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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이현 鄭梨賢
1972년 서울 출생. 2002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장편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사랑의 기초—연인들』 등이 있음. deepoem@hanmail.net
장편연재 2
내 모든 것
오랫동안 아무도 내 공간에 들이지 않았다. 단 하나의 예외라면 제이였다. 운동화를 벗고 실내로 들어서자마자 제이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일회용 비닐에 담긴 빵이었다. 식빵과 베이글, 단팥빵이 고루 섞여 있었다.
—오십원이래서 봉투는 안 샀어요.
그가 멋쩍게 웃었다.
—참 이거 보셨어요?
학원 이름이 붉고 커다란 글자로 인쇄된 전단지였다. 새 학기나 방학특강 등을 시작하기 전에 종종 이런 광고지를 만들어 근처 아파트 단지와 주택가에 뿌리곤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번들거리는 재질로 된 종잇장을 무심코 내려다보았다. ‘소수정예! 확실한 성적관리!! 국내 최고의 강사진!!!’ 느낌표의 개수로 점층법의 효과를 노린 낯간지러운 광고문구 밑으로 대표원장의 얼굴사진과 약력이 실려 있었다. 그 아래로는 각 과목별 강사들의 프로필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영어, 수학, 국어, 기타 과목의 순서였다. 맨 하단의 가운데쯤에 내 사진도 보였다. 언젠가 이력서에 붙이기 위해 급히 찍었던 것이다. 원장은 내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서 그 사진을 마음대로 가져다썼을 터였다.
우리는 창문을 열지 않고 담배 한개비씩을 피웠고, 제이가 사온 빵을 나누어먹었다. 나는 일회용 믹스커피를 한잔 마셨고 제이는 두잔 마셨다. 그는 카페인을 섭취하면 심장박동이 요동친다고 했다.
—혹시 드럼 쳐보셨어요?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모비딕 아세요, 레드 제플린?
—아니.
제이는 스마트폰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그 음악을 플레이했다.
—카페인이 들어가면, 이렇게 심장이 쿵쿵 뛰어요. 얼마나 신나는데요.
제이는 별로 신나는 것 같지 않은 음색으로 말했다. 구름 위로 떠오르는 것 같다고도 했다. 어떤 하늘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먹장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인지, 새털구름이 가붓가붓 흩날리는 하늘인지.
—의사는 자꾸 그러다 큰일난다지만.
제이가 가슴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의사들이야 원래 전부 다 하지 말라는 사람들이잖아요.
나는 냉장고에서 500밀리리터짜리 페트병에 담긴 오렌지주스를 꺼냈다. 어떤 편의점에서나 살 수 있는 평범한 것이었다.
—어, 나 커피 더 마실 건데.
—그럼 그러든지.
내가 주스를 도로 집어넣으려 하자 제이가 활짝 웃었다.
—아, 아니에요. 그래도 선생님이 사오셨는데.
진열대에서 그걸 집어들었을 때 그의 얼굴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단 것은 입에 대지 않았다. 제이는 병뚜껑을 돌려 열고는 주스를 한꺼번에 다 마셨다. 꿀꺽꿀꺽. 사람 목구멍에서 의성어와 똑같은 소리가 나는구나, 나는 의미없이 그런 생각을 했다. 제이는 담배를 피우고 요기를 하고 무언가를 마시기 위해 이 집에 들르는 것 같았다. 아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집에서의 제이는 어떤 곳에서의 제이보다 느긋했다. 그가 담배 한개비를 더 피우고는 일어섰다.
—저 이만 가볼게요.
—그래.
그는 가방을 메고 문가에 가지런히 벗어놓은 운동화에 발을 꿰었다. 문을 열려다 말고 문득 내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선생님.
쌤이 아니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아이, 제이.
—응?
—아니에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그가 나가자마자 도어록이 자동으로 잠겼다. 엘리베이터 타는 모습을 볼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이상한 예감이었다. 탁자 위는 어지러웠다. 재떨이와 빈 컵들을 치우려다가 그 옆에 놓인 전단지를 집어들었다. 내 사진 아래 이름이 또박또박 인쇄되어 있었다. 증명사진은 엄지손톱만 했다.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반포에 살았던 이지혜. 부원장이 받았다던 그 전화는 나한테 걸려온 게 맞을 것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 속에서.
*
1994년 여름,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는 3384명이었다.
무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폐사한 가축의 빈 우리를 뉴스에서 보았다. 저런. 뜨거운 물에 우린 잎차를 마시던 할아버지가 혀를 찼다. 할머니가 단언했다. 종말이 가까웠다니까요. 그들은 반팔 실내복 위에 칠부 소매의 얄따란 카디건을 덧입고 있었다. 그 집의 실내온도는 언제나 25.5도를 유지했다. 나의 조부모들은 한의사의 전언대로 찬 기운이 몸에 스며드는 일만큼 해로운 건 없다고 믿는 눈치였다. 세상에는 얼음도, 설탕도, 콜라도, 배달치킨도 먹지 않는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경건하지 않은 삶 말이다.
여름방학이 한창이었지만 나는 꼬박꼬박 학교에 갔다. 낮 동안 가 있을 마땅한 곳이 없었다. 집에 종일 머무는 것은 고려해보지 않았다.
—아무래도 학교 도서실이 집중이 잘되니까요.
딱히 변명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데도 변명처럼 들릴 것 같았다. 할머니는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결정적인 관심이 없는 보호자와 함께 사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았다. 매일 아침 아홉시 집을 나섰다. 김기사 아저씨가 자동차 뒷문을 열어주었다. 평소보다는 학교와 가까운 곳에서 차를 내렸다. 들킬 위험이 덜해서라기보다는 너무 더웠기 때문이다. 게스 청치마와 청바지를 번갈아 입고, 위에는 몸에 붙는 폴로 피케티셔츠를 입었다. 스타킹도 양말도 신지 않았다. 대학생이 된다는 건 이런 기분일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가 사그라졌다. 고등학생이 된 뒤에 크게 달라진 바 없는 것처럼 대학생이 되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급하게 변하는 건 늘 이 세계였다.
재수하지 않고 대학에 간다면 나는 97학번이 될 것이다. 1997. 머나먼 숫자였다. 반드시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1997년은 나에게 스무살이 되는 해로 의미가 있었다. 보호자 란에 쭈뼛쭈뼛 아빠 이름을 쓸까, 엄마 이름을 쓸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 그냥 당당하게 내 이름 석자를 휘갈겨도 되는 나이로서의 스물 말이다.
간혹 1997년의 내 모습을 상상해보곤 했다. 하지만 유리잔 밑바닥에 남은 우유 찌꺼기처럼 희뿌옇기만 했다. 1988년에는 1991년이, 1991년에는 1994년이 그랬다. 시간은 체력장 오래달리기 같았다. 눈을 감고 뛰다보면, 저 앞에 도무지 내가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속도로 달리던 아이가 어느 순간 내 뒤로 쳐져 있는 거다. 늙어간다는 건 따라잡을 아이가 점점 줄어들다가 결국 아무도 없어진다는 거겠지. 그러면 좀 쓸쓸할 것 같기도 하다.
여름방학, 학교 도서실에는 거의 언제나 나 혼자뿐이었다. 넓지 않은 열람실엔 낡은 선풍기 한대만 권태롭게 돌아갔다. 서가는 어둡고 서늘해서 숨어 있기 좋았다. 나는 세계문학전집이 순서대로 꽂힌 책장 밑에 쪼그려앉아 많은 시간을 보냈다. 각권의 맨 뒷장엔 초판 발행일이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내가 태어난 날보다 하루라도 먼저 묶인 책들만 읽었다. 눈물을 훔치며 읽기도 했지만, 아무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적도 많았다. 내가 읽은 것은 서사라기보다는 문장들이었다. 예컨대 『호밀밭의 파수꾼』은 이런 문장으로 내게 남아 있다.
