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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나리오
강서현 姜瑞現
한국외대 영미문학전공 4. 1987년생.
thessalythea@hanmail.net
블랙아웃
씨놉시스
지적 장애를 가진 순이는 재개발을 앞둔 아파트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아파트 주민들은 대개 이사를 갔고, 막 이사 채비를 마친 경수네마저 떠나버리면 남는 것은 순이네뿐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거처조차 확실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순이에게 내비치지 않는다. 대신 매일 성실히 주인 없는 공터에서 채소를 키우고 꼭두새벽에 일어나 폐지를 줍는다. 순이의 모자란 지능은 할머니의 지혜가 채우고, 늙고 쇠한 할머니의 체력은 순이의 젊음이 채운다. 가난하고 부족한 삶이지만, 할머니와 순이의 일상은 평화롭다. 이들의 조화로운 삶을 깨뜨리는 것은 재개발에 대한 압력도, 순이의 모자란 지능도, 할머니의 약한 몸도 아니다. 자신은 순이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하지만 강자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해지는 힘없고 평범한 사람들이다.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는 낡은 복도식 아파트를 무대로, 낯선 소리가 주는 공포심을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씨나리오다. 자신보다 더 약한 자에게 악랄해지는 인간의 잔인성과, 순이를 더 깊은 어둠으로 몰아넣는 것은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쓰고 싶었다.
*지면사정으로 작품의 일부만 싣습니다. 씨나리오 전문은 대산문화재단 홈페이지(www.daesan.or.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전략)
4. 골목길. 새벽
할머니, 작은 손수레를 끌며 좁은 골목길을 오른다. 수레에는 이미 상자가 가득 실려 있고, 한쪽으로 할머니와 순이가 배달해야 하는 우유가 보인다. 순이는 잠이 덜 깬 듯 눈을 비비며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수레를 끄는 소리가 느리고 고르게 이어진다. 할머니의 한쪽 다리를 끄는 발소리와 타닥타닥 걷는 순이의 발소리가 새벽의 골목을 울린다.
앞서가던 할머니의 수레가 멈춰서자 순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본다. 할머니가 골목에 버려진 상자를 가리킨다. 순이, 그 상자를 주워 수레에 싣는다. 순이, 계속 잠이 깨지 않아 연신 하품을 한다. 할머니, 순이가 상자를 싣자 다시 힘겹게 수레를 끈다. 다시 이어지는 수레 끄는 소리와 두사람의 발소리. 할머니의 발소리, 점점 느려지고 한쪽 다리를 끄는 소리가 더욱 심해진다. 우유주머니를 집어드는 순이, 할머니를 앞질러 걸어간다. 순이의 빠르고 힘찬 발소리. 순이, 골목을 쏘다니며 우유를 배달한다. 순이는 여전히 잠이 덜 깬 모습이지만 배달해야 하는 곳을 정확히 알고 움직이고 있다.
<Cut to>
순이, 대문에 걸린 우유주머니에 우유를 넣고 있다. 그와 동시에 한쪽에서 불이 켜진다. 그를 보자 돌아서는 순이. 곧이어 대문이 열리고 할아버지1, 대문 밖으로 나온다.
할아버지1 (순이의 뺨을 가볍게 톡톡 두드리며) 아이고, 오늘도 나왔구나.
순이, 할아버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까딱 하고 인사를 한다. 누군지 알지는 못하지만 어른에게 예의상으로 인사를 하는 모양새다.
할아버지1, 골목으로 한발 나와 수레를 끌며 뒤따라오는 할머니에게 인사를 건넨다.
할아버지1 아이고, 힘드시겄소. 내가 좀 도와드려?
할머니1 (할아버지 쪽을 보지 않고 묵묵히 수레를 끌며) 아직은 괜찮수. (고개를 들어 순이에게) 너는 뭣 하고 섰냐! 빨리 배달 안하냐!
