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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나리오

 

 

8800

이호선 李浩善

서울예대 극작과 1학년. 1984년생.

ihosun@hanmail.net

 

 

 

내 이모

 

 

씨놉시스

모두가 함께 가난하지 않은 시대, 대한민국의 오늘. 이 시대를 사는 열세살 소녀에게 가난은 어떤 의미일까. 나아가, 가난을 나누어 짊어지는 가족은 소녀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 소녀가 가슴속 깊이 담아두었던 말을 내뱉는다. 늘 그렇듯 처음은 쉽지 않다. 그래서 소녀를 응원하는 이들이 있다. ‘흑인들의 BBC’라 일컫는 힙합 뮤직과 소녀들의 첫사랑, 아이돌 뮤직이다. 음악으로 치유받으며 가족의 사랑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예민하고 혼란스러운 열세살 소녀의 성장기를 그려내고자 한다.

 

*지면사정으로 작품의 일부만 싣습니다. 씨나리오 전문은 대산문화재단 홈페이지(www.daesan.or.kr)에서 보실 수 있습니편집자.

 

등장인물

유혜리(13, 여) 당찬 성격만큼이나 가슴속 깊이 숨기고 있는 나름의 한(?)이 있다.

강혜혁(17, 남) 세상의 편견 속에 자기 말을 내뱉는 아마추어 힙합 뮤지션.

이수정(34, 여) 혜리의 이모, 13년간 연락을 끊고 살다가 갑자기 나타났다.

이수경(45, 여) 혜리 모, 좀처럼 발전이 없는 미용기술로 집안의 생계를 책임진다.

유정한(45, 남) 혜리 부, 다정하고 따뜻하지만 세상에 대한 분노로 삶의 의욕을 상실한 상태다.

박순자(72, 여) 혜리 외할머니, 치매를 앓음. 가족 중 가장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

 

씬1. 콘서트장 (혜리 꿈, 밤)

아이돌 ‘더 파이브’의 콘서트. 관중석의 팬클럽 소녀들, 풍선 플랭카드 들고 열띤 환호 중. 더 파이브의 멤버 혁을 바라보는 혜리, 황홀한 표정으로 소리 지른다. 무대 조명, 음악 꺼지고 립싱크를 하던 멤버들은 붕어처럼 입모양만 움직인다. 일순간에 조용해진 관객석. 멤버들, 노래를 멈추고 무대 뒤로 빠져나간다. 관객들, 무대 뒤로 사라져가는 그들을 보고 아쉬움에 소리지른다.

 

혜리 (입모양만 뻐끔거릴 뿐 소리는 안 난다) 돌아와! 돌아와!

 

<콘서트 장 출구>

혜리,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통로를 달려간다. 멀리, 혁과 어떤 여자가 나가는 게 보인다. 유독 가까워 보이는 여자와 혁, 손을 잡는다. 혜리 숨이 턱까지 차올라 혁을 따라간다. 혁, 여자의 손을 꼭 잡고 혜리를 향해 돌아본다. 혜리, 번개라도 맞은 듯 그 자리에 멈춰서고, 혁은 묘한 웃음을 흘리며 여자를 가까이 끌어당긴다.

 

혜리 누구야? 누군데!

 

박명수의 호통이 통로를 쩌렁쩌렁 울린다. “일어나! 몇신데 아직 쳐자고 있어!” 혁, 돌아서서 여자와 함께 통로 끝, 쏟아지는 빛 속으로 사라진다.

 

혜리 (입술 깨물고) 젠장!

 

씬2. 혜리 방 (아침)

침대와 책상, 옷장이 놓인 단출한 방. 공주풍의 아기자기함은 찾아볼 수 없고 언뜻 보면 사내아이 방 같기도 하지만 침대엔 긴 속눈썹의 예쁜 소녀, 혜리가 자고 있다. 번쩍 눈을 뜨고 일어나 앉는 혜리, 잔뜩 골이 나 있다.

 

혜리 젠장……

 

혜리, 계속해서 호통치는 박명수 알람을 끄기 위해 폴더 핸드폰을 열었다 닫는다. 혜리, 고개를 들어 천장에 붙어 있는 혁의 브로마이드 사진을 본다. 침대에서 일어서서 손을 들어 혁의 얼굴을 만지는 혜리,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혁의 얼굴 부분의 미세하게 튀어나온 요철을 확인한다.

