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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이기호 李起昊
1972년 원주 출생. 199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소설집 『최순덕 성령충만기』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 등이 있음. antigiho@hanmail.net
이정(而丁)
그녀가 아들에게 개명(改名)에 대해서 처음 말한 것은 11월 하순의 일이었다. 아들이 국립대 수시모집에 합격한 후, 함께 지리산 근처로 여행을 다녀온 직후의 일이기도 했다. 여행에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던 딸도 동행했다. 말하자면 가족여행인 셈이었다. 그 여행을 위해서 딸은 과외 아르바이트와 여론조사 설문기관 아르바이트 일정을 어렵게 조정해야만 했고, 그녀 또한 칠년째 일하고 있던 한과 공장 사장 부부에게 사정을 설명해야만 했다. 1956년생, 그러니까 그녀와 같은 해에 태어난 사장 부인은, 강정 라인과 유과 라인을 옮겨다니며 함께 일을 하곤 했는데, 어딜 갈지 아직 정하지 않았다면, 하면서 지리산 화엄사 바로 아래에 있는 콘도 이용권을 내밀었다. 그녀는 사장 부인에게 손사래를 치면서 이렇게까지 하실 필욘 없다고 했지만, 끝내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 가족의 여행 목적지는 지리산이 되었다.
콘도 앞 산채비빔밥 전문집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그들 가족은 화엄사 일주문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왼쪽에는 아들이, 오른쪽에는 딸이, 각각 그녀의 팔짱을 끼고 걸었다. 늦가을 바람은 선선했지만 햇살은 따사로웠고,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씩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오래된 낙엽에선 튀밥을 튀기듯 고소한 냄새가 났다. 그들은 천천히 걸었고, 자주 멈춰서서 산 아래를 바라보았으며, 그녀는 이대로 죽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후회도, 미련도,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는 그때까지만 해도 두달 후, 자신이 또다시 같은 생각에 빠지게 될 것이라곤 짐작도 하지 못했다. 두달 후, 그녀는 후회와 미련 때문에 죽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히게 된다.
화엄사 경내로 들어서기 전, 그들 가족은 검푸른 이끼가 낀 부도와 그 맞은편에 있는 공적비 하나를 보게 되었다. “아, 이게 이 사람 공적비구나.” 사회학을 전공하고 있는 딸이 검은 대리석으로 된 공적비 가까이 한 걸음 더 다가가며 말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사망한 한 경찰 총경을 기리는 공적비는 고은 시인이 쓴 것이었다. ‘이제 해원의 때가 무르익었으니 천하의 영봉 지리산을 생사의 터로 삼아 동족상잔의 피어린 원한을 풀어 그 본연으로 돌아감이 옳거니 여기 근본법륜 화엄사 청정도량에 한 사람의 자취를 돌에 새겨 기리도록 함이라……’로 시작된 문장은 ‘백척간두의 상황 중에 서로 이념을 달리하는 핏줄 하나라도 구출하자는 숭고한 인간애를 낱낱이 보였으며 전설적인 상대였던 이현상의 시신을 정중하게 장사 지내기도 하였거니와 조계종 통합종단 초대 종정 이효봉 대종사로부터 감사의 뜻을 받기도 하였던바 새삼 그의 유덕을 길이 전하는 까닭을 이에 밝혀놓으니 지나는 길손이여 한 겨를 머물러주소서. 산은 여기 있고 물은 먼 데로 흘러감이라’로 마무리되었다. 딸은 소리내어 공적비 내용을 읽었고, 그녀와 아들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전쟁 때 화엄사를 소각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았지만, 법당 앞에서 문짝 두개만 태우고 만 일, 덕분에 쌍계사와 선운사와 백양사도 무사하게 된 일들이 거기 씌어져 있었다. “너, 이 사람이 더 놀라운 게 뭔 줄 알아?” 딸은 아들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아들은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고 말았다. “이 사람 죽음에 관한 것인데……” 딸의 설명에 의하면, 젊은 시절 좌익 계열인 조선의용대 소속으로 항일유격전 활동을 한 바 있는 공적비의 주인공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경찰에 특채되어 빨치산 토벌에 혁혁한 전공을 세운다. 하지만 휴전 이후, 조선의용대 경력과 이현상의 장례를 치러준 사실 때문에 좌익 혐의로 조사를 받고, 좌천도 당하게 된다. 그리고 1958년 금강 곰나루로 가족과 함께 물놀이를 나갔다가, 아들을 바위 위에 세워둔 채 「볼가강의 뱃노래」를 부르면서 뚜벅뚜벅 강으로 걸어들어갔다는 것. 그게 그의 마지막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흘 후에 강바닥에서 이 사람 시신을 찾았는데…… 전쟁 때 침수된 인민군 탱크를 꼭 끌어안은 채 죽어 있더라는 거야.”
“그럼, 그 사람도 좌익이었던 거야?”
아들이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모르지…… 그냥 그래서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다는 얘기야.”
“나는 왜 그 사람이 꼭 아들 앞에서 그래야 했는지…… 그게 더 궁금한데?”
그녀는 딸과 아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녀가 개명에 대해서 처음 생각한 것은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아들은 대학 진학과 동시에 ROTC 지원서를 내겠다고 말했다. 장기복무 지원을 하면 장학금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아들의 설명이었다. “뭐야, 그럼 군인이 되겠다고? 차라리 육사를 가지?” 콘도 거실에 비스듬히 누워 사과를 먹던 딸이 말했다. “육사는 여름에 지원을 하거든. 그땐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고……” 아들은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지금은 고민이 다 끝났거든.” 그녀는 사과를 깎다 말고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들은 반쯤 고개를 숙인 채 주먹으로 툭툭 제 종아리를 두들기고 있었다. 신중하고 반듯한 아이였다. 아버지 없이 자랐지만 한번도 원망이나 서러움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또 그것을 농담으로라도 쉽게 넘기려 든 적이 없었다. 그녀는 아들이 수학여행을 가지 않고 교실에 남아 자습했다는 사실을 후에 담임교사와의 통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학원에서 강사보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강의를 들은 사실 또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꼭 그런 아들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한달에 한번 있는 공장 회식에서 술은 입에 대지도 않고 항상 아홉시 이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가끔 아들이 아버지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등록금 때문이라면…… 그럴 필요 없다.”
그녀는 아들의 얼굴을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엄마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꼭 그것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에요.”