정말로 이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아마도 가장 먼저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끔찍했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 우리 부모님이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내가 태어나기 전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와 같은 데이비드 코퍼필드 식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야기들에 대해 알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난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지가 않다. 우선 그런 일들을 이야기하자니 내가 너무 지겹기 때문이고, 그렇게 시시콜콜하게 이야기를 했다가는 우리 부모님이 뇌출혈이라도 일으킬 것 같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그런 일들에 대해 굉장히 신경이 예민하셨다. 두분 모두 좋으신 분들이지만—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끔찍할 정도로 과민한 분들이니까. 더구나 난 여기서 지루한 자서전을 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정말로 이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협박 가정법이다. 남의 이야기를 정말로 듣고 싶어하는 사람이, 정말로 있을까. 남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의 이야기를 생각하려 한다면 몰라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부모의 직업 따위에 대해 시시콜콜 말하고 싶지 않다는 부분을 읽었을 때 나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내 부모는 나란히, 피라미드 회사의 다이아몬드 직책이었었고 지금은 아니었다. 책의 어떤 페이지에도 밑줄은 치지 않았다. 나만을 위한 빨간 줄을 긋는다고 하여 먼저 그곳에 새겨져 있던 의미들이 내 것이 될 리는 없을 테니까. 나보다 오래 존재해온 글자들이 이 세상 어딘가 낡은 책장 속에 납작 엎드려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족했다. 독서는 대수롭지 않은 비밀이었다. 이 더운데 거기서 내내 뭘 하느냐고 친구들이 물어오면, ‘졸다 오는 거지, 뭘’ 하는 식으로 얼버무리곤 했다.
서울의 기온이 36도를 넘던 날, 준모가 도서실로 찾아왔다. 나는 고장난 선풍기를 망연히 쳐다보던 중이었다. 좀 덜덜거리는 해도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은 유지할 만한 바람을 보내주던 낡은 선풍기가 갑자기 멈춰버렸던 것이다. 십자드라이버가 있다면 플라스틱 안전망을 열고 프로펠러 날개에 쌓인 먼지를 조심조심 털어내볼 텐데.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집에서 이런 건 항상 엄마의 몫이었다. 드라이버로 장난감의 건전지박스를 돌려 열거나, 쇠망치를 두드려 벽에 못을 박거나 하는 일이 다른 집에서는 대개 아빠의 역할이란 걸 알고서 나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었다. 엄마가 기계 앞에서 진땀을 흘리고 있을 때 아빠는 낮잠을 자거나, 우걱우걱 사과를 씹으며 축구중계를 보거나, 엄마의 솜씨에 순수하게 감탄하거나 했다.
—넌 뭘 그런 걸 다 할 줄 아냐?
애초부터 자기와는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엄마는 한탄인지 비웃음인지 모를 한숨을 삼키며 묵묵히 나사를 돌렸다. 한남동에 살아보니 아빠의 이런 태도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이 집에선 할머니나 할아버지나 고모나 무슨 일이 생기면 일단 누군가를 부르는 게 당연했다.
—아줌마!
아니면 김기사! 아니면 황기사! 금방 달려오기만 한다면 옆집 강아지라도 상관없었다. 본인 손가락을 까딱하지 않는다는 사실 외엔 중요한 게 없는 사람들 같았다.
—(뭐 해?)
준모가 소리없이 입을 벙긋거리며 물어왔다. 내가 선풍기를 가리키자 준모는 힐끔 벽 쪽을 보더니 반쯤 빠져 있는 코드를 끼웠다. 프로펠러가 털털털 다시 회전하기 시작했다. 어떤 문제는 때론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간단히 해결되기도 한다. 어쩐지 힘이 나는 기분이었다.
—고맙다, 친구.
준모가 깜짝 놀라더니 검지를 입술에 대고 쉿, 하는 시늉을 했다.
—아, 괜찮아. 어차피 여긴 아무도 없어.
—(그래도 도서관이잖아.)
준모는 내 어깨를 툭툭 치더니 입술말로 밖에 나가 기다리겠다고 했다. 참 일관되게 바보 같은 녀석이다. 나는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혼이 쑥 빠질 것 같은 기세로 매미가 울었다. 복도가 끝나는 곳에 준모가 뒷모습을 보인 채 서 있었다. 넓고 단단한 등이었다. 악마가 침범하지 않았을 때의 준모는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는 남자아이였다. 멀쩡할 때의 준모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자꾸 조마조마해졌다.
우리는 땡볕을 피해 차양막이 쳐진 운동장 둘레를 둘레둘레 걸었다. 강남역에서 지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학원 땡땡이쳤나봐.
지혜의 학원이 그 근처였다. 그녀의 부모는 방학이 시작되기도 전에 국영수 전문의 소수정예학원에 딸을 등록시켰다. 모르긴 해도 한달 수강료가 웬만한 대학의 등록금에 육박할 터였다.
—차라리 날 주지.
전화통화에서 지혜는 픽 웃으며 말했다. 수업시간에 한 글자라도 덜 담기 위해 죽도록 노력하고 있다고도 했다.
—원래는 스파르타 넣으려고 했는데 많이 봐준 거래.
그녀가 말하는 ‘스파르타’란, 수강생들을 24시간 감시하면서 공부시키고 먹이고 공부시키고 재우고 공부시키는 기숙사형 학원을 의미했다. 1990년대 이후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이런 식의 학원들은 양수리나 포천의 러브호텔들 사이에서 성업 중이었다.
—외출이 한달에 두번이래. 정말 끔찍하지 않니?
지혜는 참혹해했고 나는 혹했다. 나는 그중 한곳의 번호를 알아내어 전화를 걸어보았다. 목소리를 최대한 나직하게 깔았다.
—저희 아이를 좀 보냈으면 하는데요.
저희 아이,라고 발음하는데 심장이 툭 내려앉았다. 무방비상태에서의 습격이라 더 아팠다. 학원 관계자는 친절한 편이었다. 한명 정도면 이제라도 받아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옷장 깊숙이 넣어두었던 통장을 꺼내보았다. 돈이 절반 넘게 모자랐다. 좁고 팽팽하다고 믿었던 통로는 헐렁하게 뻥 뚫린 구덩이일 뿐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다면, 고모나 할머니여야 할 것이다. 할머니가 가장 나을 수도 있었다. 할머니 입장에서도, 탄생부터 화근이라고 믿어온 손녀딸과의 느닷없는 동거를 일시 청산하기에 이만큼 적당한 타협안은 없을 테니까. 그렇지만 나는 할머니에게 끝내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한달에 두번 외출’이라는 조항을 곱씹다 내린 결론이었다. 이주 만에 바깥세상으로 나와 남들이 다 집에 갈 때 한남동으로 돌아오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여기에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는 것과는 명백히 다른 문제였다.
저 멀리서 강남역 행 버스가 달려왔다. 그때 갑자기 준모가 팔을 뻗더니 택시를 잡았다.
—응? 11번 저기 오는데?
—킁, 킁, 씨팔. 미안해.
악마가 또, 찾아왔다. 준모는 이미 황황히 택시문을 열고 있었다.
—그냥 이거 타자. 킁, 아, 좆같아, 더워, 킁, 씨팔.
