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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동아시아인의 공통 과제는 무엇인가

11 이후의 일본

 

 

오까모또 아쯔시 岡本厚

일본 이와나미쇼뗑(岩波書店) 편집국장. 1996~2012년 『세까이(世界)』 편집장 역임.

 

*이 글의 원제는 「アジア共通課題か: 3・11以後日本から」으로, 본지 주최의 국제심포지엄 ‘2012년의 동아시아, 대안적 발전모델의 모색’(2012.6.29~30)의 발표문을 옮긴 것이다. 이 회의는 본지 창간 40주년을 기념해 개최한 ‘동아시아 비판적 잡지 회의’(2006.6.9~10)를 모태로 한 것으로, 한・중・일・대만 등 동아시아 각국의 잡지 편집인들이 모여 격년으로 심포지엄을 가지고 있다. ⓒ 岡本厚 2012 / 한국어판 ⓒ 창비 2012

 

 

1

 

지금 일본에서 뭔가를 발신하려고 할 때 작년 311일에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이 사고로 약 2만명의 사망자·행방불명자가 났고, 여전히 15만명 이상이 피난민 처지다. 일본은 지금도 ‘311일’의 충격과 혼란 속에서 발버둥치고 있고 또 진혼(鎭魂)과 상중(喪中)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원전사고를 생각해보면 일본은 ‘조용한, 오래 지속되는 비상사태’를 살고 있는 셈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는 이렇게 거대한 재해를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동일본 대지진은 20세기 이후에 일어난 세계의 지진 가운데 네번째로 크고, 방출된 지진 에너지는 19951월의 한신(阪神)·아와지(淡路) 대지진의 1450배였다고 한다. 적어도 수백년 동안 일본이 경험해보지 못한 규모의 대지진이다. 일본이 앞으로 정치적·경제적으로 어떤 방향을 선택하고, 국제적으로 어떤 역할을 하며, 또 어떤 사상을 산출해나갈지, 이 311의 영향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311 대지진은 크게 말해 두가지 양상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지진 후 토오호꾸(東北) 지방과 칸또오(關東) 지방 북부의 500킬로미터에 이르는 연안 지역을 덮친 쯔나미다. 지금까지 나온 사망자의 대부분은 이 쯔나미에 희생되었다. 이 쯔나미 피해에 의해 우리는 곧바로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는 과거로 소환된다. 토오호꾸 지방에는 수십년마다 반복적으로 쯔나미가 덮쳤는데, 가장 큰 규모는 869년에 일어난 조오깐(貞觀) 쯔나미였다고 한다. 1천년 이상이나 지난 고대의 일이다. 태평양 연안에도 여러차례 거대한 쯔나미가 덮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록에는 전하고 있지 않지만, 고고학은 과거에 그보다 훨씬 거대한 쯔나미가 토오까이(東海) 지방이나 시꼬꾸(四國) 지방에 도달한 흔적을 발견했다. 이것들은 우리 사고의 뿌리에 있는 ‘근대’의 시간을 넘어선다. ‘인간의 시간’이 아닌 것이다. 이 재해를 ‘근대’의 언어로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311의 둘째 양상은 후꾸시마(福鳥)1원전 사고다. 지진과 쯔나미로 세 원자로의 전원이 끊기고 거의 동시에 노심용해(爐心鎔解, meltdown)가 발생했다. 사상 최악의 원전사고라고 해도 좋다. 현재는 소강상태이지만, 사고가 일어난 직후에는 정부가 수도권 주민 3000만명의 피난도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심각했다. 사고는 여전히 수습 중이며(방사능 유출은 계속된다), 다행히 소강상태가 이대로 계속된다고 해도 사고 원자로의 폐로(廢爐)작업은 최소한 30년이 걸린다고 한다(실제로는 그 이상 소요될 것이다). 즉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이 사고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사능에 오염된 지역의 회복은 어렵고 시간이 걸린다. 장소에 따라서는 거의 영원히 살 수 없는 지역도 나올 것이다. 수천년에 걸쳐 일구어지고,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자식으로부터 손자에게 전해진 지역과 풍경을 영원히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방출된 방사능은 다른 사고와 달리 원래로 돌아가지 않는다. 찐다고 해도 태운다고 해도 없앨 수 없다. 줄일 수도 없다. 바다에 방출된 방사능이 어디까지 퍼지고 생물에 어떻게 농축될지 전혀 알 수 없다. 우리는 인류가 경험한 적이 없는 사태를 맞이하고 있다. 원자력 사고는 바로 사람의 힘으로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흔히들 후꾸시마 원전사고로 사람은 죽지 않았다고 말한다. 주로 원전 추진파 쪽에서 나온 발언이다. 그러나 원전사고로 수색이 지연되고 또 돌봄이나 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해 숨진 사람이 많고, 방사능 오염에 절망하여 자살한 농민이나 축산인도 있다. 체르노빌 사고에서도 나타났듯이 중요한 것은, 암이나 면역부전(免疫) 등 방사능이 사람의 건강에 끼치는 피해는 앞으로 수년에서 수십년 후에 나타나게 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영향은 세포분열이 활발한 젊은 세대일수록 크다. 이를테면 원전사고는 미래에 대한 불안인 것이다.

