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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이현 鄭梨賢
1972년 서울 출생. 2002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오늘의 거짓말』, 장편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사랑의 기초—연인들』 등이 있음. deepoem@hanmail.net
장편연재 3
내 모든 것
목적한 바를 이루기에, 투신은 드물게 안전한 방식이다. 높은 곳에서 몸을 던지는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안다.
마지막 목격자는 엘리베이터의 CCTV였다. 엘리베이터에 탄 제이는 1층이 아닌 15층 버튼을 눌렀다. 옥상과 연결되는 층이었다. 제이를 발견한 사람은 교대를 위해 출근하던 경비원이었다. 새벽 다섯시 반 즈음, 60킬로그램짜리 물체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의 둔중한 충격음을 들었다는 주민은 꽤 여럿이었다. 그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준 사람은 경찰관이었다. 머리 위와 발밑에서 벌어진 일을 나는 며칠 동안 알지 못했다. 그날 오후 집을 나서는데 평소와 달리 공동현관 앞에 중년여자 몇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 풍경을 보고도 그냥 지나쳤을 뿐이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동안 나는 멍하니 15층이라는 높이에 대해 생각했다. 이사 온 지 몇해가 지났으나 그 층에 올라가보지 않았다. 거기, 옥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다는 인식도 하지 못했다. 형사의 점퍼 앞자락에 크기가 다른 세 점의 잿빛 얼룩들이 나 있었다. 갑자기 눈알이 시렸다.
—자살로 추정합니다. 일단은. 유서가 있으니까요.
눈을 깜빡이지 않기 위해 나는 그 얼룩들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우리 일이라는 게 그렇다고 끝은 아니니까요.
형사는 흥미롭지도 권태롭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흰 종이 한장을 내밀었다.
—쓰세요.
그가 친절하지도 퉁명스럽지도 않은 음성으로 덧붙였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니 그날까지. 아는 대로. 쭉 다.
그날까지. 아는 대로. 볼펜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2010년 7월 16일이었습니다. 그는 내가 근무하는 학원에 혼자 왔고 여름방학 종합반에 등록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K고등학교 1학년이라고 했습니다. 그 학원의 아이들이 주로 다니는 학교가 아니었고 거리도 먼 편이었지만 더 묻지는 않았습니다. 그날 그애는 본 조비의 얼굴이 그려진 검정색 반소매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애가 속한 반은 일주일에 오일은 국영수 수업을 중심으로 하고 일주일에 이틀은 과탐과 사탐 수업을 했습니다. 나는 그애의 사탐 강사였습니다. 그애는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아주 나쁘지도 않았습니다. 삼주에 한번 꼴로 치르는 쪽지시험에서 그애는 처음에는 평균 80점을 맞았고 그다음부터는 결석을 했습니다. 제이는 종종 학원을 빠지곤 했습니다. 다음날에 나타나서 몸이 좀 아팠었다고 말했습니다. 원장이 그애의 부모에게 전화를 걸자 그들은 괜찮다고, 아들을 그냥 놔뒀으면 한다고 했습니다. 남에게 방해만 되지 않으면,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곳의 부모들은 아이의 수업태도에 민감합니다. 결석에 대해 관대한 부모는 거의 없기 때문에 그 일은 강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새엄마잖아. 누군가 말했고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다들 수긍했습니다. 제이는 학원비를 꼬박꼬박 납부하고 수업시간에 있는 듯 마는 듯 조용했습니다. 남에게 방해가 되는 행동 같은 것을 하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그리고 그 이후를, 쓸 수 있을지 없을지 나는 모른다. 문장과 문장의 갈피에 숨겨진 크고 작은 얼룩들의 각기 다른 농도에 대해서도. 제이가 15층으로 올라간 뒤 지상으로 떨어지기까지 세시간여가 비었다. 경찰관이 그 점을 지적했다.
—영하 5도였는데 말이지요.
그 말만이 가슴을 옥죄었다. 그동안 제이가 얼마나 추웠을지 알 수 없었다. 그 세시간은 영원히 공백으로 남겨질 것이다.
참고인 조서를 쓰고 나오니 한낮이었다. 경찰서 1층 복도의 널찍한 유리창으로 서늘한 햇볕이 푸짐하게 쏟아졌다. 선 채로 나는 울었다. 아주 오랜만에. 아마 그날 이후 처음일 것이다.
*
이런 밤이면 혀를 뿌리째 자르고 싶어진다.
나는 가위를 떠올렸다. 그러자 기묘하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며칠 전 철물점에서 공업용 가위를 샀다. 검은색 플라스틱 손잡이 밑으로 두개의 은빛 가윗날이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가위를 종이상자에 담은 후 접착테이프로 밀봉했다. 상자를 책상서랍 깊숙이 집어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마음만 먹으면 금방 부서뜨릴 수 있는 연약한 자물통이었다.
원해서 태어나는 아이는 없다. 열일곱살이 된 뒤 나는 생명이 만들어진 최초의 순간에 대해 즐겨 생각하곤 했다. 스스로를 위한, 일종의 농담이었다. 정자가 방출되던 순간 아버지는 신음 대신 내뱉었을까. 씨팔. 막 배란된 난자가 자궁 속을 헤엄쳐 다니던 정자와 만나던 순간 엄마는 중얼거렸을까. 좆까.
—딸꾹질처럼 여겨보면 어떻겠니?
잔뜩 술에 취해 귀가한 아버지가 말했다. 아버지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으므로 좀 당혹스러웠다.
—다녀오셨어요.
나는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이것 봐. 이렇게 멀쩡한데.
아버지가 탄식했다. 부패한 알코올 냄새가 쏟아졌다. 나는 숨을 참았다.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몇마디 더 했다가는 한동안 잠잠하던 악마가 다시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일은 2월 26일이었다. 호리병처럼 좁디좁은 목구멍의 입구를 꽉 졸라매기 위해 나는 며칠째 안간힘 쓰고 있었다. 아버지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불균질한 침묵이 주위를 감쌌다. 목울대가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학교는.
거기까지 말하고 그는 잠시 멈추었다. 곧 깊은 한숨을 뱉었다. 술김에 호기롭게 올려놓기는 했으나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는 모르는 듯 두 손을 내 어깻죽지에 어정쩡히 걸친 채였다. 아버지가 차마 완성하지 못하고 끝낸 말이 무엇인지 짐작할 만했다. 정말 그만두겠다는 거니, 같은 종류일 터다. 나의 자퇴에 대해 아버지는 지금껏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해오고 있었다. 또한 그 문제는 요 몇해 동안 이 집에서 벌어진 부부싸움의 주요 쟁점이었다.
—저럴수록 정상적으로 살아야 하는 거야.
—그러니까 이러려는 거예요. 어떻게든 정상으로 키우려고.
