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심사경위

 

올해 사회인문학평론상 공모에는 총 49편이 도착했다. 7월초 심사를 시작해 심사위원 3인이 1차 검토를 거쳐 각기 3~4편을 추천했고, 이를 수합해 총 9편을 본심에 올렸다. 727일 열린 최종심 회의에서는 이 가운데 심사진의 복수추천을 받은 김정, 남세희, 정지은, 최현희의 원고를 집중 검토했다. 4편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이고 개성과 장단점이 뚜렷해 논의가 쉽지 않았다. 심사진은 토론과정에서 좀더 호응을 얻은 김정과 정지은의 글로 대상을 다시 좁혀 고심한 끝에 정지은의 「푸어(poor) 공화국, 대한민국」을 제2회 사회인문학평론상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본심 대상작은 다음과 같다.(가나다 순)

김도민 「‘청춘’은 스스로 말할 수 있을까」, 김정 「괴벨스의 망령을 초극하기 위한 제안: 희망버스, 지체(肢體)적 미디어」, 남세희 「고길동 아저씨 연대기: 세대론을 넘어 세대 간의 화해와 연대를 위하여」, 오홍진 「동안(童顔)의 이데올로기와 성찰적 주체의 길」, 윤여일 「이 시대의 정신승리법: 무력한 자가 무력함을 활용하기 위해」, 이현 「1987년 민주화와 분단체제: 한국 민주주의의 의미를 묻다」, 정지은 「푸어(poor) 공화국, 대한민국」, 최현희 「벌레들의 음모와 동물들의 상식: 탈정치적 인간주의와 정치의 귀환」, 허진 「공황장애의 등장과 사회적경제적 의미」.

 

 

 

심사평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올해 사회인문학평론상 응모작들도 상당히 다양한 주제와 시각을 보여주었다. 심사를 하는 입장에서는 이즈음 어떤 문제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비평 욕구를 발동시키는가 하는 점을 일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1회에 비해 이 공모가 질적・양적인 면에서 풍성해졌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성껏 쓴 원고를 보내준 모든 응모자들에게 감사드린다.

평론이면 평론이지 구태여 ‘사회인문학’이라는 수식을 붙인 데는 평론이라면 대개 문학평론을 연상하는 관습 탓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문학에 국한되지 않는 사회현상과 쟁점을 ‘텍스트’ 삼아 세심히 분석하면서도 인문적 통찰의 깊이에 도달해주기를 바라는 높은 기대를 반영한 표현이라 하겠다.

거의 모든 장르가 비슷한 사정이겠으나 평론 부문에서도 고정된 형식의 규정성은 꾸준히 약해져왔는데, 사회인문학평론은 애초부터 준거가 되는 형식적 모델을 설정하지 않았으므로 새로운 형식의 모색이라는 측면이 더구나 분명하다. 그런데 심사과정에서 형식과 관련해서는 일종의 양분화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학기말 보고서처럼 딱딱한 틀을 듬성듬성하고 반복적인 내용으로 채운 유형이 한 편이라면, 다른 하나는 형식이라 할 만한 것 없이 두서없는 생각이 나열되거나 도중에 논의가 툭 끊어진 것 같은 유형이었다. 통상의 틀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분석과 사유의 치밀함이 다져낸 창의적 형식을 지향했으면 한다.

앞서 주제의 다양함을 언급했지만, 너무 큰 이야기는 선택하지 않는 편이 좋을 듯하다. 주제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가령 자본주의의 위기라거나 근대적 합리성이나 일본문화 같은 주제를 글 한편에서 솜씨있게 다루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반면 지엽적으로 보이는 문제를 출발점으로 삼을 때는 읽는 사람의 궁금증을 자아내기가 상대적으로 쉽겠으나 그것은 그것대로 효과적으로 ‘맥락화’되어야 읽는 이를 끝까지 몰입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9편의 본심작 중 가장 아쉬움이 컸던 글로는 최현희의 「벌레들의 음모와 동물들의 상식」을 꼽을 수 있다. ‘상식의 정치’가 대중의 공감대를 얻고 있는 최근 한국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한 이 글은 흥미롭고 시의성 있는 주제, 탄탄한 글솜씨, 분석과 주장의 자기정합성에 이르기까지 사회인문학평론의 성격에 잘 부합하는 인상적인 글쓰기였다. 그러나 비판대상에 과도한 혐의를 투사하고 외국이론가들의 탈정치성 비판을 다분히 무차별하게 적용한 단점 때문에 수상작으로 꼽기가 망설여졌다.

