 내려졌다.
스크립터가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급히 걸음을 옮기더니 되돌아와서 탁자 위의 담뱃갑을 집어갔다. 그녀가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재단 직원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재단 직원 진짜 왔다갔다 하신다.
스크립터 왜요? 안돼요?
재단 직원 튀잖아요. 다들 그냥 앉아서 피우는데.
스크립터 담배연기를 싫어해서 그래요. 됐어요?
혼자 생각에 잠겨 있던 이안이 재단 직원에게 불쑥 말했다.
이안 아까 그 얘기 좀 해봐요. 영화 쪽 예산이 깎인 거예요?
재단 직원 트리트먼트 당선작이 다섯편이잖아요. 그중에 두편 정도 지원하나봐요. 확실한 건 몰라요. 쫄따구가 뭘 알겠어요.
스크립터 우리 영화는 어떻게 되는데요?
재단 직원이 대꾸를 하지 않자 스크립터는 완전 돌아버리겠네, 하며 담뱃갑에서 담배를 빼내 불을 붙였다. 이안이 이마에 주름을 깊게 만들며 불쾌한 듯 중얼거렸다.
이안 누구랑 통화를 하길래 이렇게 길어.
재단 직원이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도경이 갑자기 어깨를 들먹이며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도경 선생님 오늘 진짜 화장실 안 가신다. 선생님 욕 못하게 제가 다 듣고 있을 테니까 다녀오세요.
도경의 웃음소리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도경 근데 진짜, 선생님은 욕 먹을 말을 너무 잘하시지 않아요? 그게 진짜 웃겨. 섹스 이야기도 엄청 고상하게 하고, 남 갈구는 것도 완전 폼 잡고 하시잖아. 선생님, 오늘 아직 나한테 헤프다는 말 한번도 안했네요? 무뇌란 말도, 그리고 뭐더라, 불능? 아 참, 불감이던가? 우리 선생님, 진짜 노골적이지 않아요? 진짜 노골적으로 차가운 인간이세요. 그렇게 욕 얻어먹고 마음 편한 건 난생처음이야. 그것도 너무 웃겨. 선생님, 선생님 말이 맞았어요. 내가 좀 나쁜 남자 스타일인가봐. 웃겨 죽겠네, 진짜. 어떡하지? 나 한번 웃으면 못 참는데.
도경은 정신없이 웃어댔다. 빤히 바라보던 재단 직원이 한마디 던졌다.
재단 직원 진짜 잘 웃으시네요.
도경 저 원래 잘 웃어요. 원래부터 그래요.
도경의 웃음소리는 점점 높아졌고 이채는 이마를 찡그린 채 몸을 앞으로 내밀고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고 정연과 C는 낮은 목소리로 뭔가 얘기를 주고받았고 스크립터는 기침을 해가며 담배연기를 마구 뿜어댔다. 관현악 연주와 오페라의 아리아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젊은 감독은 오지 않았고 이안과 재단 직원은 술잔을 앞에 두고 각자의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이채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는 것을 확인한 요셉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잠깐 선 채로 허리를 굽히고 이안에게 무슨 말인가를 한 다음 문밖을 향해 걸음을 떼었다. 이채가 다시 들어와 카운터에 걸어놓았던 겉옷을 입고 나갔다.
이채의 재구성, 놀이터
술을 깨기 위해 좀 걸어야겠다고 요셉이 말했다. 선생님, 안 추우세요?라며 이채가 자연스럽게 요셉의 팔짱을 끼었다. 둘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늦은 밤 가로등이 켜진 골목 안은 조용했다. 이채가 놀이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선생님, 우리 저기 잠깐 앉아요. 꽃핀 목련나무 뒤쪽으로 등걸만 남은 등나무 아래 어둑어둑한 벤치가 보였다. 둘은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별은 없네요.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채가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고는 요셉을 향해 몸을 돌렸다.
—선생님. 저, 할 말 있어요.
어둠속에서 이채의 눈빛이 반짝였다.
—저도 늦게 와서 잘 모르지만, 이안 감독님하고 C언니가 무슨 일을 꾸미는 것 같아요. 정연언니는 술만 많이 팔아주면 된다고 하고. 암튼 조심하세요. 저, 이 말 하려고 선생님 화장실 가기만 기다렸는데.
—난 이채가 일어나기만 기다렸지.
—저요? 왜요?
—답답하잖아. 저기서 말 통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
요셉의 말에 이채는 입술을 내밀며 어리광 부리듯 대꾸했다.
—그렇긴 해요. 실은 저 이런 자리 처음이거든요. 예술가들은 무슨 얘기 하나 엄청 기대가 컸는데. 다들 자기 얘기만 하고, 별로 재미없었어요. 그 명품으로 휘감은 여자는 유럽이 그렇게 좋으면 거기 가서 살지? 더럽게 잘난 척하던데. 돈자랑하는 아줌마는 누구예요?
—응, 팬.
—그럴 줄 알았어요. 전화까지 하고 기어코 쫓아와서는 계속 옆에서 술이나 따르고.
—할 수 없지.
귀찮은 존재라는 듯 요셉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채가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근데 솔직히 말하면, 좀 부럽기도 했어요.
요셉은 이채가 도경 대신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 술을 따라주고 싶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채의 입에서는 다른 말이 흘러나
왔다.
—돈 많은 남자랑 결혼한 거요.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재단 직원 그 여자같이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는 틀렸고. 선생님, 저 좀 한심하죠? 아니 욕심이 많은 건가.
