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소설

 

 

4356

조우리 趙羽利

중앙대 국어국문학과 4. 1987년생.

wearewol@naver.com

 

 

 

개 다섯마리의 밤

 

 

사람들은 들떠 있었다. 대화를 나누기는커녕 숨소리를 크게 내는 사람조차 없어 버스 안은 조용했지만, 지유는 버스에 오르는 순간 모두가 상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창밖도 시계도 보지 않는 사람들. 조바심도 초조함도 없는 사람들. 멈춰 있는 버스 안에서도 벌써 저 멀리로 달려가고 있는 사람들. 지유는 그 사이를 지나 버스의 맨 뒷자리까지 갔다. 마흔다섯개의 좌석에 빈자리는 없었다.

밖에서 담배를 피우던 운전기사가 통로에서 서성이는 지유를 보고 버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이미 피로해 보였다. 지유는 그의 구겨진 셔츠와 뻗친 뒷머리를 보았다. 늦은 오후에 출발해서 새벽에 도착하는 밤길운전은 운전대를 잡기도 전에 그를 지치게 하고 있었다. 그에게 이 버스 안의 사람들은 어떻게 보일까.

운전기사는 지유를 흘낏 보고 버스 안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지유에게 눈을 돌렸다. 지유와 그의 시선이 잠깐 엇갈렸다. 그는 짧은 한숨을 쉬고 운전석 뒤쪽에 두자리를 차지하며 쌓여 있는 상자들을 통로 쪽 한자리로 몰아주었다. 지유는 상자 옆자리에 몸을 끼워넣듯이 앉았다. 상자에서는 식은 기름 냄새가 났다. 음식이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버스 앞바퀴의 바로 위라 바닥이 툭 불거져 있었다. 무릎을 세워 앉으니 발목에 힘이 들어갔다. 지유는 멀미를 하지 않는 체질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의자에 최대한 깊숙이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앞에는 운전석, 왼쪽엔 커튼이 쳐진 창, 오른쪽엔 켜켜이 쌓인 상자. 사방이 단단했다. 지유는 슬쩍 커튼을 열어 밖을 보았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 길어진 여름해가 느리게 기울어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버스가 출발할 것이다. 시동이 걸려 있어 미세하게 진동이 느껴졌다. 몸을 조금씩 웅크리자 어느순간 등이 의자에 꼭 들어맞았다. 오목한 그릇에 담긴 갓 지은 밥처럼, 아늑한 느낌이었다. 잠이 왔다.

 

지유가 잠에서 깼을 때, 버스는 휴게소에 멈춰 있었다. 간이화장실과 주유소, 편의점이 전부인 작은 휴게소가 창밖으로 보였다. 간판불이 모두 꺼져 있어 을씨년스러웠다. 지유는 문득 폐허가 된 마을이 배경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 영화를 보면서 사람이 만든 공간은 사람이 없으면 얼마나 쓸쓸해지는지에 대해 생각했었다. 산이나 바다는 저 혼자서도 푸른데 왜 도시는 천천히 퇴색하는지.

드실래요?

지유의 앞으로 불쑥 손이 나타났다. 젊은 남자가 햄버거와 콜라를 내밀었다.

괜찮아요.

남자는 지유 옆자리의 상자를 풀어 그 속의 햄버거를 버스 안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 밑의 상자에는 콜라가, 또 그 밑의 상자에는 크림빵이 들어 있었다.

빵도 있어요.

괜찮아요.

배고프지 않으세요?

혹시 물 있나요?

남자가 건너편 자리에 쌓여 있는 상자들을 헤집어 생수병을 찾아냈다. 상자들 사이로 겨우 한사람이 끼어앉을 수 있는 자리가 보였다. 거기가 저 남자의 자리라는 걸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고마워요.

 

햄버거와 콜라를 받은 사람들이 차례차례 버스 밖으로 나갔다. 지유도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은 주차장 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햄버거를 먹기 시작했다. 어쩐지 그 모습이 피난을 떠나는 행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비참함보다는 비장함이 서려 있어 마치 고행의 길을 가고 있는 수도자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주차장에는 지유와 사람들이 타고 온 버스뿐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버스를 볼 수 있는 위치와 거리를 유지하며 조금씩 떨어져 앉아 있었다. 지유도 적당한 자리를 찾아 바닥에 앉았다. 운전기사가 버스 옆에 길게 누워 있었다. 잠깐이라도 온몸을 곧게 펴고 싶은 그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버스에서 내내 굽히고 있던 무릎을 펴자 종아리가 저릿저릿했다.

