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독자의목소리

 

‘계절의 전령사’ 창비

 

나에게 『창비』는 ‘계절의 전령사’이다. 봄호와 함께 계사년 봄을 맞는다. 계사년 봄,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안보 지형이 심상치 않아 보인다. 동아시아 3국 지도자의 동시 교체. 잠재적인 화약고나 휴화산의 폭발력을 내장하고 있는 역사와 영토 분쟁의 진행. 그 분쟁의 도화선이나 방아쇠 역할을 할 수도 있는 민족주의 기운의 고조. 그리고 북한의 제3차 핵실험 이후 가파른 양상을 보이면서 진행되는 급박한 국제정세. 한반도의 3월은 마치 백척간두에 올라선 듯한 형국이다. 그 맥락은 다르지만 중국 당나라 시인 동방규의 ‘춘래불사춘’이라는 시구를 연상하게 한다. 이러한 3월에 받아본 창비는 그 어느 것 하나 종요롭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풍성하다. 특히, 특집 ‘2013년에 무엇을 해야 하나’에 실린 네편의 시사적인 글은 한반도 정세에 대해 적잖은 성찰과 통찰을 자극한다. 그중에서도 손열의 「세계 권력지형 변화 속 한국의 전략」이 제시하는 ‘중견국 외교’는 과거 광해군의 ‘등거리 외교’를 연상시키는 것으로서 우리의 역량과 지혜를 어떻게 조정하고 결집시키는가에 따라서 충분히 실현 가능한 전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종구 kong@kunsan.ac.kr

 

 

소외된 사람들이 당당해질 수 있는 사회를 향해

 

답답한 오늘과 절망스러운 내일에 직면한 사람들의 꿈의 집합체였던 18대 대선이 지나갔다. 대선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암담했지만, 그 결과가 현재의 사회구조 전반에 대한 근본적 통찰의 계기가 되고 있는 점은 긍정적이다. 특히 봄호의 「학벌서열체제를 어떻게 깰 것인가」(이재훈)는 그러한 고민의 흔적이 역력해 현재 ‘밑바닥 대학생’인 필자의 공감을 샀다. 특히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지금의 교육 그리고 노동문제에서 그려볼 수 있는 구체적인 미래상”이라는 지적은 적실하다. 그간 한국사회에서 ‘학벌’은 지속적으로 ‘소외’를 재생산해왔다. 이재훈은 계급격차에 따른 교육기회의 격차와 학벌프리미엄의 세습, 그리고 수도권 공룡화로 인한 지방 소외라는 기형적인 문제를 중점 제시한다. 즉 학벌은 반()공존의 ‘성벽 쌓기식’ 사회구조가 재생산되는 틀이다. 입시제도 개편과 사교육 억제는 이에 대한 근본적 대책이 되지 못한다. 이에 이 글은 국공립대 통합네트워크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다만, 이와 함께 공교육 자체의 강화 역시 그 대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교육의 본질이 뒤틀린 상황에서 정작 필요한 해법은 본질을 되살리는 길일 것이다. ‘학교(고등학교, 대학교) 간 서열화’와 ‘학교 내 학생서열화’는 ‘공()’의 본질이 아닐뿐더러, 교육의 본질이 입시가 아님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글에서 학벌로 인해 소외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부족해 보인다. 모쪼록 대선을 계기로 형성된 사회성찰의 모색이 지속돼 이 땅의 ‘소외된 사람’들이 물심양면으로 당당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윤성환 bul6334@hanmail.net

 

 

한국은 분단체제다

 

두번의 대선이 지나가는 동안, 학생에서 직장인이 됐다. 그러나 내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고, 아직도 내 또래 친구들은 취업전선에서 발버둥치고 있다. ‘일자리 창출’이라는 MB의 공약을 믿었던 친구 몇몇은 “17대 대선에서 잘못된 선택을 했노라”고 고백했다. 18대 대선에서 ‘혹시나’ 하고 뚜껑을 열었더니 ‘역시나’ 하는 허무함과 냉소만이 검은 연기처럼 뿜어져나왔다. 『창비』 봄호를 냉큼 집어들었던 건 순전히 2012년 대선을 돌아보고 2013년 새 정부를 내다보는 ‘대화’와 ‘특집’ 때문이었다. “1953년 이후 전쟁이 어정쩡하게 끝난 상태가 굳어짐으로써, 저는 그걸 분단체제라고 부릅니다”라고 말한 백낙청 교수의 말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공교롭게도 창비 봄호가 나온 지 한달도 채 되지 않아 남북관계가 뒷걸음질을 치더니, 개성공단의 심장은 9년 만에 멈췄다. 87년체제의 한계를 말하기 이전에, 우리는 ‘분단’이란 현실이 잉태한 괴물의 실체부터 제대로 봐야 하는 게 아닐까.