아들은 사과 한조각을 집어들면서 말했다.
“직업군인으로 사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아서 그래요. 어차피 갈 군대고……”
“엄마 때문에 그러니?”
“그냥 이것저것 다 생각해보고 결정한 거예요.”
그녀는 소리내지 않고 작게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몸도 약한 애가 어떻게……”
“그리고 아직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것도 경쟁률이 꽤 높다고 하더라고요.”
아들은 그렇게 말한 후, 허리를 뒤로 활처럼 구부리면서 스트레칭을 했다. 그녀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누워 있던 딸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어휴, 참 대단한 모자네. 이건 뭐 하나밖에 없는 딸을 한순간에 이기적인 인간으로 만들어버리니. 참 나……”
아들은 그 말을 듣고 농담으로라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슬쩍 미소만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그녀는 지리산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난 후, 아들에게 개명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책상에 앉아 원동기 면허시험 문제집을 보고 있던 아들은 허리를 세운 채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가 이름을 바꿀까 하는데……”
“이름을요?”
아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곤 손에 쥐고 있던 볼펜을 내려놓았다.
“엄마도 나중에 안 건데…… 엄마 이름이…… 그 사람 호랑 똑같다고 하더라.”
그녀의 이름은 최이정(崔而丁)이었다. 그건 박헌영의 호와 똑같은 이름이었다. 그는 한때 ‘조선의 레닌’으로 불리던 인물이었다.
“그건 그냥 우연 아닐까요? 동명이인도 많잖아요?”
아들은 책상에서 내려와 그녀 앞에 앉았다.
“그게…… 나도 네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긴데…… 한자까지 똑같다고 하더라. 그런 한자로 이름을 짓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도 하고……”
그녀의 이름을 풀어보면 ‘고무래가 되겠다’라는 뜻이었다. 그것 또한 남편에게서 들어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아들에게 남편 이야기를 하게 된 셈이었다.
“아버지랑 헤어진 것도 그것 때문인 거예요?”
그녀는 아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은 농촌진흥청에서 일했던 사람이었다.
“그럼, 외할아버지가…… 그쪽이셨던 건가요?”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그랬던 거 같아. 엄마 다섯살 때 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얼굴도 잘 기억 안 나고…… 술만 드시다가 무슨 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얘기만 들었지, 뭐.”
아들은 방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외할머니 말로는 저쪽에서 무슨 학교를 다녔다는 거 같은데…… 그 이상은 나도 몰라. 네 외할머니도 일찍 돌아가셨고 나도 곧 고향을 떴으니까.”
아들은 한참 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천천히 말했다.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장기복무 때문에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니?”
“이젠 연좌제 같은 건 없대요. 저 때문에 그러실 필욘 없어요.”
“그래도 군인인데…… 신원조회 같은 건 할 거 아니니? 엄마 이름을 알아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만약 그게 문제가 된다면…… 개명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을 거예요. 어쨌든 기록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요.”
이번엔 그녀가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녀는 괜스레 손가락으로 방바닥에 자신의 이름을 써보았다.
“그래도 엄만 이번 기회에 바꾸고 싶어. 네 외할아버지가 무슨 뜻으로 이렇게 딸 이름을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싫다. 더이상 이름 때문에 불안하게 살기도 싫고.”
아들은 잠시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곤 알겠다고, 짧게 대답했다.
“네가 한번 알아봐줄래? 요샌 다들 쉽게 개명을 한다고 하더라. 엄만 공장 일 때문에 도통 시간을 낼 수 없어서……”
그녀는 그렇게 말한 후, 안방으로 건너갔다. 무언가 짧은 후회가 그녀 가슴을 스쳐지나갔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떠나간 남편 생각을 잠깐 했을 뿐이었다. 남편은 그녀와 헤어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재혼을 했고, 그러곤 연락이 끊어졌다.
개명 절차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개명신청허가서와 주민등록등본, 그리고 경찰서에서 뗀 범죄경력조회서 등을 가정법원에 제출한 후, 결정문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불허되는 경우가 잦았지만, 근래 들어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대부분 허가해준다고 했다. 아들은 법무사 사무소를 통해서 일을 진행할까 하다가 그냥 제 손으로 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그쪽은 수수료가 만만찮았다.
“뭐, 따로 생각해두신 이름 있으세요?”
아들은 개명신청허가서를 앞에 두고 그녀에게 물었다.
“글쎄…… 뭐가 좋을까?”
그녀는 책상에 앉아 있는 아들의 어깨에 팔을 두르면서 말했다.
“그걸 먼저 정해야 신청 취지를 적을 수 있거든요.”
“그냥 네가 하나 지어주면 안될까?”
아들은 ‘제가요?’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젠 네가 내 보호자잖니?”
“그래도…… 아들이 엄마 이름을 지어준다는 게……”
“이름이 뭐 별건가? 네가 좋은 뜻으로 하나 지어줘. 이 나이에 이젠 이름으로 불릴 일도 없을 테니까……”
아들은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생각해볼게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후에 그녀가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들은 그때 ‘개명할 이름’보다는 ‘개명 사유’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무엇 때문에 이름을 바꾸려고 하는가? 어쨌든 법원의 허가 여부는 거기에 달려 있었다. 이유가 타당한가 타당하지 않은가.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 후, 그녀는 아들 책상서랍에서 파지가 되어버린 여러장의 개명신청허가서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거기엔 주로 이런 문장들이 적혔다가 다시 볼펜으로 북북 그어져 있었다.
‘한자의 뜻풀이가 시대에 뒤떨어지고 무거운 바……’
‘과거 역사적 인물의 호와 동일한 이름으로 인하여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한 오해를……’
‘부친의 정치적 색채가 지나치게 드러난 이름으로 인해……’
그 문장들은 대부분 끝을 맺지 못하고 중간에서 끝나버렸다. 그러니까 그녀의 아들은, 그 문장들이 필연적으로 논리를 갖출 수 없다는 점을, 논리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알지 못한 채 꾸역꾸역 문장들을 적어나갔고, 그래서 자주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외할아버지의 존재에 대해서 조금씩 의구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그것이 맞다. 문장의 시작은 바로 거기에 있을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아들은 의외로 쉽게 그 흔적들을 찾아냈다.
