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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황인숙 黃仁淑
1958년 서울 출생.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슬픔이 나를 깨운다』『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자명한 산책』『리스본行야간열차』등이 있음. rana58@naver.com
나의 균열
월요일 아니면 화요일에
더러는 수요일에
어느 땐 목요일에
주로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오천원어치 한장을
때로는 한장을 더 얹어
구매했노라
그 ‘한장 더’가
앞의 한장을 망치는 게 아닐까
운명의 조합을 헝클어뜨리는 게 아닐까
진지하게 주저하면서
이러나저러나 로또는
번번이 꽝
그러니 드느니
노벨문학상은 왜 공모를 안하는 걸까
노벨 신인문학상이라도 제정하지 않을까
요따위 생각뿐
(쯧쯔, 그건 뭐 로또 당첨보다 쉬울 줄 알고?)
모레가 미국 대선인데,
매케인이 당선될 확률은
운석에 맞아죽을 확률보다 낮다고 한다
매케인이 당선되고, 그다음
운석에 맞아죽는 거 아니야? 크크……
그럴 확률보다 더 낮은
목숨 얻어 태어날 확률
오, 장하도다, 그 확률을 오래전 뚫은 두 손으로
오늘도 꽝인
로또를 찢으며
민원
호기심으로든 혐오감으로든
누구라도 그 집 앞에서 발을 멈출 만했다
이층짜리 외벽엔 각양각색 문짝과 자바라와 창살과
유리장과 철책과 방충망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리고 발 디딜 만한 데마다 화분이 놓였는데
그 화분들에선 관목이나 덩굴식물이 울울창창 잎새를 뻗고
혹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옥상도, 철봉대니 역기니 그밖에
용도불명의 물건들이
필경 녹슬거나 부식해가며
또 어떤 식물들과 어우러지고 어질러져
빼곡 채우고 있었다
고철업자나 건축업자가 제 상품을
재어논 거라면
고개를 젓든 끄덕이든
사람들은 수긍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집 주인은 개인택시 기사였다
산책길에 그 집을 보고 구경하러 다가갔을 때
집 옆 공터에는 택시가 세워져 있고
빛바랜 노랑 제복을 입은 이가
낑낑거리며 뭔가를 옮기고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 오십대 남자였다
내 아첨하는 웃음에 그는
워낙 유순한 얼굴로 유순히 응대해줬다
“택시 몰고 다니다 보면 많이 버려져 있어요.
그럼 잘 봐뒀다가 손님 내려주고 돌아가서 싣고 와요.”
멀쩡해 보이는 자재들인데
그가 공들여 손질했나 보다
꿀벌이 봉분을 쌓듯
물고 온 수많은 문짝 등으로
그는 집을 봉해놓았다
진짜 문과 유리창은
층층 아래 어딘가 숨겨져 있다
그는 어디를 통해 드나들까
열 수도 닫을 수도 없는 문들, 유리창들
붉은 벽돌 벽 위에 누벼져 있다
저 집 안에
뭐가 있을까
허허벌판이 있을까? 시체 한 구가 있을까?
그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누가 있을까
“내가 이촌동에 집이 하나 더 있어요.
연립주택인데 살기는 거기 살아요.”
그러니까 이 집은-동네 한복판 흉가 같기도 한,
그러나 무구한 이 집은-그의 작품인 것이다!
이 집을, 그러니까 자기를, 이해하고 이어나갈
사람이 있다면 물려주고 싶다고
그는 기대에 찬, 외로움 그득한 눈빛으로 말했다
생각이 있다면 집 안을 보여주겠노라고.
나는 주춤 물러섰다
망가지거나 버려진
알지 못할 사람들의 잡동사니가
반듯반듯 깔끔하게-그러나 어딘지 어색하게-
이층건물 전면을 뒤덮고, 말하자면 설치돼 있었다
(에, 그러니까 시란,
말이란,
단어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거지요
적재적소가 아니면
그건 함부로 모아놓은
낱말무더기지요
흉흉하지요
소통이 안되지요)
사람들이 집 앞에 쓰레기를 무단투기한다고
하소연하며 청소하는 그를
봄볕 속에 두고 나는 돌아왔다
몇달 뒤, 여름도 다 지나서
근처를 지나다 먼발치에서 그 집을 보니
무언가 달라져서 가보았다
아직 몇개의 연둣빛 철책과 문짝이 남아 있었지만
그 집은 여느 조촐한 이층 양옥집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그는 야윈 등짝을 보이며 집을 향해 쪼그려 앉아
풀을 뽑고 있었고
집 주위에는 그 동네 덩치 큰 남자들이 둘러 서
속 시원한 듯 딱한 듯 멋쩍은 듯, 그런 웃음을 띤 채
담배를 피며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