택시 안의 실내온도는 터무니없이 낮았다. 다른 세상에 내던져진 것 같아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준모는 평소 지하철이나 버스를 잘 타고 다녔다. 아니, ‘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내게 있는지는 자신이 없었다. 동물원 고릴라처럼 바라보는 시선도, 밑도 끝도 없이 날아오는 주먹도, 어떻게든 요령있게 피하며 살아남았다는 것이 내가 아는 정보였다. 준모가 제 손으로 제 입술을 세게 꼬집어대는 모습을 보고서 나는 ‘오늘은 왜?’라는 질문을 삼켰다. 살아남기 위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였다. 차가 방향을 틀자 유리창 너머로 지독한 태양광선이 쏟아져 들어왔다. 너무 눈이 부셔서, 눈이 아파서, 우뚝 솟은 준모의 콧날을 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가려진 그의 입술에선 뭉그러진 욕지거리가 연신 새나오고 있었다.
—킁 킁, 아, 씨팔, 씨팔, 씨팔.
뒷머리까지 훤히 벗겨진 택시기사가 룸미러 너머로 곁눈질했다.
—죄송합니다. 얘가 좀 아파서요. 뚜렛 증후군이라는 병이에요.
기사에게도 준모에게도 내 목소리가 담담하게 들렸으면 좋겠다. 기사가 슬그머니 오디오 볼륨을 높였다.
내가 환난 당할 때 주가 보호하시고 거룩한 산 시온에서 도우심을 원하네. 모든 죄를 통회하고 나의 몸을 드리니 믿음으로 구한 것을 이뤄주심 바라네.
가혹한 찬송이었다. 준모는 눈은 감지 않았지만 아무것도 안 보이는 사람처럼 눈동자를 멈추고 있었다. 그의 입은 여전히 손가락에게 쥐어뜯기는 중이었다. 인간의 의지란 얼마나 무력한가. 준모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발작적으로 들이닥쳤다가 거짓말처럼 쓱 잠잠해지기를 반복하는 그의 증세. 신의 장난이 아니면 귀신에 씐 건지도 모른다. 신과 귀신의 차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한 소녀와, 신과 귀신에게 인내심을 시험당하는 한 소년을 싣고서 택시는 제일생명 사거리를 향해 질주했다.
역시 신과 귀신의 가호가 필요한 또 한명의 소녀 지혜는 전자오락실에 있었다. 게임 헥사(HEXA) 앞이었다. 어릴 적부터 오십원만 생기면 오락실로 달려가던 그녀였다. 이즈음엔 부쩍 헥사를 즐겨했다. 삼단 블록이 공중에서 떨어지면 조이스틱으로 휙휙 변형하여 바닥에 내리꽂았다. 언뜻 보기엔 아무렇게나 떨어지는 것 같지만 나름대로 일정한 패턴이 있다는 것이 지혜의 주장이었다. ‘쉬워. 몇번만 해보면 금방 파악할 수 있어.’ 그래. 어련하겠니.
—왔네?
지혜가 우리를 올려다봤다. 심드렁한 눈빛이었다. 조이스틱을 놓고 일어서자 텅 비었던 화면 하단에 삼단블록들이 착착 겹쳐져 쌓였다.
—아깝다.
—괜찮아. 어차피 지겨웠어. 두시간째거든.
—그런데 왜 계속했어?
—안 끝내지는 걸 어떡해. 다 외웠다니까.
—킁, 킁, 씨팔, 그럼 왜 하는데?
—응?
—킁, 킁, 씨팔, 좆같아, 다 예측할 수 있으면 오락을 할 필요가 없잖아. 씨팔, 안 그래?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이었다.
—너희가 어떻게 알겠니.
지혜가 이렇게 나오기 시작하면 게임오버인 거다. 머리가죽이 타버릴 만큼 햇볕은 뜨겁고, 나는 숨이 턱 막혔다.
—번번이 설명하기 지겹지만 말이야. 내 머릿속은 항상 엉망진창이라고. 거미줄 백만개가 뒤엉켜 있는 것 같아. 그럴 때 아주 쉽고 뻔한 뭔가를 하고 있으면 그나마 좀 편안해져. 숨통이 트인달까.
—킁, 킁, 씨팔, 지혜야. 그건 낭비일 수도 있어.
준모가 들릴락 말락 말했다. 표정을 보니 지혜는 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이렇게 학원 땡땡이쳐도 괜찮은 거야?
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외삼촌이 돌아가셔서 문상을 가야 한다고 뻥을 쳤단다.
—삼촌 죽은 건 맞아. 1945년 2월 10일 생, 닭띠에 물병자리, 이건희 회장과 생년월일이 똑같지. 작년 6월 28일에 간암 선고를 받았어. 항암 두번 받고 중환자실에서 187일 있었어. 직접 사인은 감기로 인한 폐렴 합병증. 우리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건 1988년 10월 2일 서울올림픽 폐막 날이야. 삼촌네 부부가 폐막식 보려고 부산에서 올라오는데 기차가 연착했대. 만취한 삼촌이 기차에 불 싸질러버린다고 난동을 부리다 경찰에 끌려간 거야. 그래서 그냥 우리집 텔레비전으로 봤어. 삼촌은 쿨쿨 자고 외숙모는 자꾸만 울었지.
이럴 때 내가 할 줄 아는 말은 많지 않다.
—좋은 데 가셨을 거야.
지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됐지만 가능성이 높진 않아. 누가 봐도 막 살았거든. 1990년 현충일, 음주운전하다 사람 치어서 감방도 갔다 왔잖아. 아무튼 엄마 아빠 오늘 새벽에 내려갔으니 내일이나 올 거야. 학원에다가는 나도 부산 간다고 해놨어.
무사히 학원을 하루 빠질 수 있는 핑계거리만 된다면, 돌아가신 분이 삼촌이든 외할아버지든 누구든 지혜에겐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우리는 버거킹 2층으로 올라갔다. 창밖이 제일 잘 보여 우리가 좋아하는 자리에 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자리는 이미 다른 일행이 차지하고 있었다. 네명의 남녀 대학생들이 쌍쌍이 마주 앉아 화기애애하게 와퍼를 먹는 중이었다.
—짜증나. 킁, 킁, 씨팔.
내 귀에도 들릴락 말락한 소리를, 조폭 막내조직원같이 생긴 남자가 찰떡같이 알아들었나 보다. 남자가 날카롭게 우리 쪽을 째려봤다.
—죄송해요. 그쪽한테 그런 게 아니거든요.
늘 내가 앵무새처럼 지껄이던 대사를 웬일로 지혜가 했다.
—그럼?
—얘가 아파서 그래요. 뚜렛 증후군에 음성 틱.
—뭐라고?
—틱 증후군 몰라요? 얘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입에서 아무 말이나 그냥 막 나오는 병이라고요.
남자가 오만상을 구기며 일어나려는 걸 옆의 여자가 붙잡았다.
—하지 마. 애들이잖아.
—조심들 해라!
남자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꼭 무서워서는 아니었지만 우리는 준모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 중간에서 준모가 멈춰섰다.
—에이, 씨팔……
그것은 틱이 아니었다. 욕이었다. 나는 알았다. 어떤 울음보다 깊은 준모의 한숨이었다.
—재수없어.
지혜가 뇌까렸다.
—돼지같이 생긴 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끝내주는 생각이 났다는 듯 지혜가 팥빙수를 쏘겠다고 했다. 그러나 얼음 가는 기계가 5분 전에 갑자기 고장나버렸다고 했다. 더워도 너무 더웠다. 얼음 가는 기계가 아니라 이 도시에 사는 그 누구라도 멀쩡한 정신으론 버티지 못할 여름이었다.
저녁 여섯시, 영양센터 오븐 속의 전기구이통닭처럼 진이 쪽 빠진 채 현관에 들어서자 낯선 남자 구두가 보였다. 검정색 끈으로 꽉 묶인, 앞코가 각진 검정 구두는 지루하도록 무난한 디자인이었고 막 새로 사 신은 듯 광이 났다. 거실 쪽에서 꽤나 어색한 웃음소리가 웅성웅성 들려왔다.