남자는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햄버거를 더 가져다주기도 하고 말을 걸기도 하면서 바쁘게 움직였다. 이 버스를 인솔하는 사람인 듯했다. 남자는 따로 떨어져 앉아 있던 사람들을 천천히 한곳으로 모았다. 남자를 따라 모인 사람들은 버스 앞쪽으로 둥근 대형을 만들며 앉았다. 지유는 남자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떨어져 앉아 있는 사람은 어느새 지유뿐이었다.

오늘 처음 오셨어요?

네.

불편한 자리에 앉으셔서 고생하셨네요.

괜찮아요.

남자는 더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무릎을 조금 굽혀 몸을 살짝 기울인 채 지유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지유는 문득 자신의 짧은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밤에는 제법 쌀쌀하죠?

네.

갈까요?

 

남자는 둥글게 모여 앉은 사람들에게 말했다. 두시간 뒤에 목적지에 도착할 거라고. 그곳 상황은 별로 좋지 않다고.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작게 대답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받는 덤덤함이 느껴졌다. 지유는 남자가 알려주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자신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자가 고개를 숙이자 모두 조용히 박수를 쳤다. 남자는 머쓱한지 헛기침을 하며 햄버거 포장지와 빈 캔을 걷으러 다녔다. 햄버거 포장지에는 웃는 이모티콘이 덧붙은 응원의 메시지가, 콜라캔에는 어느 단체의 마크인 듯한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서로의 옆사람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할 수순처럼 대화가 시작되어서 지유도 양옆의 사람들과 몇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처음 오셨나봐요.

네.

생각보다 힘들죠?

괜찮아요.

지유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마다 처음 왔느냐고 묻는 것이 의아하고 신기했다. 어떻게 알았을까. 지유는 주의깊게 주변을 살폈다. 다른 사람들끼리는 그렇게 첫마디를 시작하지 않았다. 햄버거 드셨어요? 오늘은 차가 덜 막혀서 좋네요. 버스가 좀 덜덜거린 것 같지 않아요? 사소한 공감에서부터 시작하는, 동질감을 확인하는 대화들. 그런 대화를 하고 있는 사람들. 지유는 그들이 모두 비슷한 표정과 목소리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저들끼리만 통하는 무슨 암호가 있는 건 아닐까, 반드시 갖춰야 할 표지가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신을 혹시 적대적으로 대하지는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지유는 덜컥 겁이 났다. 둥근 대형은 벌써 흐트러지고 사람들은 저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앉아 대화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더이상 지유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지유는 멍하니 버스를 바라보았다.

불편하지 않겠어요?

인솔자 남자가 지유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네?

발이 아플 텐데.

남자가 지유의 신발을 가리켰다. 얇은 끈을 엮어서 발을 감싸는 낮은 굽의 쌘들이었다. 지유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왜 자신이 저들의 유순한 대화에 쉽게 끼지 못하는지.

사람들은 모두 비슷한 차림새였다. 헐렁한 티셔츠와 긴 바지, 운동화, 등에 바짝 붙는 배낭. 밤을 지새우기 위한 준비가 된 복장이었다. 지유 자신만 짧은 소매의 블라우스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버스에 두고 내린 숄더백이 떠올랐다. 지갑과 휴대폰만 들어 있는 작은 가죽가방.

괜찮아요.

이제 와 별다른 수도 없었다. 지금까지 괜찮다는 말을 몇번이나 했는지. 이제는 정말 괜찮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밤은 아주 길 거예요.

남자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남자의 신발은 등산화였다. 지유는 생각했다. 햄버거를 그냥 먹었어야 했나.

남자가 하늘을 향해 젖혔던 고개를 천천히 내려 지유와 눈을 맞추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버스가 다시 출발했다. 옆자리의 상자가 다 치워져서 룸미러를 통해 버스 안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목소리를 낮추어 옆사람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정해진 규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모두가 일정한 어조로 말하고 있어서 얼핏 하나의 노랫소리 같았다. 때때로 의견 차이가 있는지 한두 단어가 툭 튀어오르긴 했지만 곧 잠잠해졌다.

지유는 건너편 자리에서 눈을 감고 있는 인솔자 남자를 곁눈질했다. 남자의 옆엔 아직 생수가 든 상자가 쌓여 있었다. 버스가 굽은 길을 지날 때마다 출렁이는 생수병 너머로 눈을 감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함께 흔들렸다.

지유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남자는 곧 사과했다. 추궁하려는 건 아니에요. 지유도 알고 있었다. 남자는 정말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사실대로 준희를 찾으러 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어쩐지 그런 이유를 말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지유는 그저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 대부분 할 대답을,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준희를 찾으러 왔을 뿐이니까. 그곳에 가면 준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처음에는 준희를 알아보지 못했다. 텔레비전 속 준희는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를 하고 있었다. 심야에 방송하는 현장취재 프로그램의 한 꼭지였다. 지유는 잠옷바지에 한쪽 다리만 넣은 채로 한참 텔레비전을 보았다. 카메라는 준희를 자세히 비춰주지 않았다. 준희는 서너번, 스치듯 화면 끄트머리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말도 안되는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지유는 텔레비전을 손으로 잡고 이리저리 틀어보았다.