가령 사고가 없었다고 해도 원전에서 나오는 고방사성폐기물은 100년간 냉각상태를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고, 최종 처리까지는 10만년이 걸린다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미래가 소환된다. 100년, 1000년, 수만년 앞이라는 시간은 ‘인간의 시간’을 넘어선 것이다.

이처럼 311에 의해 과거와 미래 양쪽에 ‘인간의 시간’을 넘어선 시간이 펼쳐졌다. 기껏해야 200년 정도의 시간이 낳은 ‘근대’의 지성은 여기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말할 언어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근대’를 넘어선 가치란 어떤 것일까.

이 회의에 모인 우리가 몸담고 있는 잡지라는 미디어도 한편으로는 ‘근대’를 낳고, 또 한편으로는 ‘근대’가 키워온 것이다. 지진재해 직후 내가 편집한 『세까이(世界)(20115월호)는 ‘살자!’라는 타이틀의 특별호를 냈다. 이 말은 기도이자 외침이며 시이자 호소이며 비명이기도 했다. 적어도 사회과학・인문과학・자연과학적 언어를 구사해온 미디어의 언어는 아니다. 이러한 사태가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말이다. 그것이 광범위한 독자에게 받아들여져 이례적인 증쇄를 거듭한 것은, 지진재해 이후 일본의 정신상태, 그 일면을 드러낸 것이라 생각한다.

 

 

2

 

어떤 나라든 재해는 그 사회의 허약함을 백일하에 드러낸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부분을 확대하여 눈에 보이도록 해주는 것이다.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은 도시직하형(都市直下型, 진원이 도시 지하에 있음)으로, 64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다. 개발에 뒤처진 도시 중앙부(inner city)에 빽빽하게 들어찬 싸구려 목조 연립주택 등에 살던 고령자의 사망률이 높았다.

앞에서 말한 대로 3·11 동일본 대지진에서는 토오호꾸 지방에서 칸또오 지방 북부에 걸친 연안지대에 쯔나미가 덮쳤고, 대략 2만명의 사람들을 휩쓸어갔다. 여기서도 사망자의 60퍼센트 이상은 65세 이상의 고령자였다. 고령자는 신체능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정보에서도 뒤처진 경우가 많다. 이른 아침에 일어난 한신대지진의 경우에는 건물 붕괴에 의한 압사, 화재에 의한 소사(燒死)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오후 2시 반이 지나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에서는 건물 붕괴에 의한 사망자는 거의 없었고, 지진 발생 40분에서 1시간 후에 덮친 쯔나미에 의한 사망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청장년들은 직장에 있었고 어린이들은 학교에 있었다. 집에 남아 있는 이들은 노인들이었다. 그중에서 피하려고만 했으면 피할 수도 있었던 곳도 있었다(실제로 쯔나미 대응교육에 주력했던 이와떼현岩手県 카마이시시釜石市에서는 초·중학생들이 고지대를 향해 달려 99.8퍼센트가 살아남았다). 그리고 쯔나미를 피했다고 해도 추위에 시달리거나 받고 있던 돌봄 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사망한 지진 관련 사망자가 1천명을 넘었는데, 여기서도 고령자가 많았다.

