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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2013년에 무엇을 해야 하나

 

세계 권력지형 변화 속 한국의 전략

 

 

손열 孫洌

연세대 국제학대학원장. 저서로 『일본: 성장과 위기의 정치경제학』 『동아시아와 지역주의』(편저) 『근대한국의 사회과학 개념 형성사 2』(공편) 등이 있음. yulsohn@yonsei.ac.kr

 

 

1. 서론

 

2013년을 여는 동아시아의 새 지도자들은 한 목소리로 ‘부흥’을 이야기하고 있다. 중국의 시 진핑(習近平) 총서기는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외쳤고, 일본의 아베 신조오(安倍晋三) 수상은 장기침체와 동일본 대지진으로부터 벗어나 부흥을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으며, 한국의 박근혜(朴槿惠) 대통령 당선인 역시 경제부흥으로 또다른 ‘한강의 기적’을 성취하려 한다. 그러나 2013년이 동아시아 부흥의 원년이 되기엔 많은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다. 먼저 세계경제는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어 유로존 재정위기로 침체의 늪에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고, 향후 5년의 전망도 어두워서 모두가 다시 흥하기는 어려울 것처럼 보인다. 특히 장기 경제침체기에 각국은 국제협력보다 국내문제 해결을 우선시하는 내향성(inwardness)이 강해지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에 ‘부흥’ 담론은 일국중심적, 민족주의적 성향을 띨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현재 동아시아는 영토문제와 역사문제로 민족주의적 열정이 상승하고 있고, 한일관계와 중일관계는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다. 남북관계의 획기적 전환 역시 어렵다. 김정은(正恩)정권은 핵선군체제를 유지하면서 외부의 반대 속에 중국 의존을 심화하는 노선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선경제노선을 선택하여 국제사회와 연결하면서 정상국가의 길을 걸을 것인가의 기로에 있다. 20년 만의 권력교체가 대내외 정책변화에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아직 리더십의 변화는 감지되지 않는다. 특히 중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반대를 뿌리치고 지난 12월 미사일 발사를 감행한 데 이어 핵실험 카드를 만지고 있어서 새 정부는 대단한 인내심을 갖고 대응해가야 한다.

향후 박근혜정부 외교의 5년을 좌우할 가장 큰 변수는 미중관계, 즉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 간 세력배분 구조의 변화다. 자고로 패권국의 쇠퇴와 부상국의 등장이라는 세력전이(power transition)가 일어나면 전쟁이 발생했다. 부상국은 기존 패권국이 만들어놓은 국제질서에 불만을 갖고 무력을 사용하게 되며, 기존 패권국 역시 경쟁국의 부상을 선제하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국제정치에서 국력의 불균등한 발전과 세력전이는 항상적으로 있어왔다. 문제는 세력전이를 평화롭게 수용하는 국제체제를 만드는 일이다. 빠르게 부상하는 중국이 기존 지역질서를 어느 정도 뒤흔들어놓을지, 상대적으로 쇠퇴하는 미국은 어떤 대안을 갖고 있는지, 예상 외로 빠르게 하강하는 일본의 공백과 이를 되돌리려는 그들의 노력은 지역질서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 이런 속에서 평화적 세력전이는 가능할지 등이 관건이다. 강대국 간 세력전이가 대립과 갈등을 수반한다면 한국은 줄서기를 강요받을 것이고, 경제부흥이나 영토・영해문제의 해결, 북한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협조도 어려워진다.