그날은 지유가 해고를 통보받은 날이었다. 사물함 속의 작업복과 칫솔을 챙겨 가방에 넣으면서 지유는 준희가 해고되던 날을 생각했다. 공장은 3교대에서 2교대로 체제를 바꾸면서 인력을 감축하겠다고 공고했다. 세사람이 하고 있는 일을 두사람도 할 수 있다면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지유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월급도 오른다고 하고 야근수당도 붙게 된다고 했다. 좋은 일 아닌가. 새로 바뀐 시간표를 확인하려고 할 때, 조장이 준희에게 내일부터는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집으로 오는 길 내내 준희는 말이 없었다. 지유는 말했다.

걱정 마. 일은 새로 구하면 되지.

그렇게 말하는 지유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준희의 표정이 떠올랐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처럼. 지유는 그때 준희에게 하지 못한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자 못 견디게 억울해졌다. 누군가의 잘못을 대신 뒤집어쓴 느낌. 그 누명을 해명할 기회를 영영 얻지 못할 것 같은 불안.

똑같았다. 내일부터는 나오지 않아도 돼. 조장은 그렇게 말했다. 두사람이 하고 있는 일을 한사람이 할 수도 있는 거구나. 지유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세사람이 하던 일을 두사람이 했을 때처럼, 어떻게든 된다면 되게 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어깨가 뻐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지개를 켜려고 했을 뿐인데 눈물이 났다. 피곤하구나. 어서 집으로 가서 오래 자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 비로소 준희가 이제는 없다는 것이 너무 생생해졌다.

그런데 텔레비전에 준희가 나온 것이다. 지유는 한참 텔레비전과 씨름했다. 결국 준희는 다시 나오지 않았고 프로그램은 끝나버렸다. 지유는 인터넷을 검색해서 준희가 나온 꼭지가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 알아냈다. 영상도 구했다. 그리고 몇번이고 그 영상을 다시 돌려 봤다. 밥을 먹다가 말고, 양치를 하다가 말고, 이부자리에 눕다가 말고, 지유는 모니터 앞으로 가서 그 영상을 보았다.

 

어떻게 오셨어요?

인솔자 남자의 질문에 말 그대로 ‘지하철을 타고 왔어요’라고 대답하거나 조금 더 자세하게 ‘인터넷에서 버스에 탈 사람들을 모집하는 글을 보고 약도를 출력해서 찾아왔어요’라고 했다면 인솔자 남자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저 말 그대로만 대꾸해주었다면.

어떻게.

그 말은 너무 무거운 질문이라고 지유는 생각했다. ‘왜’이기도 하고 ‘무엇’이기도 하고 ‘누구’이기도 하고 ‘언제’이기도 하고 ‘어디서’이기도 한 질문. 모든 물음표가 가득 들어찬 질문. 그래서 오히려 모든 대답을 막아버리는 질문. ‘어떻게’라는 말을 들으면 지유는 정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넌 앞으로 어떻게 살 작정이야?

준희가 그렇게 물었을 때도 지유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왜 나한테 그런 걸 물어봐? 도대체 뭘 말하라는 거야? 넌 어떤 대답을 원해? 머릿속에 가득 차는 말들을 되물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유는 차라리 준희가 계속해서 자신에게 따져 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질문이 더 이어지면 준희가 원하는 대답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한테 힌트를 좀 줘. 하지만 준희는 그저 끝까지 지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고, 지유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유는 연달아 떠오르는 기억들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천천히 속도를 줄이고 있었다. 기어를 바꾸는 운전기사의 마른 팔이 보였다.

지유는 ‘어떻게’를 묻는 사람들은 묻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물어야 할지 모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모든 물음표를 가득 담고 모든 대답을 원하는 질문.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는 몰라도 무엇을 들어야 하는지는 알고 있는 질문.

지유는 자신에게 ‘어떻게’를 묻는 인솔자 남자를, 또한 그렇게 물었던 준희를, 준희의 ‘어떻게’에 대답하지 못했던 자신을 떠올렸다. 묻는 사람과 대답하는 사람이 서로를 제대로 짐작해야만 이해되는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럴 수가 있는 걸까. 어떻게.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다. 버스가 더이상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버스기사는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웠다. 버스 안의 사람들이 번갈아 인솔자 남자에게로 다가와 상황을 물었다. 그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도 하고 버스 밖으로 나갔다가 돌아오기도 했지만 버스는 여전히 멈춰 있었다. 지유는 커튼을 젖혀 창밖을 보았다. 다른 버스들이 더 있었다. 지유와 마찬가지로 커튼을 젖힌 채 불안한 눈으로 밖을 살펴보는 사람들이 보였다.

