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대화
비대칭적 한중관계와 동아시아 연대
백영서 白永瑞
연세대 국학연구원장, 사학과 교수. 본지 편집주간. 저서로 『동아시아의 귀환』 『동아시아의 지역질서』(공저) 『대만을 보는 눈』(공편) 등이 있음.
쑨 거 孫歌
중국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교수. 저서로 『아시아라는 사유공간』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사상이 살아가는 법』 등이 있음.
*이 글은 두 사람이 중국어로 나눈 대담을 녹취해 각자의 수정 보완을 거친 뒤 백영서의 발언은 본인이, 쑨 거의 발언은 김정수(서울대・숭실대 강사)가 각각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녹취록 작성에는 쑹 원즈(연세대 정외과 박사과정)가 도움을 주었다.
백영서 오늘 대화는 쑨 거 교수가 한국을 방문해 한달 반 정도 머무는 기회에 한국과 중국의 지식인이 서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짚어보고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기획한 것입니다. 이 대화를 통해 한중 간의 호혜적인 관계를 만들어가는 길을 모색했으면 하고 기대합니다. 특히 영토와 역사 문제로 지역내 갈등이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한반도의 긴장까지 겹쳐 동아시아 전체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위기에 처한 국면이라, 이 대화가 위기상황을 극복하고 평화의 동아시아를 구현하는 데 한중 지식인이 어떤 작은 역할이라도 수행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우선 독자들에게 쑨 거 교수에 대해 간단히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이 자리에서는 한국어로 번역 출판된 당신의 책들을 중심으로 한국사회에 알려진 면모를 살펴볼까요. 당신의 이미지에는 크게 보면 두가지 특징이 있지요. 하나는 중국지식인 가운데 드물게도 동아시아담론의 주창자라는 것입니다. 이게 맨 처음 소개된 『아시아라는 사유공간』(창작과비평사 2000)에 잘 드러납니다. 다른 하나는 일본의 중국문학 연구자이자 동아시아론자인 타께우찌 요시미(竹內好) 전문가라는 점이지요(『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그린비 2006). 그러나 저는 이 두가지 특징 말고 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사회인문학’의 구현자라는 성격에 특히 주목합니다. 분과학문의 틀에 따라 심각하게 분화된 한계를 넘어서 탈분과학문적 연구와 글쓰기를 현장의 실천경험과 결합하려는 노력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 둘이 다른 지면에서 대담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신자유주의시대 학문의 소명과 사회인문학」, 『동방학지』 159집, 2012). 그래서 특정 학과의 전문학자라기보다 비평가의 역할을 수행하는 당신을 저는 매우 중시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일상생활의 ‘사건’ 속에서 사상의 자원을 건져내는 사람이란 뜻이지요. 당신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일회성의 사건’을 ‘사상사적 사건’으로 전환하는 특징이 되겠지요. 현실에 대해 발언하기보다 현실인식에 대해 발언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독특한 사유의 결을 가지고 있어 얼핏 들으면 이해가 쉽지 않으나 번뜩이는 통찰력이 있습니다. 이 점은 최근 간행된 윤여일(尹汝一)씨와의 대담집 『사상을 잇다』(돌베개 2013)와 저서 『사상이 살아가는 법』(돌베개 2013)에 잘 드러납니다.
제 오랜 친구이기도 한 당신과의 대화를 준비하면서 저 자신의 동아시아론을 성찰하는 기회로도 삼을 수 있기에 가벼운 긴장과 흥분을 느낍니다. 본격적인 대화에 앞서 진행방식부터 제안하지요. 독자들을 위해서 가능하면 구체적인 사건을 통해서 인식의 문제로 옮겨가는 식으로 논의하되, 각자의 체험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신을 걸고 대화하자는 거지요.
쑨 거 백선생의 말씀을 들으니 긴장도 되고 흥분도 됩니다. 지금 저의 생각들은 아직 완전히 체계가 잡힌 것은 아닙니다. 선생 같은 대화상대를 찾는 것은 중국에서도 쉬운 일이 아닌데, 이번 기회를 통해서 저의 사고가 한걸음 더 발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장에서 느낀 한반도 위기와 한중의 상호인식
백영서 이번에 한국에 머무는 기간이 길진 않지만 많은 한국 지식인과 학생 들을 만난 것으로 압니다. 여러차례 강연에 초대받아 만나본 사람들을 통해 받은 인상은 무엇인가요. 특히 당신의 사유, 더 나아가 중국에 대해 그들이 갖고 있는 인식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이야기해주길 바랍니다. 이어서 여기 머물면서 접한 한국인의 생활이나 인문환경에 대한 체감은 어떠했는지도 들려주면 좋겠어요. 공교롭게도 지금 한반도가 전쟁 직전의 상황에 처해 있지 않습니까. 일부 외국인들이 전쟁을 염려하는 가족의 요구에 따라 귀국했다는 말도 들려요. 한국에 와 있는 중국인으로서 그 분위기를 어떻게 실감했는지 궁금합니다.