아버지 목소리는 짜증스러웠고 엄마는 고집스러웠다. 1980년대 초반 준공된 서른세평 아파트의 내벽은 얇았다. 귀를 세우지 않아도 내 방에서 그들의 목소리가 고스란히 들렸다.
—어떻게든 지가 극복하도록 해야지. 그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끝까지 보호하고 책임을 져야지요. 그게 부모의 의무예요.
—언제까지 비닐하우스 안에서만 키울 건데? 사내놈인데 세상과 맞서 싸워야……
—당신 눈엔 이게 공정한 싸움 같아요? 우리 준모 혼자 일방적인 테러를 당하고 있는 거라고요. 곤고와 환란의 날들이에요.
아버지가 쩝, 입맛 다시는 소리 비슷한 것이 들렸다. 벽 너머에서는 별별 소리가 다 들려오곤 했다. 때론 금세라도 꺽꺽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은 흐느낌이, 때론 ‘미안해서, 죽어도 죽지 못해, 우리 아들 불쌍해서’ 따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제멋대로 뭉뚱그린 비감한 탄식이. 격앙된 감정을 과장되게 표현하는 쪽은 늘 엄마였고 아버지는 벽 너머에서도 밋밋하고 존재감이 없었다. 그랬더라도 귀를 막았겠지만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소리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엄마가 나를 자퇴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벽을 통해 알았다. 엄마의 계획은 꽤 체계적이고 원대했다. 치료와 어학연수 과정을 병행한다는 거였다. 어학연수를 마치고 나서 진학할 유명한 사립기숙학교의 명단도 이미 확보해두고 있었다. 아버지는 줄곧 반대했다.
—걱정 말아요. 내 심장을 팔아서라도 어떻게든 해줄 테니까.
엄마의 답은 단호하고 비장했으며, 아버지의 반대 속에 숨겨진 이유가 경제적 부담이라는 점에 대해 노골적인 경멸을 담아 비난하고 있었다.
—허, 참.
부모의 싸움은 어떤 내용이든 결국 돈으로 귀결되었고 결말은 흐지부지했다. 다른 집도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은 적나라한 대화가 나에게 낱낱이 전달될지 모른다는 염려는 아예 잊은 것 같았다. 내가 이 논의의 제3자가 아니라 당사자라는 것도. 아버지와 엄마에게는 인정하기 싫은 건 믿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엄마가 번갈아가며 입에 올린 ‘정상’이라는 단어를 곱씹어보았다. 터무니없이 멀리 가는 고속버스에 잘못 올라탄 기분이었다.
아버지의 손은 무겁지 않았으나 거추장스러웠다. 그가 두번째 한숨을 내뱉었을 때 나는 별 수 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안녕히 주무세요. 씨팔, 죽어버려, 미친놈.
아버지의 눈에 긴가민가 드리워졌던 희망의 빛이 걷혔다. 다행이었다. 절대자에 의한 모든 곤고와 환란이 그렇듯 내 병 역시 기적처럼 치유되리라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 엄마보다는 아버지 쪽이 나았다.
엄마는 또 교회에 있을 것이다. 저녁 무렵 집을 나서며 현관문 닫는 소리가 내 방까지 똑똑히 들렸지만 모르는 척했다. 철야기도회가 며칠째 계속되고 있었다. 진심을 다해 간구하면 하느님도 들어주시지 않곤 못 배길 거라는 게 엄마의 주장이었다. 늘 그렇듯 나는 잠자코 있었다. 엄마 앞에서라면, 나는 잠자코 있는 것 외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딱 한번만 따라와주면 안되겠니.
엄마가 간혹 눈물을 글썽이며 부탁해올 적도 있었다. 나는 눈물이 싫었다. 나 때문에 눈물 흘리는 타인을 보는 건 더 싫었다. 침묵 속에서 고개를 떨어뜨리는 것 말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엄마는 정말 모를까.
아버지와 나는 마루에서 헤어져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꼭 닫고 잠금 꼭지를 눌렀다. 불을 껐다. 창밖에 신경질적인 바람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침대에 누워 나는 세미를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절대로 잊지 못할 날이 있을 것이다. 그 하루를 기준으로, 인생을 사과처럼 둘로 탁 쪼갤 수 있게 된 날. 한번 쪼개지고 나면 그 이전의 생과 그 이후의 생은 같은 것일 수 없다. 1991년 2월 26일. 중학교 예비소집일이 나에게는 그날이다.
지나간 한 시절을 떠올릴 때 당시 어떤 틱을 하고 있었는지를 먼저 기억해내는 건 시험답안지를 쓰기 전에 오른쪽 세번째 손가락에 잡힌 굳은살을 만지작거리는 행동처럼 일상적인 습관이다. 그때 나는 한번 터져나오면 주체할 수 없이 지속되는 헛기침, 이유 없이 찾아와 5분여 지속되다 사라지는 눈 깜빡임 증상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은 ‘악마’가 슬쩍 발톱만 보였던 때다. 돌이켜보면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일은 당시에는 결코 알 턱이 없는 법이다.
첫 증세는 목구멍이 간질거리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의 보이스카우트 캠프에서였다. 스카우트 단복을 입고 캠핑 가는 아들을 배웅하는 장면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아이를 낳기 전부터 품어온 엄마의 로망이었다고 한다. 학교 운동장에 어설픈 길이의 반바지 밑으로 채 굵어지지 못한 장딴지를 드러낸 소년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었다. 관광버스는 그들을 줄줄이 태운 채 이름 모를 국도를 달렸다. 버스 안에서 오래된 포크송을 합창했다.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물가에 마주 앉아 밤새 속삭이네.
—껍질을 먹는다고?
옆자리에 앉은 녀석이 조그맣게 물어왔다.
—묶는다잖아.
—껍질을 어떻게 묶어? 이상하잖아?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한 일은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경기도 가평 어딘가의 야영장 앞은 전국 각지의 번호판을 단 관광버스들로 가득 찼다. 똑같은 옷을 입은 소년들이 버스 출입문 밖으로 꾸역꾸역 밀려나왔다. 지역과 학교를 무작위로 섞어 다섯명씩 한 조가 되었다. 한 조의 단위는 ‘보’였다. 텐트 빨리 치기를 시작으로 모든 것이 보별 대항전이었다. 버너에 빨리 불 붙이기, 밥 빨리 먹기, 옷 빨리 입기, 오줌 빨리 누기. 공중변소는 넓은 공간에 몇개의 긴 줄로 파인 웅덩이였다. 다른 소년이 소변을 보는 사이 엉덩이를 까 내리고 대변을 봐야 했다. 사흘째 되는 날 수영을 하다 말고 아랫배가 묵직하게 아파왔다. 공중변소 안에는 6학년 형들 서넛이 있었다. 나는 수영팬티를 까내리지 못했다. 집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내내 변의를 참아야 했다. 밤에는 누군가의 손이 바지 안으로 쓱 들어왔다 나가곤 했다. 경상북도 어딘가에서 왔다는 6학년 보장이었다. 키가 170cm는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손가락도 하나 움찔거리지 않았다.