구명주 freetree9@gmail.com

 

 

개인을 품은 사회, 사회를 품은 개인

 

이번 대선은 내 삶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던, 관계 없다고 생각했던 정치라는 것이 나와 연결되었음을 일깨운 점에서 의미가 있다. 어떤 모양의 연결이 될지는 앞으로 더 지켜봐야 알 수 있겠지만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어쨌든 새로운 경험이었다. 나에게 정치란 크게 보면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함인데, 그런 뜻과는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우리의 입장이 여권과 야권, 이렇게 양분될 수 있는 것일까? 삶이란 늘 변하는 것이고 그에 따라 입장 또한 변할 수 있는 것 아닐까? 대화 ‘2012년과 2013년’은 자칫 한쪽으로 치우칠 법한 혹은 무의미한 난상토론이 될 수도 있는 주제를 각자 다른 입장을 가졌지만 한국사회의 발전을 소망하는 것에서는 일치하는 구성원들의 기탄없고 분명한 의견 제시로 균형잡힌 토론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여권과 야권이 우리 사회에서 각각 어떤 역할을 해나가면 좋을지에 대한 방향과 과제가 제시되어 있어,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이 이를 받아들이고 실행하면 분명 약이 될 것이다. 진정한 용기는 어떤 대단한 일을 앞장서 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무엇을 학습해야 하는지에 대한 재검토는 비단 야권뿐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삶에서도 가져야 할 태도이다. 이번 대화를 읽고 ‘2012년 대선’을 그저 여권의 승리와 야권의 패배가 아닌, 우리 사회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라고 보게 되었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한국사회의 2013년체제와 더불어 나의 2013년체제를 구상해봐야겠다.

조장희 pannaji@hanmail.net

 

 

나이 들며 더 친근해지는 시

 

보고 싶은 친구에게. 새해를 맞이하고도 너와의 조우를 즐기지 못한 마음이 몸살을 앓는 듯 뜨겁다 차가워지기를 반복할 즈음, 우연히 창비 2013년 봄호를 받아보게 되었네. 언제부터인가, 책을 보면 자연스레 작가의 나이를 살피는 버릇이 생겼어. 젊은 작가들의 글은 새로운 생각과 표현이 신선하고 고급스럽긴 하지만 ‘느림’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읽기 바쁘고 그 생소함에 금세 지친다고나 할까. 비슷한 경험과 정서에서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을 누군가의 글에서 찾을 때 훨씬 공감할 수 있는 법이니깐. 그래서 그런지, 이번호에 실린 시인들의 연령대가 참 좋았어. 숨쉬기 쉬운 상태에서의 책 읽기였달까. 특히 김사이 시인의 「바람」이 진정 바람처럼 내 마음에 스며들더군. “아팠기 때문에 견뎠을 바람 같은 삶” “마흔을 넘어서니 독기가 옅어진다”라고 한 시인의 마음처럼 나도 비슷하거늘, 어릴 땐 결코 알 수 없었던 것들이지. 모르는 이에게서 위로가 되는 눈빛을 주고받은 듯한 묘한 기분. 그리고 나희덕 시인이 「그러나 밤이 오고 있다」에서 “이 온기가 남아 있는 동안은 견딜 만하다고 중얼거리면서”라고 말함은, 연륜에서 나오는 절제된 담담함 아닌가. 우리도 언젠가는 시인의 시어에 절격히 공감할 때가 오겠지. 아! 시를 이렇게 친근하게 만날 수 있다니, 나이 들어감도 이렇듯 멋진 일이다 싶어. 친구는 어떤 감정으로 마지막 책장을 넘기게 될까. 봄이 서둘러 물러가기 전 이 책을 화두로 즐거이 함께할 시간이 진정 기다려지네. 그때까지, 안녕.