쑨 거 역사는 항상 위기의 포화상태에서 갑자기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낸다고 벤야민이 말한 적이 있지요. 사상사 연구자라면 이러한 위기를 포착해 역사에 진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번 방한은 마침 이러한 위기 포화의 순간에 이루어졌고, 한국사회를 관찰하고 이해하는 데 가장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먼저 한국의 학자들에게서 받은 인상을 이야기하자면, 저에 대한 그들의 토론은 모두 호기심과 선의가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매우 유쾌한 학술적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백선생 같은 중국문제 전문가나 중국과 오랫동안 교류해온 몇몇 분들을 제외하면, 대다수 학자들의 중국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관념화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데올로기의 영향도 있겠지요. 중국을 이야기할 때 많은 학자들은 먼저 중국의 인권문제에 관심을 보이거나 중국의 이데올로기는 한국과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다른 두 사회가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러한 관념화된 상상을 깨기 위해서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분석작업이 필요할 것입니다. 저의 기본적인 생각은 서구의 논리로는 중국사회를 분석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인권 같은 개념으로 중국의 역사와 현상을 분석한다면, 구체적인 역사상황과 사회상태에 효과적으로 진입할 수 없습니다. 중국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에 대해서는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한국에 있었던 시간이 너무 짧고 또 한국어를 모르니 지식계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네요.
백영서 그 질문에 답하기 전에 한국 학자들이 당신의 사유에 대해 얼만큼 이해하고 있다고 느꼈는지 알고 싶네요. 제 예상보다 많은 기관에서 당신에게 강연을 요청했던데, 그들이 당신에게 뭘 듣고자 하던가요?
쑨 거 그것은 선생이 방금 언급했던 제 작업이 가진 특성과 관련이 있을 듯합니다. 제가 전문가형 학자라기보다 지식인형 학자이기 때문이지요. 저의 전공은 정치사상사이고, 현실생활과 연관된 사상과 현실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마침 한반도가 지금 이러한 상태인데다 제가 중국인이다 보니, 몇몇 한국 학자들은 저로부터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듯합니다. 물론 그들이 제 문제의식에 대해 흥미를 느끼더라도 저의 분석과 결론에 꼭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래서 그들이 대화를 하고자 한 것이겠지요.
백영서 일반 한국인의 중국 인식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고 봐요. 하나는 중국이 큰 나라이기에 패권에 대해 염려하는 거지요. 다른 하나는 중국을 무시하거나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거예요. 이런 현상에는 역사적 맥락도 있고 현실적 원인도 작용하고 있지요. 전통시대에는 중국이 보편문명의 중심이라고 인식하고 ‘상국(上國)’으로 간주했으나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한 이후 중국을 낮춰보는 인식이 강해졌어요. 이런 인식은 물론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일본을 개혁의 모델로 삼은 것과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게 식민지시기에 대량 이주해 값싼 노동력을 제공한 중국인 노동자와 접촉하는 경험에 의해 강화되었다고 봐요. 그러다 냉전시기에는 중국과 접촉이 불가능해진 상태에서 반공냉전형 ‘중공’ 인식에 매몰되어 ‘낙후한 중국’이라고 무시하는 태도가 계속되었지요. 1992년 한중 국교정상화 이후 양국 정부는 물론이고 민간 차원에서도 교류가 활발해져 상호의존도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서로간의 멸시가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에요. 연세대 강연에 참석한 한 한국인 학생이 이 현상을 지적하면서 중국인의 한국 멸시는 중화주의라는 사상에 기반한 것인데, 한국인은 그런 근거도 없이 중국인을 멸시한다고 말한 적도 있지 않습니까.