처음엔 동네 내과에 갔다. 의사는 인두염이 의심된다고 진단했다.
—편도선이라는 말이죠?
엄마가 대수롭잖게 재확인했다. 항생제를 일주일치 먹고도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심해졌다. 개미 몇마리가 기어다니는 것처럼 간질간질한 감각이었다. 간질간질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근질근질이 되었다. 그것은 아프다는 느낌보다 갑갑하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온몸의 근육과 신경이 그 개미들에게 지배당하는 것 같았다.
—음, 음, 음, 음.
세상에서 가장 낮은 소리의 기침을 수시로 뱉어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숨을 쉬기 위해, 살기 위해 나는 연거푸 기침을 해댔다.
종로의 유명하다는 이비인후과에서는 과민성 인후염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쉽게 말해 신경성이라는 얘깁니다.
의사는 강박장애의 일종일 수 있으며 안정을 취하면 나아질 수 있지만 혹여 더 심해지면 신경정신과에 가야 한다고 말해 엄마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정신병이라는 거야, 뭐야.
지하철 안에서 엄마는 내 손을 꽉 잡고 투덜거렸다.
—아무튼 네가 좀 예민한 건 사실이잖아. 항상 마음을 담대하게 먹고 가슴도 좀 펴고.
엄마가 내 가슴팍을 딱딱 때렸다. 이렇게 오래도록 바닥 모를 싸움이 펼쳐질 거라곤 엄마도 나도 짐작조차 못했을 시절이다. 한의원엔 못해도 네댓곳은 가 보았을 것이다. 불안한 신경을 가라앉혀준다는 침은 가는 데마다 꼭 맞으라고 했다. 이마에도, 뺨에도, 손등에도, 발등에도, 사타구니에도, 나는 그들이 하라는 대로 침을 맞았다. 날카로운 바늘 끝이 생살을 파고 들어올 때 작은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아 한의사들의 칭찬을 받았다. 이 개미들만 처치할 수 있다면 다 괜찮다고, 다 참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침을 꽂은 뒤엔, 뺄 때까지 혼자 병실에 누워 기다려야 했다. 음, 음, 음, 음, 음,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는 마음껏 기침을 해댔다.
징후가 나타나고 일년여가 지난 뒤에야 엄마는 신경정신과에 나를 데려갈 용기를 냈다. 대학부설 종합병원이었다.
—저, 의무 기록이 남지 않나요? 나중에 군대도 가야 하고.
수납창구의 직원에게 묻던 엄마의 절박한 목소리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엄마는 왜 하필 군대라는 예를 들었을까. 남의 아들들만큼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만큼만 되기를 바라는 헛된 욕망 때문일지 몰랐다.
엄마를 밖에 앉혀두고 나만 혼자 방으로 불려 들어갔다. 사방을 흰색으로 칠한 방에 덩그마니 앉아 있으니 의사가 나타났다. 단발머리의 여자였다.
—여기가 막 근질거리고 답답하니?
—네.
—토할 것 같기도 하고?
—네.
—그런 느낌을 전조 감각이라고 하는 거야.
—………
—준모는 요즘 행복하니?
—잘 모르겠는데요.
—그럼 불행해?
—모르겠어요.
—지니 알지? 램프의 요정. 만약 지니가 나타나 네 소원을 들어주겠다면 뭘 부탁할 거야?
—그런 거 없는데요.
—그래도 한번 잘 생각해봐. 부모님한테 바라는 거라든지.
—음, 잘 모르겠어요.
—독방은 어때? 지금은 너만 혼자 쓰는 방이 있어?
—아니오.
—그럼 부모님이랑 같이 자니?
의사의 눈빛이 반짝였다.
—네.
—집에 남는 방이 없어서?
—아니요. 그건 아닌데. 그냥 어릴 때부터 쭉 그래 와서요.
—그래. 그렇구나. 우리 준모는 더이상 부모님하고 같이 자고 싶지 않구나.
나만의 방을 가지고 싶다는 게, 부모님과 따로 자고 싶다는 것과 반드시 같은 뜻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상관없었다.
—혹시 말이야.
의사가 갑자기 사무적인 목소리로 물어왔다.
—준모 혹시 지금 바지 좀 벗어볼 수 있겠니? 선생님이 궁금한 게 있어서 그래.
내가 당혹스러워 하자, 의사가 차트에 뭔가를 휘갈기듯 적어넣었다.
—싫어? 싫으면 안해도 되긴 해. 그래도 할래, 안할래?
—……아니오.
나는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래. 그럼 됐어. 괜찮아. 이제 나가봐.
그 의사가 처음부터 궁금해했던 건 내 팬티 색깔 따위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엄마의 차례였다. 엄마가 혼자 진료실에 들어가 있는 사이 나는 간호사의 감시를 받으며 복도에 있어야 했다. 그들은 혹시 내가 도망이라도 칠까 염려하는 것 같았다. 십여분 후 엄마가 나왔다. 엄마의 얼굴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내가 너한테 그렇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준 거니?
집에 오는 길 엄마가 내게 건넨 딱 한마디였다. 그날 밤부터 나는 혼자 자게 되었고, 내 헛기침은 틱 장애라는 병명을 갖추게 되었다. 여러가지가 변한 듯이 보였다. 독방을 갖게 되었고 매끼 한움큼씩 약을 먹게 되었고 두달에 한번 의사와 면담을 하게 되었으나, 증세만은 그대로였다. 아니다. 좀벌레가 모직코트를 느릿느릿 좀먹어가듯 시간이 흐를수록 내 틱은 서서히 악화돼갔다.
1991년 2월 26일, 사과가 절반으로 잘라지기 직전의 나는 중학교 입학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며, 코 킁킁도 없었고 눈 깜박임도 5분 이상 넘어가지 않았던 일년 전의 모습을 필사적으로 그리워하는 중이었다.
—어차피 걔들이 걔들이야.
엄마 딴에는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라고 한 말이겠지만 그 말을 들은 뒤 나는 새삼스러운 공포에 사로잡혔다. 두겹의 공포였다. 좁은 동네였다. 4학년부터 6학년에 이르기까지 일어난 나의 몰락을 곁에서 지켜본 그 아이들과 또다시 새 공간에서 만날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전혀 새로운 아이들도 만날 것이다. 그리고 두 부류는 빠르게 섞이겠지.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단 하나의 인간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1991년 2월 26일, 새 학교의 신입생 예비소집일 아침. 집을 나서기 전 약국에서 파는 방한용 마스크 중에서 가장 큰 사이즈를 썼다. 코의 아랫부분을 포함한 얼굴의 절반 이상이 가려졌다. 배정받은 중학교는 아파트단지 안에 있었다. 오종종하게 늘어선 키 작은 주공아파트들과, 어느새 굵어져버린 플라타너스 나무들 사이를 걸었다. 터덜터덜 걸었다. 화재가 잦은 계절이었다. 건물이 무너지는 사고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내 몸이 도착하기 전에 그곳이 불길에 휩싸이거나 먼지처럼 폭삭 주저앉는 상상을 하다 보니 교문 앞이었다.
