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소설
장희태 張熙台
광주대 문예창작과 3. 1987년생. gmlxoqkqh@naver.com
시안, 쥐와 함께 잠들다
쥐는 발밑에 있었다.
그는 공장 주변 잔디밭을 걷고 있었다. 벚꽃잎은 선선한 봄바람에도 우수수 떨어졌고, 우종은 얼굴에 달라붙는 벚꽃비를 손으로 닦으며 공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무언가 물컹한 것을 밟은 느낌에 화들짝 그의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우종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발 디딘 자리를 살폈다. 분명 발밑에서 무언가 물크러지는 느낌이 선명했는데, 잔디밭 위에는 아무것도 뭉개져 있지 않았다. 그가 발 디뎠던 자리에는 벚꽃잎만 수북하게 쌓여 있을 뿐이었다. 우종은 무덤처럼 불룩 솟은 벚꽃잎 더미를 의문스레 들여다보았다. 잎과 잎 사이 틈새로 잿빛 털 같은 것이 어른거렸다. 그는 운동화 끝으로 조금씩, 아주 조심스럽게 벚꽃잎을 걷어냈다. 화석을 발굴하는 고고학자의 붓질처럼, 신중하게 발끝을 놀려 벚꽃잎을 털어냈다. 시든 꽃잎이 몇장씩 각질처럼 떨어질 때마다, 감춰져 있던 잿빛 털 뭉치가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밟은 건 손바닥만 한 쥐였다. 배가 우묵하게 반쯤 꺼진 쥐가, 벚꽃잎을 솜이불처럼 덮은 채 잔디밭 위에 누워 있었다. 우종은 천천히 운동화 밑바닥을 살폈다. 하얀 운동화 밑바닥에는 마른 잔디 몇가닥과 벚꽃잎만 눌려 있을 뿐, 쥐의 어떤 흔적도 묻어 있지 않았다.
쥐는 죽어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멀쩡했다. 그가 밟아 배 한가운데가 우묵하게 꺼진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상처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살아 있을 리는 없었다. 그가 쥐를 잡으며 느낀 바에 의하면, 그것들은 예민하고 끈질긴 짐승이었다. 배를 살짝 누르는 것쯤으로 즉사하는 동물이 절대 아니었다. 살아 있었다면 진작 몸을 피했거나, 최소한 발악을 하며 이빨로 운동화라도 물어뜯었을 것이었다. 그럼 이건 뭔가. 쥐에게는 개미나 파리 한마리조차 꼬여 있지 않았고, 우종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조차 헷갈리는 쥐를 보며, 자신이 함정을 밟았다고 생각했다. 시안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우종은 이년 전 공장에서, 대머리 과장의 소개로 시안을 처음 만났다. 말하자면 그와 그녀는 직장의 파트너가 된 셈이었다.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그녀와 악수를 나누며, 그는 자신이 인형의 손을 붙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인형처럼 아름다웠던 것은 아니었다. 시안의 여윈 몸은 헐렁하고 더러운 유니폼에 감싸여 있었고, 드러난 팔다리는 가지만 남은 겨울나무처럼 앙상하게 솟아 있었다. 그와 대머리 과장 쪽으로 걸어오는 몇걸음이 위태로워 보일 지경이었다. 시안은 찬바람에 나부끼는 마른가지처럼 그에게 다가왔고, 색이 바랜 낙엽처럼 희고 건조한 손을 내밀었다. 그는 부러질 듯 가는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고 애매하게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려요. 시안은 대답 대신 메마른 입술로 희미하게 웃었다. 양쪽으로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서 금세 선홍색 피가 배어나왔다. 시안의 핏기 없는 입술은 터지고 갈라져 검붉은 피딱지가 굳어 있었고, 고무줄로 묶은 푸석한 머리채는 빗자루처럼 매달려 있었다. 허우적거리는 동공은 그가 아닌 허공을 더듬는 듯 초점이 어긋나 있었다. 시안의 몸에서 유일하게 빛났던 건, 붙잡은 손 검지에 끼워져 있던 반짝이는 싸구려 도금반지 뿐이었다. 인간 형상을 한 하얀 가죽부대가 숨을 내뱉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는 그날부터 시안과 함께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원단을 접착시켰다. 시안은 그에게 업무에 관한 말조차 건네지 않았고, 그는 출근 첫날부터 원단 한 롤을 통째로 망쳤다. 대머리 과장에게 욕설을 듣는 동안에도, 시안은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묵묵히 원단을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희고 가는 팔로 원단을 안아 올리며, 그녀는 아이를 어르는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모두가 짜고 그에게 덫을 놓은 기분이었다.
쥐는 벚꽃들이 은밀하게 감춰놓은 덫이었다. 그는 보기 좋게 올가미에 걸리고 만 것이었다. 우종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자신이 밟은 함정을 살폈다. 양손으로 쥐의 털을 꼼꼼하게 헤집어가며 상처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도 쥐의 몸에는 작은 구멍 하나, 생채기 하나 나 있지 않았다. 앞니 하나, 손톱 하나도 빠져 있지 않았다. 먹이를 구할 능력이 없어진 늙고 병든 쥐가, 우연히 벚나무 아래에서 굶어 죽은 것도 아니었다. 쥐는 미세한 독침에 찔려 죽은 것처럼 어떠한 외상도 보이지 않았고, 고르게 난 잿빛 털에는 피 한방울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이토록 고스란히 형태를 갖춘 쥐가, 따듯한 봄에 왜 죽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쥐도 겨울잠을 자는지 생각했다. 겨울잠에서 깨지 못한 곰이나 개구리가, 잠든 채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생존하기 위해 택한 유일한 방법이, 스스로를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천천히 죽이는 것이었다. 쥐도 깨어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벚꽃이 이불처럼 쥐를 아늑하게 덮어주어, 봄에 짓눌린 채 안락사한 것은 아닐까. 우종은 마른 침을 삼켰다. 굽혔던 무릎을 펴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온화한 봄 햇살 아래에서 돌연 현기증이 몰려왔다. 멀쩡한 쥐의 시체는 언젠가 시안이 말해준 그녀의 엄마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영안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엄마가 누워 있던 철제 침대는 눈이 아프도록 새하얬어. 하얀 셔츠를 입은 사람이 손잡이를 움켜잡고, 냉장고 같은 침대를 천천히 꺼냈어.
냉장고?