드실래요?

뿔테안경을 낀 여자가 지유의 옆자리에 앉았다. 여자의 손에는 크림빵이 들려 있었다. 지유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정말요? 아까 아무것도 안 드셨죠?

배가 고프지 않아서요.

그렇지만 먹어두는 게 좋아요.

밤이 무척 길 테니까. 여자는 그렇게 말하며 지유에게 크림빵을 내밀었다. 지유는 빵을 받아 얼떨결에 포장지를 벗겼다. 실온에 오래 두어 천천히 발효되고 있던 빵에서는 시큼한 냄새가 났다. 야근을 할 때 배급되던 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자 베어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나도 처음엔 그랬어요.

네?

이런 자리가 낯설고 어색했거든요.

지유는 빵을 천천히 씹었다. 괜찮았다. 여자는 지유가 빵을 먹는 것을 보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지유가 빵을 다 먹을 때쯤 물었다.

커피 마실래요?

지유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여자는 버스 뒤쪽으로 갔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보온병 뚜껑에 담긴 커피를 내밀었다.

있을 줄 알았어. 다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오거든요.

여자가 웃었고 지유도 따라 웃었다.

어느날인가 지유는 준희와 같이 대형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준희는 새 일을 구하지 않고 있었고 지유는 일주일에 하루만 쉴 수 있었다. 집안일도 하고 장도 봐주면 좋으련만 준희는 하루종일 방 안에 틀어박혀 잠을 자거나 텔레비전을 보았다. 겨우 닦달을 해서 준희를 데리고 나섰다. 오랜만에 함께 하는 외출이었기 때문에 지유는 장바구니와 적립쿠폰을 두고 온 것도 신경 쓰이지 않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저 과자 처음 보는 거네. 하나 살까? 나 이번주에 월급날이니까 사줄게.

준희는 대답이 없었다. 군것질을 좋아하는 준희를 지유는 항상 타박했었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커다란 과자상자를 집어드는데 준희는 벌써 저만치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봐. 지유는 부랴부랴 과자상자를 들고 준희의 뒤를 따라갔다. 유통기한을 살펴서 우유를 고를 때도, 할인하는 상표의 통조림을 찾을 때도, 준희는 자꾸만 혼자 걸어가버렸다.

계산대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열개의 계산대 중 두개만이 운영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다른 계산대를 이용해주세요. 안내판이 매달린 빈 계산대에는 어쩐 일인지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지유가 줄을 서는 사이 준희는 계산대를 지나 출구로 향했다. 어느새 지유의 뒤로도 길게 줄이 늘어서버려서 지유는 멍하니 준희가 마트 밖으로 나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봉투값 백원을 주고 받아온 비닐봉투는 구입한 물건들을 다 담기에 터무니없이 작았다. 지유는 비닐봉투에 들어가지 않는 커다란 과자상자를 한쪽 옆구리에 끼고 돌아왔다. 현관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었다. 바닥에 짐을 내려놓고 열쇠를 돌려 문을 열었다. 준희는 웅크리고 앉아 발톱을 깎고 있었다.

문 좀 열어주지 그랬어.

틱.

이거 좀 받아주면 안돼?

틱.

내 말 듣고 있어?

틱.

대체 왜 그래?

발톱을 다 깎았는지 준희는 바닥을 손으로 훔쳐 사방에 튄 발톱들을 한데 모았다. 그리고 다시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지유는 과자상자를 준희의 앞에 내려놓았다. 준희는 물끄러미 과자상자를 바라보았다. 한참 그렇게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 갑자기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텔레비전을 켰다.

 

버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멈춰섰다.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나요?

지유가 묻자 인솔자 남자가 버스 앞유리 너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뇨, 바로 저기예요.

지유는 몸을 숙이고 고개를 젖혀 멀리 높은 곳을 보았다. 희미하게 깜빡이는 빛이 보이는 듯했다.

그런데 왜 가지 못하고 있는 거죠?

막고 있어요.

인솔자 남자는 곤란하다는 듯이 웃으며 덧붙였다.

사람들이 막고 있어요.

여자는 백일이 넘게 그곳에 있었다. 사람이 가장 공포를 느낀다는 높이를 넘어, 고양이가 안전하게 몸을 말고 착지할 수 있다는 높이를 넘어, 낙하산을 펴면 오히려 공중으로 치솟게 된다는 높이를 넘어. 까마득하게 올려다보아야 하는 높이에, 바로 그곳에.

