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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다시 장편소설을 말한다

 

장편소설의 현재와 가족서사의 가능성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이 있음. cyndi89@naver.com

 

 

1. 장편소설의 현재를 바라보다

 

근래 한국문학의 현장에서는 유례없이 많은 장편소설이 출간되고 있다. 몇년 전부터 문예지 및 온라인 공간에서 장편연재가 고정된 형식으로 자리잡고 신인과 중진을 대상으로 한 장편소설상이 신설되면서 장편소설의 활황은 어느정도 예측했던 것이기도 하다. 드라마나 영화 등 각종 문화산업과의 관련 속에서 부각되는 서사장르의 다양화 역시 장편소설에 대한 기대와 필요성을 높이는 요인이다. 무엇보다도 문학현장에서 장편소설에 대한 관심과 주문은 독자와의 폭넓은 공감과 소통을 확보하는 활력있는 이야기 형식으로서의 소설문학에 대한 기대를 반영한다.

장르문학과의 접합,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 파괴, 역사 소재의 가공 등 다양한 형식이 꾸준하게 시도되고 있지만 그중 뚜렷하게 부각되는 현상 중의 하나는 가족서사를 다룬 작품들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독자의 각별한 관심을 받은 신경숙(申京淑)의 『엄마를 부탁해』(창비 2008)와 김애란(金愛爛)의 『두근두근 내 인생』(창비 2011)을 포함하여 윤성희(尹成姬)의 『구경꾼들』(문학동네 2010), 강영숙(姜英淑)의 『라이팅 클럽』(자음과모음 2010), 천명관의 『고령화 가족』(문학동네 2010), 최진영(崔眞英)의 『끝나지 않는 노래』(한겨레출판 2011), 김이설(金異設)의 『환영』(자음과모음 2011), 성석제(成碩濟)의 『위풍당당』(문학동네 2012) 등 가족 이야기를 다룬 많은 작품들이 발표되고 있다.

장편소설의 역사에서 19세기 이래 ‘가족’은 ‘성장’과 더불어 가장 익숙하고 친근하게 다루어져온 소재 가운데 하나다. 장편소설이 감당해야 하는 ‘긴 이야기’의 시간적 흐름을 생각한다면 가족의 탄생과 변화, 쇠락의 과정은 인간사의 굴곡을 담아내기에 좋은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1) 물론 개인과 사회의 긴밀한 관계를 담아내는 주제의식이 강력하게 작동했던 근대적인 가족서사와 비교한다면, 근래 한국의 장편소설이 보여주는 가족서사는 확실히 다른 변모의 지점들을 보여준다.

한 예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각기 다른 서술 시점을 활용하여 가족의 변화와 쇠락이라는 흐름 속에서 ‘엄마’에 대한 기억을 담아낸다. 서사의 중심이 되는 엄마의 생애는 단일한 줄거리로 환원되지 않고 각자의 기억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복합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소설을 감싸는 애도의 곡진한 정서적 효과는 다성적인 목소리에 의해 변주되는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을 펼쳐보이는 데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이 보여주는 가족의 이야기 역시 주인공 소년의 기억과 상상 속에서 입체적으로 구성된다. 이 소설은 따뜻한 연민의 시선을 통하여 부모 세대의 위계적 서사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해체하며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위계적 가족서사의 해체와 더불어 최근의 장편소설은 가족 연대기의 흐름을 허구의 새로운 원천으로 적극 활용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천명관이나 김연수(金衍洙), 최진영과 김이설의 소설에서 활용되는 가족서사는 개인의 정체성 찾기의 과제로만 수렴되지 않는, 그 자체로 증식하고 확장하는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인물의 탄생과 성장에 얽힌 사회적 연대기를 담아내면서도 그것의 기원이 되는 가족관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전 소설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허구의 이야기 세계가 그 어느 때보다도 확장되지만 정작 이것을 변주하는 시선의 한편에 파국과 종말의 상상력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도 현재 장편소설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2) 김사과, 최진영, 안보윤과 백가흠(白佳欽)의 소설이 보여주는 비관적인 세계인식과 과도한 폭력 상징은 근래 소설들에 나타나는 중요한 징후다. 시대의 흐름을 담아내는 절망과 종언의 서사는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일정한 결말을 요구하는 장편소설에서 피할 수 없는 형식이기도 하다. 넘쳐흐르는 허구적 이야기들과 대조되는 파국의 상상력은 우리시대의 장편소설이 서 있는 자리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장편소설에 드러나는 가족서사의 다채로운 조합과 변형은 우리가 익숙하게 접하고 있었던 근대소설의 서사형식이 어떤 것인지를 돌아보게 하면서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체하고 조립하는 장르적 변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 살펴볼 천명관과 최진영, 김이설의 소설은 그 사례를 살피기에 유효한 좌표가 될 것이다.3)