따라서 미중관계 변화의 파고를 넘기 위해 박근혜정부는 새로운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이명박정부는 과거 노무현정부가 동북아 지역협력을 전면에 내걸면서 협력적 자주국방을 꾀하고 동북아균형자론을 논하면서 전통적 한미동맹을 훼손했다고 보고 동맹 복원에 전력했다. 그 결과 한미관계는 더없이 양호한 수준에 이르렀으나, 덩치가 커지면서 다양하게 펼쳐진 한국의 국익을 이러한 동맹노선으로 제대로 실현하기는 어려웠다. 북핵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잡지 못한 채 5년 내내 중국과 껄끄러운 관계를 감수해야 했고 천신만고 끝에 비준한 한미FTA는 경제부흥의 열쇠가 아니었다. 이제 새 정부는 동맹외교와 아시아외교, 지역 및 지구적 수준에서의 다자외교를 균형있게 추구할 새로운 전략개념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박근혜 당선인이 내건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한반도 안전과 평화에 국한된 구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최근 국내 학계 및 정책써클에서 논의되고 있는 중견국 외교(middle power diplomacy)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견국이란 단순히 경제적・군사적 규모 면에서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중간(medium-sized)국가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세계 10위권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추고 있지만, 이와 비슷한 규모의 국가들의 외교적 공통분모를 찾기는 어렵다. 일각에서는 특정한 외교속성으로서 규범외교, 지구적 다자외교, 틈새외교 등을 중견국 외교로 정의하기도 한다. 이는 호주와 캐나다의 경우로, 두 나라 모두 지정학적 위협에 당면해 있지 않은데다 상대적으로 자급자족적 경제체제를 갖추고 있는 가운데, 지구적 이슈들에 개입하여 국제공헌을 통해 자국의 위상을 높이는 전략을 펼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의 위협에 직면해 있고 세계경제의 변화에 취약한 경제구조를 갖고 있는 한국이 모델로 삼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개념이다.1) 이 글에서 주장하는 중견국 외교란 강대국에 편승하여 단기적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약소국 외교나 무력과 경제력을 앞세워 상대국을 밀어붙이는 강대국 외교를 지양하고, 장기적 관점에서 지역 혹은 지구 전체의 거버넌스와 이익을 위해 노력하는 외교를 뜻한다. 또한 강대국 중심으로 짜이는 지구적・지역적 패권 질서를 지양하고, 새로운 질서 조성을 위해 강대국 간의 소통과 대화의 장을 마련하고 협력을 촉진하는 중재・중개자이자 주요 아젠다를 형성하고 질서를 설계하는 파트너로 기능하는 국가의 외교를 의미한다. 한국은 중견국 외교를 통해 미중관계의 험난한 파고를 넘고, 번영과 공생의 동아시아 질서를 건축하는 데 앞장서며, 평화의 한반도 거버넌스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2. 미중 간 세력균형의 변화

 

한반도는 해양세력 미국과 대륙세력 중국 사이의 지정학적 단층선(fault line)에 위치해 있고, 양국과 경제적・전략적으로 깊이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양자관계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미중이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둘러싼 제로썸 게임에 돌입하고 다양한 정책수단을 사용해 경쟁하는 와중에 최종적으로 무력에 호소하려 할 경우, 한국의 입지가 좁아짐은 물론 심지어 군사력 충돌의 장이 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또한 패권갈등으로 중국의 부상이 좌절되거나 불안정해진다면 한국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다. 한국의 안보적 대미의존과 경제적 대중의존 간의 부정합은 난처한 상황을 가져올 수 있다. 최근 중일관계에서 보듯이 중국은 안보상의 이익을 위해 경제적 수단을 동원해왔고, 미국 역시 전략적 이익을 위해 한국과 중국의 경제관계에 영향을 미치려 할 수 있다. 생존을 추구하는 북한은 미중의 경쟁구도가 강화될수록 자신의 입지가 강화되고 전략적 가치가 상승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일의 가능성은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 한국외교의 큰 방향은 미중이 전략적 협력을 지속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제로썸 게임을 벌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또한 미중 간의 세력배분 구조의 변화와 세력전이가 평화로운 방법으로 이뤄지도록 하는 동시에 그 과정에서 한국의 국익을 최대한 증진시키는 것이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동아시아 세력전이를 평화적으로 흡수하여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를 창출할 수 있는 ‘체제적 유연성’을 증가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향후 미중관계를 정확히 전망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두 강대국의 관계가 갈등국면인지 협력국면인지에 따라 다른 외교전략이 구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향후 미중관계는 경제력과 군사력의 상대적 변화추이, 경제적 상호의존 정도, 국내정치적 요인으로 나누어 내다볼 수 있다. 먼저, 중국은 1978년 개혁개방 이후 두자릿수 경제성장을 지속해왔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빠른 회복과 함께 8%가 넘는 성장률을 이루었으며, 2012년 글로벌 경제침체 속에서는 7.8% 성장을 거두었다. 최근 2% 전후의 성장률을 기록한 미국이 계속 고전한다면, 양국의 GDP 균형은 10년 후인 2022년경에 역전될 것으로 추산된다.