눈치는, 학습되는 것이다. 수영이나 자전거 타기의 원리와 같다. 한번 몸에 각인되고 나면 아무도 시키는 이 없어도 저절로 작동되는 시스템이었다. 나는 복도 끝에 선 채 잠시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곧 그가 고모의 맞선남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내 행동을 결정할 일만 남았다. 나는 살그머니 까치발을 들었다. 이대로 2층 계단을 올라 조용히 스며들면 어떻게 될까? 내 귀가를 아무도 모르거나, 모른 척 할 수 있을 것이다. 할머니는 굳이 마다할 리 없을 것이고, 할아버지 또한 적당히 묵인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앞으로 나아갔다. 거칠 것 없는 척, 그랬다. 교과서와 옷가지만을 넣은 여행용가방을 밀고 처음 이 집에 살러 오면서 했던 돌멩이 같은 다짐을 자꾸 바스러뜨리면 나중엔 가루조차 남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거실이 연극무대라면, 소파는 중심세트쯤 될 것 같았다. 오늘 무대의 주인공은 줄무늬 타이로 목을 졸라맨 남자였다.
—인사 드려라. 고모부 되실 분이야.
할머니의 말에 놀라서 혀를 깨물 뻔했다. 맞선 후의 반응이 ‘이상한 사람 같진 않은데’였던 걸로 보아 몇번 더 만나겠거니 예상은 했지만 한달도 안되어 일이 이렇게까지 진행되고 있는지는 몰랐다. 지구상엔 결혼한 부부가 수억만쌍은 될 테고 그들 각자에게는 다 나름대로 결혼에 이른 이유가 존재하겠지만,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결혼을 결심하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 일에 속할 터였다.
나는 흘낏 고모의 얼굴을 봤다. 고모는 콧등에 미세하게 주름을 잡으면서 눈빛으로 ‘알잖아’ 혹은 ‘알면서’라는 싸인을 보냈는데, 내가 파악한 건 그게 전부였다. 말하자면 고모는 할머니의 단정적 언사에 대한 본인의 진짜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남자는 생각보다 잘생긴 얼굴이었다. 아저씨치곤 흔치 않은 조붓한 달걀형 얼굴에 흰 피부여서 더 그렇게 보이는 것 같았다. 이마에서 코, 턱으로 떨어지는 선도 제법 섬세했다. 사법연수원생이 아니라 배우 지망생이라고 해도 그럭저럭 어울릴 것 같았다. 주연은 아니고 주연의 친구의 사촌형쯤으로 나오는 조연탤런트. 주로 주연배우 커플을 이간질하려다 들켜서 사라져버리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김태식입니다. 잘 부탁해요.
남자가 나에게 고개까지 숙여가면서 정중하게 인사했다. 나는 더 깊숙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왠지 기분이 나빠졌다.
—너도 거기 앉아라.
할아버지가 근엄하게 지시했다. 별 수 없이 나는 고모 옆자리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붙였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고모 커플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는 구도였는데 내가 낌으로써 뭔가 미묘하게 균형이 깨져버렸다. 엄마가 즐겨 보던 일일연속극에서 종종 나오던 광경이었으므로 겨드랑이가 간질댈 만큼 어색하지는 않았다. 사실 엄마는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저녁 여덟시 반 무렵만 되면 습관적으로 리모컨을 눌렀던 이유는 아마도 마음껏 조롱을 퍼붓기 위해서였으리라. 남들 눈엔 늘 웃고 있는 여자로 보이지만, 속으론 늘 짓눌려 있던 엄마에게는 대놓고 비웃을 객관적 대상이 필요했다. 엄마가 지금 이 무대의 관객이라면 뭐라고 할까.
대화는 주로 할아버지와 김태식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할아버지가 큰 관심은 없다는 듯 툭 한마디를 던지면 그가 일단 어른의 의견에 대해 무조건적 수긍을 한 뒤에 성실하고 겸손하게 부연하는 식이었다. 말투가 느리고 조금 어눌한 듯하기도 했는데 잘 들어보면 경상도 사투리의 억양을 숨기고 표준어로 발음하려는 노력의 일환임을 알 수 있었다. 안 그런 척하면서도 은근히 현란한 말빨이 보통이 아니었다. 한참을 보고 있자니 그가 결혼하고 싶어하는 상대가 고모인지 할아버지인지 헛갈릴 지경이었다. 할아버지 또한 만만할 리 없었다. 남자가 검사 지망생이라는, 나조차도 알고 있는 사실을 아예 모르는 척, 그에 관련된 화제는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식탁에서는 고모가 내 앞에 앉았다. 김태식의 자리는 고모의 오른쪽 옆이었다. 정면에서 보니 그는 잘생기기는 했으나 어딘지 촌스러움이 묻어나는 인상이었다. 이대팔 가르마의 짧은 헤어스타일은 북한 축구선수 같았다. 지금껏 고모 주위에 있던 남자들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확연했다. 세련되지 못한 스타일을 죄악으로 여겨온 그녀의 심미안을 익히 아는 처지로서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멀리 놓인 오이소박이를 집기 위해 젓가락을 뻗었을 때 깜짝 놀랐다. 그 해사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짧고 뭉툭한 손가락과 두꺼비 같은 손등의 형상이라니. 고모는 일주일에 두번씩 꼭 전문가의 손질을 받는, 피아니스트의 것이라 해도 믿을 만한 우아하고 아름다운 손을 가지고 있었다. 닮은 데라곤 없는 두개의 손이 얽히고설키는 장면이 상상되지 않았다. 두 남녀의 눈빛이 허공에서 자연스럽게 스쳤다 풀어졌다 다시 휘감기는 걸 바로 앞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나는 자꾸 그렇게 믿고만 싶었다.
이상한 건 고모였다. 그녀는 여태껏 내가 안다고 생각해온 그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눈썹과 광대, 팔자주름 같은 미세한 얼굴근육을 평소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조작하고 있었다. 동작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렇게나 시원시원하게 사지를 뻗고 뻗대는 것이 그녀의 특징이건만 지금 고모는 전통생활관에 입소한 미스코리아 지망생처럼 조심스럽고 부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는 중이었다.
—어때?
양주 몇잔을 받아먹고 눈동자까지 불콰하게 달아오른 김태식이 기사아저씨가 모는 그랜저 뒷자리에 실려 사라진 뒤, 고모가 물어왔다.
—뭘 어때.
나는 당연히 남자에 대한 질문일 줄 알았다. ‘글쎄 별론데’라는 답이 적절할지 아니면 ‘어차피 하지도 않을 거면서 왜’가 맞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고모가 뒤통수를 쳤다.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하는 거 같아?
그랬다. 고모는 오로지 할아버지의 평가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내 판단이 정확했다. 이 결혼의 주체는 역시 할아버지였던 것이다. 부모, 특히 할아버지의 말씀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도리질을 해온 청개구리 고모의 이러한 극적 변화를 어떻게 풀이해야 한단 말인가.
—귀엽지?
고모가 다시 물었다. 화장기 지워진 그녀의 아랫입술 한가운데 루주 찌꺼기인지 고춧가루인지 모를 붉은 가루가 두어점 묻어 반짝였다. 나는 검지를 뻗어 그것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크게 대답했다.
—응.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인지, 두번째 질문에 대한 답인지 확인하지도 않고서 고모는 씩 웃었다.
—흐흐. 고마워.
—고모, 그 아저씨랑 할 거야, 결혼?