순이, 할머니의 호통에 우유주머니를 들고 골목 위쪽으로 뛰어간다. 순식간에 앞질러 가는 순이. 할머니, 다시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묵묵히 수레를 끈다. 수레를 끄는 할머니의 속도는 더디다.
할아버지1 (살갑게) 저게 올해 나이가 몇인가? 스물인가? 곱게도 컸네. 인자 시집갈 때 안됐소?
할머니1 시집은 무슨. 저 모자란 것을 누가 데리고 살겄소. 나랑 평생 살아야제.
할아버지1 아따, 할매도 이제 궂은 일 그만하고, 그냥 저것 나한테 보내지? 나가 할매 떠난 지도 오래됐고 그냥 적적해서 그러니께. 나가 달마다 할매 용돈도 드리고……
할머니1 (할아버지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며) 일없소! 징그러운 소리 마소! 나는 저것 남한테 보낼 생각 없응께 그런 줄 아슈. 그리고 담부터는 남의 손녀딸 얼굴 함부로 만지지 마소!
할머니, 못마땅한 얼굴로 수레를 끌면서 자리를 뜬다. 계속 구시렁거리는 할머니.
할머니1 다 늙어빠진 놈이 발정이 났나. 죽을라면 점잖게 죽을 것이지, 쭈그렁 할아범이 어딜 넘봐……
할아버지1, 불쾌한 듯 할머니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으며 집으로 다시 들어간다. 할머니, 순이가 뛰어올라간 오르막을 수레를 끌며 오른다. 할머니 혼자 수레를 끄는 소리는 아까처럼 고르지 못하고 힘에 부친다. 앞서 가던 순이, 할머니가 힘들어하자 다시 할머니에게 뛰어와 뒤에서 수레를 같이 민다. 수레는 다시 느리고 고르게 굴러간다.
5. 할머니의 집. 아침
할머니, 부엌에서 아침식사 준비중이다. 할머니, 정성스레 쏘시지에 계란을 입혀 부치고 있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순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다. 문틈으로 보이는 하나뿐인 방. 몇 없는 세간살이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다. 옷장 위에 얹힌 상자마저도 가지런히 줄 서 있다. 방 한쪽에는 할머니의 이불이 곱게 개어져 있고, 순이는 그 옆에서 몸을 일으킨다. 할머니의 이불은 여기저기 덧댄 자국이 보인다. 그에 비하면 순이가 덮고 있는 캐릭터이불은 아주 새것이다.
할머니 순이야! 밥 먹어야제!
순이, 비몽사몽 비틀거리며 일어나 이불을 개기 시작한다. 잠이 다 깨지 않은 모습이지만, 이불을 반듯하게 개고 있다. 순이, 깔끔하게 접은 자신의 이불을 옷장 안에 넣고 뒤이어 할머니의 이불도 집어넣는다. 순이가 밖으로 나오자 할머니, 갓 부친 쏘시지부침을 접시에 담는다. 순이가 자리를 잡고 앉자 할머니, 쏘지지를 순이 앞에 놓는다. 밥상 위에 올라온 쏘시지를 보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순이. 바로 쏘시지부침을 젓가락으로 찔러서 입에 넣는다. 순이, 쏘시지를 씹으며 콧노래를 부른다. 순이가 즐거운 듯 몸을 흔들자 할머니, 빙그레 웃는다.
할머니 쏘시지만 먹지 말고 밥도 같이 먹어 이년아.
할머니, 손으로 순이의 머리를 쓸어 귀 뒤로 넘겨준다. 할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cut to>
순이, 스스로 옷을 입고 있다. 순이가 입은 핑크색 티셔츠는 매우 낡고 촌스럽다. 하지만 거울을 보는 순이의 얼굴은 만족한 듯 뿌듯해 보인다. 티셔츠의 가슴 부분에 달린 리본을 제대로 묶지 못하는 순이. 할머니가 다가와서 순이의 엉성한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주고 리본을 묶어준다. 할머니가 묶어준 리본은 양쪽 매듭의 크기가 고르고 꼼꼼하다. 할머니, 행상할 채소꾸러미를 들고 순이의 손을 잡아 집을 나선다.