중국의 군사력 발전은 경제성장과 비례한다. 중국은 연 15% 이상 국방비를 늘려왔으며, 2011년 미국 국방비(6980억달러)1/6 수준인 1200억달러를 지출하며 세계 2위를 기록했다. 중국은 향후 10년간 국방비 4780억달러를 감축해야 하는 미국과 격차를 더욱 좁힐 것이다. 아울러 우주선 개발, 위성요격 미사일 및 핵무기 등 전략무기 증강, 최신예 전투기 실전배치, 핵잠수함 및 항공모함 건조 등 군사 현대화에도 힘쓰고 있다. 또한 중국군은 동아시아에서 미군의 활동범위를 제한하려는 이른바 반()접근, 지역거부 전략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반면 미국은 경제력의 상대적 쇠퇴 속에서 글로벌 리더십의 부활을 위해 고투하고 있다. 미국은 부시 행정부 8년의 우세(primacy)전략 혹은 패권전략을 마감하고 오바마 행정부 들어 다자주의에 기반을 둔 선택적 개입 전략을 택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9·11사태 이후 대테러전쟁에 따른 안보불안과 정당성 위기에 2008년 금융위기까지 겪으면서 기존의 패권전략을 유지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불황을 극복하고 재정적자 확대에 대처하는 일환으로 국방예산을 대폭 축소해야 하는 상황에서 미국은 군사력 조정에 따른 외교전략을 내놓았다. 클린턴(H. Clinton) 국무장관의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 선언은 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외교적 관심과 노력이 부족했던 사실을 인정하면서 아시아의 성장과 동력을 미국의 경제적・전략적 이익을 위해 활용하겠다는 입장을 바탕으로 다양한 차원에서 아시아에 대한 관여와 협력의 구도를 구축하려는 의도의 표명이다.2) 여기서 핵심대상은 중국으로, 양자・소다자(mini-lateral)・다자(multilateral)틀 등 다층위에서 중국을 제도적으로 엮어두는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

한편, 미국은 장기적으로 중국의 패권도전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적 견제장치를 마련하는 이중전략을 펼치고 있다. 대표적으로 20121월에 발표된 「미국의 세계 지도력 유지: 21세기 국방의 우선과제」라는 국방부 문서는 (1) 미국의 전력구조와 투자 방향을 아시아태평양 지역과 중동으로 재조정한다는 점 (2) 기존의 대규모 주둔형 전략구조를 전환하여 신속이동이 가능한 형태로 변환한다는 점 (3) 대테러전,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동맹국 지원, 싸이버전 대비 등 주요 분야의 예산이 보존 혹은 증강된다는 점을 강조한다.3) 여기서 특기할 사항은 미국이 전략환경의 최우선 요소로 여전히 테러로 인한 지구적 안보상황을 꼽고 있지만 예년에 비해 그 중요성이 점차 약화되고 있으며, 오히려 아시아태평양이 미국의 향후 경제발전과 동맹국과의 관계 강화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점이다. 특히 최근 중국이 집중하고 있는 반()접근, 지역거부 전략에 대한 대응을 논의하면서 이를 매우 중요한 목표로 상정하고 군사전략의 차원에서 이를 점차 가시화하고 있다. 20126월 파네타(L. Panetta) 국방장관은 좀더 구체적인 조치로 2020년까지 태평양과 대서양에 배치된 미 해군의 함대 비중을 5:5에서 6:4로 조정할 것이며, 항공모함 6척을 포함하여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총 285척의 함정 중 절반을 태평양에 배치하겠다고 선언했다. 장기적인 국방력 감축에도 아시아태평양에 대한 전력은 오히려 확대하겠다는 의지다.4)

