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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야콥 타우베스 『바울의 정치신학』, 그린비 2012

정치를 갱신하고 종교를 구제하는 길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jykim@hs.ac.kr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일급 서구 철학자들이 사도 바울을 새롭게 읽고 있다. 바디우(A. Badiou)의 『사도 바울: 보편주의의 정초』(1997)와 아감벤(G. Agamben)의 『남아 있는 시간: 로마서에 대한 주해』(2000)에 더해 바울을 집중적으로 다루지는 않지만 핵심 분석대상으로 삼는 지젝(S. Žižek)의 『연약한 절대자』(2000)와 『꼭두각시와 난장이: 기독교성의 도착적 핵심』(2003)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야콥 타우베스(Jacob Taubes)의 『바울의 정치신학』(Die politische Theologie des Paulus, 1993, 조효원 옮김)이다.*

유대인 철학자 타우베스는 생전에 박사학위 논문 단 한권만을 저서로 출간했고, 사후에 논문집 한권, 강연록 『바울의 정치신학』, 카를 슈미트(C. Schmitt)와 주고받은 서한집들이 출간되었을 뿐이다. 그가 미국과 독일에서 명망있는 대학의 교수로서 봉직한 기간과 여러 철학자와 신학자에게 받았던 존경에 비하면 매우 과작이다. 하지만 『바울의 정치신학』을 읽고 나면 저서의 많고 적음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책은 말기암의 ‘남아 있는 시간’ 동안 타우베스가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했던 강연들을 묶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기적 일화와 통찰력이 넘치는 분석 그리고 논지의 비약과 집중적 제시가 매력적으로 뒤섞여 있다. 하지만 매력적인 그만큼 사도 바울의 서한과 해석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에게는 맥락 파악이 어려울 수 있다.

타우베스의 강연이 속한 이론사적 맥락은 그로부터 연원하는 논쟁 맥락과도 일정부분 겹친다. 사도 바울의 신학에 함축된 보편주의의 성격과 관련해 바디우와 아감벤이 논쟁적으로 대립하고 있으며 지젝이 바디우을 거드는 쪽이라면, 자신의 로마서 연구를 타우베스에게 헌정한 것이 보여주듯이 아감벤은 타우베스로부터 영감을 이끌어낸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에 대한 현대의 철학적 해석에서 바디우/지젝 대 타우베스/아감벤의 논쟁구도를 구성해볼 수 있다.

타우베스 이후에 구성된 이런 논쟁구도는 이들이 참조하는 성서학자들 내부의 대립선, 루터적 바울 해석과 반루터적 바울 해석이라는 대립선과도 연계되어 있다. 타우베스와 아감벤의 바울 해석이 크라이스터 스탕달이나 애드 패리쉬 쌘더스 같은 탈루터적 신학자의 편에 선다면, 바디우와 지젝은 매우 강한 무신론적 제스처에도 불구하고 카를 바르트와 루돌프 불트만의 루터적 바울 해석의 자장 안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디우/지젝과 타우베스/아감벤 모두가 기독교 최대의 사상가인 사도 바울에 집중하는 이유가 더 중요할 것이다. 이들은 모두 탈세속사회(post-secular society) 속에서 종교적 전통의 문제를 중심 테마로 삼고 있다. 세속화는 관찰되었지만, 세속사회에서도 종교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 자명해졌다. 이런 사태는 종교 간의 관계에 더해 세속적 사회제도와 종교제도 그리고 세속적 시민과 종교적 시민 사이의 관계 설정, 더 나아가 개별 시민의 내면에 이미 복잡하게 뒤얽혀 있는 세속적 심성과 종교적 심성의 연관을 깊게 천착되어야 할 문제로 만든다.

이런 갈등상황에 대한 표준적인 자유주의적 처방은 관용이다. 하지만 관용은 각자의 종교적・인종적 정체성을 사적 세계에서 특수주의적으로 고수하는 것을 방임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용은 종교적 정체성과 감성이 공적 영역으로 들어오는 진입로를 막는 얇은 차단막, 언제든 근본주의에 손쉽게 찢겨질 수 있는 차단막에 지나지 않는다.

세속적인 공적 영역과 종교적 영역 사이에 필요한 것은 힘없는 차단막이라기보다 엄격한 이론적 필터라고 할 수 있다. 종교적 전통 속의 진리 내용을 공적 영역으로 번역해냄으로써 종교적 전통 자체를 혁신하는 동시에 세속적 삶을 종교적 진리로 충전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 점을 지젝은 『연약한 절대자』의 부제인 ‘왜 기독교적 유산은 그것을 위해 투쟁할 가치가 있는가’를 통해 잘 표현하고 있다. 기독교의 진리는 몽매한 근본주의자에게 그냥 넘겨주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라는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정치가 신학으로부터 근원적 힘을 길어올림과 동시에 신학이 내재적으로 정치적임을 모호하게 함축하는 ‘정치신학’이라는 오래된 단어에 타우베스가 집중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정치와 신학을 진정한 방식으로 매개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그 둘 사이의 불길한 상호범람을 막는 동시에 신학적 진리를 구제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해서 타우베스는 카를 슈미트를 그의 정신적 적수로 삼으며, 모든 면에서 카를 슈미트와 이론적으로 맞섰던 발터 벤야민을 우군으로 끌어들인다. 논쟁을 통해서 타우베스는 바울의 정치신학이 모든 정치질서의 신학적 정당화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부정적 정치신학(negative political theology)임을 밝힌다. 또한 바울의 노모스(nomos, 법 또는 관습이라는 그리스어) 비판이 유대율법 비판인 동시에 로마제국의 법 비판임을 보여줌으로써 바울의 정치신학이 전복적 정치신학이라는 것 또한 해명한다. 이런 논증이 수반하는 흥미진진한 사상사적 분석들을 여기서 상세히 소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진 독자에게 이 책이 다른 어떤 책보다 더 풍부한 보상을 안겨줄 것이라는 점은 약속할 수 있다.

그리고 이명박정부하에서 표면화되기 시작한 종교 간 갈등 및 세속적 시민과 종교적 시민의 불화를 생각하면, 이런 문제에 대한 관심은 시급한 것이기도 하다. 인터넷상에서는 기독교적으로 동원된 ‘종북좌파’ 비판이 횡행하고, 공격성을 띤 세속적 감성은 기독교를 ‘개독교’라고까지 비아냥거리고 있다. 이렇게 점증하는 종교적 불화의 진원지에 있는 기독교가 이미 우리의 삶과 전통과 문화의 일부인 한, 갈등을 극복하고 기독교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사도 바울을 진지하게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다.


※ 이 책들의 국역본에 대해 간략히 논평하고자 한다. 대체로 읽을 만하고 잘된 번역서는 『사도 바울』과 『바울의 정치신학』이다. 『꼭두각시와 난장이』의 경우 읽을 만한 번역이기는 하나 이상하게도 판권은 독일 출판사로부터 사고 영어판을 저본으로 옮겼다. 그리고 제목은 원제와 꽤 거리가 있는 ‘죽은 신을 위하여’가 되었다. 『남아 있는 시간』(한국어판 제목 ‘남겨진 시간’)의 경우 워낙 텍스트가 번역하기 까다로운 것임을 염두에 두더라도 오역이 제법 있어서 개역판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연약한 절대자』(한국어판 제목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의 번역본은 일독을 권할 수 없는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