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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조명 | 은희경 장편 『태연한 인생』
고독의 연대, 움직이는 숲으로의 초대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1996년 『문학사상』에 김소진론을 발표하며 등단. 저서로 『소설의 고독』 『소진의 기억』(공편) 등이 있음.
은희경의 신작 장편 『태연한 인생』(창비 2012)은 1930년대 모더니스트 박태원(朴泰遠)이 선점해버린 기념비적 소설 제목이 없었다면 ‘소설가 요셉 씨의 육일’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 소설은 서울 서쪽 신도시의 오피스텔에 작업실을 두고 안 써지는 소설을 세상 탓으로 돌리며 이곳저곳 까페와 술집을 어슬렁거리는 사십대 후반의 소설가 김요셉의 엿새간 이야기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희경이라는 이름에서 곧장 첨단의 감각을 떠올리게 마련인 오늘의 독자들은 이런 실없는 가정에 대번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으리라. 먼지 풀풀 나는 ‘소설가 소설’ 혹은 ‘예술가 소설’의 의장(意匠)이나 제목은 우리가 아는 세련된 은희경 소설과 얼마나 먼가. 그러니 『태연한 인생』을 “글이 안 써져 고민하다가 짐 싸들고 떠나는 작가 이야기 말야”라는 소설 속 요셉의 냉소적 독설을 좇아 ‘예술가 소설’로 읽는 우를 범할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된다. 이번 소설에서 중요한 서사적 공간으로 작용하는 영화 쪽 세상의 언어를 빌려서 말한다면 ‘예술가 소설’의 의장은 맥거핀(MacGuffin, 중요한 것처럼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줄거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극적 장치)의 일종이다. 그 맥거핀을 따라가다보면 얼마간의 과장과 위악적 자기비하의 포즈 속에 그려진 소설가의 일상이나 글판 주변의 풍경을 가볍게 즐길 수는 있겠으나, 그 풍경의 밑은 허방이다. 앞으로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소설가 요셉이 쏘피스트적 궤변과 현란한 반어법의 전시로 보여주는 소설가의 일상은 그 자신의 많이 ‘태연하지 못한’ 고독의 텅 빈 형식이라는 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멋지지 않은가, ‘태연한 인생’이라는 제목. 어떻게 ‘태연하다’는 말을 인생 앞에다 가져다놓을 생각을 했을까. ‘태연한 인생’이라고 하면 인생이 의인화된 주어인 셈인데, 이 가벼운 낯설게 하기는 허무의 태도나 연극적 위장의 포즈를 뉘앙스로 끌어들인다. 두 단어로 된 짧은 제목인데도 은희경 특유의 지적 긴장이 넘친다. 그리고 ‘태연한 인생’은 이번 소설의 인물들이 각자의 참호에서 기약없이 버티고 있는 총성 없는 전선의 이름이기도 하다. 일찍 찾아온 무더위와 가뭄 사이로 잠시 단비가 내리던 오후, 산뜻한 레인부츠를 신고 나타난 작가에게 먼저 제목에 대해 물어보았다.
은희경 다른 소설에 쓰려고 만들었던 제목이에요. 단편에 쓰려고 했는데 그냥 이 소설에도 어울릴 것 같아서. 그러고 보니까 내가 쓴 모든 소설에 다 어울리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첫 장편 『새의 선물』(1996)에서부터 ‘바라보는 나’ ‘보여지는 나’라는 설정이 있었고, 소설집 해설 제목에 ‘연기하는 유전자의 무의식에 대하여’ 이런 것도 있었고요. ‘태연하다’와 통하는 데가 있어요. 어떻게 보면 이번 장편이 지금까지 내가 써온 소설의 종합판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싶고. 그래서 평이하지 않으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냥 그렇게 갔어요. 근데 태연한 인생이 어떤 인생이냐고 물으면 대답을 못하겠어요. 인생에는 태연해야 할 일이 많다는 뜻 같기도 해요.
정홍수 이번 작품은 원래 구상하고 준비했던 장편이 좀처럼 쓰여지지 않는 와중에 뜻밖의 지점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작가의 말’을 보면 다양한 ‘우연’의 개입이 있었던 듯합니다.
은희경 맞아요. 물론 장편은 이런 적이 없었죠. 장편 구상은 오래 하니까. 그런데 단편 쓸 때는 전에도 그랬어요. 가령 『새의 선물』을 절에 가서 썼는데 그때 절에서 지냈던 경험을 가지고 「그녀의 세번째 남자」를 쓴달지 하는 식으로. 글을 쓰러 새 장소를 찾아가지만 그때는 워낙 예민해져 있는 상태라서 쓰는 것 말고도 뭐든지 보고 듣는 대로 빨아들여요. 그때 느꼈던 공간, 그때 스쳤던 사건들이 다음 소설이 된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장편을 완전히 바꿔서 전혀 새로운 걸 쓰는 건…… 이게 다 내가 창비 쪽에 못 쓰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일어난 사건이죠.(웃음) 쓰기는 해야겠고, 일단 소설이 안 써지는 소설가 이야기를 써보자고 설정해놓은 거예요. 그 이야기만큼은 할 수 있겠다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것만 갖고 장편을 쓸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원래 준비했던 장편이 여자 기숙사에서 만난 네 친구들의 30년에 걸친 인생 여정인데, 류의 부모 얘기를 쓸 때 그 일부가 나왔어요. 그러고는 문상, 생일, 씨나리오 심사 등등 연재하는 동안 내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재료로 이야기를 끌어간 거죠.
