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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4・11총선 이후의 한국정치
백낙청白樂晴
서울대 명예교수, 『창작과비평』 편집인. 저서로 『2013년체제 만들기』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백낙청 회화록』 등이 있음.
윤여준 尹汝雋
한국지방발전연구원 이사장, 평화재단 평화연구원장. 제16대 국회의원, 환경부 장관 역임. 저서로 『대통령의 자격』 등이 있음.
이해찬李海瓚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제19대 국회의원 당선자. 제13~17대 국회의원, 교육부 장관, 국무총리 역임. 저서로 『광장에서 길을 묻다』(공저) 등이 있음.
백낙청 (사회)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호 대화에서는 4월 총선 후 우리 정치와 사회의 진로에 대해 점검해보려 합니다. 윤여준 이사장님께서는 정・관계의 경험이 남달리 풍부하신데다가 지금은 현역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자유롭게 말씀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최근엔 스테이트크라프트(statecraft, 治國經綸)와 대통령의 자격에 대한 저서까지 내셨지요. 이해찬 민주당 상임고문께서는 그야말로 선수와 평론가를 겸한 정치인이십니다. 창비가 두분을 모시기로 했을 때, 이 전 총리께서 국회의원 당선은 확정된 후지만 당대표 출마설이 나돌기는 전이었어요. 어쨌든 민주당을 대표하는 입장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을 듣고자 모신 겁니다. 우선 4・11총선이 끝났고 19대 국회의 윤곽이 드러났는데 이번 선거결과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대목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시지요.
야권은 제대로 반성하고 있나
이해찬 선거 시작할 때는 각 당이 130석 내외로 승부가 날 거라고 봤어요. 잘하면 130~40석, 못하면 120석이 되리라 싶었는데 결과는 새누리당 152석 대 민주통합당 127석이었죠. 첫째로 꼽을 건, 새누리당이 선거기간 관리를 잘했어요. 162석인 거대한 당이 분열되지 않고, 말하자면 예전의 친박연대 같은 것이 나타나지 않았고 탈락자도 무소속 출마를 거의 안했죠. 둘째는 역시 지역주의와 소선구제의 한계죠. 다만 부산・경남 지역의 야권 득표율이 40%라는 게 긍정적이에요. 전국단위 선거에서는 많이 올라간 편이고, 고루 40%대가 나왔다는 점은 지역주의가 서서히 녹아가고 있다는 조짐입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범야권진영의 득표수는 범여권과 별 차이가 없었어요. 대선 구도로 보자면 승패가 예측 불허인 득표수를 보여줬기 때문에, 총선에서는 정치적으로 완패를 당했지만 대선은 그동안에 치렀던 어떤 선거보다 형편이 낫다는 생각입니다.
윤여준 이총리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야권이 총선은 졌지만 대선 전초전이라는 성격으로 보면 대선에서 상당히 유리한 지형에 놓였음을 확인하는 계기였어요. 새누리당에서는 박근혜(朴槿惠)라는 강력한 대선후보가 전면에 나서 선거를 치렀죠. 그렇다면 새누리당의 득표율은 상한선을 보여준 셈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히려 새누리당에 경고 메시지가 갔다고 할 수 있겠죠. 또 하나 제가 주목한 것은 김대중・노무현정부 10년과 이명박정부 4년 사이에 진보적 가치가 빠르게 확산되고 많은 국민이 이를 수용했는데, 그것이 해당 세력에 대한 지지로 연결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백낙청 바꾸어 말하면 그런 세력을 형성하는 데 실패한 야당의 책임 얘기가 되겠는데요, 아까 이총리께서는 새누리당이 잘했다고 칭찬하시면서 민주당이 잘못한 얘기는 안하셨는데,(웃음)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해찬 민주당에는 두가지 현상이 나타났는데, 하나는 통합과정이 늦어지면서 내부 질서가 완성되지 않은 채 전쟁을 겪어야 했던 겁니다. 그러다보니 리더십이 확립되지 못한 채 공천과 선거를 치렀죠. 또 하나는 지금 말씀하신 진보적 가치가 널리 대중화됐는데 그것을 구체화할 이행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못했어요. 진보적 가치의 내용에 민생이나 일자리 문제를 반영해 명확한 정책으로 선보여야 하는데, 한마디로 미래 비전이 안 보였던 거죠.
윤여준 제가 보기에도 취약한 리더십이 치명적인 패인 같아요. 정권심판론만 반복했지 대안은 얘기하지 못했거든요. 일각에선 민주당의 ‘좌클릭’이 원인이라는 말이 많던데 저는 좌클릭 자체보다 민생과 관련 없는 좌클릭을 한 게 실수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좌클릭을 해도 민생을 챙기는 방향으로 했으면 효과적이었을 텐데 거대담론만 내세우니까 지지를 조직화하지 못했죠.
이해찬 일례로 ‘부자 감세’가 연간 16조원 가까이 되지 않습니까? 연간 3만달러 소득의 일자리 50만개를 제공할 수 있는 예산이에요. 순전히 부자 감세만 되돌려도 디슨트 잡(decent job), 즉 괜찮은 일자리를 연간 50만개 만들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선명한 청사진과 재원, 일자리의 성격을 제시했더라면 무상급식보다 훨씬 큰 비전이 되는 거였죠.
윤여준 제가 이번 선거과정을 지켜보면서, 전에는 한나라당이 선거전략을 잘 못 짜서 몰리는 게 한심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의외로 민주당 쪽이 갈팡질팡하더군요. 그래서 그 전략들이 다 어디 갔나 싶었죠. 이총리께서 자기 선거구에만 매달려서 당의 선거에는 관여를 안하시나 그런 생각도 해보고요.(웃음)
백낙청 세간에서 총선 결과에 대해 여러 분석이 나오는 중에 공감하시는 대목도 말씀하셨고, 좌클릭 논의 같은 것은 그런 식으로 봐서는 안된다는 의견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밖에도 이런 대목은 그렇게 보면 안된다고 이의를 제기하실 부분은 없습니까?
이해찬 좌클릭이냐 중도냐 하는 건 관념적인 얘기에 불과해요. 대중에게는 별로 전달되지 않는 내용이죠. 역대 선거과정을 보면, 지난 지방선거에서는 무상급식이 구체화된 정책이었죠. 2002년 대선에선 행정수도 이전, 2007년에는 뉴타운과 747공약이 그랬고요. 이렇듯 정책이 구체성을 띠어야 대중에게 전달되는데, 선거가 끝나고도 관념적인 얘기가 똑같이 이어진다면 민주당으로서도 별 실익이 없죠. 제일 중점적인 정책 하나둘을 가지고 구체화해야 되는데, 그런 능력이 당내에서 많이 취약해졌어요.
백낙청 야권 승리를 기대했던 국민 입장에서는 민주당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쌓여서 반성하라는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전반적으로 통렬한 반성의 분위기는 민주당에 부족한 것 같아요. 일각에서는 진 건 아니라는 얘기도 들리고요. 지긴 졌지만 희망을 찾자고 얘기하는 것과, 안 졌다고 하는 건 천지차이죠. 이번 선거가 야당으로서 희망이 있다고 한다면, 오히려 이길 수 있는 선거를 야당이 잘못해서 졌다는 점일 거예요. 최선을 다했는데도 졌다면 더 나올 게 없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패배를 철저히 반성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다만 반성은 누구나 다 해야지 민주당보고 반성하라고 손가락질하면서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도 곤란하지요. 저 자신만 하더라도 밖에서 이런저런 훈수도 하고 미래에 대한 그림을 그리면서 총선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이겨야지 제가 말한 2013년체제가 확보된다고까지 말했는데, 예상이 틀린 거야 점쟁이가 아니니까 그럴 수도 있지만, 총선에서 패배했을 경우에 2013년체제 건설이 어떻게 되느냐에 대한 그림이 없었다는 건 심각한 문제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제 마음속에 총선 승리에 집착하고 손쉬운 길을 탐내는 마음이 있었던 거지요.
제가 4월 총선을 꼭 이겨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유 중 하나는, 총선에서 박근혜 위원장의 예봉을 꺾어놔야 대선이 잘되리라 본 건데, 너무 쉽게 가려 했던 셈이지요. 또 하나는 2013년체제라 부를 만한 새로운 시대를 열려면 행정권력만으론 안되고 입법부가 중요한데, 그걸 새누리당이 장악하면 어려워진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여전히 강력한 논리이긴 한데, 다만 2013년체제를 만들겠다는 대통령이면 반대당의 힘을 현실로서 인정하고 그걸 바탕으로 새누리당과도 협상하고 소통하는 게 진정으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길이 아니냐는 생각도 들어요.
아무튼 19대 국회는 의석분포를 봤을 때 어느정도 합의제적 운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효율적인 국정이 어려울 건데 새 국회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며 또 어떻게 되리라고 전망하시는지요?
19대 국회의 달라진 운영과 우선과제
이해찬 4월말 현재 새누리당 150석,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을 합치면 140석, 자유선진당 5석, 무소속이 야쪽에 2명 여쪽에 3명이 있어요. 16개 상임위에서 여당이 과반수가 다 되는 건 아니게 됩니다. 자유선진당이 포함되면 16석 차이니까 그럴 수 있지만, 자유선진당을 빼면 5개 위원회는 과반이 안되고 동수가 되는 거죠. 전횡을 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 됐어요.
