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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김경민 金京民
중앙대 연극영화학부 4. 1988년생.
white_smoke@hanmail.net
섬
씨놉시스
누군가의 꿈의 바다에 띄워졌던 섬은 작은 고시원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대가 아주 낮은 탓에 단 한방울의 눈물만으로 침몰해버린 섬이다. 이후 다시 건져진 섬에서 여자와 남자, 두명의 여행자가 만난다. 둘은 가이드를 놓치고 잠시 섬에서 일행을 기다리기로 한다. 홀로 돌아다니기에 꿈의 바다는 너무 험하고 길을 잃기 쉬운 탓이다.
가이드를 기다리며 잠이 든 여자는 섬에서 남자와 단 둘이 사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다정한 연인인 여자와 남자는 섬에 거주하는 동안 타인을 두 눈으로 본 적이 없다는 사실과 그 타인의 기척만이 남아 자신들의 곁을 맴도는 것을 깨닫고 두려움에 잠긴다. 남자는 섬이 그들을 집어삼킨 것이라며 떠날 것을 종용하지만 여자는 거부한다. 남자는 홀로 섬을 떠난다. 여자는 꿈에서 깨어난다. 가이드는 아직 되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림의 시간을 달래기 위해 그들은 섬 곳곳을 구경한다. 그러다 남자는 여자에게 사진 한장을 건넨다. 사진 속의 여자가 당신과 똑 닮았다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혼란에 빠진다. 제 얼굴을 떠올리지 못하는 여자를 위해 남자는 맑은 바닷물에 여자의 얼굴을 비춰볼 수 있도록 이끈다. 이내 여자는 사진 속의 여자가 바로 자신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남자는 이 침몰한 섬의 원래 주인은 그녀이며, 자신은 여자를 데리러 온 진짜 가이드임을 밝힌다. 믿지 않으려 하는 여자에게 기억이 문득 되살아난다. 천장에 매달려 줄곧 자신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이상한 줄이, 바로 생전의 자신이 목을 매단 줄임을.
여자는 줄에 매달리는 것 말고는 이곳에서 탈출할 방법이 없었다고 울음을 터뜨린다. 남자는 문밖을 보라고 여자를 달랜다. 여자는 그제야 문밖에 난 단단한 길을 본다. 제 자신의 꿈에 갇혀 미처 보지 못했던 단단한 길이다. 여자는 새로운 삶을 위해 섬을 떠난다. 남자는 여자를 배웅하고 섬의 마지막을 준비한다. 남자가 섬의 문을 닫는 순간, 침몰한 섬은 다시 영원한 휴식 속으로 잠긴다.
*지면사정으로 작품의 일부만 싣습니다. 희곡 전문은 대산문화재단 홈페이지(www.daesan.or.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등장인물
여자(20대), 남자(20대), 가이드
무대
낡고 허름한 고시원. 관객석 기준 무대 오른쪽 끝에는 고시원 입구가 있다. 복도로 들어서면 먼저 커튼으로 가려진 공용주방 입구가 보인다. 그 옆에 남녀공용 화장실이 하나 있다. 그 옆에 101호는 문이 활짝 열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침대와 책상만으로도 여유가 없는 아주 좁고 답답한 방이다. 침구는 흐트러져 있고, 책상 위는 각종 물건들로 혼잡하다. 침대 발치 선반에는 작은 TV가 비스듬히 있다. 방 벽 정면에는 창이 있다. 그러나 문을 열어도 회색 벽이 보일 뿐이다. 바닥에는 물빛 조명이 흐른다. 이따금씩 물결치는 소리가 무대를 맴돈다.
1.
막이 오르면 101호 안에서 가이드가 안내를 시작한다.
가이드 (관객을 향해) 몰-디-브. 아름다운 섬 몰디브에 대하여 아십니까? 몰디브는 아시아 남부 인도양 중북부에 위치한 산호초로 이루어진 섬들의 군락지입니다. 에메랄드빛 바다가 물결치는 지상 최고의 낙원이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 섬의 가치를 증명해주는 것은 몰디브가 매년 천천히, 천천히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에게 머문 사람들의 추억과 저에게 오지 못한 사람들의 기대를 안고서. (두 팔을 펼치며) 그러나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몰디브보다도 먼저 가라앉은 성질 급한 섬입니다. 지대가 아주 낮아서, 이곳에 사는 거주자는 함부로 눈물을 바다에 흘려서는 안된답니다. 수면이 조금이라도 높아지면 한순간에 잠겨버리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이렇게 잠긴 섬들을 건져내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자료로 쓰고 있습니다만 매년 이런 불행한 사고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고 하고 싶습니다. 그럼, 다음 섬을 보시겠습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죠.
