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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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연 權智娟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1. 1988년생.

dryicelip@hanmail.net

 

 

 

폭력의 역사

 

 

내 목을 매달던 밧줄에서 나던 냄새

 

내 늑골을 물어뜯을 때

너의 이빨이 부서지며

벌어진 살에서 피가 흐르는 시간

그 피가 마르고 굳어 흉터가 되는 속도로

 

연한 살무덤이 유치를 밀어올릴 때

아스파라거스에 말린 베이컨이 팬에서 익어가는 시간

그 아스파라거스에 올리브유가 배어드는 시간

 

덧바른 그림 위에서 마르는 안료

덧칠 아래서 갈라져가는 그림

 

나는 쓰레기 산 앞에 오체투지한다

너는 나의 등을 밟고 갔다

얼어서 깨지는 나의 등

부서진 나의 뼈로 레고를 맞추는 아이들

 

고마웠어

 

나한(羅)을 만나 나한에게 죽었고 조사(祖師)를 만나 조사에게 죽었고

너를 만나 너에게 세번을 마저 죽었다

나는 너를 죽일 수 없었지

너의 흰 손이 종루에 기대주었던 사다리는

내 발이 닿자마자 부서졌다

 

검은 하늘에 울려퍼지던 종소리

젖은 돌 속의 너의 목소리

오래전 불에 타 죽은 너의 목소리

 

너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그 돌에

머리를 찧는다

돌을 적신다

돌이 차가움을 잊을 때까지

아무리 찧어도 검은 돌이

색으로 물들 때까지

 

비가 다시 내리면

색이 씻겨나가고

그 돌은 더 검어지겠지만

 

비가 올 때까지

그 돌은.

 

 

 

샴, 하드 로맨스*

 

 

우리는 하나의 가죽을 쓴 두 사람

서로에게 등이 열린

 

너의 뼈가 굽으면 당겨진 내 핏줄이 몇가닥씩 끊어져도

너의 피가 혈관을 타고 돌 때 내 피부에는 열꽃이 터졌다

체리 블라썸의 환희

 

너의 피톨은 석류처럼 익어 벌어져

제발 씹어 삼켜달라고 말했지

껄끄러운 너의 씨는 유리가루

내 식도와 내장을 다 갈아버렸어

 

너는 나에게 수면제 먹이고

밤마다 찾아오는 아편쟁이와 섹스했지

그의 가슴에 칼을 꽂아준 걸 고마워해야 할 거야

아편쟁이의 살무덤은 무쇠 칼을 게걸스럽게도 잡아먹더군

스물여덟번 칼을 꽂을 때까지 넌 내 등에 매달려 있었다

뒤집어진 벌레처럼 팔다리를 허우적대면서

 

너는 향기로운 피가 마르고

부드러운 살이 썩어

삭정이 같은 뼈만 남을 때까지

내 등에 업혀 다니다

척추를 빼들고 떨어져나갔다

 

내 등은 텅 비었어

네가 살아 있을 때 즐겨 먹던 너의 씨들이

살을 파먹고 자라서

유령 같은 덤불로 무성해져 있었거든

그 덤불들은

볕을 쬐자마자 휘발해버렸지

나를 마취시켰던

날 위한 너의 그리움처럼

 

너를 탈각하고

우린 죽어서야 마주보게 되었다

죽은 너의 두 엄지손가락이

나의 두 눈을 도려낸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재로 된 너의 얼굴

바람에 무너져내리던

재의 성.

 

 

--

*김정구 감독의 단편영화(2001).

