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경위
만해문학상 운영위원회는 2012년 6월 13일 회의를 갖고 백낙청 염무웅(문학평론가), 천양희(시인), 신경숙(소설가)을 제27회 만해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위촉했다. 심사위원회는 등단 10년 이상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이의 최근 3년간의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을 대상으로 하는 만해문학상의 규정에 따라 추천위원(창비의 시와 소설 분야 기획위원)들이 추천하고 심사위원이 추가한 아래 13권의 작품을 대상으로 본심을 진행했다.
고형렬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유리체를 통과하다』, 위선환 『두근거리다』, 이상국 『뿔을 적시며』, 이시영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황학주 『모년모일의 별자리』(이상 시), 권여선 『레가토』, 김형수 『조드』, 성석제 『위풍당당』, 윤성희 『웃는 동안』, 은희경 『태연한 인생』, 정찬 『유랑자』(이상 소설), 황현산 『잘 표현된 불행』(평론)
7월 23일 모임에서 먼저 이상국 시집, 이시영 시집, 성석제 장편, 은희경 장편, 정찬 장편을 주요 심사대상으로 압축한 뒤 심사위원 각자가 다섯 작품에 대해 좀더 상세한 견해를 밝히면서 토론을 이어갔다. 논의가 진행되면서 시 부문으로 대상이 좁혀졌고 결국 이시영 시집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를 제27회 만해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하는 데 심사위원 전원이 만장일치로 합의했다. 현실에 맞서 시대의 진실을 세심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밀도 높은 서정이 다양한 형식 속에 조화롭게 어우러진 뛰어난 시정신의 소산이라는 점에 공감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심사평
백낙청(白樂晴) 문학평론가
소설에서 수상작을 낸다면 나는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을 밀고 싶었다. 이 작가 특유의 경쾌함 속에 어떤 치열성을 느낄 수 있었고, 작중의 소설 못 쓰는 소설가 요셉에 대한 풍자와 공감의 배합도 꽤나 정교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 스스로 불러일으킨 독자의 기대에 온전히 부응하지 못한다는 일부 동료위원의 지적에 나도 공감하는 바 없지 않았다. 꽉 짜인 서사구조 없이 진행하는 작품의 매력을 인정하면서도, 풍성한 소재를 충분히 활용하지는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한층 높은 그런 성취를 이루기에는 ‘매혹 대 고독(내지 고독을 견디는 흐름)’이라는 구도가 너무 협소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이시영 시집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의 탁월함에 모두 공감했기에 소설 후보작에 대한 논란을 오래 끌 필요가 없었다. 시집 가운데 이상국의 『뿔을 적시며』도 매력적이었지만, 너무 편안하고 따뜻하기만 한 시들이 많아 전체적으로 긴장이 떨어졌다. 이시영 시집에도 다소 긴장이 풀린 시들이 없지는 않다. 표제시도 그 도발적인 제목과 달리, 산문시라 해도 시로서 지녀야 할 가락의 힘이 약하고, 철거민들도 경찰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는지 그냥 ‘자신의 경찰로 여기지 않았다’는 건지 주제상의 혼란이 없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인용시’ 가운데도 「직진」이나 한층 시적 가공(加工)이 더해진 「고급사료」 등은 감동적이다. 「지구별에서」 「작은 점 하나」 「저녁에」 「나비처럼」 「해골」 「아침에」 같은 짧은 소묘들은 하나같이 시적 섬광을 선보이면서도 그 정취는 자못 다양하다. 또다른 유형으로, 일기장에 쓸 법한 개인적 이야기를 풀어낸 「아침의 몽상」 「마음의 길」 「싸락눈 내리는 저녁」 같은 작품들도 만만찮은 성과이다. 게다가 바로 이렇게 다양한 유형의 작품들이 솜씨 좋게 배열되었다는 점도 시집의 매력을 더해준다.
환갑을 넘기면서 더욱 정진하는 시인의 모습이 나 개인으로서는 든든했고 여러 위원들의 높은 평가에 기꺼이 동조했다.