 

 

2. 이야기의 향연, 모험의 형식과 가족서사

 

다양한 서사장르의 요소들을 모사하고 조합하는 소설의 흐름은 모레띠(F. Moretti)가 분석한 바 있는 ‘브리꼴라주’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은 본디 유기적이고 자기완결적인 장르가 아니라, 여러 장르의 특성을 ‘재기능화’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모레띠의 주장4)은 최근의 장편소설들을 둘러싼 논의에서 다양한 장르의 접합을 시도하는 작품들을 해석하는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허구와 현실의 혼합, 비평적 에세이와 소설의 혼합, 단편과 장편의 경계 부수기 등 이질적인 선행 텍스트들에서 추출한 파편을 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서사적 실험이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5) 이렇듯 근대소설 형식에 각종 인접 장르문학의 특징들이 녹아들고 있는 현상은 실제로 근대소설사 초기부터 두드러졌을 뿐 아니라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특정한 서술기법의 유형이나 고정된 길이의 개념으로 장편소설을 정의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다양한 서사장르와의 접속을 꿈꾸는 이야기의 향연을 통해 장편소설이 지닌 혼종적 특성을 뚜렷이 드러내는 사례는 천명관의 소설에서 발견된다. 허구를 창조하는 이야기꾼의 도래와 소설의 모태가 되는 다양한 이야기 형식의 탐색이라는 점에서 천명관의 소설은 성석제를 연상시키는 바가 있다. 더불어 그의 소설이 보여주는 대중문화적인 상상력은 김영하(金英夏)를 거쳐서 박민규(朴玟奎)나 최제훈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그의 첫 장편 『고래』(문학동네 2004)에서 펼쳐지는 무한증식하는 이야기의 파편들은 다양한 서사장르들의 특성을 모사하고 조합하며 일종의 축제를 벌인다. 허구로 직조된 이야기의 공간을 한껏 부풀린 『고래』에 견준다면 근래 발표한 『고령화 가족』과 『나의 삼촌 브루스 리』는 가족서사를 매개로 하여 인물들이 자리하는 시대적 현실을 가깝게 끌어들인다.

한 인물의 성장과 모험을 둘러싼 시대적 연대기를 활용한다는 점에서 천명관 소설은 성석제가 활용하는 인물의 전기(傳記) 형식을 연상케 한다. 천명관은 역시 능란한 이야기꾼의 면모를 보여주지만 성석제 소설이 보여주는 “기억과 지혜에 있어서 공동체에 의존하고 있는 이야기꾼”6)의 고전적인 자의식 세계와는 다른 맥락에 있다. 천명관 소설에서 인물들의 일대기는 공동체의 이야기를 환기하는 애도의 세계로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유로운 모험의 세계로 향한다.

천명관의 소설이 주목하는 것은 해체된 가족과 그것으로부터 미끄러져 나온 아웃사이더들의 인생유전이다. 『고령화 가족』에서 이러한 떠돌이 아웃사이더들을 결집하는 중심인물은 가족 구성원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엄마’이다. 제목에서도 암시되듯이 성장해서 떠난 자식들이 거꾸로 다시 집에 돌아오면서 시작되는 ‘늙어버린’ 식구들의 이야기는 쇠락한 가족의 형태를 직접적으로 암시한다. ‘평균 나이 49세’의 ‘고령화 가족’의 자식들은 실패한 영화감독, 교도소를 드나들다가 빈털터리가 된 백수, 딸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온 이혼녀이다. 이들의 범상치 않은 삶의 이력은 엄마의 비밀과 관련이 있다. 주인공의 형인 ‘오함마’는 아버지가 첫 부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고 동생인 미연은 엄마가 다른 남자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던 엄마는 자신이 낳지 않은 오함마 역시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아낀다. 스스로의 욕망에 솔직한 만큼 자식들에게도 관대한 엄마는 독립된 가정을 꾸려야 할 자식들이 빈손으로 집에 돌아와도 아무 말 없이 그들에게 집과 먹을거리를 제공한다. 엄마를 중심으로 다시 모여든 ‘고령화 가족’은 딱히 혈연관계에 집착하지 않는다. 부모가 각각 다른 형제들은 서로에게 짜증과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오갈 데 없는 쓸쓸한 서로의 운명을 연민하며 공감을 주고받는다.

