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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상환 『철학과 인문적 상상력』, 문학과지성사 2012
한국 인문학의 활로를 찾는 여우 놀이
강신주 姜信珠
철학자, 문사철 기획위원 contingent@naver.com
아름답다. 아니 우아하다. 김상환(金上煥)의 새로운 책은 쇼팽의 피아노 쏘나타 3번처럼 감미롭고 격정적이며 무엇보다 우아하다. 테미 와이넷의 히트곡 「stand by your man」에서 인문정신을 읽어내는 대목도 근사하지만, 기형도(奇亨度)의 시 「오래된 서적」에서 한국적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엔딩도 옷깃을 여미게 한다. 김상환의 신작 『철학과 인문적 상상력』은 이렇게 서정적인 팝송에서 시작되어 기형도의 애절한 시로 마무리된다. 척박하고 남루한 정신세계가 지배하는 우리 지성계에 이런 우아하고 경쾌한 정신이 있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낄 일이다.
한쪽에서는 인문학의 위기를 부르짖는 교수들의 절규가, 그리고 다른 한쪽에는 인문학에 대한 평범한 이웃들의 목마름이 존재하는 것이 우리의 기묘한 현실이다. 김상환의 신작은 상아탑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문학의 탈출로를 제시하고, 치열한 삶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입에는 인문학의 정수를 넣어주기에 충분하다. 경쾌하고 우아한 글쓰기가 아니라면, 어떻게 상아탑과 현실 사이의 심연을 이처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겠는가. 그만큼 삶과 괴리된 인문학과, 인문정신이 결여된 삶 사이의 거리는 생각 이상으로 크다.
“인문적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김상환의 신작이 스스로에게 던진 화두다. 화두를 돌파하는 순간, 상아탑이 폐쇄성을 벗어나 활력을 되찾는 방법과 동시에 우리 이웃들이 인문학에서 진정으로 배워야 할 요체도 동시에 밝혀질 것이다. 동서양과 문・사・철을 가로지르는 복잡한 경로를 거치면서 마침내 김상환은 인문적 상상력의 핵심에 도달하게 된다. “인문적 상상력은 관념, 이미지, 개념, 이념, 가치들에 대하여 자유롭고 활력적인 재조합의 가능성을 불어넣는 능력이다. 인문적 상상력에 대한 물음은 인간 사유 일반에 생기를 가져오는 원리, 영감의 원리에 대한 물음이 되어야 한다.”(275면)
무슨 말인지 애매하다면, 책에 등장하는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상징을 다시 음미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이샤야 벌린(Isaiah Berlin)의 책 『고슴도치와 여우』에서 유래한 것이다.(3부 1장 「새로운 인문적 상상력의 조건」) 가시를 돋우며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려는 고슴도치는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인간형을, 그리고 매사에 호기심이 많은 여우는 능동적이고 모험을 즐기는 인간형을 상징한다. 그래서 고슴도치적인 인간이 새롭게 접한 미지의 것을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환원하려고 한다면, 여우적인 인간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새롭게 접한 것에 맞게 해체하여 재조합하려고 한다.
저자가 여우에서 인문적 상상력의 핵심을 발견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진리란 자유롭고 활력적인 재조합을 통해 창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재 상아탑에는 여우가 아니라 고슴도치만 우글거리고 있지 않은가. 결국 “진리의 사원에 들어갈 엄두는 내지 못하고 단지 그 앞에서 벌이는 유희, 현장 부재의 철학. 그것은 거꾸로 세속 사회로부터 물러나 수도원 속으로 들어간 중세의 철학과 같을 것이다.”(287면) 그렇지만 주어진 진리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는 수도원 같은 곳에서 고슴도치라면 몰라도 여우가 어떻게 하루라도 살 수 있겠는가.
여우에 대한 찬사이자 여우 행태 보고서! 『철학과 인문적 상상력』은 우선 이런 관점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인지 김상환의 책에는 다양한 여우들이 등장한다. 여우는 고슴도치가 지키는 알량한 체계를 해체하고 새로운 지평으로 탈출하려 한다. 바로 이럴 때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은 화려하게 재생하는 법이다. 20세기는 여우들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서양 정신사에서 과거의 전통을 해체하고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이보다 강했던 적은 없었다. 들뢰즈, 데리다, 하이데거, 메를로-뽕띠 등 쟁쟁한 여우들의 이름을 거명하는 것만으로 숨이 차다.
여우에게는 기묘한 역설 하나가 있다. 비범한 여우의 거동을 찬양하며 따라하는 순간, 우리는 여우가 아니라 고슴도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인문적 상상력이 가진 숙명과도 관계된다. 인문적 “상상력은 기존의 이미지를 파괴하고 무화시킬 때에만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우는 단독적인 존재, 혹은 고유명사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이 대목에서 우리 땅에서 철학하기의 어려움이 분명해진다. 한때는 싯다르타의 여우짓을, 한때는 주희(朱熹)의 여우짓을, 한때는 맑스의 여우짓을, 그리고 한때는 들뢰즈의 여우짓을 반복하면서, 우리는 여우의 제스처만을 취하는 고슴도치로 전락한 것은 아니었는지.
우리 땅에서 철학하기가 가능할지 묻는 것은, 사실 우리 땅에서 고슴도치가 아니라 여우를 발견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김상환이 박동환(朴東煥)이란 철학자에 주목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4부 4장 「박동환의 3표론과 현대 차이의 철학」) 그는 여우의 본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동시에 한국산 여우가 되는 데도 성공한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김상환에 따르면, 들뢰즈 같은 서양의 여우들이 여우짓을 하면서 희열을 느낄 때, 박동환이란 여우는 여우짓을 하면서 한(恨)의 정서를 표출했다. 바로 이것이 그가 최초의, 혹은 가장 중요한 한국산 여우로 박동환을 주목하는 이유일 것이다.
여기서 잠깐 조심해야 한다. 박동환에 주목하면서 자칫 김상환이 보여주는 여우짓을 간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책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서 김상환은 박동환의 철학을 한용운과 김소월, 그리고 기형도의 시세계와 오버랩하며 한(恨)의 철학으로 이행하려는 여우 놀이를 벌인다. 어쩌면 이 대목이 이 책의 백미가 아닐까. 하긴 인문적 상상력(혹은 여우의 본성)을 누구보다 정확히 간파하고 있는 김상환에게 고슴도치의 우직스러움을 기대하는 것이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또 기다리게 된다. 한(恨)에 대한 저자의 본격적 여우 놀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