글쓰기와 관련해, 우연성에 대해 두가지 정도 이야기를 할 수 있어요. 하나는 메모를 해두었더라도 정작 써먹으려면 정서가 안 맞을 때가 있다는 거예요. 그때의 감각이나 문제의식이 살아나지 않아요. 메모를 할 땐 굉장히 멋있는 것 같아서 써놨는데 그 느낌이 안 오면 소용없거든요. 그런 점에서 평소의 성실한 태도도 필요하지만, 모든 감각이나 문장력이 가장 열려 있을 때 받아들인 것을 가지고 쓰는 게, 그러니까 집중한 순간 포착하는 게 어쩌면 더 정확할 수 있다는 생각이 늘 있어요. 또 한가지는, 어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가장 알맞은 에피소드가 있어서 그걸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고는 보지 않아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어떤 이야기로 담아내느냐가 문제기 때문에 내 발상과 관점이 중요하지 에피소드 자체는 중요하지 않아요. 해답을 찾아내서 그걸 옮겨적는 게 아니라 나 자신도 질문 속에서 소설을 써나가기 때문에, 그 질문에 집중해 있는 상황에서는 뭘 보든 그걸 에피소드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문학에서 의도냐 우연이냐를 가리는 게 별로 의미가 없을 수도 있고요.
물론 그렇게 풀려나온 이야기 역시 최근 몇년간 작가의 의식, 무의식에 어떤 형태로든 계속 쌓이고 있었던 것이리라. 2005년 장편 『비밀과 거짓말』을 펴내면서 작가는 이렇게 쓴 바 있다. “소설가가 된 지 올해로 십년이 되었다. 이 책이 나의 여덟번째 책이다. 그동안의 할말은 어지간히 한 것 같다. 새로운 이야기로 들어가는 경계에 섰지만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작별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 젊은 날 나의 거짓과 고독, 헛된 열정에 대한 마지막 사랑의 기록이다. 그리고 모든 유랑의 끝이 그렇듯이 마침내 다다른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실, 이 ‘아무것도 없음’이야말로 독자나 평자 쪽에서는 감히 건드려볼 수도 없는 작가의 고독은 아닐까. 『비밀과 거짓말』을 두고 당시 평단에서는 개인 혹은 나르시시즘적 자아의 영역에 집중되어 있던 은희경 문학의 관심이 사회, 역사, 타자의 지평을 응시하고 받아들이는 쪽으로 확대되어가는 것으로 평가하면서, 이른바 90년대 문학의 대표주자였던 은희경 문학의 변화에서 90년대 문학의 상징적 종언을 읽기도 했다. 그러나 작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떤 집중이나 강조, 방법의 문제이지 타자의 지평을 놓은 적이 없었던 것이겠고, 90년대 문학과 관련된 이런저런 표지들이야말로 받아들이기 힘든 ‘패턴’의 강요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작가 스스로 하나의 경계로 삼았던 『비밀과 거짓말』 이후 은희경은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2007)와 장편 『소년을 위로해줘』(2010)를 펴냈다. 그리고 2012년 6월 신작 장편 『태연한 인생』이 우리에게 도착했다. 거의 2년에 한권꼴인 셈이다. 소설 속 요셉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작가는 “열심히 썼고 문운(文運)도 좋았죠”라며 말을 아낀다. 그렇긴 해도 이번 작품에서 우리가 요셉이란 인물을 만나게 된 행운의 이면에는 작품이 안 써져 괴로워했던 작가의 고통이 크게 한몫한 것도 사실인 듯하다. 오랫동안 준비해왔던 장편은 어디에서 막혔던 것일까.