천명관이 보여주는 가족서사는 가족의 관계를 억압의 대상으로 소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혈연관계에 머무르지 않고 뻗어나가는 연민과 이해의 시선은 천명관 소설을 움직이는 힘이다. 각자의 가정이 깨져서 뒤늦게 다시 모여든 ‘고령화 가족’의 작은 연립주택은 종래의 집과는 다른 유대감을 준다. 가족을 경유하지만 가족 내부의 질서로는 환원되지 않는, 아웃사이더의 공동체에 대한 연민과 공감은 천명관 소설이 형성하는 독특한 감수성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윤성희의 『구경꾼들』이 보여준 가족을 매개로 뻗어나가는 우연의 공동체와 천명관 소설의 한 대목을 연결시킬 수도 있겠다.

아버지는 물론이고 어머니도 구심점이 아닌 가족 속에서 이야기는 자유분방하게 뻗어나간다. 『고령화 가족』에서 의외로 소설의 중요한 내용이 되는 것은 후반부에 난삽하게 펼쳐지는 오함마의 모험담이다. 동생을 구하기 위해 깡패들의 범죄에 합류했다가 그들을 배신하고 해외로 도주하는 데 성공한 오함마의 인생역전은 주인공이 끝내 실현하지 못한 영화적인 삶을 대리실현해준다. 전반부의 가족서사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오함마의 여정은 현실을 떠나 낭만적인 모험을 떠나는 영웅의 한 모습을 연상시킨다. “꼬일대로 꼬인 막장인생”을 청산하고 “<스팅>의 주인공처럼 멋지게 한탕해서 <쇼생크 탈출>의 주인공처럼”(233면) 인생을 전환시킨 오함마의 이야기는 가족서사가 탄생시킨 모험서사의 새로운 한 장을 암시한다.

부계가족의 해체와 출생의 비밀에서 뻗어나간 모험형식의 활극은『나의 삼촌 브루스 리』에서도 만개한다. 할아버지의 숨겨둔 아들로 뒤늦게 가족에 편입된 삼촌 도운의 모험담은 이 소설의 드라마틱한 인생유전을 이끌어가는 핵심요소다. 흥미로운 부분은 서자(庶子)로 여겨졌던 삼촌이 사실은 이 집안과 혈연적으로 관계 없는 사람임이 뒤늦게 알려지는 대목이다. 주인공의 관점에서 삼촌을 억눌렀던 것은 진정한 가족의 계보에 속하지 않는 ‘서자’의 자의식이었다. 삼촌은 액션대역배우의 고단한 삶 속에서도 영화배우 ‘브루스 리’에 대한 열망과 동경을 놓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영화배우 ‘원정’을 향한 삼촌의 순정이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는 그것이 스스로 열망하는 진짜의 삶을 확인하는 여정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우연히 알게 되는 삼촌의 출생 비밀은 서자의식 역시 삼촌 자신의 모험을 자극하는 연기술이었음을 허무하게 보여준다. 결국 이 소설에서도 핏줄이나 출생의 비밀과 관련된 가족의 이야기는 영화 속의 맥거핀(macguffin)처럼 분위기만 유도한 채 소설의 후반부에서 사라져간다. 모험의 원동력은 사연과 비밀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낙천성과 활력을 품은 인물들이 펼쳐가는 이야기 그 자체에서 흘러나온다.7)

혈연가족으로부터 이탈한 삼촌이 펼쳐가는 모험세계는 천명관이 보여주려는 소설장르의 경계 확장을 비유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70년대에서 90년대를 관통하는 삼촌의 모험과 생애는 한국사회의 근대화 과정과 맞물려 있지만, 군부독재, 민주화운동, 자본주의 소비현실의 심화라는 환경은 삼촌의 삶을 스치고 가는 외부의 그 무엇으로 놓여 있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는 『고령화 가족』보다 훨씬 많은 역사연표를 소설 속에 기록하면서도 그것을 인물의 동선과 굳이 연결 짓지 않는다. 역사연표를 넘나드는 인물의 모험은 남성 영웅서사의 쓸쓸한 판타지를 부분적으로 재생하면서 그 자체로 위무되는 고독과 추억의 감수성을 자극한다. 그런 점에서 이 모험의 세계는 수많은 이야기의 활극을 거느리면서 그것을 감싸안는 애잔한 추억의 정서로 귀착한다.

