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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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경위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는 지난 920일 모임에서 제14회 백석문학상 예심위원으로 안현미 이장욱 2인을, 본심위원으로 김사인 장석남 최원식 3인을 위촉하고 심사를 진행하였다. 예심에서 심사규정에 따라 최근 2년간 출간된 시집들을 검토한 결과, 총 12권의 시집이 본심에 올라왔다.

곽재구 『와온 바다』, 김선우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김혜순 『슬픔치약 거울크림』, 문태준 『먼 곳』, 박성우 『자두나무 정류장』, 백무산 『그 모든 가장자리』, 심보선 『눈앞에 없는 사람』, 유홍준 『저녁의 슬하』, 조연호 『농경시』, 최승자 『물 위에 씌어진』, 최정례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가나다순)

본심은 1029일에 진행되었는데, 대상작 모두 저마다의 감각과 언어가 돋보이는 뛰어난 시적 성취를 보여주고 있어 어려운 심사 가운데에도 기쁨이 컸다. 곽재구 박성우 백무산 심보선 유홍준 최승자 최정례 허수경 시집을 집중적으로 논의한 끝에 최정례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문학과지성사 2011)를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는 담담한 목소리 속에 생의 깊은 국면을 절묘하게 드러내는 진실함을 담고 있어 백석의 시세계와 상통하는 울림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아, 심사위원 전원은 최정례 시인을 제14회 백석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하는 데 흔쾌히 합의했다.

 

 

 

심사평

 

김사인(金思寅) 시인

최정례 시인의 수상을 치하해 마지않는다. 그의 시집은 이전에 비해 훨씬 깊고 진실해진 느낌이다. 다소 냉소적이거나 작위적 요설의 기미가 때로 어려 있던 이전의 어투가 걷히고, 분명한 전언에 접근하면서도 삶의 깊은 어느 곳을 울려내고 있는 것이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어떤 계기로건 나날의 잡답을 넘어 삶의 보다 근본적인 경계와의 조우를 치렀던 듯싶고, 그것이 이번 시집을 달라지게 한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독자로서는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표제작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를 비롯하여 「이름을 부를 때까지」 「팔월에 펄펄」 「산갈치」 등 1부의 명편들이 드러내는 기막힌 마음의 표정들은 쉬 잊히지 않을 듯하다. 밑 빠진 자루 같은 생의 허망함과 황당함, 그 근원적인 ‘어찌할 수 없음’ 앞에서 그저 입만 벌린 채, 속수무책으로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기—그것이 이 시집의 가장 큰 내용일 것이다. 그 유구무언의 시적 표정들에 대해, 마침내 그가 유구무언에 이르렀음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토론 과정에서 그의 시집이 두세번 기각과 재논의의 대상이 될 때까지 나는 적극적으로 그의 편에 서지 못했다. 하나는 최정례의 시집 자체에 다소 아쉬움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정례 시집의 2, 3부에는 이전 시집에서 낯이 익은, 일상사에 대한 ‘투덜거림’들이 적지 않았고, 이것이 시집의 밀도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했다.

또 하나는 내가 최승자 허수경의 시집들이 더 무겁고 크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삶과 고통에 더와 덜이 있을까만, 그 ‘지옥’을 맞아 감당하는 마음의 태세에 있어 최승자가 보여주는 순도와 허수경이 보여주는 긴 호흡의 뜨거움은 매우 감동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최승자의 경우, 지난번 문학상을 받던 무렵의 시세계에 비해 새 변화가 있는 건 아니라는 지적이 있었고, 허수경 시집의 성취에 대한 평가는 의견들이 날카롭게 갈렸다. (나는 허수경의 이번 시집이 매우 뜻깊은 정신의 모험을 담고 있다는 것, 그것이 단지 허수경 개인의 몫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와 한국어 사유의 확장과 심화가 도달한 최전선의 하나로서 의미를 가질 만한, 매우 예민하고 의미심장한 텍스트라는 소견을 다시 한번 여기 적어두고자 한다. ‘지리산 주막의 주모의 넋’으로 일쑤 불려온 시인, 그리고 그의 한국어에 유럽 체류 십여년이 무엇이었는지, 이번 시집은 그러한 고향과 세계성 사이의 대립과 충돌, 스며듬이 벌어지고 있는 생생한 현장으로 읽혔다. “울기에는 너무 낡은 정열”과 “글로벌이라는 새 고향” 사이에서 무엇을, 어떻게 ‘울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긴 고심과 모색이 그의 시적 성실성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언급은 심의 과정에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눈 밝은 독자들에게 허수경 시집의 편치 않은 문체를 참고 2, 3부까지 다시 한번 읽어봐주실 것을 좀더 자극적으로(!) 촉구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다.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를 처음부터 앞에 내세운 심사위원은 아무도 없었다. 앞장세워졌던 시집들은 중간에 모두 반대에 부딪혔다. 그런데, 누구도 이 시집을 강하게 거부하지 않았다. 반대하지 못했다. 이것이 중요하다. 누구도 ‘아니라’고 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려놓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최정례의 이번 시집이 지닌 힘이다. 세시간여의 우여곡절 끝에 애초의 뜻과 다른 수상자를 결정하고도, 우리는 모두 흔쾌했다.