—젊은이들은 욕심을 부려야지. 욕망을 키우라고. 기성세대들을 밀어내야 해. 이런 한심한 세상을 물려줘놓고 사과를 해야지, 잔소리나 늘어놓잖아. 그것도 잘 들어보면, 자기가 뭘 안다는 얘기만 있지 뭘 생각한다는 얘기는 하나도 없어.
—근데 사실, 별로 희망이 없으니까 뭘 열심히 하고 싶지도 않아요.
이채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진한 핑크색 매니큐어가 칠해진 긴 손톱을 요셉의 눈앞에 가까이 가져가며 다시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저 나름 일 열심히 하거든요. 언니가 말끝마다 철없다고 잔소리해서 미치겠어요. 그러는 자기는 선물 사주는 남자가 제일 섹시하다고 하면서.
—솔직하네.
요셉은 포털 싸이트에서 보았던 설문조사 내용을 떠올렸다. 데이트할 때 여자가 가장 싫어하는 남자는 외모나 성품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아니라 짠돌이였다. 결혼 결정에 영향을 주는 항목에서도 카드빚이 상대방의 과거 연애사보다 순위가 높게 나타났다. 그 글에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자란 젊은이들의 물질만능주의가 심각하다고 걱정하는 결론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요셉은 그들이 허위의식의 무게에서 조금 벗어나 솔직해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 진짜 이해심 많으시다니까. 진짜 똑똑한 사람들은 남의 마음을 잘 아는 것 같아요. 선생님같이 제 마음을 딱 집어내는 분은 처음 봤어요.
—친구들이 더 잘 통하겠지.
—안 그래요. 다들 경쟁심이 심하고 자랑에다 질투, 숨기는 것도 많구요. 피곤해요. 선생님은 그런 게 없어서 마음이 편해요.
두손으로 요셉의 팔을 감싸며 이채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저의 멘토세요.
—멘토 같은 건 만들지 마. 한두가지 맞는 말은 어지간하면 다 해. 계속해서 맞는 말을 하는 인간이란 성립되기 어렵고. 그러니까 남을 믿지 말고 자기가 혼자 생각해야 해. 세상이란 건 의심을 해도 절반은 속고 있다고 보는 게 맞아.
—근데 혼자 생각하는 게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 선생님. 저 자신을 못 믿겠어요. 그치만 남한테 지적을 받으면 엄청 열받는 거 있죠. 엄청 까칠해져요. 나중에 생각하면 막 혼자 당황스러워.
—당황할 것 없어. 뻔뻔하게 욕망을 키워나가야 해. 강 건너에 사랑하는 어둠이 있을지라도.
—역시!
이채는 두손으로 요셉의 팔을 잡고 끌어당기며 몸을 살짝 기댔다가 뗐다. 그런 다음 눈을 맞추며 요셉을 향해 활짝 웃음을 지어 보였다. 순간적으로 요셉의 팔이 이채의 젖가슴에 닿았는데 그 탄력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채의 등뒤 어두운 허공 속에는 목련꽃이 하얗게 피어 있었다. 요셉의 머릿속에 조금 전 젊은 감독이 인용했던 시가 떠올랐다. 꽃이 없을 때는 나무그늘 아래에서 서성이다가 꽃이 필 때는 목련꽃 담 밑으로 옮기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선생님, 이안 감독이 진짜 제자였어요?
—응.
—원래 저렇게 예의가 없어요?
—변함없는 인간이지.
—분명히 속셈이 있다니까요. 억지소리 하면서 물고 늘어지잖아요. 선생님이 돌려서 말해주는데도 못 알아듣고 계속 같은 얘기 또 꺼내고. 제가 보니까 말예요.
이채는 급정지 스튜디오에서 벌어진 일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재단 직원 그 여자가 제일 밥맛이야. 티를 너무 내요. 앞에 앉은 감독한테 완전 반했던데, 애교 부리는 건 완전 닭살. 다른 사람은 다 개무시하던데요? 이안 감독님 말도 안 듣잖아요. 자꾸 전화하라고 하니까 몇번은 전화기 안 누르고 하는 척만 했어요. 스크립터 언니가 쳐다보니까 기분 나쁘게 탁 째려보구요. 그 언니를 제일 무시하는 것 같더라구요. C언니가 그러는데 둘이 동갑일 거래요. 스크립터 언니는 진짜 착한 것 같애.
요셉은 스카프 매듭이 조금 돌아가 있는 이채의 목덜미에 눈길을 주며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팀장 말예요. 왜 약속 안 지켜요, 짜증나게. 누구 계속 기다려야 하면 술자리 분위기가 좀 그렇잖아요. 주방에서 C언니가 그러는데 원래 올 생각이 없었던 것 같대요. 그럴 거면서 다들 기다리게 하고. 그 팀장이 오면 뭐가 어떻게 될 거라고 이안 감독님은 그렇게 애를 태우는 거예요? 상 받은 감독님한테 감정이 많은가보던데, 무슨 지원인가 못 받게 된 거, 그것 때문이죠?
—그렇겠지.
—그럼 상 받은 감독한테 싸움을 걸어야지 왜 선생님한테 그래요? 제자하고 사귈 수도 있잖아요. 좋으면 같이 잘 수도 있고. 자기 소설 베꼈다는 말도 진짜 웃기는 거 같애요. 저번에 선생님이 그러셨잖아요. 하늘 아래 새로운 이야기는 없고, 그걸 어떻게 썼는가가 중요하
다고.
—그랬나.
요셉은 계속 건성으로 대답했다.