출생 비밀에 얽힌 가족사의 사연을 모험의 여정으로 변환시키는 마력은 우리시대 장편소설이 가족서사를 활용하는 유동적인 한 경계를 암시하는 듯하다. 집단적 귀속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순수한 위무와 공감의 세계, 성장의 입사절차를 판타지의 공간으로 확장시켜버리는 이 긴 이야기의 모험세계는 향후 장편소설의 한 영역을 예측하게 한다. 그런 점에서 『고령화 가족』의 결말은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의 향연을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엄마의 죽음으로 ‘고령화 가족’은 해체를 맞지만 주인공은 에로영화 감독이 되어 계속 영화를 찍고 오함마는 캄보디아에서 두 아이를 입양하여 또다른 인생을 살아간다. 그렇게 이야기의 쓸쓸한 탈주는 계속된다. 천명관 소설은 가족에서 출발하여 가족 바깥으로 향하는 가장 활달한 모험의 양식을 우리 앞에 펼쳐보이는 것이다.

 

 

3. 가부장적 가족의 부정과 파국의 상상력

 

천명관 소설의 주인공이 가족서사의 이탈을 통해 허무와 연민의 정서로 가득한 모험세계로 길을 떠난다면, 최진영 소설의 주인공은 폭압적 가족체제에 대한 강렬한 부정의식을 끝까지 밀고 나감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첫 장편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에서 주인공 소녀는 폭력적인 아버지와 그것을 방관하는 어머니에게 반발하며 가출을 감행한다. 자신의 부모를 부정하면서 진짜 부모가 따로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아이의 환상은 프로이트가 분석한 가족이론의 한 대목을 떠오르게 한다.

주목되는 부분은 이러한 소녀의 ‘길찾기’ 서사가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구조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진짜’ 부모의 세계를 찾아가는 소녀의 여정은 비극적인 현실의 구조를 차례로 확인해가는 과정과도 같다. 부모를 찾는 길에서 소외받는 이들의 고달픈 삶을 차례로 들여다보게 되는 주인공이 종국에 확인하는 것은 가족구조를 포함한 환멸적 현실세계의 모습 그 자체다. 진짜 부모를 찾기 위해 떠난 상상적인 여정은 살인이라는 극단적 결말을 통해 세계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 감정을 폭발시킨다. 소설에서 주인공이 내세운 길찾기의 여정은 “폭력의 기원으로서의 아버지와 아버지를 꼭짓점으로 한 가족 로망스를 해체하고 재맥락화”8)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가부장적 가족에 대한 부정이 세계에 대한 절망과 분노로 연결되는 구조는 근작 『끝나지 않는 노래』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식민지시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성인물 삼대의 가족사를 압축한 이 작품에서 ‘두자’는 한많은 여인의 전형으로 소설의 중심부에 놓여 있다. 그녀가 겪는 삶의 고난은 철저하게 남성중심적인 가부장적 사회구조의 모순에서 비롯된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남의 집 씨받이 노릇을 하다가 고달픈 여성가장으로 살아가야 하는 두자의 고단한 삶은 자식들에게까지 이어진다.

소설 속에서 아버지는 모순적이고 억압적인 기원으로 놓여 있으며, 어머니 역시 그러한 현실을 무기력하게 방관한다. 폭압적인 아버지에 견준다면 어머니는 상대적으로 인간적인 온기를 지녔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가 현실적인 구원의 축은 될 수 없다.9) 소설에서 두자가 겪는 고난의 삶은 딸들의 삶으로 이동하면서 그 억압의 기원마저 흐릿하고 희미해진다. 부모에게 기댈 수 없는 세계에서 딸들은 스스로 현실을 헤쳐나갈 수밖에 없다. 비극적 세계 속에서 억압받는 타자들끼리의 공명과 연대 역시 구원의 길을 제시해주지는 못한다. 절망과 고난의 현실에서 공감의 연대는 매우 가냘픈 가능성만으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소설에서 인물들이 위치한 시대는 간략한 연표의 기록과 압축된 사건 묘사로 편집된다. 최소한의 사실만 선형적으로 늘어놓는 연대기의 구성은 사건과 인물의 관계를 극히 단순한 인과로 설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익숙하고 오래된 여성 수난사를 가공하는 문제적인 대목은 바로 과거와 현재의 교차구성으로서 삽입되는 고시원 화재현장의 기록들이다. 대대로 내려온 고단한 여성들의 삶은 서울에 올라와 안간힘을 쓰며 고시원에서 살아가는 한 청춘의 삶과 번갈아서 기술된다. ‘88만원세대’의 비극을 체현하는 고백적 화자의 등장은 과거의 여성수난사를 현재에 가져다 놓으려는 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엄마와 할머니의 무수한 사연들이 풀려나오는 과거 이야기에 반해 정작 그 스토리를 엮어야 하는 현재 화자의 전망은 비관적이다. 엄마들의 고통스러운 삶은 가부장제의 폭력이라는 수난사 속에서 요약되지만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인공의 삶은 그 어떤 틀로도 요약되지 않는 암담함 속에 놓여 있다.