또 하나는 마침 18대 국회에서 국회선진화법을 만들어서 운영위를 통과해 재론이 되고 있는데, 박근혜 비대위원장이 국회 본회의를 다시 열어서 통과시켜야 한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직권상정 같은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진 상황이죠.(이 법안은 5월 2일 본회의에서 통과됐다—편집자) 19대 국회에서는 모처럼 상당한 합의 또는 선의의 협상을 이루어낼 가능성이 퍽 높아진 거예요. 적어도 대선 전까지는 그렇게 될 겁니다. 왜냐면 조심해야 되니까요.(웃음) 대선이 끝나고도 유지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올 연말까지는 합의적으로 운영될 텐데 그게 상당히 중요하다고 봐요. 2013년체제라고 하는 게 필요한 법과 예산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보편적 복지에는 예산이 따라줘야 하는데, 복지예산을 둘러싸고 입장이 상충하겠지만 궁극적으로 국가예산에서 비중을 높여나가자는 합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점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죠. 그건 국민의 가치관에까지 영향을 미쳐요. 지금 같은 토건 위주의 관점에서 삶의 질 관점으로 넘어가는 가치관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고, 바로 그것이 2013년체제의 골간이 될 수 있는 거죠.
백낙청 이총리 말씀대로 대선까지의 기간이 있고, 대선 후는 또 야당이 승리했을 경우와 여당이 승리했을 경우가 다른데, 그런 경우의 수에 따라서 국회운영이 어떻게 달라질지 전망을 해주시죠.
윤여준 승패에 따라 한쪽이 무너진다면 그건 별개의 문제인데요, 그렇지 않다면 큰 변화 없이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총선에선 의석수가 크게 벌어지지 않았죠. 과거에는 수적으로 큰 차이가 날 때 다수당이 항상 힘으로 밀어붙이려고 해서 반대당의 극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잖아요. 특히 집권당이 다수당일 때는, 과거에는 대통령이 당의 총재였고, 총재가 아니더라도 늘 집권당을 통해서 국회를 지배하려고 했죠. 지금의 여당이 야당 할 때와 야당이 여당 할 때도 비슷한 양상이었습니다. 그래서 국회에서 극한 대결이 빚어졌고 우리 민주주의 발전이 심각하게 왜곡된다고 느꼈어요. 그런데 이번 의석 분포를 보면서 그게 이제는 불가능하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쨌든 여야간에 타협을 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정치권에는 타협의 전통이 없어서 그 점은 아주 미숙하잖아요. 그래서 처음에는 좀 힘들겠죠. 자칫하면 아무것도 되는 게 없겠다는 걱정도 들지만 그렇더라도 그런 과정은 한번은 거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전에는 정치권에서 타협을 하면 곧 야합했다고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있었죠. 민주화시절의 습관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지금은 국민도 그렇게 보는 것 같지 않더라고요. 여야가 타협하고 절충해서 서로 싸우지 않고 가기를 바라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의석수가 큰 차이가 안 날 때 대화와 타협의 전통을 만들어야 합니다. 국회에서 못 만들면 한국사회 어디서 도대체 그걸 합니까.
백낙청 그런데 18대 국회는 그런 국회가 못 되다보니 많은 갈등이 누적되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합의제로 운영한다 하더라도 합의할 수 없는 안건이 너무 많이 쌓였을 거예요. 이총리께서는 우선 내년도 예산안을 하나의 시금석으로 말씀하셨어요. 예산안을 합의해서 만들 가능성이 얼마간 있다고 보시더라도, 18대 국회에서 가령 야당 쪽이 제기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조사가 안 되어 쌓여 있는 것들도 19대 국회에서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해찬 이미 새누리당이 해놓은 것들이 몇가지 있죠. 민간인 사찰이나 선관위 디도스 공격 특검이 그렇고, 내곡동 게이트도 그냥 넘어가기 어렵고, 이번에 나온 최시중(崔時仲) 파이시티 문제도 새누리당으로서는 처리 안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시한이 따로 없는 법안과 달리 예산안은 연말까지 꼭 처리해야 하는 것이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것이 타협의 시발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백낙청 야권과 시민사회에서 강력하게 주장해온 4대강사업의 국정조사 같은 것도 가능할까요?
윤여준 4대강사업은 어떨까 모르겠네요. 다른 사안들은 국민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슈인 데 반해, 4대강이 그렇지는 않거든요. 그리고 이 이슈에 대해 잘못된 거냐 아니냐를 판단하려면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해서 일반시민이 태도를 정하기가 어려워요. 이게 불붙는 이슈가 아니라서 어떻게 될지 잘 모르겠네요.
이해찬 이명박정부의 여러 정책 중에서 4대강사업이 제일 큰 사안이라고 볼 수 있죠. 환경뿐 아니라 예산구조에까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죠. 행정처리에서의 밀어붙이기 혹은 위법성 얘기까지 나올 겁니다. 그런데 민감한 정치적 사안들이 그후에 워낙 많이 나왔기 때문에 쟁점이 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윤여준 4대강사업은 예산이 크다, 과정이 불법적이다 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대통령이 그 사업을 추진하는 자세가 근본적인 문제라고 봐요. 널리 나오진 않았지만 이런 보도가 있었습니다. 이대통령이 4대강사업 추진본부를 방문해서 “이 사업은 내가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심사숙고해서 결정한 사업인 만큼 논쟁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걸 보고 저는, 이분이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을 안 읽어봤나, 어떤 사회에서 대통령이 결정한 사안을 국민이 논쟁하면 안된다는 건지, 대통령이 헌법정신에 위배되는 말을 어떻게 이렇게 거침없이 하는지 정말 경악했어요. 이처럼 4대강사업을 추진하는 과정, 자세, 태도가 헌법정신을 유린하는 식이었어요. 부정이나 비리 차원과는 달리 이걸 언젠가는 제대로 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낙청 그것은 국회조사의 대상이라기보다 국민적 논의의 대상이겠죠. 그러나 대통령이 그런 태도로 이 사업을 추진했기 때문에 추진과정에서 마땅히 국회조사를 받아야 할 일들이 많이 벌어졌을 겁니다. 아직은 다른 시급하고 분명한 사안에 묻혀 있을지 몰라도 저는 그것이 드러나게 돼 있다고 봐요. 국정조사를 하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여야가 논의해야겠지요.
윤여준 지금까지 보면 여야가 국회 운영방식에 잘 합의하지 않았고 만든 합의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잖아요. 그런데 이번에 여야 의석 분포가 팽팽하게 된 마당에, 국회 운영에 대한 합의를 이루고 지키는 전통이 만들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이게 지켜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돼요. 이총리께서 당대표가 되신다면—
백낙청 윤장관님은 이총리께서 다음 당대표가 되실 것을 기정사실로 보시는 겁니까?(웃음)
윤여준 이총리께서 이끄시는 세력이 당의 대주주라고 하던데, 되시겠죠.(웃음)
민주당 역할분담 논란, 그 배경은
백낙청 마침 그 대주주하고 그보다는 작지만 확고한 세력을 가진 박지원(朴智源) 최고위원이 역할분담을 하기로 한 일 때문에 지금 한창 시끌시끌한데 어떻게 되어갑니까?
이해찬 언론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니까 당황한 것 같아요. 그렇게 단합 내지 연대가 될 거라곤 전혀 예상하기 어려웠던 거 아닙니까. 실제로 전날까지도 가능성이 없었죠. 두가지예요. 전혀 예상치 못한 데서 오는 당황, 또 하나는 당내 경쟁자들의 낭패감이죠. 그 다음에 보수언론이라든가 상대편 당으로서도 위협적인 등장으로 받아들인 거죠. 그런데 실제 일반시민들이나 직접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로서는, 비교적 좋은 구도다, 그래야 당의 안정감이 생기고 대선을 안정적으로 풀어갈 수 있다, 그런 게 일반적인 여론이라고 봐요. 결과는 향후 원내대표 경선에서 나오겠죠.(5월 4일 민주통합당 원내대표 경선에서 결선투표 끝에 박지원 의원이 선출되었다—편집자) 제 정치적 경험으로 보면, 당내에서 친노(親盧)/비노(非盧)로 대립구도를 만들고 언론에도 그렇게 비치면 당이 총선 이후 정비되는 모습을 못 보여주는 거죠. 대선을 끌어갈 때도 당내 통합이 안돼서 어려워지고요. 그래서 우선 보수언론의 친노/비노의 프레임을 깰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당내의 지역통합을 이뤄내야 되겠다 싶었어요. 실제로 이번 총선에서 호남의 소외감 때문에 투표율이 낮아진 측면이 있거든요.
윤여준 정치담당 기자들 말에 의하면 민주당판 ‘3당 합당’이라고 하죠. 제작, 각본, 감독, 주연이 모두 이총리라고도 하고요.(웃음)
백낙청 일반 국민이 볼 때는 어떤 것 같습니까? 언론을 보면 부정적인 보도가 대부분이더라고요. 역풍을 받을 거라느니 하던데, 그것이 언론 쪽의 과장일까요, 아니면 상당한 근거가 있는 것인가요?
