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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브루스 커밍스 『미국 패권의 역사』, 서해문집 2011
미국사에서 ‘태평양 관점’이 왜 중요한가
김인선 金仁善
부산대 사학과 강사 skrosa@hanmail.net
한반도 전문가로서 미국의 동아시아 개입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어온 시카고대 석좌교수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의 『미국 패권의 역사: 바다에서 바다로』(Dominion from sea to sea: Pacific Ascendancy and American Power, 김동노 외 옮김)가 번역되어 나왔다. 한국어판 제목 탓에 한때 쏟아져나온 미국 패권의 위기에 대한 분석이나 전망을 다룰 것이란 예상과 달리 이 책은 미국 패권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태평양 지역의 중요성을 역사적으로 조명한다. 미국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위상을 ‘태평양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이런 시도는 기존의 미국사 책들과 사뭇 다른 입장에 있다. 저자는 1967년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과 인연을 맺은 후 미국이 한국과 관계 맺는 방식에서 미국사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다고 회고하면서, 태평양 연안 주들과 태평양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올바로 이해할 때 비로소 세계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위치를 제대로 가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동부가 미 대륙의 중심이며 유럽의 가치와 제도가 제일이라고 믿는 대서양주의에 대한 야심찬 도전이다. 저자는 대서양주의가 미국 외교의 오랜 기조인 듯 보이지만 실상은 건국 이후 1940년까지 거의 150년간 서부의 발전이 전체 미국 성장의 원동력이었다고 역설한다. 또한 미국인들은 개척할 땅과 새로운 시장을 찾아 태평양을 향하고 있었고 미국의 외교정책은 ‘고립주의’가 아니라 줄곧 ‘팽창주의’를 지향했다고 못박는다. 골드러시와 감귤, 석유, 할리우드 영화와 항공기, 씰리콘밸리의 성장이 몰고 온 서부의 발전이 미국의 성장으로 이어졌고, 서부에서 시작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미 대륙을 넘어 전세계적으로 자리잡았다. 나아가 1941년 이후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미국이 대서양에서와 동시에 태평양에서도 지배적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20세기 중반 이후 미국 패권의 본질적인 기반이 마련된다.
커밍스는 태평양의 이러한 중요성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것이 미국의 치명적인 문제라고 본다. 1941년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 엘리뜨들은 유럽과 미국이 민주주의와 평등, 자유, 다자주의, 법치의 가치를 공유한다고 굳게 믿으면서도, 동아시아와의 관계에서는 위계질서, 일방주의, 아시아 지도자에 대한 무시, 군사력에 대한 맹신을 너무 당연시한다는 것이다. 한술 더 떠, 미국이 동아시아와의 관계에서 보여준 일방주의는 전세계로 확대되면서 국제문제에 대한 미국의 행동방식으로 굳어졌다. 이런 맥락에서 커밍스는 미국이 대서양지역에서 보이는 국제주의와 태평양지역에서의 팽창주의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가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단언한다.
책의 전반부(1~11장)는 1840년대부터 1940년까지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한 서부의 역사를 다룬다. 여기서 커밍스는 미국 백인은 방해세력이 없었기에 서부의 광활한 땅을 영토로 편입시킬 수 있었고, 그 원동력은 백인의 폭력과 탐욕, 욕망이지 결코 신이 부여한 ‘명백한 사명’이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1840년대 이후 거의 한세기 동안 “전쟁과 대약진, 망각, 무관심”이 “세계를 보는 미국식 방법”이었을뿐더러, 이것이 허울 좋은 ‘문호개방’이란 이름으로 진행되었다고 개탄한다.
후반부(12~17장)는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의 태평양 지역 개입과 패권의 역사를 추적한다. 저자는 “거대 군산복합체와 결부된 미 제국의 해외기지”로, 전쟁이 끝난 뒤에도 미군이 영구 주둔하고 있는 ‘제국의 군도’야말로 미국의 가장 큰 치부라고 주장한다. 2차대전 이후 천문학적인 군비 지출로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한 거대 군산복합체와 미국경제의 관계가 밀착하고, 극단적 반공주의자들인 공화당 우파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서부 출신 정치인 닉슨과 레이건, 부시의 시대에 미국의 일방주의는 정점에 달했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 외교는 균형을 되찾을 기회가 있었지만, 여전히 엘리뜨집단이 대서양주의를 고집하며 무모한 팽창주의로 회귀하는 바람에 오히려 미국의 미래가 암담해졌다는 분석이다. 커밍스는 미국이 어떤 유형의 군사적・세계적 역할을 담당할 것인가를 질문하며, 21세기 세계평화를 위해 아시아를 유럽과 동등하게 상호이익 정신으로 대할 것을 촉구한다.
하지만 미국의 일방주의를 계속 문제삼는 저자조차 때로 ‘미국 예외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커밍스에게 중국의 눈부신 부상과 관련된 담론은 과장일 뿐이며 미국의 쇠퇴나 몰락 역시 헛된 예측이다. 1970년대 이후 미국의 국민총생산은 세계경제의 30%를 꾸준히 유지했고, 태평양 연안 주들의 대약진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커밍스는 대규모 재정위기와 정치적 갈등으로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캘리포니아의 현실에 눈감고 끝모를 확신을 보인다. 이는 결국 미국의 장밋빛 미래에 대한 강한 자신감과 직결된다. 그런데 그런 판단의 근거가 ‘씰리콘밸리에 며칠만 머물면 최신기술을 보유한 미국의 우위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라면 아무래도 좀 당황스럽다.
덧붙여, 번역에서 몇가지 아쉬움이 남는다. 가령 7장의 제목 ‘에덴, 푸르고 차디찬’(307면)은 각기 하와이와 알래스카를 가리키는 ‘푸른 에덴과 차디찬 에덴’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 또한 “캘리포니아의 엘리스 섬은 에인절이라는 멋진 별명을 갖고 있다”(340면)는 부분은 흡사 캘리포니아에 있는 ‘엘리스 섬’의 별명이 ‘에인절’이란 의미로 읽힌다. 하지만 저자는 미국 이민국을 대표하는 이름인 ‘엘리스 섬’(뉴욕 소재)을 가져와, 이민자 차별로 악명 높은 캘리포니아 이민국 이름이 아이러니하게 ‘천사의 섬’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캘리포니아주 이민국은 천사의 섬이라는 멋진 이름이 붙어 있었다” 정도가 좋았을 것이다. 이처럼 부분적으로 뜻이 통하지 않거나 비유와 상징을 제대로 살리지 못해 어색한 대목이 가끔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미국사와 세계사, 정치경제사와 국제관계사를 통합해 미국의 서부 팽창과 일방주의를 거시적 관점에서 조망하려 한 저자의 야심찬 시도로서 40여년간 동아시아를 연구한 전문가의 내공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900면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은 촌철살인의 표현과 갖가지 비유, 놀라운 인용들로 가득 차 전혀 지루하지 않다. 게다가 서부와 태평양 지역에 대한 균형잡힌 시각을 촉구하는 커밍스의 문제제기와 깊이있는 통찰력이 날카롭게 어우러져 대중서이자 전공개설서로도 손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