전작인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이 세상에 대한 분노와 우울을 인물의 적극적인 행위로 발산했다면 『끝나지 않는 노래』의 인물은 그마저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에 처해 있다. 이 소설이 당면한 서사적 곤경은 여성들의 삶을 억눌렀던 가부장적 삶의 질곡과 ‘88만원세대’의 시선이 접속하는 비관주의의 지점에서 발생한다. 역사 속에서 여성의 삶에 깃든 고통을 들여다보려는 애정어린 시선에도 불구하고 이 기록들은 현재의 인물이 갖는 비관적 현실인식과 생동감있게 연결되지는 못한 듯하다. 엄마들의 과거로 거슬러올라가는 이야기의 세계는 거침없이 확장되는데 정작 그것을 상상하고 더듬는 화자의 현실은 고시원 화재현장처럼 폐쇄되어 있다. 두 세계의 기묘한 대조는 최진영 소설을 포함한 최근의 한국소설에서 보이는 서사적 모험의 한 국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닫힌 세계에 대한 체념과 비관은 역설적으로 허구적 공간에서의 기억과 상상을 부풀린다. 확장된 허구의 세계는 파국과 종말마저도 하나의 예정된 서사의 형식으로 흡수한다. 이 지점에서 “종말의 상상이 반드시 재앙을 필요로 하지는 않으며 종말의 주체가 반드시 불안과 위기를 속성으로 삼지는 않는다”10)는 전언을 새삼스럽게 상기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진정한 파국의 상상력은 종말을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끝이 어디에 존재하는지를 끊임없이 성찰하는 과정에서 생성된다. 고시원에 갇힌 우울한 청춘이 감당해야 하는 고민이 가부장적 가족구조를 포함한 세계에 대한 인식과 섬세하게 결합되기 위해서는 이 비관주의의 한 국면을 냉정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가족구조의 모순을 격렬하게 부정하는 이 파국과 고통의 서사는 또다른 성찰과 모험을 새롭게 필요로 한다. 긴 이야기의 여로를 거쳐 현재로 돌아온 최진영 소설이 앞으로 펼쳐갈 서사적 모험이 궁금해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다.

 

 

4. 전락하는 가족과 여성, 윤리의 경계를 묻다

 

가난과 폭력 속에서 자신의 삶을 훼손당하는 여성들의 전락과정은 김이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내용이다. 『나쁜 피』(민음사 2009)와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문학과지성사 2010)이 보여주는 것은 가부장적 가족구조와 가난으로 표현되는 핍진한 현실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여성의 고단한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김이설 소설에서 포착되는 여성의 삶과 경험은 자본주의 일상에서의 물화현상을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유사한 소재를 다룬 최근의 한국소설을 돌아볼 때도 이토록 처절하고 노골적으로 ‘돈’의 세계와 ‘몸’의 세계가 전면에서 부딪치는 소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한 가정의 주부가 생계의 전선에서 윤락여성으로 변해가는 비극적인 도정을 그린 『환영』은 김이설 소설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작품이다. 『환영』을 이끌어가는 이야기의 흐름은 소설 속 가족이 보여주는 ‘전락의 서사’를 통해 구축된다. 가부장적 폭력과 헤어날 수 없는 가난, 아버지의 병으로 인해 와해된 가족은 주인공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이미 끝장났던 집 아냐? 다 내 탓인 것처럼 그러지 마. 나 아니어도 산산조각 난 집구석이었어, 뭘!”(55면)이라는 동생 미연의 말처럼 구제하기 힘들 정도로 전락한 부모와 형제는 주인공 윤영에게 무거운 짐이다. 이 가족을 벗어나기 위해 윤영이 새롭게 구성한 가족 역시 비슷한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고시원에서 만난 남편은 공무원 시험공부를 핑계로 생계의 전선에서 뒤로 물러나 있고 아이 역시 윤영이 치료비를 벌며 보살펴야 하는 책임의 대상이다. 어머니와 형제, 남편과 아이를 동시에 부양해야 하는 윤영의 황폐한 현실은 왕백숙집에서 윤락행위를 하게 되는 실질적 계기이다.