윤여준 언론의 속성상 정치권의 동향, 특히 갈등요소에 대해선 약간의 과장이 항상 있죠. 그런데 사실 국민은 언론에 등장하는 밀실이니 담합이니 하는 말을 일단 안 좋아하죠. 하지만 저도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봤는데 민주당 내에서 그렇게 구도가 짜이는 것에 대해 큰 관심을 갖는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백낙청 저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는 그간 언론에 해명한 것도 있고 이 일과 원탁회의가 무관하다는 공식성명도 나왔지요. 이 대화가 출간될 때쯤에는 상당히 지나간 일이 되었겠지만, 두분의 합의 이후에 벌어지는 사태를 보면서 이걸 원만하게 잘들 처리하신 건지, 아무리 잘해도 이 정도의 부작용을 감수할 만한 성질이었는지, 아니면 더 잘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는지, 문외한으로서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지만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됐어요. 어쩌면 두분이 당대 최고의 기술을 지닌 정치인이면서도 무언가 민심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게 아닌가 염려되기도 하고요. 기본적으로 저는 민주당 전체가 치열한 자기반성이 부족한 가운데 이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게 문제라고 보는데, 이번에 두분의 처리방식이 소위 ‘구태’에 해당하는 부분이 있다면 거기에 대해서도 반성이 필요할 거고, 또 무조건 두 사람의 ‘담합’을 몰아치는 것으로 민주당의 반성책임을 다하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것도 반성이 부족한 대목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어요.
이제 한국사회의 진로에 대해서 좀더 큰 틀의 얘기를 해봤으면 하는데요, 국회의 합의제적 운영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 사회 전체의 정치사회적 통합 아니겠습니까. 윤장관께서도 『대통령의 자격』(메디치 2011)에서 이 점을 대단히 강조하고 계신데, 그 가능성을 어떻게 보시며, 그걸 위해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얘기해봤으면 합니다.
사회통합, 언제 어떻게 이룰까
윤여준 요즘에 다 ‘통합’이 시대정신이라고 말씀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통합할까요. 저는 경제민주화 없이는 사회통합이 불가능하다고 봐요. 불가능할 뿐 아니라 경제민주화를 안하고 가면 체제가 못 견딜 겁니다. 서민의 불만이 언젠가는 폭발할 거예요. 지금 30~40대를 만나보면 분노가 임계점에 다다랐다고 느낄 정도입니다. 우리가 각성하고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시장경제나 자본주의가 지속 가능하지 않은 상태가 올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건 국가적 불행이죠. 경제민주화가 가장 시급하고 핵심적인 과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경제민주화란 체제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는 거죠. 그것이 안 되면 통합이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해체가 촉진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까지 갖게 됩니다.
이해찬 참여정부 때 통합에 굉장히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격차 해소가 많이 안 되었어요. 자원 배분이라든가 여러 측면에서 격차 해소를 하려고 애썼는데도 해소된 양이 0에 가깝단 말이죠. 이명박정부 들어와서는 대기업 집중을 강화했기 때문에 그 격차가 훨씬 더 벌어졌죠. 가령 환율정책이라든가 조세정책 같은 게 다 대기업, 재벌 위주로 갔어요. 그래서 지금 30~40대가 우리 세대보다 미래에 대해 훨씬 불안해합니다. 일자리도 적지 정년도 빨라지지, ‘40대 정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니까 굉장히 불안하죠. 자녀를 다 교육시키기 전에 일을 그만둬야 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비정규직도 늘어나고…… 우리 세대는 정년이 50~60세까지는 되고 급여가 안정적인 정규직으로 유지됐기 때문에 생활수준은 낮아도 불안감은 적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안 되는 거죠. 장래가 불안하고 격차도 더 커지기 때문에 재생산도 안 되죠. 사회협약을 통해 통합을 시도한 네덜란드나 아일랜드 같은 나라는 안정적으로 발전해가는 반면, 통합을 못한 그리스나 스페인 같은 나라는 어려워졌죠.
우리나라도 2013년체제에서 사회통합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안정된 복지국가로 가느냐 못 가느냐가 결판난다고 보는데, 그런 점에서 차기 대통령이나 정당 리더들 역할이 굉장히 중요해요. 사회통합이라는 게 결국 타협이거든요.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하고, 단기적으로 어느 수준까지 합의를 할지, 그리고 중장기적으로 어떻게 실현해갈지, 우선순위와 경로를 어떻게 정하고 제도화할지, 이 모든 게 소통과 토론을 거쳐야 하거든요. 노사정위원회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통합위원회 차원의 소통이 있어야 하는 거죠. 이게 19대 국회에서 가장 중요한 임무라고 봐야죠.
윤여준 그런데 경제민주화를 얘기하면 자꾸 재벌 때리기나 반기업 정서라고 왜곡하는 이들이 있어요. 그런데 이건 그런 차원이 아니라 공정하게 경쟁하도록 해달라는 거죠. 헌법 제119조 2항에 나와 있는 대로 국민경제를 균형있게 안정시켜달라든지 소득분배를 적정하게 해달라든지, 시장의 지배나 경제력의 남용을 막아달라든지 말이지요. 이걸 재벌 때리기나 반기업 정서라고 몰아가는 게 문제죠.
백낙청 경제민주화를 하다보면 재벌규제를 안할 수가 없겠죠. 우리나라 재벌이 지난날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지금도 엄청난 몫을 차지하고 있습니다만, 이제는 전체 경제발전이라든가 대다수 기업들의 건전한 성장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분석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명박 대통령이 ‘비즈니스 프렌들리’(business friendly)라고 할 때 중소기업을 포함한 기업 전체에 우호적이라면 괜찮은데, 사실은 ‘재벌 프렌들리’거든요. 그러다보니 기업풍토 자체를 악화시키는 데 일조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사회통합이라는 큰 목표에는 동의하지만 그 과정에 대해서는 훨씬 당파적이라면 당파적인 생각을 하고 있어요. 다시 말해서 보수 대 진보라는 통상적인 구도가 문제라면 양자의 사회적 통합이 비교적 쉬운데, 이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란 말이에요. 식민지시대와 분단시대를 거치면서 부당한 특혜를 잔뜩 거머쥐고 안 놓으려는 수구세력, 다시 말해 보수・진보의 이념을 따질 것 없이 오직 자신의 특권적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온갖 반칙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세력이 지배해온 사회이기 때문에, 그리고 최근 4년간 특히 심해졌는데 이런 세력이 주도하는 수구・보수 동맹에 진정한 보수주의자들이 대부분 포섭되어 있는 구도이기 때문에, 2012년의 선거를 통해 이 구도를 한번 깨뜨리지 않으면 제대로 된 사회통합은 어렵다는 입장이에요. 그러니까 진정한 사회통합은 2013년체제에 안겨진 ‘숙제’이지, 당장 이루긴 어렵다는 얘기지요. 수구세력의 헤게모니를 깨는 작업이 4월 총선에서 본격화되기를 기대했던 건 저의 지나친 욕심이었지만, 역시 대선을 통해서 그게 한번 깨져야지 2013년 이후의 새 대통령이 새누리당이 지배하는 국회와 소통하고 협력하면서 사회통합을 주도해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곁들여서 개인적인 주문입니다만 ‘2013년체제’라는 용어가, 이총리께서는 그 표현을 쓰고 계시는데 윤장관님께서는 어느 토론 자리(세교연구소・한반도평화포럼 주최 심포지엄 「‘2013년체제’를 향하여」 2011.11.25)에서 이의제기를 하신 바도 있지요. 아무튼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적절한 교정을 통해 활용할 수 있는 프레임이라고 보시는지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13년체제는 유용한 개념인가
윤여준 제 식견의 한도 내에서 말씀드리면, 2013년체제가 분석개념이기보다는 실천의지를 가진 형성적 개념, 즉 포머티브(formative)한 개념이라고 받아들였어요. 운동의 관점에서 보는 개념이라면 상황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수정해서 사용할 수 있는 틀이 아닌가 판단했습니다.
백낙청 맞습니다. 87년체제론은 87년이 지나고 한참 있다가 나온 개념인 데 반해 2013년체제론은 2013년이 되기 전에 2011년부터 이미 내놓은 개념이니까 분석의 대상이 아직 없지요.
윤여준 따라서 저는 이걸 실천할 수 있는 리더십이 대단히 중요하지 않겠는가 생각해요. 폴리티컬 리더십을 어떻게 수립하느냐가 큰 과제 같고요. 또 하나는 체제, 레짐(regime)이라는 말이 추상도가 굉장히 높은 용어잖아요. 그러다보니 모든 게 그 안에 다 담기는 경향을 갖기 쉬워서, 구체성을 잃어버리게 되면 운동성도 상실하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봤어요. 어쨌든 평화, 민주, 복지 이런 과제들이 해결되는 새 세상을 말씀하시잖아요. 새 세상이 좋게는 느껴지지만 일반시민의 가슴에 닿는 건 아니지 않나, 이걸 이론과 실천의 양면에서 구체화하는 작업이 뒤따라야 효력이 있겠다 싶습니다. 먼저 이론적으로는 이게 어떤 민주주의 모델이냐 하는 점도 분명하게 해주실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실천의 차원에서는 과제들 간의 논리적 연관성도 중요하지만 전략상의 우선순위나 구체적 전술의 관점에서 민생과 연결시키는 구체화된 대안이 절실하다고 보고요. 다만 한가지 조심스럽게 생각하는 게 남북관계 관련이거든요. 혹시 남북한을 등가적(等價的)으로 보시는 것은 아닌가—
백낙청 아닙니다.(웃음)
윤여준 만약에 등가적으로 보시는 거라면 한국사회에서 상당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런 정도로 피상적인 생각을 했습니다.