가이드가 101호에서 나와 무대 왼편으로 사라지면 변기 물 내리는 소리와 함께 화장실 문이 열리며 여자가 나온다. 손의 물기를 옷에 닦으며 신기한 듯 주위를 둘러보다가 101호 안을 엿본다.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방에 들어가 안을 살핀다. 그러다가 침대에 앉는다. 낡은 매트리스가 삐걱댄다. 그 때 남자가 고시원 입구를 통해 복도로 들어온다. 꽤 정중한 옷차림이다. 주방 커튼 사이로 고개를 디밀고 잠깐 들여다본다. 무엇이 재미있는지 한참을 들여다보다 101호를 향해 다시 걸음을 옮긴다. 101호 문 앞으로 남자의 모습이 보이자 여자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선다.
여자 미안해요. 너무 오래 앉아 있었죠. 이제 어디로 가면 되죠?
남자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인데.
여자 네?
남자 좀 늦어서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나요?
여자 (안도의 한숨 내쉬며) 아아. 전 그쪽이 가이드인가 하고.
남자 전 방금 온 참인걸요. (주위를 둘러보곤) 혼자 계세요?
여자 잠깐 화장실에 들렀다 왔는데 모두 사라지고 없네요.
남자, 고개를 끄덕이곤 흥미로운 얼굴로 101호로 들어선다. 방이 좁아 둘만으로 버겁다. 여자가 뒤로 물러선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전혀 개의치 않고 물건들을 이리저리 만지며 방 안을 살핀다. 여자는 그런 남자를 피해 침대까지 올라간다. 침대로 올라간 여자가 천장에 매달린 이상한 끈을 발견한다. 여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만진다.
남자 잠깐 앉아도 되나요?
여자 (놀라 쳐다보면)
남자 그 침대에요.
여자 (밑으로 내려오며) 네, 그러세요.
남자와 여자 나란히 앉는다.
남자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여자 제가요?
남자 네. 무리에서 홀로 떨어진 사람 같지 않아요.
여자 불안하세요?
남자 (멋쩍어) 자유여행을 좋아하지 않거든요.
여자 외로움을 많이 타시나 봐요.
남자 조금. 가이드가 있어야 안심이죠.
여자 전 가이드가 무서워요.
남자 왜요?
여자 보아야 할 것만 보여주는 것 같아서. 언변이 화려해서 모두 휘말려버려요.
남자 이렇게 조그만 섬에 숨길 것이 있을까요.
여자 신기하지 않아요?
남자 뭐가요?
여자 이렇게 작은 섬이 있다니. (사이) 물도 풀도 없는 곳에서 무얼 먹고 살았을까요?
남자 들리는 말로는 음식이 열리는 나무 같은 것이 있다나 봐요.
여자 어디에요?
남자 (고시원 주방을 가리키면)
여자 (고개를 끄덕이며) 아—
남자 딱히 훌륭한 것은 아니라지만.
여자 다른 섬의 사람들도 그 나무에 의존하나요?
남자 그런 것 같아요.
여자 싸움이 나지 않을까요? 서로 많이 먹으려고요.
남자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여자 왜요?
남자 열매들마다 각 섬의 이름이 적힌 채 맺히거든요. 102호 김치, 103호 장조림, 104호 파래무침, 이렇게요.
여자 (감탄하는) 정말 똑똑하신 분 같아요. 어디서 그런 것을 들을 수 있나요?
남자 (머리를 긁적이며) 사실은 아까 잠깐 보고 왔어요.
여자 저 나무를요?
남자 네.
여자 그런데 왜 누구한테 들었다고 하셨나요?
남자 요즘 세상이 다 그래요. 모두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에만 흥미를 갖죠. 형의 친구, 형의 친구의 사촌동생, 아는 누나의 직장동료 같은 사람들이요.