고모가 손바닥으로 내 머리통을 쓱쓱 문질렀다.
—그러니까 데려왔지. 너 모르니? 내가 남자를 집에 데리고 온 건 오늘이 처음이야.
사랑에 빠진다는 건 기억중추에 치명적 결함이 생긴다는 뜻인가 보다. 내가 몇달 동안 정면으로 목격한 고모의 남자만 해도 세명이나 되었다. 두 남자는 각각 고모를 집 앞에 태워다 주는 장면을 보았고, 한 남자는 고모를 태워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 장국영을 빼닮았던 그 남자는 빨간색 프라이드를 몰았다. 그가 기다리는 걸 알면서도 고모는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일어났다. 기지개를 켜면서 아직 그 차가 기다리고 있는지 슬쩍 보고 오라고 일렀다.
—쪽팔려. 이 나이에 내가 저 깍두기 같은 차 옆자리에 타고 다녀야겠니.
—그럼 왜 만나기로 했어?
—미안해서 어떻게 거절하니.
거절하는 것은 미안하고, 지각하는 것은 미안해하지 않는 자세. 오직 그녀만의 황당무계하고 순수한 윤리감각이었다. 나는 그 귀여운 뻔뻔함이 좋았다.
—고모 금방 나올 거래요.
—아, 고맙습니다.
남자의 표정이 환하게 변했다. 나는 그 남자가 사랑에 빠졌다는 걸 알았다. 사랑에 빠진다는 건 정말 뭘까? 한 인간의 기억중추에 치명적인 이상을 불러일으킬뿐더러, 세계관을 극단적으로 바꾸고도 본인만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이상한 물질이 분비되는 것만은 분명했다.
—아니 내 말은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온 게 처음이란 말이야. 정식으로 인사시킨 것도 처음이고.
고모는 진심으로 이 사랑에 ‘처음’이라는 눈부신 수식어마저 부여하고 싶은 걸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고모는 맞선에서 만난 그 잘생기고 촌스러운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나한테 결혼하자고 한 남자도 이 사람이 처음이야.
‘그런데 처음을 너무 믿지는 마.’ 우리 엄마가 누누이 하던 조언을 현재의 고모에게 건네는 것은 적절치 않을 것이다. ‘첫끗발이 개끗발이야.’ 아니, 그 말도 옳지 않다. 엄마와 아빠는 열여덟살에 만난 첫사랑이었고,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팔이 하나 끊어지고 다리가 하나 잘려도 좋을 정도로’ 사랑했고, 스무살에는 도망쳐 같이 살았고, 스물여덟살에는 종종 팔과 다리를 물어뜯으며 싸웠고, 서른여덟살에는 남남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빨 자국은 좀 남았을지언정 그들의 팔과 다리는 여전히 각각 두개씩이다.
—식장에서 남우세스럽진 않겠더라.
김태식에 대한 할머니의 촌평이었다. 평소 타인에 대한 평가가 박하기로 유명한 할머니로서는 엄청나게 고무적인 발언이었다. 할아버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승낙의 의미였다.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할머니는 무언가를 자꾸 사들이기 시작했다. 한번 외출했다 오면 그뒤로 김기사 아저씨가 양손 가득 백화점 쇼핑백을 들고 따라 들어왔고, 초인종이 울리면 열에 아홉은 각종 업체의 종이상자가 배달되었다.
소나기가 퍼붓고 더위가 한풀 꺾인 날 아침, 학교에 가려는 나를 할머니가 불러 세웠다.
—오늘은 하루 쉬어라.
어디 갈 데가 있다고 했다.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고모는 깨우지 않았다. 할머니와 단 둘이 하는 외출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차는 남산터널을 지나 시내를 빙빙 돌아 어딘지 모를 빌딩의 주차장에 멈추었다.
—내려라.
할머니가 내게 하는 말의 팔십퍼센트 가량은 해라체로 끝났다. 할머니를 따라 들어간 곳은 오피스텔이었다. 현관문을 열면 넓은 대기실이 나오고 그 안쪽으로 상담실이 있는 구조였다. 대기실 의자는 먼저 온 사람들로 앉을 틈 없이 빼곡했다. 다들 지루했는지 신참자인 할머니와 나를 호기심어린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할머니가 입고 온 쎈 존 투피스와 에르메스 악어백은 이곳과 영 어울리지 않았다.
—여기 누구 관리자 없어요?
비서처럼 보이는 젊은 남자가 나왔다.
—선생님 뵈러 오셨습니까? 여기 번호표 받고 기다리십시오.
—나 예약했는데.
—여기 다 예약하고 오신 분들입니다.
—여의도 서의원댁 사모님이 전화하셨을 텐데.
남자가 할머니의 말을 잘랐다.
—오늘 선생님 기도가 좀 오래 걸리셔서 전체적으로 밀렸습니다.
어쩔 수 없이 할머니는 소파 아래 마룻바닥에 엉덩이를 붙여야 했다. 나도 그 옆에 가만히 쪼그려앉았다.
—딸내미 진학 때문에 오셨나?
꽃분홍색 블라우스를 입은 뚱뚱한 중년여자가 슬쩍 말을 걸어왔다. 대기실의 사람들이 일제히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에요.
할머니의 짧고 쌀쌀맞은 대답이 성에 안 차는지 아줌마는 호기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막낸가 보다. 엄마하고 똑 닮았구먼.
—어디가 닮았어요?
할머니가 작고 사납게 대꾸했다. 기분 나쁘기로 따지면 내 쪽이 훨씬 더할 텐데, 나는 못 들은 척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할머니에게 면박을 당한 꽃분홍 아줌마는 건너편에 앉은 다른 노파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남편 사업이 하도 안 풀려서 여쭤보러 왔다, 그래도 요즘 장안에서 여기가 제일 용하다지 않느냐, 우리 친척 중에 누구도 여기 선생님이 일러주신 대로 해서 십년 묵은 땅 문제를 해결했다더라, 하는 내용이었다. 할머니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턱을 똑바로 들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있었는데, 그들과 섞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할머니가 여기 온 이유는 짐작할 만했다. 고모의 결혼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나를 왜 데리고 왔는지는 짐작하기 힘들었다. 우리 차례가 왔다. ‘선생님’은 아주 조그맣고 아주 예쁜 언니였다. 무심코 길을 걷다 뒤를 돌아볼 정도로 단아한 미모의 젊은 여자가 새하얀 모시 치마저고리를 입고 방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사진 한장을 내밀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사각모를 쓴 김태식의 대학 졸업사진이었다.
—쇠붙이군요.
여자가 한마디 툭 던졌다.
—네?
여자는 대답 없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한겨울이에요. 아주 춥고 눈이 많이 내리네요. 바다, 넓고 차가운 바다가 있어요. 망망대해…… 맞아요, 태평양. 그 한가운데 있어요. 이 사람은 바다를 떠도는 커다란 배예요.
—배? 보물선인가?
할머니는 기대에 부풀었다.
—아니오.
여자가 단호하게 부정했다.
—잠수함이에요.
—잠수함이오? 그게 무슨 뜻……
—말 그대로예요. 이 사람은 잠수함 같은 사람이라고요.
고모에 대해서는, 팔랑팔랑 고운 날개를 가진 영혼이라고 했다.
—아, 보여요. 나비네요. 이분은.
잠수함 위에 나비가 앉은 형국이니, 이 조합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할머니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잘살까요?
—둘이 하겠다고 하나요?
—그러기는 하는데.
—그럼 살겠죠. 세상을 살리는 합은 아니지만, 둘은 살겠죠. 그러면 된 거예요.