쑨 거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지금 직면한 현실적인 과제가 바로 한중 두 사회 사이의 적대감을 어떻게 감소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선생께서 말씀하신 대로, 중국에 대한 한국사회의 태도는 두가지 극단적인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상 동일한 태도가 보여주는 두 얼굴입니다. 중국사회 역시 이러한 현상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두 사회 민중의 기본적인 상상을 구성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두 사회 사이에 모종의 적대적인 감정이 출현한 것이지요. 그런데 현재까지 이러한 적대감은 아직 고착되지 않았고, 우리에게는 여전히 국면을 전환할 기회가 있습니다. 만일 중국과 일본의 관계 같은 문제가 나타난다면 상황은 더욱 어려워집니다. 현재 한국과 중국의 지식인들에게는 이러한 적대감을 해소해야 하는 동일한 임무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선생께서 방금 말씀하신 냉전이데올로기나 과거 조공(朝貢)의 기억 등이 한국의 중국 상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토론해야 합니다. 또 어떠한 요소가 중국의 한국 인식에 영향을 끼쳤는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이러한 일반적인 서사에서 ‘입구(入口)’를 찾아 구체적인 토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영서 당신이 말하는 입구란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나요?
쑨 거 두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비교적 직관적인 방식입니다. 중국에 대한 한국사회의 긴장감을 대상화하여 그것을 사상의 문제로 연구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한국에 대한 중국사회의 무관심 역시 대상화하여 사상 문제로 처리해야 합니다. 잠재의식을 대상화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자각을 갖추는 작업이죠. 중국에 대한 한국의 긴장이나 한국에 대한 중국의 무관심 같은 현상이 지식계에서도 무의식적으로 정당화되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교정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리고 또다른 방식은 원리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는 국가를 단위로 토론하면 안됩니다. 예를 들어 중국에 대한 한국의 인식이 한국의 내부 문제로 전환될 수 있을지에 대해, 이것을 한국 내부에 존재하는 차별과 긴장으로서 해석을 시도해보는 것이지요. 중국사회 역시 그렇습니다. 중국사회가 언제나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깊은 자괴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중국이 제1세계나 일본과 대면할 때면 어떤 묘한 긴장감이 생기는 복잡한 상태가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각자 사회 내부로 내화시킨 이후에 분석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백영서 그 말씀처럼 외부에 대한 인식은 각자의 사회 내부문제의 인식과 연결되어 있지요. 저는 2010년 여름 광저우의 주간지 『난팡두스바오』(南方都市報)의 초청을 받아, 한중관계와 상호인식에 대해 대중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두 나라의 젊은이들이 특히 인터넷에서 상대방을 비난하는 여론을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 국내사회의 모순, 즉 불균등한 발전과 관련이 있다고 강조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서로 교류만 더 많이 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고 각자의 사회를 좀더 인간다운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이 점은 중국 안팎의 여러 학자도 지적하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에 우리가 고려하지 않으면 안되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고 강조하고 싶어요. 제가 최근에 발표한 글(「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한중관계의 과거・현재・미래」, 『역사비평』 2012년 겨울호)에서 밝힌 것이기도 한데 당신에겐 그 중국어 번역본을 드렸지요. 그 핵심 주장 중 하나는 한중관계의 ‘변하지 않는’ 조건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비대칭관계라는 거예요.
그 비대칭적 관계는 일방적인 지배와 복속이 아니라 중국과 주변국이 각자의 이익을 고려한 합리적 선택과 전략적 상호작용의 결과이고, 그것이 지속적으로 되풀이되면서 양국이 오랜 기간 평형을 유지해왔다고 봅니다. 그런데 비대칭의 한쪽인 중국은 한국에 대해 과소 관심, 한국은 중국에 과잉 관심을 가졌다고도 할 수 있어요. 중국인은 오랜 역사에서 대국으로 자처해 다른 나라에 대한 관심이 적어요. 그래서 오늘날 한국에 대해서도 한류, 한국상품 등 주로 자신의 생활과 직결된 내용에 한정된 관심을 갖는 데 비해, 한국인은 중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한중관계 등 각 방면에 걸쳐 관심을 갖지요. 그 때문에 양국은 상대방에 대한 요구도 비대칭적이기 마련이지요. 중국인은 자부심이 강해 자신을 아시아문화의 종주국으로 여기고 주변국가, 예컨대 한국인의 승인과 존중을 기대하나, 한국인은 중국이 한반도 평화와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등 여러 영역에서 역할을 해주길 기대해요. 당신이 말하는 ‘감각의 비대칭’이 존재하는 거지요. 그래서 서로에 대한 기대가 다르고, 오해 또는 부정적 정서가 형성되기 쉬워요. 이 문제의 해결방식에 대해 논의해보고 싶습니다.