<cut to>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순이와 할머니. 문에 끼여 있던 광고지가 후두둑 떨어진다. 할머니, 광고지를 주워 모두 우유구멍 안으로 밀어넣는다. 그리고 현관문을 잠근다. 열쇠, 부드럽게 돌아가서 잠긴다. 할머니, 문이 잠겼는지 손잡이를 돌려 다시 한번 확인한 후에 열쇠가 걸린 굵은 줄을 목에 건다. 목에 건 열쇠를 보이지 않도록 옷 속으로 잘 넣은 후, 순이의 손을 잡고 아파트 복도를 함께 걸어나간다. 할머니의 속도에 맞춰 걷는 순이. 아파트 복도에는 이사 간 사람들이 버리고 간 낡은 세간들이 듬성듬성 보인다. 긴 복도를 따라 늘어선 집들은 죄다 문이 활짝 열려 있다. 텅 비어 있는 집들. 할머니와 순이를 제외한 다른 집들은 모두 이사를 갔다. 빈 집을 지나 복도를 걸어나가는 두사람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진다.
할머니 할머니가 문단속은 몇번 확인해라 그랬지?
순이 두번.
할머니 모르는 사람한테 문 열어주면 되냐 안되냐?
순이 안돼.
할머니 할머니 장사할 때 모르는 사람 따라가면 돼, 안돼?
순이 안돼.
할머니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먹으면 돼, 안돼?
순이 안돼.
할머니 경찰 전화번호가 몇번이여?
순이 112.
할머니 공중전화는?
순이 긴급통화 누르고 112.
두사람의 말소리, 점점 작아진다.
6. 횡단보도 앞. 아침 출근 시간
할머니와 순이, 채소를 놓고 행상을 하고 있다. 오늘도 할머니가 늘어놓은 것은 잘아빠진 것뿐이다. 할머니가 손을 흔들어 지나가는 행인을 부르지만, 사람들은 할머니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빠른 걸음을 옮긴다. 순이는 횡단보도 앞에 멈춰선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다. 그 사이로 보이는 여자1. 큼직한 리본 핀으로 머리를 묶었다.
순이 오늘은 리본 했네.
신호가 푸른색으로 바뀌고, 사람들 일제히 건너편으로 건너간다. 여자1이 걸음을 떼는데 리본 장식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순이, 그것을 발견하고 잽싸게 튀어나와 리본을 집는다. 여자1에게 돌려주려고 고개를 들자 여자1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벌써 건너편까지 멀어져 머리꼭대기만 간신히 보인다. 순이, 뭐라 말을 하지도 못하고 여자1의 뒷모습을 보며 서 있다. 순이, 안타까운 탄식만 내뱉는다. 하지만 금세 뒤에서 사람들이 치고 나온다. 사람들에게 떠밀려 반대쪽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는 순이. 할머니가 있는 쪽으로 가려 하지만 사람들에게 치여 가지 못한다. 결국 횡단보도를 건너고 만 순이. 반대쪽에 도착하자마자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가는 남자에게 부딪혀 리본을 떨어뜨린다. 리본, 사람들의 발에 밟힌다. 그 리본을 다시 주우려 고개를 숙이는 순이. 가슴의 리본이 풀어져 그 사이로 젖가슴이 조금 드러나 보인다. 사람들 틈바구니를 뚫고 힘겹게 리본을 줍는 순이. 그때 불쑥, 거친 남자 손이 튀어나와 순이의 팔을 세게 움켜잡는다. 놀라는 순이. 순이를 잡은 것은 할아버지1이다.
할아버지1 아이고 우리 아가. 여기서 뭐 하나? 가자. 할머니한테 데려다줄게.
