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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당신의 승리들을 점거하라
‘월가 점거’ 일주년을 기념하며
리베카 쏠닛 Rebecca Solnit
미국의 사회평론가, 시민운동가. 1980~90년대 반핵운동에 몸담았으며 현재 뉴욕 자유대학 프로그램과 캘리포니아 인문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국내 번역 출간된 저서로 『어둠 속의 희망』 『걷기의 역사』 『이 폐허를 응시하라』 등이 있다.
*이 글은 진보 성향의 미국 온라인저널 탐디스패치(www.tomdispatch.com)에 2012년 9월 16일과 27일 게재된 두편의 칼럼을 옮긴 것으로, 원제는 각각 “Occupy Your Victories: Occupy Wall Street’s First Anniversary” “The Rain on Our Parade: A Letter to My Dismal Allies”이다. 본문에 작은 글씨로 들어간 간주(間註)는 모두 옮긴이 주이다. ⓒ Rebecca Solnit 2012 / 한국어판 ⓒ 창비 2012
‘점거하라’(Occupy)는 이제 한살이다. 상당수의 중요한 문제들에서 일년이란 터무니없을 정도로 짧은 시간이다. 한살 때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는 위대한 화가가 아니었고 베씨 스미스(Bessie Smith)도 뭐 대단한 가수라 할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흑인민권운동이 일어난 지 일년이 된 때에도, NAACP(유색인지위향상 전국협회) 몽고메리 지부의 이름 없는 사무장과 애틀랜타 출신의 한 설교사—즉 로자 파크스(Rosa Parks)와 마틴 루서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가 촉매가 되어 일어난 ‘몽고메리 버스 안 타기 운동’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점거하라’라는 이 팔팔한 아이는 일년 전 그토록 강한 투쟁과 기쁨 속에서 태어났고, 우리는 지금 그로부터 12개월이 지난 시점에 있다.
2011년 9월 17일 당시 ‘점거하라’는 대단한 일로 보이지 않았고, 대다수가 젊은이인 군중이 맨해튼의 주코티 공원을 향해 갈 때 그것을 바라본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 운동의 가장 대단한 측면은 지구력임이 증명되었다. 사람들은 승리 혹은 패배를 선언하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바로 그곳이 집이라고 결정하고 촉매작용으로 가득한 두달 동안 거기에 자리잡은 것이다.
텐트와 총회, 그리고 ‘점거하라’의 행동과 수단, 이념 들이 미국 전역에 걸쳐, 그리고 알래스카에서 뉴질랜드에 이르는 서구 세계와 일부 아시아권에서도 폭발적으로 나타났다. 지난주까지도 ‘홍콩을 점거하라’는 강력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한동안은 이 아기가 대단한 물건임을 쉽게 알 수 있었지만, 이윽고 전부는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도시 텐트촌이 해체되었고 운동은 뭔가 좀더 미묘한 것이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들이 그것은 사라졌노라고 말하게 내버려두지는 말자.
작년에 누군가 내게 물어온 가장 깜짝 놀랄 만한 질문은 “‘점거하라’의 10개년 계획은 무엇입니까?”라는 것이었다.
누가 그런 장기적인 관점을 취하는가? 미국인들은 정치적 운동을 슬롯머신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어서, 은행주 세명이 감옥에 가든가 혹은 세가지 분명한 승리가 성취되든가 하는 식으로 신속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동전만 버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활동가도 승리라는 게 정말 어떤 것인지 아직 규명한 바가 없는 마당에 우리가 거기에 도달할지 말지를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때때로 우리는 세가지 분명한 승리를 실제로 얻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혹은 승리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아무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축하하는 게 합당한 일임을 깨닫지 못하기 일쑤며, 어떤 때는 심지어 그것이 승리임을 알아채지조차 못한다. 우리는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승리란 대개 간접적이고 불완전하며 느리게 찾아온다. 또 우리가 영향력을 미쳤다고 추측할 수는 있어도 증명할 수는 없는 상황인 경우가 많지만, 그럼에도 하나하나 손으로 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승리인 것이다.
한줌 이상의 승리들
‘점거하라’ 일주년을 기념하여 뉴욕과 쌘프란시스코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그리고 전국 곳곳에서 그보다 작은 규모의 행동이 다수 계획되었지만, ‘점거하라’의 깃발 아래 모인 사람들 중 일부는 그동안 줄곧 조용하고 대체로 눈에 띄지 않는 방식으로 꾸준히 일해왔다. ‘채터누가(미국 테네시주의 도시)를 점거하라’에서부터 ‘런던을 점거하라’까지, 사람들은 어떤 때는 그저 토론회를 열기 위해, 어떤 때는 주택차압을 저지하거나 대중시위를 계획하기 위해, 혹은 다른 형태의 조직화 작업에 참여하기 위해 매주 만나고 있다. 예를 들어 8월 22일에는 쌘프란시스코의 저소득층 주거지에 위치한 킴 미첼의 집에 대한 주택차압이, ‘버널을 점거하라’와 ‘노이밸리를 점거하라’(쌘프란시스코에 이웃한 지역들)가 ACCE(공동체권리를 옹호하는 캘리포니아인연합)와 더불어 결성한 연합에 의해 저지되었다. ACCE는 공화당 정부에 의해 와해된 ACORN(개혁을 위한 지역사회단체연합)을 계승한 단체이다.