교정은 조용했다. 지나치게 조용했다. 불이 나지도 않았고 건물이 무너지지도 않았다. 나에게 시계가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조회대 옆에 설치된 대형시계탑의 시간은 열시 오분 전이었다. 파카주머니 속에 접어넣은 종이를 펴보았다. 소집시간 아홉시, 장소는 운동장. 한시간을 착각했다.
나는 운동장 가장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교사 반대방향이었다. 제일 높은 철봉에 여자아이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빨간색 망토에 초록색 털모자를 쓰고 있어서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보였다.
—어, 안녕.
철봉에 매달린 채 여자아이가 인사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너도 여기야?
—으, 응.
—잘됐다.
여자아이가 씨익 웃었다. 씩,이 아니라 씨익, 하고 웃는 웃음이 존재하는 세상이 있다는 걸 나는 처음 알았다. 그녀가 웃자,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변했다. 뻑뻑한 암흑으로 뒤덮인 하늘 한귀퉁이에 다정하게 뜬 노란 달, 가느다란 틈새.
—한신 7차 살지? 놀이터에서 가끔 봤어.
나는 모르는데 나를 아는 아이. 마스크 속에서 나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여자아이가 땅으로 풀썩 뛰어내렸다. 이마가 내 어깨에 닿을락말락했다.
—휴, 힘들다.
하마터면 ‘그런데 왜 매달렸어?’라고 물을 뻔했다.
—근데 넌 몇반이야?
—모, 몰라.
—어, 아직 끝난 거 아니야? 아, 뭐야, 너도 지각한 거구나?
여자아이가 십분 늦게 도착해보니 운동장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너무하지 않냐. 딱 십분인데.
여자아이가 입술을 옴짝대며 투덜거렸다. 여자아이와 나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여자아이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은색 쿠킹호일에 쌓인 것은 네모난 식빵이었다.
—자, 먹어.
이 동네 아이들은 친구가 되고 싶은 다른 아이에게 대부분 ‘이거 먹고 싶니?’라는 식으로 접근한다. 최근 몇해 동안 나한테 다가온 아이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먹어’라고 하는 조그만 여자아이가 갑자기 아주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먹어봐. 좀 식었을 텐데 바삭하게 잘 구워져서 아직 맛있을 거야.
여자아이가 다시 한번 권했다. 얼결에 빵을 받아들었다. 나는 조금 주저하다가 마스크를 벗었다. 앞니로 식빵 모서리를 조심스레 베어 물었다. 특별히 맛있다고 하기 어려운 보통 맛의 빵이었다. 여자아이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내 모습을 지켜보다가 나보다 더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어때? 괜찮아?
식빵 부스러기를 혀끝에 올리고 입천장에 가만히 대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다시 초승달 두개가 떴다.
—사실 다 이거 때문이야.
여자아이가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자기는 원래 지각은 절대로 하지 않는데, 오늘 늦은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고 했다. 막 집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손님들이 왔고, 엄마가 식빵을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켰고, 식빵이 없으면 정말 큰일이기 때문에 길 건너 크라운베이커리까지 갔고, 빵집 문 열 때를 기다려 식빵을 사다주고 오느라 늦었다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여자아이가 늘어놓는 동안 나는 몇차례나 더 고개를 끄덕였을까. 그후로 오랫동안, 이 아이 앞에서 고개를 젓지 못하리란 걸 그때 나는 어렴풋하게라도 예감했을까.
분명한 건 그때 어딘가에서 사과 한알이 또르르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운명은 내게 그것을 줍게 했다는 사실이다. 벌레에게 좀 먹히고 여기저기 곪은 못난이 사과지만 동그랗고 단단했다. 사과는 탁 절반으로 쪼개졌고, 그 속에는 윤이 나는 사과씨가 비밀처럼 숨어 있었다.
여자아이의 이름이 윤세미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원래는 샘이라고 지으려고 했대. 세상 사람들이 다 샘내는 여자가 되라고. 하하하. 우리 아빠가 그렇게 좀 유치해.
또 여러가지 것들을 천천히 알아가게 되었다. 기적이 연거푸 일어나 우리가 같은 반이 되었고,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 만난 날, 그녀가 그렇게 빵에 집착했던 이유도 밝혀졌다. 그녀의 부모님은 한 다단계업체의 간부였으며 그 즈음의 주력상품 중 하나가 신형 토스터였다. 토스터 시연회처럼 그녀의 집에선 곧잘 이런저런 행사가 열리곤 한다는 것, 그녀의 어머니는 몹시 바쁘다는 것, 그래서 딸의 도시락으로 잼도 곁들이지 않은 토스트나 오천원권 지폐 한장을 쥐어줄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다.
—예전에 전골냄비 잘 나갈 때는 아침저녁 쇠고기전골만 먹었는데.
처음 같이 밥을 먹던 날, 내 도시락 반찬통의 동그랑땡을 포크로 찍어먹으며 세미가 중얼거렸다.
—응. 1988년에서 1989년으로 넘어가던 겨울에 그랬지.
지혜가 대꾸했다. 지혜는 세미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의 단짝이었다.
—솔직히 맛은 별로였어, 그치?
—너희 엄마가 원래 좀.
지혜가 심드렁한 말투로 말하면 세미는 진지하게 맞장구치는 게 이들의 대화패턴이었다.
—나는 세상에 쇠고기전골만 있는 줄 알았다. 해물전골, 곱창전골, 김치전골도 있는데 우리 엄마는 왜 항상.
—쇠고기가 제일 비싸잖아. 고마운 줄도 모르고. 그래도 냄비 무지 잘 팔렸잖아?
—응.
세미가 천진하게 웃었다.
—그러면 뭐해. 아빠 때문에 또 망했었는데.
남들이라면 구태여 입 밖에 내지 않을 말을 세미는 스스럼없이 했다. 세미는 언제나 진심만을 말하고, 진심을 다해 말했다. 세미가 동그랑땡을 또 하나 집어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야, 진짜 끝내준다. 이런 걸 집에서 만든단 말이야, 정말?
동그랑땡은 명절을 상징하는 음식이었다. 온 일가친척이 모여들어 버글대는, 골방에 숨어 버텨내야 하는, 더러운 구덩이 속의 물처럼 시간이 고여 썩어가는 하루.