은희경 모르겠어요. 쓰는 데 그냥 재미가 없더라고요. 재미가 없다는 건 아직 초점이 안 맞은 거라고 생각해요. 그 길로 못 들어선 거예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이전 작품에 대해서 못 털어버린 구석도 있었을 거예요. 뭐라 그럴까, 『소년을 위로해줘』가 상당히 의욕적인 시도였고 나 스스로 기득권을 내려놓고 썼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방식이 안이하게 보일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모니터링한 걸 보면서. 그러면서, 내가 어디까지 내 것을 갖고 가며 어디까지 새로워져야 하는지 생각이 많았어요. 그런 상황에서 새 장편을 쓰려고 하니까 대체 나다운 것은 뭔가, 누가 그걸 결정했나, 또 나는 혹시 누가 나답다고 정해놓은 대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식으로 생각이 더 많아지는 거예요. 무슨 얘기를 만들어내든, 요셉이 말한 것처럼 ‘남이 다 해버렸거나 심지어 내가 이미 쓴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갑자기 너무 혼란스럽고. 더구나 그 시점에서 쓰려고 했던 얘기가 여자대학 기숙사에서 만난 네 여자의 얽히고설킨 30년 인생이었기 때문에 너무 통속적으로 보일 우려가 있었고요. 지난번 소설에서 이거 감상적인 이야기니까 제대로 감상을 쓰자 했는데 그 의도가 잘 안 받아들여졌다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에, 이 소설은 통속적인 이야기니까 가장 통속적으로 쓰자고 시작을 했다가 또 어떤 결과가 올지 속으로 두려웠던 거예요. 그래서 안 써지더라고요. 그러면 과연 작가는 무엇을 지키는 것이고, 지킨다는 것은 또 뭔가, 이런 고민 속에서 이 소설이 나온 것 같아요. 요셉이라는 인물이 소설가로 설정된 건 그런 맥락도 있겠죠.
자아와 타자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회의를 넘어 자아와 타자 사이에 가로놓인 메워지지 않는 간극에 대한 예리한 감각은 은희경 문학의 근원적 특질이라 할 만한 것이다. 그 감각은 사랑에 대한 천진한 환상을 무너뜨릴 때 가장 빛나는데,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그 환상에 대한 공격이 흔히 알려져 있듯 사랑에 대한 냉소나 환멸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오히려 사랑에 천상의 자리를 내어주고, 이편에서는 개인의 고립이나 고독이라는 산문적 진실을 수락하고 견디려는 마음의 결의와 관련되어 있다. 사정이 이렇다면 은희경 소설은 고독을 통해 사랑의 불가능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부재나 결핍에 저항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사랑의 탈낭만화는 반어적 전략일 뿐, 은희경 소설의 궁극에는 사랑의 성소(聖所)가 있는지도 모른다. 달리 말해 은희경 소설에서 고독의 테마는 사랑의 복화술일 가능성이 높다. 툭 털어버린 자의 가벼움보다는 허무의 심연을 저만치 둔 숨 막히는 호흡이 은희경 소설을 떠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는 은희경식 ‘고독의 발견’ 연작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것이었고, 『소년을 위로해줘』 역시 열일곱살 주인공 연우에게 고독의 자리를 찾아주면서 그 고독의 이야기를 우리 모두의 것으로 확장하고 있다. 근자 은희경 문학에서 고독의 테마는 어떤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면 『태연한 인생』은 이 테마에 대한 작가의 종합적인 성찰 혹은 모종의 결산이라는 생각도 든다.
은희경 내가 고독해서 그런가봐요.(웃음) 고독의 정체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해오긴 했는데, 요즘은 이제 고독을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전에는 고독하다는 ‘상황’에 대해서 많이 쓴 것 같은데 이제는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으니까 받아들여야 된다는 이야기를 쓰고 있지 않나 싶어요. 그럼 고독하면 안 좋은 건가? 이런 생각도 하게 됐고. 그러다 보니 ‘고독의 연대’란 말도 쓰게 되고. 『소년을 위로해줘』에서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라 해도 상대의 고독에 대해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고 썼는데, 좀더 발전한 걸까요.
정홍수 고독의 문제와 이어져 있는 것이기도 한데, 특히 이번 소설에는 개인의 고유성에 대한 옹호를 중심으로 ‘개인’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그 반대편에는 유형화된 패턴의 세계가 있고, 이 둘 사이에 고독의 감내와 승인이라는 다리가 있는 것 같고요. 말하자면 지금 우리는 우리 삶의 주인인가, 누군가가 써놓은 서사 안에서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서사 안에서라면 고독 역시 하나의 패턴이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이런 질문들을 계속 던지고 있습니다. 어쨌거나 오늘의 세상이 ‘근대’라는 명찰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개인이 개인의 자리를 고수하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만.
은희경 밀란 쿤데라 식으로 말하자면 행위하기도 전에 행위의 의미가 정해져 있는 거죠. 무슨 행위를 하기도 전에 그 행위의 의미와 심지어 처벌할 방법까지 정해져 있어요. 선악이나 가치에 대한 개념까지도 다 마련되어 있는 시스템 안에 개인이 있는 거예요. 근대 이후 다양성을 존중하고 개인의 삶에서 자유를 말하고 있지만, 그 자유라는 것에도 너무 많은 패턴이 개입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단지 세분화되어 있을 뿐이지. 어떤 예제에 속해 있다는 거, 그런 건 고유성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사람들이 개인을 의식하면서부터 오히려 개인이 없어져가는 것 같아요.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자신을 고유한 개인으로 의식하면 서로의 고유성이 충돌하게 되잖아요. 다 다른 개인일 테니까요. 그럼 시스템 안에서 맞춰야 되는데, 그 관계 안에서 개인이 오히려 억압되는 거죠. 각자 개인을 주장하기 때문에 조율하기가 너무 복잡하고, 그러다 보니 각자의 원칙이 자꾸 양산되고 증식되고, 그래서 개인이 ‘자기’라는 것을 갖기 어렵게 돼버린 것 같아요. 요셉이 표현하듯 ‘나는 나야’라는 아웃사이더 의식에서 출발하지만 ‘나는 남과 달라’라는 권력적 소수가 될 수도 있고요. 아무튼 ‘나’라는 개인의 고유성을 지키려면 내가 남과 다르다는 게 아니라 남이 나와 다르다는 걸 받아들이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요.