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승리였고, 경제적으로 또 인종적으로 다양한 단체들이 이렇게 아름답게 협력한다는 것은 또다른 승리였다. ‘주택을 점거하라’ 덕분에 이같은 시위와 승리는 미네쏘타를 포함한 미국 전역에 걸쳐 정기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달 초순에는 ‘월가를 점거하라’의 도움을 받아 맨해튼의 식당노동자들이 어떤 형편없는 사장과 직장폐쇄를 물리치고 레스토랑 체인인 핫 앤드 크러스티의 한 가맹점에 결국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직장에서 쫓겨난 동안 노동자들은 보도를 점거하고 거기서 ‘노동자 정의 까페’를 운영했다)
로드아일랜드주의 프로비던스에서는 지난 1월말 ‘점거하라’ 텐트촌이 해산했지만 이는 시 당국이 노숙자를 위한 주간 쉼터를 연다는 조건하에서만 이루어졌다. 프린스턴대학은 더이상 대형 은행들을 캠퍼스로 초대해 채용활동을 벌이게 하지 않는데, 이는 십중팔구 ‘프린스턴을 점거하라’ 덕분인 것 같다.
이같은 수많은 작은 승리가 있었을 뿐 아니라 몇몇 큰 승리도 있었다. ‘돈을 옮겨라’(Move Your Money, 월가의 대형 금융기관에 맡겨놓은 돈을 지역기반의 소규모 금융기관으로 옮기자는 캠페인) 기획의 파급효과라든가 학자금대출 채무노역에 반대하는 점증하는 저항, 그리고 좀더 간접적으로는 주택차압 조치의 남용으로부터 주택 소유자를 보호하는 캘리포니아 법안의 통과 등이 그러한 예이다. (이는 분명히 ‘점거하라’가 그 조치의 야만성과 타락을 강조한 데 힘입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가시적인 성취를 하나의 기초로 삼아야지 거기에 빠져서는 안된다. 한층 덜 가시적인 ‘점거하라’의 정신이라든가 그것이 촉발한 새로운 유대야말로 다음에 어떤 현실이 도래하든, 즉 예의 10개년 계획을 위해서 진정 중요한 것이다. ‘점거하라’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거대한 만남의 장이었다. 분리하고 고립시키는 데 능한 가상세계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들이 갑자기 공공장소에서 서로 얼굴을 맞대고 만난 것이다. 거기서 그들은 경제정의와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열정이라는, 그리고 자본주의가 초래한 광범한 고통에 대한 인식이라는 공통의 토대를 발견했다.
나이와 인종, 계급 같은 일상적인 차이들을 가로지르며, 일자리가 있는 이들과 없는 이들은 물론, 집을 가진 이들과 집 없는 이들 사이에서도 유대가 형성되었고 그러한 유대의 일부는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 유대를 둘러싸고 엄청난 감정들이 오갔다.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는 기쁨, 부채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그 그늘에서 벗어날 때 떨어져나간 수치심, 우리 중 그토록 많은 이들이 경찰에게 공격당할 때 발휘된 맹렬한 결속력, 모든 것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눈부신 희망, 그리고 이미 그렇게 달라진 순간에 느낀 신바람.
사람들은 직접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배웠다. 사람들은 힘을 맛보았고, 타인과 공통된 어떤 것을 발견했으며, 공공의 삶을 살았다. 그 모든 것이 중요했고 지금도 여전히 중요하다. 그것들은 미래를 위한 위대한 기반이자 현재를 살아가는 멋진 방식이다.
‘점거하라’는 어쩌면 너무나 성공적인 브랜드라서 이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진행 중인 민중봉기의 일부라는 사실이 때로 감춰지기도 했다. 이들 민중봉기에는 가령 아랍의 봄(세개의 성공적인 혁명과 현재 진행 중인 시리아 내전, 예멘 봉기 등을 포함하는), 몬트리올과 멕시코, 칠레에서 일어나 계속 발전하고 확장하는 학생봉기, 스페인과 그리스, 영국에서의 경제적 저항, 아프리카 여기저기에서 진행 중인 시위와 내란사태, 심지어 인도, 일본, 중국, 티베트에서의 다양한 저항 행위들이 있으며, 그중 어떤 것은 대규모의 강력한 운동이다. 당신이 눈치채지 못했다 하더라도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는 갖가지 형태의 반란이나 내란 혹은 항의 사태를 맞고 있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유사성이 중요하다. 그 유사성을 다 합해보면 당신은 탐욕, 정치적 부패, 경제적 불평등, 대대적 환경파괴, 어두워지고 쪼그라드는 미래 등에 대한 유사한 분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영웅시대
그럼에도 일주년 기념일은 숱한 주류언론으로 하여금 수많은 이야기를 꾸며내도록 만들기 십상이지 싶다. 즉 ‘점거하라’는 그저 작년에 무너져버린 한 무리의 텐트촌일 뿐이고, 순진해빠졌더랬으며, 그냥 그걸로 끝장났다고 당신에게 확언할 것이다. 이 말을 믿지 마라. 합리적으로 되지 말고 현실적으로 되지 말며 패배하지 마라. 일년은 아무것도 아니다. 주류언론은 힘이 어디에 있는지 변화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망각하고 있는데, 당신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바로 그 언론이 화요일부터 당신에게 당신이 얼마나 무력한지, 그리고 모든 권력이 선거에서 이겼거나 선거를 매수한 정장 차림의 남자들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관해 아흔아홉가지를 말할 것이지만 그 역시 믿지 마라. 대신 블라지미르 뿌찐(Vladimir Putin)이 밝은색 천모자를 뒤집어쓴 세명의 젊은 공연자(펑크록 그룹 푸씨 라이엇이 러시아정교회 성당에서 반뿌찐 공연을 하던 중 세명이 체포・투옥됨) 때문에 얼마나 겁에 질렸는지, 마찬가지로 월가가 우리 때문에 얼마나 공포에 떨고 있는지에 주목하라. 그들은 우리가 곧잘 잊어버리는 어떤 것을 기억한다. 즉 함께 있으면 우리가 놀랄 만큼 강력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만들 수 있고 만들어왔다. 또 앞으로 만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그 소중한 것에서 눈길을 떼지 않고, 커다란 텐트를 치며, 목표에 도달하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때에만 그러하다.