1991년 2월 26일부터 1995년 2월 26일까지 내 틱의 증상이 어떻게 변해왔는지에 대해서는 구태여 설명하고 싶지 않다. 나를 한번이라도 목격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나 대신 증언할 수 있을 터였다. 개미들은 대(大)부대가 되었고 나는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가진 병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증명하는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추석날 식탁 앞에서 아주 잠깐 속으로 씩, 웃는 사람이 됐다. 비 오는 날 앞서가는 행인의 노란색 우산을 보고 생뚱맞게 동그랑땡을 떠올리며 씩, 웃기도 한다. 아직은 온 우주가 환해지도록 그녀처럼 씨익, 두 음절로 웃는 방법은 터득하지 못했지만.
나는 곧 학교를 떠나게 될 것이다. 엄마의 바람대로 미국에 가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럼 1996년 2월 26일에는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 상상만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시간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바람의 방향이 계속 바뀌었다. 퇴근 무렵이어서일까, 버스는 여간해서 오지 않았다. 한떼의 회사원들이 정류장 앞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음악에 섞여 들려왔다. 나는 시디플레이어의 볼륨을 올리고 이어폰을 단단히 고쳐 끼웠다.
정말 난 바보였어 몰랐었어 나를 사랑한다 생각했어
내 마음도 널 사랑했기에 내가 가진 전부를 줘버렸어
넌 왔다 갔어 이런 날벼락이 이 세상에 혼자 남은 듯한
하늘이 무너져내리고 있어 그리고 자꾸 깊은 곳으로 떨어져
서태지만 듣는 건 아니지만 서태지를 가장 자주 들었다. 1집부터 4집까지 기분에 따라 선택했다. 세미에게 가는 길에 「필승」은 어울리지 않는 듯도 했다. 그래도 트랙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아까부터 자꾸만 몽롱해지는 정신을 추스를 강렬한 비트가 필요했다. 요즈음 나는 자주 멍해지고 자주 피곤했다. 길을 걷다 갑자기 발밑에 움푹 파인 구멍을 발견하곤 놀라 피하려다가 발을 헛디디기도 했다. 뒤를 돌아보면 구멍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먹는 약의 분량을 늘린 뒤부터 나타난 증세였다. 곧 자퇴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 담당의사가 내린 결정이었다.
—물러설 데가 없으니 한번 해보는 겁니다.
바지를 벗어보라던 여의사에 이어 네번째 주치의였다. 삼십대 후반의 남자선생은 공격적이고 색다른 처방을 내리곤 했다. 한약이라면 기겁을 하던 이전 의사들과 달리, 한방이든 양방이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다 해보라고 했다.
—후회보다 나쁜 건 없습니다.
정 불안하면 외출할 때마다 입술에 테이프를 붙이라고 한 것도 그였다.
—언제 터져나올까 조마조마해하며 강박에 시달리기보다는 맘 편한 게 훨씬 낫습니다.
집을 나서기 전이면 욕실거울 앞에서 넓적한 투명 테이프를 붙여 입술을 막았다. 테이프는 엑스(X)자 모양으로 붙였다. 그 위에다 방한 마스크를 썼다. 테이프는 효과가 없지 않았다. 욕설이 터져나오다가 미처 봉인된 입술 너머까지 퍼지지 못하고 목구멍 안쪽으로 웅얼웅얼 사라져가곤 했다. 에이 씨팔 좆 같은 년. 테이프 아래에서 나는 여전히 끊임없이 욕을 했지만 그 욕을 듣는 이는 나뿐이었다.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는 건 참을 만했다. 틱이 새어나갈까봐가 아니라 테이프의 존재를 들킬까봐 어깨가 오그라들었다. 집에 돌아오면 마스크를 벗고 거울 앞에서 테이프를 뗐다. 붙일 때는 몰랐는데 수염에 닿았던 접착 면의 끝부분을 떼어낼 때는 눈물이 핑 돌 만큼 쓰라렸다.
멀리 710번이 보였을 때는 「필승」을 세번째 반복해 듣고 있었다. 떠들어대던 아저씨들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버스정류장에서 편의점 골목으로 꺾어져 몇걸음만 걸으면 작은 꽃집이 있었다. 세미에게 장난으로도 꽃을 사준 적이 없었다. 조금 고민하다가 나는 빈손으로 한남동행 버스에 올랐다. 세미와 나는 4년째 가장 친한 사이로 지내왔지만 같이 한 것보다 하지 못한 게 더 많았다. 이 버스도 늘 세미 혼자 태웠었다. 밤이 늦었을 때 슬쩍 ‘데려다줄까?’ 하고 물으면 세미는 입버릇처럼 ‘다음에’라고 했다.
—야, 야, 걱정 마. 누가 나 잡아가지도 않아. 밥값 많이 들어서.
그러곤 또 킥킥거렸다. 나는 따라 웃는 척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소 띤 표정의 완강한 거절이었다. 어쩌면 세미는 나와 단둘이 있는 상황을 부담스러워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이해했다. 아무데서나 욕설을 토해내는 남자의 애인으로 보이고 싶지 않은 건 그애의 품성 따위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러고 보면 세미와 나 사이에는 거의 항상 지혜가 있었다. 셋은 비겁하고 안전한 숫자였다. 언제부터 우리는 셋이었을까? 세미를 처음 만난 2월 26일에 대해서라면, 나란히 걸터앉았던 나무벤치에 액상화이트로 휘갈겨 쓴 낙서까지 선명히 기억하지만, 지혜를 처음 만난 날의 기억은 새하얬다. 정확히 언제인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거짓말처럼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지혜는 성실하고 좋은 친구였다. 나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지혜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한남오거리의 공중전화부스에서 세미한테 전화를 걸었다. 부스 안에서 등을 돌리곤 입에 붙인 테이프를 떼어냈다. 세미는 자다 깬 듯했고 꽤 놀란 눈치였다.
—잠깐만, 지금 몇시지?
—아홉시 십분 전이야.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좀 늦기는 했는데, 아무튼 나갈게. 기다려.
세미가 지정한 장소는 근처 대학교의 중앙도서관 앞이었다. 거기 말곤 근처에 달리 아는 데가 없다고 했다.
—정문에 서 있기는 쪽팔리잖아.
대학 캠퍼스라는 곳에 처음 들어가보았다. 밤 아홉시의 캠퍼스는 어두컴컴하고 을씨년스러웠다. 텅 빈 밤의 운동장은 커다란 저수지처럼 보였다. 검은 물 밑에 벌거벗은 시체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을지 몰랐다. 나는 무작정 언덕 위로 올라갔다. 오르는 사람도, 내려오는 사람도 없었다. 멀리 보이는 불빛을 향해 정처 없이 걸었다. 걷다보니 그곳이 도서관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들었다. 도서관으로 연결된 유리문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문은 아주 가볍게 밀렸다. 문을 열기만 하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도서관 안쪽과 어두운 바깥은 두개의 다른 세계였다. 도서관 로비의 파리한 형광등 아래에서 나는 비로소 숨을 골랐다.