이번 작품의 경우 ‘우연성의 개입’이라는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은희경 소설은 거의 언제든 치밀한 텍스트의 짜임을 자랑한다. 근자에 오면서 문장의 강도, 플롯의 정교함, 작품에 대한 지적인 통제 등 전반적으로 소설의 밀도는 더 상승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 점에서 이번 작품도 예외는 아니다. 작가가 들려준 이 소설의 ‘우연한 출생담’이란 정황적으로는 사실일 수 있겠지만, 일단 작품 안으로 진입하면서부터는 그 우연의 인자(因子)들을 붙잡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집중력이 투입되었으리라. 『태연한 인생』은 일반적으로 장편에 기대하기 마련인 서사적 볼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주인공 요셉이 보여주는 엿새간의 일상은 그저 작은 에피소드의 연속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소설을 읽으며 우리는 뭔가 근사하고 복잡한 이야기의 미로를 따라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결말에 대한 긴장된 기대 역시 놓기 힘들다. 딱히 액자형식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더라도, 이야기가 이야기를 감싸는 중층의 감싸기로부터 서사의 단선적 진행에서는 얻을 수 없는 소설적 의미의 진폭과 자장이 빚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원형적 이야기로 소설 전체를 크게 감싸고 있는 것은 과거 요셉의 연인이었던 류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서사다. 여기에서는 매혹의 삶과 견딤 혹은 지속의 삶이 고독을 중심에 둔 두가지 인생 패턴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원형적 이야기에 감싸여 류와 요셉이 나누었던 십년 전의 짧고 뜨거운 사랑이 소설의 전사(前史)로 놓여 있는데, 이미 실패로 종결되어버린 두 사랑으로부터 반복될 수밖에 없는 패턴의 운명에 맞서 그 운명을 거스르는 사랑 혹은 고독의 서사가 가능한지 하는 질문의 공간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공간에 홀로 떨어져 있는 인물이 소설의 현재 시점을 이끌어가는 소설가 요셉이다. 그러니까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 이후에 지금 소설의 현재에 도착해 있다. 세상에 대한 그의 과장된 냉소와 환멸은 안 써지는 소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상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정리하자면 류의 부모의 서사, 류와 요셉의 과거, 류와 요셉의 현재로 이어지는 일련의 감싸기가 과거/현재의 시간 차원과 인생 패턴의 차원에서 동시에 중첩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물론 요셉의 현재 이야기 또한 요셉과 도경, 요셉과 이채, 그리고 이안의 영화 「위기의 작가들」을 둘러싼 한바탕 소동극이라는 부분집합을 그 안에 거느리고 있다. 소제목으로 분절되어 얼핏 산만하고 복잡해 보이는 이야기가 이 거듭되는 감싸기의 형식을 통해 모종의 소설적 흐름으로 종합되는 과정은 이번 장편 읽기의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었다.
은희경 일종의 울타리나 액자 같은 거죠, 류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뿌리라고도 할 수 있어요. 거기로부터 연원해서 어디로 갈지 모르는 현재 일들이 가지를 뻗어나가는 거죠. 그리고 뿌리라고는 해도, 그것도 고정돼 있는 건 아니고요. 처음에 류의 부모 이야기를 제시하고 이것을 변주해가면서 계속 다른 해석을 보여주려고 했어요. 낭만적인 첫 만남에서 시작해 환상이 깨지는 것까지는 익숙한 설정인데, 그러면 과연 류의 어머니가 일방적인 희생자였냐, 그건 아니었다는 걸로 바뀌어요. 동의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이데올로기 안에서 인생을 자기 의도대로 만들어갔으니까요. 처음엔 류가 부모의 결혼생활을 호감 없는 동료와의 직장생활 같다고 표현하지만, 과연 사랑하지 않았느냐, 그것도 아니었죠. “길을 잃지 않았다면 아름다운 그 꽃을 발견하지 못했겠지”라는 아버지의 고백도 그렇고, 어머니도 ‘자기 방식으로 소멸해가는 사람에 대한 선망’이 있었기 때문에 16년 동안 아버지 곁에 있었거든요. 사랑에 이런 측면도 있을 수 있다, 거기에 고유성을 주고 싶었어요. 사랑이 가족제도나 인간관계의 이데올로기에 갇혀 패턴화된 면이 있다고 생각해요. 매혹 없이 사랑을 시작한 사람들은 개인의 성품이나 인격이나 환경에 따라 좌우되기 쉬운 거지만요. 처음 매혹됐던 순간의 근원적인 접속이랄까 접점이랄까 그런 것이 결국은 사랑을 이어가게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류의 부모가 각기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었다 해서 사랑을 잃은 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사랑에 대해 중첩된 패턴을 하나씩 하나씩 무너뜨리고 싶었어요. 형식 면에서 보자면, 그런 개념 정의가 류의 부모의 이야기를 통해 액자 테두리처럼 둘러지고 액자 안에서는 현재 진행되는 요셉의 엿새가 그 개념을 실험해 보이는 거죠.
