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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
문화유산 백년대계를 바란다
숭례문 준공에 즈음하여
천지현 千智賢
창비 어린이출판부 편집자 kkujae@changbi.com
2008년 2월 10일 설 연휴 마지막 날 저녁,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났다. 국보 1호 숭례문(崇禮門)이 화마에 휩싸여 무너져내린 것이다. 당시 TV를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된 숭례문 화재는 전 국민을 엄청난 문화적 상실감 속으로 몰아넣었다. 황망히 현장으로 달려가 그곳을 지켜보던 시민들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5년이 지난 2013년, 숭례문은 문루(門樓)와 성곽 복구공사를 끝내고 다시금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숭례문 화재사건. 그러나 딱 여기까지다. 사실 우리는 생각보다 숭례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필자 역시 다르지 않다. 서울에 살면서 둘레를 무심히 지나치긴 했어도 일부러 찾은 적은 없다. 그러고 보면 이 사건은 문화유산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무관심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인지도 모르겠다.
숭례문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도성을 쌓고 동서남북으로 성문을 내면서 도성 남쪽에 세워졌다(1398). 숭례문은 백성이 드나드는 통로였을 뿐 아니라 외국 사신이 오가는 도성의 정문 역할을 한 곳이었다. 현존하는 옛 성문 중 규모가 가장 크고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1962년에 국보 1호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우리 기억 속의 숭례문에는 양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성곽이 없다. 사다리꼴 모양의 석축 위에 2층짜리 문루가 올라선 모습뿐이다. 숭례문의 모양새가 지금과 같이 된 것은 대한제국 말기의 일이다. 1907년 일본 왕세자 요시히또(嘉仁)가 조선을 방문하면서 약소국의 ‘허름한’ 성문 아래로는 지나갈 수 없다고 하여 서쪽 성곽을 헐어버렸다 한다. 명문화되어 있지 않아 이 사건의 진위를 두고 논란도 있지만, 이 시기에 숭례문 주변의 성곽이 헐린 것은 사실이다. 이후 전차가 본격적으로 다니기 시작하고 교통수단이 복잡해지면서 숭례문은 점차 도심 속 섬처럼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멀어졌고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
사실 숭례문이 시민에게 개방된 지는 10년도 되지 않았다. 2004년 1월 1일, 당시 이명박(李明博) 서울시장은 신년사에서 “숭례문 지역에 도심 광장을 조성하여 국제적인 명소로 만들겠다”고 밝히고 2005년 5월 27일에 숭례문을 처음으로 개방, 이듬해에는 숭례문의 홍예문(虹蜺門, 성문의 출입구)까지 개방했다. 시민과 괴리됐던 문화유산이 다시금 일반의 생활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과정이 문제였다. 안전상의 문제를 들어 개방에 다소 부정적이었던 문화재청의 견해가 무시되고 관리체계가 허점을 드러내는 등 특유의 밀어붙이기식 개발주의가 이 경우에도 그대로 발휘된 것이다. 그로부터 약 2년 뒤에 화재가 발생한 것을 생각하면 이러한 허술함이 참으로 뼈아프다. 게다가 사건 발생 직후 당시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숭례문 복원을 “정부예산보다는 국민이 십시일반으로 참여하는 성금으로 하는 게 위안이 되고 의미가 있지 않겠나 생각한다”면서 모금운동을 전개하겠다고 나서, “정부의 책임을 국민에게 떠넘기는 것 아니냐” “국민이 봉이냐”는 등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것을 기억한다.
지금 숭례문은 가설 덧집이 철거되면서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과거 잘려나갔던 성곽도 동쪽으로 53m, 서쪽으로 16m 가량 일부나마 복원되었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30~60cm 높아진 지반은 조선 후기의 지반에 맞춰 낮아졌다. 약 250억원을 들여 복구공사 전반을 우리 전통 방식에 따라 진행하고자 애쓴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4월 준공식을 앞두고 이번 공사와 관련해 여러가지 이야기가 들려온다. 홍예문 천장에 그려진 용 그림이 이전과 달라 논란이 이는가 하면, 작업에 쓰인 단청 안료 대부분이 일본산이라는 지적도 있다. 좀더 장기적인 안목으로 사회적 합의를 거쳐 복원 계획을 세울 수는 없었는지 안타깝다. 복구공사의 완공 시점이 ‘대통령 임기 내’로 계획되었다는 점도 공기(工期)를 무리하게 설정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한다. 작년 11월 4일, 복구 현장의 공개관람이 허용된 마지막 날 현장을 찾아 관계자에게 준공 일정을 물었더니 공사는 12월 중에 끝날 것으로 예상되지만 대선 기간과 맞물리면서 준공식은 현 정부 임기 내에 할지 차기 정부 출범 이후로 미뤄질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공사 지연이나 한파 같은 원인도 있겠지만 어쩐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듯해 여러모로 씁쓸하다.
문화재 복원은 수백년 뒤를 바라보며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다. 일본 쿄오또(京都)의 킨까꾸지(金閣寺, 정식 명칭은 로꾸온지鹿苑寺)는 1950년 화재로 소실된 이후 무려 50년간, 수차례에 걸친 복구작업 끝에 이전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에스빠냐의 건축가 가우디(A. Gaudi)가 설계한 싸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 성가족) 성당이 100년 이상 공사 중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숭례문은 화재 수습과 고증 조사 및 설계에 2년, 실제 공사에 3년으로 총 5년 정도가 걸렸다. 두 사례와 건축 규모 면에서 차이가 있겠지만 빨라도 너무 빠른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요즘 서울에는 한양도성을 복원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2009년 당시 오세훈(吳世勳) 시장 때부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목표로 추진되어온 서울시 정책사업인데, ‘형식적인 복원은 없다’고 한 박원순(朴元淳) 현 시장의 말대로 단순히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하고 관리하는 것을 넘어 600년 고도를 재현하는 책임있는 사업으로 진행되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민이 깨어 있어야 한다. 알아야 지지도 하고 비판도 할 수 있다. 능동적인 감시자, 적극적인 향유자가 되자. 우리 주변의 문화유산을 안내하고 보존운동에 동참하게끔 도와주는 단체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는 어느 미술사학자의 말에 이어 사랑하는 만큼 지켜주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