텔레비전 속의 여자는 수척해 보였다.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둔탁하게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와 바람이 매섭게 지나가는 소리, 먼 곳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뒤섞여 여자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리지 않았다. 준희가 텔레비전 볼륨을 높였다.

여러분, 혹시 개 다섯마리의 밤이라는 표현을 아세요?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들은 아주 추운 밤이면 키우는 개를 담요로 삼아 곁에 두었다고 해요. 개가 다섯마리나 있어야 버틸 수 있는 밤은 얼마나 추웠을까요. 그래도 다섯마리의 개들과 함께 지낸 밤은 얼마나 따뜻했을까요. 여러분, 여러분은 저에게 이 밤을 함께 버텨낼 따뜻한 온기입니다. 여러분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할 만큼 두렵고 추운 이 밤, 그래도 여러분이 있어 이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올 것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지유야.

응?

우리에게도 다섯마리의 개들이 있을까.

다섯마리의 개?

그래, 밤을 버티게 해주는.

지유는 묻고 싶었다. 나는 너를 버티게 하지 않니? 너는 나를 버티게 할 수 없니? 준희는 지유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이 텔레비전을 끄고 이부자리를 폈다. 지유는 등을 돌리고 누운 준희의 옆에 누웠다. 준희야, 너의 밤은 춥니?

넌 앞으로 어떻게 살 작정이야?

지유가 막 잠이 들려고 할 때, 불쑥 준희가 물었다. 뭐라고? 그렇게 되물었는지 아니면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는지 지유는 확실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이미 준희는 없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준희가 묻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지유는 결국 이해하지 못한 준희의 질문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준희가 듣고 싶었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알아내고 싶어서 지유는 버스에 탔다.

일단 내립시다.

누군가가 말했다. 인솔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버스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운전기사가 못마땅하게 지켜보았다. 지유는 뿔테안경을 낀 여자의 소개를 받아 커피를 준 보온병 남자에게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괜찮아요.

어쩐지 그의 목소리가 준희를 닮은 듯해 지유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아뇨, 제가 아는 사람을 닮아서요.

그런가요.

보온병 남자는 이런 자리에 익숙한 듯 가방에서 접이식 방석을 꺼내 깔고 앉았다. 지유도 그의 곁에 앉았다. 어째서 이 사람이 준희를 닮았다고 생각했을까. 자세히 보니 체격도 생김새도 전혀 달랐다.

네, 저는 그 사람을 찾으러 여기에 왔어요.

사람들은 담장처럼 서 있는 버스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른 버스에서도 사람들이 내렸다. 어떤 버스의 사람들은 똑같은 색깔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고, 어떤 버스의 사람들은 커다란 깃발이 매달린 장대를 들고 있었다. 누군가는 확성기로 사람들에게 대열을 잘 맞춰달라고 말했고, 누군가는 글씨가 빼곡하게 적힌 종이를 나눠주고 있었다.

지유는 사람들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준희는 없었다. 더 가까이 가야 했다. 분명 그곳에 준희가 있을 것 같았다. 버스를 막고 있다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 지유는 고개를 빼고 기웃거렸다. 제복을 입은 사람들일까. 험악하게 욕설을 하는 사람들일까. 몸을 반쯤 일으키던 지유는 깜짝 놀랐다. 어린아이가 있었다.

 

수많은 부품 중 하나를 끼워넣는 일을 준희가 그렇게 좋아했던가. 혼자 출근한 첫날, 지유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작업복을 입었다. 다른 일을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최저시급을 받을 뿐이고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일은 많았다. 편의점에서 카운터를 지키거나 마트에서 바코드를 찍거나 하는 일도 다르지 않았다. 지유는 자신의 자리에 가서 섰다. 벨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루 일곱시간을 서 있는 것과 아홉시간을 서 있는 것은 고작 두시간 차이일 뿐인데도 야근수당이 붙으니까 더 좋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일주일이 되자 열네시간이 늘었고 한달이라고 생각하니까 육십시간이 되었다. 그만큼 월급명세서의 숫자도 늘었고 지유의 피로도 늘었다. 지유는 점심시간이 짧아진 것과 교대준비시간이 짧아진 것도 한참 뒤에야 알았다. 어쩐지 자주 소화가 되질 않았다.