정홍수 저는 이 감싸기의 형식으로 말미암아 요셉의 냉소와 독설, 자기기만으로 포장된 고독의 세계가 그 자신으로부터 분리되는 아이러니한 거리를 얻게 되지 않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류의 시점을 가능한 한 과거에 붙잡아두고 현재 시점에서 그녀의 발언이나 행동을 최소화함으로써 고독과 상실을 둘러싼 소설의 울림이 증폭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은 좀더 작은 이야기 단위에서도 소설의 형식으로 기능하면서 소설을 두껍게 만들고 있는데, ‘시정마(혈통 좋은 수말의 교미를 위해 암말을 흥분시키는 일을 한다) 이야기’도 그러하지만 ‘류’라는 이름의 연원에 대한 아버지와 어머니 각자의 기억, 류와 요셉의 사랑에서 어떤 상징적 관건으로 작용하는 시 「소곡」에 나오는 숲 이야기, 그리고 요셉에게 거대한 허무와 낙관의 스케일로 다가온 미당(未堂)의 시 「침향」에 나오는 침향목 이야기, 류 앞에서 돌아서야 했던 요셉의 어느 겨울 기억에 나오는 ‘새장 속 새’를 잠재우는 검은색 보자기의 이미지 등등이 그러합니다. 제게는 「소곡」에 나오는 움직이는 숲의 이미지와 새장에 씌워지는 검은색 보자기의 이미지가 특히 강렬했습니다. 지금 요셉의 일상이 어떠하든 이 두 이미지 혹은 이야기가 그의 영혼에 남아 있는 한 요셉의 삶은 구원, 아니 구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대로 된 고독 혹은 평온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소설의 결말을 보면 류와는 달리 요셉은 “어둠 속에서는 노래할 수가 없었다”고 맺고 있습니다.
은희경 이안과 요셉이 만남으로써 현재의 사건이 시작되잖아요. 그것도 류에 의해서 만나게 된 거죠. 그러니까 류는 현재의 모든 사건을 추동하지만 현실세계에는 별로 등장을 안해요. 사건은 과거에 완결되었지만 그것이 기억 속에서 변주되면서 현재의 삶을 간섭한다고 할까요. 소설을 이끌어가는 건 새로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라 지나간 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고요. 그래서 개념을 설명해주는 에피소드와 이미지 들이 필요했어요. 사실 이 소설을 교정볼 때 딱 한번 짜릿한 부분이 있었는데, 류를 만나려고 눈 속을 달려온 요셉이 마지막 한 걸음을 남기고 멈춰버리는 장면이었어요. 이 소설에서 제가 제일 맘에 드는 부분이에요. 제가 그렇게 쓸 줄 전혀 몰랐거든요. 그냥 10년 전 헤어졌지만 한번 스쳐간 적이 있다, 그런 설정을 하면서 류가 왜 요셉을 떠났나를 설명하는 다리를 놓으려고 한 거였어요. 그런데 그 장면을 쓰다가 갑자기 생각지 않았던 문장이 풀려나오는 거예요. 쓰면서 어떤 사유에 닿은 기분이었어요. 사실은 그래서 그걸 쓰고 나서 마음이 아팠어요. 딱 한번 주인공에게 완전히 감정이입이 된 건데, 그때의 생각을 정리하자면 ‘어둠 속에서는 노래할 수 없었다’였거든요. 그 문장을 쓰고 나서 나도 눈을 딱 감았어요. 나 자신이 요셉과 같은 사람이구나 느꼈기 때문에 약간 울컥했던 거예요. 요셉이 문을 열면 거기에는 원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 너머가 있다는 걸 깨닫고 멈칫하는 그 장면에서, 내가 작가로서나 내 삶의 주인으로서나 해봤자 여기까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웃음)
정홍수 그 장면이 압권이었죠.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 ‘류의 노래’는 이렇게 끝납니다. “타인이란 영원히 오해하게 돼 있는 존재이지만 서로의 오해를 존중하는 순간 연민 안에서 연대할 수 있었다.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 속에 류의 삶은 흘러갔다. 류는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다.” 이건 말하자면 류의 손을 들어준 건데요. 성숙의 표지를 준 거 아닌가요.
은희경 고독을 줬죠, 또.