우리는 그야말로 영웅시대에 살고 있다. 미얀마의 아웅 산 수치(Aung San Suu Kyi)의 시대이자 멕시코의 사빠띠스따의 시대, 존 루이스(John Lewis)와 조지프 로워리(Joseph Lowery) 목사를 포함한 흑인민권운동의 핵심 조직가들의 시대, 그리고 아르헨띠나에서 아이슬란드에 이르는 곳곳의 수많은 이름 없는 남녀 영웅들의 시대다. 그들에 대한 찬양의 노래도 종종 울려퍼지고 그들이 보여주는 용기와 진실성, 관대한 정신과 비전 같은 것들이 모두 중요하지만, 나는 우리가 별로 염두에 두지 않는 또다른 미덕에 관해 말하고 싶다. 우리 마음에 들거나 온화하게 보일 때는 인내라 부르며, 우리 마음에 들지 않거나 온화하게 보이지 않을 때는 고집이라고 부르는 미덕 말이다.
수치 여사는 1990년 그녀가 얻어낸 승리를 군사정권이 탈취해간 이후 여러해 동안의 가택연금과 위협에도 꿋꿋하게 버텼고, 겨우 올해 들어서야 상황이 다소 변화를 보였다. 흑인민권운동의 사례에서처럼, 고집스러운 사람들이 설정한 목표는 처음에는 종종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 점에서는 19세기초 미국의 노예제폐지운동도 매한가지인데, 이 운동은 노예제의 잔악상을 근절하기 위해 시작되어 승리에 도달하기까지 30여년이 걸렸다. 그래도 이는 동시대의 여성운동이 투표권 같은 기본적인 권리를 얻어내는 데 걸린 시간보다 훨씬 빠른 것이다. 변화는 일어나기 마련이지만 수십년이 걸릴 수 있다. 또한 변화는 한편으로 새로운 에너지의 수혈을, 더불어 그런 수십년의 기간에 꿋꿋하고 끈기있게 (혹은 고집스럽게) 남아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한다.
나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운동을 이끄는 영웅들이 지닌 꿋꿋함이 단지 사실에 입각해서일 뿐 아니라 신념에서도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대의가 정당하고 이것이 지구상에서 살아가는 올바른 방식이며 자신의 활동이 중요한 일이라는 신념이 있었으며, 결과가 나오기 수십년 전에 이미 그런 신념을 갖고 있었다. 미얀마의 장군들이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백분리주의 체제, 미국의 흑인차별정책인 짐 크로우(Jim Crow), 5000년간의 가부장제, 혹은 수세기 동안의 동성애혐오증에 맞설 가능성을 따지자면 비현실적이 될 수밖에 없었을 테지만, 우리 중 비현실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을 바탕으로 바로 그 일에 뛰어들었고 엄청난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현실주의가 과대평가되고 있지만, 사실 ‘점거하라’ 운동은 이미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일찌감치 전국적 논쟁을 변화시켰고 이전에는 뻔히 보이는 곳에 감쪽같이 숨어 있던 것을 훤히 드러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월가의 폭력을, 다른 한편으로는 나머지 대부분의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공동체와 정의, 진리, 힘 그리고 희망을 향한 열망을 모두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중요한 단서가 될 무엇을 발견했다. 수백만의 소위 ‘깡통주택’ 소유자나 의료비 채무자, 나중에 월급을 받아 갚는다 해도 도저히 빚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써브프라임(비우량) 교육에 속박된 학생들에게 떠맡겨진 그 채무노역에 관해 우리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는지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 ‘점거하라’의 또다른 귀중한 성취가 있다. 그것은 현행 경제체제가 얼마나 끔찍하고 파괴적인가를 우리가 분명하게 큰 소리로 이론의 여지 없이 표현했다는 사실이다. 무언가에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은 하나의 강력한 행동이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현실을 바꾼다. 그리고 이것은 왜 선거정치가 완곡어법과 평행우주이론에서부터 놀라운 거짓말과 완전한 얼버무림에 이르는 넓은 스펙트럼을 섭렵하는지를 완벽히 설명해준다. ‘점거하라’ 운동은 수완 좋게도 진실을 가득 실은 트로이의 목마를 월가의 요새로 데리고 왔다. 청동 황소(월가의 금권을 상징하는 동상)조차 그 목마를 제압할 수 없었다.
장래의 가능성들을 도중에 만나기
10개년 계획은 마치 지도처럼 그동안 우리가 어디에 있었고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기 원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 쌘프란시스코에서 열릴 일주년 기념행사에서 참가자들은 부채에 갇힌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상징적인 행위로서 학자금대출 계약서와 주택담보대출 계약서를 불태울 것이다. 뉴욕에서는 ‘월가를 점거하라’가 일주년을 기념하여 채무자 모임과 부채 화형식에 집중하는 중이다. 올해 9월 17일에는 구체적인 목표가 선언되고, 부채 저항자들을 위한 사용설명서(Debt Resistors’ Operations Manual)가 첫선을 보인다. 누가 알겠는가? 10년 내에 그 목표 중 일부라도 완전히 실현되는 일이 생길지.
이를 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결심이 필요하다. 아무런 성과가 없더라도 말이다. 이는 도중에 맞이하는 실제 패배뿐 아니라 과도적이고 불완전한 승리에 대해서도 심통을 부려서는 안됨을 뜻한다. 10년 동안 우리는 흥미진진한 사태를 볼 수도 있다. 가혹한 새 파산법이 일시에 역전된다든지 학비조달 방식이 변하거나, 은행법이나 담보대출법이 대폭 바뀌면서 어쩌면 부채탕감 같은 해결책이 나올 수도 있다.