할아버지1, 순이의 손을 더욱 세게 잡고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려 한다. 순이, 할머니가 있는 횡단보도 반대쪽으로 가려고 하지만, 할아버지1이 손을 놓아주지 않는다. 골목 안쪽으로 할아버지1에게 끌려가는 순이. 주위 사람들은 순이와 할아버지를 신경쓰지 않고 스쳐지나간다. 순이, 횡단보도 반대쪽을 향해 손을 뻗지만 할머니의 모습은 사람들에 가려 보였다 보이지 않기를 반복한다. 순이 간절한 눈으로 주변 사람들을 쳐다보지만 간혹 순이와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은 순이의 이상한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눈살을 찌푸릴 뿐,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버린다.
<cut to>
골목 안쪽으로 끌려가고 있는 순이. 점점 더 인적이 드물어진다. 순이가 가지 않으려고 떼를 쓰자 할아버지1, 순이의 입을 틀어막는다. 그때 골목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남자 하나, 순이와 할아버지1을 발견한다. 할아버지, 남자를 보고 별일 아니라는 듯 웃어 보인다.
할아버지1 아이고. 우리 손녀딸이 정신이 좀 이상해.
남자, 순이와 눈이 마주친다. 점점 가까워지는 남자. 순이, 절실히 도움을 바라는 눈으로 남자를 바라본다. 점점 가까워지는 남자의 얼굴. 남자는 순이를 신기하게 쳐다보고는 그냥 지나쳐버린다. 남자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할아버지1, 더욱 거칠게 순이를 잡아끈다. 가지 않으려 버티는 순이의 다리, 거칠게 끌리는 소리를 낸다. 순이를 잡아끄는 할아버지1의 손이 점점 노골적으로 엉덩이와 가슴을 향한다.
그때 뒤쪽에서 등장한 할머니. 전대로 할아버지1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친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는 할아버지1. 할머니, 숨을 헐떡이며 매섭게 할아버지1을 쏘아보고 있다.
7. 할머니의 집. 저녁
할머니, 회초리를 들고 순이를 매질하고 있다. 순이, 울며 잘못했다고 손으로 비는 시늉을 하지만 할머니는 매질을 멈추지 않는다. 매질을 피해 좁은 집을 뛰어다니는 순이. 할머니, 순이를 따라다니며 끝까지 매질한다. 눈물범벅이 된 순이의 얼굴과 벌겋게 상기된 할머니의 얼굴.
할머니 야 이년아. 거길 왜 갔어, 이 나쁜년! 할미가 모르는 사람 따라가면 안된다고 했냐, 안했냐! 할머니가 했냐 안했냐! 거길 왜 가, 왜 따라가 이년아! 거길 왜 가!
순이이 (엉엉 울며) 할무니.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할머니의 회초리가 순이의 팔뚝과 허벅지를 찰싹 때린다. 고통스러워하며 맞은 부위를 손으로 비비는 순이. 순이가 울며 싹싹 빌자 할머니, 회초리를 놓고 손으로 등을 친다.
할머니 (울음 섞인 목소리로) 이년아, 무슨 일이 생길 뻔했는지 알긴 하는겨! 응? 무슨 일이 생길 뻔했는지 아냐, 이것아!
가슴을 때리며 결국 울음을 터뜨리는 할머니. 순이, 주저앉아 울고 있다.
8. 같은 시각 경수의 집.
경수, 얼굴을 모니터 앞으로 들이밀고 컴퓨터 게임에 열중하고 있다. 모니터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은 모습이다. 그때, 열린 창문으로 순이의 징징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순간 찌푸려지는 경수의 얼굴. 하지만 스피커에서 새어나오는 총소리와 긴박한 음악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경수,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작게 심호흡을 한다. 눈을 더욱 부릅뜨고 모니터에 집중하는 경수. 경수의 캐릭터, 목표물을 발견하고 서서히 접근한다. 긴장한 듯 마른 침을 삼키는 경수. 경수의 캐릭터가 적진에 가까이 접근하고, 순이의 울음소리도 더욱 크게 들린다. 꿈틀거리는 경수의 눈썹. 그때, 목표물이 경수의 캐릭터를 발견하고 도망을 시도한다. 경수, 다급하게 목표물을 조준하지만 결국 놓치고 만다. 조준에 실패하자마자 짜증을 내며 마우스를 집어던지는 경수.