두손으로 빠른 제스처를 써가며 이야기하는 이채의 모습은 생기가 넘쳤다. 요셉의 눈길을 사로잡는 핑크빛 손톱의 움직임이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꽃잎의 율동 같았다. 말을 내뱉을 때마다 도톰하고 붉은 입술에서는 희미하게 입김이 뿜어나왔다. 이채 쪽으로 고개를 조금 숙인 요셉은 목련꽃 향기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채에게서 풍기는 향수 냄새라는 걸 깨달았다. 요셉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패턴과 통속을 이기기에는 자신이 너무 약한 존재라는 생각과 모름지기 작가란 극단성과 데까당스를 갖춰야만 한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작가들도 힘들겠어요. 그죠?
—경멸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세계는 있어야 해. 우리가 대화하기 위해서. 사랑을 배겨내는 침묵은 없거든.2)
요셉의 말이 끝나자마자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던 이채는 요셉의 입술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요셉은 소리가 나도록 이채의 입술을 빨았다.
—어?
이채가 손가락으로 제 뺨을 만지며 요셉에게서 얼굴을 뗐다. 그리고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눈 와요.
요셉은 대꾸하지 않고 이채를 힘껏 끌어당겨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눈발이 조금씩 날리기 시작했다. 요셉은 추워서 몸을 떨었다. 주머니에서 전화벨이 울렸을 때 이채가 몸을 떼려 하자 요셉은 움직이지 못하도록 어깨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전화벨은 조금 오래 울렸다.
도경과 요셉의 대단원, 어둡고 따뜻한 방
도경이 전하는 말은 도무지 두서가 없었다. 스스로 재미있어한다는 것만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긴 이야기를 마친 뒤 그녀는 목이 마른 듯 탁자 위의 맥주잔으로 손을 뻗더니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머, 나도 다쳤잖아! 손등에 피가 조금 흘러나와 굳어 있었다. 파편이 튀었나봐. 도경은 침대 옆으로 가서 스탠드 램프의 불빛에 손등을 이리저리 비춰가며 손톱으로 연필심만한 유리조각을 빼냈다. 그런 다음 휴지를 뽑아 손등을 누른 채 눈으로 전화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선생님, 맥주 더 시켜요? 요셉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경을 침대에 눕힐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양복 재킷도 그대로 입은 채였다. 요셉의 머릿속은 도경에게 들은 이야기를 짜맞춰보느라 분주했다. 캐릭터가 분명했기 때문에 플롯을 파악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젊은 감독과 이채, 그리고 요셉이 자리를 비운 뒤 테이블에는 여섯사람이 앉아 있었다. 말없이 술을 따라 마시는 이안은 몹시 피곤해 보였다. 재단 직원이 이안의 유학시절에 대해 물으며 다시 유럽 이야기를 꺼냈지만 몇마디 형식적인 대꾸가 돌아왔을 뿐이었다. 재단 직원도 이내 조용해졌다. 그녀는 휴대폰을 켜서 액정화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는데 도경에게는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뒤늦게 마시기 시작한 스크립터는 묵묵히 술만 축내고 있었다. C와 정연만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주고받았다.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급격히 되살아난 것은 젊은 감독이 돌아오면서부터였다. 젊은 감독은 코끝이 빨갰고 몸에서 냉기가 전해져왔다. 자기가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려는 젊은 감독을 이안이 불러 옆자리로 오게 했다. 요셉의 자리였다. 이안은 누구나 한눈에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술이 오른 상태였다. 이안이 누구와 통화했느냐고 묻자 젊은 감독은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이안은 젊은 감독이 실력도 있고 인맥도 탄탄하고 성격도 좋아서 앞으로 잘 풀릴 거라고 비아냥거렸다. 부모가 다 살아 계시냐고 묻더니 아버지 직업까지 물었고 젊은 감독의 마지못한 대답을 듣자 대뜸 부모복까지 타고났다며 그의 행운에 또 한번 탄복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도 여러번 했다. 그리고 그런 말들을 이죽거리며 늘어놓는 사이사이 계속해서 누구와 통화했는지를 집요하게 묻는 것이었다. 마침내 젊은 감독이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자꾸 묻느냐고 삐딱하게 대꾸했다. 김류 팀장하고 통화했느냐고 되묻는 이안의 목소리는 꽉 잠겨 있었다. 젊은 감독은 아니라고 간단히 대꾸했다. 이안은 난데없이 젊은 감독에게 몇살이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벌떡 일어나, 나이도 어린 새끼가 건방지게!라고 소리지르며 테이블 위로 술잔을 내던졌다. 다음 순간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젊은 감독의 머리 위로 술병이 퍽 소리를 내며 깨졌다. 젊은 감독은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얼굴로 흘러내리는 술과 깨진 병조각을 두손으로 몇번 터는가 싶더니 곧바로 이안에게로 몸을 날렸다. 그러고는 맥없이 바닥으로 나동그라진 이안을 짓밟기 시작했다. 소리를 지르며 재단 직원이 일어났고 뒤이어 C가 뛰어왔다. 두 여자는 젊은 감독의 양쪽 팔을 하나씩 붙들었다. 싸우려거든 밖으로 나가라고 욕을 퍼부으며 정연도 힘을 보탰다. 소리치는 여자들의 목소리와 스피커의 음악소리가 겹쳐지고 이안의 신음소리와 젊은 감독의 욕설이 더해져 술집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스크립터만이 무관심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킨 채 술잔을 기울였다. 도경은 이안을 더 잘 보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섰다. 마침내 세 여자는 젊은 감독을 이안에게서 떼어놓았다. 젊은 감독도 더는 때릴 마음이 없는 듯했다. 그는 두팔로 얼굴을 감싸쥐고 무릎을 굽힌 채 시멘트 바닥에서 버르적거리는 이안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진 다음 의자에 가 앉았다. 그제야 젊은 감독의 머리가 피투성이라는 걸 발견한 재단 직원이 비명을 질렀고 C가 택시를 부르기 위해 뛰어나갔다.