 

 

3. 미중관계의 미래로서 신형대국관계

 

미국과 중국의 국력격차가 축소되면서 지역질서의 향배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세력전이가 초래할 변화에 대해서는 비관론과 낙관론이 엇갈린다. 비관론자들은 세력전이에 따른 패권경쟁이 패권국 중심 기존질서에 대한 부상국의 불만 정도, 국력수준, 국가간 연합 양상 등의 영향을 받지만 결국 전쟁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특히 같은 지역에 공존하는 강대국들은 안보의 여지를 최대화하기 위해 경쟁국과의 국력격차를 극대화하려 하며, 따라서 장기적 충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 본다. 중국이 지구적 차원에서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지는 않을지라도 동아시아에서 자국의 핵심이익 확대를 위해 지역패권을 추구할 것이고, 따라서 미국과의 경쟁은 필연적이며 주변국들은 줄서기를 강요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예상한다.

반면, 낙관론자들은 경제적 상호의존이 심화되어 서로에 대한 민감성과 취약성이 높아질수록 갈등보다는 협력이 우세할 것이라 본다. 미중 간 경제적 상호의존 정도는 깊다. 미국은 중국의 최대 수출대상국이고, 중국은 미국의 제3위 수출대상국이다. 금융 부문에서 살펴보면 중국은 미국 대외부채의 약 23%를 안고 있다. 그렇다고 채권국인 중국이 채무국 미국에 대해 결정적인 협상력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테러의 균형’이란 표현처럼 중국이 미국채를 파는 순간 양국의 경제는 대타격을 받게 되어 있다. 또한 중국 대외수출의 절반은 외국자본의 대중국 투자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 중국은 외국투자로 짜여진 초국적 분업생산 구조 속에서 중간재를 수입하여 최종재를 구미로 수출하는 초국적 시장네트워크에 속해 있기 때문에 미국과의 갈등이 악화되면 경제성장에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된다.

그러나 경제적 상호의존의 심화가 전쟁을 반드시 방지해주지는 않는다. 대표적 사례가 20세기 영국과 독일로, 양국은 깊은 경제관계에도 불구하고 결국 1차대전으로 치달았다. 영국으로부터 독일로의 세력전이는 전쟁의 가능성을 높이는 조건이지만, 양국간에 심화된 경제적 상호의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영국에 유리한 쪽으로의 비대칭관계였다. 사실 독일은 전략물자 수입의 20%를 영국식민지에서 충당했고, 무역금융은 런던에 의존했기 때문에 영국에 대한 자국경제의 취약성이 자국에 대한 영국경제의 취약성보다 상대적으로 컸다. 그럼에도 독일은 영국이 유럽대륙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오판하고 전쟁을 시작했다. 심화된 경제적 상호의존 때문에 영국(특히 런던 씨티의 금융자본)이 유화적으로 나올 것이라 보았고, 당시 유럽에 풍미한 이른바 ‘공격의 숭배’(cult of offensive)에 사로잡혀 전격공격에 의한 단기전으로 결판낸다면 영국에 대한 경제적 취약성이란 약점을 피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영국은 신속히 참전해 국력을 총동원하는 전면전과 장기전을 치러내면서 독일의 꿈을 앗아갔다.