염무웅(廉武雄) 문학평론가
최근 두툼한 부피의 평론집들이 잇달아 출간되는 가운데 황현산의 『잘 표현된 불행』은 우리 비평의 한 경향과 수준을 대표할 만한 업적이다. 머리말에서 스스로 언급하고 있듯이 그는 프랑스 현대문학을 소개하는 일과 한국 현대시를 독해하는 일을 자신의 본업으로 여겨온 분인데, 당연히 이 두 작업 간에는 긴밀한 상호조응이 있게 마련이다. 서양문학 전공자가 많이 활약한 우리 비평사에서 이것은 흔히 보아온 현상이었다. 오히려 지난날 문제가 있었다면 서양문학(이론)에 대한 어설픈 학습이 우리 문학작품에 대한 부실한 해석으로 이어지는 사례들이 빈번했던 것인데, 황현산의 비평문장은 그의 전공을 잊게 만들 만큼 현장의 텍스트에 밀착해 있어서 나에게는 독서의 긴장과 즐거움을 주었다. 다만 만해문학상 심사에서는 창작과 평론이 대등하게 거론될 경우 창작에 우선권을 주기로 한다는 만해상의 관행에 따라 나는 기꺼이 황교수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소설에서 먼저 나를 사로잡은 것은 정찬의 『유랑자』였다. 지금까지 그의 작품을 통독한 건 아니지만, 읽을 때마다 내게는 감동과 갈등이 함께 일곤 했다. 현실 속에 존재하는 불의와 광기의 근원을 투시하려는 그의 작가적 집념에 늘 경의를 느끼면서도, 그런 시도를 일종의 관념소설로 풀어내는 방식이 불만스러웠기 때문이다. 『유랑자』는 장편소설인 만큼 그런 균열이 더 드러나 보였다.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은 세련된 감각과 지적인 문체로 독자에게 강한 흡인력을 발휘하는 작품이다. 게으른 소설독자로서 나는 오랜만에 한동안 이 작품에 ‘빠져서’ 지냈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나서 생각하니, 인물과 서술의 진행이 전체적으로 모호하게 남아 있다. 예컨대, 문단세계의 속물성에 대한 주인공의 탐닉과 반발 사이에서 작가가 좀더 분명한 선택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
이상국의 『뿔을 적시며』는 아주 따뜻한 시집이다. 시인은 일상생활의 비근한 소재들을 차분히 더듬어 각박한 현실에 내재한 작은 온기들을 나지막하게 노래한다. 그의 시가 전해주는 잔잔한 위로의 말씀은 그것 없이 사는 세상의 무서움을 오히려 부각시키는 반사판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시집은 좀 단조롭다. 더 훌륭한 시가 되려면 평명(平明)한 문체 안에 세상을 향해 치고 나가는 힘도 더러 솟구쳐올라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시영의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는 40여년에 걸친 시적 이력에 있어 하나의 결산에 해당하는 시집이라고 생각된다. 초창기 ‘이야기시’라고 불렸던 것이나 신문기사와 책에서 일부를 그대로 옮긴 듯한 소위 ‘인용시’뿐 아니라 전통적인 서정시와 ‘선시’라고 부름직한 아주 짧은 시 등 그동안 이시영이 시험해온 각종 형식들이 망라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집의 진정한 성취는 다채로운 형식적 실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21세기 들어 이시영의 시는 남다르게 독특한 하나의 스타일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 중요한 것은 그 여러 스타일의 시들 안에 어떤 일관하는 자세가 들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내가 읽기에 이번 시집에는 팍팍한 시대를 굽힘 없는 꼿꼿함으로 살아가려는 한 인간의 정신과 감정이 때로는 수채화처럼 때로는 정밀화처럼 세심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만해 시정신의 현대적 계승이자 확장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천양희(千良姬) 시인
이시영 시인은 오랫동안 짧은 시와 이야기시(인용시)로 그만의 시의 밀물과 썰물을 보여주었다. 이번 시집은 그동안의 다양한 시의 밀물과 썰물이 함께 응집되어 한 바다의 경지를 이루고 있다. 짧은 시들은 짧지만 울림이 크고, 인용시들은 마치 진실에 사다리를 놓는 것 같다. 그의 시에는 시대의 요구에 응답하는 정신이 있고 현실에 대한 질문이 있다. 남이 말하지 않는 것, 보지 못한 것들을 소재로 삼아 그만의 시법으로 감추어진 세계의 진실을 냉정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런 점이 그의 참여적 면모를 말해준다. 「소나기」와 「발자국」에서처럼 현실에 맞서는 시정신을 읽을 수 있고 「싸락눈 내리는 저녁」에서 보듯이 자기갱신 또한 끊임없는 시계(視界)의 변모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저녁의 몽상」에선 자발적 소외와 지독한 고독을 자청하는 시인의 고뇌가 아프게 느껴진다.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할 때도 타자와 함께 말함으로써 보편적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있다. 개인과 타자와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그 관계의 진실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다보면 그것이 시대현실에 대한 질문에 닿는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 인식이 시인으로 하여금 ‘창조의 파괴’를 하게 하고 ‘창조의 미학’을 세우게 했을 것이다. 그의 시는 독자들의 마음속에 영감의 수신탑을 세워 진실의 전파를 받을 수 있게 하는 시목(詩木)이라 말하고 싶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2010년대를 장편소설이 꽃피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말들 한다. 여러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앞으로 장편소설의 붐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예술적 성과를 논할 만큼 뛰어난 작품이 얼마나 나올까 하는 위기감이 들기도 했다.