여자 그래서 모두 제 이야기에 흥미가 없었던 거군요.
남자 그럴 거예요.
남자, 지루한 듯 일어서서 방문으로 다가가 복도를 살핀다.
남자 모두 멀리 가버렸나봐요. 너무 조용하네.
여자 바다는 원래 고요해요. 바람이 시끄러운 거지.
남자 (뒤돌아보며)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여자 (쑥스럽게 웃으며) 엄마하고 살 곳을 찾으려고요. 아마 조금 먼 미래의 일이겠지만.
남자 벌써 노후대책이에요? (문가에 기대 여자를 훑어보며) 아직 까마득해 보이는데.
여자 저뿐만이 아닌 걸요. 다들 몇십년 후를 위해서 일해요.
남자 이해할 수 없네요.
여자 (관객석을 가리키며) 저기 바다를 좀 보세요. 뭐가 보이나요?
남자 (열심히 보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음. 예쁜 물고기가 보여요. (특정 관객을 지칭하는 대사를 해도 좋다) 머리를 묶고 보라색 옷을 입고 있네요.
여자 (웃는) 거짓말.
남자 (실토한다) 맞아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여자 그럼 저긴?
여자, 저 멀리 하늘을 가리킨다. 조명이 별같이 반짝 빛난다.
남자 별이 보이는 것 같아요.
여자 진짜 별일까요?
남자 그건 모르겠어요.
여자 그런 거예요. 눈앞의 것은 당장 보이지 않으면 죽어도 보이지 않는 거죠. 하지만 아득히 먼 것은 보인다고 착각할 수 있거든요.
남자 그럴듯하네요.
여자 이번엔 당신 차례예요. 여긴 왜 왔나요?
남자 말했잖아요. 난 자유여행을 싫어한다고.
여자 그래서요?
남자 가이드가 있는 투어가 이것뿐이었어요. 그래서 온 거죠.
여자 왜 이곳에만 가이드가 있죠?
남자 꿈의 바다는 헤매기 아주 쉬운 장소거든요. 빠지면 답도 없고요.
여자 전 몰랐어요.
남자 몰랐으니까 겁도 없이 무리를 이탈했겠죠.
여자 자긴 늦어놓고선.
남자 (웃는) 그러게요. 피장파장이네요.
여자 그래도 이곳에만 있으면 안전할 거예요.
남자 정말 그럴까요?
여자 이미 침몰한 섬이잖아요.
남자 (보면)
여자 세상에 두번 가라앉는 섬은 없어요.
남자 (사이) 어디로 갔을까요?
여자 네?
남자 이 섬에서 꿈꾸던 사람이요.
그때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소리가 들린다. 남자, 비틀댄다. 여자는 겁먹은 듯 침대 위로 발을 올린다.
남자 바람이 부나봐요.
여자 누구의 꿈이 요동치나요?
남자 아마 옆방인 것 같아요.
여자 (가슴을 짚으며) 멀미가 나는데.
남자 눈을 감고 누워 있어요.
여자 그러다 잠들어버리면 어떡하죠.
남자 전 여기서 가이드가 오나 살펴볼게요. 다음 여행지로 가기 전에는 인원체크를 할 테니까. 그러다 가이드가 오면 깨워주면 되죠.
여자,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에 눕는다. 곧 잠이 든다. 남자는 잠시 복도를 바라보다가 책상으로 다가간다. 책상에 놓인 작은 액자를 집어든다. 남자는 액자를 유심히 살핀다. 조명 어두워진다. 암전.
2.
여자는 꿈을 꾼다. 조명이 밝아지면 남자는 방문 앞에 편한 자세로 앉아 있다. 신발과 양말을 신지 않은 채 소매와 바짓단까지 멋대로 걷었다. 손에는 낚싯대가 들려 있다. 여자는 침대에 엎드려 잡지를 보고 있다. 남자, 관객석을 향해 낚싯대를 던진다.
남자 이상하다. 보기에는 물 반, 고기 반인 거 같은데 통 입질이 없네.
여자 자기야, 그게 그렇게 재밌어?
남자 (낚싯대 내팽개치며) 재밌어서 하냐. 여기서 할 일이 이거밖에 없으니까 하지.
