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김소연 金素延

1967년 경북 경주 출생. 1993년『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으로『극에 달하다』『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등이 있음. catjuice@empal.com

 

 

 

침묵 바이러스

 

 

나는 말비듬이 떨어진 당신의 어깨를 털어주었다. 당신은 말들을 두 손 가득 담아 내 몸에 뿌려주었다. 눈을 맞은 나무처럼 꼿꼿이, 이 거리에 함께 서 있던 잠깐 동안의 일이리라.

 

말을 상자에 담아 당신에게 건넸을 때, 당신은 다이얼을 돌려가며 주파수를 잡으려 애를 썼다. 라디오 앞에 귀를 내어놓은 애청자처럼, 나는 당신의 사연을 읽어주는 DJ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우리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누구도 말하려 하지 않았을 뿐. 올겨울은 침묵 바이러스가 모두를 몸져눕게 했다.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해진 체벌이었을 수도 있다. 결백을 입증하는 것보다 죄를 입증하는 데에 말이 더 무력한 탓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발가벗은 몸으로 거리에 서 있었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말없이 열렬히 속삭였다. 그럴 때 당신은 꿈을 꾸고 있었으리라. 말로 할 수 없는 몽롱한 꿈이거나 말로 하면 안되는 알몸의 꿈. 햇빛 받은 나무처럼 온몸으로 투명해지는 형벌.

 

벌을 선 채로 우리는 꿈속으로 들어가길 갈구했다. 서로의 꿈속으로 들어가 사지를 포갠 채 말을 대신하길 바랐다. 당신이 듣고 싶은 한마디가 입에서 나오질 않는다. 할 말을 하지 않아서 내가 앓는 동안, 당신에게 가는 버스는 끊기고, 막차를 놓친 사람들과 함께 이 겨울을 받아내며 나는 서서히 얼어간다. 눈은 쌓여 어깨가 버겁다. 말을 잘하려고 침묵하는 것인지, 말이 필요치 않아 침묵하는 것인지,

 

귀가 천개라도 모자랄 새벽, 손이 만개라도 못다 쓰다듬을 당신,이 쏟아낼 말들에, 제대로 된 자세로 몰매를 맞아보려고 손을 뻗어 라디오를 끈다.

 

 

 

폭설의 이유

강정 시인에게

 

흰 약처럼 쓰디쓴 고백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핏대를 세워 밤새 지르는 고함과도 같다

귀가 찢길 듯하다

 

차디찬 고백이 생피를 흘린다

입김을 불어 유리창을 닦는다

나는 우두커니로 확장된다

 

우리가 흘린 벙어리장갑 한쌍이 보인다

깍지를 낄 순 없었지만

밑면과 밑면은 情死한 연인처럼

더 바랄 게 없는 표정으로 포개어져 있다

못다 한 고백들이 정전기가 되어

그 사이로 스며든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흠뻑흠뻑 들린다

털이 많은 짐승 하나

아랫도리를 부드럽게 스치며 지나간다

 

유리창을 한페이지 넘긴다

나는 하얗게로 지워진다

지워진다로 정확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