물론 그녀는 아들이 외할아버지에 대해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개명 절차가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것을 단지 아들의 신중한 성격 때문으로만 여겼다. ‘어떤 이름을 지어올까?’ 은근히 그런 기대를 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 안에 지금 아들이 바라보는 자신의 현재가 모두 담겨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모든 사실들을 새까맣게 잊고 지냈던 것이 맞다. 윤달을 앞둔 설날인지라, 신정과 구정 모두 한과 수요가 많았다. 동짓날부터 시작된 야근과 잔업은 성탄 전날을 빼곤 계속 이어졌는데, 그녀는 종종 라인에서 벗어나 쌀가마니를 나르거나 조청 반죽하는 일까지 거들어야 했다. 그 기간 동안 그녀는 아들이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는 것을 알곤 있었지만, 정확하게 어떤 종류의 일인지는 몰랐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와보면 아들은 항상 책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거나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바이트가 힘들지 않니?”라고 물으면 “기껏해야 햄버거 만드는 일인데요, 뭘” 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정말로 그런 줄로만 알았다.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아들이 보고 있던 책이 어떤 것들인지, 아들이 호적에 적힌 외할아버지의 이름만으로 인터넷 이곳저곳을 검색하다가 무엇을 찾아내게 되었는지, 또 그것 때문에 누군가와 오랫동안 통화를 하게 되었는지, 그런 것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들을 그녀가 어떻게 짐작할 수 있었겠는가. 그것들은 모두 사고 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녀는 그때 하루하루 그저 피곤에 지쳐 씻기 무섭게 잠들었을 뿐이었다.
아들이 스쿠터를 몰고 햄버거나 치킨, 콘쌜러드나 콜라 따위를 배달하는 것을 알았다면, 그녀는 그것을 하지 못하게 말렸을까? 아니, 아마 그러진 못했을 것이다. 사고 당일, 아들은 한 여자중학교 점심시간에 맞춰 후문 옆 담장 사이로 햄버거와 감자튀김을 배달했다. 여중생들은 교사들의 눈을 피하느라 시간을 끌었고, 담장 밖으로 동전을 싼 지폐를 던져주었다. 그게 일반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아들은 패스트푸드점으로 돌아가는 길에 핸들을 틀어 여자중학교와 한참 떨어진 그녀의 공장 앞까지 오토바이를 몰고 찾아갔다. 후에 아들이 근무하고 있던 패스트푸드점 매니저는 돌아올 시간이 지나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고 말했다. 걔가 근무시간에 거길 왜 갔는지 모르겠다고, 그런 말도 덧붙였다. 아들은 활짝 열린 공장 철문 앞을 몇분 동안 계속 오토바이를 탄 채 맴돌다가, 그러면서도 자주 손목시계를 바라보다가, 다시 공장 앞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오십여미터가량 벚나무가 심긴, 그녀가 아침저녁으로 오르내리는 길이었다. 그 길을 아들은 오토바이를 타고 내려갔고, 그리고 코너를 도는 순간 마주 오던 일톤 화물트럭과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그날 화물트럭 조수석에 타고 있던 공장 거래처 영업사원은, 아들이 입에 서류봉투를 물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것이 바람에 날려 시야를 가린 것 아니겠냐고…… 그녀가 더 깊은 자책에 빠지게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아들이 입에 물고 있던 서류봉투에는 그녀의 주민등록등본과 범죄경력증명서, 그리고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개명신청허가서가 들어 있었다.
아들은 화물트럭과 부딪친 순간, 십여미터 정도 튕겨져나가 풀썩, 보도블록 경계석에 떨어지고 말았다.
*
아들은 병원 응급실에 실려오기 전, 이미 몸 안에서 다발성 출혈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건 헬멧을 썼던 머리 쪽도 마찬가지였는데, 눈에 띄는 타박상은 거의 없었지만, 의식은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공장에서 연락을 받고 응급실로 달려온 그녀는 한동안 아들의 모습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의 몸엔 너무 많은 호스와 튜브가 매달려 있었다. 상체는 누군가에 의해서 발가벗겨졌고, 등 뒤로 베개를 받혀놓았는지 가슴은 불룩 위로 솟아올라 있었다. 젊은 의사 두명과 간호사 세명이 아들 침대 곁에 서 있었다. 그녀는 침대 앞에 붙어 있는 이름표를 보고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정수환, 그것이 그녀 아들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링거 바늘이 꽂혀 있는 아들의 왼손을 잡았다. 아들의 이름을 불러보려 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아들이 깁스를 하거나 붕대를 감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게 그녀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저기, 보호자 되십니까?”
차트를 들고 있던 의사 한명이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녀는 애써 침착하려 노력했고, 대답은 못했지만 고개는 끄덕일 수 있었다.
“잠깐, 보실까요?”
의사는 그녀를 데리고 응급실 간호사 데스크 쪽으로 걸어갔다. 의사의 가운엔 검푸른 얼룩이 묻어 있었고, 쉰내가 났다. 천장에는 케이블카처럼 연결된 선로를 따라 쉴 새 없이 차트들이 옮겨지고 있었다.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지만,”
의사는 한 손을 이마에 얹은 채 말했다.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다. 엉덩뼈가 여러조각으로 골절됐고, 그쪽 아래 동맥도 끊어진 상태입니다. 소장과 대장도 찢어져 출혈이 있고…… 복강에도 피가 고이고 있습니다.”
언제 왔는지, 그녀 뒤로 두명의 남자가 자리를 잡고 의사의 이야기를 같이 들었다. 한명은 화물트럭 운전사였고, 또 한명은 패스트푸드점 모자를 쓰고 있었다.
“저는 그렇게 말씀하시면 못 알아들어요.”
그녀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살릴 순 있는 거지요?”
의사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동의서에 서명만 해주시면 바로 수술에 들어갈 순 있습니다. 한데…… 이런 경운 장담을 못 해요. 워낙 여러 부위를 수술해야 하고, 또 열었다가 다른 문제 때문에 그대로 닫아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거든요. 복강 수술만 두번을 해야 하는데…… 수술과 수술 사이에 패혈증이 올 수도 있어서…… 사실 수술을 권해드리고 싶진 않습니다.”
그녀 뒤에서 누군가 아, 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녀는 의사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머리 쪽인데…… 수술로 다른 부분은 어떻게 해결한다고 해도 그쪽은 이미 손상이 너무 심해서…… 의식을 되찾긴 어려워 보입니다.”