점심시간마다 구내식당에서 밥을 함께 먹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보이지 않았다. 남은 사람들은 밥을 더 빨리 먹기 위해 가끔 씹지도 않고 음식을 삼켰다. 식사 후 조금이라도 자리에 앉아 눈을 붙이고 싶어했다. 지유는 식판을 들고 줄을 서다가, 물을 마시기 위해 정수기 옆에 놓인 일회용 종이컵을 뽑다가 준희를 생각했다. 집 안에서 한껏 몸을 웅크리며 잠들어 있을 준희를. 아직 벽에 걸려 있는 준희의 작업복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똑같은 시급이라면 한사람에게 아홉시간 분량의 시급을 주는 것과 두사람에게 네시간 반 분량의 시급을 주는 것은 똑같지 않은가. 똑같은 하루 스물네시간, 한달이면 칠백이십시간을 여럿이 나누어가질 뿐 아닌가. 지유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밥알을 천천히 씹었다.

퇴근을 하고 돌아왔는데도 준희는 일어나지 않았고 집 안은 지유가 출근할 때와 마찬가지로 어질러져 있었다. 지유는 바닥을 쓸고 걸레질을 하고 저녁을 준비했다. 주방은 깨끗했다. 준희는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 같았다. 밥상을 차려 놓고 준희를 깨웠다. 밥 먹자. 준희의 몸을 돌렸더니 잠든 것이 아니었다. 준희는 멍하니 눈을 뜨고 있었다.

밥 먹자. 밥을 먹어야지. 준희는 마지못한 듯 몸을 일으켜 밥상에 앉았다. 수저까지 쥐어줘야 해? 준희는 지유의 말에 눈살을 찌푸린 채 수저를 들었다. 지유는 준희에게 말했다. 이건 정말 너무해. 너 정말 너무해. 그렇게 말하자 정말 모든 것이 너무한 것 같았다. 준희가 대꾸했다. 그래, 너무해.

 

아이는 어른들 사이에서 아무렇게나 누워 잠들어 있었다. 지유는 어른들을 보았다. 아이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아이의 이마를 쓰다듬고 있었다. 커다란 꽃무늬가 있는 헐렁한 원피스를 입고서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모시옷을 입은 노인과 졸음에 겨워 하품을 하고 있는 러닝셔츠 차림의 중년남자가 있었다. 저 사람들의 밤은 너무 뜨겁구나. 저렇게나 덥구나. 지유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왜 저런 사람들이 길을 막고 있는 거죠?

지유는 누구에게든 묻고 싶었다. 속으로 생각만 하려고 했는데 저도 모르게 말이 되어 나왔다. 보온병 남자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 화가 나서 그래요.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모두가 아는 노래인 듯 여기저기서 따라 부르는 사람들이 늘었다. 이 사람들에게 화를 낼 일이 아니잖아요. 지유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화를 내려면 여기가 아니잖아요. 노래가 조금씩 더 크고 빨라진다고 생각했을 때,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돌을 던졌다. 곧이어 음료수캔이며 물병 같은 것들이 연달아 날아왔다. 건너편 사람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조용히 해! 조용히 좀 하라고! 잠을 잘 수가 없어! 건너편에서 날아온 것 중 하나가 보온병 남자의 머리에 맞았다.

괜찮아요?

보온병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머리에 맞아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들었다. 지유는 그의 손에 들린 작은 고무공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한창 좋아한다는 동물 캐릭터가 그려진 고무공은 안에 방울이 들어 있는지 딸랑딸랑 소리를 냈다.

 

대출금을 갚기 위해 공장에 들어왔다고 하자 조장은 지유를 향해 큰 사업이라도 했느냐고 물었다. 지유에게 인수인계를 해주던 직원이 깔깔 소리를 내서 웃었다. 아가씨 같은 사람들 생각보다 많아. 별일 아니지. 같은 벨트의 사람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보탰다. 가방이라도 샀어? 카드 긁었어? 지유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학교를 다녔어요. 더이상 아무도 웃지 않는데 갑자기 준희가 크게 소리내서 웃었다. 지유는 자신이 일하게 될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준희의 자리를 보았다. 벨트가 가장 빠르게 도는 곳이고 그래서 제일 바쁜 곳이었다. 준희가 번쩍 손을 들었다. 안녕.

준희는 지유보다 먼저 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열아홉에 처음 공장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했다. 차근차근 일을 배웠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준희도 지유도 기숙사에 살고 있었지만 비상교대를 하기가 힘들었고 밤에도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계속 들려와서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공장 밖에 방을 구했을 때, 준희는 보람이 있다고 했다. 지금까지 열심히 일한 보람이 있구나.