백낙청 한반도 문제는 조금 있다가 더 얘기하기로 하고요, 오늘 말씀하신 걸 들으니까 2013년체제를 조건부로 용인하시는 것 같아서 조건을 채우도록 노력해볼까 합니다. 그런데 일전의 토론회에서는 더 근본적인 문제제기도 하셨어요. 용어상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87년체제라는 건 87년에 새 헌법을 만들면서 성립했는데 2013년체제는 2013년에 새 헌법을 만들자는 건 아니잖느냐는 지적이었지요. 그 점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헌법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있는 헌법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아까 헌법 제1조도 말씀하셨고 119조 2항도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그게 제대로 실현이 안 되는 시대를 살아왔어요, 특히 지난 4년간. 그래서 헌법이 실행이 안 되던 시대에서 헌법을 지키는 시대로 넘어간다면 그게 곧 새 시대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아무튼 ‘2013년체제’ 자체가 분석적인 개념은 아니지만 87년체제에 대한 나름의 분석에 기초한 개념이고, 정치적 실천과 관련해서는 이명박정부 4년간을 비판하지만 마치 모든 문제가 MB에게 있다는 듯이 ‘MB심판’만 부르짖는 노선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87년체제가 갖고 있던 한계가 세월이 흐를수록 더 드러났고, 혼란스러운 말기국면에 접어든 게 참여정부 중반부터거든요. 그러니까 이번 선거에서 참여정부에 직접 관여했던 인사들이 MB심판을 부르짖을 때 서민층에서는 ‘아니, 당신들이 할 때도 난 못살았는데’ 하는 반응이 나왔고, ‘이번에는 어떻게 더 잘할 건지 내놔봐’ 하는 요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자 찍어줄 마음이 안 생겼던 것 같습니다.
이해찬 2013년체제라고 하는 건 하나의 희망적 전망이죠. 87년체제가 일정한 성과를 냈기 때문에 2013년체제도 그후의 2단계 성과를 내자는 희망적 전망이 섞여 있다고 보는데, 실제로 이것이 실현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이번 12월에 어떤 세력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죠. 수구적인 세력이 집권하면 2013년체제가 발전할 가능성이 낮아지는 것이고 민주진보진영이 집권하면 민주, 복지, 평화가 강화되면서 2013년체제의 내용이 발전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득표율이 어떻게 되느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명박정부가 이토록 무도할 수 있었던 데는 대선 득표율에서 상대편과 차이가 컸다는 점이 작용했지 않습니까. 반면 이번 대선에서는 득표율의 차이가 아주 미세할 것 같아요. 지난 1997년이나 2002년만큼 근소한 차이가 난다면 이 다음에 수구세력이 집권한다 하더라도 크게 퇴행하는 상황까지 갈 것 같지는 않고, 또 진보진영이 집권한다 해도 의회권력을 빼앗겼기 때문에 함부로 끌고 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2013년체제론이 낙관적인 전망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느낌이에요. 지금은 웬만한 보통 사람들이 절대빈곤에서 벗어났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원칙, 투명, 상식 이런 가치관이 더 중요해졌어요. 절대빈곤 상태일 때는 투명이건 원칙이건 상식이건 간에, 생존 자체가 더 중요했죠. 지금은 안 그렇거든요. 선거운동을 해봐도 이제는 예전보다 풍토가 많이 좋아졌어요. 밥 먹고 나서 각자 만원씩 걷는 걸 처음에는 어색해했는데 이제는 당연시해요. 농담으로도 술 사달라, 밥 사달라 하는 사람이 없어요. 그만큼 한단계 올라간 거고 그런 점에서 복지에 대한 국가의 역할, 안전에 대한 국가의 역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어요. 이런 요구는 시장이나 재벌로부터는 확보할 수 없지 않습니까. 국가의 개입과 역할이 중요하다는 걸 사람들이 알기 시작한 거죠. 거기에 남북관계까지 안정화하고 갈 수 있다면 2013년체제의 내용이 더 풍성해질 수 있다고 봅니다.
남북관계, 단순 복원만으로는 안돼
백낙청 시간이 없으니 다음 주제로 넘어가야 할 것 같은데요, 두 분 모두 한반도 문제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고 계시고 저도 나름대로 관심을 지녀왔는데, 현재는 남북관계가 꽤 험악한 상태입니다. 하지만 당면문제에 너무 매몰되지 말고, 2013년 이후 한반도 문제가 어떻게 해결돼야 하는지, 이를 위해서 정치세력들이 무슨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 말씀해주시죠.
이해찬 최근에 아주 해괴한 얘기를 하나 들었는데, 통중봉북(通中封北)이에요. 이대통령이 이 말을 쓰시는 걸 듣고서 참 어찌나 부끄럽고 창피한지…… 한반도 및 동북아 평화체제가 우리의 특수성 아닙니까. 그리고 실제로 여러 분야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고요. 그런데 대개 이 부분을 자기 삶과 분리된 것으로 보고 있어요. 그런 경향을 빨리 극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한반도 문제를 6자회담이라는 틀을 갖고 그나마 관리하려고 하다가 이명박정부 들어와서 거의 5년을 허송세월, 아니 악화시킨 셈이죠. 그런데 올해 우리 총선과 대선이 끝나고 나면 다른 나라에도 다 새로운 체제가 들어섭니다. 그렇기 때문에 각국의 새로운 리더십이 6자회담이라는 틀을 다시 발전시키는 계기가 올 수 있다고 봅니다. 북쪽도 그 대비를 할 거고요. 현 정부와는 안하겠지만 다음 정부와는 하려고 들 겁니다. 새누리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현 상태에서 더 악화될 수는 없는 구조기 때문에 어떤 방향으로 가느냐가 문제지 가긴 간다고 보는데, 이때 남쪽 정부의 주도력이 없으면 진전이 잘 안돼요. 그래서 남쪽 정부가 이걸 주도할 준비를 서둘러야 합니다. 참여정부 때는 시작이 너무 늦었어요. 다음에 누가 대통령이 되든 빨리 6자회담을 복원하는 쪽으로 노력한다면 어느정도 발전할 수 있다고 낙관합니다.
윤여준 최근에 한반도 주변 해역에서 벌어지는 열강의 군사력 시위를 보면 한반도를 중심으로 패권경쟁이 본격화된다는 생각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남북관계가 지금처럼 단절된 채로 가면 자칫 민족의 이익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 오겠다 싶어요. 그래서 어쨌건 남북한이 주도적으로 동북아 평화를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우리가 ‘봉북’을 하면 안되죠. 지금 한반도에서 가장 시급한 게 미국과 중국이 충돌하는 구도를 피하는 일인데, 그 구도를 안 만들려면 북한이 현상타파를 하려고 몸부림치지 않게 해야죠. 봉북을 하면 북한이 그렇게 돼요. 그러면 금방 미중 대결구도가 만들어지고 이건 우리 국익에도 그렇고 민족에도 유익한 게 아니죠. 그리고 계속 이런 상태로 가면 결국 북한을 점점 중국 쪽으로 밀어내는 결과가 올 수밖에 없죠. 그래서 남북한이 윈윈(win-win)하도록 풀어가야 하는데, 이른바 인게이지먼트 폴리틱스(engagement politics)라는 협상의 일반 원칙, 즉 때에 따라 당근도 썼다 채찍도 썼다 하는 방식 외에 다른 뾰족한 게 있을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남북한이 주도적으로 동북아 평화를 이끄는 쪽으로 가지 않으면 민족의 이익을 지키기 어려워요. 다음 정부 들어서는 정말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21세기판 ‘조선책략’ 같은 뭔가 새로운 대북정책과 동북아정책을 펴야 할 것 같아요.
백낙청 사실 남북관계에 관해서는 김대중・노무현정부를 거치면서 해법의 기본틀은 마련됐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새누리당이 대선에서 이기면 이명박정부처럼 하지는 않겠지만 과연 그 틀을 제대로 계승해서 발전시킬 수 있을지는 의문이에요. 야권에서 집권한다면 계승은 확실히 하려고 할 텐데 그냥 계승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새로운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어요. 그걸 해낼 준비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까 남과 북을 등가적으로 보느냐고 물으셨는데 사실 제가 분단체제론을 말하다보면 그런 오해를 많이 받습니다. 보수진영만이 아니고 통일운동가들도 비슷한 지적을 하곤 합니다. 저더러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에 택일하라면 그건 두말할 필요 없이 대한민국이지요. 다만 그런 식의 양자택일만으로 한반도 문제가 해결되느냐는 거예요. 한반도에는 남북을 아우르는 분단체제라는 것이 있고 이걸 유지하면서 이득을 보는 세력이 남에도 있고 북에도 있다는 인식을 갖춰야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물론 이득을 보는 방식이 다르고 정도도 각기 다릅니다만, 남북 양쪽에 다 있는 기득권세력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어떻게 깰 것인가라는 연구 없이,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결, 거기서 너는 어느 편이냐 하는 단순논리로 접근하면 안된다는 입장이에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통일운동을 오래 해왔고 민족주의적・반제국주의적 의식이 뚜렷한 분들은 ‘북이 아무리 문제가 많다고 해도 자주적으로 미국과 맞서고 있는데 어떻게 거기하고 친미사대주의 정권을 등가적으로 취급하느냐’ 하는 분들도 있어요. 반면에 다른 쪽에서는 북이나 남이나 다 분단정권이고 나쁜 놈들이라면 당신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양쪽이 분단정권이라는 결함과 한계를 공유한다고 해서 다 똑같다는 말은 아니지요. 또 시기에 따라서 어느 쪽이 얼마나 나쁘냐가 달라지기도 해요. 우리 남쪽에서는 4・19 이래로 국민이 피 흘리고 땀 흘려 싸우면서 변화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국가라는 게 여러가지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도 어느정도는 다수 국민의 뜻에 맞게 조정하는 장(場)으로 진화해왔어요. 그런 민주적 기능이 최근 4년간에 많이 후퇴했다는 게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지요. 북에서도 우리 눈에 안 보이는 갈등과 조정 기능이 발휘되고는 있겠지만, 한국과 같은 민주화투쟁의 역사를 못 가졌기 때문에 국가가 민중의 생활상의 욕구를 반영하는 기능이 훨씬 저하되어 있다고 봐야겠죠. 다만 이걸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어느 쪽이 나쁘다고 손가락질한다고 풀리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데 이번 총선에서는 남북관계가 큰 이슈가 아니었고 총선의 성격상 그리 되기도 힘든데, 대선 때는 어느정도 쟁점이 될 거라고 보시나요?