“열일곱살 이후로 단 한순간도 쉬어본 적이 없이 돈벌이를 했”(13면)던 윤영에게 ‘가족’은 고통을 주는 현실인 동시에 이것을 벗어나기 위한 상상적 구성물이다. 소설이 특히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가족을 구성하고 지탱하려는 욕망의 한가운데 자리잡은 ‘모성’의 위치를 환기하는 데 있다. 생계의 압박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일깨우는 절박한 명분이 되는 것이다. “내가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모두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위해서였다”라는 고백은 “내 배로 낳은 아이였으므로, 나처럼 살게 할 수는 없었다.”(15면)라는 합리화로 나아가고 끝내는 “엄마가 평생 몸을 팔아서라도 네 다리 고쳐줄게”(164면)라는 의지로 굳어진다.

그러나 윤영이 자각하는 모성적 정체성은 아이에 대한 집착과 사랑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욕망으로부터 분리된 것일 수는 없다는 점에서 균열에 봉착한다. 그녀는 가족을 지탱하는 경제적 버팀목의 위치가 화폐가치가 작동하는 소비의 욕망 한복판에 있음을 수시로 자각한다. 윤락행위를 하는 명분에는 이렇게라도 뒷바라지를 해 나중에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안정되게 넓은 집에서 살고 싶다는 평범한 소시민적 욕망이 함께 스며 있다. 이러한 욕망의 균열은 이 이야기를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상품화되는 여성의 모습에 대한 자연주의적 묘사로 제한할 수 없게 한다.

좀더 넓은 방으로 이사가는 것이 “많이는 아니고, 조금만. 그건 욕심이 아니라 희망이라고 생각했다”(29면)라는 윤영의 토로는 심리적 균열의 한 징표를 정직하게 보여준다. 윤락행위를 해서라도 번듯한 직업을 가진 남편을 만들고 싶은 욕망은 ‘가족’을 먹여살리고 어머니 노릇을 한다는 자의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돈을 벌면 벌수록 감당해야 할 가족의 빚은 늘어가고 그녀의 욕망도 수입 이상으로 증식해간다. 그녀의 물질적 욕망과 그 충족을 위한 몸의 상품화 과정이 조응하지 않는 비극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결과기도 하다. 『환영』이 보여주는 전락의 양상은 그런 점에서 무섭도록 현실적이다.

전락의 서사로 펼쳐지는 가족과 모성의 이야기는 물신세계의 소비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여성의 자의식을 동시에 묻는다. 『환영』이 극단화하는 여성의 고단한 삶에 대한 묘사는 극히 건조한 사건의 기록들로만 나타나지만, 디테일이 압축된 사건 위주의 묘사는 역설적으로 현실의 가장 핍진한 구석을 드러낸다. 어떤 맥락에서는 이와 같이 일그러뜨리고 압축하는 형상화 방식이 현실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거부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런데 디테일의 과장과 압축이 곧바로 재현의 거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환영』에서 과도하게 넘쳐흐르는 듯한 성과 육체의 황폐한 이미지는 현실에서 자각하지 못했던 억압의 실체를 거꾸로 환기한다.

더불어 『환영』에서 인물들의 행로를 압축하는 전락의 서사는 윤영의 삶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입체성을 확보한다. 왕백숙집에서 함께 일하는 이모와 언니, 공판장 여자 등 주인공의 일상으로 섞여드는 주변 여성들의 삶은 『환영』이 보여주는 전락의 서사를 다양하게 직조해 보인다. 윤영의 전락에 큰 원인을 제공하는 여동생 민영도 마찬가지다. 전화기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드러나는 민영은 물화현상 속에 자취도 없이 스러진 존재로 표상된다. 학자금 대출과 카드빚과 다단계와 인신매매에 휩싸여 비참한 생을 마감하는 민영의 존재는 주인공이 몸을 던져서라도 질기게 살아남고자 하는 욕망을 가동시키는 절실한 계기가 된다.