완벽한 승리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아예 승리처럼 보이지 않거나 우리가 기대했던 모습이 아닐 수도 있으며, 순수주의자들이라면 ‘타협’이라고 개탄할 여러 단계를 계속 밟아나가는 것일 수도 있다. 케이크 하나에서부터 책 한권에 이르기까지 당신이 실제로 만들어내는 모든 사물이 결코 당신 머릿속에 있는 플라톤적 이데아와 닮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승리는 그 견본과는 다른 모습일 수 있다. 하지만 승리가 아무리 불완전할지라도 당신은 그것을 한발 나아간 성취로 인정하여 축하해야 하며, 결코 길이 끝났다거나 이제 그만 걸어야 한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그래도 여전히 당신이 결과 이야기를 해야겠다면, 나는 학자금부채 문제를 민주당의 공약에 올려놓고 그것을 오바마 선거운동의 주요 화두로 만든 것은 ‘점거하라’와 이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학생운동가들로부터의 압력이었다고 확신한다. 지금으로부터 10년 후 만약 학자금조달 방식이 더 긍정적인 쪽으로 변한다 해도 그것이 왜, 그리고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리고 누가 그 모든 일을 시작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그래서 아무도 그걸 기념하지도 않고 우리가 정말로 얼마나 강력해질 수 있는지를 아무도 느끼지 못할까봐 나는 걱정스럽다.
그것은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 중 어떤 사람들에게 그토록 오랫동안 참정권을 박탈해온 투표권이 그렇듯이 말이다. 기후 및 환경 운동가들 덕분에 이 나라에 100개 이상의 화력발전소가 건설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것과 꼭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전에는 세상이 도무지 달랐음을 장차 잊어버릴 것이다. 만약 ‘350.org’(대기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350ppm 이하로 유지하자는 운동을 펼치는 미국의 환경단체)를 비롯한 반대세력이 없었다면 키스톤 XL 송유관(캐나다 앨버타의 유전에서 미국 텍사스의 정유시설까지 이으려는 계획이었으나 현재 오클라호마 구간까지 완공되고 중단된 상태다) 공사가 지금쯤은 끝났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이유로 이야기, 특히 우리의 힘과 우리의 승리와 우리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중요하다.
감사하며 뒤를 돌아보기, 치열하게 앞을 내다보기
한때 이 나라에는 거대한 반핵운동이 있었다. 그것은 처음에 ‘평화로운’ 원자력발전의 어리석음과 위험성에, 그다음에는 핵무기의 사악함에 초점을 맞추면서 지금은 기억에서 사라진 많은 승리를 얻어냈다. 부분적으로는 안전기준이 매우 상향 조정되었기 때문인데, 1970년대 이래 실제로 우리가 원자로를 하나도 건설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유념한 적 있는가? 그레이트베이슨(미 서부에 위치한 대분지) MX미사일 시설이 끝내 지어지지 못했다는 것, 씨에라블랭카(뉴멕시코주의 화산산맥)와 워드밸리(캘리포니아주 모하비 사막 동부지역), 유카 산(그레이트베이슨 사막에 위치)에 핵폐기물 처리장이 끝내 세워지지 못했다는 것을 지금 누가 기억하고 있는가?
몇몇 전략무기감축협정에 관해 아직까지 기억이나마 하고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하지만 반핵운동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성과는 이룩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활동가에게 감사하라. 그리고 특히 초창기에 등장한 선각자들과, 1980년대 초반 핵동결운동에 참여한 수백만의 사람들이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버린 후에도 오랫동안 꾸준히 그 일을 해온 고집 센 이들에게 감사하라. 그들 중 일부는 지금도 여전히 활동하고 있으며, 우리는 모두 그 덕을 입은 수혜자들이다.
1970년대에 시작된 일련의 반핵 활동을 한 초창기 단체들 가운데 하나는 뉴햄프셔주에서 제안한 씨브룩 원자력발전소 건립에 반대하기 위해 1976년에 창설된 ‘조가비연맹’(Clamshell Alliance)이다. 씨브룩에 원자로 1기가 건설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가동 중이다. 한 원자로는 반대에 부딪혀 건설이 취소되었다. 첫번째 원자로를 짓는 데 애초에 책정했던 비용의 다섯배가 들어갔고, 이로 말미암아 그 소유자인 뉴햄프셔 공공사업단은 지방세 납세자들이 그 비용을 내도록 만드는 데 실패하면서 당시로는 미국 역사상 네번째로 큰 파산을 당했다. 이를 부분적인 승리라고 할수도 있겠으나 조가비연맹은 훨씬 많은 일을 해냈다.
그들의 정신과 창조적인 새로운 접근법은 미국 전역의 다른 활동가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고 또다른 운동을 생성하는 데 일조했다. 조가비연맹의 활동 여파로 66개의 원자력발전소 건설이 취소되었다. 조가비연맹과 그뒤를 이은 많은 반핵 단체들이 비위계적이고 직접민주주의적인 조직방식을 발전시켰다는 사실 역시 명심하라. 그 이래로 미국 안팎의 운동과 운동가들이 이 방식을 사용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로 ‘월가를 점거하라’가 도입했던 합의에 기초한 총회 방식은 상당 부분,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한 무리의 히피들에게서 따온 것이었다.
활동가 빌 모이어(Bill Moyer)는 1978년에 조가비연맹의 회원들을 만났는데, 당시 그는 회원들이 전국적인 운동을 고취시키는 일에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다고 생각한 반면, 회원들 스스로는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한 말은 여전히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금요일 밤에 나는 자기네가 성취한 것들에 대해 자부심을 지닌 기백 넘치고 낙관적인 집단을 만날 거라고 기대했다. 조가비연맹의 활동가들이 고개를 숙인 채 풀이 죽고 침울한 모습으로 도착해 자기네가 해온 노력이 헛수고였다고 말했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조가비연맹이 겪은 낙심과 좌절의 경험은 조금도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다. 과거 20년 동안 있었던 모든 주요한 사회운동은 ‘이륙’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후 몇년 이내에 심각한 좌절을 겪었다. 그런 좌절 속에서 활동가들은 자신의 운동이 실패했고 강력한 제도들은 너무나 강력하며, 자신의 노력은 쓸데없는 것이라 믿었다. 이러한 상황은 심지어 어떤 운동이 과거의 성공적인 사례가 택했던 정상적인 길을 따라 실제로 상당히 잘 진척되고 있는 경우에도 나타난 바 있다.”