이해찬 그동안 이 문제가 큰 이슈가 된 적은 없습니다. 북풍 같은 게 이슈가 된 적은 있지만 한반도 평화체제라든가 남북관계 자체가 큰 쟁점이 된 적은 없었죠. 왜냐면 이것보다 국민에게 더 절박한 문제가 먼저 제기되니까요. 그러나 이것도 기본적인 프레임에서는 전망을 같이 내놔야 할 겁니다. 박근혜 위원장이 후보가 되면 지금 이명박 대통령과는 차이점이 많은 안을 내놓는다고 봐야겠죠. 양적인 차이만 있는 게 아니고 관점의 차이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이 대선에서 큰 쟁점이 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네요.
백낙청 2002년 대선에서는 첫번째 쟁점은 아니었지만, 전쟁이냐 평화냐 하는 게 많은 영향을 줬다고 봅니다. 이회창(李會昌) 후보가 당선되면 전쟁 위험이 증가할 거라는 우려가 있었어요. 이번에도 만약에 사태가 더 악화돼서 위험상황이 되면, 한쪽에서는 그러니까 확고한 안보태세를 취해야 한다고 보수 쪽으로 쏠릴 수 있고, 다른 한편 오히려 그런 위기의식 때문에 평화적으로 해결할 세력을 선택해야 된다는 흐름으로 갈 수도 있죠. 하지만 문제가 그런 식으로 부각되지는 않기를 바라죠.
이해찬 북쪽의 동향을 보면 이명박정부와는 아니라도 다음 정부와는 관계설정을 하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걸로 이쪽에 냉전 수구세력이 등장할 빌미를 주지는 않으려고 하고 있고요. 또 미국도 오바마 정부가 처음에는 대북정책에 시간을 쓸 틈이 없었죠. 그래서 소홀히 했다가 이제는 어느정도 윤곽을 잡았기 때문에 다음 선거가 끝나면 북미관계에서 진도가 나갈 가능성이 있고, 박근혜 위원장도 냉전수구로 몰고 가기보다는 남북 화해무드를 어느정도 만들려고 할 것 아닙니까?
윤여준 그렇겠죠. 저도 대선에서 이 문제가 그렇게 첨예한 이슈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보는데 다만 이명박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반성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정책을 어떻게 세울 거냐를 놓고 여야간에 약간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박근혜 후보의 권위주의 리더십
백낙청 대선에 관해서 좀더 구체적인 얘기를 해봤으면 하는데요. 여권에서는 소위 비박(非朴) 후보들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총선을 거치면서 박근혜 구도로 상당히 굳어진 셈인데 이대로 갈 거라고 보시는지, 간다면 박근혜 위원장을 대선후보로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윤여준 요새 새누리당 사정을 면밀히 살펴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는데, 일단 드러난 당내 사정만 보면 박근혜 위원장을 꺾을 사람은 현실적으로 없잖아요. 새누리당 안에서는 박근혜 대세론이 확고하다고 봐야겠죠. 더구나 지난 공천을 보면 이건 뭐 작심하고 한 거잖아요. 그래서 오죽했으면 일부 정치학자들은 박위원장이 지난 경선에서 MB에게 진 게 트라우마로 남았던 거 아니냐, 그래서 어떤 경우의 변수나 가능성도 없애겠다고 결심하고 공천을 한 것 같다 하더군요. 대선에서 혹시 실패하더라도 계속 당권을 쥐겠다는 의지가 보인다고 할 정도의 공천이었죠. 당내 사정만 보면 요지부동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본선에선 박위원장도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수도권 열세, 2040세대 열세를 극복하는 게 핵심적인 과제인데, 뾰족한 방법이 없어 보여요. 그렇다면 대선은 절대 낙관 못 한다는 거죠. 더구나 이번 투표율이 54% 정도였는데 대선에서 최소 10% 정도 높아진다고 보면, 박위원장이 본선에서는 낙관하기 어려울 거예요.
이해찬 제가 더 걱정스러운 건 박위원장이 그렇게 소통능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여러가지 중요한 사안에 대처하는 걸 보면 간명하게 끊어버리고 말지 않습니까. 대통령이 계속 그러면 잘못된 권위주의 틀에 갇히게 되거든요. 민주당이 공천과정에서 잘못했다는 비판을 많이 받는데, 공천 내용을 보면 사실 새누리당이 질적으로 더 안 좋아요. 주변 사람들의 품성이나 도덕성이 이명박 대통령 주변보다 별로 나아 보이지 않고요. 그게 집권하고 나서 어떤 양상을 띨지…… 한쪽으로는 권위주의가 형성되고 다른 한쪽으로는 부도덕한 권력집단이 형성될 가능성이 상당히 크죠. 다음 정부는 사회통합을 이룩하라는 시대의 요청을 받는 정부인데, 사회통합은커녕 권위주의와 부정부패가 만연하면 사회협약이라는 게 맺어질 수 없죠. 신뢰와 소통 없이 시대적 가치와 동떨어지면 갈등이 더 심해지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야권이 얼마나 잘하느냐, 여기에 달려 있는데, 야권은 어떤 점에서 97년이나 2002년보다는 조건이 좋죠. 그걸 얼마나 잘 효과적으로 운영해서 성과를 내느냐는 민주당 역량에 달려 있는 거고요. 민주당이 운영을 잘 못하고 성과를 낼 전망이 안 보이면 투표율이 안 올라갑니다. 가령 2007년에는 관리를 잘 못하니까 유권자들이 아예 투표를 안해버린 거잖아요. 그래서 그걸 지금부터 금년 대선까지 계속 용의주도하게 관리해서 씨너지효과가 나도록 해야 되는데,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에요. 첨예하고 예민한 국면이기 때문에 판단의 오류나 원심력이 작용하면 벌거숭이가 되어버리거든요. 그걸 잘 관리할 수 있는 민주당의 능력이 국민의 시험대에 올라가서 민주당 후보, 진보당 후보, 안철수(安哲秀)라는 제3의 인물, 이 3자가 단일화되는 과정을 훌륭하게 거치면 투표율이 60%는 넘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냉소주의로 기울겠죠. 투표율이 65%까지 가면 여권 후보와 지금보다 격차가 더 벌어질 수 있다고 봐요. 그런 점에서 올 하반기 6개월이 우리 현대사 전체의 향방을 좌우하는 굉장히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윤여준 저도 박근혜 위원장에 대해 과연 시대적 상황에 맞는 리더십인가 의문이 있습니다. 시대적 요구가 통합이고 그걸 실현할 지도자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민주적 리더십이 아니면 불가능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박위원장이 보여주는 건 아주 수직적이고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리더십이죠. 그래서 오죽했으면 제가 중세 유럽의 궁정정치를 하느냐고 비판한 적도 있었어요.(웃음) 예를 들어 새누리당의 비대위가 구성됐는데 비대위는 최고위원회를 대행하는 최고의결기구죠. 그런데 그 비대위원으로 참석했던 분들의 얘기를 간간이 들어보면 박위원장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의사결정구조가 무력화되는 경우가 많은가 봅니다. 당에서도 그런데 만약 대통령이 됐다고 하면 더 큰 문제 아닌지…… 그래서 박위원장이 대선에서 폭넓은 국민의 지지를 받으려면 지금 보여주는 리더십으론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백낙청 저도 박근혜씨가 만약에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우리가 수구세력의 헤게모니를 깨뜨리거나 약화시키고 2013년체제 아래서 사회통합을 이룩해가기가 참 어려울 것 같아요. 권위주의를 말씀하셨는데, 정말 제왕적 체질이 몸에 밴 분 같아요. 그래서 우아하게 보이기까지 하지요. 이명박 대통령은 현대건설 CEO를 했다지만 사실 현대에서는 모두가 정주영 왕회장 밑의 머슴이라서, 정회장의 머슴 노릇 하면서 배운 권위주의지 자기가 최고결정권자로서 익혀본 권위주의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더 갈팡질팡하죠.
4월 총선에 대한 저의 예상은 빗나갔지만 그전에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지형은 야당에 유리한데 병력을 보면 저쪽은 확실한 지휘관이 있고 이쪽은 그게 없으니까 어떨지 모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지형은 유리하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병력이 제대로 조직화가 안되고 확실한 후보가 없으면 또 질 가능성이 있는데, 저는 그렇게 되면 나라가 참 곤란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권위주의 문제도 있고, 또 뭐니뭐니해도 이번에 지역주의적인 구습을 오히려 부활시키는 데 박위원장이 크게 일조했고 그 최대 수혜자였거든요. 또 하나는 남북관계를 이명박 대통령보다는 더 신중하게 관리하겠지만 필요하면 색깔공세를 펴는 게 상당히 습관화되어 있지 않나, 한반도 문제라는 게 4~5년 전과 또 다르고 새로운 판을 짜야 될 상황인데, 그걸 주도하기에는 힘들겠다는 생각입니다. 한가지 덧붙인다면 저는 야당이 대선에서 꼭 이겨야 할 뿐만 아니라 넉넉한 표차로 이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요. 입법부를 새누리당이 장악하고 있으니 대선에서 낙승했다고 독주할 우려는 없을 것이고, 반대로 2013년체제를 만들어야겠다는 민의가 확실히 드러나야 새누리당 국회와의 원만한 타협도 가능해지리라 봅니다.