여자 (남자에게 다가가 뒤에서 끌어안으며) 왜 또 심술이야?
남자 심술은 무슨.
남자, 고개를 돌려 여자에게 입맞추려 한다. 여자, 잽싸게 고개를 돌려 피하고는 새침하게 침대로 올라가버린다.
남자 아 진짜!
여자 진짜 뭐.
남자 아무도 없는데 뭐 어때?
여자 아무도 없긴 뭐가 없니?
남자 그럼 뭐가 있어!
여자 네가 그랬잖아. (관객석 가리키며) 물 반, 고기 반이라고.
남자 야, 물고기가 알긴 뭘 알아! 그리고 쟤넨 우리보다 훨씬 더할걸?!
여자 훨씬 뭘 더해?
남자 우린 그냥 뽀뽀만 하고 말지만, 쟤넨, 그, 뭐냐, 생식활동……
여자 (베개 던지는) 하여튼 생각하는 거 하고는.
남자 아! (다시 낚싯대 던지며) 내가 저것들을 다 잡아버리던지 해야지.
여자 그만하고 이리 좀 와봐.
남자 (부루퉁한) 왜.
여자 풍경 좀 보게.
남자 이 조그만 데서 뭘 볼 게 있다고.
여자 그래도 이리 와봐.
남자 이거 다 잡기 전까진 안 가.
여자 뽀뽀해줄게.
남자, 부리나케 여자 곁으로 간다. 여자, 남자의 볼에 가볍게 입맞춘다.
여자 됐지?
남자 (기분좋은) 그럭저럭.
여자가 남자에게 기대면 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는다.
여자 이렇게 같이 살았음 좋겠다.
남자 여기서 평생 살자는 이야긴 아니지?
여자 그럼 안돼?
남자 여긴 너무 좁잖아.
여자 이렇게 꼭 붙어 있으면 되지.
남자 나중에 애기 낳으면 어떡할 건데.
여자 자기랑 내가 한팔씩 껴안고 있으면 되지.
남자 애기들이 울기라도 하면 침수되어버릴걸.
여자 그 조그만 것들이 눈물을 흘려봤자 새오줌만 해.
남자 말을 말자.
여자 또 도망가지.
남자 섬에 평생을 거는 바보가 어디 있어?
여자 섬도 사람 사는 곳이야. 왜 살면 안돼?
남자 (일어서며) 섬도 섬 나름이지. 여길 좀 봐라. 좁고, 물은 바닷물뿐이고, 물고기는 영악해서 잡히지도 않고.
여자 (시무룩한) 음식은 저쪽에서 구할 수 있잖아.
남자 말이 나와서 말인데 아주 구역질이 나는 곳이야.
여자 왜?
남자 다들 만족할 줄 몰라. 남의 열매가 열리기만 기다리느라 엉덩이에 욕창이 생긴 것들이 풍기는 악취가 코를 찔러.
여자 (순진하게) 그치만 우리 걸 가져간 사람은 없었잖아.
남자 내가 밤마다 지키지 않았으면 너 음식 구경도 못해봤을걸?
여자 밤마다 거길 다녔던 거였어?
남자 그럼 어딜 간다고 생각했던 거야?
여자 다른 여자 옆을 꿰차러 가는 줄 알았지.
남자 (기가 찬) 그러고도 아무 말 않았던 거야?
여자 물증이 없잖아. 물증도 없이 그러면 의부증 취급했을 거면서.
남자 말을 말자.
여자 지금이 솔직히 말할 기회야.
남자 뭘.
여자 다른 여자 훔쳐본 적 있지.
남자 뭐?
여자 말해봐. 지금 말하면 용서해줄 테니까.
남자 기가 막힌다 정말.
여자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던데.
남자 그러는 너야말로 다른 남자 생각한 적 없어?
여자 난 없어.
남자 못 믿어.
여자 진짜야. (사이) 난 사실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없는걸.
남자 뭐?
여자 이 섬에 온 뒤로 쭉 그랬어. 나, 그리고 너. 그뿐이야.
남자, 그림처럼 정지한다.
여자 왜 그래?
남자 나도 그래.
여자 우리 음식을 훔쳐가는 사람을 봤다며.
남자 보지 않았어. (코를 가리키며) 맡았을 뿐이지.