그녀는 잠깐 두 눈을 감았다. 그러곤 무언가를 참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동의서를, 주세요.”
의사는 손으로 얼굴을 한번 쓱, 문지르고 나서 가운에 꽂혀 있던 볼펜을 빼들었다. 그녀는 의사가 건넨 볼펜으로 동의서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최이정. 그녀는 동의서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수술은 그날 오후부터 바로 시작되었다.
딸이 병원에 도착한 것은 그날 저녁 무렵이었다. 아들이 왼쪽 허벅지 아래 동맥 봉합수술에 막 들어갔을 때였다. 수술실 앞 벤치에 공장 사장 부부와 함께 앉아 있던 그녀는, 자신의 겨드랑이 아래를 부둥켜안고 흐느끼는 딸의 등을 토닥거리면서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라고 말했다. 딸의 울음소리는 쉬이 그치지 않았고 때때로 더 커지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그녀 역시 겁을 집어먹었던 게 사실이었다. 딸의 몸을 오랫동안 껴안고 있자니, 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몸에서 단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공장의 냄새였다. 그 냄새가 그녀를 더욱 자책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패스트푸드점 매니저가 찾아와 공장 사장과 얘기를 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공장 사장과 매니저는 수술실에서 조금 떨어진 커피자판기 앞에 선 채 짧게 대화했지만, ‘업무 외적인 사고’란 말과 ‘본사’라는 말은 그녀의 귀에도 선명하게 들려왔다. 공장 사장은 그를 돌려보낸 후에도, 그녀에게 이렇다 할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들은 동맥 봉합수술 후, 곧장 복강 수술에 들어갔다. 상처가 난 소장과 대장 부위를 꿰매고 복강에 찬 피를 빼내는 수술이었다. 의사는 동맥 봉합은 그런대로 잘되었다고 말했다. 골절된 정강이뼈도 우선 바깥에서 나사로 고정시켜놓았다고 했다.
“의식은요?”
딸이 의사에게 물었다.
“그쪽은 아예 생각도 못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렸는데……”
의사는 그렇게 말한 후, 목 부위를 두들기면서 외과 병동 쪽으로 걸어갔다.
밤 열시가 지나 공장 사장 부부가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그녀와 딸은 계속 수술실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병원 복도 형광등은 밝았고, 지나다니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딸은 세상에 엄마와 자신, 단 둘만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수술실에선 아무런 소리도 새어나오지 않았다.
“엄마 때문이야.”
그녀가 느닷없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딸은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렇지 않아, 엄마. 그냥 사고였을 뿐이야.”
“아니야, 다 나 때문이야…… 내가 괜한 부탁을 해서…… 그래서 수환이가 저렇게 된 거야……”
“부탁? 무슨 부탁을 했는데?”
딸은 그렇게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가자.”
엉겁결에 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 먹으러 가자고.”
“밥? 지금 무슨 밥을 먹는다고 그래?”
“밥 먹고 넌 집에 가서 자고 내일 아침에 다시 와.”
“엄마……”
“걱정하지 마. 다 똑같아질 테니까, 다시 예전처럼 똑같이 살게 될 거라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딸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커피자판기 앞에 서서 다시 한번 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딸은 엄마의 얼굴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술은 나흘 동안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의사들은 개복한 상태 그대로 아들을 중환자실로 옮겨놓고 이틀 동안 경과를 지켜보기로 했다. 개복한 부위에는 임시변통으로 의료용 천과 비닐을 덮어놓았다고 했다. 그것들은 모두 의사로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아들은 계속 면회가 금지되어 있었다. 정강이에는 나사가, 개복한 부위에는 천과 비닐이…… 그녀는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만 그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래서 자주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손가방 끈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그녀는 일부러 공장 생각을 했고, 커다란 기계 칼날에 서걱서걱 썰리는 한과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것들은 다시 더 잔인한 생각으로 이어졌고, 그래서 그녀는 계속 복도 끝에서 다른 끝으로 왕복하며 걸어다녔다. 응급실로 급하게 들어온 몇몇 환자들이 그녀에게 위안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입원 닷새째 되는 날, 한차례 더 복강 수술이 끝난 후, 의사가 그들 모녀를 찾아왔다.
“이제 급한 수술은 어느정도 마무리된 거 같습니다.”
그녀와 딸은 손을 잡은 채 의사의 말을 들었다.
“경과를 지켜보면서 몇차례 더 정형외과 수술을 하면……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끝나는 거 같습니다.”
그녀는 의사에게 꾸벅, 허리를 두번 숙였다. 의사는 ‘이 정도 된 것도 사실 기적 같은 일이지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머리 쪽도 수술하면 어떻게 의식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딸은 그렇게 물었다. 의사는 한숨을 길게 한번 내쉰 후, 약간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요, 사실 출혈이 많이 된 거면 어떻게 시도라도 한번 해보겠는데요, 머리 쪽엔 그런 흔적도 별로 없거든요. 그래서 문제인 거예요. 손도 대볼 수 없어서…… 처음 수술을 권하지 않은 이유도…… 그거 때문이고요.”
딸이 또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그녀가 먼저 나섰다.
“애쓰셨습니다.”
의사는 마치 그 말을 기다린 사람처럼 짧게 목례를 하고 자리를 떴다. 그녀는 앞으로 병원생활이 길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그것이 한편으론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
그녀가 낯선 노인의 전화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다시 사흘이 지난 후였다.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에 앉아 있다가 엉겁결에 휴대전화를 받고 보니, 아들의 것이었다.
“이거 정수환 학생 전화 아닌가요?”
느리고 탁한 목소리의 노인이었다. 그녀는 잠깐 귀에서 휴대전화를 떼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작은 목소리로, 맞지만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띄엄띄엄 대답했다.
“그래요? 나 김명국이란 사람이오.”
노인은 자신의 이름에 유난히 악센트를 주어 말했다. 노인은, 나에게 전화가 왔었다고 전해주시오,라고 말했다가 곧바로 정정했다.
“아니 아니, 그러지 마시고 지난번에 내가 했던 말, 그거 너무 괘념치 말라고 전해주시오.”
그녀는 휴대전화를 다른 쪽 귀로 옮겨 들었다.
“저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렇게만 전하면 알아들을 거요.”
노인은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잠깐만요.”