젊은 감독과 재단 직원이 병원으로 떠난 뒤 술집에 남은 손님은 도경과 이안과 스크립터 셋뿐이었다. C와 정연은 어지러운 술자리를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둔 채 창가 자리로 옮겨서 자기들끼리 숙덕거렸다. 통화가 안된다고 전화기에다 짜증을 내는 정연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스크립터는 작정한 듯 술을 마셨다. 이안은 이따금 팔과 고개를 앞뒤 좌우로 움직여보며 분이 풀리지 않는 표정으로 담배를 피워댔다. 입술이 터지긴 했지만 재빨리 방어자세를 취한 덕분인지 다친 곳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이안이 계속해서 식식대는 데에는 재단 직원이 술값을 내지 않고 갔기 때문에 화가 난 탓도 있을 거라고 도경은 짐작했다. 도경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음을 알았다. 돌아오지 않고 있는 요셉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벨소리는 의자에 걸어둔 요셉의 양복 재킷 주머니에서 울렸다. 요셉의 양복 어깨 위에도 유리 파편이 튀어 있었다. 술에 젖어서 소매 부분이 조금 축축했다. 도경은 의자에서 양복을 벗겨 가볍게 턴 다음 다시 걸쳐놓았다. 떨어져 앉아 각기 침묵하고 있는 이안과 스크립터 사이에서 도경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스크린 속의 오페라 무대를 올려다보는 것뿐이었다.
류가 급정지 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그때였다. 바바리코트 주머니에 두손을 집어넣은 채 류는 입구에 서서 잠시 실내를 둘러보더니 이안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류가 가까이 왔을 때 도경은 밖에 눈이 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류의 검은 머리카락과 바바리코트 깃 위에 남아 있는 흰 눈이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류는 똑바로 걸어와 자연스럽게 이안 가까이에 앉았는데 그 자리는 처음부터 류의 자리로 정해진 곳이었다. 그녀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코트도 벗지 않은 채 맥주를 두잔쯤 마셨고 한차례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이안과 낮은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하는 건 주로 이안이었다. 이안의 말을 듣는 동안 류는 술이 엎질러지고 유리 파편이 흩어져 있는 요셉의 빈자리에 물끄러미 시선을 던졌다. 류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머리카락과 어깨 위의 눈은 사라지고 없었다. 스크립터와 도경에게 사무적인 눈인사를 던진 뒤 카운터 쪽으로 가는 류를 이안이 뒤따라갔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카메라를 들고 나와 뭔가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류는 아무 말 없이 술값을 계산하고는 눈 내리는 골목으로 걸어나갔다.
류가 떠난 뒤 자리로 돌아온 이안은 스크립터에게 그만 마시라고 소리를 질렀다. 냉큼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간 스크립터가 잠시 후 다시 나타났을 때는 묵직해 보이는 커다란 가방 두개를 들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이안은 가벼운 비명을 지르며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까는 몰랐는데 다리를 다친 모양이었다. C의 부축을 받으면서 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술집을 나가는 이안의 축 처진 뒷모습에 비한다면 스크립터는 오히려 명랑하게 걸음을 떼놓고 있었다. 두사람마저 떠나자 혼자 남은 도경은 하는 수 없이 요셉의 양복 재킷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4월에 웬 눈이야. 근데 옷을 갖고 가버리면 선생님이 추울 테고, 눈치가 보여서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진짜 곤란했다구요. 하필 왜 내가 그 자리에 끝까지 있었던 거지? 오분만 기다리려고 했는데, 선생님 정말 딱 오분 뒤에 오시더라? 벌벌 떨면서. 화장실을 어디까지 가셨길래 그렇게 꽁꽁 언 거예요? 말을 멈춘 도경이 요셉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채라는 애랑 같이 갔죠? 아니. 술잔을 입에서 떼며 요셉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선생님 진짜 웃겨. 류? 그 이상한 이름 말예요. 그 여자 만나러 술자리에 간 거잖아요. 새 양복까지 사 입고. 근데 잠시 한눈팔다가 놓쳐버렸어. 맞죠?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요셉의 앞으로 얼굴을 바짝 가져가며 도경이 고자질하듯 덧붙였다. 그 여자는 선생님 만날 생각 없나봐요. 이안 감독이 선생님 화장실 갔다, 저게 선생님 양복이다, 몇번이나 말했거든요. 근데 잘 듣지도 않던데요? 역시 못된 여자야. 그 여자 잊어요, 선생님.
요셉은 쏟아지는 눈발 속으로 사라지던 류의 뒷모습을 생각하고 있었다. 추운 계절에는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바바리코트를 입은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첫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채와 다시 만날 약속을 하고 급정지 스튜디오로 급히 돌아가던 요셉은 골목 어귀에서 갑자기 걸음을 늦췄다. 앞서 걸어가는 긴 머리 여자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그것이 류라는 걸 알았던 것이다. 류가 술집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이제야말로 화장실에 들어간 요셉은 오줌을 눈 뒤 세면대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어깨 위의 눈을 천천히 떨어내고 이마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을 넘겨올려 정수리의 빈 곳을 가렸다. 그러나 문을 열고 나가려던 요셉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거울 앞으로 돌아와 다시 한번 자신을 바라보았다. 십년 전의 자신이 되어 십년 뒤의 자신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거울 속의 남자는 자신이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화장실을 나온 요셉은 계단의 어둠속에 서서 오들오들 떨며 시간을 보냈다. 얼마 뒤 류가 다시 급정지 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나왔다. 류가 쏟아지는 눈발을 뚫고 골목 저편으로 사라져갈 때 몇번인가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려 했지만 요셉의 몸은 점점 얼어붙어갈 뿐이었다.
