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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요람에서 납골당까지, 세상의 거의 모든 이야기
윤성희 소설집 『웃는 동안』
양윤의 梁允禕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빠져나가는 것」 등이 있음. quixote78@daum.net
윤성희(尹成姬)의 소설은 사건의 요람(crib)이다. 그 사건이 간략한 이야기로 요약할 수 없는 숱한 의문을 남긴다는 점에서, 또한 윤성희의 소설은 진실을 수납해둔 납골당(crypt)이기도 하다. 『웃는 동안』(문학과지성사 2011)에 모은 10편의 이야기들은 누군가의 죽음(‘나’ 자신을 포함한) ‘이후’의 이야기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예기치 못한 슬픔과 당혹스러운 사건들은 삶이 예측 가능한 범위를 초과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야기마다 가족의 죽음, 연인과의 이별,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 다른 삶으로의 유배와 같은 사실적, 상징적인 죽음의 계기가 숨어 있다.
「눈사람」에서 시작하자. 이웃의 금고(crib)를 훔쳐서 돈을 모은 금고털이범(금고장수)의 이야기다. 그는 훔친 돈으로 자식을 키웠지만(금고는 아이의 요람이 되었다), 장물을 곧바로 내다팔 수 없어서 평생 가난하게 살다가, 죽어서는 유령이 되어 지하실(crypt)에 갇혀 지내게 된다. 이 금고형(禁錮刑)의 의미를 ‘뿌린 대로 거둔다’로 간추리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비밀은 죽어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다. 사소해 보이지만 누설되는 순간 돌이킬 수 없게 만드는 것, 즉 우연의 의미들이 그 비밀이다. 살아생전에 그것들을 알았더라면, ‘십년감수, 악몽, 발자국, 재채기’ 같은 말에 일희일비하거나 부화뇌동하지 않으며 살았을까? ‘평생’과 같은 말들이 언젠가는 영영 사라지고 말 헛된 단어라는 걸 알고 약속 같은 것을 하지 않으며 살았을까? 죽고 나면 “영원히 체하지도 않을 것”(155면)을 알았다면, 누군가에게 던진 말이나 누군가가 나에게 던진 말에 ‘명치에 걸리듯’이 상처받지 않고 살 수 있었을까? 유령들은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반추하고 회상하는 존재다. 죽었기에 그들은 이전의 사건들을 되돌릴 수 없다. 삶은 요람에 눕혀져 있지만, 실제로 그 요람은 납골당이었던 것이다. 유령들은 “썩어가는 내 얼굴을 바라보”(156면)고, 외로움을 견뎌야 하고(「어쩌면」), 울기도 한다( 「웃는 동안」).
유령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은 산 자들에게는 우연의 형상으로 남아 있다. 소화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아담의 목에 걸린 사과와도 같다. 「부메랑」의 인물들은 ‘소화불량’을 앓거나 ‘급체’를 해서 먹은 것을 모두 토한다. 어떤 경우에는 말〔言〕들이 그렇게 목에 걸려 있기도 하다. 「부메랑」에서 ‘그녀’는 돈을 꾸러 온 친구에게 던진 모욕적인 언사(“기미나 수술해라. 얼굴이 그게 뭐냐”)를 고스란히 되돌려받는다. 마음의 소리를 목구멍으로 꿀꺽 넘기는 순간(“치사하게 사는 게 더 나을까요, 비겁하게 사는 게 더 나을까요?”, 「소년은 담 위를 거닐고」), 타인의 의도를 내 마음대로 해석하는 순간(“이만. 나는 그것을 미안이라고 읽었다”, 「구름판」), 그리고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채 아버지를 지하실에 숨겨두는 순간(「눈사람」)까지. 소화되지 못한 것들이 걸려 있다가 때로 역류한다. 도처에서.
대차대조표의 작성을 다 끝낸 납골당 앞에서 봉인된 것들을 다시 토해내는 이유가 무엇일까. 한 시절의 사라짐(늙음) 혹은 한 인물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데리다(J. Derrida)는 타자가 자아의 내부에 위치한 일종의 지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고 말한다. 자아가 자신의 내부에 합법적인 묘소를 마련함으로써 타자의 시신을 안치하고 이를 통해 이미 상실된 타자의 죽음 이후의 삶을 계속 유지시키며, 나아가 자신의 동일성을 타자가 죽은 이후의 삶과의 동일성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7). 애도는 타자를 납골당 안에 안치함으로써 타자와의 사후적인 삶을 지속하는 일이다. 타자는 애도의 순간마다 불려나와 현재 삶과의 연결을 지속하게 한다. 납골당은 요람으로 변하며, 우리는 이 끊임없는 소환에 응답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삼켜왔던 말들, 시간들, 존재들을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 다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연이라고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미처 소화하지 못한 사건과 의미가 아닐까. 곧 타자와의 조우 그 자체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우연이란 한 인간이 태어나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부메랑」)이다. 그것은 ‘바깥’에서 온 것들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구름판」) 것들, 알 수 없는 장면들, 짐작할 수 없는 타인의 의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피식 웃음이 나는 것처럼 우연한 일로 가시화되지만, “지구 반대편”(「웃는 동안」)을 돌아오는, 그리하여 내가 너에게 힘겹게 건너가는 노동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죽은 자는 산 자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준다. 우연으로 점철된 삶에 대해서. 그렇다면 올바른 삶이 아니라 놀라운 삶을 알려주는 저 우연이라는 선생님은 또 얼마나 멋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