한국사회에는 수많은 대학들이 있고, 그 대학들 사이에 공공연한 서열이 존재한다는 정도는 나도 알았다. 하지만 지금 이 대학이 그 서열표에서 어느 정도의 좌표에 있는지, 이 학교에 입학하려면 수능성적이 얼마큼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라면 나는 까막눈이었다. 나는 대학생이 된 내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일종의 방어기제인지도 모른다. 만약 대학생이 된다면. 나 같은 놈에게 그런 가정은 차마 쉽게 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뜨고서 대학생이 된 세미의 모습을 상상했다. 모두가 감탄할 만큼 밝을 것이고 모두가 사랑할 만큼 아름다울 것이다. 늙은 겨울의 밤바람이 유리창을 힘껏 두드렸다.
—준모야!
세미가 나를 향해 곧장 걸어왔다. 한손을 쳐들고서 내 이름을 또렷하게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다정했다. 너무 다정하고 스스럼없어서 그녀가 ‘준모야’라고 할 때면 나는 이유 모를 절망감에 휩싸이곤 했다.
그녀는 회색 아디다스 추리닝에 빨간 오리털파카를 걸친 일상적 차림이었다. 동네 슈퍼마켓에 콜라라도 사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나온 듯했다. 거울 앞에서 헤어젤과 스프레이로 오랫동안 머리칼을 매만지고, 가지고 있는 겨울옷 중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입고 나온 내가 어쩐지 초라해졌다. 세미를 앞에 두고 절대로 고백 비슷한 것을 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새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처음 만난 날처럼 도서관 로비의 장의자에 나란히 걸터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는 열여덟살이었으므로 식빵 대신 커피자판기에서 갓 꺼낸 따뜻한 종이컵을 손 안에 감싸 쥐었다. 오랫동안 마음을 졸인 데 비해 어이없을 만큼 평화롭게 시간이 흘러갔다. 세미는 여기에 종종 온다고 했다.
—대학생들 보면서 정신 좀 차리려고. 하하.
진짜인지 그냥 하는 말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녀가 종종,이라는 부사를 써서 표현하는 일을 나는 까맣게 몰랐다. 어느새 그런 사이가 된 것이다. 그 틈새는 점점 더 벌어져갈 것이다.
—이 대학에 오고 싶어?
—여기도 ‘인(in) 서울’인데. 내 성적 알면서. 언감생심 아니겠어? 맞냐? 언감, 생심.
—응.
내가 퍽 오랜만에 웃었다는 걸 그녀는 죽어도 모를 거였다.
—준모, 너는? 하긴 넌 좀만 더하면 ‘스카이’도 갈 수 있을걸.
—나는 학교를 그만둘 거야.
—뭐?
세미가 몹시 놀랐다.
—어쩌려고?
—일단은 집에서 공부해서 검정고시를 볼 거야. 안되면 유학을 갈 거고.
나조차도 처음 입 밖에 내는 계획이었다.
—유학? 미국에?
—아니.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전혀 모르는 언어를 사용하는 곳에.
세미가 내 옆얼굴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한 채 마저 말했다.
—내가 한국말로 욕을 해도 무슨 뜻인지 아무도 모르는 곳에.
내 말이 끝나고 난 한참 뒤에 세미가 입을 열었다.
—정말, 그렇게 하고 싶어?
납득할 수 있다는 말도, 납득하기 어렵다는 말도 아니었다. 세미는 그저 그렇게 하고 싶으냐고 묻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그런 것 같아.
갑자기 자신이 없어졌다. 내 대답을 ‘모르겠어’라고 읽은 것 같았다. 역시 그녀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녀는 진지했다.
—준모야. 내가 이렇게 얘기할 처지는 아니지만 말이야. 나는 네가 도망가는 게 아니라면 좋겠다.
세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려퍼졌다.
—언젠가 너하고 이런 얘길 할 기회가 있었으면 하고 막연하게 바랐던 것 같아. 하지만 그러지 못했지. 내가 겁쟁이라서 그래. 미안해.
그녀가 잠시 호흡을 가다듬을 동안 나는 눈을 들어 그녀의 옆모습을 흘끗 훔쳐봤다. 가지런한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네가 되어보지 않았으니까, 그럴 수가 없으니까, 네 문제에 대해서 다 안다고, 이해한다고 말하진 못해. 그건 너도 나한테 마찬가지겠지. 그렇지만 준모야. 너는 내 친구니까 나는 이거 하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 네가 정말 대단하고 용감한 아이라는 것.
내 귓불이 얼마나 벌겋게 달아올랐는지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갈 때 가더라도 여기서 좀더 노력해보면 안될까?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잖아. 그리고 이건 정말 이기적인 얘긴데.
세미가 장난꾸러기처럼 분홍색 혓바닥을 쏙 내밀었다 집어넣었다.
—너도 알다시피 나, 너랑 지혜 아니면 친구도 없잖아. 내 인생에서 네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무도 모른다. 바로 그 순간 하늘이 휘청, 흔들렸다는 것을. 질서 정연하게 희미해져가던 별들이 살짝 몸을 비틀었고, 다시 눈부시도록 반짝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자 세미가 웬일인지 순순하게 앞장섰다. 근처인 줄만 알았는데 그녀가 사는 집은 멀고 멀었다. 길고 가파른 오르막이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집들이 늘어섰고, 그 사이사이 노란 가로등들이 경호원처럼 우뚝 서서 불을 밝혔다. 두 손을 파카주머니에 찔러넣은 세미가 반 걸음 앞섰고 내가 뒤를 따라갔다. 그녀의 등 뒤를 지키며 이렇게 아주 오래라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세미가 간간이 뒤돌아보았다.
—숨차지?
—아니.
—여기 오르내리느라 내 종아리가 말씀이 아니잖아.
그녀가 매일 오가는 길이었다. 조금 전에도 나를 만나기 위해 이 긴 길을 혼자 걸어 내려왔구나 싶어 심장이 찌르르해졌다.
—다 왔다.
세미가 커다란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뭐랄까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집이었다. 세미가 부모님과 살던 주공아파트의 낡은 계단이 불현듯 겹쳐 떠올랐다. 가로등을 등지고 있어 세미의 표정은 살필 수 없었다. 호기심이 인다고 다 입 밖에 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이윽고 그녀가 고마워졌다.
—준모야. 내가 나중에 다 얘기해줄게.
내 마음을 짐작한다는 듯 그녀가 먼저 말했다. 나는 ‘괜찮아’라고 할 수도 있고 ‘그래’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래.
내가 고른 대답은 그것이었다. 오늘, 1995년 2월 26일의 동이 튼 이래 가장 밝은 목소리였으리라고 확신한다.
—안녕.
—안녕.
작별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헤어졌다. 몇 발자국 걷다가 뒤를 돌아봤다. 내게 등을 보인 자세로 세미가 대문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온몸의 용기를 짜내어 하나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윤세미!