담배 없지? 요셉의 말에 도경이 전화기를 가리켰다. 시킬까요? 됐어. 요셉은 술잔을 들어 맥주를 마셨다. 선생님, 화장실 갈 때 이안 감독한테 뭐라고 한 거예요? 약올라 죽던데. 내 마누라하고 잔 거 다 안다고 그랬지. 진짜? 그게 진짜겠어? 그렇구나. 고개를 몇번 끄덕인 다음 도경이 다시 물었다. 이안 감독 영화는 끝난 거야, 그죠? 왜? 뻔하지 뭐. 사람이 병원에 실려갔는데. 그 여직원 있잖아요. 뭐가 그렇게 급한지 나가다가 넘어지기까지 했다니까. 팬티가 다 보였어. 자주색이던가? 요셉이 물었다. 도경이 킥킥 웃었다. 아무튼 난 오늘 싸움구경하고 뮤직비디오도 실컷 봤네. 그 오페라 제목이 뭐예요? 나쁜 남자와 뻔뻔스러운 여자 이야기. 진짜? 재밌겠다. 무슨 이야긴데요? 요셉은 그 여름 류가 식탁에 앉아 턱을 괸 채 조용히 부르던 아리아를 떠올리며 도경에게 오페라의 줄거리를 들려주었다. 전설시대의 아름다운 중국 공주는 남성혐오론자이다. 청혼자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서 맞히면 결혼해주지만 맞히지 못하면 죽이는 게임을 벌인다. 수많은 왕자들이 목숨을 잃는다. 자기 나라에서 쫓겨나 떠돌던 한 왕자도 공주를 본 순간 사랑에 빠져 수수께끼에 도전한다. 병든 아버지와 자신을 사랑하는 노비가 간곡히 말리지만 왕자는 이기적이고 나쁜 남자라서 막무가내다. 다행히 왕자는 공주가 낸 세개의 수수께끼를 맞힌다. 그러나 공주는 이름조차 모르는 남자와 결혼할 수는 없다고 뻗댄다. 이번에는 왕자가 자신의 이름을 수수께끼로 내건다. 공주가 자신의 이름을 맞히면 죽임을 당해도 좋지만 못 맞히면 자신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주는 인질로 삼은 노비를 끌고 나와 왕자의 이름을 불라고 심문한다. 노비는 사랑하는 나쁜 남자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노비의 사랑을 목격한 공주는 마음이 약해지고 그 틈을 이용해 나쁜 남자는 무작정 공주에게 달려들어 키스를 한다. 그리고 거기 넘어간 공주는 뻔뻔스럽게 왕자의 이름이 바로 사랑이었다고 노래 부르는 것이다. 요셉은 이 세상에 사랑을 이루는 건 나쁜 남자와 뻔뻔한 여자들뿐이라는 말로 이야기를 끝맺었다. 도경이 말했다. 선생님이 나한테 뭘 이렇게 자세히 말하는 거 처음 봐. 음악 좋아하셨구나. 인도 식당에 가서 인도 유행가를 주로 듣지. 요셉이 대꾸했다. 집에 오디오가 없어서 말야. 요셉의 말은 오디오가 포함된 집을 아내가 독차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선물할게요. 도경이 대뜸 대꾸했다. 요셉이 도경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넌, 왜 나한테 잘해주는 거냐? 귀찮게. 왜요? 도경이 생글거렸다. 내가 유부녀잖아. 잘해줘봤자 선생님은 두번째인데, 성의를 보여야죠. 그제서야 양복 재킷을 벗는 요셉을 바라보며 도경이 말을 이었다. 선생님 아까 진짜 불쌍하더라. 겉옷 걸치고 나서도 막 떨고. 술집 나오자마자 따뜻한 방부터 찾았잖아. 근데 선생님. 도경이 속눈썹을 깜박거렸다. 선생님은 누구한테 잘해주실 거예요? 무슨 말이야? 두번째가 누구냐구요. 요셉의 머리에 이채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직도 기다리고 있진 않을 것이다. 급정지 스튜디오로 돌아간 요셉이 도경에게서 양복 재킷을 받아들 때 정연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너 올 때까지 가게 안 닫으니까 알아서 해! 요셉을 의식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게 틀림없었다. 요셉은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녹으면서 온몸이 나른해지고 만사가 귀찮았다. 도경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한번 물어본 거야, 선생님. 난 상관없어. 나 별생각 없이 살잖아요. 근데 오페라 좀 멋진 것 같아. 그거 가르쳐주는 학원도 있을까? 난 배우는 게 좋아요. 누굴 따라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잖아. 요셉이 고개를 들어 도경을 흘끗 보았다. 그의 입에서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시계 좀 그만 봐. 지겹다. 난 앞으로 까치한테나 잘할 생각이야. 그리고 그 다음 말은 입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그래. 따분할 것도, 아득할 것도, 너절할 것도, 허전할 것도 없다.3)
3. 요셉의 노래
침향은 따뜻한 기운과 깊은 향기를 갖고 있는 약재이다. 한 시인에 따르면 침향을 만들기 위해 옛사람들은 골짜기에서 내려온 물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참나무 토막을 수백년 동안 담가놓았다고 한다. 삼백년은 지나야 향기가 나기 시작하고 천년쯤 잠긴 것은 냄새가 더욱 좋다. 사춘기 때 처음 그 시를 읽고 요셉은 몇가지 질문에 사로잡혔다. 천년 뒤에나 쓸 수 있는, 그러니까 천년 뒤에 태어날 누군지 모르는 사람을 위해 뭔가를 만드는 일. 대체 거기에는 어떤 상상력과 허무의 스케일이 들어 있는 것일까. 그 스케일이 얼마만해야 낙관이 되는 것일까. 욕망이 사라진 곳에 스케일이 생겨나는 것일까. 그때까지 요셉이 알던 세계는, 두개의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했고 그것이 자신의 인생이 되었다고 말하는, 교과서에 나오는 시 정도였다. 침향의 세계는 분명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그러나 요셉이 대답을 찾기에는 너무나 아득하고 모호한 세계이기도 했다. 십년 전 류가 말없이 S시를 떠나버린 뒤 사실 요셉은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다.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 스키장이 있는 콘도미니엄에 묵고 있던 때였다. 3월이라서 폐장을 앞둔 스키장은 한산했다. 스키하우스의 상가도 문을 닫은 곳이 많았다. 