재해로 인한 피해는 약자에게 집중되고,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격차나 빈곤을 눈에 보이게 한다. 그 사회의 구조적 결함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20058월 미국 뉴올리언즈에 닥친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미국 남부의 격차, 빈곤의 실태를 분명히 보여주었다(같은 허리케인의 습격을 받은 꾸바에서는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다 한다). 20085월의 중국 쓰촨(四川)대지진에서는 초등학교 등이 붕괴되어 수많은 어린이들이 희생되었다고 하는데, 그 구조적인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311일, 고속으로 달리던 다수의 신깐센은 선로나 다리 등에 커다란 피해가 나긴 했지만 곧바로 정지하여 한사람의 사망자나 부상자도 나오지 않았다. 한편 그때까지 ‘절대 안전’이라고 선전했던 후꾸시마 제1원전은 사상 최악의 사고를 일으켰다. 이 사고가 분명히해준 것은 원전의 기술적 결함만이 아니었다. 그 원전의 건설을 허용하고 또 기술적 결함을 40년간이나 방치해온 일본사회의 구조적 결함도 분명히 보여주었던 것이다.

원전 건설을 추진하는 기관과 원전을 규제하는 기관이 같은 관청 아래에 있고, 점검기능이 전혀 없었다는 것. 전력회사나 원자로 제조사 등으로부터 안전성이나 비용 등을 심사하는 학자들에게 연구비 등의 명목으로 돈이 흘러갔다는 것. 정계, 관계, 재계, 학계, 그리고 미디어를 포함한 강고한 ‘이익공동체’(원자력촌〔〕이라 부른다)가 존재하고, 거액의 자금을 풀어 원전에 대한 의문이나 비판을 봉쇄해왔다는 것. 그 ‘원자력촌’ 사람들이 이번 사고 때 완전히 무능하고 또 무책임했다는 것. 사법부도, 원전에 대해 많은 재판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점검 기능을 할 수 없었다는 것 등. 이런 결과 안전성이 소홀히 여겨졌던 것이다.

이를테면 일본의 민주주의는 형태만 있지 속이 텅 비고 앙상해져 있었다는 것이 여기서 분명해진 것이다. 대다수의 시민이 정치에서 사생활로 물러나 편리함과 풍요로움만 소비하는 존재가 되면, 권력자는 마음대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예컨대 원전을 보유한 자치체에서는 원전 가동을 둘러싼 공청회에 전력회사 사장 등을 동원하여 가동에 찬성하는 의견을 말하도록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계, 관계, 재계, 학계, 미디어의 복합체(conglomerate, 원자력촌)가 민주주의를 위장하면서 서로 이익을 돌려주고 한없이 증식해온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이런 민주주의의 허약함 때문이었다.

 

 

3

 