그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아들과 무슨 얘기를 했는지 말씀해주세요. 네? 부탁이에요……”
그녀는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잡고 허리를 숙였다.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엔 그녀밖에 없었다. 기다란 소파 앞 벽면에는 TV가 한대 놓여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거기에서 나오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노인은 계속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허리를 좀더 구부린 채 두 눈을 감고 말했다.
“나는 지금 우리 아들과 대화를 할 수 없어요…… 우리 아들의 정강이엔 커다란 나사가 세개나 박혀 있고요, 입엔 굵은 호스가 물려 있어요. 말씀을 전해드리려 해도…… 그럴 수가 없어요. 말씀을 전해드리려 해도…… 그럴 수가 없다고요.”
그녀는 휴대전화를 든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노인은 끙 하고 신음소리를 한번 내곤,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후 조금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거기, 병원 주소가 어떻게 되오?”
*
노인이 병원을 찾아오기까지 그녀를 괴롭힌 것은 이런 것들이었다.
두번째 복강 수술이 끝난 뒤부터 그녀는 하루 한차례씩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마스크와 일회용 장갑, 그리고 앞치마처럼 생긴 가운을 입은 채였다. 아들은 천장에서부터 길게 내려진 비닐 커튼 안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녀는 대여섯걸음 떨어진 곳에서 오분 정도 가만히 지켜볼 수 있었다. 비닐 커튼 안으로 들어갈 수도, 손을 잡을 수도 없었다. 그것이 간호사의 지시사항이었다. 아들의 입에는 굵다란 호스가 물려 있었는데, 그것은 일정한 속도로, 마치 땅바닥을 온몸으로 기어다니는 뱀처럼 꾸물꾸물 움직였다. 그리고 발가벗겨진 배 위에는 여러장의 거즈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호스 때문인지 턱은 조금 위로 들린 상태였고, 베개는 후광 모양으로 둥글게 젖어 있었다. 그녀는 아들의 모습을 보자 고통스럽기보단 오히려 후회스러웠는데, 그것은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아들의 통증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그건 의사로부터 들은 이야기와는 또다른 것이었다. 아들에겐 오직 통증만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전부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결정을, 동의서에 적어놓은 자신의 이름을, 후회했다. 아들이 자신으로 인해, 받지 않아도 되는 고통까지 묵묵히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아들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아들의 고통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 소파에 앉아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호스를 입에 문 채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며 괴로워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기도 했다. 아들은 길게 눈물을 흘리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들의 눈빛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강이에 박힌 나사와, 배 위에 가로로 길게 난 수술자국. 의식은 없지만, 그래서 더 예민해져버린 감각.
그녀는 잠에서 깬 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오랫동안 울었다.
딸의 생각은 더 직접적이었다. 그녀와 함께 두번 아들을 면회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간 딸은, 그날 밤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수화기 저편에서 한참 동안 침묵하던 딸은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리며 엄마, 우리 수환이 그냥 보내주자,라고 말을 꺼냈다. 딸은 중간중간 딸꾹질을 해가면서 계속 오열을 했는데, 우리 생각하지 말고, 수환이 생각을 해야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녀는 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딸이 원망스럽거나 매정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뜬금없이 자신보다 더 많이 배운 딸이 기특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때 만약 노인이 조금만 더 늦게 병원에 도착했다면, 그녀는 그렇게 결정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꼭 딸의 말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는 하루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아들을 바라보는 것이 더 고통스러워졌다. 하루는 그녀가 중환자실에 들어가 있을 때, 아들이 상체를 들썩거리면서 발작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금방이라도 침대 밖으로 박차고 나올 사람처럼 가슴은 퍼덕거리는데, 아들의 얼굴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무표정하기만 했다. 의사와 간호사는 아들의 어깨를 두 손으로 짓누르면서 주사를 놓았고, 그녀는 거기까지만 보고 다시 중환자실 밖으로 나와야 했다. 하마터면 그날, 그녀는 의사를 만날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질 못했고, 대신 그 다음다음 날, 노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
노인은 밤색 털모자와 하늘색 마스크를 쓰고 회색 누비 점퍼를 입은 채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로 들어섰다. 어깨는 넓었으나 허리는 굽었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노인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인은 병원 정문이라고 전화를 한 후, 한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그것을 서운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나, 김명국이란 사람이오.”
노인은 모자와 마스크를 벗고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통화할 때와는 다르게 노인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고, 어딘가 모르게 지쳐 보이기까지 했다. 눈이 작고 희끗희끗한 턱수염을 기른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수환 학생 어머니…… 맞지요?”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그들은 소파에 조금 떨어진 채 나란히 앉았다.
“내가 올해 여든여섯이오. 이 나이에 이렇게 먼 곳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다오.”
노인은 두 손으로 계속 지팡이를 잡은 채 앞을 보면서 말했다. 숨을 크게 한번 내쉬기도 했다.
“그래, 수환 학생은 좀 어떠우?”
그녀는, 여전히 의식은 없고 하루에도 두세번씩 위기가 찾아오기도 한다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노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노인이 그녀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된 일인지 내게 말해줄 수 있겠소?”
그녀는 잠깐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사고 당일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나간 일, 배달을 끝내고 돌아가다가 그녀가 일하는 공장 앞으로 찾아온 일, 그러면서도 엄마를 찾지 않고 한참 맴돌기만 하다가 다시 돌아간 일…… 그녀는 노인에게 말을 하면서, 만약 그때 자신이 아들을 만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했다. 그것은 그녀가 병원에 앉아 수도 없이 반복한 생각이기도 했다. 갑자기 찾아온 아들의 손을 잡는 생각, 함께 공장 벤치에 앉아 있는 생각, 아들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는 생각…… 그 생각들은 그녀를 가슴 벅차게 만들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더더욱 절망스럽게 만들어버렸다. 그것을 빤히 알면서도 그녀는 그 생각들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말을 하는 도중, 무언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혀 슬쩍 노인 쪽을 쳐다보았다. 뜻밖에도 노인은 지팡이를 잡은 두 손에 이마를 얹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우뚝, 말을 멈췄다. 그녀는 이제 노인이 말을 할 차례가 된 것을 깨달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노인은, 자글자글한 눈주름을 훔치면서 힘없이 말했다.
“나를…… 나를…… 용서해주시겠소?”