요셉은 산책 삼아 숲길을 걸어올라가서 그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호텔의 라운지 바에서 커피를 마시곤 했다.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 호텔은 알프스 샬레 풍의 목조건물이었는데 그쪽 어느 나라의 건축가가 설계한 것이었다. 라운지 바의 천장과 벽은 모두 통나무였고 구석에서는 벽난로가 타고 있었다. 특히 군데군데 커다란 새장이 매달려 있어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더라도 조용한 클래식 연주음악 사이로 언제나 새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값이 비싼데다 교통이 몹시 불편한 곳이었고 손님은 많지 않았다. 요셉이 콘도미니엄에 머무는 보름 동안 두차례 여자 손님이 찾아왔다. 요셉은 손님들을 그곳으로 데려가서 한 여자와는 커피를 마셨고 눈 오는 날 찾아온 또다른 여자와는 맥주를 마셨다. 류와 마주친 것은 두번째의 여자 손님과 맥주를 마시던 날이었다. 밤이 깊었고 술도 적당히 올랐으므로 그만 방으로 함께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요셉은 무심히 실내를 둘러보았다. 조도 낮은 부분조명 아래에서 종업원 몇이 조용한 움직임으로 문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실내 공기는 따뜻하고 나른했다. 모차르트의 플룻 곡이 흐르고 있었고 작게 틀어놓은 물 소리와 접시를 포개놓는 조심스러운 마찰음 사이로 드문드문 나지막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은 건너편 자리에 혼자 앉아 있는 여자뿐이었다. 그녀는 흰 이마와 반듯한 콧날 아래 흐르는 듯한 부드러운 입술의 씰루엣을 보인 채 조용히 웨이트리스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셉은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탁자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그 모습은 틀림없이 류였다. 류가 바라보는 웨이트리스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에이프런 아래 납작한 메리제인 슈즈를 신은 가냘픈 소녀였다. 손에는 검은색 보자기를 들고 있었다. 소녀는 발소리를 죽이며 붉은 카펫 위에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새장 앞에 멈춰선 뒤 거기에 조심스럽게 검은 보자기를 씌우는 것이었다. 새들을 잠재우는 시각이었다. 라운지 바에 있는 여러개의 새장을 하나씩 돌아다니며 소녀는 똑같은 동작으로 보자기를 씌웠다. 마치 미사가 끝난 뒤 긴 옷자락을 끌며 제단의 촛불을 끄고 다니는 수녀처럼 어두움과 침묵으로 실내를 장악했다. 류는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요셉은 여자를 데리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이힐을 신었던 그 여자를 데리고 눈길에 어떻게 콘도미니엄의 방까지 내려갔는지 기억조차 없었다. 여자에게 무슨 핑계를 대고 혼자 다시 밖으로 나왔는지도 역시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면서 눈발이 굵어져 있었다. 점점 무서운 기세로 퍼붓기 시작했다. 바람도 매서웠다. 요셉은 눈보라 속을 미친 듯이 뛰었다. 내리는 눈 속에서 오르막길을 헤쳐가기가 쉽지 않았다. 차가운 눈송이가 얼굴을 덮치고 시야를 가로막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몇번인가 넘어져 굴렀다. 그때마다 온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며 요셉은 수없이 중얼거렸다. 기다려줘, 류. 내가 가고 있어. 기다려줘. 뜨거웠던 그해 여름. 온 나라가 폭염으로 달구어져 들끓던 계절. 우리는 뜨거운 진흙탕에라도 빠진 듯 이불 속에서 얽혀 허우적거렸고 몸속의 마지막 땀까지 흘리며 사랑을 나눴지. 우리는 세상의 버린 자식이 되기를 기도했었어. 기다려, 류. 내가 가고 있어. 눈물인지 콧물인지 모를 뜨거운 것들이 뒤범벅된 채 얼어붙어 얼굴이 빳빳해진 요셉이 마침내 폭설을 뚫고 호텔 앞에 당도했을 때에 거짓말처럼 눈이 그쳤다. 냉기로 수축된 검은 하늘과 숲 사이로 희끗희끗한 눈발 몇개가 기운없이 흩날릴 뿐이었다. 요셉은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호텔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불빛과 눈이 그친 밤 숲의 정적이 요셉을 감쌌다. 짧은 순간 요셉은 알 수 없는 날카로운 슬픔에 사로잡혔다. 거기에는 까마득한 허공에 던져진 듯한, 역시 정체를 알 수 없는 완강한 고독과 두려움 같은 것이 있었다. 요셉은 불현듯 자신이 어떤 문 앞에 서 있으며 그 문을 열면 거기에는 원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 너머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 요셉의 눈앞에 검은 보자기를 씌워주고 있었다. 류가 바라보던 새장 속의 새가 그랬듯이 요셉은 자신의 눈앞으로 어두운 막이 내려지는 걸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는 몸을 돌려 자신이 눈보라를 뚫고 울며 달려온 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 길을 걸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다음날 후회에 빠진 요셉은 여자 손님이 떠나자마자 다시 호텔을 찾았다. 호텔 규칙상 투숙객 이름을 확인해줄 수 없다는 말에 하릴없이 라운지 바를 둘러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후 사흘 동안 매일 라운지 바에 올라가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격렬한 갈망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가 없었다. 