‘점거하라’와 더불어 놀랄 만한 사건이 이미 일어났고, 한층 더 놀랄 만한 체계적인 변화가 목전에 도래했을 수도 있다. 이것이 미국 국내뿐 아니라 해외 곳곳에서도, ‘투쏜을 점거하라’에서부터 ‘뱅고어를 점거하라’에 이르기까지, 수천의 도시와 소도시, 심지어 시골 벽지에도 퍼져나간 운동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리고 이미 일어난 일들의 많은 효과가 헤아릴 수 없이 지대하다는 사실, 또 현재의 많은 성취들은 장차 상황이 더 진행된 다음에야 비로소 분명해지리라는 것을 명심하라.
거리로 나가 일주년을 기념하고 2021년을 위한 꿈을 꾸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라. 우리가 꿋꿋하다면, 우리가 포용적이라면, 우리가 추구하는 그 소중한 것으로부터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정의하고 그것을 향한 전진을 알아보며, 우리가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기억한다면, 2021년에 우리는 훨씬 큰 무엇을 기념하고 있을지 모른다. 갈 길이 멀지만 우리는 이곳에서 그곳까지 갈 수 있다.
우리의 가두행진에 내리는 비
나의 음울한 우군들에게 보내는 편지
친애하는 우군들에게
내가 파리 몇마리를 쫓으려고 우리의 소중한 목표에서 잠시 눈을 떼더라도 용서하세요. 하지만 파리들이 아까부터 계속 윙윙대고 있거든요. 나에게는 한가지 원대한 목표가 있습니다. 바로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깊은 욕망을 지닌 공화당 우파에 맞서는 한편, 민주당이 진심으로 지지하는 것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는 나의 우군들로 추정되는 이들의 나쁜 습관에 거듭 부딪히곤 했어요.
오, 곰팡내 나는 극좌파들이여, 제발 그대들의 투덜거림을 멈추세요! 당신들에 비한다면 이요르(만화 ‘곰돌이 푸’에 나오는 비관적이고 우울한 성격의 당나귀)가 불평하는 소리는 텔레토비(유아용 TV 씨리즈의 캐릭터)처럼 귀엽게 들릴 지경이에요. 내가 만약 당신들에게 조랑말 한마리를 준다면 당신들은 모든 사람이 다 조랑말을 갖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에 분노할 뿐 아니라, 그 조랑말이 충분히 급진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말을 괴롭혀 끝내 슬픔에 찬 커다랗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도록 만들 거예요. 우리가 지금 여기서 하는 이야기는 어떤 분석이나 전략, 우주론이 아니라 하나의 태도, 그것도 우리에게 독이 되는 어떤 태도에 관한 것이에요. 단지 나뿐 아니라 당신들과 우리, 그리고 우리의 가능성들에 독이 되는 것이지요.
좌파들은 내게 상황을 설명해요
그 독은 종종 선거정치를 둘러싸고 나타납니다. 가령, 오바마가 나쁜 일들을 하고 나는 그것을 개탄하지만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기 때문에 난리법석을 피우지는 않아요. 그는 가끔 그런대로 괜찮은 일도 하며 나는 가끔 그것에 관해 언급하고 지나가지만, 언급한다고 해서 그가 한 나쁜 일들의 실상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지요.
다른 정치인들에게도 똑같은 논리가 적용됩니다. 예컨대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주에서 최근까지 주지사였던 아널드 슈워츠네거(Arnold Schwarzenegger)는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 몇가지 측면에서 꽤 잘했어요. 그러나 내가 이런 말을 급진주의자에게 한다면 백발백중 슈워츠네거가 망쳐놓은 다른 모든 사안에 대한 이야기를 한바가지나 듣게 됩니다. 마치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뭔가 최신 뉴스를 갖고 있고, 그 사람은 나를 어디 동굴에서 살다 나온 사람으로 취급하며, 나쁜 일들이 있기 때문에 좋은 일들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는 듯이 말이에요. 결과적으로 슈워츠네거가 기후변화에 대해 뭘 하고 있는지 토론하는 게 불가능해졌어요. (그리고 내 대화 상대자들은 그 일에 관해 알 필요도 없고,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궁리할 필요는 더욱이나 없는 거지요)
따라서 나는 여기서, 터무니없을 정도로 명백하지만 분명히해둘 필요가 있어 보이는 하나의 원칙을 제시하고 싶어요. 나쁜 일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은 나쁘다. 비록 그런 나쁜 일들은 나쁘지만, 좋은 일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은 좋다. 뭔가 좋은 일을 언급할 때 반드시 자동적으로 나쁜 일을 함께 내세울 필요는 없어요. 좋은 일이란 우리가 어딘가에 도달하고자 할 때 그 자체로 따라감 직한 흥미로운 길일 수 있어요. 그런 맥락에서 볼 때 나쁜 일은 막다른 골목이 지닌 모든 안전요소를 내포하고 있어요. 그리고 맞아요, 선거정치 영역의 많은 것들이 끔찍해요. 그러나 선거정치란 또한 세상일의 상당부분을 좌우하기도 하기 때문에 만약 당신이 정치적이고 싶거나 적어도 물정이라도 알고 싶다면 그것에 주목해야 하고 심지어 협력해야 할 수도 있어요.