중국의 미래는 독일의 과거와 다를 것인가. 현재 추세대로라면 일정 기간 중국의 군사력은 미국에 열세이며 경제적으로도 비대칭적 상호의존 관계가 지속될 것이다. 중국의 대미수출 비중은 17%인 반면 미국의 대중수출은 5% 정도여서 중국의 대미의존이 미국의 대중의존보다 세배 이상 크다. 또한 중국경제는 미국의 기술과 투자에 깊이 의지하고 있다. 요컨대 중국이 경제력을 고도화하여 미국과 상호의존의 균형(혹은 대칭)을 이루기 전까지는 대결구도로 가기 어렵다.

중국으로서는 불안정한 권위주의 정치체제도 문제다. 앞으로 중국의 당과 정부는 한편으로 경제성장과 사회복지, 행정의 효율성, 대외정책상의 성과, 그리고 중화민족주의 고양을 통해서 정당성을 확보하고, 다른 한편으로 내부적으로 엄격한 통제를 바탕으로 체제를 유지해갈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노동자, 농민 등 소외계층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적 소요와 불안정은 갈수록 심각해질 가능성이 크다. 정치민주화 문제 역시 공산당의 단합과 경제성장이 지속되는 한 당분간 덮어둘 수 있겠지만, 경제가 성장할수록 시급한 해결을 요하는 과제이다. 경제 역시 단기간에 급격한 성장둔화에 직면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기존의 성장우선 방식에서 민간소비를 확대하고 빈부격차를 줄이고 인플레이션을 적정 수준에서 통제하는 쪽으로 전환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향후 10년 중국은 ‘전면적 소강사회(小康社會)’ 건설을 목표로 안정된 경제발전과 내수 진작, 국내경제 불평등 해결 등을 위해 집중할 것이며, 이를 통해 미국경제를 따라잡고 미국과의 비대칭적 상호의존을 교정하려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중국은 조기에 미국과 과도한 패권경쟁을 벌이는 것은 피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경제위기로 미국의 지도력이 약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지구적 경제침체 극복을 위한 미국과의 공동노력은 중국의 국가전략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두된 것이 지난 20122월 시 진핑의 방미 연설에 등장한 ‘21세기적 신형대국관계(新型大國關係)’다. 이는 경제발전을 지속하여 2021년 전면적 소강사회 건설을 완성하도록 국제환경을 조성하려는 전략용어로, 독일의 오판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과거 영국과 독일 관계나 냉전기 미국과 소련 관계가 구형대국관계라면, 21세기 중국과 미국은 (1) “상호이해와 전략적 신뢰의 증진” (2) 양국의 “핵심이익과 중대관심사” 존중 (3) “이익증진을 위한 상호협력 심화” (4) 국제문제 및 지구적 이슈에 대한 상호협조 관계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20125월 ‘미중 전략・경제 대화’에서 후 진타오(胡錦濤) 주석은 신형대국관계를 재차 강조했다. 그는 양국을 “세계 최대 발전도상국가와 최대 발달국가”로 정의한 후, “국제정세의 변화와 중미 양국의 국내정황의 어떠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양국 모두 마땅히 협력동반자 관계 건설을 지속하고 양국 국민이 안심하도록 노력하는 신형대국관계를 건설”해야 한다고 천명했다.5)