마지막까지 거명되었던 시인들이 유홍준과 박성우였다. 나는 유홍준 시인에 대해, 그 야생성과 빼어난 재능은 눈부시지만, 시에 대한 방법적 장악이 너무 견고해서, 한편 한편은 빈틈이 없는데 시집 전체로는 늘품이 없이 닫혀 보인다는 의견을 냈다. 이것은 뭔가 ‘시적인 것’의 중요한 한 본질과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그의 시가 다시금 자유로워지는 모습을 애정을 가진 독자로서 기대한다. 박성우 시인에 대해서는, 그 초식성의 순함과 농경적 덕성의 세계가 그 자체로 지켜지는 것도 귀하겠지만, 서구적 근대의 사악함과 지옥에 한번은 호되게 쐬일 필요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을 냈다.

그런데 나는 도대체 무슨 권능으로, 시인들의 허락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그들을 늘어세워놓고, 됐다느니 안됐다느니 찧고 까불며 근수를 달고 있단 말인가. 조금만 생각해도 가소롭지 않은가. 그렇다. 핏기있는 시인들이라면 모쪼록 문학상 따위는 워리가 핥다 버린 뼈다귀쯤으로나 여기실 일이다.

 

장석남(張錫南) 시인

아주 드문 일이지만 선자(選者)가 되어 내가 지지하지 않았던 작품에서 뒤늦게 발을 동동 구를 만한 매력을 발견할 경우 난처한 행복에 처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작품은 힘이 세다’는 신념이 두꺼워진다. 누가 뭐래도 작품은 스스로 힘이 세고 번식력도 좋은 것이다!

우리에게 오랜 시간을 뚫고 사랑과 보람, 행복, 깨우침을 타전해주는 선행 작품들이 유일한 기준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시를 거량할 일이 불가피 생길 때 내가 내미는 잣대인데 ‘작품’이란, 그 잣대를 너무나 쉽게 꺾어버리는 ‘매력’이 있어 당황과 행복을 동시에 주기도 한다. 이른바 심사라는 것은 개인적인 친분을 따져 가점해주는 자리가 아니더라도 그만큼 오류이고 모순의 행위인 것만 같다.

개인적인 취향이라는 것을 잠시 내려놓고도 말장난 섞어 이야기하자면 ‘좋은 작품’과 ‘좋은 작품 같은 작품’과 ‘좋은 작품인 척하는 작품’들이 있게 마련이다. 대개는 ‘좋은 작품’보다는 ‘좋은 작품 같은 작품’이나 ‘좋은 작품인 척하는 작품’이 상을 받는 게 아닌가 의문을 가질 때도 종종 있다. 거기에는 일반 독자나 좀 전문적인 선자 혹은 평자들의 ‘요구사항’들을 발 빠르게, 골고루 갖추어놓고 마치 예술가의 고집이나 되는 듯이 너무나 당당하고 불친절한 포즈로 좋은 작품인 척하고 있는 인상이다. 아무리 봐도 ‘멜로드라마’의 수준이고 아무리 봐도 언어예술로는 미숙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것인데 앞섰다느니 ‘지성’을 갖췄다느니 하는 꾸밈말을 달아주기도 한다. 그때마다 나는 내 시선이 삐뚤어진 것인가 반성하곤 한다.

백석이란 시인…… 그토록 낡았고 또 그토록 새로운 시인이 있던가? 마치 사랑이나 죽음이라는 주제처럼. 우리 언어공동체가 그러한 전형을 가졌다는 것은 여간 다행하고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백석 없는 우리 시문학사란 얼마나 초라하겠는가. 그의 시적 자손들을 생각해보면 더욱 그러하다. ‘낡고도 새로운 시’가 백석문학상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혼자 생각하며.