갈망을 납득한다면 분열과 도망침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단지 비겁했기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분명한 것은 그때 라운지 바에서 커피를 마시는 동안 머릿속에 침향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는 거였다. 천년 뒤의 모르는 사람을 위해 침향을 만드는 허무와 낙관의 스케일이 그때의 요셉에게는 욕망의 서사로 다가왔던 것이다. 요셉은 그 콘도미니엄에서 장편소설을 탈고했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읽히지 않았다. 그나마 가장 호의적인 평가는 ‘믿을 만한 작가가 쓸 만한 작품이 아니다’였다. 요셉은 분노했다. 믿을 만한 작가라면 못 쓴 것이 아니라 안 쓴 것이다. 안 쓴 것을 보고 그 작가를 믿지 않게 되었다면 그가 그동안 믿은 것은 무엇인가. 요셉은 낡은 형판으로 상투적인 본을 찍어내는 패턴이라는 권력에 신물이 났다. 그것을 집행하는 자들은 외과의사처럼 누군가 메스와 소독가위를 건네주면 그것으로 환부를 잘라낼 뿐 고통의 고유성에는 관심이 없다. 요셉은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가 존엄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개인의 고유함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고유함이 없다면 인간은 시간이 되면 꺼지는 기계처럼 패턴에 의해 소비될 뿐이다. 패턴에는 매혹이 없었다. 타인이 지겨운 것은 관계를 맺기 위해 그런 패턴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환멸에는 그나마 고독이 위로가 되었다. 환멸을 완성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염증이었다. 요셉은 검은 보자기로 덮인 어둠속에서는 노래할 수가 없었다.
4. 류의 노래
아주 오래전 어느 봄날 류의 아버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공중전화부스의 유리에 기댄 채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녀의 눈빛과 입술과 상기된 표정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순간 그녀의 얼굴로 웃음이 퍼져나갔을 때 봄 햇살이 비쳐든 듯 전화부스 안이 환해지면서 엄청난 볼티지의 전율이 아버지의 심장을 강타했다. 류의 아버지는 즉시 사랑에 빠졌다. 몽유병자처럼 비틀거리며 장님처럼 맹목으로 그녀에게 달려갔고 그녀로 하여금 사귀던 남자를 버리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류의 어머니는 애인을 배신하고 류의 아버지와 결혼했다. 그리고 결혼생활 내내 고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류는 어머니의 이혼과 그리고 재혼이 고독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녀다운 이지적인 독립심으로 고독의 침전물 속에서 자유로움과 평화를 찾아냈고 그 범주 안에서 인생을 꾸리는 데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복수심 때문도 아니었다. 함께 사는 동안에도 품위있고 차가운 방식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아버지를 제외시켜왔던 것이다. 복수라면 아버지를 고독하게 만든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 복수는 아버지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을 고독으로 이끈 매혹의 세계에 복수한 것이었다. 류의 아버지가 사랑에 빠진 것은 다른 남자와 통화하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를 어머니에게로 이끌었던 매혹은 처음부터 배신 속에서 잉태되었다. 어머니는 그 매혹을 고독으로 환산함으로써 운명에게 갚아준 것이었다.
이혼한 다음해에 한국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계속 혼자 살았다. 몇가지 안되는 아버지의 유품은 그때의 시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류는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누구나 느끼는 충동이고 아버지의 경우 격정이나 취기에 떠밀려 행동에 옮겨볼 수는 있었겠지만 운명의 도움 없이는 성공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운명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잇는 고통과 고독의 서사가 끝나기를 원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세계의 이데올로기에 성실했던 어머니가 적국에 부역하는 포로였다면 아버지는 남의 나라에 태어난 소년이었다. 그 나라는 지속될 수 없는 매혹을 갈망하도록 운명 지워진 사람들이 태어나는 낯선 상실의 세계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류는 한국에 정착했다. 정해진 인턴 기간을 마치고 떠날 계획이었던 외국 문화원의 정식 직원이 되었다. 그때의 류는 아버지의 죽음을 대하는 어머니의 냉담에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어머니와의 단절인지 아버지를 향한 회복인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요셉을 만나게 되었을 때 류는 그에게서 아버지와 어머니 둘 다를 보았다. 그는 무책임한 욕망에서 에너지를 얻는 한편 세상과도 잘 타협했다. 류가 설명할 수 없는 친연의 감정으로 강하게 요셉에게 이끌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요셉은 부모의 나라에 이방인으로 온 류에게 첫번째로 사랑을 고백해온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 너머 굴뚝에서 뿜어져나오는 검은 연기를 바라보며 깊이 오열하던 류가 눈물을 멈췄을 때 요셉은 불현듯 옆에 서 있었다.