응, 엄마의 시체가 보관되어 있는 냉장고, 엄마는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하얀 천으로 된 시트를 이불처럼 덮고 있었어. 미라처럼 꽁꽁 가려진 시신을 보고서야, 엄마가 어디를 어떻게 다쳐서 죽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 하얀 셔츠가 엄마 머리맡의 시트를 양손으로 구겨지도록 움켜쥐는데 세상에, 그 주름을 보며 나도 모르게 질끈 눈이 감겼어. 어둠 속에서 스르륵, 가볍고 메마른 것들끼리 마찰되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아주 천천히 감은 눈을 떴어. 시트는 엄마의 툭 불거진 골반뼈까지 젖혀져 있었고 세상에, 믿기지 않게도 드러난 엄마의 창백한 알몸에는, 생채기 하나 나 있지 않았어. 오히려 생전에 있던 무수히 많은 흉터들과, 왼쪽 팔목의 주삿바늘 자국까지 말끔히 사라져 있지 뭐야. 누워 있는 엄마의 말끔한 모습은 말이야. 마치 박제 같았어.
박제?
그래, 나는 하얀 셔츠에게 물었지. 교통사고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하얀 셔츠가 내 의아한 표정을 훑더니, 신부처럼 엄숙한 태도로 말했어. 발견했을 땐 이미 가망이 없으셨다. 왼쪽 팔이 완전히 짓눌려 떨어질 듯 헐거웠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돌아가셨다. 있잖아. 엄마는 뺑소니 사고를 당한 거래, 신고만 제때 했으면 살 수 있었다고……
저런……
아니야 괜찮아. 내가 진짜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어. 나는 하얀 셔츠에게 엄마의 흉터는 다 어디갔느냐구 물었지. 짓눌린 팔은 포르말린에 적신 솜을 집어넣어 다시 부풀렸다. 터진 부분은 꼼꼼히 꿰맸다. 흉터가 많기에 몸 전체에 분도 발라놨다. 세상에, 그러고 보니 정말로 엄마의 입술에는 새빨간 루주까지 칠해져 있었어.
쥐는 죽어 있음에도 별다른 변동이나 탈이 없어 보였다. 잘 갈무리되어 있던 시안의 엄마처럼, 겉보기에는 더없이 멀쩡해 보였다. 누군가 쥐를 박제해놓은 것은 아닐까? 미세한 주삿바늘로 쥐의 내장을 몽땅 빨아내고, 텅 빈 몸속에 방부 처리된 솜을 주사해 다시 부풀려놓은 것은 아닐까. 만약 엄마의 시신이 티 하나 없이 깨끗하지 않고 처참했어도, 시안은 그 얘기를 하며 웃었을까? 아니, 엄마를 밀어버렸을까?
우종은 쥐꼬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쥐는 솜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엄마의 왼쪽 팔꿈치에서 진동했다던 소독약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는 빗질한 듯 가지런히 누워 있는 회색 털에 가만히 손을 대어 보았다. 뻑뻑하고 깔끄러운 감촉이, 꼭 우레탄과 접착시켜 만든 모피 옷을 쓰다듬는 것 같았다. 쥐의 머리와 가슴을 거쳐 배를 만지는데 갑자기 손이 눅눅해졌다. 손바닥에 녹색의 진득거리는 액체가 가득 묻어 있었다. 그는 축축한 손바닥을 코에 가져다댔다. 식초와 계란이 뒤섞여 썩는 냄새가 났다. 우종은 벚꽃을 한 줌 뜯어 손바닥을 닦았다. 손금 사이사이에 낀 걸쭉한 녹색 점액을 꼼꼼히 끄집어냈다. 그토록 멀쩡해 보였던 쥐는, 내장이 터진 채 뱃속부터 젖어가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는 쥐를 만지지 않은 손으로 조심스레 자신의 마른 배를 더듬었다.
쥐가 물건이나 모피 옷이 아니라는 사실에 새삼스레 비위가 상했다. 이처럼 바싹 마른 몸뚱이 안에, 번들거리는 젖은 내장기관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속이 울령거렸다. 쥐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기름진 호두알처럼 자글자글 주름진 뇌가, 여전히 두개골 속에 들어 있을 것이었다. 움푹 팬 뱃가죽 위로 튀어나온 갈비뼈를 바라보았다. 쿵쾅거리며 요동치던 심장, 풍선처럼 부풀어오르고 줄어들길 반복하던 횡격막, 끊임없이 숨이 드나들던 폐가 지금도 불거진 갈비뼈 속에 담겨 있을 것이었다. 녹색 점액을 흘리고 있는 반쯤 꺼진 배를 바라보았다. 소화되다 만 음식물이 삭은 채 고여 있을 소장과 대장이, 뱀처럼 똬리를 튼 채 아직도 쿨렁거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 모든 것들이 여태 젖어 있는 채로, 메마른 쥐의 용기에 담겨 있다고 생각하니 속이 메슥거렸다. 울컥 위액이 뿜어지고, 배 속에서부터 신물이 올라와 침이 고였다. 우종은 치미는 위액을 토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시큼한 침을 삼켰다. 역류해 올라왔던 밥풀 몇알이 목구멍을 간질였다.
우종은 잔디밭 쓰레기통을 뒤져 검은 비닐봉지를 찾아냈다. 쥐를 담자 무게에 눌린 봉지가 목이 헐렁한 티셔츠처럼 늘어졌다. 쥐를 다시 꺼내 윤곽이 드러나 보이지 않도록, 쓰레기통 위에 버려진 무가지로 먼저 쥐를 감쌌다. 신문지에 감싸인 쥐는 군고구마처럼 먹음직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그는 두번 매듭지은 봉지를 들고 공장 휴게실로 들어갔다.
“새벽에 어디 갔었어요?”
웃는 듯 살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시안인가. 우종은 화들짝 고개를 틀었다. 그녀는 어젯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그와 함께 있었던 민정이었다. 민정은 어제 옷차림 그대로 올 나간 스타킹에 체크무늬 모직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싸구려 모텔의 샴푸 냄새가 그의 콧속으로 훅 끼쳤다. 막 감은 듯 젖은 머리가 손가락처럼 흩날렸다.
“말도 없이 먼저 가는 게 어딨어요?”
민정이 눈을 치켜뜨고 쏘아붙였다. 아까 분명 웃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는데, 우종은 민정의 시선을 피해 망연히 올 나간 스타킹만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대답 대신 컹컹 쇳소리 섞인 기침이 터져나왔고, 그와 동시에 째지는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낡은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삼삼오오 잡담을 나누던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민정과 우종도 그 흐름에 휩쓸려 접착기 컨베이어 벨트 앞으로 갔다. 합성섬유를 만드는 거대한 기계들이 숨을 씩씩 내쉬며 깨어나기 시작했다. 기계들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성난 듯 몸뚱이를 들썩였다. 붉은 PVC로 코팅된 컨베이어 벨트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쥐가 든 봉지를 발치에 두고 작업을 시작했다. 오늘따라 벤젠 냄새가 역하게 머릿속을 파고들었고, 봉지 속의 쥐가 발에 거치적거려 평소보다 손이 더뎠다.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를 몇번인가 놓쳐 원단을 떨어뜨렸다.