여자 그럼 그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야?
남자 하지만 기척을 느꼈는데.
여자 난 소리도 들었어.
남자 그래. 눈에 보이는 것만 존재하는 건 아니잖아.
여자 우리가 너무 서로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었던 걸까?
남자, 초조하게 방을 왔다갔다거린다. 그러다 문득 방문에 붙여진 포스트잇을 발견한다.
남자 이게 뭐지? (포스트잇을 떼어본다) 여기 메모가 있어. (읽는다) 대화 소리가 너무 시끄럽습니다. 혼자 사시는 거 아니잖아요?
여자 (겁에 질려) 아까까진 없었어. 너 장난치는 거지.
남자 아니야. 너도 아까 들었다고 했잖아. 목소리들.
여자 그래, 전화를 하고 있었어.
남자 한두번이 아니었지.
(후략)
희곡 | 심사평
대산대학문학상 희곡부문에는 모두 74편의 작품이 들어왔다. 작년에 비해 11편이 늘어난 것으로 봐도 희곡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응모작들의 경향은 대부분 현실사회의 문제와 관련이 깊었다. 정치적인 이슈에서부터 88만원세대로 살아가는 대학생의 고민과 갈등을 담은 희곡까지 분포는 다양했지만 유독 자살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많았다는 것은 그만큼 이 시대의 청춘들이 느끼는 좌절과 절망이 크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고 하겠다.
1차심사를 거쳐 최종적으로 심사위원들의 손에 남겨진 작품은 「궤도를 이탈하여」 「물에 녹는 물고기」 「아버지가 방으로 돌아가신다」 「몽골 익스프레스」 「삼미약국」 「섬」 「과일 바구니」 일곱편이었다. 심사위원들은 이중에서 「물에 녹는 물고기」 「아버지가 방으로 돌아가신다」 「삼미약국」을 중심으로 의견을 교환했다.
「삼미약국」은 지방 소도시의 약국에서 벌어질 법한 일상적인 풍경과 인물들의 내밀한 사연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세련되게 풀어나간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 희곡이 품고 있는 장점은 절제된 문장구사력과 더불어 잔잔한 정서를 통해 표출되는 물기 어린 작가의 시선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민이 자칫하면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익숙한 감상으로 흐르기 쉽다는 점에서 선뜻 당선작으로 밀기가 망설여졌다.
「물에 녹는 물고기」는 사랑의 현상적인 외피에 감춰져 있는 본질, 이를테면 사랑의 뜨거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언뜻 보면 두 남녀의 밀고 당기는 유치한 연애 이야기 같은 이 희곡에 심사위원들이 기꺼운 호의와 지지를 보낸 것은 직접적인 경험이 바탕이 됐을 듯싶은 글의 진정성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미덕이 아이러니하게도 결국엔 이 작품을 자신의 경험 안에 가두어놓는 한계로 작용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심사위원들 간에 가장 논란이 됐던 작품은 「아버지가 방으로 돌아가신다」였다. 이 작품은 극의 배경이 되는 시간과 공간이 철저하게 계산된 희곡이다. ‘문’으로 압축되는 상징과 은유가 해독 불가에 가까운 난해함을 던져주었지만 오히려 그 모호함이 특별한 매력으로 다가왔던 독특한 작품이다. 그러나 미궁을 헤매는 듯한 미스터리 구조가 마지막에 가서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글의 분량이 장막(長幕)에 가까운 「물에 녹는 물고기」는 단순한 구조 속에서도 시종일관 팽팽하게 이야기를 끌고가는 작가의 역량을 고려할 때 이번 기회가 아니더라도 곧 연극 현장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있어 일단 제외됐고 논의의 초점은 「아버지가 방으로 돌아가신다」와 「삼미약국」 두편으로 모아졌다.
기성작가의 솜씨를 빼닮은 안정감 있는 노련함에 손을 들어줄 것인가 아니면 불투명하고 흐릿하지만 그 속에서 자신만의 색깔과 목소리를 선명하게 각인시킨 실험정신과 패기에 높은 점수를 줄 것인가를 놓고 심사위원들은 오랜 시간 동안 심사숙고했다. 그러나 각각의 희곡이 품고 있는 미덕과 장점만큼이나 그 결함과 단점도 뚜렷해서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았다. 토론을 거듭할수록 어느 한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기는커녕 두 작품이 당선작이 되기에는 미흡한 점들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다.