 

 

 

녹의 추천사

 

 

녹조 낀 수조 속을 휘도는 인어

비디오 안의 인어 필름 안의 인어

목걸이 속에 갇힌 너의 목소리 속의 너의 메아리

 

인어의 투명한 내장 벽

투명한 혈관을 타고 도는 투명한 피

두 허파와 폐포와 아가미

아가미 속에 희고 끈적한 연고를 채우고 물 밖으로 나가는 순간

투명한 살이 돋는다

 

폐가 폭발할 것 같아

 

허파 두개가 물거품으로 물보라로 터진다

텅 빈 흉곽을 메우는 녹물

가슴이 찢겨질 때까지 밀려든다

 

태초의 악덕과 불행의 씨

물의 아가리 속에서

태어나면서 끝나는

젖은 쓰레기 같은 숨 냄새를 토해내면서

백사장에서 썩어가는 해초 더미로 메워지는 인어의 두개골

 

되감기◀◀

무른 뼈를 태엽 감듯이 말아

넌 단백질 덩어리의 구체(球體)가 된다

공회전

물약을 토해낸다 아버지의 칼을 돌려준다

노파에서 어란에 흩뿌려지는 정액으로

 

끝나지 않는 파랑을 헤쳐 니가 찾은 것은 녹조의 책

수초뿌리에 얽힌 페이지를 펼치자 책장이 찢겨진다

 

심해화산의 연기구름처럼 폭발하는 물기둥. 너는 얼어붙은 바다 밑바닥 얼음의 기포 안에서 우리의 정원에서 작약을 꺾어간 시간의 손가락이 썩어가는 이야기를 읽는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갈라지는 살얼음에 너의 손가락이 헤진다. 떨어지는 핏방울. 우리의 시간과 현재의 낙차로 새겨지는 텍스트. 얼음이 너의 피를 빨아마신다. 빨아마시면서 녹아 사라진다. 피의 잉크로 다시 씌어지는 페이지. 뜨거운 잉크가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페이지.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는 새겨지는 순간 녹는다 죽는다 새겨진다 읽힌다 다시 죽는다.

 

파란 얼음을 깨물던 시간의 이빨이 파쇄되었다. 살 속에 박혀 녹슬어가는 얼음 덩어리. 언 채로 파랗게 죽어가는 이야기. 물살에 잘린 인어의 머리카락이 풀린 실패처럼 부유하는데 너는 푸른 피를 쏟으며 바다 밑바닥에서 녹아가는 녹의 책을 읽는다.

 

 

 

시 | 심사평

 

 

어떤 문학적 장면을 가지고 나타날 것인가. 한 시인의 출현이라는 것이 단지 그의 개인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시단과 문학사의 의미있는 표정이 되는 것임을 생각해볼 때, 그리고 그것이 더욱이 젊고 도전적인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일 때, 이 기대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새로이 막 도래한 어떤 장면 앞에 멈추어 서게 될 것인가 하는 설렘은 작품을 읽고 심사하는 내내 이어졌는데, 그래서인지 심사는 논의에 논의를 거듭하는 장고 속에 치러졌다.

올해 시부문은 총 278명이 응모했다. 응모작 대부분은 이미지의 탄생이나 그것의 감각적 포착, 언어의 기쁨들을 적절하게 감지하고 있어서, 무엇이 시가 되는 것인지 잘 이해하고 있다고 느껴졌다. 다만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응모자들이 선배시인들의 영향에 많이 눌려 있다는 점이다. 영향이라는 것을 물론 받지 않을 수 없는 법이고, 받는 것이 받지 않는 것보다 정신적으로 풍부해질 수 있겠지만, 문제는 영향의 단순한 배치가 아니라 그것의 확장과 변전을 넘어 탈환의 가능성을 얼마나 보여주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의 몇몇 젊은 시인들의 어법이나 이미지가 생경하게 감지되는 작품들을 대했을 때 아쉬움이 컸다. 출처를 들고 다니기보다 출처를 뚫고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논의가 길어진 원인 중의 하나는 같은 응모자의 작품 수준이 고르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두편의 작품이 잘생겼어도 나머지는 다시 태어나기 위해 좀더 기다려야 할 듯했다. 따라서 고른 완성도와 개성을 겸비한 최후의 1인을 찾기 위해 고심해야만 했다.