이해찬 이명박정부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속성을 보면 대개 세 종류였어요. 현대 쪽과 서울시, 그리고 당에서 나온 사람들. 그중에서 현대 쪽은 물론 기업인이고, 시에서 온 사람들은 공무원 출신이죠. 그런데 당선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더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 핵심으로 들어갑니다.(웃음) 박근혜 진영도 마찬가지예요. 여기도 주로 의원들, 새누리당에서 오래 있던 사람들, 언론인들이 당선 가능성이 높을수록 많이 들어가는데, 현재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이명박정부 인맥보다 양질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럴수록 후보나 당선자가 더 오류를 범하게 되죠. 대통령은 다 마찬가집니다. 본인이 보고받은 범위 내에서 사고하기 때문에 그걸 뛰어넘는 경우가 많지 않죠.
대선에서 야권연대 이전에 해야 할 일들
백낙청 그런데 야권 쪽은 어떻습니까. 우선 수권정당으로 신뢰받기 위해서 두 당 모두 혁신하고 정비할 필요가 있고, 아까 얘기했듯이 총선에서 선거연대가 어려웠는데 이뤄냈으니까 한고비 넘기긴 했지만 문제점이 없지 않았습니다. 대선에서의 연대는 다른 형식으로 진행될 테니까 그 문제도 있고, 대선후보를 뽑는 문제가 있겠죠. 더구나 이번에는 민주당 후보를 뽑아놓고도 안철수씨가 무소속으로 나온다면 거기와 어떻게 연대하느냐 등 여러가지 고비가 있겠지요.
이해찬 그게 앞으로 굉장히 어려운 과제입니다. 기본적으로 연대 대상은 안철수 교수나 진보당 후보가 될 텐데요, 총선에서의 연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신뢰는 좀 쌓였습니다. 관악 을 같은 경우가 전형적이지요. 제가 거기서 다섯번 선거를 치렀는데 한나라당에서 어떤 후보가 나와도 35%를 못 받은 경우가 없어요. 그런데 40%가 넘은 적도 없어요. 그래서 그쪽이 당선이 안 되는 지역이거든요. 이번에는 야권 무소속 후보가 나와 분열됐기 때문에 새누리당이 될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 유권자들이 야권 단일후보로 나온 민주노동당 출신의 진보당 후보에게 확 쏠리더군요. 아주 의외의 결과입니다. 그걸 보면서 유권자들이 훨씬 성숙했고 또 절박했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아마 대선에서도 유권자들은 후보단일화가 되면 이길 수 있다, 꼭 이겨야 된다는 흐름으로 갈 것 같아요. 다만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준비를 민주당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죠. 그래서 특히 리더십이 정확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하나는 관리를 엄격히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지 않으면 원심력이 작용해서 어지러워지는 거예요. 2007년엔 얼마나 어지러웠습니까. 당을 두번이나 깨고 만들면서 어지러웠거든요. 저도 제가 어느 당에 속해 있는지 모를 정도였어요.(웃음) 이름도 다 기억 못할 정도로요. 엄격하게 관리하면서 감동이 있는 단일화를 이뤄내면, 유권자들의 절박한 요구가 있기 때문에 대선까지 갈 수 있는 거죠. 그리고 언론환경도 2002년에 비하면 SNS미디어가 있어서 빠르고 강해요. ‘나꼼수’ 같은 경우가 이번에 한계를 보였지만 굉장한 파급력이 있는 건 사실이죠. 그에 비해 종편은 거의 영향력이 없죠. 신문의 영향력이 떨어져버렸고, 방송의 영향력은 살아 있는데 의외로 종편이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2002년보다 나쁜 환경은 아니에요. 그리고 정책에 관한 공유도 많이 이뤄졌습니다. 지난번 백교수님이 고생하셔서 정책 강령을 만들어냈지 않습니까.
백낙청 그걸 백교수라고 하면 곤란하죠.(웃음) 원탁회의가 중심이 되고 각 당과 시민사회가 참여한 작업이었지요. 민주당과 당시의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이 적극 참여했고, 진보신당도 출발할 때는 조승수(趙承洙) 대표가 동의를 했는데 나중에 빠졌죠.
이해찬 정책연합과 공동정부 두가지가 이루어져야 되는데, 정책연합에서는 차이가 있는 건 있는 대로 합의가 되는 건 되는 대로 성사될 것 같아요. 지난번 초안이 있으니까요. 사실 민주당이 초안 강령에 맞춰서 비례대표를 포진시켰어야 했는데, 이번에 잘 못했습니다. 공동정부 구성안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가 없습니다. 진보당 쪽은 이번 선거에서 의석이 많아졌으니까 성과를 얻었다고 보고 있어요. 따라서 연대를 통해 공동정부에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이 논의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진보당을 주도하는 그룹들의 힘이 총선 전보다 강해졌습니다. 민주당에서 신뢰있는 공동정부 구성안을 제안하면 어느정도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2002년 대선에서는 갈등관계였지만 지금은 우호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공동 캠페인을 하기도 훨씬 좋죠. 6월 9일 전당대회 이후 진보당과의 연대를 어떻게 하느냐가 먼저 논의될 것이고, 후보단일화 문제는 금년 가을쯤 안철수 교수나 진보당 후보와의 단일화 과정을 거치게 될 텐데 그걸 잘 구상해야죠.
백낙청 여기서 진보당에 대해 쓴소리를 할 사람은 저밖에 없는 것 같네요. 이총리는 그쪽이랑 연대를 하셔야 할 입장이고, 윤장관님이 말씀하시면 보수주의자라서 그런다고 할 테니까요.(웃음) 며칠 전에 진보연대, 진보당 등 여러 진보단체들이 초청해서 강연을 했는데 제가 세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는 의석수는 크게 늘었지만 정당명부 득표율이 17대에 못 미쳤을 뿐 아니라 울산, 창원에서 전멸했다는 점입니다. 그게 공천을 잘못하는 등의 정치공학적인 문제도 있겠지만, 사실 노동하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진보당이 나를 위해 제일 많이 해줄 수 있는 당인가 하는 확신을 주는 데 실패한 거 아니냐는 거죠. 집권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더 적극적인 요구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집권해서 책임질 일이 없기 때문에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최대한의 주장만 내세워서 오히려 노동자들을 설득하지 못한 면도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두번째는 선거연대 전략의 초점과 관련된 것입니다. 저는 진보정당이 우리 국회에서 원내교섭단체로 활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2013년체제 만들기’라는 큰 원(願)이 먼저고 원내교섭단체 구성도 그 맥락에서 추구돼야 한다고 봐요. ‘희망2013’을 위해 민주당과 ‘승리2012’를 공동목표로 설정하고, 그 과정에서 20석 이상을 얻으면 좋고, 못 얻더라도 국회법을 고쳐서 가령 10석이나 15석만 돼도 원내교섭단체를 만들 수 있도록 하자는 공동의 선거공약을 미리 내거는 거예요. 물론 국회법 개정이라는 건 새누리당도 동의해야 되니까 간단하진 않지만, 다수당이 되면 여러가지를 주고받는 가운데 그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오로지 우리 당이 20석 이상을 해야겠다, 이를 위해서 민주당을 최대한 압박해서 한 구역이라도 더 얻어내겠다면서 좀 과도하게 티격태격했고 결과적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도 못했어요.
또 하나는, 진보당 안에서 주도하는 그룹의 힘이 더 강해졌다고 하셨는데 그럴수록 조직문화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진보당뿐 아니라 진보운동단체들이 과거에 투쟁하던 시기의 조직문화를 상당부분 그대로 갖고 있거든요. 투쟁은 필요하지만 이제 국민 앞에 투명하게 드러내고 국민을 설득하는 조직이 되어야 하는데, 옛날식으로 무슨 수를 쓰든지 이기고 돌파하면 된다는 그런 문화는 쇄신해야겠다, 이렇게 세가지를 얘기했어요.