 

혜리 Na. 한번이면 된다. 딱 한번만 보면…… 보고 싶지 않을 거다. 진짜로.

 

씬3. 거실 (아침)

혜리, 방에서 나오는데 잠옷이라고는 할 수 없는 낡은 체육복을 입고 있다. 혜리를 보자마자 부리나케 화장실로 들어가는 정한. 혜리, 정한의 꽁무니를 째려본다. 부엌 싱크대에서 쌀을 씻는 수경, 산발인 머리에 빨간 미용실 핀을 간신히 꽂아 고정시켰다. 순자, 거실 복판에 앉아 있고 그 무릎을 베고 누운 수정은 외출복 차림 그대로다. 한손에는 양갱을 쥐고 다른 손으로 수정의 머릿결을 쓰다듬는 순자. 현관에는 수정이 가져온 큰 트렁크 가방 놓여 있다. 인상을 잔뜩 쓰고 서 있는 혜리.

 

순자 애가 폭삭 늙었어. 윤서방 그게 얼마나 고생을 시켰으면…… (펑퍼짐한 수정의 엉덩이 만지고) 하늘하늘 코스모스 감인데. (갑자기 앙칼진 표정으로 변해 엉덩이 찰싹 때리고) 애, 서넛은 낳은 궁둥인데!

수정 (일어나) 엄마! 아파!

순자 애는!

 

화장실에서 나온 정한, 혜리를 보고 머쓱하게

 

정한 혜리야, 아빠 똥 안 쌌다.

 

수경, 그제야 혜리를 본다.

 

순자 내 새끼, 데리고 가려고! 누구 맘대로!

 

수정,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혜리를 본다. 순자 역시 무표정하게 혜리를 본다. 온 가족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더 인상을 쓰는 혜리.

 

수정 (사근) 안녕? 이모야.

수경 (쌀 씻으며) 혜리, 인사 안하냐.

혜리 (작은 목소리로 중얼) 젠장……

 

혜리 Na. 인사해야 하는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

 

타이틀 “내 이모”

 

씬4. 거실 (아침)

서툰 손길로 혜리의 머리를 만지는 수경. 바닥에 놓인 김태희의 사진을 보며 앞머리를 땋고 있다. 앞머리를 따서 넘긴 ‘닭벼슬 머리’다. 수경, 잘 안되는지 손목에 잔뜩 힘을 줘가면서 애쓰지만 삐죽삐죽 튀어나온 혜리의 머리와 김태희의 사진은 완전 딴판이다.

 

수경 (혜리, 핀으로 대충 머리를 고정시키고) 됐다.

 

혜리, 손거울을 들어 보는데, 엉망이다.

 

<혜리 회상>

혜리, 김민희 ‘부스스 머리’ 사진과 폭탄 맞은 자신의 머리를 비교해본다. 수경, 윤은혜 ‘똥 머리’와 혜리의 머리를 비교해보는데 전혀 다른 느낌이다. 혜리, 자연스러운 웨이브 머리를 한 모델 사진과 달리, 곱슬곱슬 아줌마 머리가 됐다. 탱글탱글한 컬을 만지며 웃는 수경.

<회상 끝>

 

그럴 줄 알았다는 혜리의 표정, 머리를 헝큰다. 수경, 할 일을 마쳤다는 듯 방으로 가고, 소파에 앉아 혜리를 관찰하고 있던 수정.

 

수정 이모가 묶어줄까?

혜리 (무표정하게 수정을 본다)

수정 (혜리를 보고 미소 짓는다)

 

혜리,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빗는다. 수정, 일어서려는데 순자, 수정의 손을 꼭 잡고 놔주지 않는다. 수정, 순자를 가만히 보다 그대로 앉는다. 헛기침을 내며 신문을 접는 정한, 2번 타자로 혜리 머리 앞에 앉는다.

 

혜리 아빠, 손 닦았어?

정한 닦았지. (혜리 머리를 가볍게 쥐고) 아까 화장실 갔다 왔잖아.

 

혜리, 정한의 손에서 자신의 머리를 빼고 일어나서 빨간 점퍼를 입고 책가방을 멘다. 정한, 뭔가 아쉬운 표정. 혜리, 그대로 현관으로 나가려는데, 방에서 나온 수경, 혜리를 보고

 

수경 유혜리. 엄마가 뭐랬어.