거대한 쯔나미와 원전사고에 허를 찔려 우왕좌왕하며 통치능력이 없음을 드러낸 ‘정치의 허약함’은, 그러나 교체된 지 이제 막 2년이 되었을 뿐인 민주당 정권의 허약함만 보여주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전후(戰後) 50년이나 통치를 계속해온 자민당이 집권했다 해도 마찬가지거나 또는 좀더 심각한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3·11 이후 1년간 의회가 보여준 모습을 보면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원자력·에너지정책이나 경제정책, 또는 재정정책에 대해서도 당 안에서 의견이 맞서고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이는 야당에서도 마찬가지다. 제각각인 정당들끼리 논의해봤자 혼란만 심해진다. 이는 일본 안에서 냉전적 이데올로기 대립이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에 국민들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는’ 정치에 불만을 갖게 되고, 보다 소리 높이 주장하는 포퓰리스트 정치가에게 기대를 품게 된다. 이러한 정치의 통치능력 저하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3·11이 드러낸 ‘미디어의 허약함’은 일본 특유의 것인지도 모른다. 예전에 『뉴스위크』(Newsweek)에서 ‘학원 수업처럼 조용하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은 일본기자클럽의 회견은 원전사고 이후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원전사고가 일어나자 각 신문사, 방송사 등은 기자를 후꾸시마 원전에서 30킬로미터 권역 밖으로 물러나도록 했다. 그 권역 안에 다수의 주민이 아직 살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방송사들은 먼 데서 촬영한 영상을 내보냈고, 관청이나 토오꾜오전력(東京電力) 등의 발표에 줄곧 의존해왔다. 결국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은 없다’는 정부의 말을 되풀이하게 되어, 시청자와 독자에게 사고를 되도록 축소해 보여주는 데 가담하게 되었다. 1호기, 3호기에서 일어난 수소폭발을 ‘큰 소리가 나고 하얀 연기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등으로 표현한 미디어도 있었다. 또한 이 대규모 폭발 영상을 곧바로 내보내지 않은 방송국도 있었다. 이로써 피난 기회를 놓친 피해자는 물론이고, 수많은 시청자로 하여금 미디어를 더욱 불신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정부나 토오꾜오전력을 과감하게 추궁하고 나선 것은 기자클럽에 속해 있지 않은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들이었다. 그들의 날카로운 질문으로 많은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대형 미디어 중에서도 그때까지의 관계를 타파하고 원전사고의 진실에 다가가는 취재를 하여 보도한 기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특별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본사회의 ‘사상적인 허약함’에 대해서다. 두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는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끼(長崎)의 피폭 경험에 기초한 일본의 반핵의식과 반핵사상에 대해서다. 두 도시에 대한 원폭 공격은 처참한 비극을 초래했다. 여성, 어린이, 노인을 포함하여 대략 20만명이 죽었고, 그후에도 피폭자는 방사선의 영향으로 차례로 죽어가거나 건강을 해쳐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렸다. 일본 민중은 그 파괴의 끔찍함과 잔혹함을 기억하고 기록해왔다. 일본을 점령한 미국과 그런 미국과 결탁한 일본의 권력층은 되도록 빨리 원폭에 대한 민중의 기억을 희미하게 하려고 했다. 미국이 핵정책을 펼치는 데 일본의 반핵의식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일본의 민중은 강력하게 저항했다. 다양한 운동을 전개했을 뿐 아니라 수기, 시, 소설, 텔레비전 프로그램, 연극, 영화, 동화, 만화, 애니메이션 등의 형태로 반세기 동안 반복해서 기억을 새롭게 해왔던 것이다.

1950년대 비키니(Bikini) 환초에서의 수소폭탄 실험으로 일본 민중의 공포와 불안과 분노는 정점에 달했고, 주부들이 원자·수소폭탄 실험 중지를 요구하며 시작한 반대서명은 일본 국내에서만 1000만명을 넘어 국제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반핵의식은 일본 민중의 싸움이 거둔 빛나는 성과인 것이다. 피폭자들을 중심으로 한 반핵단체는 끊임없이 핵보유국의 행동을 비판하고 국제사회에 반핵을 호소해왔다. 한국전쟁이나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이 마지막까지 원자폭탄 사용을 결행할 수 없었던 하나의 요인은 일본사회가 보여준 이러한 강한 반핵의식이었다고도 한다.

전후 일본사회를 그렇게까지 깊이 규정해온 민중의 반핵의식, 반핵사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전에 대해서는 왜 이렇게까지 무방비했던 것일까. 일본은 왜 전국에 54기(지금은 후꾸시마 제1원전의 폐로로 50기임)나 되는 원전을 건설하고 만 것일까. 후꾸시마 사고 이래 일본 밖에서는 물론 일본 평화운동 내부에서도 몇번이고 반복해서 나온 물음이다. 이는 일본 민중의 반핵의식과 반핵사상의 허약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은 히로시마, 나가사끼의 원폭 피해를 비참하게 느낄수록 ‘그 거대한 에너지를 평화를 위해 이용하자’는 논법이 유효하게 작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자력을 도입하려고 계획한 사람들이 맨 먼저 원전을 건설하자고 한 곳은 다름 아닌 히로시마였다. 무기로 사용되기보다는 전기로 사용되는 것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선의의 사람들이 가진 일반적인 감각이 아니었을까. ‘평화적 이용’이라는 말이 민중의 반핵의식을 마비시켰던 것이다. 원자력발전은 ‘꿈의 에너지’라 일컬어졌고, 1960년대 어린이들의 영웅은 ‘철완 아톰’이라는, 원자력으로 움직이는 로봇이었다.