대학을 가고 싶진 않았어. 거긴 공부하러 가는 데잖아. 난 별로 배우고 싶은 게 없었거든. 준희는 그렇게 말했다. 그렇구나. 지유는 자신이 다니던 학교와 전공학과를 묻는 사람들 틈에서 묘하게 웃음짓고 있던 준희의 얼굴을 떠올렸다. 곤란하겠구나, 너.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넌 공부도 하고 일도 하는구나, 성실하게. 준희는 공장 밖에 방을 구하자는 말을 하며 그런 말을 덧붙였다. 지유는 부끄러워졌다. 자신에게 성실하다는 말이 붙는다면 그건 그저 계속해서 걷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멈춰도 달려도 별 뾰족한 수가 없어서 그냥 하염없이 걷고 있을 뿐인, 아주 성실한 상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지유는 건너편에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를 오가는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그림자는 사람들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밀치기도 하고 팔다리를 붙잡고 끌기도 했다. 사람들은 고함을 치기도 하고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 아이는 점점 지쳐가며 울었다. 그림자가 하나둘씩 늘어났다.

뒤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려 지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가 이곳에도 있었다. 그림자는 난폭하게 움직였다. 놀란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림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건너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건너편의 그림자들은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사방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지유는 뒤섞이는 그림자들과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았다. 보온병 남자가 지유의 손을 잡아끌었다.

버스기사는 문을 열어주지 않으려고 했다. 지유는 다급하게 버스문을 두드렸다. 버스기사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보온병 남자가 주먹으로 세게 문을 두드렸다. 뒤쪽에서 그림자에게 떠밀린 사람이 넘어지며 지유에게 부딪쳤다. 놀란 지유의 비명소리에 버스기사가 마지못해 문을 열어주었다.

버스기사는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된다고 했다. 지유는 창밖을 보았다. 멀리 인솔자 남자와 뿔테안경을 낀 여자가 보였다. 울고 있던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졸고 있던 남자는, 피곤해 보이던 노인은, 뒤쪽에서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유는 문득 저 안에 준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 좀 부탁해요.

보온병 남자는 지유에게 가방을 내밀었다. 그는 버스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버스기사는 이미 시동을 걸고 기어를 바꾸고 있었다. 저기요, 저기요. 지유는 그의 얼굴이 준희와 겹쳐지는 것만 같아 그를 붙잡고 싶었다. 준희가 위험한 곳으로 뛰어들고 있는 것 같아서.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치 준희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을 때처럼. 붙잡고 난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커피, 남아 있어요.

보온병 남자는 지유에게 그렇게 말하고 버스기사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했다. 버스기사는 보온병 남자가 내리자마자 재빨리 문을 닫았다. 열린 틈으로 새어들어오던 바깥의 소리들은 방금 전 버스 밖에 앉아 있을 때 들었던 노래 같았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지유만은 모르는 노래. 어쩌면 텔레비전에서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들려왔던 주변의 소리가 이것이었을까. 그렇다면 정말 준희는 지금 저 사람들 속에 뛰어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버스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유는 생각했다. 이곳을 벗어나도 이 밤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고.

 

 

 

소설 | 심사평

 

 

361편의 응모작들 중 본심에서 논의하기로 결정한 작품은 9편이었다. 대개가 문장이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솜씨는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대산대학문학상’에 걸맞은 신선함이나 패기, 개성 같은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작품의 완성도만으로 보자면 한편만 선택하기는 쉽지 않았다. 응모작의 수준이 심사위원들의 기대치를 넘었던, 그런 즐거운 심사였다. 9편 중 특히 논의의 대상이 된 응모작들은 다음과 같다.

「펭귄은 어떻게 달에 가게 되었나」는 필력이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나’와 ‘윤’과 ‘펭귄’의 관계가 자연스럽게 읽히지 않았고 필연성도 부족했다. 설명적인 문장을 소설 속에서 어떻게 더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을 조금 더 해보기를 당부한다. 마지막 짧은 단락은 본심작 중 가장 매력적이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바스락거리는 몸」은 문체나 한두 문장만으로도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힘이 인상적이었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정말 ‘재미있는 일이 생길 것’ 같은 즐거운 기대가 든다. 그러나 기성작가의 개성이 이 소설에서 크게 눈에 띈 점이 못내 아쉬웠다. 응모자가 아직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 듯싶은, 자신만의 신선한 글쓰기 방식은 분명히 있었다. 그 개성을 발견하고 넓혀가기를 바란다.

「미순이」는 한 심사위원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은 응모작이었다. 한 장애인의 인생을 필력있는 전라도 방언을 이용해 유쾌한 파노라마로 그려낸 점이 단연 눈에 띄었고 그만큼 개성적이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있되 소설에서 필요한 구조가 빠져 있다는 느낌이 컸다.