“아 씨, 오늘 왜 그래요?”
우종은 대답하지 않았다.
“괜찮아요?”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다 문득, 뒤통수 위로 느껴지는 시선에 뒤를 돌아보았다. 대머리 과장이 우종의 등 뒤에 서서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경광봉을 든 손으로 뒷짐을 진 채였다.
“뭘 봐. 일이나 똑바로 해.”
과장이 눈을 부라리며 경광봉을 휘둘렀고, 피처럼 붉은 잔상이 허공에 남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무한대로 순환하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쉴 새 없이 염화비닐을 올려놓았고, 민정이 그 위에 얇은 인조가죽을 겹쳐놓았다. 벨트 끝의 거대한 롤러가 그 둘을 짓눌러 한장의 합성피혁을 만들어냈다.
시안은 접착기를 사랑했다. 처음부터 느꼈지만, 우종은 그 단어 말고는 그녀가 접착기를 생각하는 감정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접착기를 사랑했다. 시안과 함께 잠든 첫날, 그녀가 들려준 거라고는 접착기와 엄마 이야기뿐이었다. 그는 시안의 속삭임을 듣고 나서야 그녀가 왜 팔년씩이나 접착 일만을 했는지, 왜 원단을 컨베이어 벨트에 올려놓을 때마다 황홀한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있었고, 난생처음 사물에게 질투를 느꼈다.
신기하지 않니? 둘을 하나로 만들다니, 합성피혁이든, 면과 폴리우레탄이든, 부직포와 나일론이든 상관없어. 어울리든 어울리지 않든, 뭐든 올려놓기만 하면 접착기는 척척 합쳐내잖아. 나는 그때마다 몸이 부르르 떨려. 접착기가 납작하게 직물을 누르고 응고시킬 때마다, 둘을 하나로 합쳐 뱉어낼 때마다 다리가 저려와. 세상에, 신기하지 않니?
“정말로, 신기하지 않니?”
딱히 민정에게 한 말이라기보다, 자기도 모르게 터져나온 말이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살폈다. 과장은 없었다. 민정 역시 곁눈질로 과장을 찾고 있었다.
“신기해요. 어쩜 이년이나 일했으면서 원단을 밀려?”
그는 다시 입을 다물고 접착기 컨베이어 벨트의 흐름에 집중했다. 합친다는 게, 변화시킨다는 게 그 자체로 신기한 것은 아니었다. 충분한 시간과 지속적인 압력만 있으면, 무엇이든 변한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돌도, 산도, 바다도, 인간도, 우주도 변했다.
“아니, 접착기 말이야”
지속적인 압력과 시간, 그러나 우종과 시안이 연인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원단이 프레스를 통과하는 시간만큼이나 짧았다.
우종이 공장에 출근한 지 이주일이 지날 때까지도, 시안은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우종이 아침저녁으로 그녀에게 인사를 할 때마다, 피딱지가 맺힌 입술로 희미한 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시안이 처음 입을 연 것은 우종이 출근한 지 보름째 되던 날, 그가 첫날에 이어 또 원단 한 롤을 통째로 망쳤을 때였다. 그렇게 처음부터 원단을 삐뚤게 올리면 안 돼. 우종에게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그곳에 없는 누군가에게 속삭이는 듯 멀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처음부터 삐뚤어지면, 나중에 아무리 애써도 꼭 맞게 겹쳐지지가 않아. 시안은 희고 가느다란 팔로 원단 한 롤을 가볍게 안아, 그걸 컨베이어 벨트 위에 정성스레 펼쳐놓았다. 그럴수록, 잘라내야 하는 부분들이 많아지는 거야. 그녀는 양손의 새끼손가락을 하늘로 곧게 편 채, 나머지 여덟 손가락으로 원단의 양끝을 팽팽하게 당겨 잡았다. 앙상한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컨베이어 벨트와 평형으로 맞추고, 미간을 찡그린 채 원단을 움켜쥔 여덟개의 손가락을 움직여 틀어진 균형을 맞췄다. 마치 거미줄을 직조하는 여왕거미의 다리처럼, 한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하고 능숙한 움직임이었다. 좀더 애정을 가지고, 이렇게. 시안의 몸이 거의 벨트 위로 올라가는가 싶더니, 야윈 몸 전체로 원단을 누르듯 매만지기 시작했다. 벨트와 원단 사이에 들뜨고 비틀린 부분들을 메우는 거야. 우종은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건 사실 대화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건 접착기를 대하는 그녀의 마음가짐, 혼잣말 같은 것이었다.
“접착기를 애무하는 것 같네요.”
그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건 명백히 그녀를 비꼬는 말이었다. 고작 원단을 벨트 위에 올려놓으면서, 미사를 준비하는 사제처럼 숙연한 시안의 모습에 반발심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런 말을 하다니, 자기답지 않다고 우종은 생각했다. 시안은 대꾸 없이 원단을 마저 매만지고 내려오더니, 여덟 손가락으로 그의 가슴팍을 할퀴었다. 그날 시안은 자신의 자취집에서 우종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었고, 그와 함께 잠들었다. 시안의 가느다란 손가락 여덟개가 하얀 거미가 되어 그의 몸을 밤새 기어 다녔고, 우종은 달콤하게 몸을 옥죄어오는 거미줄에 묶인 채 쉴 새 없이 속삭이는 시안의 목소리를 들었다.
세상에, 엄마의 얼굴에 화장이 돼 있었다니까? 응? 그게 믿겨져? 엄마의 얼굴에는 늘 멍 자국만 시퍼랬어. 온몸에도 셀 수 없이 흉터가 많았고. 공중목욕탕 한번 간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그걸 당연하게 여겼고, 엄마도 마찬가지였어.
설마
아니야. 정말이래두. 엄마가 아빠랑 이혼하게 된 것도, 아빠가 더이상 엄마를 때리지 않게 되면서부터야. 그게 이해가 돼? 알 것 같아?
모르겠어
나는 알아. 왜냐하면 내가 엄마를 떠난 것도, 엄마가 나에게 더이상 주사를 놓아주지 않게 되면서부터거든, 여기 오른 팔목에 주삿바늘 자국 보여?
보여
공장 일을 시작하자마자 나는 집을 나갔어. 세상에, 그리고 삼년 만에 엄마는 자기가 간호사로 일하던 병원 앞에서 교통사고로 죽었지. 엄마가 남긴 건 아빠가 준 싸구려 도금반지 뿐이었어. 전화를 받지 않아 문자로 엄마의 부고를 듣고, 이틀 후에 가겠다고 답장을 하고, 그리고 왜 그랬는지, 휴대전화 전원 버튼을 길게 눌러버렸어.