그러기는커녕 실제적인 승리나 건설적인 발전의 사례를 다룰 때조차도, 당면한 과제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헤아리는 것이라고 전제하는 그런 종류의 반응과 끊임없이 마주칩니다. 최근 나는 캘리포니아주의 현직 검찰총장인 카말라 해리스가 사형제 반대자이며 주택차압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 데서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그러자 한 성마른 버클리대 교수가 즉각 이런 식으로 응답하더군요. “실례지만, 그녀가 사형제 반대자이긴 해도, 그녀 휘하의 검찰청이 극약주사의 불법적 구매를 용인했다는 사실도 분명히 짚고 갑시다.”
검찰총장인 사람이 몇가지 핵심적인 사안에서 전체 미국인의 12퍼센트에게는 꽤나 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축하하고 이를 토대로 우리가 어디로 나아갈지를 헤아려보는 일이 우리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교수는 내 열의를 묵살하고 토론을 김빠지게 하려고 했는데, 그게 정확히 어떤 목적에 도움이 될까요?
이런 식의 반응은 종종 덜 급진적인 이들을 벌주거나 비난하는 분위기를 풍기는데, 이는 운동이나 동맹을 구축하는 일과 정확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아예 그 자리를 떠날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의 입을 여는 데 그만큼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 바닥에서 통용되는 불평이나 욕지거리는 해대겠지만요.
내 친구 제이미 코테즈(Jaime Cortez)는 참으로 멋진 사람이자 작가인데, 내게 이런 글을 보냈어요. “최근 한 디너파티에서 나는 오바마 건강보험개혁안의 일부가 통과되어서 2014년부터 상황이 개선될 거라며 기쁨을 표시했어. 그러자 사람들은 오바마가 지지하는 무인폭격기 프로그램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환기시키는 말들을 마구 쏟아내는가 하면 오바마 건강보험개혁안이 얼마나 불충분한가를 상기시켜주더군. 나는 개혁안이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하나의 점진적인 개선책이고 그래서 나는 기쁘다고 대꾸했어. 하지만 정말이지 그런 걸 고마워한다고 바보 같고 어설픈 인간이 된 기분이었어.”
임금님은 벌거숭인데 재미가 없어요
어쩌면 그런 태도는 이 땅에 남겨진 청교도주의적 유산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즉 문제를 시정하거나 온정을 나누는 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자신의 순수성과 우월성을 드러내 보이려는 거죠. 그것은 아마도 주류세계에서 자랐으며, 임금님은 옷을 입지 않았고 체제에는 노골적인 거짓말과 위선, 부패가 존재한다고 지적하는 아이처럼 느끼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태도이겠지요.
정말이지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이미 임금님의 엉덩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만큼 알고 있고, 토론할 가치가 있는 다른 것들도 있답니다. 흔히 그렇듯, 어쨌든 중요한 뉴스는 임금님이 아니라 반란을 일으켰거나 심지어 승리를 거둔 농민들인데, 지금 내가 묘사하려고 애쓰는 그런 사고방식은 분노에 빠져, 그리고 아마도 자기긍정에 빠져 임금님한테 갇혀 있습니다.
당신이 망치라면 모든 게 못으로 보이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가까이에 있는 것을 모조리 두드려박을 이유는 못됩니다. 무엇을 끌어올려야 할지 생각하세요. 우리의 힘과 우리의 승리, 우리의 가능성을 숙고하세요. 자신이 정확히 무슨 일에 기여하는지, 어떤 종류의 이야기를 하는지, 또 어떤 종류의 이야기를 해나가고 싶은지 자문해보세요.
‘점거하라’ 일주년 기념일에, 나는 뉴욕 주코티 공원을 처음 점거했던 이들과 함께 어울려 앉아 있다가 한 멋진 젊은이가 또래의 동료들, 특히 남자들이 흔히 갖고 있는 분노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그러나 분노란 때론 일을 해내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줄지언정 전술도 전략도 아니라고 덧붙이더군요.
무수한 사람들이 빠져 있는 이런 사고방식—혹은 어쩌면 많은 유래를 지닌 많은 사고방식들—을 상상해보는 수많은 방식이 있어요. 그중 한가지 형태는 학문적 토론에서 비롯된 것일 텐데, 그것은 최상의 경우 시험과 도전을 통해 건설적인 협업으로 어떤 논지를 정립하는 일이겠지만, 최악의 경우 습관적으로 모든 것을 찢어발기는 짓을 뜻하며, 비생산적이기 이를 데 없는 심술의 하위문화를 촉진하지요.
만약 흑인민권운동이 만사가 성에 차지 않는다고 여기는 불평분자들에 의해서 전적으로 운영되었더라면 과연 그 운동이 얼마나 진척되었을지 상상이 됩니까? 훨씬 더 큰 문제가 걸린 마당에 고작 몽고메리 대중교통체계에서의 흑백통합(흑백분리 좌석의 철폐)이 뭐란 말인가!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간디의 소금행진에 참가한 사람들이 바닷가로 가면서 내내 투덜대는 광경이라든지 부사령관 마르꼬스(사빠띠스따의 지도자)가 단지 라깐돈 밀림의 최대 불평꾼일 경우의 사빠띠스따, 혹은 신랄한 미국인 학자처럼 처신하는 아웅 산 수치를 그려보세요. 수차례 고문당한 경험을 내게 들려준 한 이집트 혁명가가 결코 그런 피해를 당해본 적이 없는, 내가 여기서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보다 훨씬 덜 원한에 사무친 것으로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켜켜이 쌓인 이런 분노의 근저 어딘가에는 이상주의가 놓여 있습니다. 세계가 완벽하기를 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그리고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비등그러진 그런 악성 이상주의 말입니다. 완벽한 것이 곧 좋은 것의 적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정말이지 여러분, 우리가 이 불완전한 순간에도 잘해나갈 수 있는 것은 어떤 기백과 단결심, 치열한 희망, 그리고 관대한 마음을 통해서이기 때문이거든요.