당선작이 소설로 정해졌다면 나는 성석제 소설을 택했을 것이다. 성석제 소설의 해학은 절대고수의 경지에 오른 것 같다. 이 소설을 이루는 25개 장의 소제목들은 대부분 잘 알려진 가곡과 서정적인 올드팝에서 가져온 것인데 그 곡들의 선율과 가사가 작중인물의 상황과 잘 맞아떨어져 의미와 재미를 함께 준다. 그 점이 독자들을 무장해제시킨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해학의 바닥에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 직면하고 있는 도덕적 해이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부정하고도 부패한 권력에 대한 저항이 있고,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갈망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이지만, ‘난 농담을 시작했어요. 세상이 모두 울기 시작했을 때’라고 말할 때 가장 성석제답다. 또 특이하게도, 소설 전체의 첫 구절이 ‘강’으로 시작해서 ‘강이다’라는 여운을 남기고 끝난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신경숙(申京淑) 소설가
예심에서 올라온 십여권의 집중 검토작을 중심으로 읽었다.
소설에서는 『위풍당당』 『유랑자』 『태연한 인생』에 대한 논의가 깊었다. 개인적으로 이들 소설을 읽으면서 그동안 우려와 기대 속에서 한국소설계에 장편소설이 안착하기를 바랐던 많은 사람들에게 안도와 즐거움을 느끼게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거론된 작가들은 각각 그동안 자신들이 일구어온 세계의 핵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한층 세련되고 깊이있고 유창하게 장편으로 펼쳐놓았다. 알다시피 세 작가의 작업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이들이 자신의 고유한 특장을 내세운 세 작품을 이어 읽는 일은 소재의 다양성, 문장의 품위,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힘과 완성도 등에서 현재 한국문학의 장편소설의 위치를 자연스럽게 가늠해보게 했다.
시에서는 『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가 독보적으로 거론되었다. 이 시집 속엔 물끄러미 생각하게 하는 마음의 시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몸을 긴장하게 시가 고루 섞여 있다. 그동안 시인이 수십년 동안 펼치고 접고 이어가던 근원과 서정의 세계, 리얼리즘 세계의 핵심들이 고스란히 한 시집 속에 총체적으로 담겨 있어 시집 제목을 ‘이시영’이라는 시인의 이름으로 달아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하드린다.
수상소감
시를 떠나 시를 찾아보자!
이시영 李時英
1949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수학했다.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월간문학』 신인작품모집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만월』 『바람 속으로』 『길은 멀다 친구여』 『이슬 맺힌 노래』 『무늬』 『사이』 『조용한 푸른 하늘』 『은빛 호각』 『바다 호수』 『아르갈의 향기』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가 있고, 시선집으로 『긴 노래, 짧은 시』가 있다. 정지용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지훈상, 백석문학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박재삼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단국대 문예창작과 초빙교수로 있다.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하여 님과의 재회(再會)를 예감하는 듯한 시구 “네 네 가요. 이제 곧 가요”(「사랑의 끝판」)로 끝나는 만해의 시집 『님의 침묵』(1926)은 내겐 쉽사리 근접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세계다. 소월의 ‘자연’과도 다르고 정지용의 ‘감각’과도 다른,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이 근대문학사의 ‘별권(別卷)’에 바쳐진 수많은 평론과 해설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 시집을 ‘완독’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만큼 그의 시는 사유와 형상이 복잡하고 다단해서, 좀 과장해서 얘기한다면 2000년대의 ‘미래파 시’들을 연상할 만큼 현재적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모든 살아 있는 문학에 바쳐지는 최고의 헌사가 바로 이 ‘현재성’ 아닌가.
나는 당신의 눈썹이 검고 귀가 갸름한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이 사과를 따서 나를 주랴고 크고 붉은 사과를 따로 쌀 때에 당신의 마음이 그 사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당신의 마음」 1연
「알 수 없어요」라는 시도 그렇지만 이 시에서도 “당신의 마음”은 끝내 드러나지 않으며 그야말로 알 수 없는 적막과 미소 사이로 그 모습을 ‘언뜻’ 비칠 뿐이다. 최근 황현산은 평론집 『잘 표현된 불행』에서 “부정의 언어, 곧 시의 언어는 늘 다시 말하는 언어이며, 따라서 끝나지 않은 언어이다”라는 말을 한 바 있는데, 1925년의 만해에게 이 부정의 언어, 전복의 언어에 대한 근대적 실천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그간 과분하게도 작고한 시인의 이름으로 된 상들을 받아왔지만 수상 소식을 듣고 이번처럼 ‘쫄아본’ 적은 없다. 그만큼 만해라는 이름은 내게 너무 크고 벅차다. 그가 위대한 불교의 선사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근대의 시적 실천이 죽음을 담보로 한 미지의 세계를 가득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지용과 미당 그리고 김수영은 읽을 만큼 읽었다. 이제는 그와 씨름을 좀 해봐야겠다. 배우고 때로 익혀야 할 선배가 있다는 것은 후학에겐 얼마나 큰 행운인가. 게다가 그는 님을 보내놓고 보내지 않았다는 위반의 언어를 발하고 있지 않은가. 시를 떠나 시를 찾아보자! 나는 지금 어떤 근원으로 향하는 모험의 탐침(探針)을 깊게 꽂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