엄마가 미웠던 거야?
응, 아니, 응, 맞아. 하지만 그래서 휴대전화를 끈 건 아니었어. 어쨌든 나는 정확히 이틀 후 영안실에 갔으니까.
잘했어.
나는 멀쩡한 엄마를 있는 힘껏 하얀 셔츠에게 밀어버렸어. 엄마는 침대째로 빠르게 굴러가 하얀 셔츠에게 쏟아졌지. 벗어놓은 코트가 허물어지듯 아무런 저항 없이, 엄마는 침대 아래로 쓰러졌어. 하얀 셔츠가 코트를 뒤집어쓰고 바닥에 구겨지는 걸 보고서야, 아픈 엄마를 보고서야 나는…… 자?
팔년 동안이나, 시안이 접착기 앞에서 필사적으로 합쳐내야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우종은 시안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목이 말랐고, 그녀의 메마른 입술에 고인 피를 빨았다. 시안의 터진 아랫입술에서는 비릿한 피가 끝도 없이 샘솟았다. 침과 뒤섞인 신선한 피를 목구멍으로 넘길수록, 우종은 시안과 뒤섞이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는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며, 시안이 접착기를 사랑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는 그날부터 시안과 한몸처럼 붙어살게 되었고, 하루에도 몇번씩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며 시안의 속삭임을 들었다. 그녀는 평생 이야기에 굶주려온 사람처럼 지저귀었지만, 반대로 우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시안에게 그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그녀는 우종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거기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고,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우종의 몸에 미로를 지었다. 그는 매일 시안의 손가락을 물다 잠들었다.
접착기는 어마어마한 압력으로 짧은 시간 내에 변화를 가능하게 했다. 두개의 목마른 직물을 육중한 롤러와 프레스로 눌러, 하나로 만들어버렸다. 시간의 제약에서 벗어나버렸다. 그들이 뒤엉켜버린 시간은, 우종과 시안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짧았다.
“접착기가 뭐가 신기해요?”
우종은 생각나는 대로 둘러댔다.
“편해. 안 기다려도 금세 하나가 되니까. 너무 건조하지만.”
원단들은 롤러와 프레스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품고 있던 물기를 모두 뺏겼다. 몇톤의 압력을 가하니 자연스레 직물 속에 있던 수분이 모두 빠져나가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갈증을, 빈자리를 메워줄 약품들도 있었다. 목마른 낙타의 혹에 지방이 스미듯이, 약품은 바싹 마른 합성섬유 속에 효율적으로 침투했다. 엄청난 열과 압력에 건조해진 두장의 원단은, 그 사이에 부어지는 약품을 남김없이 흡수하다 하나로 엉겨버렸다. 그는 다시 팽팽하게 부풀어오르는 원단을 바라보며, 시안의 메마른 아랫입술을 떠올렸다. 먼지로 텁텁한 입안에 흥건하게 침이 고였다. 직물들은 짧은 시간 내에 압축, 건조, 침투, 응고를 거쳐 하나가 되었다. 다시는 분리시킬 수도 없을 만큼 단단하게, 처음부터 한몸이었던 것처럼, 시안은 그걸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편해요? 기다릴 틈도 없어서 항상 바쁜데 뭐가 편해요?”
민정의 목소리가 격해졌다.
“편해서 먼저 가버린 거예요? 말을 좀 해봐요.”
그는 어젯밤 모텔에서 그녀가 그를 껴안으며 속삭인 말을 떠올렸다. ‘오빠는 과묵한 게 너무 섹시해.’ 그는 민정에게 들어가면서 생각했다. 이 여자는 접착기를 사랑할까.
“저 한달만 일하고 그만둘 거예요.”
우종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건 민정의 입버릇이었다. 그녀가 정말로 일을 그만둔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 다음달에도, 계절이 바뀌어도, 일년이 지나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늘 민정은 그에게 말했다.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이
“정말로, 이번 달이 마지막이라구요.”
하긴, 생각해보면 저런 입버릇이 붙을 만도 했다. 민정이 처음 공장에 들어온 때는 유난히 주문량이 많은 시기였다. 하루 종일 기계를 돌려도 늘 생산량이 달렸다. 물가 폭등과 세계적인 원자재 가격 상승, 침체되는 경기……. 그런 이유 등으로 저렴하고 뭐든 접착만 하면 만들 수 있는, 합성원단을 찾는 기업들은 갈수록 많아졌다. 합성원단은 값싼 시장표에서부터 명품까지 쓰이지 않는 곳이 없었고, 우종과 민정은 아침 8시부터 저녁 10시까지, 하루 열네시간씩 벤젠 냄새에 취한 채 원단을 합쳐야 했다. 그건 이년차인 우종에게도 힘든 일이었고, 막 공장에 들어온 민정에게는 벅찬 일이었다.
그들은 공장의 기계와 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기계의 손발이었고, 몸은 언제나 컨베이어 벨트나 롤러, 프레스기와 섞여 있었다. 벤젠 타는 냄새가 심한 날엔 몸과 기계의 경계가 더욱 모호해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우종은 자신의 손이 컨베이어 벨트에 떠내려가는 악몽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때 가장 힘들었던 건, 역시 시안이 아닐까 그는 생각했다. 민정이 왔던 작년 초겨울은, 팔년 넘게 원단을 합치던 숙련된 여직공의 손이 컨베이어 벨트 밑으로 말려들어간 때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민정은 그 여직원을 대신해서 온 우종의 직장 파트너인 셈이었다. 그 숙련된 여직공은 손가락 여덟개를 접착기 롤러에 잡아먹혔고, 우종의 도움 없이는 밥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시안은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숙달된 그녀도 헷갈렸던 것일까. 어디까지가 접착기이고, 어디서부터가 자신의 몸인지,
그날도 시안은 겨울바람에 나부끼는 나무처럼 휘청거렸다. 우종은 일이 끝나면 씻지도 못하고 뻗어버리기 일쑤였지만, 그럴수록 시안의 손가락은 도리어 더 끈끈하게 그에게 감겨왔다. 그녀는 그에게 거의 매달린 자세로 부족한 잠을 자고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접착기를 애무하는데 열중했다. 시안은 업무에 짓눌릴수록 오히려 섬세하게 원단을 어루만졌다. 우종은 그런 그녀가 컨베이어 벨트 위로 올라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일을 배우는 처지였고, 시안은 팔년 동안이나 접착 일만을 고집해온 숙련공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단 한번도 다른 부서로 옮겨간 적이 없었고, 공장에서 그녀보다 접착 일을 더 잘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날 시안은 혀처럼 검붉은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끝내 내려오지 못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그러나 슬로모션처럼 아주 천천히, 비명 소리도 없이 접착기 롤러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롤러는 아무런 저항감도 없이 손쉽게, 염화비닐을 들고 있던 그녀의 손가락을 콰득 집어삼켰다. 우종은 손에 들고 있던 우레탄 한 롤을 접착기 쪽으로 집어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롤러를 멈춰!”