그녀가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잘 자! 좋은 꿈꾸라고.
유치한 시나리오 탓에 실패한 로맨스영화의 한 장면 같았지만 그러면 좀 어때,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어둠 탓에 보이진 않았지만 그녀의 입은 활짝 웃고 있을 게 분명했다. 마스크를 코트주머니에 넣은 채로 나는 집에 돌아왔다. 택시를 탔지만 기분 같아서는 한남대교를 걸어서 건널 수도 있었다. 침대에 눕자마다 피곤이 몰려들었다. 바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느냐고 물어볼 것을. 나는 좀 후회했다. 끝 맛이 달콤한 후회였다. 예민하게 의식한 것도 아닌데, 그녀와 있을 동안 ‘악마’가 단 한차례도 침범하지 않았다. 의사는 몹시 긍정적인 징조가 아닐 수 없다며 기뻐할 것이다. 나는 혓바닥을 둥그렇게 만 채 잠들었다.
*
학원에 이틀간 출근하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깨기를 종일 반복했다. 목덜미를 시작으로 전신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으나 체온을 재보지 않았다. 구급상자에 체온계를 준비해두고 사는 삶으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 서랍을 뒤져 오래전 먹다 둔 타이레놀 캡슐을 찾아 물 없이 입안에 털어 넣었다. 실내 보일러는 켜지 않았다. 아무리해도 집안은 영하 5도보다 한참 따뜻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서 나는 덜덜 떨고 엉엉 울었다. 15년 동안 막혔던 눈물샘에 이상이 생겼는지도 몰랐다.
이틀 만에 출근했을 때 학원 공기는 뒤숭숭했다. 미처 거기까지 예상할 여력이 없었을 뿐 이해할 만했다.
—저 얼굴 축난 것 좀 봐라. 마음고생이 심했나 보다.
혀까지 차며 공연히 걱정해주는 척하는 부원장보다 궁금한 점을 대놓고 물어오는 영어선생이 차라리 고마웠다.
—경찰이 뭐래요? 둘이 어떤 사이였던 거예요? 원래 밖에서 친분이 있고 그랬던 거예요?
얼굴 전체가 물음표로 뒤덮인 표정이었다. 나는 힘없이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신경질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원장실에서 호출이 왔다.
—일단 오늘 수업은 들어가지 마세요. 임시 시간표가 나왔으니까.
—네.
—애들이 아주 시끄러워요. 소문이 늦게야 전해져가지고. 한놈은 죽었으니, 이선생님만 괜히 곤란해지게 생겼어요.
내 처지를 크게 염려해준다는 듯 원장이 말했다.
—어때요? 아무래도 계속 다니기는 어렵겠지요?
그렇잖아도, 책상을 정리하러 나왔다고 나는 대답했다.
—참 하필 이런 일이 생겨가지고 우리도 참 곤란해요. 소문이라는 게 삽시간에 무섭게 이 지역 전체로 퍼져나갈 텐데. 애들은 애들대로 수군대고, 학부모는 또 학부모대로 그렇고. 아직은 괜찮지만 어디 인터넷 신문기사라도 한줄 나오면 아주 끝장나는 거예요. 이니셜로만 떠도 귀신같이들 어딘지 다 맞혀. 참 내 성질대로 하자면 이선생님 상대로 확 손해배상 청구소송이라도 내고 싶은 심정이란 말예요.
—………
—사회선생님, 내가 이런 얘기까진 안하려고 했는데 어른이 하는 충고라고 여기고 참고 들어요. 학원강사도 교육자예요. 책임감과 사명감 없인 안되는 거예요. 이 바닥 좁은 거 잘 알죠? 좀 쉬다 다른 일 찾아보는 게 좋을 거예요.
나는 가만히 목례를 하고 원장실을 나왔다. 타인의 시선은 무섭지 않았다. 어떤 오해를 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내가 이곳을 떠나려는 이유는 철저히 스스로를 위한 것이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교무실로 와 짐을 꾸렸다. 필기구 몇개와 아이들에게 받은 작은 인형이나 사탕상자 같은 것들은 가방에 담았고, 교재들은 재활용 쓰레기통에 넣었다. 다른 강사들은 아무도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나를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느라 다들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떠나는 일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나 보다. 쉬는 시간마다 물을 따라 마시던 흰색 도자기머그잔을 보자 가슴 속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티슈를 뽑아 묵묵히 찻잔을 쌌다.
—저기요, 사회쌤.
아까의 영어선생이었다.
—누가 찾아오셨는데.
반사적으로 이틀 전에 만난 경찰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방을 매고 누구에겐지 모를 인사를 꾸벅 허공에다 했다. 교무실 문을 나서면 학원 출입문까지 짧은 복도였다. 거기 한 사람이 내게 등을 보인 자세로 서 있었다. 전체적으로 여위고 가팔라진 몸뚱이였다. 나는 눈을 비볐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 왜 예상하지 못했던 거지. 머릿속에서 숫자들이 엉망진창으로 뒤엉켰다. 나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곧 왈칵 눈물이 치받혔다.
*
신은 없다. 있다. 없다. 있다. 없다. 있다.
이른 봄, 설문조사에 응해야 했다면 나는 ‘있다’에 동그라미를 쳤을지도 모른다. 동그라미까지는 아니어도 조금 부끄러워하며 세모 모양은 그렸을 것이다. 나는 부쩍 너그러워졌다. 처음 시작된 이래 악화되기만 하던 틱 증세가 눈에 띄게 호전되어 갔다. 3월초 외래방문에서 의사는 퍽 흡족해했다.
—잘 따라와주고 있어요. 느슨해지면 안됩니다. 규칙적인 생활이 중요해요.
결론은 규칙적으로 복용해야 하는 약을 거르지 말라는 것이었다. 틱이 줄어든 결정적 이유가 학교를 그만두고 홈스쿨을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엄마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느정도 일리가 있었다. 극도의 긴장과 이완을 되풀이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영어는 주 4일, 국어와 수학 과목은 주 2일씩, 과외선생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일단 대입 검정고시와 미국유학 준비를 동시에 해보자는 게 엄마의 전략이었다. 엄마는 그밖의 암기과목과 복습, 예습 스케줄을 도와줄 목적으로 대학생을 고용했다.
—생활지도 선생님이야.
그런 명칭으로 소개받은 남자는 보통보다 큰 키에 피부가 하얬다. 깔끔하고 날렵한 얼굴선과 동그란 무테안경이 잘 어울렸다. 그는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선생님은 싫다. 성우형이라고 해줘. 일곱살 차이면 아저씨라고 불리기는 좀 억울하지 않겠냐.
