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목소리
4·11총선을 돌아보며 대선을 생각한다
●나라가 시끄럽다. 통합진보당의 구당권파와 신당권파의 이념·이익 대립이 극에 달하고, 박근혜의 5·16 발언으로 여당마저 흥분하고 있다. 그 와중에 읽은 여름호 대화 「4·11총선 이후의 한국정치」가 반가웠다. 4·11 총선 당시 정권심판론만 횡행하고 구체적 정책 제시가 부실했던 점에 대한 지적은 야당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오늘날 우리 정치 전반을 통렬히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다. 총선 이후 야권의 분열로 새누리당은 기세등등했지만, 안철수를 둘러싼 안풍(安風)의 열기도 심상치 않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보수도 진보도 아닌 비상식과 상식의 사이에서 상식을 선택하겠다’던 그의 발언은 또다시 지지율을 상승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가 뚜렷한 비전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국민은 왜 그렇게 그에게 열광하는 것일까. 백낙청이 지적한 대로, 민심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하고 MB심판만 부르짖는 정치인들 속에서 시민들은 ‘신선한 바람’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이제 곧 2013년체제를 위한 첫 단추인 대선이 다가온다. 지금 우리는 너무 많은 문제를 껴안고 있고,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다. 사회통합의 희망을 이번 대선을 통해 느끼길 기대한다.
김지현 veritas.lux.mea9217@gmail.com
한국 장편소설은 어디로 가는가
●여름호 특집 ‘다시 장편소설을 말한다’는 한국문학에서 장편소설의 위치와 역할, 본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그중 백지연의 「장편소설의 현재와 가족서사의 가능성」을 흥미롭게 읽었다. 그는 최근 발표된 가족서사의 장편소설들을 예로 들면서 가족서사와 장편소설의 불가분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족서사의 특징인 가족의 탄생과 변화, 그리고 쇠락의 서사구조는 긴 이야기를 감당해야 하는 장편소설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형식이라는 주장에 공감이 갔다. 그런데 이런 가족서사가 비단 장편소설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일회적 에피소드로 끝을 맺는 단편소설에 가족서사가 결합된다면 더욱 탄탄한 구조의 소설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글의 마지막에 이르러 백지연은 이제 가족서사가 여러 갈래 이야기와 어울려 변형과 해체, 재구성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장편소설로 자리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앞으로 어떤 가족서사가 어떤 모습으로 변주되어 연주될지 기대된다.
서진 ksiylovebysj@hanmail.net
작가의 변신에 박수를
●여름호에서 이기호, 편혜영 두 소설가의 단편을 재미있게 보았다. 이기호는 그동안의 작품에서 특유의 익살스러운 유머를 마음껏 뽐내 보였고, 편혜영은 익명성과 동일성이 가져다주는 끔찍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여름호에 실린 이기호의 「이정」과 편혜영의 「비밀의 호의」는 모두 두 작가의 이전 스타일과는 확연히 다른 점을 보여준다. 「이정」은 무겁고 진지한 기운이 내내 지배하고 있고, 「비밀의 호의」는 잔잔함이 소설 전체를 아우르며 그 속에서 삶과 늙음의 숭고함까지도 떠오르게 한다. 이것은 두 작가에게 또다른 작품세계가 시작되었다는 징조가 아닐까. 확고한 스타일이 있다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지만 그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두 작가가 자신의 장기에만 안주하지 않고 더 다양한 작품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나가는 모습이 신선하다. 작품세계의 2막에 진입한 이기호와 편혜영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김태희 eric787@naver.com
북한 문제를 풀기 위한 전제들