대머리 과장이 번쩍거리는 경광봉을 휘두르며 달려왔고, 기계는 멈췄지만 시안은 이미 기절한 상태였다. 멈춘 롤러가 시안의 짓눌린 손가락 여덟개를 토해냈다. 그녀의 손가락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염화비닐 위에 겹쳐져 있었다. 눈 덮인 겨울가지처럼 희고 가느다랗던 시안의 손가락 여덟개는, 옹이 지고 뼛조각이 박힌 껌처럼 납작해져 있었다. 검지에 끼워져 있던 싸구려 도금반지가, 핏덩이가 된 손가락을 평평한 금박지처럼 얇게 감싸고 있었다. 우종은 울면서 원단이 식기 전에 시안의 손가락들을 원단에서 떼어냈다. 119를 부르라는 과장의 가슴팍을 거칠게 밀치고, 그녀를 들쳐업은 채 병원으로 뛰었다.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손가락은 벌써 고깃덩어리가 되어 있었고, 접합은 불가능했다. 할 수 있는 건 봉합수술뿐이었다. 수술이 끝나고 정신을 잃은 채 침대에서 수혈을 받고 있는 시안을 보며, 붕대에 감긴 시안의 뭉툭해진 손가락을 보며, 우종은 한참을 울었다. 의사는 그에게 인공손가락의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를 설명했다. 우종은 이야기를 듣는 사이사이 시안을 돌아보았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선택은 인공손가락 밖에는 없어보였다. 그는 북받치는 울음을 삼키며 간이침대에 누워 밤을 지새웠다.
새벽에 정신이 든 시안은 마취가 깨었는지, 앓는 소리를 내며 자꾸 없는 손가락을 긁었다. 하나씩 남아 있는 길고 가느다란 새끼손가락으로, 다른 손가락들이 있던 침대 시트 위를 소리 나게 긁었다.
“왜 그랬어?”
잠에서 깬 우종은 시안의 어깨를 흔들었다.
손가락이 간지러워
시안은 신음을 내지르며 더 거칠게 침대 시트를 긁었다. 두번, 세번, 그가 시안의 어깨를 거세게 흔들수록 시트 긁는 소리도 점점 날카로워졌다. 그녀의 팔에 꽂힌 주삿바늘에서 피가 역류했고, 시트 긁는 소리가 철판 긁는 소리처럼 억세졌다. 시안의 새끼손톱이 견디지 못하고 부러져 손가락 속으로 파고들었지만, 시안은 아랑곳 않고 피가 흐르는 손가락으로 계속해서 시트 곳곳을 문질렀다. 마치 새하얀 시트를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손길은 집요했다.
우종은 시안이 사라진 접착기 앞에서도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못했다. 그는 작업을 하는 내내 원단에 가지런히 짓이겨져 있던 그녀의 손가락에 시달렸고, 그녀를 대신해서 온 민정과 호흡을 맞추면서, 무의식중에 민정을 시안으로 느끼기도 했다. 그런 혼동 속에서 우종은, 시안이 헷갈렸던 것이 어쩌면 그와 그녀의 경계는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시안은 공장에서 돌아온 그가 무얼 물어봐도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그녀는 그날 이후 말을 잃어버렸다. 여전히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종일 자신의 남은 양쪽 새끼손가락을 멍청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더이상 그녀의 손은 여덟개의 긴 다리를 가진 거미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손바닥만 한 하얀 벌레의 더듬이 한쌍만이 꿈틀거릴 뿐이었다.
대머리 과장은 사원들을 위로한다고 연 회식자리에서 시안의 쾌유를 빌며 건배를 제의했다. 과장은 하루 열네시간이 넘는 과한 노동에 대해서도,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던 벤젠 냄새와 제대로 가동되지 않은 환풍기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시안은 간병인을 거부했다. 우종이 주지 않으면 며칠이고 한끼도 먹지 않았고, 씻지도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다. 그녀는 종일 우종을 기다리며 병실의 텔레비전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간병인들은 반나절 동안 시안과 말 한마디 섞지 못했고,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다섯번째 간병인에게 일당을 주고 나서, 우종은 텔레비전 리모컨을 있는 힘껏 바닥에 던져버렸다. 리모컨 파편이 튀며 텔레비전이 꺼졌지만, 시안의 눈은 여전히 텔레비전 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우종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검은 거울이 된 텔레비전 화면에,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들썩이는 그의 모습이 목탄화처럼 비쳤다. 우종은 다시 텔레비전을 켰다. 그는 할 수 없이 출퇴근길마다 병원에 들러 그녀에게 밥을 먹이고 세수를 시켰다. 더러워진 옷을 벗기고 집에서 빨아온 새 속옷과 환자복을 입혔다. 시안은 그때마다 터진 입술로 희미하게 웃으며 그에게 안겼지만, 우종은 번번이 시안을 밀어냈다. 그녀에게서는 쉰 냄새가 풍겼다. 우종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에게 인공손가락 이야기를 해주었다. 상처가 아물면 좋은 손가락을 사서 달자. 그는 틈날 때마다 그녀에게 여러 손가락 모델을 보여주며, 마음에 드는 모델이 없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시안은 묵묵부답이었고, 우종을 바라보는 초점은 어긋나 있었다. 한달이 지났을 때, 퇴원하는 택시 안에서 마침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안해
응?
