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촌평
알랭 바디우 『바그너는 위험한가』, 북인더갭 2012
오늘날에도 ‘바그너의 경우’가 유효한가
전예완 全蕊妧
서울대 강사 ywjeon91@snu.ac.kr
1888년 니체(F. Nietzsche)는 자신의 저작 『바그너의 경우』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그너는 철학자에게 필요불가결하다. 보통은 다들 바그너 없이도 살아갈 수 있겠지만, 철학자에게 바그너 없이 지내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어째서 그러한가? 니체에 따르면 철학자의 사명은 자신의 시대를 극복하는 것이고, 그러려면 그는 자신의 시대를 가장 잘 알아야 한다. 그런데 바그너(W. R. Wagner)는 니체 자신이 맞서고자 하는 모든 문제들이 집약된, 이른바 ‘현대성의 요약’이므로, 철학자 니체는 바그너를 해부함으로써 당대의 문제를 적확히 들여다보고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니체의 총체적 문화비판으로서의 바그너론(論)을 위시하여, 유수의 철학자 및 예술가가 자신의 바그너 독해를 통해 시대의 문제를 묻고 대답하려 했다. 그에게서 해결책을 보든 반면교사를 보든, 이들에게 “‘바그너의 경우’는 미학적・철학적인 경우이자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정치적인 경우”(113면)였다.
『바그너는 위험한가: 현대 철학과 바그너의 대결』(Five Lessons on Wagner, 김성호 옮김)에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니체 이래 대종을 이루었던 반(反)바그너주의적 독해에 맞서 새로운 바그너 읽기를 시도한다. 원제가 알려주듯, 이 책은 다섯 강의로 구성된다. 제1강은 필립 라꾸라바르트(Philippe Lacoue-Labarthe)의 바그너론을 다루는바, 라꾸라바르트에 따르면 바그너는 총체화 기획에 복무하며 대중기만 효과에 치중함으로써 ‘정치의 미학화’를 실현한다. 즉 바그너에게 예술은 파시즘의 도구이다. 제2강은 아도르노(T. W. Adorno)의 『부정변증법』을 다루는데, 변증법적 화해를 통한 동일성 회복이라는 헤겔적 이상에 반대하는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을 통해 우리는 아도르노의 바그너 비판의 뿌리를 파악할 수 있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바그너 악극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회귀의 여정’이라는 테마, 그리고 피날레를 장식하는 궁극적인 음악적 해결 등은 동일성의 철학에 내재한 타자에 대한 폭력을 나타내며, 이를 통해 바그너는 아우슈비츠와 철학적으로 연결된다. 바디우는 이러한 두 철학자의 견해 각각을 바그너 작품의 구체적 분석을 통해 반박한다. 제3강은 바그너에게서 철학적 문제의 지점들을 가늠하며, 제4강에 이르러 바디우는 이제까지의 바그너 비판의 핵심을 항목별로 요약하고, 각각의 항목에 대해 바그너 작품의 내러티브적・음악적 사례를 제시하며 반박하고 이에 맞서는 새로운 독해를 제시한다. 제5강은 바그너 최후의 작품이자 가장 논란이 분분한 「파르지팔」(Parsifal) 분석을 통해 바디우 자신의 독해를 예시적으로 보여준다. 제4강에 정리된 바디우의 독해에 따르면, 바그너는 오히려 새로운 주체적 가능성의 출현을 보여주고, 분열적 주체를 용인하며, 차이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한 해결이 아니라 해결의 비변증법성을 보여주며, 최종성 없는 변화를 말한다. 즉 바디우는 이제껏 바그너 비판의 핵심 근거가 되어온 헤겔주의적 바그너 해석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나아가 다섯 강의 이후에 붙어 있는 지젝(S. Žižek)의 발문—그 분량과 내용 면에서 발문이라기보다 또 하나의 바그너론으로 취급해야 할 것이다—은 헤겔의 ‘부정의 부정’이라는 방법론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바그너 작품이 파시즘적 해결이 아닌 ‘열려 있음’을 담지한다고 역설한다.
주도적인 반(反)바그너주의를 소개하고 그 핵심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에 맞서는 새롭고 동시대적인 바그너 독해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 저작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바그너와 대결하고, 나 역시 결국 그와 대결하게 될 것이다”(90면)라는 바디우 자신의 말에서 기대되는 만큼의 ‘철학자 바디우’를 보여주지는 못한 듯하다. 예컨대 세계대전을 겪은 후 ‘인류는 왜 진정한 인간적 상태에 들어서지 못하고 새로운 야만에 빠졌는가’를 화두로 삼아 근대철학을 반성했던, 그리고 예술에서 유일한 희망의 보루를 찾았던 아도르노가, 헤겔주의적 이상과 독일정신의 비상(飛上)을 예술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앞시대의 바그너를 분석 및 비판 대상으로 삼았던 필연성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바디우는? 그에게 바그너를 분석할 이유와 퍼스펙티브를 제공하는 이 시대는 ‘구체적으로’ 어떤 시대인가? 라꾸라바르트 혹은 아도르노의 바그너 비판에 맞서는 바디우의 해석이 이른바 모던-이후의 시대상황적 시각에서 제공된 것임은 물론 알 수 있다. 그러나 지젝이 발문에서 말하는 ‘싸움의 패러다임’(235면)이 분명치 않아 보인다(지젝의 발문은 그러한 패러다임의 제시가 좀더 명확하다). 따라서 바디우는, 적어도 이 저작만으로는, 자신의 ‘바그너의 경우’를 본격적으로 구성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듯하다.
니체 이래 대부분의 바그너론이 대중수용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는 반면, 이 책에서 ‘오늘날’의 바그너 수용양상에 대한 분석이 빠진 것도 아쉽다. 이른바 하이엔드(high-end) 문화상품으로 유통되는 바그너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하나? 히틀러 유겐트의 바이로이트 순례와 오늘날 바그네리안(Wagnerian)들의 바이로이트 순례는 어떻게 다른가? 최신 기술공학으로 무장한 「반지」 프로덕션이 영상화되어 영화관에서 세계의 대중과 만나는 현상은? 한마디로 “오늘날 누가 바그너를 듣는가?”의 문제가 바디우에게서도, 지젝에게서도 제시되지 않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철학, 음악사 및 음악학, 바그너 논쟁사까지 모두 전제하는 이런 텍스트를 번역하여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데는 그만큼의 어려움이 따른다. 방대한 역주를 달아 이해도를 높이고자 한 옮긴이의 노고를 치하한다. 눈에 띈 사소한 몇가지를 지적하자면, 브륀힐데는 지그프리트의 숙모(297~98면)가 아니라 이모 또는 고모이다(지그프리트의 부모가 쌍둥이 남매이며, 브륀힐데는 이들과 아버지가 같기 때문). ‘남성의 외침’으로 번역된 하겐의 ‘Männer-Ruf’(296면)는 「신들의 황혼」에서 하겐이 기비훙의 남자들(Männer)을 싸움터로 불러내는(rufen) 장면이기 때문에, ‘전사들의 호출’ 정도가 어떨까 한다. 까뜨린느 끌레망에 관한 역주 23번(256면)의 경우, 본문에서 염두에 두고 있는 그녀의 저작 『오페라 혹은 여성들의 파멸』(L’Opéra ou la Défaite des femmes)이 언급되었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