윤여준 맞습니다. 이번 총선에서도 교수님이 언급하시는 그런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진보당이 위험한 세력이라는 인식을 심어줬어요. 사실 손해를 많이 봤죠. 앞으로 진보당이 국민들에게 더 폭넓은 지지를 받으려면 조직문화를 바꾸고 더 책임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거라고 봅니다. 야권연대는 총선보다는 대선이 더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요? 연대가 될 거라고는 보는데 아까 이총리님이 말씀하신 것들이 이루어지려면 민주당 안에 민주적인 강력한 리더십이 성립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정당을 운영하는 데 있어 구성적 차원이 있고 도구적 차원이 있다고 하잖아요. 구성적 차원은 당의 정체성에 관련된 것이고 도구적 차원은 전략에 관련된 것인데, 두가지를 통합하는 게 리더십이기 때문에 이게 엉망이 되면 선거를 제대로 치르기 어렵고 정당이 제대로 운영되기조차 힘드니까 민주당의 리더십이 제일 중요한 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안철수 변수’를 어떻게 볼까
백낙청 대선 국면의 리더십에 있어서 당대표의 역할이 물론 중요하겠지만 선거는 역시 후보 중심으로 갈 텐데, 특히 이총리 입장에서는 대선후보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말씀하시기 어려우신 점 이해합니다. 더구나 요즘 박지원 최고위원과의 역할분담이 문재인(文在寅) 고문을 옹립하려는 거 아니냐는 얘기마저 나오고 있거든요. 제가 나름대로 아는 당내 사정이나 관계를 볼 때 그건 말이 안 된다고 봅니다. 문재인 옹립을 전제로 박지원 최고가 그렇게 했다면 그건 완전히 투항한 건데 그랬을 것 같지도 않고, 이총리나 문고문도 그 수준은 아니라고 봐요.(웃음)
윤여준 신문에 난 거 보니까 박지원 위원이 문재인 당선자를 만났는데 문을 열지 않았다고 했던가요.
이해찬 손학규(孫鶴圭)를 만났지만 손을 잡지 않았다, 문재인을 만났지만 문을 열지 않았다,라고 했죠.
백낙청 지금 거론되는 인물들에 대한 평은 오히려 윤장관께서 자유롭게 해주실 수 있을 것 같군요.
윤여준 입장은 자유로운데요, 별로 아는 게 없어서요. 문재인 당선자는 세교연구소 심포지엄 할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악수하면서 인사했어요. 개인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말하기가 조심스러운데, 언론매체에서 받은 인상, 말하는 것,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개인적으로 인품은 정말 훌륭한 분인 것 같아요. 그런데 과연 그분이 악마적 속성이 있다는 권력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고요.(웃음) 이번에 조금 실망한 것은 선거 막바지에 ‘나꼼수’를 선거구에 초청한 것. 그걸 보면 정치적 분별력에 문제가 좀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백낙청 그밖에 손학규 전 대표가 여론 지지도는 높지 않지만 꾸준히 거론돼왔고 소위 잠재적인 가능성으로는 김두관(金斗官) 지사도 있지요.
윤여준 네, 김두관 지사도 많이 거론되더군요. 저는 그분을 잘 모르지만, 잠재적 능력으로 보면 문재인 당선자보다 낫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손지사는 저도 어제 방송을 하면서 그랬습니다만, 왜 꼭 중요한 시기에 현장을 떠나는지 모르겠어요.(웃음) 그것도 판단력의 문제 아닌가요? 그리고 손지사는 뭐니뭐니 해도 역시 한나라당을 탈당해서 왔다는 게 큰 제약 아닌가요? 총리님이 보시기에 어떠세요?
이해찬 지금은 많이 벗었습니다. 지난번 분당 을에 출마하고 당대표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원래 그 이야기는 제가 먼저 했는데 지금은 저도 문제를 안 삼거든요. 그 정도 했으면 인정을 해줘야 된다는 게 대체적인 당내 분위기죠.
백낙청 당내의 구체적인 인물평에 대해서는 이총리께서 웃고만 계신데 웃고 있게 해드립시다. 지금 당내 인물보다 오히려 더 많이 주목 받는 사람이 안철수 교수 아닙니까. 그는 당 바깥의 인사니까 한 말씀 해주시죠.
이해찬 저는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봅니다. 안철수 개인이 아니고 안철수를 중심으로 하는, 선거공학적으로 부동표라고 하는데, 그 표가 참여하느냐 안하느냐, 이게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치죠. 기본적으로 안교수도 그렇고 그 지지층의 성향이 온건한 진보진영이기 때문이고, 세대로는 20~30대가 많고 건전하고 민주적인 절차를 중시하는 사람들이죠. 그들이 참여하면 선거가 역동성을 띠어요. 안철수 개인이 아닌 그 지지층이 안철수라는 배를 수면에 띄워놓은 거 아닙니까. 그 수면이 높아졌다 낮아졌다에 따라 안철수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건데, 그 층과 공감할 수 있는 연대가 없이는 대선이 쉽지 않죠. 또 안철수 본인도 그 현상을 자기 혼자서 맘대로 내치거나 낚아챌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고 보죠.
백낙청 그 층을 끌어당기는 데 안교수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누구나 얘기하는데 그 역할이 이제까지 해왔던 형식을 되풀이해서는 안될 것 아니겠어요?
이해찬 그것이 실제 정치적인 힘으로 나오려면 안교수가 후보 수준까지 가야 되는 거죠. 무소속이든 창당을 하든 입당을 하든 어떤 방식으로든 후보 수준까지 가야 힘이 결집되고, 그 역량과 민주당 후보가 만나 단일화 과정을 거쳐야 선거까지 갈 수 있는 거죠.
백낙청 민주당에 입당해서 후보가 될 가능성은 별로 없지 않겠어요?
이해찬 적지요.
윤여준 저도 그건 안하려고 할 것 같은데요.
이해찬 당을 만들어 후보가 되든가 어떤 모임의 후보가 돼서 민주당 후보와 단일화 과정을 거쳐야 되겠죠.
백낙청 민주당 후보와의 단일화를 전제로 놓고 있는 것에 대해서 윤장관님이 다른 의견이 있으시다면……(웃음)
윤여준 아니요. 새누리당과 민주당 둘을 놓고 보면 민주당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죠.
이해찬 안교수 자신이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에 대해 확장되면 안된다고 말했어요.
결단 앞둔 안철수의 복잡한 셈법
백낙청 서울시장 선거 때 그 얘기를 분명히 했어요. 그런데 총선 전의 전남대 강연에서는 진영논리를 벗어나고 싶다고 하고 인물을 보고 뽑으라고 했지요. 저는 그 대목에서 조금 의아했습니다. 물론 좋은 인물을 뽑으라는 게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요. 진영논리를 벗어나라는 것도 여당, 야당 패거리 지어서 자기들 하는 일은 무조건 옳고 남들이 하는 일은 다 안된다 이런 논리에 빠지지 않아야 된다는 건 맞는데, 어찌 보면 안교수 자신이 서울시장 선거 때 자기 나름의 진영논리를 폈었거든요. 한나라당 진영이 확장해서는 안된다고. 그 입장에서 이탈했는가, 그런 궁금증이 들었어요.
이해찬 그건 대선 후보보다는 총선 후보들을 의식해서 한 얘기 아닌가요?
백낙청 그렇죠. 그런데 좋은 인물 뽑는 게 물론 중요하지만 저마다 다 훌륭한 인격자라고 떠들고 다니는데 누가 진짜 좋은 사람인지 아는 게 쉽지도 않고, 냉정하게 봤을 때 양쪽 다 훌륭한 인물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냐, 기권하라는 거냐. 안교수는 기권하지 말자는 거였거든요. 그런 점이 상충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이 분이 양비론적 입장으로 후퇴한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했는데, 총선 임박해서 유튜브에 비디오 올린 게 있죠. 앵그리버드(angry bird) 인형을 들고 나와서 얘기를 하는데, 원래 서울시장 선거 당시의 일종의 진영논리를 다시 펴더군요. 저 나름의 진영논리와도 통하는데, 한국사회에 보수・진보 양대 진영이 있는 게 아니라, 제대로 진영으로서의 힘을 갖추고 정당뿐 아니라 각계각층에 유리한 고지를 점한 견고한 진영은 하나밖에 없다는 거예요. 앵그리버드라는 게임에서 나쁜 돼지들이 성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거거든요. 그리고 이쪽에는 그런 성채를 못 가진 앵그리버드들이 자기 몸을 던져 성채를 공격한단 말이에요. 안교수가 그 비디오에서 여러분의 한표 한표가 앵그리버드입니다,라고 말하죠. 그래서 나와 기본적으로 생각이 같구나 하고 안도했어요.(웃음)
윤여준 그런데 남보고는 앵그리버드가 되라고 하면서 자기는 앵그리버드가 안 되면 곤란하지 않습니까.(웃음)
백낙청 끝까지 앵그리버드가 안 될 거라고 보시나요?
윤여준 그렇게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만, 제가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외곽을 맴도는 어설픈 행태 아니냐. 지금까지 한 걸 보면 의지는 분명히 있어 보이는데 본인이 가진 신선한 이미지를 가지고 장외를 계속 돈다고요. 뚜렷한 비전이나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없고. 이렇게 계속 가면 국민은 검증을 피하려고 한다는 인상을 받기 쉽습니다. 젊은 사람들보고는 끝없이 도전하고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하면서도 왜 본인은 도전하지 않고 저러느냐고 생각할 수 있죠. 제가 젊은 사람들을 만나보면 안교수에게서 그런 인상을 받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어요. 2학기에는 강의를 안한다고 했으니까 곧 정치로 나올 것 같긴 한데 정당을 만들진 않을 것 같아요. 아시다시피 정당 만드는 게 쉽습니까. 안교수 입장에서는 엄두가 안 나는 일입니다. 더구나 최근에 박세일(朴世逸) 교수가 창당했다가 무참하게 깨지는 걸 봤죠. 저는 안교수가 정당을 만들 거라고 보진 않지만 어떤 운동체나 결사체를 만들기는 할 거라고 봅니다.
백낙청 정당을 안 만들고 참여하는 것으로는 박원순(朴元淳) 모델이 있는데 그것이 대선 과정에서 어느 정도 적용 가능하다고 보시나요?