정홍수 류는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트란스트뢰메르(T. Tranströmer)의 시 「소곡」에 나오는 그 ‘다른 숲’ ‘밝은 숲’을 걷게 되었다는 이야기인가요? 아니면 그런 숲에 대한 기대(매혹)를 접었으므로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인가요?
은희경 굳이 대답을 한다면, 그냥 노래한다는 거죠. 흘러간다는 것. 자기가 장악하면서 가는 인생이 아니라 흐르면서 가는 것이고, 반면 요셉은 자기 욕망 속에 남는 거잖아요. 결국 흘러가지 못하고.
정홍수 그럼 흘러가지 못하는 요셉은?
은희경 계속 어두운 숲을 노래하겠지.(웃음) 요셉은 안되고 류는 된다는 식이 아니라, 다른 방식이 서로 만나지 못한 채 함께 흘러간다는 뜻이었던 것 같아요. 류는 흘러가는 것이 노래이고 요셉은 어둠을 노래할 수밖에 없다, 그런 식이었어요.
정홍수 위악적이고 독선적인 태도, 비겁한 자기기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요셉은 류 못지않게, 아니면 그 겨울 호텔 앞에서 돌아서던 시간만으로도 류 이상으로 고독의 쓰라림을 겪은 사람입니다. 냉소적이고 위악적인 태도 역시 고독을 견디는 그만의 뒤틀린 방식으로 볼 수도 있는 것 같고요. 그렇다면 요셉 역시 고독의 연대에 충분히 가담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 아닌가요. 그런데 류는 인생에 대한 태연함에 어느만큼은 도달한 듯한 반면 요셉은 태연함을 가장하지만 여전히 자기기만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 같아요. 이 차이는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요? 왜 요셉에게는 움직이는 숲을 보는 날이 오지 않는 걸까, 저로서는 여전히 이 질문이 머릿속을 맵돕니다.
은희경 나는 이렇게 생각한 거죠. 어두운 숲의 노래도 있고 밝은 숲의 노래도 있다는 거예요. 이 두가지를 같이 가게 만들었어요. 세가지라도 상관없어요. 패턴을 깨고 싶었다고 할까요. 어둠 속에서 노래할 수 없는 사람의 노래가 더 어두울지, 어둠 속에서도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밝은 노래를 부를지, 그것도 정해진 건 아니에요. 어쩌면 어둠 속에서 부르는 노래가 고독의 노래일지도 모르고요. ‘노래할 수 있었다’를 마지막에 놓았기 때문에 소설은 조금 더 밝게 됐지만 나는 두 목소리에 다 귀를 기울이고 싶었어요. 또 한가지, 나 자신이 류보다는 요셉 쪽에 속해 있다는 것 때문에 내 결론이 그럴 수밖에 없었고요. 나는 이쪽에 속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어두운 숲을 노래해야 되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마도 관습화된 ‘패턴’에 따라 이 소설을 읽는다면, 류의 아버지와 어머니, 류와 요셉, 요셉과 이안은 일종의 짝패 혹은 분신 모티프로 이해하는 게 손쉬운 방법일 것이다. 말하자면 이 쌍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이면이 되는 것이며, 둘 사이에 어떤 우열의 관계가 성립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작가는 그런 측면을 어느정도 형식화해서 보여주면서도 이들이 ‘우연이든 오해이든’ 혹은 ‘패턴의 선택이든’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차이가 있다는 점 역시 강조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은 그 차이가 결과적으로는 또다른 오해의 덫, 고독의 심연으로 이어지면서 삶을 전혀 엉뚱한 곳으로 데려가곤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닌가.
은희경 맞아요. 그런 얘기를 쓰고 싶었어요. 그리고 그게 가장 잘 요약되어 있는 게, ‘작가의 말’에도 인용했지만 “용의주도한 계획을 세우는 동안 일어나는 뜻밖의 일들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이며, 운명이란 주어진 운명에서 도망치려 할 때 바로 그 도망침을 통해 실현된다”는 이야기겠죠. 그리고 그런 것은 지금까지 써온 소설에서도 그랬지만, 결국은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는 데서 나오는 생각일 거예요. 그래서 “낙관은 인간이라는 유한한 존재에게 주어진 작은 쾌활이었다”라는 문장도 나오게 된 거고요. 요셉이 호텔에서 돌아서는 순간 깨친 그 너머의 세계라는 것도 결국은 인간이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생겨나는 거겠죠. 요셉은 가장 치열한 순간 낭떠러지에 이른 것이고요.
요셉은 그 과거의 쓰라린 돌아섬 뒤에 다시 한번 류를 보게 되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녀와의 만남 바로 앞에서 멈추어버린다. 소설의 현재 이야기로 들어와, ‘급정지 스튜디오’ 앞에서 쏟아지는 눈발 속으로 사라지는 류를 바라만 보고 있는 요셉의 장면. 이 두번째 돌아섬이야말로 요셉의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상징적 수준에서 완수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설의 전개는 이 두번째 돌아섬을 먼저 보여주고, 그뒤에 마지막 ‘요셉의 노래’에 가서야 그 이전에 있었던 첫번째 돌아섬의 기억을 들려준다. 여기서 소설적 울림이 증폭됨은 물론이지만, 결국 모든 상실은 사후적으로 확인된다는 사실을 돌이킬 수 없는 자리에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여왔을지도 모를 요셉의 한가닥 기대는 여기서 여지없이 붕괴된다. 요셉은 화장실 거울에서 십년 전 자신이 십년 뒤의 낯선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 대목은 참으로 아프다. 이런 것이 인생일 수밖에 없는가.