혜리 (마지못해 돌아서서) 아빠 엄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할머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냉큼 돌아서는데)

수경 거기 서. 엄마가……

혜리 (수경이 하는 말을 립싱크로 따라한다)

수경 엄마가…… 싸가지 없이 멋대로 굴어도 인사는 꼭 해야 된다고 했지?

혜리 (다시 뒤돌아 수정을 바라보다 성의없이)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이. 모.

 

문을 열고 나가는 혜리.

 

수경 (수정 보고) 인사 잘해서 미움받는 앤 없거든.

수정 언닌, 혜리가 미움받을까 걱정돼? 나처럼? (미소)

수경 너야…… 눈치가 있으니까 알아서 잘했지. (부엌으로 간다)

수정 (순자 보고) 엄마, 내가 눈치가 빠른 편이었나?

순자 (텔레비전 보며) 그래, 이년아. 양갱!

수정 (웃으며) 엄마……

 

<문 밖>

열린 문 옆, 벽에 기대 서 있는 혜리.

 

씬5. 주택가 골목길 (아침)

고등학교 교복 입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중학생 혁, 곱슬거리는 머리에 까만 피부색을 가졌다. 누가 봐도 알아볼 수 있는 흑인 혼혈이다. 혁은 나이키 운동화에 노스페이스 점퍼를 입고 있다.

 

1 야, 튀김. 좋은 거 신었다?

(무표정하게 학생1을 쳐다본다)

학생1 어쭈, 눈 안 깔아. 어디 그 허연 눈깔로 야려. 벗어.

(비웃는다)

학생1 웃어? 야, 튀김. 진짜 한번 바짝 타볼래?

2 (깔깔 웃고) 튀김이래……

학생1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얘 보고 튀김이라고 하더라.

(학생1을 째려본다)

학생1 진짜 안 되겠네. (혁의 얼굴을 때리고) 너 잠바도 벗어. 할머니 잘 만나서 호강이지? 네 할머니 요강이나 갈아, 이 튀김 자식아.

(또 웃는다)

학생1 이 새끼가…… (혁의 정강이 걷어찬다) 왜 웃어!

(다리 부여잡고) 호강…이… 요강이래…… (웃는다)

 

혜리, 골목 끝에 서서 이 모습을 보고 있다.

 

불량 고딩들, 혜리의 시선을 느끼고 그쪽을 바라본다.

 

학생1 저건 또 뭐야. 너 이리 와. 떡볶이.

혜리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점퍼 본다)

학생1 (혁에게) 아는 애냐? 떡볶이 튀김 세트야?

(입가에 피 묻은 채로 혜리 보고 씩 웃는다)

 

혜리, 혁의 미소에 당황해 뒤로 한발 물러난다.

 

<시간 경과>

 

나란히 서 있는 혁과 혜리. 혁은 맨발에 점퍼도 벗었다.

 

학생1 (혜리에게) 넌 이 오빠한테 줄 거 없어?

혜리 (학생1을 빤히 보고만 섰다)

학생1 어쭈, 또 야려.

혜리 저희 아빠는 명진에서 잘린 지 일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복직 못하고 있어요.

학생1 (표정 굳어진다) 담부턴 남 일에 껴들지 마라. (혁에게) 튀김, 너 또 실실 쪼개봐. 아주 악 소리 나올 때까지 까줄 테니까.

(입가에 미소)

학생1 (눈이 번쩍한다)

혜리 튀김이 아니라. 튀기예요. 그게 웃겨서 그래요.

학생1 (혜리를 빤히 보다) 가자.

 

학생1, 앞장서서 걸어가자

 

학생2 (못내 아쉬운 듯) 왜? 저 튀기 자식 아빠도 빌어먹을 명진에서 일했을까봐?

학생1 (돌아서 학생1을 노려본다)

 

학생2와 패거리, 기죽어 학생1을 따라간다. 불량 학생들 골목 끝으로 사라지고, 맨 발로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혁. 혜리, 가만히 서서 혁의 맨발을 본다.

 

혜리 Na. 발바닥은 하얗다.

 

씬6. 교실 (아침)

자리에 앉아 책가방에서 책을 꺼내는 혜리. 반 아이들, 형형색색으로 포장한 사탕 바구니, 박스를 들고 있다. 건너편 분단에 앉아 있는 경아, 아가씨들이 입을 법한 유행하는 옷차림이다. 아이돌처럼 염색한 머리를 폼 나게 고정시킨 동훈, 커다란 사탕 바구니를 들고 교실로 들어온다. 여자아이들의 시선이 동훈에게 집중되고, 혜리 역시 동훈을 넋놓고 바라본다. 동훈, 사탕 바구니를 경아의 책상에 올려놓는다. 경아, 기쁨을 감출 수 없는 표정.