요셉과 함께 S시로 떠나는 비행기 안의 류는 격정에 휩싸여 있었다. 문화원은 본국의 기념일에 맞춰 일주일의 휴무에 들어갔는데 그 기간이 끝나더라도 돌아가지 않을지도 몰랐다. 세상 끝까지 가보자는 요셉의 약속은 류에게 축제의 해방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요셉은 매혹된 자의 맹목으로 류를 자주 행복의 충동 속으로 빠뜨렸다. 젊은 예술가의 재능과 열정을 동원하여 발길이 닿는 곳 어디에서든 사랑에 빠진 자들만의 완벽한 독립기지를 건설해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서사를 통과한 류는 순진한 연인은 아니었다. 요셉의 궁극적 욕망이 자신의 내부를 향한 것이며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소설이라는 개인적 성취를 위해 소진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비행기의 창가 자리에 앉은 류는 이륙을 기다리는 활주로의 비행기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류는 늘 혼자서 여행했다. 마지막으로 함께 여행했던 사람은 대학시절의 연인이었던 K였다. 그는 류와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 류의 스튜디오에서 류의 여자 친구와 키스했고 그녀의 귀걸이를 셔츠 주머니에 넣은 채 류와 함께 비행기를 탔다. K와는 소식이 끊어진 지 오래였다. 그 이후로 류에게는 두명의 연인이 있었다. 한국으로 오면서 모두와 헤어졌다. 비행기 동체가 약간 흔들리는 느낌과 함께 택싱을 알리는 스튜어디스의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안전벨트를 매기 위해서 고리를 찾던 류는 흠칫 놀랐다. 옆자리의 요셉이 팔을 뻗어 버클을 채워주었을 때 그 소리가 지나치게 크고 차갑게 류의 귓속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철컥, 하는 소리는 오래전 봄날, 가족 피크닉을 떠나는 렌터카 안에서 정해진 자리에 어머니를 묶었던 그 안전벨트 소리와 비슷했다. 버클이 채워진 뒤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이 마주친 짧은 순간의 들리지 않는 총성을 신호로 그들은 점점 서로에게서 멀어졌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류는 자신도 모르게 오른손을 들어 왼쪽 가슴에 갖다댔다. 어두운 극장 안의 어머니와 똑같은 자세였다.
비행기가 이륙하면서 등받이와 함께 류의 몸이 뒤로 비스듬히 젖혀졌다.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류는 고개를 돌려 옆자리의 요셉을 바라보았다. 감고 있던 눈을 뜨면서 요셉이 류를 향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다정한 웃음은 류를 슬프게 만들었다. 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가는 세상의 끝은 S시가 아니었다. 열정이 끝나는 지점이었다. 매혹은 지속되지 않으며 열정에는 일정한 분량이 있다. 그 한시성이 그들을 더욱 열렬하게 만든 것이었다. 류는 그들에게 주어진 매혹과 열정의 시간이 끝나버리는 날 자신이 혼자 비행기에 실려 돌아오리라는 걸 예감했다. 요셉과 다른 점은 그것이었다. 둘 다 뜨거웠지만 류는 요셉과 달리 자신을 속이지 못했다. 매혹이 사라진 이후의 사랑은 어머니처럼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류는 자기기만의 부역보다는 상실을 택했다. 고통보다는 고독을 택한 것이다. 그것을 요셉에게 납득시키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조의를 표하듯 왼쪽 가슴 위에 올려놓았던 팔을 요셉에게로 뻗어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만지는 류의 표정에는 슬픔과 갈망이 깃들어 있었다. 그 여름 S시를 혼자 떠나올 때 류는 울었지만 요셉과의 관계에서 마지막 한걸음을 남겨놓고 되돌아와버린 것에 대해 후회하진 않았다.
부모가 이혼한 얼마 뒤 류는 아버지가 집을 떠나면서 챙겨가지 못한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모두 차고 한쪽에 버려지다시피 처박힌 것들이었다. 클래식음악 씨디 몇장과 녹슨 릴 낚싯대와 목공용 마스크와 록 클라이밍 신발 등 아버지가 한때 몰두하다 이내 잊어버렸던 여러가지 관심사의 흔적들, 혹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잡동사니들뿐이었다. 오래된 책과 중요하지 않은 우편물, 청구서, 연주회 티켓도 함께 굴러다녔다. 류는 그 안에서 사적인 편지 두세장을 가려냈다. 수신인이 어머니로 돼 있었으나 부치지 않은 기념엽서도 한장 있었다. 류는 첫 문장을 읽어보았다. ‘내가 잠시 길을 잃지 않았다면 아름다운 그 꽃을 발견하지 못했겠지.’ 류가 그 구절을 다시 기억한 것은 아버지 유품을 정리할 때였다. 몇가지 서류에서 아버지의 글씨를 보다가 불현듯 그 엽서를 떠올렸다. 장례식을 마친 뒤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여서인지 류는 그것이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하고 싶었던 작별인사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잠시 길을 잃었던 오래전 그날을 마음에 간직한 채 죽음을 맞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어머니는 비행기처럼 기류를 따라 자유롭게 흘러가라는 뜻으로 류의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오페라 속 여인의 이름을 따서 류에게 붙였다. 그 오페라에서 노래 부르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류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살아오는 동안 류를 고통스럽게 했던 수많은 증오와 경멸과 피로와 욕망 속을 통과한 것은 어머니의 흐름에 몸을 실어서였지만 류가 고독을 견디도록 도와준 것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삶에 남아 있는 매혹이었다. 고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적요로운 평화를 주었다. 애써 고독하지 않으려고 할 때의 고립감이 견디기 힘들 뿐이었다.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 속에 류의 삶은 흘러갔다. 류는 어둠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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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성호의 시.
** 밀란 쿤데라 『정체성』 중.
*** 서정주 「침향」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