여자가 말했다. 이상했다. 그 순간 나는 이 여자가 완벽한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저 불현듯 들이닥친 미묘한 예감일 뿐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경험상 내 예감이란 그다지 믿을 만한 게 못 되었다. 나의 예감은 언제나 가장 나쁜 쪽을 향해 극단적으로 쏠려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일고여덟살 무렵 엘리베이터에 갇혔었다. 7층짜리 상가의 피아노학원엘 다녔는데 어느날 내려오다가 승강기가 돌연 멈춰버린 것이다. 덜컥, 바닥이 어딘가에 걸리는 둔탁한 쇳소리가 나고 곧바로 실내등이 꺼졌다. 캄캄해졌다. 벽을 더듬어 비상호출 버튼을 눌렀지만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같이 탔던 친구가 울음을 터뜨렸다. 도움을 간절히 희구하는 요란한 눈물이었다. 나는 울지 않았다. 울음은커녕 목울대에서는 희미한 신음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내가 죽을 거라고 확신했다. 강렬한 공포 앞에는 오직 침묵만이 놓인다는 걸 알았다. 나는 겨우 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사랑해, 우리 세미.
엄마는 나만 보면 습관적으로 말하곤 했다.
—걱정 마, 우리 세미. 엄마 아빠가 지켜주면 하나도 안 무서워.
잠자리에서 전등을 끄지 말라고 조르는 나를 달래며 아빠는 말하곤 했다.
—항상 지켜줄게.
아빠와 엄마는 번갈아가며 내 귓가에 숨결을 불어넣곤 했다. 그러나 부모의 의지 따위와는 상관없이, 공중에 위태롭게 매달린 이 작은 상자는 곧 바닥으로 추락해버릴 것이었다. 부모는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를 것이었다. 말로 하는 다짐에는 허약한 자기위로 말곤 아무 힘도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최악의 찰나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잠시 후, 또다시 덜커덕거리는 소리가 나고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제 그랬느냐는 듯 엘리베이터는 우리를 사뿐히 지상에 내려놓았다.
할머니는 멍한 표정을 서둘러 수습하고는 나를 가리켰다.
—그러면 얘는. 얘는 어때요?
누군가 내 눈동자를 이토록 빤히 들여다보는 건 너무도 오랜만이었다. 나는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녀의 눈길을 받았다. 이윽고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이는 안 봅니다. 안 보여요.
방을 나오자마자 할머니가 투덜거렸다.
—아이고. 이건 무슨 절간 선문답도 아니고.
신발을 신고 있을 때 비서가 나를 불렀다.
—잠깐 들어오시라는데요. 아니, 이 학생만.
여자는 내가 방문을 여는 기척을 듣고서 감았던 눈을 떴다. 나는 그 앞에 오도카니 앉았다. 여자의 눈동자 속에 내가 다시 말갛게 담겼다. 두렵지는 않았다.
—나를 잘 봐요.
두려울 게 없었다.
—부탁할게요. 마음에 남기지 말아요. 어떤 일이 있어도.
개울가의 어린 올챙이를 피해 걷는 사람처럼 여자는 조심조심 말하고 있었다.
—사무쳐도, 아파도, 다 흘려보내요.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다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방을 나서는데 눈물이 서서히 차올랐다.
소나기가 몇번 내리더니, 영원할 것만 같던 이 여름의 이상고온이 점차 예년 기운을 되찾고 있다는 예보가 들려왔다. 2학기 개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방학 동안 별일은 없었다. 유념할 만한 사건이라면 고모가 나이트를 끊었다는 것, 얼마나 갈 것이냐를 놓고 고모 친구들끼리 내기를 걸었다는 것 정도였다. 나에게도 베팅의 기회가 주어졌다면, ‘당분간’을 지나쳐 ‘영원히’에 오천원쯤 걸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엄마가 알려준 전화번호가 계속 연결되지 않아서 외삼촌에게 전화를 걸었던 일이다. 외삼촌은 엄마가 급히 이사를 했다며 새 번호를 알려주었다. 나는 공중전화카드 만원짜리를 준비했다. 거기 시간으로 밤 열한시에 전화를 걸었는데 웬 남자가 받았다. 졸린 목소리로 ‘Hello’라고 했다. 자다 깬 건지, 타고난 저음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원래 영어과목을 제일 못했다. 가만히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공중전화부스는 열기로 절절 끓었다.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집에 돌아와 아주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그런 사소한 얘기들이 일기장에 기록할 만한 전부였다. 물론 일기 같은 것은 쓰지 않았지만.
지혜와는 몇번 만나 오락실도 가고, 키아누 리브스가 나오는 영화도 보고, 애플하우스 떡볶이도 먹었다. 준모와는 쉬 만나지지가 않았다. 준모네 집에 전화를 하면, 어머니가 받아서 ‘준모 나갔는데’라고만 하셨다. 지혜한테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준모가 전화통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우리한테는 다르다고 생각해왔다.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있나 싶기도 했는데 밤마다 피씨통신에 접속해 있는 걸 보면 그건 아닌가 보았다. 그는 여전히 플라자나 토론방에 죽치고 있었다. 쪽지를 보내면 답장은 꼬박꼬박 왔다.
(semiupda : 요즘 바빠?)
(adiosamigo : 응. 좀 그렇다. 과외도 많고.)
(semiupda : 그래도 우리 얼굴 좀 봐. 보고 싶어. ‘라이온 킹’ 보러 갈까? 되게 재미있다는데.)
(adiosamigo : 나중에 보자. 세미야. 비디오로 나오면.)
준모가 죽어도 영화관에 가지 않는다는 걸 어쩌자고 깜빡한 것일까. 그렇다고 미안해,라고 타이핑하면 더 미안해질 일이었다. 낭만호랑님은 내가 너무 순수하다고 했다.
romantiger : 더 살아보면 알게 돼요. 그런 일로 조바심내고 안절부절 못하고 그럴 때가 좋았다는 걸.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 사이에는 그런 거 없어요. 인간관계가 얼마나 살벌한데요. 사회의 축소판이랄까. 내가 밟지 않으면 밟히니까.
semiupda : 밟고 밟히면 친구가 아니지 않나요?
romantiger : 아니, 세미님은 너무 순수하다니까요. 친구라는 이름에다 그렇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어요. 필요에 따라 뭉쳤다 흩어졌다 그게 현대사회의 친구예요. 내가 중심인 거죠. 내가 잘나가면 친구도 따라붙고, 내가 별볼일 없으면 다 떨어져나가니까.
semiupda : 아, 네.......................
romantiger : 참 세미님, 그래서 라이온 킹 아직 못 봤어요?
semiupda : 네.
romantiger : 그럼 내가 보여줄까요?^^ 낼 모레면 개학인데 영화 보고 맛있는 거 사줄게요.
지혜는 대뜸, ‘변태일 거야’라고 했다.
—그래서 만나기로 했어? 아니지?
—응, 아니야.
—절대 안돼. 교복 좋아하는 로리콤일거야.
—그게 뭐야?
—순진하기는. 로리타 콤플렉스의 준말이잖아. 로리콤. 미성숙한 소녀에 대한 성적 선호와 집착을 가리키는 말. 블라지미르 나보꼬프 소설, 1955년, 프랑스.
—무슨 내용인데?
—그건 나도 모르지.
—그래봐야 우리랑 몇살 차이 안 나는데.
—그 남자? 야, 됐거든. 앞에 2자 붙으면 할아버지야.