손가락, 안할 거라구
그 두마디를 끝으로 시안은 다시 입을 닫았다. 그녀의 행동은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가 출근 전 틀어놓는 텔레비전 채널은 단 한번도 바뀌지 않았고, 며칠 씻겨주지 않으면 머리채는 엉킨 빗자루처럼 뒤얽혔다. 쥐며느리나 노래기 같은 다족류 벌레들이 머리카락에 엉킨 채 다리를 떨며 죽어가기도 했다. 그녀가 내뱉는 숨에서는 늘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혼자서는 양치질도 하지 않았고, 음식도 먹지 않았다. 거실 찬장 속에 가득했던 하얀 알약만이 한줌씩 줄어갈 뿐이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늦게 퇴근하는 날 밤이면, 시안은 남은 두개의 새끼손가락으로 끈질기게 우종의 몸을 애무했다. 하지만 더이상 시안은 우종의 몸에 거미줄을 치지 못했다. 겁먹은 벌레의 하얀 더듬이 한쌍만이 징그럽게 그의 몸을 훑을 뿐이었다. 그녀는 밤마다 그를 더듬으며 과장된 신음 소리를 냈고, 우종은 잠을 방해하는 시안에게 자주 화를 냈다. 민정과 처음 잠든 날 밤, 그는 시안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날 이후부터 그녀는 더욱 핏기를 잃어갔다. 밥을 먹는 것도, 씻는 것도 거부했다. 아랫입술을 물어뜯지도 않았고, 남은 두개의 새끼손가락을 꼼지락거리지도 않았다. 종일 그저 멍하니,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녀는 말라죽기를 기다리는 겨울나무처럼 점점 시들어갔다. 우종은 매일 그녀를 달랬다. 발을 씻겨주며 빌기도 하고, 울며 사정해보기도 했지만 시안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녀가 오일째 입에 아무것도 대지 않은 날, 그는 들고 있던 숟가락으로 그녀의 뺨을 때렸다. 얼마나 때렸는지 그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 시안은 밥풀이 묻은 멍들고 시뻘게진 얼굴로, 우종이 떠먹여주는 음식들을 기계적으로 씹어 삼키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점점 더 손을 대게 되었다.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 시안은 그의 폭력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시안을 때리고 난 뒤 그녀에게 밥을 먹이고 머리를 감겼다. 자꾸 벌레가 꼬이는 시안의 길어진 머리칼을, 부엌가위로 짧게 잘라주기도 했다. 날카롭게 잘린 굵은 머리다발이, 드러난 하얀 목 근처에서 흔들렸다. 그녀의 목은 금세 붉게 물들었고, 시안은 그가 떠먹여주는 밥을 우물거리며 중얼거렸다.
간지러워
그게 다였다. 그녀는 그가 머리를 감겨줄 때도, 얼굴을 씻겨줄 때도, 그녀 입가에 묻은 밥풀을 우종이 입술로 떼어내며 미안하다고 속삭일 때도, 깨진 유리처럼 초점이 어긋난 눈으로 계속해서 그를, 그의 너머 무언가를 바라보기만 했다. 우종은 점점 일상적으로 시안을 때렸고, 주기적으로 그녀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때마다 시안의 도화지 같은 몸에는 상처가 그려졌다.
시안이 다시 말을 하기 시작한 건, 등에서 사람의 귀가 자라는 쥐를 보았을 때부터였다.
저것 봐. 쥐 등에 사람 귀가 접착됐어. 세상에, 둘이 저렇게나 다른데……
디스커버리 채널이었고, 실험용 쥐였다. 사람의 특정 신체세포를 배양해 키우는, 그 기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식할 목적으로 길러지는 쥐였다. 쥐는 등에 붙은 귀가 무거운지 잘 움직이지 못했고, 살집도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살아 있었다. 그 이질적인 것과 한몸을 이룬 채, 분명하게 살아 있었다.
배고파
음식을 오물거리는 시안의 아랫입술이 양쪽으로 갈라졌고, 금세 선홍색 피가 배어나왔다. 우종은 오랜만에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부터 시안은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남은 두 손가락으로 그가 사놓은 샌드위치나 김밥을 흘려가며 먹었고, 어설프지만 세수도 꼬박꼬박 했다. 손가락 두개를 자동차 와이퍼처럼 움직여 얼굴 구석구석을 씻었다. 이십분이 넘게 걸렸지만, 벽에 걸린 수건에 하얀 얼굴을 문지를 때마다 그녀는 뿌듯해했다. 희미하게 웃는 그녀의 아랫입술에 다시 피딱지가 엉기기 시작했고, 우종은 종종 그녀 입술에 고인 피를 빨기도 했다. 먼 곳에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전처럼 집 안을 채웠고, 그도 다시 시안의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짓눌렀다. 더이상 과장된 신음 소리도, 불안에 떠는 두개의 더듬이도 없었다. 천장의 알약도 점점 줄어드는 숫자가 눈에 띄게 적어지더니, 일주일이 지났을 때부터는 똑같은 갯수를 유지하게 되었다. 모두, 시안이 등에 사람 귀가 붙은 쥐를 본 다음부터였다.
그는 마침내 다시 시안의 손가락을 물고 잠들었다. 우종은 이튿날 퇴근길에, 투명한 플라스틱 상자에 든 점박이 햄스터 두마리를 시안에게 선물했다. 그녀를 위한 거짓말도 덧붙였다.
“그 귀 결국 잘라서 아픈 환자한테 이식했대. 귀도 자라는데 손가락이라고 안 자라겠니.”
그녀는 아무 대답 없이 톱밥이 깔린 우리 속 햄스터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가 햄스터를 바라보는 초점이 분명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가 그녀에게 다시 손을 올린 것은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바로 어제 새벽의 일이었다.
다음날 그가 퇴근했을 때, 점박이 햄스터들은 배가 터진 채 죽어 있었다. 시안은 그의 눈앞에서 햄스터의 피와 내장이 엉긴 뾰족한 새끼손톱을 보란 듯이 핥았다. 우종은 배에 구멍이 뚫린 햄스터와 시안을 한참동안 망연히 바라보다 집을 나갔다. 그는 다음날 기어이 실험용 쥐를 구해 시안에게 돌아갔다. 텔레비전에서 나왔던 쥐와 똑같이 생긴, 하얀 털에 새빨간 눈을 가진 놈이었다. 쥐는 한마리만으로도 햄스터 우리를 절반 가까이 채웠고, 뾰족한 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 그가 돌아왔을 때, 쥐는 어김없이 죽어 있었다. 그녀는 손등이 다 파이고 벗겨진 채로 햄스터 우리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문이 열리자 시안은 기다렸다는 듯 쥐의 배 속에 새끼손가락을 박아 넣고 내장을 후비기 시작했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우종을 분명하게 노려보며, 피맺힌 손으로 쥐를 난도질했다. 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흩어졌고,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간신히 억누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갔다. 우종은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 시안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그동안 미친 듯이 동물시장이며 쥐가 나올 만한 시궁창을 뒤졌다. 십수마리의 쥐를 놓치고 잡은 끝에, 공장 하수처리장 근처에서 정말로 팔뚝만큼 커다란 들쥐를 포획할 수 있었다. 들쥐의 꼬리는 고양잇과 짐승의 등뼈처럼 우둘투둘했다. 우종은 재빠르게 흙바닥째로 들쥐의 꼬리를 움켜잡았다. 놈은 육중한 몸을 뒤틀며 발악을 했고, 두꺼운 거죽 위로 튀어나온 꼬리뼈가 손바닥 안쪽을 긁어댔다. 꼬리뼈의 무늬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한 느낌이었다. 들쥐는 철제 포획통에 옮겨지는 짧은 순간에, 악착스레 그의 손을 깊숙이 파헤쳐놓았다. 살점이 떨어진 손등이 홧홧하게 부어오르기 시작했고, 우종은 피가 멈추지 않는 손등을 만족스럽게 핥으며 집으로 향했다.
