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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혼돈의 신은 검은 하늘에

고형렬 시집 『유리체를 통과하다』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타원형 감옥의 외부: 『목화밭 엽기전』과 그 맥락이 있음.

netka@hanmail.net

 

 

2031‘애채’라는 말을 고형렬(高炯烈)에게서 배웠다. 사전에는 ‘나뭇가지에 새로 돋은 가지’라고 풀이되어 있다. 그런데 이 말의 혈관 속 “DNA”와 “미토콘드리아” “데옥시리보 핵산의/나선형 사다리 끝”으로 음악이 흐른다. 그 음악은 이를테면 혼돈의 음악이다. 이 혼돈은 단순한 무질서 이상의 함의를 품는다. 그것은 질서와 무질서가 대립하기 이전의 혼돈, 말하자면 태초의 혼돈이다. “그곳은 무()이다/죽음의 나뭇가지들만 죽음의 그늘 밑에서 흔들린다/메타포도 그 흔한 일상어도, 미소도 은약도 장난도 유머도”(「문 닫히는 소리, 쾅」) 없는 태허(太虛)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의 눈으로 질서화한 혼돈 이전의 눈먼 혼돈”(박형준)이라는 추천사의 한 구절이야말로 이 시집을 이해하는 기초다. 모종의 우주관과 인간관을 응축하고 있는 ‘애체’는 그러므로 “죽음의 나뭇가지”에서 돋아나는 새로운 혼돈의 사상 또는 그로부터 파생하는 새 세상의 기미를 가리키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눈먼 혼돈”의 음악은 “안대를 감은 한 광상(狂想)의 추상화가”(「제국 도시의 밤」) 또는 “시의 불가지론을 믿는”(「시인의 말」) 시인으로서는 직접적인 제시나 선명한 형상화가 불가능한 무엇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언어에 속도를 내면서 시의 강박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시인은 마침내 통상적 형상화의 궤도를 벗어나 자신이 “무사(無事)의 우둔”(앞의 글)이라고 부른 능동적 무지와 무위(無爲)의 도정에 오른다. “풀잎만 남고 모든 것은 텅 비워졌다/흔들림 속에 형해는 간곳없다”(「하하하, 바보 달밤」)와 같은 시행은 그래서 가능해진다. 풀의 의미나 형상은 지우고 그 흔들림만 남겨놓기. 어떠한 작위에도 침범당해보지 않은, 그러니까 “꿈을 음송해줄 언어가 없는 검은 하늘”(「사슴의 뿔을 자르다 2」)에 이르고자 하는 간단없는 실존적 기투가 이 시집의 핵심이다.

“검은 하늘”은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는 뜻의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부터 유래했을 것이다. 이 “눈먼 혼돈”의 ‘검을 현()’은 방위로 치면 북쪽을 가리키는 것이어서 “북방 저 안쪽, 이제 다 왔다/오래된 무서운 통화”(「통화(通化) 시편」) 같은 시행을 낳고 사상사적으로는 위진(魏晉)시대의 현학(玄學), 그러니까 시인이 오랫동안 천착해온 장자(莊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오래된 무서운” 저 북방의 검은 하늘은 모든 종류의 인간적 작위나 구별 짓기가 무화된 심연이자 일체의 새로움이 발아하는 전위다. 이 시집의 수록작 108편(이들은 모두가 신작이다)과는 별개로 발표된 가작 「잎파랑치의 절규」에도 “여기는, 그러니까 나는, 심연과 전위의 중간”이라는 의미심장한 대목이 등장한다. 도시문명 또는 그 파산의 문제를 우주적 차원에서 사유하는 이 시집은 “심연과 전위의 중간” 또는 “24시 밖의 고도”(「인간적인, 전기의 문제」)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확보함으로써 시와 시인 자신을 혼돈의 체현자로 만든다. 문명과 질서의 자리에서 저 혼돈의 세계를 논증하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 혼돈을 자처함으로써 저 너머의 세계를 온몸으로 암시하고 입증하는 것. “혼돈의 신”은 이 길을 택한, 그 공포와 전율을 능히 감당하기로 결심한 자에게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엉망진창의 형상의 그 검은 혼돈이 뛰어들어왔다/그의 몸엔 온갖 쓰레기와 먼지들이 달라붙은 채/ (…) /내 얼굴에 고함을 질렀다, 네가 나를 찾은 놈이냐/ (…) /무시무시한 전율 속에서 예 그렇습니다/나는 얼른 대답했다”(「혼돈의 신이 찾아오다」).

이 시집의 의의는 복합적이다. 노장적 무위의 맥락을 딛고 있되 강호가도(江湖歌道)로부터 90년대의 ‘신서정’에 이르는 안빈낙도(安貧)의 급진적 수동성을 해체하여 적극적으로 재전유하고 있는 점은 특히 중요하다. 이토록 능동적이고 심지어 정치적이기까지 한 무위의 음악을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다. ‘애체’는 어쩌면 ‘강철새잎’(박노해)보다 거대하고 숭고(공포와 전율을 그 핵심 자질로 한다는 점에서)한 정치적 상징일지 모른다. 허수경(許秀卿)의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2011)과 함께 문명비판의 급진성이란 차원에서도 이 시집은 눈여겨볼 만하며 시단의 젊은 전위들과 언어실험에 동참하되 수직적 깊이를 동시에 추구한다는 면에서도 주목을 요한다. 시인이 말하는 혼돈이 질서와 무질서의 대립 이전의 ‘눈먼 혼돈’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반시(反詩) 또한 시와 반시의 구별 너머로부터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의 강박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이 시집은 마침내 공포 앞에서의 숭고한 절규가 되었지만, 그래서 불분명한 전언과 관념들로 균열투성이가 되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강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그 선구로는 김지하(金芝河)의 『검은 산 하얀 방』(1986) 정도를 지목할 수 있을 텐데, 어쨌든 검은 하늘 뒤로 “조용히 착상하는 피안의 그림자 정원”(「유리체를 통과하다」)이라면 기다려볼 만한 이유는 이미 충분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