경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아! 저 병신년이 또! (창문 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씨발! 조용히 해!
9. 할머니의 집. 늦은 밤
잠들어 있는 순이. 눈가에는 아직도 눈물이 촉촉하다. 고요한 방에는 순이의 쌔근거리는 숨소리만이 들린다. 할머니, 옆에 잠든 순이의 얼굴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순이의 눈물자국을 훔친다. 할머니, 낡은 서랍장을 열어 연고를 꺼낸다. 삐걱이는 서랍장 소리. 순이, 깨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얼마 남지 않은 튜브형의 연고. 할머니, 끝에서부터 말아 요령껏 연고를 짜낸다. 순이의 팔과 다리 여기저기에 매를 맞은 자국이 붉게 남아 있다. 할머니, 맞은 자리에 연고를 발라준다. 순이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얼굴에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보인다. 할머니, 연고를 다시 서랍장에 넣는다. 슬쩍 눈물을 훔치는 할머니. 그러고는 순이의 옆자리에 눕는다. 할머니가 자리에 눕자 본능적으로 할머니의 품으로 파고드는 순이. 할머니, 순이를 꼭 끌어안는다. 순이의 등을 토닥이는 할머니.
할머니 (나지막이) 아이고 내 새끼. 내 새끼……
할머니의 나직한 목소리와 나란히 누운 두사람의 모습 Fade out.
(후략)
씨나리오 | 심사평
총 47편의 응모작 중 당선권에 근접한 것은 다음 6편이다.
「장학퀴즈」는 장안의 화제였던 장학퀴즈를 중심으로 권력을 둘러싼 남자들의 암투와 다양한 부자지간을 통해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한 작품이다. 흥미롭고 다채로웠지만, 등장인물이 많은 탓에 산만한 느낌도 들었다. 주인공의 형이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다가 생을 마감하는 설정도 쉽게 마무리되어버린 느낌이다. 장점도 많지만 단점도 섞여서 총점이 높지 않은 셈이라 아깝다.
「엄마로소이다」는 상당히 매력적인 꼬마아가씨 덕분에 가장 속도감있게 읽은 작품이다. 그만큼 안일한 설정과 연결고리를 지녔다는 뜻도 되지만 어린 딸과 주변인물의 대화는 매순간 빛이 났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극을 신바람나게 이끌어온 리듬감이 사라지며 굳이 다루지 않아도 될 이야기에 친절을 베푼다. 그렇지만 꼬마의 캐릭터만으로도 훌륭한 평가를 받을 만하다. 정말 유쾌했다.
「레몬타임」은 응모작을 통틀어 가장 매력적인 제목이다. 작가의 설명대로 김승희 시인의 시에서 빌려왔다고 해도 내용과 절묘하게 어울리는 제목이라 칭찬하고 싶다. 별일 아닌 것 같은 얘기를 시종일관 차분하게 풀어가며 그 위에 궁금증이란 고명을 살짝 얹어놓은 느낌이다. 깊이를 거부한 채 소소하게 풀었다는 이유가 경쟁작한테 밀린 정도라 말하고 싶다.
「비겁한 암살자」는 지문과 대사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면서도 힘이 있다. 대단하다. 하지만 주인공 강우를 비롯 여러 등장인물의 행동에 무리함이 보인다. 등장인물들이 장준하, 박정희, 김재규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래서 논픽션이란 느낌을 풍기며 팽팽한 긴장감을 준다. 그러나 극의 결말과 달리 실제로 장준하와 박정희의 죽음엔 4년이란 시차가 있기에 이런 모순을 깨닫는 순간, 시종일관 생생한 긴장감을 주던 설정들이 빛을 잃으며 매력이 반감된다. 실화와 역사를 다룰 땐 더 신중해야 한다.