정홍수 도경과 요셉이 숨이 넘어갈 듯 웃으며 차를 타고 제주도 해안도로를 달리는 2부 마지막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뭐랄까, 여기서 소설이 일단락되어도 좋겠다는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도경은 말합니다. “웃겨서 안되겠다구요. 웃겨서 못할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면에서 텅 빈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세상을 자기 방식으로 통달한 듯한 도경이라는 캐릭터는 기실 은희경 소설에서 낯익은 인물이기도 합니다. 당장 깊은 구멍 같은 텅 빈 눈으로 과장되게 웃으며 이상한 방식으로 애정을 갈구하던 「타인에게 말 걸기」의 ‘그녀’가 떠오릅니다.
은희경 「타인에게 말 걸기」의 ‘그녀’와는 연결을 못 시켰는데 생각해보니까 그런 이미지가 있네요. 내가 실은 그런 인물을 쓰기 좋아해요. 도경이 늘 뭔가 배우러 다니잖아요. 아무 생각 없이 남을 따라하고 있으면 뭔가 하고는 있으면서 자기가 드러나지 않으니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진실을 알고 싶지 않아, 알면 힘들거나 불행해질 게 뻔하잖아, 이런 식으로 회피하는 인물이랄까. 남편의 주머니 같은 건 절대로 뒤지지 않을 여자죠.(웃음) 의심스러운 것의 균열을 애써 덮으려는 류의 어머니의 이성적 태도와 달리 의심스러움 자체를 멀리하려는 거예요. 이 역시 태연함이 필요해요. 그리고 밑 빠진 독같이 텅 빈 존재, 그것도 자기 생존의 방식이죠. 그걸 가지고 요셉 같은 인간은 부조리극처럼 평화롭다고도 하고 경멸할 수 있기 때문에 통쾌함이나 편안함도 느끼고. 그래서 내가 요셉한테 도경이를 만들어준 건 상당히 휴머니즘 차원에서……(웃음) 그리고 내가 한껏 폼 잡고 썼던 고통이나 고독에 대해 도경은 한마디로 정리하잖아요. 같이 있으면 고통이고 혼자 있으면 고독이라고. 물론 그 트로트 가사는 내가 만든 거지만. 어쨌든 통찰까지는 아니고 그 사람 방식으로 꿰고 있는 거죠.
정홍수 요셉의 생각과 행동 그리고 말은 대부분 반어법의 방식으로만 드러나고 있습니다. 반어의 독설이나 궤변이 지나치다 싶은 곳에서는 안쓰러운 생각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반어의 지점이 소설의 승부처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말하자면 요셉은 신뢰할 수 없는 화자입니다. 그는 세상에 냉담한 것처럼 그 자신의 진실에도 냉담합니다. 제자인 이안이 정당하게 비판하는 것처럼 그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인물이며, 위선자고, 자기기만의 늪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는 그 진흙탕의 자리를 감수하는 댓가로 곧잘 거부하기 힘든 진실 혹은 통찰의 언어를 들려줍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이 소설이 세상 혹은 인생과의 대결에서 감내하고 있는 아이러니한 거리 그 자체일 수도 있겠습니다. 작가가 인물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빠져나오기도 하면서 어떤 줄타기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 것은 그 때문일 것입니다.
은희경 더 못되고 괴팍한 사람으로 쓰고 싶었지만 더 센 것은 생각이 잘 안 났어요.(웃음) 일종의 이탈자인데 그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이 있죠. 생각이 패턴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요셉을 독설가로 만들었지만 이 세상 모든 독설가의 약한 부분이 자기일 거예요. 그런 점에서 보면 요셉이란 인물이 안쓰럽죠. 잘나가는 작가 인터뷰를 까페에서 엿들으며 자기가 대답해보고 그러잖아요. 그런 자기에 대해서 모르지 않죠. 하지만 자괴감 같은 건 안 어울리니까 되도록 안 드러나게 쓰고 싶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은 류와 요셉의 얘기인데 류 부분이 너무 적게 나온다고 하는데, 내가 요셉에게 애정이 더 많았기 때문에 그의 분량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하는 짓을 더 보고 싶어서.(웃음) 류한테는 그다지 감정이입이 안됐어요. 류의 어머니라면 모를까.(웃음) 아무튼 류는 어떤 개념을 설명하려고 설정된 인물이기 때문에 사건을 이끌어가는 주인공이라기보다 부모 인생의 내레이터이고 요셉의 욕망과 생각의 틀을 장악하고 있는 연인이란 게 중요하죠. 이 소설에서 류 자신의 인생은 그다지 의미가 없어요.