 

동훈 난 빚지곤 못 살거든.

 

동훈, 폼 잡으며 교실을 나가고 동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혜리.

 

<혜리 회상>

한달 전, 214일. 동훈의 교실 밖에서 얼쩡거리는 혜리, 손에는 리본으로 묶은 양갱을 들고 있다. 커다란 초콜릿 바구니를 들고 당당하게 교실문 앞에 선 경아, 혜리를 비웃고 안으로 들어간다. 동훈 책상에 초콜릿 바구니를 올려놓은 경아, 부끄러운 척 교실을 뛰어나온다. 혜리, 부서져라 양갱을 꼭 쥔다.

<회상 끝>

 

혜리, 자기도 모르게 교과서를 구기고 있다.

 

혜리 Na. 가난은 사랑도 포기하게 만든다. 이 세상에 가난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없다.

 

씬7. 스타일 미용실 (낮)

동네 미용실. 세련된 분위기를 내려는 듯 인테리어 소품을 갖췄지만 중구난방으로 놓여 있고, 어린왕자 시트지가 벽에 붙어 있지만 오히려 산만하기만 한 분위기다. 수경, 거울에 붙어 있는 최신 유행 스타일의 모델 사진을 힐긋 보며 아줌마의 머리를 롤로 말고 있다. 수경의 눈에 띄지 않으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걸어가는 정한. 미용실 앞을 잘 지나쳐 왔다는 생각에 터덜터덜 걷는 정한을 어느새 따라나온 수경.

 

수경 야, 유정한!

 

정한, 망부석처럼 멈춘다. 정한, 헤벌쭉 웃으며 수경을 돌아보는데

 

수경 엄마는!

정한 처제 있잖아.

수경 어디 가는데.

정한 사내대장부가 어딜 가는지 여편네한테 일일이 보고해야 되나!

수경 (눈 부라리고)

정한 (금방 쫄아서) 일 알아보러……

수경 바람났지?

정한 이 동네에서 나 백수인 거 모르는 사람도 있냐?

수경 담배 사 피울 돈 있음 올 때 두부랑 콩나물 좀 사와.

정한 (침울)

수경 알았어, 몰랐어?

정한 (작은 소리로) 몰랐어.

수경 (안 들려서) 뭐?

정한 알았다고.

 

수경, 돌아서 미용실로 들어가버리자 한숨 놨다는 표정의 정한.

 

(후략)

 

 

 

씨나리오 | 심사평

 

올해는 작년에 비해 응모작 수가 현저히 줄고, 수준 또한 차이가 났다. 수준 미달인 작품들도 줄었지만 눈에 확 띄는 작품들도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이런 점이 심사를 어렵게 만들고 당선작을 내는 데 고심하게 되었다. 총 26편의 작품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9편을 내 나름의 예심으로 골라내었고, 그들끼리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지 않아 결선작을 따로 추리지 않았다. (본심작 「라이어」 「날개」 「중추완월」 「유진」 「나쁜 소년들」 「기억의 그늘」 「해도 될까요?」 「내게 온 노숙 소녀」에 대한 심사평은 대산문화재단 홈페이지 참편집자)