물론 이는 과거의 도광양회(韜光養晦) 전략과는 차이가 있다. 절대 양보할 수 없는 “핵심이익”을 제시하고 이를 지킨다는 선언을 하기 때문이다. 후 진타오 주석은 201211월 중국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 개막보고에서 전면적 소강사회의 추진과 함께 3대 핵심이익(①국가 정치체제國體와 정권의 구성형식政體 및 정치적 안정 ②주권안전과 영토완정完整 및 국가통일 ③경제・사회의 지속가능 발전 보장) 수호를 위해 강력한 국방력을 키울 것을 밝혔다.6) 중국은 커져가는 덩치에 따라 핵심이익의 범위를 확장해가면서 이와 결부된 다양한 현안들에 공세적으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신형대국관계론에 화답하고 있다. 클린턴 국무장관은 오늘날 기성대국과 신흥대국의 만남은 한 국가가 잘되지 않으면 나머지 국가들도 성공할 수 없는 상호의존 관계이므로, 20세기와 완전히 다른, 어렵지만 새로운 미래관계를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7) 파네타 국방장관도 20129월 중국 칭따오(靑島)에 있는 북해함대 사령부를 방문해서,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군사력 재배치는 중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며, 미국의 정책은 중국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확대하고 참여를 증진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8) 협력과 경쟁을 함께 꾀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향후 미중관계는 협력과 갈등의 이중주일 것이다. 다만 중국이 2022년 일인당 소득 1만달러 시대까지는 상대적으로 협력을 추구할 것이라 보면, 우리가 적극적으로 동아시아 질서 변환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은 10년 정도일지 모른다. 이 정도가 미중 양국이 세력다툼이라는 강대국 중심의 사고를 극복하고 진정한 공동이익을 발견하고 정의해가도록 역할을 수행하는 중견국에 주어진 시간이다.

 

 

4. 새 정부의 중견국 외교전략

 

미중의 신형대국관계 속에서 2013년 한국의 새 정부가 가져야 할 전략적 비전은 동아시아가 강대국 중심 질서에서 다차원적 협력의 지역질서로 변환하는 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향후 10년간 동아시아 세력전이를 평화적으로 흡수・발전시킬 체제적 유연성을 확보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역내외 다양한 행위자들이 서로 연계하는 복합네트워크 질서를 설계할 필요가 있다.9) 민족주의가 분출하고 강대국 경쟁이 본격화되는 지역 현실에서 정체성의 공유를 전제로 하는 ‘공동체’적 질서란 이상에 가깝다고 본다면 네트워크 질서가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 여기서 ‘네트워크’란 기존의 동맹체제처럼 국가간의 고정된 연계가 아니라 통상・금융・안보・생태환경 등 다층위에서 국가 및 비국가 행위자들이 개방적이고 탄력적이며 확장 가능한 형태로 연계한다는 의미로, 이런 질서를 만들어감으로써 강대국 중심 편가르기와 민족주의 과잉에 의한 국가간 대립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중견국으로서 한국의 역할은 이런 질서 조성을 위해 주요 행위자와 전방위로 연계를 확장・강화해가는 동시에 강대국 간의 소통과 협력을 촉진하는 중재자이자 주요 아젠다를 형성하고 질서를 설계하는 파트너로서의 역할을 모색해야 한다. 중견국 외교를 통해 미중관계의 험난한 파고를 넘고, 번영과 공생의 동아시아 질서를 세우는 데 앞장서며, 평화의 한반도 거버넌스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다음과 같은 네가지 중점과제를 고려해볼 수 있다.