열두분의 시집이 주어졌다. 각각 위치가 확고한 분들도 있었고 비교적 젊은 분들도 있었다. 듣던 이야기가 허망한 시집들도 있었다. 박성우 최정례 유홍준 세분이 끝까지 이야기되었다. 박성우 시인의 시는 생활상의 언어화 과정 면에서 확실한 백석의 후예라는 인상이 들었는데 제 살림의 과다한 노출은 연민으로 빠져들까 조마조마했고 기획된 듯 같은 톤의 반복은 부자연스럽다는 지적이었다. 유홍준의 시는 무엇보다 거침없었다. 고개 숙이지 않는 야성, 젊은 날의 ‘찌질함’에 대한 유례없는 솔직함이 우리 시대의 한 음화를 아름답게 보여주었다고 여겨졌다. 애초에는 이분이 받지 않을까 예감했는데 상복이 없었다. 최정례 시인의 시는 담담하여 쉽게 각인되지는 않는다. 한데 오래 걷다가 앉으면 천천히 다리가 저려오고 어깨가 결려오듯 마음에 감전되어오는 것이 있었다. “창밖으로 4월의 가로수를 바라보다가/그의 뒷모습을 보았다/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그가/다른 사람들과 떠들며/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 높은 건물에서 내려다보면/아득하게 모르는 사람이 되는 너/언젠가는 다른 세상이 될 여기/이쪽 세상에서 저쪽 세상을 바라보는데// (…) 이제 보니 그는 네가 아니었다 (…) 멀어지고 있었다”(「몽롱의 4월」)에서처럼 아무것도 아닌 듯한 이야기가 생의 심각한 어떤 국면으로 변이되어 침투되는 풍경을 절묘하게 보여준다. 드러내려 하지 않고 시에 뭘 꼭 싣고 가야겠다는 것 없이 묵묵한 울림이어서 자세히 오래 보지 않으면 안 보이는 세계였다. 백석의 그것과 상통하는 귀한 세계라는 이야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축하드립니다.

 

최원식(崔元植) 문학평론가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시집은 총 12권, 그중 본심위원들이 더 촘촘히 검토할 대상으로 추천한 8권을 가렸으되, 우선 백무산 시집 『그 모든 가장자리』가 올 대산문학상 수상작이란 점을 참작하기로 하였다. 자유로운 토론 끝에 박성우 유홍준 최정례로 좁혀졌다. 나는 심보선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이 눈에 밟혔다. 민중시의 간난 속에서 서정시의 매너리즘화와 모더니즘의 지력감퇴가 눈에 띄는 요즘 그만큼 탈계몽적 사회성을 새로운 문화생태계 속에서 고민하는 젊은 시인도 드물거니와, 기이하게도 이 시집에서 ‘침묵하는 님’ 또는 ‘부재()하는 님’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직은 더 지켜보자는 의견을 수용했다.

박성우 시집 『자두나무 정류장』은 말하자면 새로 쓴 전원시다. 시대의 겨울로부터 퇴각한 신석정(辛夕汀)류의 목가가 아니라 재지(在地)의 눈으로 농촌을 파악해간 신경림(申庚林)풍의 농민시에 가깝다. 시인이 생활한 그 장소의 깊이와 두께가 충실하게 살아난 점이 좋았다. 그러나 공동체에 대한 따듯한 선의가 자칫 폐쇄적 장소성과 엇물려 분노는 거의 실종된 지경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듦도 어찌할 수 없던 것이다.

유홍준 시집 『저녁의 슬하』는 물()에 대한 독특한 사유를 보여준다. 유홍준만큼 대상을 단숨에 나꿔채 거침없는 언어로 마감질하는 날랜 솜씨를 지닌 시인은 많지 않다. 아마도 그 천품은 “아무도 없는 상림 숲길”에서 맞닥뜨린 “눈망울이 똥그란 다람쥐 한 마리”에서도 “꼬리가 저절로 빳빳하게 치켜올라가는”(「맞장을 뜨다」) 온생명적 긴장에 전율할 줄 아는 이 시인 특유의 감성적 스파크에 말미암을 터인데, 물 자체를 포착하는 시인의 능력이 경이롭다. 그런데 그 솜씨가 어느 틈에 기교로 떨어지는 경향도 보이고 즉물성이 시인의 체험에 갇히는 상투성으로도 나툰다는 점에 유의했다.

최정례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를 읽고 나는 내심 놀랐다. 뜻밖에 재밌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전에 그녀의 시에 잘 감응하지 못했다. 뭐랄까 답답하다는 느낌이었는데, 「호랑이는 고양이과다」가 잘 보여주듯 시인은 드디어 고양이 속에 숨은 호랑이를 막, 알아챈다. 그런데 제목이 가리키듯 호랑이로 진화하려는 그 욕망을 또한 가볍게 야유하던 것인데, 고양이와 호랑이를 기우뚱한 균형으로 파악하는 경지에 도착한 것이다. 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그동안 꽁꽁 싸매두었던 내상(內傷)을 슬쩍슬쩍 보일 용기도 생긴 듯해 기쁘다. 습기(習氣)가 더러 감지될지라도 전반적으로 그녀의 시세상이 번해진 것이다.