「내 이모」는 주인공 13세 소녀의 캐릭터가 당차고 매력적이다. 쉽게 볼 수 없는 인물이다. 가난한 가족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마음으로 모두를 품는 조숙함이 유쾌한 분위기 속에 순간순간 숙연함을 자아낸다.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당선작으로 뽑기엔 부족함이 보여 올해엔 당선작을 내지 말지, 그래도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낼지 결심이 서지 않아 여러번 읽어보았다. 이야기 구성이나 등장인물들 면면은 개성과 힘이 느껴지나 지문이나 해설의 문장이 거칠어서 기본기가 부족하단 인상을 주었다. 게다가 맞춤법과 띄어쓰기의 실수가 여러군데 드러나 몰입해서 읽기가 힘들었다. 극 속에 나오는 코스모스 나 즉흥 랩 가사들은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나 씨나리오는 대사만 공들이면 되는 게 아니다. 진정한 실력은 지문과 대사에서 발휘됨을 마음에 새겨두길 바란다. 또한 맞춤법은 글의 품격이며 그 수준을 알 수 있는 바로미터라고 여기기에 이번 공모에 참여한 다른 응모자들에도 같은 조언을 하는 바다. 저자의 눈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오자들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도 개인 경험으로 잘 안다. 하지만 여러번 읽고 검토했는데도 놓친 오자가 아닌, 명백한 맞춤법의 오류나 등장인물의 이름을 혼동해서 쓰는 등의 무성의한 실수는 자신이 쓴 글에 대한 무관심과 무책임함처럼 보여 읽는 이도 기운이 빠진다. 그럼에도 「내 이모」에 최고점을 준 이유는 소재가 신선하고 작가의 개성도 보이며, 또한 소시민의 삶을 따뜻하게 지켜보는 작가의 시선 때문이다. 등장인물 모두 지극히 현실감을 주면서도 매력을 풍겨 읽는 이에게 그들을 응원하게 만드는데, 이것 또한 작가의 역량이리라. 하지만 마지막에 혜리와 유리의 만남이나 그후의 에필로그는 꼭 필요했을까? 주인공 소녀 혜리는 여전히 조금은 냉소적인 매력을 지닌 채로 남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고민 끝에 당선작을 낸 만큼 다음 작품을 기대해본다. 응원하고픈 애정이 없었다면 고민도 적었을 테다.

이정향

 

 

 

씨나리오 | 당선소감

 

글은 기다림이다. 기다린다면 기필코 내게 오게 되어 있다, 그렇게 믿어 왔습니다. 내 안에서 차올라 흘러넘치면 비로소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위로했습니다.

정작 저는 참을성이 없는 편입니다. 기미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미 왔다고 믿어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때는 모릅니다. 지나고 나서야 아직 오지 않은 허상에 만족해하며 발만 동동 굴렀음을 깨닫습니다. 이번에는 진득하게 기다려볼 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만하면 참을 만큼 참았다며 다 오지 않은 글의 첫 문장을 시작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글은 기다림이다. 언제까지 반복할지 모르는 이 과정에서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변명을 해봅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잘 참아내고 있다고 기운을 냅니다.

그럼에도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절망감은 이내 어리석음으로 이어지고 맙니다. 선생님께 여쭤봅니다. 도대체 제 장점은 뭐예요? 고칠 점이 아닌 장점을 물어보는 제 자신이 한심했지만 그렇게라도 자신감을 찾고 싶었습니다. 단점은 너무 긍정적인 것, 장점도 긍정적인 것, 그래서 문제아다…… 입술이 삐죽 나옵니다. 뱃속의 창자가 비틀어지는 느낌입니다. 다행히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선생님께서는 밑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어야 한다, 작가가 밑바닥까지 내려가는 걸 겁내서는 안된다…… 저는 긍정적이지 않으면 이 싸움에서 버틸 수 없을 거라 확신해왔기 때문에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밑바닥으로 내려가면 다시는 올라올 수 없을 것 같지만 정말 끝까지 내려가 바닥을 치면, 이상한 일인데, 어떤 힘이 생겨 반드시 위로 올라올 수 있다, 그게 바로 희망이고 진정성이다, 올라올 수 없다고 믿는 건 네가 밑바닥까지 내려가지 않아서이며 그걸 해내야 비로소 작가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순간 멍해졌습니다. 저는 그 말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순 없어도 흉내라도 내보려 발버둥을 칩니다. 아직은 뭐든 어렵습니다. 역시나 탕 하고 바닥을 치고 튀어오르는 순간에 이르기에는 역부족입니다. 그저 다른 이들의 작품으로 그 순간을 간접 경험하는 데 만족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반드시 이루어내겠습니다. 기다림과 밑바닥. 첫 문장을 시작하고 엔딩을 찍을 때까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노력하겠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뒤늦게 글쓴다며 온갖 궁상을 떨고 어깃장을 놓는 딸을 작가라 부르며 믿음으로 지켜봐주시는 엄마, 아저씨 행복하세요. 나와는 달리 예쁘고 우월한 신장에 착하기까지 한 내 동생. 언니가 글 써서 예민한 게 아니라고 매번 변명하지만 인정한다. 대본 핑계 삼아 예민하게 굴어서 미안해. 같은 걸 나누고 다름을 이해하는 친구들, 언제나 고마워.

그리고 심사위원이신 이정향 감독님, 감독님께서 제 씨나리오를 읽어봐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이에요.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당분간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글에만 전념할 수 있게 지원해준 대산문화재단에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이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