입술이 아니라 얼굴 근육 전체에 주름을 잡아 웃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아침 아홉시면 그가 집으로 왔다. 엄마는 그 시간에 맞춰 출근을 했다. 심장을 팔아서라도 뒷바라지해주겠다는 자신의 다짐을 지키려는 듯 아이스크림 가게를 인수해 일을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는 또 반대했지만 엄마는 반대를 위한 반대로 치부해버렸다.
성우형은 좋은 사람이었다. 과외선생으로서뿐 아니라 형으로서도 그랬다고 생각한다. 형제도 없고, 남자와 우정을 나눠본 경험이 거의 없는 나는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들에 대해 약간의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성우형은 무례하지 않았고 나쁜 냄새가 나지도 않았다. 담배를 피우지 않고 술도 많이 마시지 않았다. 랜디 로즈가 있던 시절의 오지 오스본을 최고라고 생각하고 블랙 사바스를 좋아하는 취향도 나와 비슷했다. 구하기 힘든 오지 오스본 1집이 고향집에 있다면서 나중에 꼭 빌려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서태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이었다.
—뭐 나쁘지는 않아. 지금 당장의 결과가 아니라 음악사적으로 크게 봐야 하니까.
그러나 이렇게 덧붙이는 걸로 보아 속으론 그다지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
—솔직히 자기보다 어린애를 이만큼이라도 인정하는 건 보통 도량으로는 어려운 거거든.
‘넌 아직 잘 모르겠지만’ 따위의 단서를 붙이지 않는 점이 그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낮 동안 빈 집에서 형과 나는 음악을 크게 듣고 공부를 하고 점심을 차려 먹고 가끔은 NBA 중계를 보았다.
세미는 두번이나 집에 놀러왔다. 한번은 지혜와 함께였고, 나중에는 혼자였다. 토요일 수업이 끝난 뒤에 와서 성우형이 끓여준 떡라면을 점심으로 먹고, 저녁으로 삼선볶음밥을 시켜 먹었다. 나와 성우형이 영어 복습을 할 때는 소파에 앉아 드라마 재방송을 보며 조금 졸기도 했다. 세미가 만든 코코아에서는 달콤하고 말랑말랑한 향기가 났다.
—미모의 여자친구도 있고 준모가 형보다 백배 낫다.
성우형의 놀림 섞인 농담에도 세미는 질색하는 기색 없이 방글방글 웃었다. 나중에 다 말해준다던 한남동 집 앞에서의 약속을 기억했지만 채근하지는 않았다. 가만히 기다리는 건 내 주특기였다.
그날 밤 엄마는 밤 열시가 넘어서야 돌아왔다. 한눈에도 고단하고 지쳐 보였다. 장사를 시작한지 한달 만이었다. 급히 옷만 갈아입고는 성경 가방을 챙겨들었다. 교회에 갈 준비였다. 식탁에 멀뚱히 앉아 있는 나에게 엄마가 물어왔다.
—준모야. 한번만 같이 가보면 안되겠니?
—……그럴게요.
엄마는 어리벙벙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몇해째 반복되어온 습관적인 부탁에 내가 갑자기 그런 대답을 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엄마의 교회는 압구정동에 있었다. 화려해 보이는 압구정이라도 다 같은 압구정이 아니었다. 현대백화점 건너편 먹자골목 쪽에는 세련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낡은 건물들이 수두룩했다. 엄마의 교회는 장로교도 감리교도 침례교도 아닌 교회였다. 건물 앞에서 나는 마스크를 추켜올렸다. 오랜만에 마스크를 쓰고 밖에 나섰다. 낯선 장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의자 무장이었다.
교회는 1층에는 전자오락실과 돼지갈비집, 2층에는 만화방과 전당포가 세든 낮은 건물의 3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없었고 계단이 유난히 가팔랐다. 허리관절이 별로 좋지 않은 엄마는 중간에 두어번 멈춰 서서 심호흡을 했다. 계단참에서 희미한 지린내가 났다. 실내는 넓지 않았다. 마룻바닥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도록 장판이 깔렸고, 스무명 남짓의 신도들이 나무 장의자에 드문드문 앉아 있었다. 목사는 막달 임신부처럼 배가 아주 많이 나온 중년사내였다.
예배는 그곳이 아니라 건물 옥상에서 열렸다. 밤에는 아직 서늘한 날씨였다. 검은 밤하늘에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예배가 무르익자 신도들이 갑자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비닐봉지였다. 검정 비닐봉지, 투명 비닐봉지, 반투명 비닐봉지, 오시오 슈퍼마켓 비닐봉지, 신사아구찜 비닐봉지, 독일제과점 비닐봉지.
—주여!
목사가 던진 탄성이 신호였다. 신도들은 저마다 가지고 온 비닐봉지를 일제히 머리에 뒤집어썼다.
—주여! 주여! 주여!
그들은 제각각 울며불며, 제각각 비명을 지르며, 제각각의 기도를 밖으로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대한 난장판이었다. 나는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 엄마의 머리통에도 신반포쇼핑센터의 비닐봉지가 씌워져 있었다. 펄럭이는 비닐봉지로 변신한 엄마는 이방(異邦)의 언어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고 있었다. 내 귀로 알아들을 수 있는 문장이 절반, 그렇지 않은 게 또 절반이었다. 주여, 주여, 아멘, 아멘, 문장과 문장마다 그런 추임새가 쉴 짬 없이 반복되었다.
—벗어. 벗어.
어느새 엄마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준모야. 다 벗고 하느님한테 다 말씀드려. 아멘!
엄마가 내 마스크로 손을 뻗었다.
—하느님한테는 다 고백해도 돼.
엄마의 손을 슬그머니 뿌리치고 나는 그곳을 도망쳐나왔다. 계단을 두개씩 밟아가며 지상으로 내려왔다. 다시는 여기 올 일이 없으리라고 그때는 그렇게 믿었다.
날씨가 많이 훈훈해졌다.
—요 앞 화단에 개나리 꽃망울이 맺혔던데.
삼월의 마지막 주말, 한결 가벼워진 니트 카디건 차림으로 집에 도착한 형이 말했다.
—나가자. 한강 가서 농구라도 하게. 이런 꽃 피는 주말에 집에만 있는 건 죄야.
그때 형의 삐삐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라고 했다. 형이 우리 집 전화기로 전화를 걸었다.
—아, 세미구나?
형이 비교적 덤덤하게 말했기 때문에 나는 몇배의 충격을 받았다.
—그래. 우선 진정 좀 하고. 그래, 그래.
통화를 끝내고서 형이 내게 말했다.
—준모야. 세미가 갈 곳이 없다는데 일단 여기 오라고 해도 될까?
—지, 지금, 학, 학교에 있을 시간인데.
나는 더듬거렸다.
—그, 그래요.
세미가 형의 삐삐 번호를 어떻게 아느냐고, 왜 내가 아니라 형을 찾느냐고 묻지 못했다.
—학교를 안 간 것 같아. 무슨 일인지 모르겠는데 막 울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