「붉은 낙화」는 중년과 노년의 사랑을 그린 수작이다. 선자와 덕원의 관계가 아릿한 여운을 남긴다. 정말 대학생이 썼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그 나이대 대사들이 생생한, 아주 탄탄하고 좋은 작품이다. 하지만 미자의 급격한 변화가 어색했으며, 모친이 일본군 위안부였단 설정이 잔잔한 극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또한 덕원의 성격이 순정파로만 묘사되어 설득력이 부족했다. 영화 대본다운 영상적 상상력은 부족했다.
「블랙아웃」은 문장력이 좋고 세밀하여 읽는 내내 상황과 공간이 머릿속에 쉽게 그려지며 끝까지 호기심과 긴장감을 늦추지 않게 된다. 소외된 계층에 대한 시선과 애정도 높이 사고 싶다. 캐릭터와 구성도 수준급이다. 하지만 이 대본을 영화화하자는 투자사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투자를 받을 수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게 보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영화화된다는 것이 결코 훌륭한 대본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게 우리나라 영화계의 현주소다. 그렇기에 응모작들이 대학생의 작품이란 점을 중시해서, 흥행성과 오락성을 떠나 글쓰는 이가 갖추어야 할 소양과 기초실력,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이해와 자세를 엄중하게 살폈다. 즉, 1. 소재가 신선하고 관점에 개성이 있는가 2. 다루는 내용이 의미가 있는가 3. 구성의 완성도와 문장력을 갖추었는가, 이 세가지에 무게를 두었다. 그러므로 당선작을 비롯한 본심작들은 유행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만의 소중한 시각과 개성을 다듬어나가길 바란다. 기대하겠다.
이정향
씨나리오 | 당선소감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부터 복도식 아파트에 살았다. 집에 혼자 있을 때면 신발을 끌면서 뛰어오는 언니의 발소리, 아버지의 열쇠고리가 흔들리는 소리, 엄마의 나직하고 규칙적인 발소리를 기다렸다. 잠 못 드는 새벽이면 낯선 남자의 둔탁한 발소리, 옆집 할아버지의 지팡이 짚는 소리도 무서웠다. 옆집 벨이 고장나서 하루종일 울리는 것을 듣다가 문득 이걸 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감에 맞추려고 급하게 써서 급하게 보냈다. 씨나리오 쓰는 것을 배운 적도 없어서 본심에 올라가기나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감기몸살로 몸져누워 있던 중에 수상소식을 들었다. 그냥 멍했다. 사실은 수상소감을 쓰는 지금도 멍하다.
씨나리오를 쓰는 동안은 가슴이 답답해서 여러번 그만두려 했다. 이렇게 가여운 이야기는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일이면 좋겠다. 제발 순이와 할머니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길 바란다.
주변 사람들에게는 이제야 고백하는 일이지만, 짧든 길든 글은 매일 썼다. 다만 내가 글쓰기의 재능을 가진 사람인지 항상 궁금했다. 아무래도 재능이 없는 것 같아 매일 포기하려 했지만 잠자리에 누우면 쓰지 못한 글들이 나를 괴롭혔다. 어느덧 현실을 좇아야 하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도저히 마음이 비워지지 않았다. 그러다 비워지지 않는 마음도 재능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타고난 천재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게 주어진 재능 하나가 있다면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끈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먹은 지 1년 만에 이 상을 받았다. 앞으로도 그 끈기로 2년, 3년 쓰다보면 또 하나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직 제대로 시작조차 하지 않은 것을 안다. 많이 부족한 것 역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이렇게 상을 받은 것을 보면 그렇게까지 하찮은 재능은 아닌가보다. 지금은 그게 마냥 기쁘고 감사하다.
강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