빈궁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왕백숙집으로 돌아오는 윤영의 선택은 ‘윤리의 경계 위에서 살아남기’라는 명제를 이야기하는 참으로 절박하고도 아슬아슬한 지점을 보여준다. 현실의 고통에 무감각해짐으로써 버티고 살아남는 방법을 선택하지만, 이 살아남기는 예민한 질문을 되돌려줄 수 있다.11) 왕백숙집으로 윤영이 돌아와 윤락행위를 계속하게 되는 소설의 결말은 표면적으로 볼 때 두가지 효과를 실현할 수 있다. 하나는 어느정도의 도덕적인 결과가 소설의 말미에서 실현되기를 바라는 독자의 윤리적 기대지평을 배반하는 효과이며, 다른 하나는 서사적 갈등의 끝을 내부적으로 완결하는 효과라고 할 수 있다. 『환영』의 결말은 기묘하게도 두가지 효과를 모두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양쪽 다 온전히 충족시키지만은 않는다. 그 이유는 윤영이 왕백숙집으로 돌아오는 결말 자체를 체제 안에서 버티고 살아남는 문제로 곧장 환원시키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윤영의 선택은 세계 내의 정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바깥의 결단이 무엇일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을 되돌려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벗어날 수 없는 황폐한 현실의 극단을 제시함으로써 오히려 그 극단의 세계 너머를 상상하게 하는 힘, 김이설 소설의 전언이 있다면 여기서 발견될 것이다. 왕백숙집으로 향하는 경계의 물가에 어른거리는 환영은 주인공이 상상하는 그 너머의 세계를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 어떤 가족과 어머니의 자리도 투명하게만 존재할 수 없는 현실의 세계를 돌아보게 하는 고통스러운 경계선이다.

 

 

5. 이야기의 끝, 세계의 끝을 넘어서

 

근대 소설장르가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주변부의 활력 및 ‘범주의 불안정성’은 지금 생산되는 장편소설에서도 중요한 흐름으로 이어진다. 최근 작품들이 드러내는 가족서사의 해체와 재구성은 관습적인 소설양식을 적극적으로 해체하고 조립하면서 새로운 틈새를 보여준다. 부계 부재의 서사를 넘어서 부모 세대로부터 이탈하는 고아들의 이야기, 늙어가는 소년, 기억 속에서 재구성되는 어머니의 모습 등 우리시대의 가족서사는 길찾기와 모험에 얽힌 인생유전의 이야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모사하고 변형하고 있다. 가장 오래되고 고전적인 이야기를 통하여 가장 해체적인 이야기의 미래를 꿈꾸는 가족서사의 변주는 역설적으로 양면성을 담고 있다. 그것은 모순된 현실의 서사를 쾌락적으로 재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관습화된 서사 너머의 서사를 열망한다.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서사성을 강조하는 우리시대의 장편소설에서 확인되는 것은 “그 자체가 역사적일 수밖에 없어서 역행 불가능하고 영원히 가속할 수밖에 없는 변화 과정에 매여 있는 근대 내러티브 텍스트의 역동성”12)인 동시에 그 역동성을 기반으로 삼아 서사의 관습적 형식들을 현실의 맥락에서 새롭게 소화하고 가공하는 흐름이다.

시간의 연대기와 호응하여 인물의 내적 발전을 거치는 장편소설의 공식을 상기한다면 최진영과 천명관의 소설이 보여주는 역사적 연대기의 압축은 우리가 접해온 관습적인 플롯에 현저히 미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식민지시대를 거쳐 6·25와 분단, 근대화 과정에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심화를 목도하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펼쳐지는 서사의 파노라마 속에서, 인물과 호응하는 역사적 연대기들은 파편적 에피소드로서 스쳐간다. 이러한 서사의 압축 혹은 과잉 현상은 가족서사의 중심부로 모여들지 않는 정서적 충동을 발생시킨다. 천명관의 소설에서 아웃사이더 인생을 상징하는 오함마나 삼촌의 삶이 환기하는 연민과 위무의 세계, 최진영의 소설에서 부조리한 세계를 향한 격렬한 부정과 비판은 소설에서 구사되는 새로운 리얼리티의 가능성을 질문한다.

김이설의 소설이 보여주는 가족서사의 파국과 물화된 현실에 휩싸이는 여성의 전락과정은 장편소설이 감당할 수 있는 윤리의 가능성을 묻는 가장 예민한 지점을 보여준다. 소설이 이끄는 전락의 서사는 자본주의 일상에 포섭된 여성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생계와 모성이라는 명분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그녀의 욕망은 더이상 나아갈 곳이 없을 법한 바로 그 지점에서 균열을 일으키며 윤리의 가능성을 질문한다. 김이설 소설이 보여주는 비관주의는 종말과 파국을 표면적으로 선언하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극단의 세계를 상상하는 리얼리티를 확보하면서 서사의 잠재적 가능성을 예시한다.