1차 심사를 거쳐 「중력」 외, 「불의 리듬」 외, 「몸 없는 집」 외, 「폭력의 역사」 외, 「낙타가 타들어간다」 외, 「당신을 암기합니다」 외를 2차 심사에 올렸고, 이 중 「불의 리듬」 외, 「몸 없는 집」 외, 「폭력의 역사」 외를 놓고 최종 심사에 들어갔다. 논의는 쉽지 않았다. 셋 모두 완성도와 나름의 개성을 갖추고 있다고 판단되었고, 나름의 미흡함이 느껴졌다.

「불의 리듬」 외 4편은 물질적 상상력의 기하학적 구성이라는 독특한 전개 방식이 돋보였다. 응결과 도약, 밀폐와 전진, 구상과 추상의 대면과 교차가 인상적이었다. 이 힘의 균형이 장점이라면, 또 한편으로 이 균형을 무너뜨린 속살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인 듯하다. 잠긴 문이 스스로 열리는 지점까지 더 나아간다면 피가 돌고 힘이 붙을 예사롭지 않은 솜씨다.

「몸 없는 집」 외 4편은 오래 들여다본 언어와 삶의 풍경들을 단정하고 깊이있는 성찰로 매편마다 차분하게 전개하고 있어서 눈길을 머무르게 했다. 언어로 내밀한 호흡을 해온 오랜 내력이 느껴졌다. 앞으로 이 호흡이 좀더 출렁이면서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가파른 자유를 향해 스스럼없이 나아가기를 지켜봐야할 것 같다.

당선작으로 선정된 「폭력의 역사」 외 4편은 거침없고 활달한 언어들이 쏟아져 나와 전투를 치르는 언어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언어의 물욕, 언어의 사심, 언어의 돌출과 이물감이 사물들을 느닷없이 헤집고 벌려놓는 장면들이 신선했다. 언어가 사물의 위태로움을 편들고 부유하는 것은 언어가 스스로 사물이 되고 사물의 잉여가 되는 생생한 현장이기도 했다. 비록 이 과정이 함께 수록된 다른 시들에서 이미지까지 부서지고 해체되는 무차별성으로 종종 인도되지만, 이러한 위기와 모험에까지 두루 격려를 보낸다.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축하하며 큰 시인으로 성장해가길 기대한다.

김기택 이수명 이정록

 

 

 

시 | 당선소감

 

눈이 미친 듯이 내리고 상 위의 초는 바람에 타오르면서 꺼지지 않았다. 우리는 따뜻한 홀에서 눈보라 속으로 광대가 걸어다니는 유리문 밖을 보며 튀긴 새우와 피자와 타르타르 치킨 샐러드를 먹었다. 스카시오렌지 빨대에 끼워진 입체 종이오렌지를 접었다 폈다 하며 웃음을 터뜨릴 때만 해도 나에게 이런 운명이 펼쳐질 줄 몰랐다. 하지만 그 밤 너는 진심으로 내가 될 거라고 말해주었지. 창작과비평 받으려고 너와 함께 응모했는데 얼떨결에 당선이 되어버렸다. 솔직히 당선되기에 곤란한 실력이다. 나보다 좋은 시를 쓰는 학생들이 많다. 그럼에도 내 시를 선택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누가 되지 않게 미적 용기와 겸손함 사이에서 더 열심히 쓰겠다.

상을 수상하는 것보다 시를 가르쳐주신 조동범 교수님께 감사 인사를 전할 수 있어 기쁘다. 선생님께 지금까지 배운 날보다 앞으로 배울 날이 더 많다는 것이 행복하다. 사랑하는 윤성희 교수님과 김남혁 교수님께도 감사드린다. 가족보다 가족 같은 귤—주희언니, 민교, 문경, 대성, 민경, 신정이—고마워. 15년 동안 내 곁을 지켜준 은선아, 베를린에서 고생 많지. 너와 함께 자라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모습일 거야. 늘 고맙다. 정민아, 불어 번역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한국 오면 밥, 커피, 술 풀코스로 쏠게. 청하보다 맑은 전실 언니, 언니는 영원한 제 여신이에요. 사랑해요.

권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