히로시마, 나가사끼, 비키니 등에서 벌어진 핵보유국의 핵실험, 또는 스리마일섬(Three Mile Island) 원전사고, 체르노빌 원전사고 등 ‘핵’의 피해는 언제나 일본 ‘밖’에서 초래되었다. 일본은 일방적인 피해자로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후꾸시마 사고는 ‘밖’에서 초래된 것이 아니라 일본 ‘안’에서 생겼다. 스스로의 문제로서 ‘핵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국내 주민은 물론이고 바다와 하늘을 통해 방사능 오염이 국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핵문제에서 일본은 처음으로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핵에너지는 제어가 불가능하다, 이는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난 직후 고르바초프가 한 말이다. 우리 또한 통제할 수 없는 핵에너지의 끔찍함을 목도하고 있다. ‘평화적 이용’ 따위의 말이 원래 가능했을까. 일본의 반핵의식, 반핵사상이란 뭐였을까. 원전문제는 미국의 ‘핵우산’(핵 억지력)문제와 함께 근본적인 반성과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둘째로 일본의 사상적 허약함은 지진재해 후 이웃 나라들(동아시아)에 대한 대처 방식에 있다. 3·11의 피해상황은 영상을 통해 국외로 전달되었고, 세계 각국에서 지원과 협력의 손길을 뻗어왔다. 지원의 목소리는 특히 한국, 타이완 등에서 컸고, 다양한 모금운동이 벌어졌다. 중국에서도 수색대를 파견했다. 북한에서도 지원금을 보내겠다는 성명이 나왔다. 이웃 나라들과의 관계가 좋지 못했던 일본으로서는 이렇게 보내온 동정이나 공감이 어떤 의미에서는 외교적인 자산이 될 수도 있었다.

1923년 식민지제국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일본을 덮친 것은 칸또오대지진이었다. 이때 1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었다. 그 몇년 전에 일어난 조선의 3·1독립운동(1919)의 기억에서 공포와 불안을 느꼈을 일본 민중은 지진재해의 혼란 속에서 엄청나게 많은 수의 조선인, 중국인을 학살했다. 제국주의 민중의 잔혹함이다. 1995년 한신대지진 때도, 이번에도 역시 그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제국 일본과 전후의 민주 일본의 민중의식이 보여준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중국인 유학생을 살리고 자신은 쯔나미에 휩쓸린 교사도 있었다. 역사문제로 항상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일본은, 이때야말로 ‘다시 태어난 일본’을 어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아간 방향은 그 반대였다. 교과서 검정에서 초등학교 교과서의 지도에 타께시마(竹島)를 일본 영토로 표시한 일 따위를, 급하지 않은데도 발표함으로써 지원에 나서려는 한국 사람들에게 찬물을 끼얹는다거나 이웃 나라들에 통고도 없이 방사능으로 오염된 물을 바다에 흘려보내 분노를 샀던 것이다. 아마 정부는 원전사고의 대응에 쫓겨 생각할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정부의 중추에 있던 한 의원은 사고 후 몇주간은 ‘전쟁(상태)’이었다고 나에게 말했다). 교과서는 지진재해 이전에 결정되어 있었던 것을 일정대로 공표한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오염된 물을 유출한 것은 그 지역에 가까운 어업협동조합에조차 알리지 않아 항의를 받았다. 그러나 그 행위가 의식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었기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동아시아에 대한 경시가 일본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널리즘도 특별히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역으로 미국의 지원에 대해서는 과도할 정도로 호의를 표명했다. 미국은 ‘토모다찌(友達, 친구) 작전’이라며 미군을 동일본 연안지역에 배치(그러나 후꾸시마 원전의 반경 80킬로미터 권역 내에는 접근하지 않았다)했으며, 일본의 언론은 구조활동에 힘쓰는 미군의 모습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재난 피해자에게 공개되지 않던 방사능물질영향 예측시스템(SPEEDI)의 데이터가 미군에는 제공되었다는 사실이 나중에야 밝혀졌다. 이 데이터의 공표가 늦었기 때문에 원전사고 후 방사능 오염이 더 높은 곳으로 피난한 피해자도 있었던 것이다. 또한 원전사고가 가장 심각했을 때 미국은 수상 관저에 자국 대표를 상주시킬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관저 측에서는 역시 주권의 문제로 거절했다고 하는데, 이 사실은 미국이 일본을 자립적인 독립국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냉전이 끝난 지 20년이 되었고, 게다가 정권교체 후에도 일본은 미일안보체제에 푹 잠긴 채 전면적으로 미국에 의존하며 이웃한 아시아 국가들을 함께 살아가는 상대로 보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하또야마(鳩山) 정권이 내세운 ‘동아시아공동체’는 보기 좋게 사라지고 말았다.