*
그녀의 아들이 인터넷 이곳저곳을 검색하다가 자신의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한 것은 한달 보름 전의 일이었다. 비전향장기수의 수기를 구술 형식으로 채집해 연도별로 정리해둔 한 대학원생의 블로그에서였다. ‘1948년 7월 1일—평안남도 강동군 승호면 대성리 소재 “강동정치학원” 장기반 입학—동기생으론 석기용(전남 화순), 김한영(경기 부천), 최근식(강원 홍천), 김종철(경남 창원), 박용남(충북 옥천) 등이 있었고, 후에 이정 선생의 세번째 부인이 되는 윤옥(윤레나)도 같은 학원생이었다.’ 그녀의 아들은 그 문장을 마우스로 드래그했다. 그리고 즐겨찾기 항목에 그 블로그를 추가시켰다. 아들은 어머니의 호적등본을 모니터 옆에 펼쳐놓고 계속 수기를 읽어나갔다. 수기는 원고지 천매가 조금 넘는 분량이었지만, 그녀의 아들은 그날 밤 그것을 모두 읽었다. 그리고 창문 밖이 희부여니 밝아올 무렵, 블로그에 나와 있는 이메일 주소로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수기의 주인공이자 1954년 3월부터 1995년 광복절까지 전향을 거부하고 감옥에 남아 있던 김명국씨는, 1927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난 사람이었다. 해방 전 일본으로 건너가 후지모또 철공소 견습공으로 일하면서 그곳 노조 지도자로부터 사회주의사상을 학습받은 그는,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와 곧장 남로당에 가입하고 선전활동 사업에 매진했다. 그리고 남로당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심해질 때쯤 서울을 탈출해 ‘박헌영 학교’라고 불리는 ‘강동정치학원’에 입학하게 된다. 그 대목에서 김명국씨는 조금 흥분하기도 했는데 ‘그건 뭐 결정하고 말 것도 없었어. 그때 조선 인민에게 가장 사랑받는 사람 또한 이정 선생이요, 친일파들에겐 가장 미움 받는 사람 또한 이정 선생이었으니까. 그분이야말로 세계적인 혁명가였지. 그냥 우리 모두 그분을 찾아간 거야’라고 말했다.
강동정치학원에 입학해 육개월 남짓 교육을 받은 김명국씨는 1949년 경북 지역으로 파견되어 동기들과 함께 유격 활동을 벌이다가 한국전쟁 때 다시 북으로 후퇴, 장풍군 소재 인민위원회에서 잠깐 일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1953년, 다시 강동정치학원 동기생들과 함께 청옥산에 있는 강원도당에 합류하기 위해 산악지대를 통해 침투했다가, 잠복 이주 만에 모두 경찰에 체포되고 만다. 그것이 그의 감옥생활의 시작이었다. 그가 동기생들과 함께 사실상 죽음을 각오하고 다시 남쪽으로 침투한 것은 이정 박헌영과 남로당 세력의 몰락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대학원생은 따로 각주를 달아놓았다. 1952년 12월부터 당 간부들에 대한 전면적인 사상검증 작업이 시작되었고, 그 이듬해 박헌영을 비롯한 이승엽, 설정식, 임화 등은 ‘미제국주의 고용간첩 박헌영 리승엽 도당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전복 음모와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줄줄이 구속되고 만다. 그에 따라 남로당파와 강동정치학원 출신들 또한 신분이 위태로워진 것은 자명한 사실. 김명국씨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뭐, 남아서 죽으나 떠나서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지. 그럴 바엔 차라리 이정 선생이 말씀하신 8월 테제에 따라 조국 혁명을 위해 온몸을 바치기로 결심한 거야. 이정 선생이 미제 간첩이라니…… 그건 너무 졸렬하고 가소로운 일 아니야? 그렇지 않아?’
이후 김명국씨의 수기는 주로 감옥생활과 사상 전향서, 그에 따른 단식에 대한 이야기로 길게 이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에게 그런 것들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그는 오직 한사람의 이름을 찾기 위해, 그 이름이 다시 한번 등장하길 바라면서, 수기를 끝까지 읽어나간 것이었다. 김명국씨의 수기에는 두번 다시 그 이름이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아들에겐 이미 어떤 확신 같은 것이 들어앉은 이후였다. 최근식, 강원 홍천 출생. 그녀의 아들은 그 이름만 오랫동안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
“나는 감옥에서 사십년 가까이 산 사람이라오. 그중 절반은 면회도, 편지도, 출역(出役)도 금지된 독방에서 살았지요.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았고, 차마 인간으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숱하게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곳에서 내가 의지를 갖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단식뿐이 없었는데, 그것도 매번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이었지요.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돌아봐주지 않는 그것을 위해서 목숨까지 내걸어야 하는 게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아마 짐작도 못할 거요. 허기가 무서운 게 아니라 침묵이 더 고통스러웠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나는 줄기차게 단식을 했소.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한다’ 나는 그것이 주의자로서의 삶이라고 믿었소. 그래서 감옥에서 나오고 난 뒤 처음 몇년까지도 나는 주의자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소. 감옥에 있든, 밖에 있든, 여전히 역사 문제는 내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집회에 나가든, 토론회에 나가든, 대학원생과 인터뷰를 하든, 나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소. 우리 주의자들은 아무리 하찮은 곳에 있다 하더라도 도덕적인 책무를 저버려선 안된다는 믿음 때문에, 나는 허리 한번 편하게 펴지 못하고 자리를 지켰지요…… 후, 하지만 그건 모두 예전 일이오. 이년 전부터 나는 복지단체에서 마련해준 방 안에 가만히 누워만 지내고 있소. 그게 지금의 내 삶이오. 무엇이 계기가 되었는지 나도 잘 모르겠소. 아마, 나와 오랫동안 감옥에 함께 있던 형님의 장례식 이후 그렇게 된 것 같은데…… 그 장례식에 모인 사람은 여섯명이 전부였소. 첫날부터 발인 때까지 모두 여섯명…… 아마도 그 일이 내게 어떤 식으로든 상처가 된 거 같은데…… 그걸 무엇이라고 정확히 말할 순 없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했지만, 결국은 하지 못했다’ 계속 이런 문구만 머릿속에 맴돌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 화초 같은 상태가 되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뿐이었소. 주의자로서의 은퇴란 있을 수 없지만, 주의자로서의 체념은 있을 수 있는 법.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거렸소. 내 장례식에 와줄 여섯명, 아니 다섯명을 생각하면서 계속 누워만 있었소. 물론 몸 또한 조금씩 망가지기 시작했고…… 그게 지난 이년 동안의 내 삶이었소. 분노도, 투쟁도, 의지도 없이, 가만히 돌덩이처럼 누워만 있는 삶…… 그런 와중에 수환 학생으로부터 전화가 온 거요…… 오래전 나를 인터뷰한 대학원생을 통해 연락처를 알았다면서.”