하민서 bada0206@naver.com

 

 

소설은 소설가의 ‘거짓, 자백’이다

 

2013년 봄호 소설 중 최제훈의 「현장 부재 증명」이 흥미로웠다. 소설과 소설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소설 속의 사건들은, 작품 속의 형사가 추측하는 것처럼 ‘허구가 아니라 진실의 기록’이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주인공 M은 ‘거짓 자백’으로 형사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배신한다. 독자의 질문에 대한 소설가의 대답이다. 더이상 소설로 소설가의 삶을 증명해내려는 의혹은 그만두라는 것. ‘잠파노와 젤소미나’라는 이름이 그렇듯이, 현실과 허구는 짝패인 동시에 그것을 부르는 자의 명명에 의존한다. 명명은 소설가의 몫이고, 독자는 그가 소설의 현장에 부재하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괴테가 말했다. “나는 내가 겪지 않은 것을 소설에 쓴 적이 없다. 그러나 단 하나도 있는 그대로 쓴 적은 없다.” 다음에 읽게 될 최제훈 작가의 ‘거짓, 자백’이 인간과 세계의 본질에 대해 깊이 성찰한 그의 주제의식이 빛나는 작품이길 바란다.

김영주 debbykim@paran.com

 

 

우리 시대 이야기꾼에게 듣는 이야기의 본질

 

이번호에서 ‘작가조명’이 유달리 마음에서 공명한 것은 바로 ‘이야기의 본질’을 다룬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 황석영의 대화체 이야기와 문학평론가 백지연의 문어체 해설이 어우러져 그의 신작 『여울물 소리』를 차분하고도 역동적으로 들려준다. 특히나 “이야기꾼은 낭만적인 혁명가의 이상을 꿈꿀 수 있으되 혁명가 자체는 될 수 없다”는 작가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야기꾼은 뜨겁고 비루한 삶의 현장에 있으면서도 그곳으로부터 떨어져 또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쓴 백지연의 문장을 읽고는, 당대의 현실을 온몸으로 감지해내되 행동가나 실천가이기보다는 목격자・기록자로 살아가는 것이 이야기꾼의 운명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19세기 우리나라 현실의 막중한 무게와 한국사회가 여전히 몸에 지닌 ‘근대’의 문제를 지나치지 못해, 자유분방한 서사보다 현실을 끌어안는 서사를 택한 작가, 그리고 그의 소설이 환기하는 삶의 진실을 “세상은 반드시 변할 것이라는 믿음은 ‘오늘’을 살아가는 데서 가능하다”라고 표현해낸 평론가의 만남은, 여전히 절망과 실패, 사랑과 혁명이 교차하는 격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온갖 우여곡절 가운데서도 삶은, 이야기는, 흐르는 물처럼 계속된다는 위로를 주는 동시에 기어이 그 책을 펼쳐들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진경 realbless@gmail.com

 

 

난해한 현대시 이해를 돕는 안내자

 

“일상이란 일상범백사(日常凡百事)를 줄인 말이고, (…) 일상을 떠나서는 삶도 없고, 실존의 의미도 구할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일상은 가장 훌륭한 인문학적 사유의 대상이기도 하다.” 일상에 대한 장석주 시인의 정의다. 시인은 이러한 일상을 구체적으로 포착하고 분화시켜 그 순간의 감성을 기록한다. 하지만 현대의 시를 비롯한 여러 예술이 포착해낸 그 감성은 자주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자꾸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 더뎌졌다. 그러던 중 봄호에 실린 신형철의 평론 「2000년대 시의 유산과 그 상속자들」과 만나게 되었다. “2000년대의 어떤 시인들 덕분에 한국시는 ‘시인(1인칭)의 내면 고백으로서의 시’라는 일면적이면서도 지배적인 통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이제 시는 누구도 될 수 있고, 무엇이건 말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을 통해 현대시가 난해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고, ‘정치와 시의 관계성’에 관한 대목에서는 정치적 상황에 따른 우리나라의 현대시 해석에 대한 새로운 고민도 해볼 수 있었다. 아직도 최근의 젊은 시에 대해 온전한 이해와 공감은 어렵지만 이제는 2010년대의 시, 현대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시인들의 작품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곽새롬 apple050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