남세희의 「고길동 아저씨 연대기」도 잘 읽히는 글이었다. 만화 『아기공룡 둘리』에 그려진 80년대 중산층 고길동의 살림살이를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그 아들 세대인 오늘날 중산층이 겪는 삶의 팍팍함과 비교한 참신함이 돋보였고 결말의 세대연합 이야기도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역시 전체적으로는 익숙한 내용을 재탕한 느낌이 컸고 80년대 중산층의 비교우위 주장도 충분한 설득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좀더 중층적인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어느 하나로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던 마지막 두편 중의 하나가 김정의 「괴벨스의 망령을 초극하기 위한 제안」이었다. 희망버스 운동 자체가 하나의 새로운 미디어라는 데 착안한 이 글은 미디어의 가능성과 위험에 관한 인식을 토대로 ‘지체(肢體)로서의 미디어’라는 흥미로운 개념을 내놓았다. 주장도 강하고 전개도 활기있어서 끝까지 기대를 품고 읽게 되는 글이었으나, 희망버스, 미디어, 그리고 지체라는 핵심 키워드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 말끔히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미디어라는 틀이 첨가되었을 뿐 기존의 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 보였다. 희망버스에 대한 평가보다 미디어라는 주제에 확실히 초점을 두었더라면 한결 나은 글이 될 수 있었으리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긴 논의 끝에 정지은의 「푸어(poor) 공화국, 대한민국」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이 글의 장점으로는 무엇보다 꼼꼼한 시선과 야무진 글솜씨를 들 수 있다. 워킹푸어, 하우스푸어에서 씰버푸어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푸어’ 사태들이 시리즈로 이어지는 우리 사회의 고단하고 불안한 삶을 다양한 측면에서 촘촘히 고찰하는 부지런함이 돋보였고, 이런 여러 측면들을 한켜 한켜 포개나가는 글의 흐름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요약문에서 필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팍팍한 삶의 현실만 너무 이야기”하고 있다는 한계 또한 분명했다. 누군들 시원하게 해결할 수 없는 ‘푸어’ 사태에 무슨 대안을 제시했어야 한다는 말이라기보다, 글 중간중간에 좀더 긴 호흡의 인문적 통찰을 요청하는 대목이 있는데도 사유와 분석을 본격적으로 개진하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현실을 열심히 들여다보려는 의지와 널리 읽히는 글을 쓰고자 하는 노력이 앞으로 빛을 발하리라는 믿음을 주었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사회인문학평론상의 취지에 공감해준 많은 응모자들께는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평론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예리하고 지적이고 실천적인 글들이 갈수록 더욱 많아지리라 기대한다.

박명림 유재건 황정아

 

 

 

수상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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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1981년생. 인하대 국문과 및 성공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인천문화재단 재직중.

 

 

 

10여년 전, 유년기부터 학창시절까지 살았던 아파트가 재건축에 들어갔습니다. 아파트는 물론이고 5층까지 오던 우람한 은행나무도, 초등학교 때부터 타고 놀던 그네도, 동네 슈퍼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제 개인의 역사에서 많은 페이지가 강제로 뜯겨져 나간 듯한 느낌이었지요. 그때 발견한 책이 프랑스 사회학자 발레리 줄레조의 『아파트 공화국』이었고, 오랜 의문이 조금은 해소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렴풋이나마 제가 쓰고 싶은 글이라고, 적어도 읽고 싶은 글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전통적인 문학평론이나 사회학에 가졌던 알량한 호기심과 열정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제게 기존 평론은 너무 딱딱하거나 지루하거나 어려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습니다. 늘 글을 쓰고 싶었지만, 제가 쓰고 싶은 글이 어떤 장르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시간을 보냈던 이유이자 변명이기도 합니다. 현실과 문학의 중간 어디쯤, 문학의 예민한 감수성과 사회의 시스템 사이를 횡단하고 싶었던 제게 사회인문학평론상이 그 길을 열어준 셈입니다. ‘따라가는 길’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길’이기에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그만큼 큰 기회라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습니다. 종과 횡을 가로지르며, 현실과 감성 사이를 경쾌하고 발랄하게 뛰어다니겠습니다.

항상 격려해주시고 변함없는 믿음으로 큰딸을 지지해주시는 부모님, 수상 소식에 누구보다 기뻐해준 사랑하는 두 동생들에게 가장 먼저 감사와 기쁨을 전합니다. 부족하고 서툰 제 곁에서 늘 함께해준 벗들과는 환희의 술잔을 들고 싶습니다. 이 글은 두서없는 이야기를 끈기있게 들어주고 빈약한(poor) 문제인식을 풍성하게(rich) 만들어준 소중한 친구들에게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습니다. 수상 소식을 전할 때의 그 기쁨이란!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창비에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수상의 기쁨을 함께 나눠준 인천문화재단 식구들과 축하해주신 모든 분들도 고맙습니다. 많이 부족한 만큼,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만이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긴 호흡으로 즐겁게 읽고 이야기하며 쓰겠습니다.

두근두근, 그리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