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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민하 李旻河
1967년 전북 전주 출생. 2000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환상수족』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모조 숲』이 있음. poemian25@hanmail.net
물결
두개의 별이 부딪쳤다는 뜻입니다
밤하늘에는 유람선들이 무수히 떠 있습니다
파편처럼 빗방울이 흩날리고
빗방울은 인류의 기원(起源)입니다
허공에서 비를 타고
천천히 익사하는 기분으로
우리는 섞입니다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발이 푹푹 빠지지만
블록처럼 쌓인 사람과 사람 사이에 빈칸이 있습니다
구성원이 된다는 것
무색투명한 결속의 시간이 오고
취향이 아니라 방향 같은 것
출석부엔 수감번호가 입력되고
이리저리 물살에 휘어지며 집단체조를 배웠습니다
어둠의 이불이 덮일 때까지
물뱀처럼 구부린 알몸으로
하루치 급식을 받으려고
엄마의 태반을 식판처럼 들고 있습니다
탯줄을 끊어봐야 가위로 물 자르기입니다
밤과 낮으로 통하는
두개의 다리 사이에 갇혀서
어느날엔 유람선에서 폭죽을 터뜨리는 성인식도 치르겠지만
줄을 서지 않아도 유령선에 탑승하는 날도 오겠지만
탈옥은 인류의 기원(祈願)입니다
손가락에 물갈퀴를 끼우고
조금씩 승천하는 기분으로
우리는 떠돕니다
누군가 손목을 그으면 삽시간에 핏물이 번집니다만
비린내를 못 견디고 수족관 밖으로 뛰쳐나간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오물처럼 둥둥 떠 있는 사산아들을 가르며
물살을 밀고 나간다는 것
무색투명한 결단의 시간이 오고
미로가 아니라 회로 같은 것
숨을 참지 못해서 고개를 쳐들고
수면에 잘린 두 토막의 몸으로
물속의 하반신을 끌고 다니는 사람들 아래
물 밑으로 빠르게 이동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밑바닥에는 입구인지 출구인지 알 수 없는 회전문이 열리고
출렁출렁 쏟아지는 묵념의 박수 소리와 함께
한차례 대열이 빠지고 나면 쉿,
물구나무선 채로 백년의 숨을 몰아쉬며
다음 구령을 기다립니다
벽 속의 누가(累家)
나무들이 한삽씩 빗물을 퍼붓고 있다. 벌어진 창틈 사이로
골목의 아이들이 웃음의 뼛가루를 뿌리고 사라진다.
나는 언제부터 깨어 있었던 걸까. 백년 전부터 눈을 뜬 것 같은데
희미한 것을 보면 왜 잠만 올까.
벽 속에 누가 있다. 외로운 누가.
걸음마보다 숨바꼭질을 먼저 배운 언니는
뙤약볕이 싫었는지 벽 속으로 기어들어가 꼭꼭 숨었다.
언니의 뒤통수도 보지 못한 나는
엄마가 고함을 지를 때까지 자궁벽 안에 웅크려 잠만 자고 있었다.
잠보다 놀이를 먼저 배웠더라면 술래가 되어 언니를 찾아낼 수 있었을까.
축축한 것을 보면 왜 잠만 올까.
벽 속에 누가 있다. 벽에 물집이 번지던 여름날,
스무해 동안 갈아주지 못한 기저귀가 생각난 듯 갑자기
엄마는 하얀 시트를 둘둘 만 채 벽 속으로 들어갔다.
앰뷸런스도 배웅하지 못한 나는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었다.
문법보다 마법을 배웠더라면 두 손으로 벽을 비집고 엄마를 꺼낼 수 있었을까.
딱딱한 것을 보면 왜 잠만 올까.
벽 속에 누가 있다. 가구가 늘어도 한쪽 벽엔 늘 네모난 빈자리가 놓여 있는 이유.
나는 벽과 나란히 누워 있다.
벽에 박힌 사진 속에서 늙지도 않는 엄마를 마주 보다가
잡초 무성한 벽지를 움켜쥔 채 외할머니도 지난여름 뒤따라갔다.
뺨을 타고 장맛비가 흘렀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흔들면서 가세요.
뒤늦게 입이 트인 나는 엄마의 손수건을 할머니 손에 쥐여주었다.
울음보다 음악을 먼저 배웠더라면 아름다운 곡소리를 낭송할 수 있었을까.
서늘한 것을 보면 왜 잠만 올까.
벽 속에 누가 있다. 손끝으로 벽을 쓸어보면 생생하게 묻어나는 마지막 체온.
여름에 떠난 사람들은 영원히 추위를 모르고
비라도 내린다면 천근만근 살 껍질을 귤껍질처럼 벗을 텐데.
내가 잠들면 벽에 걸린 옷들은 어떤 기분일까.
구겨진 몸을 늘어뜨리며 없는 목을 매다는 연습은 왜 하나.
바닥에 납작 깔려 있는 나는 어제보다 얇아져 편지지처럼 고백이 늘었는데
말을 실어나르는 바람의 부피는 늘지 않는다.
눈앞에 마주 보이는 천장이 지난밤보다 낮아진 것일까.
무심한 것을 보면 왜 잠만 올까.
벽 속에 누가 있다. 할머니의 메이크업처럼 뽀얀 벽지 위로
빗줄기가 날리면 덜컹거리는 액자들을 창문처럼 열어젖히고
눈이 텅 빈 얼굴들이 뚫어지게 바라본다.
벽 속에 집이 있다. 오래된 누가.
벽을 똑똑 두드리면 그녀들이 천장으로 올라가 두 발로 꾹꾹 밟으며 화답한다.
보름 전에 죽은 길고양이는 소리 높여 곡을 하고
빗소리가 함께 달구질한다
목이 쉬도록 후렴구는 잠들 줄을 모르는데 나는 왜 잠만 올까.
벽 속에 누가 있다. 잠에서 깨어 거울을 보면 나도 모르게 뒷걸음치는 이유. 손을 내밀면 잡아당길 것 같아 뒤로 감추는 이유.
간밤에 죽은 내가 거울을 열고 벽 속에서 빤히 내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