첫째, 한미관계와 한중관계라는 핵심적인 양자관계를 병행하며 심화해가는 일이다. 한미동맹은 그 자체로 존재의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나아가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무조건적인 미국 편향이 한국의 국익에 부합되지 않음은 이명박정부의 여러 사례에서 확인되었다. 또한 한미간 포괄적 전략동맹을 한국이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다. 국방력의 감축을 염두에 두고 있는 미국은 더 많은 우방의 협조와 분담을 촉구할 것이고, 한국은 미국의 기대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국민정서에 부담이 되지 않을 협력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이것이 차기 정부가 수행해야 할 중요과제다. 사실 한미동맹은 운용하기에 따라 한국이 갖는 가장 중요한 자산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한반도뿐 아니라 지역 및 지구적 차원에서 한국 스스로의 목표와 전략을 우선 정립하고 동맹의 발전에 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중관계는 한미관계에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갖는 과제다. 한중간 심화되는 경제・사회・문화관계는 정치・군사영역으로 확산되어 협력을 이끌 수 있는 반면, 한국경제의 중국 의존도가 높아짐에 따라 중국이 이를 정치수단으로 삼을 위험성도 있다. 따라서 중국이 한중관계를 동아시아 공생과 번영이라는 지역전체의 이익 차원에서 인식하고 역내 정경분리 원칙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한편, 경제관계의 제도화로 전략적 외부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제도를 설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또한 한미동맹을 유지하면서 중국과도 협력관계를 발전시켜가기 위해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의 역할이 중국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는 신뢰를 중국에 심어주는 외교적 노력을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한다. 한국은 미중이 협력할 쟁점과 갈등할 수 있는 쟁점을 정확히 분별하고 미중관계가 전략적・패권적 대결로 환원되지 않도록 대안적 논리구조와 담론을 만들어가는 중간자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둘째, 동아시아 중견국과의 네트워크를 확대하고 이들 사이의 협력을 주도하여 미중의 대결구도로 지역질서가 재편되지 않도록 외교적 노력을 다해야 한다. 효과적인 지역다자질서를 구축하면 강대국의 행동을 제도적 규범과 규칙으로 제약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지정학적 이해를 공유하고 있는 국가군, 예컨대 경제적으로는 중국에 대한 의존이 커지는 반면 안보적으로는 미국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중견국들과 일종의 유지연합(like-minded group)을 형성하여 새로운 지역다자제도 구축에 공동보조를 취할 수 있다. 한국과 협력할 수 있는 대상은 인도네시아 등 일부 아세안국가, 호주, 인도, 그리고 일본이다. 이 작업이 쉽지는 않다. 중견국들의 무임승차를 방지하는 한편 집합행동의 기반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출발로 한국은 일본과 새로운 협력의 틀을 마련해야 한다. 사양대국(斜陽大國) 일본은 이제 강대국 정치의 객체로 전락했고 새로운 중견국 정체성을 모색하고 있어 한국이 이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한일 양국은 동아시아의 두 OECD 국가로, 근대화・산업화・민주화를 여타 아시아 국가보다 먼저 겪은 이른바 ‘실천적 선구자’(thought leader)다.10) 양국은 강대국 패권정치를 지양하는 지역질서를 세우고 지역의 집합정체성을 만드는 데 협력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차기 행정부는 현재 독도문제로 정체되어 있는 한일관계를 지역적 차원의 전략협력 관계로 발전시키는 길을 모색하는 일과 한미일 협력의 적정수위를 확보하는 일을 우선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셋째, 경제협력을 통한 지역다자질서를 모색해야 한다. 지난 십수년간 동아시아 지역은 세계경제 성장의 견인차였는데, 성장의 이면에는 지역을 단위로 한 초국가적 산업축적과 국제분업 네트워크가 자리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기업들은 역내에서 서로 다른 입지조건과 부존자원을 활용하여 초국적 생산네트워크를 짜가면서 세계적으로 가장 역동적인 제조업 경쟁력을 축적했으며, 이와 함께 동아시아 경제의 네트워크화를 진전시키고 있다. 또한 시장주도형 발전을 한단계 높이기 위해 양자간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를 엮는 다자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등 제도화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이는 경제적 상호이익을 증진시키는 동시에 국가간 전략적 경쟁을 완화하고 협력을 추동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최근 논의되고 있는 한중일 FTA, 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등 다자주의 FTA는 동아시아 지역주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문제는 한중일이다. 아시아 3대 경제대국이면서도 삼자 간에는 어떠한 FTA도 체결되지 않았다. 중일의 주도권 싸움, 민감 부문의 강한 보호주의, 영토・역사문제의 엄존, 역외국가 미국에 대한 이견 등이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전략논리를 넘어 새로운 경제논리를 개발함으로써 지역다자 FTA를 성사시키고, 이를 통해 전략적 외부효과를 도모해야 한다. 또한 FTA 피로현상을 극복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끌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국내 경제환경과 조화된, 즉 균형성장과 일자리 창출에 도움을 주는 통상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이러한 대외적인 FTA 정책을 추구해가면서 국내 경제거버넌스 또한 분배적 측면을 좀더 감안하는 방향으로 개선되어야 한다.