어느 여당 의원은, 정권교체 덕분에 다양한 개혁을 할 수 있었지만 후뗀마(普天間) 기지 문제를 포함한 미일안보와 원전이라는 두 문제는 아무리 손을 써도 “단단한 암반에 부딪쳐 튕겨져나오는 느낌이었다”고 나에게 말했다. 이 두가지 문제가 이를테면 현재 일본 권력의 핵심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진재해로 일본 권력의 핵심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4

 

이상에 입각하여 문제제기를 하고자 한다. 백낙청()은 최근 일본에서 번역 출간된 저서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번 대지진과 쯔나미, 그리고 원전사고를 계기로 일본은 동아시아와 인류 문명의 선구적인 위치에 설 세번째 기회에 직면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첫번째 기회가 메이지유신 이후 쑨 원(孫文)을 비롯한 수많은 동아시아 지도자들이 기대한 ‘동양 평화의 맹주’가 되는 길이었다면, 두번째 기회는 2차대전에서 패한 후 평화헌법의 채택에 그치지 않고 명실상부한 평화국가로서 세계의 모델이 되는 길이었다. 311 대지진 이후의 일본사회가 단지 원전산업의 투명성과 안전성을 더 높이거나 원자력 의존도를 줄이려는 태도에 그치지 않고 메이지유신 이래의 근대주의적 성장의 논리와 ‘탈아’ 노선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까지 나아간다면, 이는 지금까지 두번의 기회에서 잃어버린 명예를 만회하는 역사적 쾌거가 될 것이다. (『韓國民主化 2.0』, 岩波書店 2012)

 

‘다만’이라고 백낙청은 덧붙인다. 그런 변화는 일본 시민의 분노와 저항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을 거라고. 한반도 전체의 평화적이고 창조적인 새로운 사회의 건설 없이 일본의 변화는 어려울 것이라고. 역으로 한국의 변화도 한국인이나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의 힘만으로 달성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이를테면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함께 변화할 공통의 과제 앞에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인이 맞서야 하는 공통의 문제는 동아시아를 평화롭고 환경친화적인 세계로 건설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핵에너지 문제다. 한국도 중국도 타이완도 원전을 가동하고 있다. 사고가 일어나면, 이는 국경을 넘어 지역 전체의 문제가 된다. 더욱이 방사성폐기물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설사 재래식 무기에 의한 것이라고 해도, 원전이 있는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곧장 심각한 방사능 오염을 일으키게 된다. 이 지역에서의 전쟁은 공멸의 전쟁이다. 어떻든 피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원전이나 사용후 연료 재처리는 핵무기 개발과 결부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북한을 방치해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은 지금 핵무기 개발뿐 아니라 경수로 건설도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지역 공통의 문제를 안고 있는 나라로서 어떻게든 북한에 관여하지 않으면 안된다.

핵에너지를 생각한다는 것은 대체에너지를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동아시아 공통의 문제는 에너지 확보다. 석유나 천연가스, 또는 재생가능 에너지 등의 확보와 개발은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사업이다.

두번째로 중요한 것은 이 땅을 덮고 있는 ‘냉전’구조의 해체다. 남북한, 양안(兩, 중국과 타이완), 그리고 일본과 기타 여러 나라와의 대립과 긴장을 해소해야 한다. 당연히 거기에는 한·일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미국이라는 존재가 있다. 미국은 스스로 한·일에 ‘핵우산’을 제공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그 억지력이 상대를 핵으로 공격한다는 것이고, 상대는 지금 핵으로 자신을 방어하려 나섰다는 것이다. 이 딜레마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면 대립과 긴장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없다. 오끼나와(沖縄)의 미군기지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핵문제의 현실적인 선택지로서 나는 동북아시아에 비핵지대를 설정하고 넓혀나가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거기에는 남북한, 중국 동북부, 러시아 극동부, 일본, 오끼나와, 몽골 등이 들어간다. 미군기지도 포함됨은 물론이다. 동남아시아는 이미 비핵지대를 선언했다. 우선 핵무기를 멀리하는 것, 그것이 화해로 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번역 | 송태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