“우리 수환이가…… 외할아버지에 대해서 묻던가요?”
“그러니까 부친의 함자가…… 최근식씨 맞지요?”
노인의 물음에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환 학생이 호적을 보고 불러준 것과 내가 아는 것을 따져보니, 그 사람이 틀림없는 거 같았소. 나보다 두살 어린 것도, 생일이 음력 칠월이라는 것도……”
“저는 그분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요.”
“나는 그렇지 않았소…… 나는 그 친구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 친구를 원망하면서 보낸 적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다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소. 처음 수환 학생으로부터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내가 대학원생에게 그 친구를 거론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 아마도 동기생들 이름을 쭉 부르면서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모양인데…… 그게 수환 학생에겐 시작이 되었던 모양이오.”
노인은 숨이 가쁜지 잠깐 말을 끊었다. 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닦기도 했다. 그런 다음 노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맹세코 내가 처음부터 수환 학생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소. 그것은 믿어주시오. 나는 말한 것처럼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하고, 돌덩이가 된 사람이었소. 그런 사람에겐 그 어떤 이름도, 과거도, 마음을 움직일 순 없는 법이라오. 물론 조금 퉁명스럽게 말을 했지만, 수환 학생이 그 친구 외손자라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소. 그게 누구라도 나는 그랬을 테니까……”
“자주 통화하셨나요?”
“수환 학생이 자주 걸어왔소. 내가 아무리 시큰둥하게 말해도, 목소리 하나 변하지 않고 끈덕지게 물어왔소. ‘어머니도 저도 외할아버지에 대해선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요’라고 하면서, ‘그래도 할아버지는 우리보다는 많이 아실 거 아니에요?’ 하면서…… 세번째 통화였던가, 아마도 그랬던 거 같은데 그때부터 나도 조금씩 목소리를 누그러뜨리고 말을 하기 시작했소. ‘네 외할아버지는 옹골찬 주의자였어’ 뭐, 그렇게 말을 하기 시작한 거요…… 혹시 수환 학생이 그런 말을 하지 않던가요?”
“아니요…… 저한테 그런 말을 하진 않았어요. 제가 공장 일 때문에 늘 집에 늦게 들어가서……”
“그랬군요…… 사실 나는 그뒤로 수환 학생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소. 그 친구에게 원망을 품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게 수환 학생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 거겠소. 오히려 나는 수환 학생이 조금 애틋하게 여겨지기도 했소.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리면서 이야기를 해준 것이었소. 그 친구가 레닌대학에 가겠다면서 러시아어 공부에 열성을 쏟은 일, 경북 의성에서 함께 인민위원회를 꾸리고 활동한 일, 9・28 때 아군과 끈이 떨어져 으스스한 서울 거리를 달빛에 의지해 빠져나온 일, 그런 이야기들을 해주었소.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사이엔 아무런 문제도 없었으니까……”
노인이 말을 하는 도중,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로 한 여학생이 들어왔다. 여학생의 눈은 벌겋게 되어 있었고, 한 손으론 입을 막고 있었다. 여학생은 노인과 그녀를 바라보곤 다시 밖으로 나갔다. 노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수환 학생은 항상 내 말을 조용히 듣다가 ‘그뒤에는요?’라고 물어왔소. 그뒤에는…… 그뒤에는…… 그러니까 그때 내가 먼저 눈치를 챘어야 했소. 어쩌면 수환 학생에게 중요했던 것은 그뒤의 것들, 그뒤의 것들, 우리의 과거가 아닌, 이야기의 끝이었는지도 모르겠소. 거기에서부터 수환 학생의 궁금증이 시작됐을 테니까…… 어째서 그런 주의자였던 외할아버지가 이 땅에서 결혼을 하고 딸까지 낳을 수 있었는지…… 동료들은 모두 죽거나 감옥에 갔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믿어줄지 모르나 나는 애초부터 그 말만은 수환 학생에게 하지 않으려고 했소. 그게 내 이야기의 원칙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도 모르게 수환 학생에게 반문을 하고 말았소. ‘그뒤에는요?’라고 묻는 질문에 ‘너는 왜 네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냐?’ 이렇게 물은 거지요…… 그리고 그제야 수환 학생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소……”
“수환이가…… 개명에 대해서 이야기하던가요?”
“그러니까 수환 학생 어머니 이름이……?”
“최이정…… 그 이정이에요……”
“후, 그러니까 나도 잘 모르겠소…… 내가 왜 그 이름을 듣고 그렇게까지 피가 거꾸로 솟았는지…… 왜 그렇게 흥분을 하고 말았는지…… 나는 수환 학생에게 모든 걸 말하고 말았소.”