우리는 예시(豫示)적 정치에 관해, 즉 당신 스스로 당신의 목표를 구현해낼 수 있다는 발상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는 흔히 직접민주주의적인 수단을 통한 정치적인 조직행위라는 관점에서 논의되곤 하지만, 영웅적인 정신을 가진다든가 관대한 태도를 취한다는 관점에서 논의되지는 않지요.
좌파의 투표 억압
이러한 무분별한 성마름의 한가지 징후는 4년에 한번씩 방송을 타는 표현, 즉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는 두개의 악(惡) 중 차악을 고르도록 요구받는다’는 표현입니다. 이제 이것은 어떤 분석도 통찰도 아니고 그저 상투어일 뿐입니다. 그것도 무척 지겨운 상투어이며, 흔히 후보자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주장과 한묶음으로 전달됩니다. 하지만 그 표현을 이렇게 재구성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는데, 아예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둘 중 더 악한 것을 선택하는 것과 동일할 수 있다고.
그러나 결혼할 권리나 차별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또는 의료 서비스에 접근할 권리를 갖는 것은 둘 중 덜 악한 쪽이 아닙니다. 만약 내가 민주당에 표를 던진다면 그것은 고통받는 사람의 수가 조금이라도 줄어들기를 바라는 희망에서지, 그 선택이 세상의 고통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나의 목표 근처 어딘가로 데려다줄 거라고 믿어서, 혹은 그것이 내가 지향하는 가치를 완벽하게 대변한다고 믿어서도 아니에요. 그러나 사람들은 기꺼이 이 ‘악’이라는 구호를 사용해 지구의 운명과 그 위에서 살아가는 만물의 운명에 내포된 그 모든 무한한 복잡성을 둘둘 말아 내다버리고 있어요.
나는 선거정치, 특히 국가 차원의 선거정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대체로 나는 이러한 선거가 대체로 맥 풀리는 일이고, 그보다는 세계 곳곳에서 민중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운동들, 그리고 더 많은 온정과 더 많은 창조성을 향한 한층 섬세한 사회적 변화와 상상력 차원의 변화에서 진정한 희망을 찾습니다. 그럼에도 4년마다 한번씩 우리는 발이 밟히는 것과 마취 없이 발목이 잘려나가는 것 중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 질문을 받습니다. 좌파 측의 통상적인 답변은 그 두 경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자기네는 체 게바라에게 족욕치료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것이에요. 그러나 지금 체 게바라의 족욕치료는 실현 가능한 선택사항이 아니잖아요. 천국에 가면 틀림없이 엘 헤페(피델 까스뜨로의 별칭)가 우리 모두의 발톱에 국방색 칠을 해주겠지만 말이에요.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인 현재 시점에서 둘 사이의 차이를 실제로 검토하자는 것도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발이 밟히는 쪽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우리 모두가 그 견딜 수 없는 발목 절단에 더 가까이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사람들이 고통을 겪을 당사자가 아닌지도 모르지요. 왜냐하면 그들의 재정형편이나 의료, 교육 접근권 등이 위태롭지는 않을 테니까요.
밀입국자 한 사람은 내게 보내는 편지에서 “민주당은 우리의 친구가 아니라, 우리가 협상할 수 있는 유일한 당일 뿐이에요”라고 썼어요. 그런가 하면 네바다주의 한 활동가 친구는 이렇게 말했어요. “맙소사, 캘리포니아에선 거룩한 체하면서 투표를 하든 말든 상관없지만, 저 불평투성이 급진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투표가 중요한 주들에서의 투표를 억누르고 있어.”
대통령 선거정치는 오래전에 죽은 개에 구더기 슬듯 온통 기업체의 돈과 로비스트로 들끓고 현상유지라는 썩은 배설물 속에 푹 절어 있는데, 모두가 이 사실을 알고 있지요. (그러니 그걸 뉴스 속보로 전하는 건 제발 그만두세요) 2000년으로 거슬러올라가, 당시 내게 부시와 고어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말했던 사람들은 이후로 다시는 연락이 없답니다.
나는 예전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옹호자이자 세계무역기구(WTO) 지지자들과 한통속인 고어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두 사람의 차이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특히 우리 중 가장 취약한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는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기후변화의 초기 충격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그렇고, 여성의 3분의 2가 자기 주에서 낙태권을 가졌던 미국을 그런 여성의 수가 절반 이하인 곳으로 바꿔놓은 2000년 이래의 변동의 차원에서도 그렇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교육과 의료 서비스, 경제정의가 더 중요한 국내정책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분야에서 민주당은 가끔 꽤 잘하는 편이고 심지어 위기에 처한 생명을 구할 정도인 데 반하여, 급진주의자들은 흔히 다른 모든 것을 제쳐놓고 대외정책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나는 오바마가 대통령으로서 수행하는 무인전투기 전쟁이라든가 전지구적 기후조약에 대한 형편없는 무대책, 이번 행정부 출범 이후 치솟는 밀입국 강제송환자 수를 보고 경악하는 이들과 같은 편입니다. 여러분 중 일부가 오바마의 행동이 너무 역겨운 나머지 그에게 투표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또는 이 선거정치 시스템 전체를 독으로 생각한다는 것 역시 이해합니다.
얼마 전 브래들리 매닝(정보공개 웹사이트 ‘위키리크스’에 미 국무부와 국방부의 기밀자료를 넘겨준 병사)을 지지하는 한 시위에서 나는 어떤 죽은 아이의 사진에 “이 아이에게 민주당이 두가지 악 중 덜 악한 쪽이라고 말해보시오”라는 문구가 적힌 엽서를 건네받았어요. 우리의 방책을 위해 죽은 자들을 이용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 아이는 실제로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똑같은 행정부가 수백만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의료보험을 제공했기 때문에 혹은 수천명의 생명을 구하는 환경규제들을 다시 도입했기 때문에 살게 된 아이들도 있습니다.