●개번 매코맥의 글 「광명성 3호 발사 이후」의 부제는 ‘100주년의 북한문제’다. 글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북한(핵) 문제’라는 표현은 북한과 미국 및 그 동맹국들(남한과 일본) 사이의 갈등을 호도하고 동아시아의 현재 정세를 은폐한다. 그 하나는 핵발전과 우주산업에 대한 강대국들의 독점체제를 외면하는 위선적 태도다. 다른 하나는 ‘사악하고 호전적인 북한’에 모든 정치적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동아시아에서 군사적 동맹을 강화하는 미국의 패권주의와 북한의 2천배에 달하는 일본 플로토늄 보유를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지적은 단순한 ‘북한 편들기(종북)’ 언사가 아니다. 현재 북한이 압제적이며 군사적인 국가라 하더라도, 오늘날 한반도, 아니 동아시아 군사적 대결구도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는 미국 중심의 군사동맹을 그냥 두고서는, 설혹 북한정권이 소멸된다 하더라도 동아시아의 전쟁위험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임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려스럽게도 현재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은 날로 강화되는 추세인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사례가 얼마 전 보도된 일본 이지스함의 한국 서해 배치 검토 계획이나 무산된 한일군사정보협정 체결 시도인데, 이는 한-일 간의 직접적인 군사협력이 장차 머지않았음을 의미하며, 미국을 매개로 한 동아시아의 군사동맹이 더욱 공고해질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매코맥도 지적하듯이, 비단 ‘북한 문제’뿐 아니라, ‘미국 문제’와 ‘일본 문제’라는 시각에서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정희찬 hanmyong1@naver.com
비판적 지성의 허를 찌르다
●김항의 「계몽의 한계와 대중지성의 전개」는 ‘허를 찔렸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일본의 저명한 비판적 지식인의 발언을 인용한 이 말은 그들이 원전문제를 에너지나 환경의 차원으로 국한해 다뤄왔음을, 그렇기에 후꾸시마 원전사태가 말 그대로 허를 찌른 사건이었음을 말해준다. 사실상 원자력발전소는 전후 일본이 건설한 국가체제의 근원적 문제성을 응축하고 있다. 비판적 지성계에서는 이 사태를 역사와 정치와 국가와 자본주의의 문제로 성찰하기 시작했지만, 대중지성은 이를 일종의 ‘이벤트와 게임’ 같은 담론활동이라고 비판하며 스스로 주체가 되어 사태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김항에 따르면 ‘대중지성’적 활동이 “인터넷으로 소통하며 자발적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통해, 국가와 자본과 과학이 권위적으로 독점해온 진리를 불신의 늪으로 빠뜨”렸다. 또다른 측면에서 비판적 지식계의 허를 찌른 것이다.
한국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도 자발적인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 주목하고 이것이 활동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역할을 대중지성 스스로 그리고 비판적 지성계에서도 해야 한다. 위에서부터 형성되어 짓누르는 식이 아닌, 아래로부터 피어오르는 담론활동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지식사회의 구도가 변하려면 지식인은 지속적으로 ‘허를 찔’려야 한다. 바꿔 말하면 대중지성은 계속해서 비판적 지성계의 허를 찔러야 한다. 물론 여기에 창비가 포함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최혁규 misueno4@naver.com
변화의 진정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현상 유지를 바라는 사람들은 현재를 해석하는 것만으로 족하겠으나 현실 변화를 바란다면 그에 더해 미래를 바라보아야 한다. 고단함, 억울함, 불안함이라는 키워드로 한국사회의 대립전선을 그려낸 김기원의 글 「한국사회의 모순과 2013년체제」는 유익한 읽을거리였다. 진보·개혁·평화세력이 서로의 대립 지점, 옳고 그름의 분별, 양립 가능한 대립과 해소해야 할 대립을 구분해야 한다는 지적에 동의한다. 또 이들은 진정성과 비전, 전략을 제대로 갖추어야 할 것이다. 진정성이란 어디서 나오는가. 무엇보다 눈앞에 던져진 제 이익을 대하는 태도가 아닐까. 스스로의 위치가 무색하게 처신하여 좌우분별 없는 상황을 만들지는 않는가. 제 이익을 위해 정의의 탈을 씌워놓지는 않나. 철저히 반성해보아야 할 일이다.
wmcmi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