*
그녀의 아들이 자세히 살피지 않은 김명국씨의 수기에는 한명의 배신자 이야기가 나온다. 수기에는 실명이 거론되지 않았으나, 1953년
강원도당에 합류하기 위해 침투한 강동정치학원 동기생들 중 한명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김명국씨와 스물두명의 동기생들은 강원도 오음산 부근에서 국군과 경찰의 이중 경계망으로 인해 한치 앞도 나가지 못한 채, 개인 비트 속에서 무려 보름 넘게, 하루 강냉이 한홉과 바위에 쌓인 눈을 퍼먹으면서 지내게 된다. 달이 없는 밤마다 동기생들은 비트 속에서 나와 정찰을 하거나 서로의 안위를 확인했는데, 모두가 심한 동상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바다 쪽으로 퇴로를 트자는 의견과, 희생이 있더라도 정면 돌파하자는 의견, 얼마간 더 상황을 지켜보자는 의견이 적힌 쪽지가 각 비트와 비트 사이를 오갔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쪽지에 적힌 문장들은 짧아져가기만 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암묵적 동의로 퇴각을 결정한 다음날 오후, 한 비트당 일곱명의 군인과 경찰들이 총부리를 겨눈 채 들이닥쳤다. 그때 김명국씨와 동기생들은 모두 잠들어 있는 상태였는데, 비트 속으로 갑자기 쏟아진 햇살 때문에 계속 그것이 꿈인 줄로만 알았다고, 김명국씨는 진술했다. 그리고 덧붙여 이런 말을 했다. ‘교도소에 가고 나서야 동기생들 중 한명이 비는 걸 알았지. 우리 모두 그가 체포 도중 잘못된 것이라 믿었어. 그럴 수밖에 없었지. 그럴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한데, 4・19 직후던가, 잠깐 편지와 면회가 허용된 적이 있었거든. 그때 처음 그 사람에게서 편지가 도착한 거야. 나는 뭐 읽지도 않고 찢어버렸어.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번에 알아챘으니까…… 몇몇 동기생들은 그래도 그걸 읽어보긴 한 모양인데…… 뭐, 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거 같았어. 결혼도 하고, 양조장에 취직해서 지낸다는…… 그렇고 그런 얘기였지. 후…… 한때는 그 사람 이름을 교도소 벽면에 적어놓고 복수하겠다고 날뛰기도 했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거든. 버티려고 일부러 더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고 말이야……’
*
노인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나는 수환 학생에게 ‘걱정하지 마라, 넌 연좌제에 걸릴 염려 따윈 하지 않아도 될 거다, 하지만 개명은 꼭 해라, 어디서 감히 그런 이름을……’ 하면서 화를 냈소. 내가 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야기도 다 꺼내고…… 그 친구가 교도소로 보낸 편지 이야기까지 하면서 비아냥거리기도 했소. 나는 내가 돌덩이가 되었다고 믿었는데…… 사실 그건 내 착각이었던 거 같소. 돌덩이가 된 것은 내 상처지, 내 마음은 아니었던 게요……”
노인은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곤 다시 눈을 떠 천장을 한번 바라보았다. 노인은 말했다.
“수환 학생도 지지 않았소. ‘무언가 착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굳이 그런 이름을 지었겠느냐? 배신자가 왜? 무엇 때문에?’ 하면서…… ‘할아버지는 우리 외할아버지의 편지를 읽어보지도 않고 찢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어떻게 아느냐?’ 하면서…… 후,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게…… 그러니까 수환 학생 어머니가 태어난 해가……?”
“1956년요.”
“그러니까 이정 선생이 저쪽에서 숙청당한 그다음 해가 맞군요…… 우리도 교도소 안에서 그 소식을 들었는데…… 아마 그 친구도 그 소식을 밖에서 들었을 것이오. 그땐 그 뉴스로 신문이 온통 도배되었으니까…… 아마도 그것과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데…… 물론 그건 내 짐작일 뿐이오. 내가 어떻게 그 친구의 마음을 온전히 알아볼 수 있겠소. 그리고 그 짐작도 뒤늦게 품게 된 것일 뿐이고…… 수환 학생과 얘기할 땐 그런 생각도 하지 못한 게 맞고……”
“그러면……”
“나도 잘 모르겠소. 딸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면, 어쩌면 그 친구가 더 괴로워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소…… 스스로를 더 괴롭게 만들겠다는 의지 같은 것도 있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때 그 모든 것이 다 못마땅했소. 어디서 감히…… 어디서 감히……. 그런 말들만 계속 맴돌았소. 그래서 수환 학생이 ‘우리 어머니는 외할아버지 이력 때문에 고통받았다. 이혼도 당하고 평생을 혼자 사셨다’라고 말했을 때, 그만 잔인하게도……”
노인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잠깐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지팡이를 잡은 노인의 두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만 잔인하게도…… ‘그건 네가 잘 몰라서 하는 얘기일 거다. 자세히 알아봐라, 네 어머니가 이혼한 건 그것 때문이 아닐 게다. 연좌제 때문이라니, 함부로 그 고통에 대해서 말하지 마라. 다른 가족들은 몰라도 네 가족만은 그것을 다 피해나갔을 것이다. 그것이 네 외할아버지의 의지였으니까’라고 말해버렸소. 내가 그렇게…… 그렇게 말해버렸소…… 그게 우리의 마지막 통화였소……”
*
노인이 말을 마쳤을 무렵엔 중환자 보호자 대기실 유리창으로 비스듬히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창밖 어디선가 끊임없이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그로 인해 안개가 낀 듯 유리창은 점점 뿌옇게 변해갔다. 그녀는 그런 유리창을 바라보면서 몇번 두 눈을 비볐는데, 그럴수록 시야는 더 흐릿해져만 갔다. 노인은 그녀 옆에서 다시 한번 “나를…… 나를 용서해주시겠소?”라고 말을 했다. “오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소”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녀는 그 말을 듣고도 가만히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날, 아들은 무슨 말을 하려고 공장까지 찾아온 것일까? 그녀는 다시 한번 그런 생각을 했다. 개명을 하지 말자고 말하려 왔던 것일까? 아니면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물으려 왔던 것일까? 아니 아니, 어쩌면 그냥 불현듯 엄마 얼굴이 보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겠지. 그녀는 아예 두 눈을 감아버렸다. 옆에선 계속 훌쩍거리는 노인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치이익치이익, 스팀이 들어오는 소리도 들렸다. 그녀는 애써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아버지 같았던 아들, 어미의 이름을 짓기 위해 노력했던 아들…… 그녀가 바랐던 모든 것들…… 그녀는 도무지 아들의 얼굴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계속 두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깨어날까요?”
노인은 한참 말하지 못하다가, 울음이 꽉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깨어나길 바라겠소.”
그녀는 그제야 두 눈을 떠 노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노인은 묵묵히 그녀의 시선을 견뎌냈다. 그리고 느릿느릿 이런 말을 꺼냈다.
“언젠가 수환 학생이 이정 선생의 이름을 처음 말하면서 그게 ‘고무래가 되겠다’라는 뜻 아니냐고 물어왔던 적이 있소. 나는 그때 그런 뜻도 있지만 그건 그냥 글자 모양 그대로 보는 게 맞을 거라고 말해주었소. 그러니까 쇠스랑(而)과 망치(丁)가 맞을 거라고…… 우린 해석하기보단, 보이는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녀는 그 말을 듣고도 아무런 대꾸 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어디선가 세찬 바람이 불어와 유리창을 한차례 흔들고 지나갔지만, 그녀와 노인은 말없이 굳은 듯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앉아 있었다. 어둠이 내리고, 별이 깃들 때까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