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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한 샤오꿍 지음 『열렬한 책읽기』, 청어람미디어 2008
중국문명과 인류문명에 대한 경고(敬告)
문명기 文明基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원 moonster0909@hanmail.net
개혁·개방 이래 중국이 추구해온 소위‘현대화’의 실상이 자핑아오(賈平凹)의 『폐도(廢都)』(일요신문사 1997)에 묘사된 것과 다를 바 없는 천민자본주의에 지나지 않음을 증거하는 이런저런 소식들을 접하면서, 중국(문명)에 대한 기대를 반쯤 접은 지 꽤 오래다. 하지만 새로운‘중국의 가능성’이 한 중국 지성의 강건한 육성과 정갈한 번역에 실려 황해를 건너 나에게 왔다. 1949년 이래 중국사회의 다양한 사회현상과 사상조류를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그 대안을 모색하려 노력한 한샤오꿍(韓少功)의 『열렬한 책읽기』(백지운 옮김)는 단순한 산문집을 넘어 새로운 중국문명, 나아가 새로운 인류문명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의 밑그림으로 읽어도 좋을 만큼 계발성(啓發性)이 풍부하다.
그 새로운 가능성의 탐색을 위해 저자는 중국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점검한다. 체제화·권력화되면서 수많은 위선과 부패를 낳아 내부에서 소멸해버린‘강자의 광기’인 좌파의 문혁(文革)에 대해 체 게바라와 밀로반 질라스(Milovan Djilas)를 빌려 비판하면서, 현실을 견인하는 귀중한 전제인 이상(理想)이 사회체제에 강요되었을 때의 참담한 결과를 잊지 않는다(190~95면). 2000년 전에 일찌감치 학파로서는 멸종한, 대중에 가장 쉽게 환영받았지만 또 가장 쉽게 내쳐진 묵자(墨子)를 통해 혁명가들의 비극적 운명을 설파하는 것도, 평균주의와 고행주의를 추구했던 마오쩌뚱의 빗나간 인간 이해를 꼬집기 위해서다. 인간의 소유욕은 역사적으로 형성되었기에 역사적으로 소멸할 수도 있다고, 때문에 사회주의는 필요하고도 가능하다고 강변한 맑스와 달리 대중의 심리 속에 담긴, 실현될 수 없으나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귀족의 꿈이 “문명을 발육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동력”(309면)임을 인정한 저자의 인간 이해는, 미래에 추구해나갈 새로운 인류문명이 통과해야 할 복잡하고 지난한 행로를 암시하는 듯하다(307~309면). 장자(莊子)가 묵자에 대해 행한 촌철살인의 한마디,‘그 도가 지나치게 각박하여 천하가 감당할 수 없는(其道太∟ … 天下不堪)’이념의 불가행성(不可行性)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문혁 이후의 중국이나 사회주의 몰락 이후의 세계가 아름답기만 한 것인가. 저자는 시장경제와 민주정치로 대표되는 현대화의 물결이 전지구를 정복하는 상황을‘역사의 종말’로 개념화하는 것은‘제2급 역사’에 불과하다고 꼬집는다. 역사는 여전히 전진하고 있으며 새로운 지식이 나타나 자신을 감지하고 표현하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219~20면). 아울러 근대문명의 총체적 비판을 표방하지만 권력자들의 잠재적 동맹밖에는 되지 못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태생적 한계도 남김없이 드러낸다. “모든 이즘의 결점을 끄집어내거나 회피함으로써 자신의 최대의 결점, 즉 그 자신은 어떤 이즘도 될 수 없고 진리에 대한 열정과 확신을 심어줄 능력도 없다는 결점”을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을‘야행자의 잠꼬대’라고 일갈한 후, 자신은 눈앞에서 칠흑 같은 어둠에 맞설지언정 몽유병자는 되지 않겠다고 결심한다(100~101면).
그렇다면 중국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전방위적 비판 후에 남은 대안적 모색은 무엇일까.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중국 전통의 재발견을 통한‘중서융합(中西融合)’에 무게중심이 기울어 있는 것 같다. 이 책이 소박하고‘직설이 가능한’산문 형식일 뿐 아니라 조익(趙翼)의 『이십이사차기(二十二史箚記)』나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日知錄)』 같은 전통 문인의 차기(독후감) 형식을 빌린 것도 우연이 아닐 성싶다. 더욱이 “5·4 이래의 역사허무주의적 태도와 문화적 열등감을 반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거나(395~96면) “중국의 전통문화는 대부분의 시기 강세문화이자 우수문화였는데, 뭐가 창피합니까?”라고 묻는 대목(384~85면)에서는 중화주의의 부활과 연결된 중국사회의 문화보수주의적 흐름과 다를 바 없지 않나 하는 의심도 든다. 내가 보기엔 기계적인 이분법적 역사인식에 불과한‘중국사는 지속적·연결적인데 서양사는 단계적·도약적’이라는, 후스(胡適)의 호적수이자 20세기 전반기 문화보수주의의 맹장이었던 첸무(錢穆)의 역사이해를 독특한 창견이라 치켜세운 것도(389면)‘전통으로의 회귀’라는 중국 지식계의 저간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아 보여 다소 불편하다.
하지만‘중국에 아시아가 있는가?’라는 백영서(白永瑞)의 문제제기에 대해 (중국 지식인으로서는 드물게도!) 민족국가가 강대국의 꿈을 품는 순간 이웃 나라를 불안에 떨게 하는 대외팽창주의를 가져온다는 걸 자각하는 점(254면),‘동서비교’를 습관적으로‘중서(中西)비교’라고 말해온 중국 지식계의 관행에서 대중화주의의 꼬리를 숨기기 어렵다고 실토하는 점(247면) 등을 존중하고서 저자의 주장을 경청할 경우, 참신한 발상이 곳곳에 눈에 띈다. 예컨대 서구와 같은 고(高)소모형 현대화가 좌절을 맞고 있는 상황에서 1인당 평균자원이 빠듯했던 인구대국 중국의 역사적 경험과 교훈이야말로 결코 홀시할 수 없는 문화적 유산이라고 지적한다거나(408면),‘소비사회’로 상징되는 서구의 욕구충족적 문명의 대안으로서 (소동파蘇東坡의 반反금전주의에 표현된) 욕구절제적 발상의 중요성을 환기시킨 점(69~71면) 등은 동서융합의 소중한 사례로서 귀 기울일 만한 대목이 아닐까.
과거와 현재의 중국은 어찌 보면 인류문명의 거대한 실험실이다. 사회주의에 경도된 나머지 문혁이라는 공전의 극좌적 시도도 이미 경험했고, 자본주의의 폐해가 전지구적으로 확장되고 있는 시점에서 자본주의로의 전환도 시도하고 있다. 스스로의 역사 그리고 인류의 역사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모순·병폐를 선명하게 계시하는 지금, 과거의 인류사를 동일하게 반복하는 것은 중국사회와 인류를 위해서 소모적이고 불행한 일일 것이다. 저자가 적확하게 지적했듯이, 많은 특수한 인류경험이 특정 언어에 누적되면 언젠가 에너지를 방출하여 인류의 모종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 고유의 기능이 발휘될 것이다(353면). 이러한 어종(語種)의 규모에서 얻는 혜택과 풍부한 문화전통을 중국사회가 잘 활용한다면, 저자가 (아직은) 희미하게 전하는 중국의‘새로운 가능성’이 구체화될 때 이는 중국만이 아니라 인류의 축복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 성과를 중국사회가 어떤 형태로든 특권화하고 전유(專有)하지만 않는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