낭만호랑님의 제안에 응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여고생과 한번 만나 어떻게 해보려는 변태일까봐서는 아니었다. 나에게 실망할까봐, 그래서였다. 보통남자들의 상상 속에 들어 있을 법한, 하이틴영화나 청소년드라마에 나오는 열일곱살 청순미 날리는 소녀와 나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나는 콤플렉스 덩어리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장 큰 콤플렉스는 유난히 발달한 코의 모공이었다. 검은깨를 뿌려놓은 것 같은 콧날을 지우개로 문질러보기도 했고, 고모의 샤넬 각질제거 스크럽을 사흘에 한번씩 써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세로에 비해 가로 길이가 너무 긴 눈도 싫었다. 눈과 눈 사이도 너무 멀어서 거울을 보다가 몽고주름 수술을 하고 싶다는 느닷없는 열망에 사로잡히곤 했다. 누가 봐도 예쁘다고 하기 어려운 얼굴에 여자 하키선수처럼 두꺼운 종아리. 나는 그냥 까맣고 퉁퉁한, 작은 사람에 불과했다. 애도 아니고, 애가 아니라고 하기도 어려운, 개학날 학교에 가지 않아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보잘것없는 그냥 사람.
온라인에서 대등한 관계로 만나던 대학생과 오프라인에서 만나고 싶지 않았다. 밖에서 받은 모멸감을 더 먼 바깥으로 던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성격이 못 되었다. 안으로, 안으로, 점점 더 깊고 은밀하게 못난이가 되어갔다.
고모의 결혼식은 개천절로 잡혔다. 만남을 주선했던 송여사가 아예 날까지 받아왔다.
—더할 나위 없다네요. 궁합도.
—그래?
할머니는 짐짓 모르는 척했다. 잠수함과 나비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비밀의 공모자로서 나는 쓱 자리를 피했다. 양가 부모끼리 상견례를 하기로 했다는 날, 이옷 저옷을 입어보며 수선을 피우는 고모와 달리 할머니는 느릿느릿 준비를 했다. 보다 못한 순천댁이 ‘그러다 늦으세요’라고 하자, ‘늦으면 기다리라지’라고 대답해서, 나와 순천댁 아줌마가 놀란 눈빛을 교환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두시간여 만에 상견례를 마치고 돌아왔다. 오며 가며 길에서 보냈을 시간을 고려하면 아주 짧은 회동이었다. 귀가 시의 분위기에 비하면 그래도 나갈 때는 화기애애한 편이었다. 할머니는 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안방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집이 왜 이리 춥나. 소중한 전기를 이렇게들 낭비하다니. 쯔쯔.
할아버지는 별안간 어울리지 않는 에너지 홍보대사로 빙의하여 공연히 화를 냈다. 기온은 평소와 다름없는 25.5도였다. 고모는 화장을 지우지도 않고 내 침대에 올라와 다리를 쭉 뻗었다.
—별일? 아냐. 특별한 일은 없었고.
말을 아끼다니, 고모는 점점 고모답지 않아져갔다. 나는 고모의 약혼자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유보하고자 애썼다. 고작 인상 따위로 타인을 판단하는 일은 옳지 않으니까. 물론 첫인상으로 타인을 판단하는 일은 충분하지 않다. 그래도 네다섯번째쯤 되면 어느정도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동안의 경험치를 합치고 나누어 대략적인 평균을 내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마디는 할 수 있었는데, 김태식은 적어도 일관성은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나에 대한 태도 역시 쭉 한가지를 견지했다. 형식적으로는 깍듯했으며, 실질적으로는 무관심했다. 옆에서야 몰라도, 당사자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게 바로 무관심이었다. 그에게 나는, 그녀가 아끼는 루이뷔똥 몽소 핸드백이나 그녀 침대에 십년째 놓여 있는 미키마우스 인형 등과 동일한 선상에 있는 ‘아영씨 조카’였다. 그는 냉철한 판단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었고, 그것이 그의 냉철한 판단이 내린 결론이었다.
상견례에서 그쪽 부모의 경제적, 문화적 수준에 실망하고 온 할머니는 이후 고모더러 “이 결혼 꼭 할 거니?”를 하루 다섯번 꼴로 물어보았다. 고모는 천진난만한 척 ‘네’를 하루 다섯번씩 외쳐야 했다. 사실 결혼을 재고하고 싶어도, 그럴 만한 시간도 없어 보였다. 그들은 이미 쳇바퀴를 달리는 다람쥐 두마리 같았다. 고모와 할머니는 몹시 바빴다. 그들은 사고, 사고, 또 샀다.
그쪽 집에서 아름다운 꽃봉투에 담아보낸 편지에는 ‘댁의 따님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은 낭만적인 내용은 들어 있지 않았다. 워드프로세서로 작성된 그것은, 예단 목록이었다. ‘큰외삼촌 은수저 다섯벌’ ‘작은고모 차렵이불 한채’ 하는 식이었다. 그밖에도 ‘시어머니 밍크코트-짧은 것’이라고 썼다가 가위표를 치고 ‘긴 것’이라고 고친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할머니가 혀를 찼다.
—아들 장사해서 아주 온 친척이 팔자 고치려는가 보다.
—다 이렇게 해.
모기만한 소리로 고모가 중얼거렸다.
—미친년. 지가 팔려가는 것도 몰라.
—왜 내가 팔려가는 거야? 돈은 우리가 내는걸.
고모가 눈을 크게 뜨고 항의했다.
—잘났다, 이년아. 우리는 무슨. 다 내가 내는 거잖아.
말은 그래도 할머니는 갖은 정성을 다했다. 그 눈코 뜰 새 없는 상황에서도 직접 예단을 준비하러 다녔다. 김태식의 큰외삼촌 댁에는 은수저 다섯벌이, 작은고모 댁에는 차렵이불 세트가 착착 배달되었다. 시어머니에게는 길고 짧은 최고급 밍크코트가 각각 하나씩 전달되었다. 어떤 경우든 할머니는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최상품을 고르는 센스를 잊지 않았다. 할머니의 표현에 의하면 그건 ‘자존심’이라고 했다. 태풍으로 마비된 도시에 긴급 투입된 구호대장처럼 그녀는 신속하게 판단하고 빠르게 행동으로 옮겼다. 할머니의 지휘 아래 결혼 준비는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어갔고, 결혼식 날짜도 하루하루 가까워져갔다.
고모가 나를 백화점으로 데려갔다. 청담동 갤러리아였다. 나는 백화점을 좋아했다. 하긴 누구나 백화점을 좋아한다. 나에게 백화점이라는 공간은 유치원보다 더 친숙했다. 아마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들락거렸을 것이다. 집에서 한 정거장도 못 되는 거리에 반포 뉴코아백화점이 있었으니까. 어쩌면 ‘백화점’이란 단어는 나와 친구들에게 반포 뉴코아를 부르는 또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뉴코아는 흰색 외관에 빨간 리본 모양의 그림을 크게 그려넣어 건물 전체가 마치 대형 선물상자처럼 보였다.
—야, 뉴코아 무너졌대.
—뭐? 어쩌다가?
—리본 풀려서.
그러니까, 그걸 농담이라고 키득거리던 시간들이 있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는 주로 지하의 스낵코너를 분식집 대신 이용했다. 떡볶이 아줌마는 우리가 가면 항상 쫄면사리를 넉넉히 담아주었고 접시 끄트머리에 순대 몇점을 슬그머니 올려놔주었다. 칼국수 아줌마는 나를 특히 예뻐했는데 요즘 여자애들답지 않게 차분하게 면발을 꼭꼭 씹어먹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 원래 뜨거운 걸 잘 못 먹어서 그래요.
—그래? 그래도 먹는 게 소담스러워서 예뻐. 우리 딸 닮아서.
아줌마의 딸은 오래전에 미국 유학을 떠났는데 거기서 만난 브라질 남자와 결혼했단다. 얼굴을 본 지 몇해가 지났는지도 까먹었다 했다.
—거기가 좀 멀어야지.