일주일 만에 본 시안은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그는 커다란 들쥐를 우리 안에 풀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들쥐의 데굴거리는 눈은 포도알만큼이나 컸고, 툭 튀어나온 앞니와 단단한 손톱은 알이 굵은 호박씨만 했다. 힘줄이 불거진 손가락은 금방이라도 먹이를 움켜쥘 듯 탐욕스러워 보였고, 이빨은 무엇이든 잘게 바술 것처럼 앞쪽으로 날카롭게 몰려 있었다. 회색 털로 뒤덮인 몸통 가죽은, 몇겹으로 접착한 합성모피를 두른 것처럼 질겨 보였다. 시안의 가느다란 새끼손가락으로는, 절대로 뚫을 수 없을 만큼 두꺼워 보였다. 들쥐가 몸을 틀 때마다 비좁은 햄스터 우리는 들썩거렸고, 거대한 앞발과 날카로운 앞니로 벽을 갉작일 때면 곧 금이 갈 것처럼 위태로운 소리가 났다. 우종은 민정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다시 현관문을 열었다. 등 뒤에서 쇠를 긁는 듯 요란한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천둥처럼, 발치에서 봉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윙윙거리는 컨베이어 벨트가 머릿속에 통째로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벤젠 타는 냄새가 진동했고, 기계들의 진동과 소음에 지진이 난 듯 발밑이 떨려왔다. 계속 타이밍을 놓쳐 손이 벨트에 딸려 들어갔고, 그때마다 축축하고 거대한 혓바닥이 손을 핥고 지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땀에 전 손으로 벨트 위에 원단을 펼쳐놓을 때마다, 우종은 그 위에 반듯하게 누워 있는 시안을 보았다. 냄새에 취해 기계적으로 그걸 롤러 쪽으로 밀어넣으며, 그는 하나로 접착시키고 싶었던 것들을 떠올렸다. 시안과 손가락, 시안과 거미, 시안과 나, 시안과……
우종은 양손으로 얼굴에 고인 물기를 훔쳐냈다. 아까부터 그를 힐끔거리던 민정이 놀란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유니폼까지 벗은 그녀의 몸은 온통 젖어 있었고, 달라붙은 티셔츠 위로 굴곡진 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반투명해진 원단에 비치는 매끄러운 허리와 가슴 곡선, 탄탄한 피부와 울퉁불퉁한 등뼈…… 등뼈는 민정이 바쁘게 몸을 움직일 때마다, 싱싱한 열 손가락을 분주히 하느작거릴 때마다 살아 있는 생물처럼 불룩였다. 꿈틀거리는 민정의 등뼈에서 조금씩, 커다란 들쥐의 꼬리가 떠올랐다. 햄스터 우리를 가득 채웠던 들쥐의 꼬리…… 기계들의 굉음과 벤젠 타는 냄새 속에서 서서히, 민정이 한마리 거대한 마른 쥐로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쥐가 털이 북슬북슬한 앞발을 내밀고 우종에게 다가왔다. 그는 뒷걸음질을 쳤고, 발밑에 잠들어 있던 봉지 속의 쥐를 밟았다. 쥐는 터진 배에서 녹색 점액을 흘리며, 직물 더미와 기계 사이를 벌레처럼 기어다녔다. 검은 비닐봉지에 눈이 가려진 채 미친 듯 접착기 주변을 맴돌다가,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고 컨베이어 벨트 위로 말려 올라갔다. 그는 다급하게 고개를 들어 민정을 바라보았다. 축축한 티셔츠를 입은 거대한 마른 쥐가, 우종을 향해 끊임없이 뭐라고 주둥이를 달싹이고 있었다. 뾰족한 주둥이가 벌어질 때마다, 앞쪽으로 몰린 날카로운 이빨이 점멸하는 형광등 빛에 번뜩거렸다. 쥐의 앞발에는 손가락이 하나씩밖에 붙어 있지 않았고, 끈적한 침이 떨어지는 누런 이빨에는 터진 들쥐가 꿰어져 있었다. 동공은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었고, 그의 너머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우레탄 한 롤을 들어, 들쥐를 씹고 있는 거대한 마른 쥐에게 집어던졌다. 여자 비명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이명처럼 귀를 파고들었다. 어느새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눈앞까지, 검은 봉지를 뒤집어 쓴 쥐가 실려왔다.
“기계를 멈춰!”
어디선가 과장의 고함 소리가 들렸지만, 쥐는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발버둥치며 그대로 롤러에 삼켜졌다. 접착기를 통과한 온순해진 쥐가, 형체도 없이 잠잠해진 채 터진 봉지 사이로 새어나왔다. 물크러진 쥐는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반죽처럼 뚝뚝 떨어져 내렸고, 우종은 발밑 녹색 리놀륨 바닥에 흥건히 고이는 쥐를 보며, 시안의 손을 잡고 거대한 롤러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시안, 쥐와 함께 잠들었다. 어디선가 뚝뚝,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설 | 심사평
올해 대산대학문학상 소설부문은 총 334명이 응모했는데, 그 어느 해보다 흥미롭고 유니크한 작품이 많아 읽는 재미가 컸다. 신선한 발상과 폭넓은 상상력은 기성작가보다 훨씬 뛰어났고 무엇보다 안정되고 다양한 화법이 흥미진진했다. 주제를 사회적 문제로 확장시키려는 시도가 이루어진 값진 작품들이 유난히 눈에 띈 점도 긍정적이었다. 기시감을 주는 작품보다는 서툴고 미숙할지라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축조해내려 애쓴 흔적이 엿보이는 작품이 적잖이 섞여 있어서, 심사위원 모두 만만찮은 양의 작품을 읽고 검토해야 했음에도 지루할 새가 없었다.
심사위원들은 작품의 완성도와 문장력, 대학생이 쓴 작품에 걸맞은 패기와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작품들을 위주로 우수작을 골라냈다. 「3년째 문학상 심사를 맡고 있다」 「씨에스타」 「주꾸미를 아는지」 「이누이트의 책장」 「벽」 「시안, 쥐와 함께 잠들다」 모두 장단점이 뚜렷했기에, 심사위원들은 서로의 동의를 구하며 한 작품씩 가려낼 수밖에 없었다.
「3년째 문학상 심사를 맡고 있다」는 제도권문학을 직격하는 언어유희가 볼 만했으나 그 이상이 없었다.