쉽게 가닥이 잡히지 않자 심사위원들은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중심논의에서 배제했던 본심작들을 다시 정독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인물의 설정이 명확하지 못하고 극구조가 느슨해서 주제의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한쪽에 밀쳐놓았던 작품 한편을 새롭게 꺼내들게 됐다. 그 희곡이 바로 「섬」이다.
「섬」은 앞에서 언급한 몇가지 결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충분히 상쇄시킬 만한 미덕도 함께 갖추고 있는 작품이다. 고시원의 방들을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에 비유하고 있는 이 작품은 그 섬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그 얼굴들은 문명화된 사회에서 고립되고 소외된, 그리하여 캄캄한 밀실에 외롭게 버려져 있는 현대인의 자화상에 다름아니다. 또한 전망 없는 시대를 살아가는, 꿈을 잃어버린 청춘의 일그러진 초상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압축과 상징을 통해 암담한 현실의 공간을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는 환상의 공간으로 확장시킨 뛰어난 상상력도 일품이었다.
「아버지가 방으로 돌아가신다」와 「섬」은 작가가 고심해서 열심히 쓴 흔적이 드러난 작품이며 둘 다 작가의 비극적인 세계관을 은연중에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 굳이 한편을 선택하자면 희망의 빛이 새어들어올 만한 작은 틈새를 열어놓은 「섬」에 표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아픔과 슬픔으로 버무려진 고단한 삶의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은 늘 그렇듯이 미래를 끌어당기는 단단한 희망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현장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선배들을 거울삼아 후배들 역시 조금 더 분발해서 한국문학과 연극의 새로운 길을 개척해가는 훌륭한 작가로 성장해주기를 부탁드린다.
최진아 최창근
희곡 | 당선소감
올해 초 대학생 몇몇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었지만 그들이 세상에 고한 이별에 대한 짧은 기사 몇줄은 가슴속에 작은 발자국을 남기고 지나갔다. 그 안에는 빗물이 고였다. 그 웅덩이를 내내 들여다보던 한해였다. 많은 생각을 했지만 남은 것은 없었다. 지쳐 나가떨어질까 싶은 때가 되고서야 나는 간신히 수면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샘처럼 몇개의 말이 솟았다. 안아줄게요. 그래도 안아줄래요. 이 한줄의 대사로 시작된 글이다.
그 작은 희망의 불씨를 놓치지 않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린다. 천둥벌거숭이와 다를 바 없던 나를 하나하나 이끌어 희곡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에 눈뜨게 해주신 장성희 선생님, 고연옥 선생님, 이원기 선생님, 이대영 선생님께도 당연히 크디큰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또한 내 세계의 한축을 당당히 담당하고 있는 친구들, 중앙대 디지털문예 49기 동기들—유리, 나원, 동경언니, 수, 수정, 성은에게도 감사하다. 언젠가 반드시 모두 같은 목표점에서 만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기꺼이 고운 축하를 보내준 보미, 은초, 유진, 주현, 수연, 주영, 세준, 수영, 강, 현주 또한 빼놓지 말아야 할 사람이다. 이들이 축하해주지 않았다면 기쁨 또한 반으로 줄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가족과 이 모든 기쁨을 나누어야 마땅할 것이다. 나조차 스스로를 의심할 때 늘 나를 작가라고 불러주신 부모님과 웃는 얼굴로 집을 밝게 비춰주는 오빠에게 이 세상 무엇보다 큰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엄마, 아빠. 이 부족한 딸에게 퍼부어주시는 그 무한한 신뢰는 내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깊은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아요. 정말 감사하고 사랑해요.
응모 후 보냈던 몇몇의 불면의 밤이 떠오른다. 쉬어가되 포기하지 않는 작가가 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태달라는 짤막한 기도로 지새우던 밤들이었다. 너무나도 받고 싶던 상이었고, 받았기에 형언할 수 없이 기쁘다. 그리고 그 교환의 댓가로 걸었던 건방진 다짐을 마지막으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나는 반드시 좋은 작가가 되겠다. 반드시 좋은 글을 쓰고야 말겠다.
김경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