세 시집을 두고 오래 논의한 끝에 박성우 시인과 유홍준 시인의 내일에 기대하면서 바야흐로 긴 문턱을 넘은 최정례 시인을 수상자로 삼는 데 합의하였다. 그 자유함이 최고권력의 눈에 거슬리는 곳까지로 진화하기를 기원하며 최정례 시인의 수상을 축하한다.

 

 

 

수상소감

 

최정례 崔正禮

1955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문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1990년 『현대시학』에 시 「번개」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내 귓속의 장대나무숲』 『햇빛 속에 호랑이』 『붉은 밭』 『레바논 감정』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등이 있다. 김달진문학상, 이수문학상,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창비에서 시행하는 백석문학상을 감히 제가 받을 것이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수상 소식을 듣고는 좀 당황스러웠고 제가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제 학위논문의 대상이기도 한 백석 시인의 이름으로 받게 되는 상이라서 기쁘고, 또한 백석 시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에 제게 이런 특별한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창비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좀처럼 일어날 수 없는 일에 관하여 생각하다보니 문득 백석의 「나와 지렝이」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천년 동안만 밤마다 흙에 물을 주면 그 흙이 지렝이가 되고 다시 그 지렝이가 커서 구렁이가 되고, 암컷과 수컷이 새끼를 낳고, 그러면 그 지렝이의 눈이 보고 싶다는 내용의 시 말입니다. 저뿐 아니라 여러분도 이런 터무니없는 말은 믿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천년 동안 의심 없이 흙에 물을 주는 이런 일은 거의 미쳐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렝이의 눈이 보고 싶어 천년 동안 흙에 물을 주는 이 간절함이 바로 시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간절함이 희망이고 결국은 이 간절함이 현실을 변화시키는 시의 힘이라 생각합니다. 간절한 마음을 품게 되는 어떤 순간에 저는 책상 앞에 앉게 됩니다. 고맙게도 이 간절함을 품고 시를 굴리고 있으면 문득 어느 순간에 시는 나를 버리고 혼자 굴러갑니다. 그러니까 저는 시가 저 혼자 굴러갈 때까지 그 직전까지만 노력을 기울이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 노력 너머에서 일어납니다. 그때부터 시는 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가끔 시가 돈이 안된다 현실생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불평하다가도 문득 저 자신에게 말해봅니다. 네가 한 일이 뭐가 있는가? 어느정도까지만 애쓰면 시가 저 혼자 시의 힘으로 말의 힘으로 굴러가는데 그게 시와 말의 힘이지 네 힘이냐라고 반문합니다. 시 속에서 일어나는 아주 이상한 일, 불가능한 꿈의 바닥에는 인간의 간절함이 숨어 있습니다. 시를 쓰는 일과 시를 생각하는 일은 흙에 물을 주는 것처럼 당장 우리를 변화시키지 않습니다. 시를 쓴다고 해서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어리석은 일에 골몰하면 웃음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백석은 일찌감치 이런 일들의 의미나 그 마법적 효과를 간파했던 듯합니다. 현실은 아주 가혹하고 냉정해서 좀처럼 날개를 달고 푸드덕 날아가지를 않는다는 사실도 깊이 알고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천년 동안 물을 주며 기다리겠다는 간절함을 버린다면 그런 삶은 정말 재미없는 삶일 것입니다. 수많은 가상들, 이미지들이 현실로 변하는 것을 봅니다. 지렁이가 인간의 간절함에 의해 용이 되는 이 초현실적 사건처럼 도처에서 현실이 초현실적 이미지로 변하며 날아가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늘 정신 차리고 현실이 어떻게 가혹하게 우리를 무너뜨릴 것인가를 직시하고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천년 동안 아무것도 없는 흙에 물을 주듯이 꿈에 헌신할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흙 속에서 지렁이를 기다리고 그 지렁이가 구렁이가 되고 용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천년 동안 물을 주겠다는 심정으로 힘과 에너지를 오롯이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가파른 현실이 눈 깜짝할 순간에 초현실적인 순간이 되는 것을 기다리며 그 시간들을 사랑하는 일이 시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백년 전의 백석이 상상했던 것처럼 간절함을 지닌 채 지치지 않을 것을 스스로 다짐해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