「주꾸미를 아는지」는 당당히 밀고나가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 자체도 흥미진진했지만, 설화와 밑바닥현실과 학문사회를 넘나들며 풍자와 해학을 뿜어대는, 장대한 스케일과 야심찬 비판력이 가상하고 반가웠다. 하지만 조각조각으로 존재하는 천들을 이어 한장의 커다란 보자기를 만들어내는 퀼트 작업과도 같은 이야기 구성력이 당선작으로 올리기에는 다소 떨어졌다.
「벽」은 ‘골목을 공유하는 총 일곱 가구’ 앞에 어느날 시멘트 벽이 세워지면서 시작되는 얘기다. 대단히 절제된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우리 시대에 벽이 상징할 수 있는 소통의 문제를 잘 형상화했다. 그러나 벽이 상징하는 것이 공권력이든, 소통이 가로막힌 현상을 형상화한 것이든, 그것이 또 벽이라는 상징성에 갇혀버리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새로운 서사를 펼쳐내지 못한 한계라고 할까, 특히 결론 부분의 도식이 매우 안타까웠다.
「씨에스타」는 가족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떤 무력감을 잠으로 표현한 부분이 좋았고 엄마의 생명력을 ‘망고’에 빗대어 표현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그러나 설정 자체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집 안에 끊임없이 개미가 들끓는다든지, 아픈 아버지가 소파에 붙어 있다는 상황 등이 식상했고 무엇보다 작가가 이 현실에 대한 대안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아쉬웠다.
결국, 최종까지 남은 두 작품은 「이누이트의 책장」과 「시안, 쥐와 함께 잠들다」였다.
두 작품은 시소의 양 끝처럼 극단에 놓인 작품이었다. 심사위원들은 무엇을 수상작으로 결정할지 여러번 고민하고, 반문하고, 의견을 조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누이트의 책장」은 ‘잠’이라는 소재를 독특한 감각과 상상력으로 ‘그럴듯하게’ 풀어낼 줄 아는 능력이 돋보여 심사 초반 높은 점수를 받았다. 청년 이누이트들이 잠에 매진하는 이유가 에너지 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인 데 있다는 설정이, 오늘날 무기력한 소비계층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청년들의 초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해 값졌다. 문장과 시점이 안정되어 있었고,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개연성을 획득하는 법을 잘 터득한 듯했다. 책으로 이글루를 쌓는 마지막 장면은 아름답기까지 했지만, 읽는 내내 말랑말랑 젤리를 먹는 느낌이었다. 끝까지 읽고 났을 때 한봉지나 되는 젤리를 다 먹고 난 뒤처럼 입안이 너무 달고 달아, 신인답지 않게 일찌감치 독자의 구미를 눈치 빠르게 터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패기가 돋보인 「시안, 쥐와 함께 잠들다」는 길들여지지 않은 상상력이 압도적인 작품이었다. 상상력이 끌어올린 이미지를 의심하고 않고, 의문하지 않고 벼랑 끝까지 밀고나가는 뚝심에 심사위원들은 한목소리로 높은 점수를 주었다. 합성피혁 공장의 현장성을 쇳내 나게 살려낸 점, 허기지고 그늘진 공장 노동자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어루만지려 애쓴 시선 또한 장점으로 작용했다. 접착기를 사랑하는 시안의 고백들, “어울리든 어울리지 않든, 뭐든 올려놓기만 하면 접착기는 척척 합쳐내잖아. 나는 그때마다 몸이 부르르 떨려. 접착기가 납작하게 직물을 누르고 응고시킬 때마다, 둘을 하나로 합쳐 뱉어낼 때마다 다리가 저려와” 같은 대목은 울림을 주기에 충분히 사실적이고 문학적이었다. 그러나 중반 넘어, 접착기에 대한 집착이 지나쳐 시안이 접착기의 컨베이어 벨트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장면은 지나치게 잔혹하고 작위적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적당히 서사 안에 안주하는 작품을 제외하고 강렬하면서도 솔직하고 거친 작품을 택하기로 합의했다. 길고 고단했던 만큼 의미있던 심사를 거쳐 제11회 대산대학문학상의 주인공이 된 당선자에게 진심 어린 축하의 박수와 격려를 전한다.
강영숙 김숨 김종광
소설 | 당선소감
이번 생에 할 일이 생겼다.
겨우내 얼어붙은 손이 녹을 때처럼, 손바닥이 간지럽다. 아직 더듬지 못한 문장의 무늬들이 언 땅에 묘비명으로 새겨져 있고, 나는 미처 발화하지 못한 봉오리처럼, 봄에 물러터진 지층처럼 쌓여 있다.
소설이 이야기임을, 재구성된 현실의 여백을 증폭시키는 일임을 깨닫게 해준 이기호 선생님께 감사하다. 한번도 소리나 문장으로 태어나지 못한 생각이지만, 선생님을 만난 인연을 얼마나 다행으로 여기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앞으로도 가르침에 따라 한 문장 한 문장, 살얼음을 딛는 마음으로 쓰겠다. 문학이 뭔지도 모르던 나를 이끌어주신 교수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큰 은혜를 입었다. 부족한 소설에서 가능성을 높게 봐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이십칠년간 삭고 곰팡이 핀 책을 고르고 또 펼쳐주셔서, 삶의 여독을 소설로 토해낼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 뽑은 걸 후회하시지 않도록, 안목 없다는 말 듣지 않도록 충실히 할 일을 하겠다. 십년 만에 만나 학교를 보내준 큰아버지, 불화를 견디면서도 소신을 지켜주셔서 감사하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두 동생과 문우들, 초췌한 종이 위에 자세히 적히는 아침햇살을 보고 나서야 잠드는 그들을 응원한다.
제 살을 깎아낸 시안에게, 여러해가 지나 컨베이어 벨트 위에 원단을 올려놓다 불현듯, 너의 자해가 나와 접착되기 위한 구애의 몸부림이었음을 깨달았다. 너의 병증을 탓하던 내가 부끄러워 밤마다 나는 떨었다.
하늘을 나는 것이 꿈이라 날개도 없이 날아버린 현목이 형에게, 앞으로 몇년만 지나면 내 동생이 될 그에게 이 소식을 띄운다. 언어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소통을 시작한 아버지, 절에서 내려와 원룸 쪽방에 가부좌를 튼 엄마, 내가 몇년간 쓴 글이 해로움을 간파하고 당선 며칠 전에 컴퓨터를 포맷해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펌프를 만든다는 형, 이런 모든 유기적인 사슬들에 목 졸리고 있음이 고맙다.
언제나 내 그리운 영감이 되어주는 C에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께, 나머지 여백을 다 드린다.
장희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