넷째, 미중 경쟁 가운데 중견국 외교의 차원에서 대북외교를 추진한다는 것은 북한문제를 단지 한반도 차원이 아니라 지역 차원의 문제로 제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과정에서 한국이 정책주도권을 행사하고 국제협력 문화를 창출한다면 이는 지역문제를 해결하는 모델을 제시하는 의의를 가질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문제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인식하고 대북외교를 중견국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향후 고려해야 할 사항으로는 첫째, 대북외교의 목적을 핵폐기 및 개혁개방 유도, 통일에 한정할 것이 아니라 다른 대외정책 이슈들과 결합하여 장기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북핵문제를 한국외교 전반의 관점에서 인식하여 그것이 단기적으로 해결되지 않을 경우라도 그 관리 과정에서 한국의 외교적 입지를 다져야 한다. 동시에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고, 미중 양자관계 속에서 한국의 외교적 운신의 폭을 넓혀야 한다. 이렇듯 동아시아 다자안보의 기회로서 북한문제를 인식하고, 북한의 핵 비확산 및 정상국가화 과정에서 한국의 지구적 외교모델을 강조하는 등 다각적인 외교 성과를 쌓아가야 할 것이다. 북한문제를 지역 전체가 협력해서 다루는 구도를 굳건히하고 그 속에서 미중협력을 이끌어냄은 물론 지식외교의 주도력을 증폭시킴으로써 우리가 원하는 장기적인 외교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끝으로 중견국 외교는 배타적 국익이 아닌 지역 전체 혹은 지구 전체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국익을 증진시킨다는 장기적 관점의 국익계산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박근혜정부는 고도 정보화시대에 걸맞은 시민사회와의 소통기제를 마련하여 국익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이뤄내고, 시민사회의 지혜를 정책결정과 실행의 과정에 연결시키는 새로운 외교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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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캐나다와 호주를 주요 사례로 한 중견국 외교에 대해서는 Cooper, Andrew, Richard Higgott, and Kim Nossal, Relocating Middle Powers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Press 1993).

2) Hilary Clinton, “Americas Pacific Century,” Foreign Policy (November 2011).

3) Department of Defense, “Sustaining US Global Leadership: Priorities for 21st Century Defense,” http://www.defense.gov/news/Defense_Strategic_Guidance.pdf.

4) Leon Panetta, “The Force of the 21st Century,” 2012/12/18. http://www.defense.gov/speeches/speech.aspx?speechid=1742

5) 시 진핑과 후 진타오의 발언은 한석희 「시 진핑 지도부의 대외관계 분석」, 『국가전략』 제18권 4호(2012) 39~40면에서 인용.

6)Full Text of Hu Jintaos Report at the 18th Party Congress,” 2012/11/18. http://www.globaltimes.cn/content/744879.shtml

7) Hilary Clinton, “Remarks on the US Institute of Peace China Conference,” 2012/3/7. http://www.state.gov/secretary/rm/2012/03/185402.htm

8)Panetta Visits Chinese Navy Fleet, Tours Vessels,” http://www.state.gov/secretary/rm/2012/03/185402.htm

9) 복합네트워크 개념에 관해서는 하영선 엮음 『2020 한국외교의 10대과제』(동아시아연구원 2013) 참조.

10) “실천적 선구자” 개념은 2006년 일본 아소오 타로오 외무상이 사용했다. 麻生外務大臣演説アジアの将来安定繁栄目指して: 過去教訓、そして自由けたビジョン」 2006/5/3. http://www.mofa.go.jp/mofaj/press/enzetsu/18/easo_05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