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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역진화의 윤리

장석원 시집 『역진화의 시작』

 

 

이성혁 李城赫

문학평론가. 저서로 『불꽃과 트임』 『불화의 상상력과 기억의 시학』 『서정시와 실재』 등이 있음. redland21@hanmail.net

 

 

2031장석원(張錫原)의 시는 강렬하다. 그의 시에는 시인의 목소리—분열적으로 표현되는—가 전면에 울려나온다. 그에게 시는, ‘형상적 사유’가 아니라 ‘울부짖음’이 전개되는 공간이며 ‘어떤 싸움의 기록’이다. 그는 강렬한 흥분 속에서 세계를 흡수하고 또한 세계에 흡입된다. 이 과정을 기록하는 그의 시는 열병을 앓을 때처럼 세계의 혼돈을 그대로 수용하고 무의식에 개방된다. 이러한 시인의 시작(詩作)은 포스트모던적인 가벼운 유희와는 거리가 있다. 시에 욕설이 난무하고 대중가요와 시의 정전(正典)이 리믹스되어도, 그의 시는 무겁게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이다. 이는 시의 전면에 등장하는 서정적 주체가 개인사적 기억을 포함한 역사의 인력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장석원은 『아나키스트』(문학과지성사 2005)와 『태양의 연대기』(문학과지성사 2008)에서 기성 세계와의 격렬하고 끈질긴 불화를 기록했다. 그의 시가 주는 신뢰감은 여기에 있는데, 알랭 바디우(A. Badiou) 식으로 말하자면, 그러한 기록이 사건에 충실함으로써 진리를 생산하는 ‘윤리’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출간된 『역진화의 시작』(문학과지성사 2012)도 어떤 윤리를 보여준다. 그것은 진화의 반대방향으로 ‘충실하게’ 퇴화하여 소멸로까지 나아가는 윤리다. 시집은 “우리에겐 기원이 없”는 “돌연변이”로 진화했다고 주장하는 ‘신주체들’을 비아냥대는 「밤의 반상회」에서 시작하여 표제시인 「역진화의 시작」으로 끝난다. 이 표제시에서 시인은 “지상에서 영원으로 추락”하여 “허공의 둥근 묘혈 안에 거주하는 부동의 점”으로 역진화하는 ‘새’를 보여준다. 이 시와 1부 ‘Kakotopia(절망향絶望鄕이라는 뜻) 사이에서, ‘추락-소멸-역진화’를 가능케 하는 사랑의 과정이 전개된다. 그런데 이 시인의 사랑은 폭력적이다. 둘째 시집 해설에서 조강석이 잘 짚었듯이, 그에게 사랑의 대상인 ‘당신’은 나를 거세시킨 아버지인 ‘대타자’다.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뿔을 자른 당신이 전기인두로 나를” 지지는 폭력으로부터 시작되며, 당신에게 사육되고 흡입되는 ‘내’가 “당신이기를 열망하면서 열렬하게 소화”(「몬스터」)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이렇듯 거세자에 대한 사랑은 외설적이기도 해서, 그것은 “나를 습격하는 쥐새끼, 같은 사랑”(「육체복사」)이다. 이 시집의 ‘연시’들이 불편함을 주는 것은 시인의 사랑에 폭력과 더러움이 뒤섞여 양가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특히 4부의 ‘연시’들에서, 「님의 침묵」과 같은 한국 근대시의 정전들은 그의 ‘사랑’과 ‘리믹스’되어 불온하게 오염된다. 그런데 시인에겐 오염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레이캬비크」)다. 시인은 이 오염의 “혼란부터 사랑하고 육체를 망각하고 나부터 고발하”여 “의미를 폭파하”(「개구기(開口期)」)는 분만으로 ‘역진화’하려 한다. 이러한 ‘역진화’는 “당신과 조우하는 거리/즐거운 지옥”에서 “견디기 위해” ‘부동의 점’에 이르기까지 “나를 소거”(「그러나 그 이후의 고통에 대하여」)해가는 과정이다. 당신과의 외설적인 사랑을 통해 ‘나’를 폭파해 “묘혈 안에 거주하는”(「역진화의 시작」) 단자(單子)로서의 존재에 이르는 역진화, 이를 위한 ‘Durchhalten’(‘견디자’)이 장석원의 ‘윤리’다.

이 윤리는 이미 “나는 사라지는 먼지/나부터 혁명되어야 한다/사랑부터 혁명되어야 한다”(「태양의 연대기」, 『태양의 연대기』)는 다짐에서 배태되었을 것이다. ‘나’와 ‘사랑’의 변혁을 위해 시인은 ‘아버지’와의 오이디푸스적인 욕망을 과감하게 추적하여 무의식에 묻혀 있는 상처를 의식 위로 파내고, 내밀한 욕망을 다시 가동시켜 ‘나’를 ‘소거’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러한 폭력적 방식으로 기성의 자신을 넘어서려는 시인은 계속 아플 수밖에 없다. 시인의 거친 발화에서 짙은 비애를 느끼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허나 이 과정의 반복이야말로, 시인에겐 혁명이다. 그에 따르면 혁명은 “re-volution, 다시 회전”(「지난해 ○ 여관 때로 △△ 여관에서」, 『아나키스트』)하는 것이다. 이 반복-혁명은 니체를 따라 ‘위버멘쉬’가 되고자 하는 영겁회귀의 과정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파괴적’ 사랑은 ‘Indestructible(2부 제목), 즉 불멸이다. 이에 시인은 불현듯 깨닫는다. “사랑은 죽음 후의 역능”(「트리니티」)임을.

그러나, 혁명은 투쟁과 사랑을 통해 돌발적으로 폭발하는 사건의 도래이자 이로 인한 ‘돌연변이’의 탄생이고, 관계의 응축과 과잉을 통해 나타나는 것 아닐까? 이는 ‘돌연변이’를 지지하는 ‘진화론자’의 생각이라 하겠지만 말이다. 반면, 장석원의 시에서 볼 수 있는 파토스의 과잉은, 극한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비극적으로 반복해서 소거하는 과격성에서 나온다. ‘응축’의 과잉과 ‘소거’의 과잉 중 어느 쪽이 혁명적인가는, 논쟁 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