이해찬 2002년에 정몽준(鄭夢準) 후보는 당을 만들어서 경선을 했어요. 딴 방법이 없으니까 여론조사를 했지요. 박원순 시장은 당을 안 만들고 여론조사와 현장투표로 했는데 역시 그 방법은 그렇게 역동적이지는 않아요. 나이브하죠. 실제로 단일화를 해서 정말 씨너지효과를 내려면 당을 만들어야죠. 당을 만들어서 양당이 경선을 하고, 단일화가 되면 그 당과도 공동정부를 또 만드는 식으로요. 그냥 그룹으로 있는 것과 당이 돼서 공동정부를 만드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실제로 정권교체를 해서 공동정부를 구성하고 운영하려면 당을 만들어서 당 이름으로 후보단일화 과정을 거치는 것이 훨씬 역동적이지, 그룹으로 해놓으면 정강정책이 있는 것도 아니고 후보 개인의 의견만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공동정부 구성에 있어서 원칙이나 방향이 공유되기가 어렵죠.
윤여준 시민단체 성격의 조직을 만들어서 당의 후보와 경선한다는 게 승산이 얼마나 있느냐 하는 것도 굉장히 조심스럽죠.
이해찬 그런 점도 있어요. 정몽준 후보와 노무현 후보도 단일화 논의를 시작할 때는 23:17로 정몽준 후보가 6%를 앞섰습니다. 그랬는데 나중에 결과를 분석해보니까, 적합도 여론조사를 했는데 민주당 표는 결집을 하는 반면 국민통합21은 당은 당인데 형식적인 당이니까 결속도가 떨어져요. 그런 점이 있기 때문에 안철수 교수는 일찍 판단을 내려야 돼요.
백낙청 당을 만드는 일이 엄두가 안 날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당을 만들어도 쉽지 않다는 거군요. 입당해서 민주당 경선에 참여하는 것도 거의 가능성이 없고, 박원순 모델도 안 통할 것 같고……
이해찬 통하긴 통하는데 역동성이 떨어지는 거죠.
윤여준 안교수 본인의 고민이 길어지는 것도 그런 점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자기 입으로 대통령에 나서는 건 선택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어요. 수동적인 자세죠. 세상에 선택이 아닌 게 어디 있습니까. 더구나 국가의 권력을 쟁취하는 건데 주어지는 것이다? 안교수와 대화를 나누어보면 끊임없이 상황을 점검해서 이거라는 확신이 없으면 안 움직이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농담으로 그럼 정치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정치지도자는 상황을 만들어가는 사람이지 상황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하면 평생 기다려도 그런 상황이 안 온다고 웃으면서 얘기한 적이 있어요. 지금도 선택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라고 하잖아요. 그건 정말 잘못된 생각이라고 봐요.
이해찬 이런 겁니다. 저도 정치를 하면서 느끼는 게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타는 일이란 거죠. 상황은 끊임없이 밀려옵니다. 한시도 쉬지 않고. 파도를 계속 타고 넘어야 돼요. 넘다보면 파도 속에 끌려들어가서 물 먹고 나오기도 하고 매끄럽게 넘기도 하고. 그걸 꾸준히 해서 목적지까지 가는 거예요. 그냥 둥둥 떠서 가는 게 아니고 끊임없는 파도타기를 하면서 가니까 정말 어렵고 위험하고 예민한 거죠. 그걸 피할 수는 없습니다.
윤여준 본인은 그걸 상당히 겁내고 있다고 봐요. 물 먹는 걸 겁내는 거예요. 현실정치판을 보면 때로는 주먹다짐도 하고 멱살잡이도 하고 구정물을 뒤집어쓸 때도 있잖아요. 저걸 내가 어떻게 해내냐 이런 생각을 함직하거든요. 그리고 정치적 상황이라는 게 아무리 점검해봐도 계속 움직이잖아요. 그러니까 고민만 길어지는 거예요.
이해찬 생각해보세요. 작년 8월 무상급식 주민투표부터 시작해서 불과 여덟달 만에 우리 정치가 얼마나 변해왔습니까. 앞으로 6개월 동안에도 변화가 없을 리가 없어요. 파도타기가 계속 된다고요. 파도를 끝까지 타서 넘는 사람이 골인하는 것이죠.
윤여준 안교수는 굉장히 좋은 배도 있는데 왜 그렇게 파도타기를 겁내는지 모르겠어요.
백낙청 글쎄요. 안교수가 상황이 주어져야 된다고 말하는 건 상황이 저절로 만들어지면 꽃가마를 타겠다는 얘기라기보다 파도타기를 안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파도타기를 하겠다는 뜻일 수도 있겠지요.
이해찬 자기가 이기려는 의지가 있어야 되거든요. 그래야 세력이 결집이 돼서 씨너지가 나오는 거지, 져도 좋고 이겨도 좋다 하면 씨너지가 안 나옵니다. 그리고 정당이라는 건 사회제도예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되는 사회제도이자 기구 아닙니까. 그건 언제나 충원해가면서 발전시켜나가야 되는 거지요.
윤여준 안교수만 해도 잃을 게 많다는 얘기인데 과감해지기 어려울 수 있겠죠.(웃음)
2013년은 대한민국 재도약의 갈림길
백낙청 안교수 일은 지켜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고요,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마지막으로 정리를 겸해서 유권자들이 2012년 대선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기준으로 후보자를 판단해야 할지, 개별 정치인뿐 아니라 정당이나 시민사회, 지식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해주시죠.
이해찬 2013년체제가 앞으로 20년이 갈지 25년이 갈지 모르겠습니다만, 2013년부터 대략 2030년까지 우리 사회가 정말 살기 좋은 나라로 발전할 수 있느냐 아니면 여기서 주저앉느냐를 가늠하는 아주 중요한 역사적 시기가 바로 지금이에요. 왜냐면 여기서 우리가 동북아 평화체제를 만들고 군비축소를 하면서 어느정도 복지공동체의 내적 구조를 만들고 민주적 질서를 확립하면 유럽 수준 이상으로 갈 수 있는 나라가 되는 것이고, 그걸 못 만들고 수구적이고 냉전적인 요소가 더 강화된다면 좋은 기회를 잃어버리는 거죠. 그렇게 되면 진보진영은 구심력이 대단히 약해져서 한참 후에나 회복될지 모르고, 수구세력은 더 기승을 부려서 예상 외로 훨씬 강화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어요. 그렇게 되면 아까 말했듯이 갈등은 더 첨예해지고 안정적인 사회에서 멀어질 우려가 크죠. 그런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권력구조의 개편이기 때문에 정말 비전을 갖는, 그리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진정성있는 후보를 우리가 선택해야 된다는 점이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윤여준 우리가 당면한 시대적 과제는 권위주의를 완전히 청산하고 민주적인 포스트박정희 모델을 만드는 것입니다. 특히 강력한 빛과 그늘을 동반하는 세계화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말입니다. 그게 없으면 지속적인 발전도 어렵고 평화통일이라는 건 난망하기만 하죠. 이번 대선은 그런 시대적 과제를 향한 첫걸음이 아닐까요. 그래서 후보를 판단할 때, 제가 건방지게 스테이트크라프트를 얘기했습니다만, 복잡한 국가기구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보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 공공성이거든요. 공공성이 이명박정부 들어서 너무나 무너져서, 이래서는 도저히 민주주의도 할 수 없는 거죠. 그래서 공공성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봐야 합니다. 공공성 위에 능력이 담겨야지, 공공성이라는 기초 없이 유능하면 자칫하면 국가에 해를 끼칠 수 있어요. 저는 누가 가장 공공성이 투철한가를 기준으로 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백낙청 그 점은 저도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공공성이라는 게 우선 대통령 될 사람의 개인적인 심성의 문제기도 하지만, 그걸 뒷받침하는 세력과 기반이 없이 가령 나는 이명박보다 공심(公心)이 강한 사람이니까 내가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지 않나 합니다. 그리고 진정성을 말씀하셨는데, 무엇을 위한 진정성인가. 저는 ‘희망2013’을 향한 진정성이라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계속 2013년체제 얘기를 하려고 합니다. 87년 이래의 세월과는 다른 차원의 한반도를 만들려는 큰 그림을 갖고 그 그림에 대해 얼마나 진정성을 갖느냐로 후보를 판단해야 될 것 같아요.
아까 한반도 문제를 얘기하다가 시간관계상 자세한 얘기는 못했습니다만, 사실 87년체제는 기본적으로 1953년 정전협정 체제라는 토대 위에서 군사독재를 갈아치웠을 뿐이지 53년체제의 기반은 공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87년체제를 넘어서 또 한번 도약하려면 정전협정 체제가 평화협정으로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국 대통령 마음대로 다 되는 건 아니지만 사실 한국의 대통령이 강한 의지를 가지고 국민의 동의를 업고 밀어붙이면 최소한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일 정도는 임기 내에 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내가 대통령이 되면 언제까지는 평화협정을 맺겠다고 공약하고 거기에 대한 여러 반론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해요. 북핵문제는 간과하겠다는 거냐, 혹시 남북을 등가적으로 보는 것 아니냐, 이런 얘기들이 다 나오겠지만 흔들리지 않을 만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국민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당에 계시는 이총리나, 원래는 한나라당에 계셨지만 지금은 자유롭게 활동하고 계시는 윤장관님이나, 줄곧 시민사회에서 활동해온 저나 2013년 이후에는 좀더 통합된 대한민국이 이루어지는 데 최선을 다해 일조하기를 바라겠습니다. 오랜 시간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2012.4.28 세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