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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츠쯔젠 『어얼구나 강의 오른쪽』, 들녘 2011
소수민족에 대한 시선의 현재성
성근제 成謹濟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HK연구교수 geunje@empas.com
2008년 중국의 가장 저명한 문학상 가운데 하나인 마오둔문학상 수상작인 츠쯔젠(遲子建)의 『어얼구나 강의 오른쪽』(額爾古納河右岸, 김윤진 옮김)이 국내에 소개되었다. 1964년 헤이룽장(黑龍江) 모허 출생인 작가는 중국의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인 어웡키(Ewenki, 중국어로는 鄂溫克로 쓰고 ‘어원커’로 읽음)족 마지막 샤먼의 구술을 토대로, 그의 부족이 겪은 파란만장한 100년의 근대사를 한편의 드라마로 엮어내고 있다.
중국의 어웡키족은 중국과 러시아의 경계지역인 헤이룽장성 어얼구나 강(러시아어로는 아르군Argun 강)의 동쪽 대흥안령 산맥의 깊은 산속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이다. 어웡키족을 판별하는 기준은 시기에 따라 달라져왔지만 대체적로는 어룬춘(Orochon/Oroqen, 鄂倫春)이나 다구르(Dagur, 達斡爾)와 함께 (몽골족과는 약간 계열을 달리하는) 퉁구스 계열에 속하는 민족이며, 거란의 후예로 추정된다. 유목생활을 하지만 초원에서 양을 치는 기마민족인 몽골족이나 여진족(만주족)과는 달리 산속에서 순록을 치고 사냥을 하며 생활해왔다. 현재 어웡키로 분류되는 인구는 3만 정도(2000년 조사 기준)에 불과할 정도로 극소수민족이지만, 그나마도 적잖은 수는 한족과의 잡거(雜居)지역에 정착하게 되면서,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 상당정도 한화(漢化)되어 있는 실정이다.
이로부터 대략 감을 잡을 수 있듯이 어웡키족의 근대사는 수난과 질곡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부족공동체와 그 문화는 목하 해체와 소멸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청제국의 수립, 러시아의 동진, 그 결과로서의 네르친스끄 조약의 체결, 일제의 만주 진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혁명기의 다양한 정치운동과 소수민족 정책의 변화…… 이 각각의 사건들이 어웡키족의 삶 속으로 끊임없이 개입해올 때마다 이들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생활공간은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이들의 거주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태어난 작가는 한족이지만 어려서부터 이들의 존재와 문화를 의식하고 경험하면서 성장했다. 아마도 그것은 이 작품의 밑바탕에 이 소수민족의 삶과 정신세계에 대한 따뜻하고 애틋한 시선이 깔릴 수 있게 만든 가장 중요한 원천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작가는 이러한 이해심 깊은 시선으로 이 부족의 마지막 샤먼인 주인공 ‘나’의 이야기를 서술해내고 있다. 때문에 이 작품은 매우 낯선 문명과 문화의 세계로 독자를 자연스럽게 이끌어가는 매력을 지닌다. 또한 이야기의 재미와 함께 현대문명에 대한 잔잔한 반성적 사색의 기회를 주기도 하는,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옮긴이의 애정과 노력을 엿볼 수 있기에 충분한 깔끔하고 전달력있는 문체 역시 한국의 독자들로 하여금 이 낯선 세계에 편안히 다가설 수 있게 만드는 윤활유가 되어준다. 한마디로 일독을 권할 만한 괜찮은 번역소설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세상 이치가 대개 그러하듯, 이 작품의 중요한 미덕 가운데 하나인 낯선 문명에 대한 ‘따뜻하고 애틋한 시선’은 다른 한편으로는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한계와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 ‘따뜻하고 애틋한 시선’이 지닌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텍스트 밖으로 나와 이 작품을 오늘날 중국사회 내부의 소수민족 담론이라는 컨텍스트에서 다시 조망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최근 몇년 사이 ‘소수민족’과 ‘변방’이 중국의 담론계와 출판계에서 나름 꽤 나가는 물건 가운데 하나로 부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내 소개되어 있는 아라이(阿來)의 『색에 물들다』(제5회 마오둔문학상 수상작이자 작가의 대표작) 『소년은 자란다』, 장룽(姜戎)의 『늑대토템』 등도 이러한 경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이 일련의 소수민족 관련 작품들이 매우 농후한 신비주의적·이상주의적 경향을 공통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들 속에서 소수민족은 매우 원시적이고 이국적이면서도 동시에 고귀하고 순수하며, 신비한(마법적인) 존재로 재현된다. 『어얼구나 강의 오른쪽』 역시 다르지 않다.
소수민족에 대한 이러한 시선은 분명 전통적인 화이론적 관점에 비해서는 한걸음 진전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더이상 그들을 부정적 교화의 대상인 ‘야만’이나 ‘오랑캐’로 재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夷)를 표상하는 방식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평자는 소수민족에 대한 신비주의적 이상화 역시 화이론의 교묘한 변형태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세밀한 논의가 필요한 문제지만 지면관계상 간략하게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이 작품들 속에서 소수민족의 삶과 문화가 여전히 이성과 역사 바깥의 존재로만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의 ‘연대기’를 서술하는 경우에도 그 문화와 정신은 이른바 ‘근대사’의 타자로서만 재현될 뿐이다.
이처럼 역사적 현재성이 탈각된 서사는 아주 손쉽게 소수민족의 문화와 역사를 박제화·박물화한다. 그리고 이것은 (엄격한 의미에서 본다면) 소통이나 대화라기보다 ‘소비’에 더 가깝다. 때문에 이 작품에서 한국의 소설가는 자신이 떠나온 고향을 발견했고, 인민일보의 서평자는 인류의 정신적 고결함을 발견하기도 했으며, 또 중국작가는 가장 인간적인 체온을 감지해낼 수 있었다는 고백으로 추천의 말을 대신하고 있지만, 어떤 독자라 하더라도 이 작품을 통해 어웡키의 현재와 그들의 중국 근대사에 대한 역사적 문제의식에 다가서기는 쉽지가 않아 보인다. 아마도 독자들의 한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평자는 다만 어웡키에게 바쳐진 작가의 이 애틋하고 아름다운 만가(輓歌)가 현실에서는 여전히 자신들의 역사와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어웡키의 소멸과 도태를 (가슴 아프지만) 불가피한 것으로 승인하고 기정사실화하기 위한 거대한 쎄리모니의 일부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