그때는 아줌마가 거짓말을 한다는 걸 몰랐다. 부모자식간이라면 서로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인지는 도저히 까먹을 수 없는 일이다.
비싼 브랜드만 모아놓아 아무나 쉽게 들락거릴 수 없는 곳이라는 선입견 탓일까. 갤러리아백화점에는 전에 와본 적이 없었다. 정문에 들어서면서부터 왠지 기가 죽었다. 모두들 몸에 딱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한데 나만 혼자 겉도는 야릇한 느낌이었다. 고모는 내 손을 끌고는 거칠 것 없는 걸음으로 속옷 매장을 향해 걸어갔다. 살굿빛과 아이보리, 민트 색의 네글리제를 펴놓고 갈등하더니 결국 세벌 모두를 샀다.
—이렇게 간단한걸.
그녀가 혓바닥을 쏙 내밀었다. 백태가 끼지 않은 싱싱하고 건강한 혓바닥이었다. 고모는 엄연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자주 내가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애들 입을 만한 거 좀 보여주세요.
판매원이 이런 저런 브래지어와 팬티들을 꺼내왔다.
—어머, 다 괜찮다.
고모가 반색을 했다.
—이거 다 주세요. 얘 사이즈로.
반포 집에서 허둥허둥 짐을 싸 나오면서 대충 집어넣어온 속옷들을 번갈아 빨아 입으며 지내고 있었다. 불편하지는 않았다. 속옷 같은 데에 신경을 쓰고 살 만한 정신적 여력이 없었다.
—세미야, 잊지 마. 여자는 겉옷보다 속옷을 더 잘 챙겨입어야 해.
고모가 제법 의젓하게 말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야. 남자가 아니고. 어머머, 미쳤나봐. 내가 애한테 뭐라는 거니.
우리는 킥킥 웃었다.
—세미야, 너 모르지? 너 놔두고 가는 거에 내가 얼마나 마음 쓰이는지.
부모는 항상 바빴다. 아빠가 늘 이런저런 즐길 거리를 찾아다니느라 바빴다면, 엄마는 그런 아빠가 낸 손실분을 메우고 어떻게든 세 식구 건사하려고 점점 더 악착같이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엄마를 사기 혐의로 고발한 피해자들은 다르게 받아들이겠지만 말이다. 나는 고모가 이 집을 떠난다는 것을 쓸쓸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배고픈 저녁, 놀이터 그네에 앉아 하염없이 서쪽 하늘을 쳐다보는 일곱살 꼬마의 마음으로.
—나는 괜찮아. 고모.
판매원이 쇼핑백을 내밀었다. 백화점은 표정을 추스르기에도 진심을 숨기기에도 적당한 장소다. 나는 갤러리아백화점의 쇼핑백 손잡이를 한쪽 손목에 걸고, 다른 쪽으로 고모의 팔짱을 꼭 꼈다.
모든 해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기억된다. 공통의 합의가 쉽게 이루어지는 해도 있다. 1979년은 대통령이 총 맞아 죽은 해, 1988년은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해라는 명명에 보통 한국인이라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어떤 해는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1994년.
내 친구 지혜라면 이런 방식으로 말하리라.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죽었다. 그해 여름은 기상청이 문을 연 이래 가장 높은 기온을 기록했다. 대구 밀양 39.4도, 서울 38.4도. 10월 21일에는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승용차 5대와 버스 1대가 추락했다. 사망자 32명, 부상자 17명. 5월에는 거액의 유산을 노려 부모를 살해한 24세 청년 박한상이 체포되었고, 10월에는 사회에 대한 증오심으로 무고한 시민을 살해한 지존파 사건, 훔친 택시로 전국을 돌며 부녀자 6명을 성폭행하고 2명을 살해한 온보현 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다. 온보현은 제 나이만큼 사람을 죽이려 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서른여덟살이었고, 일기에는 ‘36명 남음’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해 나는 열입곱살이었다. 3월 2일, B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학기 중간고사 성적은 반에서 20등, 전교 189등. 새로운 친구는 하나도 사귀지 못했다. 사기혐의로 수배되어 LA로 도망친 엄마를 한번도 만나지 못했고, 할아버지의 힘으로 수배는 면했지만 유배 가듯 마닐라로 떠난 아빠와는 한번 만났다. 고모 윤아영은 7월 10일 맞선을 본 사법연수원생 김태식과 10월 3일 삼성동 공항터미널 예식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웬만하면 넌 집에 있는 게 어떠니.
결혼식 전날, 할머니가 직접적으로 권유했다.
—뭐야. 세미 안 가면 나도 안 가.
웬만하면 나도 할머니 의견을 존중해주고 싶었는데 고모가 너무도 강하게 화를 내는 바람에 중간에서 어쩔 줄 모르게 되었다. 할머니가 짧게 한숨을 쉬더니 ‘그럼 교복 입지 말고 고모 옷 중에 얌전한 거 골라 입어라’라고 한발 물러섰다. 내 마음은 이중적이었다. 웨딩드레스 입은 고모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바람과, 아직도 나의 아빠가 노총각인 줄 아는 다수의 친척관계자들 앞에 그림자 한조각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맞섰다. 구태여 교복을 입지 말라고 주문한 할머니의 의중에도 남의 눈에 도드라져 보이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어 있을 터였다.
나는 결혼식장에 혼자 갔고, 하객석 중간에 따로 앉았다. 가족사진을 찍을 때도 나가지 않았다. 일부러 다른 곳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을 때 눈을 비비지 않을 수 없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옆에 서서 사진을 찍고 있는 남자는 아빠였다. 윤이 좌르르 흐르는 감색 양복을 멀쑥하게 빼입은 아빠가 결혼식장에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빠는 혼자 온 게 아니었다. 서른살쯤 된 여자를 데리고 왔다. 엄마보다 예쁘지도 않고 키도 작고 파란색 치마에 갈색 구두를 신은 걸로 보아 패션감각도 형편없었다. 먼 친척이라 추정되는 노인들에게 아빠와 그 여자가 공손히 인사하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조용히 식장을 빠져나왔다.
—그러게 오지 말라니까.
할머니가 나중에 말했다. 고모는 11월 초에 임신 사실을 알려왔다. 초겨울의 나뭇잎들은 한순간에 바스러졌다. 2학기 기말고사 성적은 반에서 15등, 전교 145등이었다. 성적이 올랐다는 칭찬은 아무도 해주지 않았다.
1995년이 시작됐을 때 나는 막 열여덟살이 되었고 그해를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게 될지 알지 못했다.
1월 17일, 일본 코오베 남부에서 리히터 규모 7.2의 강진이 있었다. 5천명이 죽고 2만 7천여명이 다쳤다. 2월 26일, 준모가 집 앞으로 찾아왔다. 입김은 나오지 않았으나 곧 봄이 올 거라 기대하기엔 지나치게 이른 밤이었다. 그는 악마가 침범하기 전의 상태였고, 학교에 자퇴서를 냈다고 또박또박 말했다.
—일단은 집에서 공부해서 검정고시를 볼 거야. 안 되면 유학을 갈 거고.
—유학? 미국?
—아니. 아마도 내가 전혀 모르는 언어를 사용하는 곳에.
—………
—내가 한국말로 욕을 해도 무슨 뜻인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그는 학교를 그만두면 앞으로 자주 보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할 말이 남은 듯 오래 머뭇거리다 돌아갔다. 3월 20일, 토오꾜오 지하철에서 독가스 사린을 살포하는 테러 사건이 벌어졌다. 신흥 종교단체 옴진리교의 소행이었다. 그리고 3월 25일, 생각지도 못했던 한 사람이 내 인생에 들어왔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