그 어느 때보다 흥미진진하고 다채로운 가족이야기가 넘쳐흐르는 것 같지만 그 이야기의 세계는 역설적으로 비극적 현실의 일면을 가리키고 있다. 과도하게 넘쳐흐르는 이야기의 형식은 장편소설이 담아낼 수 있는 세계의 위태로운 경계를 상상하고 비춰보게 하는 중요한 징후가 된다. 그것은 현실을 향한 강렬한 분노와 부정의 에너지를 뿜어냈던 파국의 상상력이 얼마나 쉽게 서사의 고정된 틀에 장착될 수 있는지 그 위험성도 동시에 알려준다. 종말의 예언마저도 허구적 서사로 순식간에 흡수하고 확장하는 이야기의 놀랍고도 아슬아슬한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이 끝나더라도 삶은 계속되며 이야기 역시 끝나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세계로 달려가는 이 소설들의 모험은 우리시대 장편소설의 한 흐름을 진단하는 계기로서 주목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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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원식(崔元植)은 일본이나 중국과 비교하여 한국소설사에서 ‘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전통’이 풍요롭지 않았던 현실을 지적하며 이러한 곤경이 장편소설의 창작에서 이중적인 긴장으로 작용해왔다고 말한다. (최원식・서영채 대담 「창조적 장편의 시대를 대망한다」, 『창작과비평』 2007년 여름호 152~53면)

2) 역사의 종언마저도 소설 내러티브로 삼는 파국의 서사가 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임경규 「역사의 종언 그리고 지시대상체의 귀환」, 『문학과사회』 2011년 봄호 279~80면).

3) 본문에서 분석 대상으로 다룰 작품은 천명관의 『고령화 가족』 『나의 삼촌 브루스 리』(예담 2012), 최진영의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한겨레출판 2010) 『끝나지 않는 노래』, 김이설 『환영』이다. 이하 인용시 면수만 표기한다.

4) 프랑꼬 모레띠 『근대의 서사시』, 조형준 옮김, 새물결 2001, 44~47면.

5) 유럽 중심적인 서구 근대소설의 모형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모레띠의 근대서사시론은 오히려 근대 리얼리즘소설의 정형화된 일부 형식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다. 소설장르가 안고 있는 가능성의 풍부함을 환기한다면 소설의 브리꼴라주적인 성격은 장편 자체가 가능하지 않은 종언적 현실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그 현실마저 재료로 삼아서 무한한 변형을 시도하는 소설장르의 경계 변화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6) 황종연 「시장사회의 돈키호테」, 『탕아를 위한 비평』, 문학동네 2012, 145면.

7) 오함마나 삼촌 등 천명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품은 낙천성과 선량함은 소설의 장르적 혼종성을 배가시키는 요소라는 점에서 따로 눈여겨볼 만하다. 민담이나 설화의 등장인물을 연상시키는 주인공의 순진하고 활달한 풍모는 환상과 모험으로 질주하는 내용에 어울린다. 더불어 타인과의 소통에 열려 있는 모습은 천명관 소설이 전달하는 연민과 위무의 정서를 확장시켜준다.

8) 심진경 「무서운 소설, 무서운 아이들」, 『자음과 모음』 2012년 봄호 186면.

9) 한 예로 봉선과 수선은 학교폭력을 겪은 아이를 위해 어떤 현실적인 해결책도 내놓지 않는다. 자기 아이를 때린 아이에게 거꾸로 음식을 사주면서 나중에 우리의 마음을 알 거라고 이야기할 따름이다. 이처럼 선량하지만 무기력한 어머니의 모습은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에서 주인공을 맡아 한동안 키워준 태백식당 할머니에게도 나타난다.

10) 황정아 「재앙의 서사, 종말의 상상」, 『창작과비평』 2012년 봄호 307면.

11) 작가가 처음 의도했던 ‘환영’의 뜻이 ‘illusion’이 아닌 ‘welcome’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welcome’이 파국의 현실을 어떤 방식으로든 수용하고 버티겠다는 의지를 암시한다면 ‘illusion’은 인물이 처한 상황 자체를 현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작가의 의도와는 달리 많은 독자들이 환영을 ‘illusion’의 맥락에서 읽는 것도 이 소설이 포함한 윤리적 계기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지와 관련된 흥미로운 대목이다(김이설・최정우 대담 「알리바이 없는 현실을 환영 없이 환영하기」, 『자음과모음』 2012년 봄호 243면).

12) 피터 브룩스 『플롯 찾아 읽기』, 박혜란 옮김, 강 2011, 8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