정홍수 명석하고 통찰력 있는 요약으로 사태를 정리하는 것은 이제 은희경 소설의 스타일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 같습니다. 특히 이 소설에서는 류의 전사(前史)나 요셉의 캐릭터를 보여주는 데 효과적으로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묘사나 기술을 통해 인물이나 사건에 조금씩 접근해들어가는 소설의 산문적 리듬과 이러한 요약 사이의 균형에 대해 생각해보게도 됩니다.
은희경 그런데 나는 잠언을 만든다거나 정의를 내린다거나 하는 의식이 별로 없어요. 그때의 느낌에 집중해서 그때의 어법으로 쓰는 거죠. 그런데 나중에 독자들이 이런 구절 좋다 그러면 그 구절이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빼려다 만 문장이 그런 말을 들을 때도 있어요. 일부러 그걸 배치하거나 그러지는 않고 어떤 생각이나 느낌을 제일 정확하고 정직하게 말하려고 애를 쓰는 것뿐이에요. 소설 쓰기 시작하면 평소보다 내 말이 날카롭고 사나워진다고 하더라구요. 정직하고 정확한 표현을 찾는 태도가 일상생활에도 들어가는 것 같아요. 얘기하다보니 내 성향이 그런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식으로든 명확하게 정리를 하려고 하는 게 있거든요. 어쩌면 나는 세계가 모호하다는 이야기를 정확하게 하려고 애쓰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슬프게도. 근데 그 방식을 학습했고 그것이 몸에 배었기 때문에 바꾸기 힘든 것 같아요.
정홍수 너무 지적이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사실 은희경 소설을 읽는 큰 즐거움 중의 하나죠. 감탄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소설에는 그런 명료함을 거부하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은희경 맞아요. 그래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고, 사실 명쾌하지 않은 소설도 몇편 썼어요. 근데 그런 건 별로 안 읽어주더라구요.(웃음) ‘작가의 말’ 같은 데도 쓴 적 있지만, 나는 모호하고 애매하고 낯선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내가 잘하는 건 좀 다른 세계 같은데 내가 잘 못하더라도 낯설고 애매한 걸 쓰고 싶다고 말이죠. 기승전결이 명쾌하면 거짓말이기 쉽고 완벽한 균형이라면 성형미인일지도 모른다, 『비밀과 거짓말』에 이런 문장도 쓴 적 있으니까요. 어떤 단편은 써놓고 나서 그런 부분, 내가 모든 세계를 요약해버린 건 아닌가 하는 부분은 많이 들어내요. 그러다 보니 뻑뻑해지는 느낌도 있지만. 그런데 이번 소설은 그런 걸 빼야지 하는 생각을 별로 안했어요. 이 소설은 어쨌건 내가 잘하는 걸 그냥 한다, 이런 생각으로 갔으니까요. 그래서 내 속에 가지고 있는 긴장이 그대로 나온 거지 내가 긴장을 만들지는 않았거든요. 그렇게 이 소설을 쓰고 나니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명료한 것은 문학적이 아니라고 누가 정했나. 열린 것과 닫힌 것은 반대가 아니다. 열린 것이 닫힌 것을 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게 중요한데, 문학적이 아니면 또 어떤가. 문학이라는 걸 의식하는 태도도 요셉의 용어대로 지배이데올로기에 부역하는 일종의 패턴일 수도 있겠죠. 어떤 감정이나 생각은 고유한 것이지만 그것을 진단하는 데는 패턴이 있어요. 그 패턴을 깨려면 나는 설명을 하지 않을 수 없어요. 그게 나의 한계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무튼 나에게는 얼버무리기 싫어하는 게 있는 거예요. 인식 같은 거요. 난 그냥 그렇게 가려고 해요. 결국은 아무것도 아닐 게 뻔하지만 나라는 비겁하고 모순된 존재에 대해 끝까지 질문하고 설명해보고 싶어요. 뭐, 이것도 또 변하겠지만요.
그 질문과 설명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한 대목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만남의 보고서를 마무리하는 것도 좋겠다. “어머니는 그 세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세계를 믿지 않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달리 무엇을 믿는단 말인가. 상실은 고통의 형태로 찾아와서 고독의 방식으로 자리잡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어두운 극장의 의자에 앉아 모든 것이 흘러가고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고통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침전될 것이었다. 하지만 원심분리기 안의 소용돌이 속에서 추출되고 있는 부유물은 고통으로 보이는 고독이었다. 그 봄날의 피크닉이 오랜 우기 끝에 찾아온 찬란 뒤에 불길함을 숨겨놓았듯 모든 매혹은 고독의 그림자를 감추고 있었다.”(72~73면) 아마도 은희경 문학은 ‘어둠 속’에서도 이 냉정한 인식과 심미적 이해의 언어로 계속 잊을 수 없는 인생의 노래를 들려주리라.(2012.7.5. 인문까페 창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