당신은 오바마에게 투표하는 것이 아이들을 죽이는 데 표를 던지는 행위라는 논지를 펼 수도 있고 아니면 그에게 투표하는 것이 다른 아이들을 보호하거나, 최소한 덜 죽이는 데 표를 던지는 일이라는 주장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상 미국의 모든 대통령은 함께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죽음을 야기했지요. 이 체제는 부도덕한 체제인 겁니다.
당신이 이 체제에 참여할 필요는 없으나 이 체제와 이 체제의 복잡성과 모순을 정확하게 묘사할 필요는 분명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참여하지 않기를 선택할 때는 당신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이게 종종 오락용 빈정거림이기도 하지요—의 함양보다는 좀더 흥미로운 이유를 대는 게 낫다는 사실도 반드시 알았으면 합니다.
빈정거림은 당신에게 독이 되고 또 당신이 주입한 빈정거림을 받은 사람들에게 독이 됩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당신은 독을 좋아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쫓아버리는 거예요. 참여하기로 선택한 사람들을 당신이 처벌할 필요는 없어요. 사실상 당신은 그 누구도 처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뿐이에요.
우리는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과 사실에 관한 모든 관심을 내던져버린 급진 우파와 대면해 있습니다. 우리가 대면한 것은 그들의 특정 정책만이 아니라, 진실에 가치를 두지 않고 우리가 처한 상황의 복잡성과 미묘한 차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며 공감이 행동을 촉발하는 힘이 되게 만들지 않은 데서 유래하는 일종의 문화적 부패입니다. 그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과 달라져야 하며, 이는 공감과 지성, 이 둘과 함께 시작됩니다. 이 두가지는 흔히들 말해온 것처럼 따로 떨어진 것들이 아닙니다.
그들과 달라진다는 것은 당신과 잠재적 우군들이 공유하는 바를 찬양하는 것을 뜻하지, 대수롭지 않은 차이점을 근거로 우군들을 벌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좌파나 우파 모두 의지하는 경향이 있는 희화적인 흑백논리를 넘어서서, 문제가 되는 사안들에 대해 한층 복합적인 이해를 개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축하는 행위는 현장의 사실들과 그런 사실들이 당신의 삶에 지운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한 방식입니다. 마이클 에릭 다이슨(Michael Eric Dyson)은 최근에 이렇게 말했지요. “당신이 분석 중인 조건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없는 이상(理想)이나 수사(修辭)는 좋지 않습니다. 달리 말하면, 당신은 실재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물질적 조건을 개선하는 데 아무 쓸모도 없는 일종의 수사적 나르시시즘과 이데올로기적 자기몰두에 빠져 있는 겁니다.”
9년 전에 나는 희망에 관해 쓰기 시작했고, 마침내 나의 기획을 ‘좌파의 품에서 절망이라는 애정 어린 테디베어를 낚아채는 것’이라고 지칭했습니다. 그 모든 불평들은 패배주의의 한 형태이거나 때 이른 항복, 혹은 일에 딱히 나서지 않으려는 핑계입니다. 절망 역시 일축하기의 한 형태인데, 당신은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지 벌써 알고 있으며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혹은 불가능할 정도로 완벽한 것 외에는 무엇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당신이 만약 특권층이라면 그렇게 말하고 집으로 가서 개떡 같은 텔레비전이나 보든가 똑같이 투정하는 친구들과 더불어 당신의 투정을 더욱 강화할 수 있겠지요.
절박한 이들은 종종 그보다 훨씬 희망적입니다. 경이로울 정도로 활발한 농장 이민노동자 권리 단체인 ‘이모칼리(플로리다주 남부에 위치한 도시) 노동자연대’는 희망에 차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그 단체의 탈퇴란 유선방송의 재방송 프로그램을 포기하는 차원이 아니라 현대적 노예제, 지독한 가난, 굶주림, 혹은 죽음에 투항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희망에 차 있고 강하며, 타코벨과 맥도널드, 쎄이프웨이와 홀 푸즈, 그리고 트레이더 조우스(모두 미국의 대형 식료품점 및 패스트푸드 체인)에 대항했고 싸워 이겼습니다.
위대한 인권운동가인 하비 밀크(Harvey Milk)도, 비록 그가 암살당할 무렵 게이와 레즈비언은 거의 아무런 권리도 못 가진 상황(그가 중요한 역할을 하여 두개의 주요한 승리를 막 거두었을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희망에 차 있었습니다. 그가 한 유명한 말이 있어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한다.”
그간 게이와 레즈비언이 획득한 권리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제 우리는 분명히 밀크가 깜짝 놀랄 만한 상황에 있는데, 여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단계적으로 한번에 하나씩 실용적이고 불완전한 승리를 일궈냈고, 장차 쟁취해야 할 많은 것들을 앞두고 있습니다. 희망적이라는 것은 미래에 대해 못 박지 않는 것이자 가능성을 향한 예민한 감수성을 의미하며, 변화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헌신함을 의미합니다.
활동가에게는 진정으로 단 두가지 질문이 있을 뿐입니다.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가?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런데 이 두 질문은 서로 긴밀히 얽혀 있습니다. 당신은 매일, 매시각, 매분마다 바로 자기 자신을 만들고 있듯이 세상을 만들고 있는데, 기왕이면 그 일을 관대하고 따뜻하게 그리고 멋지게 하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그것이 현재 진행 중인 작은 승리이며 그 위에 거대한 승리들이 세워질 수 있는데, 당신도 승리를 원하는 거 맞지요?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분명히해두고, 그 승리들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보세요.
사랑을 담아
리베카
번역 | 최선령・텍사스주립대(UT) 방문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