「아무것도 아닌, 기울어짐」은 당선작과 끝까지 겨루었던, 아쉬움이 크게 남는 응모작이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망설인 이유는 뜻밖에도 이 소설이 독자의 기대를 전혀 배반하지 않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야기나 인물의 행동 같은 패턴들이 이미 독자에게 읽힌다는 점에 있었다. 그러나 정확한 문장이나 개성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첫 단락은 기억에 오래 남을 만큼 아름다웠다. 신인다운 풋풋함도 살아 있었다. 이런 작품이 ‘젊은 소설’이라는 느낌도 들게 했다. 지치지 말고 계속 정진하기 바란다.

수상작으로는 조우리의 「개 다섯마리의 밤」을 선정했다. 이 소설은 문장이나 구조, 내용이 매우 안정적이었다. 응모자는 습작을 많이 해봤을 뿐만 아니라 책읽기의 시간과 경험 또한 만만치 않게 갖고 있을 거란 짐작을 하게 했다. 글쓰기를 진정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쓴 소설이 이런 것이겠지,라는 생각도 든다. 다만 우리가 이 소설을 두고 오래 이야기를 나눈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소설의 도입부에서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간다. 그것이 희망버스인지 아닌지, 그런 목적으로 가는 것인지 아닌지 분명하지 않다. 문장도 이야기도 그렇다. 어딘가 모호하고 불분명한 것, 다 말하지 않는 것, 흐릿한 안개에 쌓인 듯한 여운과 여백을 주는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혹자는 명확한 이야기나 개연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느낄 수 있다. 심사위원들은 앞의 이유로, 그 모호함을 개성과 장점으로 여기고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담담하고 여운이 오래 남는, 놀라울 정도로 매끄러운 소설이다. 앞으로의 작품이 무척 기다려진다.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김숨 김종광 조경란

 

 

 

소설 | 당선소감

 

 

어색하다. 아직,이라고 해야 할까 여전히,라고 해야 할까. 당선통보 전화를 받으면서도 호들갑 떨지 말자고 생각했다. 낙방이 익숙했으므로. 전화를 끊고서 심사평을 읽고 난 뒤에야 조금 울었다. 이상해서, 어쩐지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 같아서, 모니터 속 글자들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생각나는 건 집 근처의 우편취급소다. 천천히 걸어도 일분 남짓 거리인 그곳을 나는 숨이 찰 때까지 힘껏 달려가곤 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서류봉투 위에 붉은 ‘응모’ 글자를 적고 달려오는 나를 맞아준 작은 간판. 등기번호가 찍힌 영수증을 들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흐리고 궂은 날에도 어쩐지 눈이 부셔서 하늘을 보며 인상을 잔뜩 찌푸렸던 기억.

나에게 가장 특별한 이야기의 제목을 지어준 서동미에게, 퇴고되지 않은 불편한 원고를 성의껏 읽어준 황유정에게, 변함없이 지지해주신 이경수 교수님께 가장 먼저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읽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은 나를 쓰는 사람이 되고 싶게 했다.

글 쓰는 사람의 마음을 바라게 해준 안양예고 문예창작과에, 항상 도망치고 싶었지만 늘 돌아갈 자리가 되어주었던 중앙대 국어국문학과에 감사한다. 그 속에 함께하는 수많은 이름들의 따스함이 나를 이루는 기억이 되었다.

십년 동안 유별난 친구 덕에 숱하게 바람 맞았던 박은영, 오진아, 이진희, 조주희에게 애정을 고백한다. 너희들의 담담한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는 걸 알리고 싶다.

새벽마다 글자 두드리는 소리에 잠을 설치신 부모님과 모니터 불빛에 괴로워하던 두 동생 조한울, 조한별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걱정 끼치지 않는 피붙이가 되고 싶다.

내가 간절하게 하고 싶었던, 그렇지만 늘 더듬거리거나 머뭇거렸던 말을 가만히 귀기울여 들어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대산대학문학상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노력하겠다. 심사평을 읽으면서 앞으로도 내가 이렇게 과분한 문장의 평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간절하게 바란다.

하나의 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한사람을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눈으로 뒷모습을 좇던 동급생일 때도 있었고, 앞에만 서면 부끄러워 고개 숙이던 스승일 때도 있었다. 이불 속에서 저주의 말을 내뱉게 했던 이나, 오래도록 단어를 골라 편지를 보냈던 이일 때도 있었다. 그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나에게 소설은 미처 하지 못하고 입속으로만 삼킨 말이었다. 그런 순간들의 나였다.

「개 다섯마리의 밤」은 내가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쓴 소설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여유를 가지라고 아직 어리다고 말했지만, 나는 내가 지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너무 두려웠다. 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당신의 마음에 드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났던, 나를 스쳤던, 서로를 서툴게 두드렸던 모든 ‘당신’들과 언제든 어디서든 내 손을 잡기 위해 손을 뻗어주는 바로 당신, 너에게.

조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