중심-주변의 이분법을 깨뜨리는 사유방식
쑨 거 비대칭의 문제는 확실히 매우 중요합니다. 이 문제에서 시작하여 토론한다면 한・중 두 사회 간의 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한국 방문에서 어떤 영감을 받았는데, 이것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볼까요.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을 참관했을 때 저는 전형적인 비대칭의 이미지를 보았습니다. 기념관 잔디밭에 남북 군인 형제가 포옹하는 조각상이 있는데, 남한의 군인은 건장하고 북한의 군인은 왜소합니다. 비록 이들이 형제라고는 하지만, 남북을 상징하는 조각상이 보여주는 신체의 차별을 나이 차이로 해석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대국과 소국의 관계를 보았고, 이것은 아마 한반도 내부의 비대칭일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비대칭을 하나의 구조로 삼아 한중관계를 토론한다면, 이 구조를 두 국가 간의 관계로 위치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두 국가, 두 사회 사이에 존재하는 문제는 바로 두 사회 내부에 존재하는 문제가 국제적으로 반영된 것입니다. 중국사회에도 발달한 도시와 낙후한 농촌의 관계가 존재하고, 발달한 지역은 스스로를 우월한 지위에 두고서 농촌에서 온 노동자 문제를 대합니다. 우리가 비록 평등을 강조하지만 이러한 비대칭관계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만일 이 내부의 문제를 한중관계에 놓고 본다면, 우리는 심리적으로 평등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자문해야 합니다.
백영서 이 문제는 중심과 주변의 구조와도 연관이 됩니다. 제가 말하는 주변은 단순히 지리적인 의미라기보다 인식론상의 문제에요. 또 주변적 주체도 그보다 더 주변적인 존재에 대해서는 중앙이 되는 식으로 무한하게 연쇄되는 관계이지요. 한중관계의 비대칭 문제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불변의 요소와 관련된 것이고 역사적으로 서로 이 관계를 이용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지식인들은 비대칭을 강조하는데도 왜 중국을 멸시하는 현상이 생길까요? 중국의 또다른 주변 베트남에도 이런 현상이 있는지 궁금하군요. 우리가 이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 나눈 것은 2001년 토오꾜오에서입니다. 그때 제가 중국의 학술지 『두슈』(讀書)에 발표한 글(「世紀之交再思東亞」, 1999년 8월호)을 놓고 토론했지요. 제가 당신의 중국에 대한 시각을 비평했더니, 당신은 한국인이 중국인의 감각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 주된 요인이 규모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답했어요. 한국은 작은 나라지만 중국은 역사도 길고 땅덩이도 넓다, 규모의 차이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한국인은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셨지요. 그때 저는 그런 식의 대답이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거야말로 대국주의 아닌가?’라고 생각했지요. 귀국 후 당신이 쓴 많은 글을 읽고 나서, 당신이 왜 그렇게 ‘규모의 차이’를 강조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솔직히 말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어요.(웃음) 이렇게 비대칭 관계는 확실히 존재합니다. 그러니 한국인은 이 비대칭성을 인정해야 하고, 동시에 중국인은 상대방 사회를 깊이 배려해야 합니다.
쑨 거 선생 글에서 언급한 비대칭 문제 가운데 가장 영감을 얻는 부분은, 이 비대칭 문제를 반(反)패권의 방향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역사를 통해서 두 사회의 구성 메커니즘의 차이를 연구하고 각자의 역사적 논리를 분석한 점입니다. 아까 제가 비대칭 상태에서 드러나는 우월감과 오만함을 얘기했는데, 또 선생 말씀처럼, 사실 한국사회에는 중국에 대한 또다른 오만함과 우월감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우월감이 결코 문제의 전부가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비대칭은 연구대상이지 간단하게 부정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패권에 반대하는 동시에 크기에 관계없이 모든 국가가 동등하다는 허구적인 인식론적 전제를 깨뜨려야 합니다. 그것은 단일화된 상상으로써 다양성을 가진 역사적 과정을 말살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냉전적 상상을 돌파하여 상대방의 역사적 논리로 들어가 그것을 인식하느냐가 바로 진정으로 평등한 의식을 싹 틔울 수 있는 기초입니다. 제가 말한 인식론적인 전복과 선생의 역사학을 결합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평등한 마음가짐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평등한 호기심으로 상대방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중국인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만, 또한 반드시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대국이든 소국이든 모두 자신의 문화적 논리가 있고, 이러한 논리를 동등하게 존중해야 그들에게 들어가, 비대칭 속에서 역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비대칭에 깃든 가치판단을 객관적 사실과 구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한국이 남북관계상의 비대칭을 검토하고 이러한 가치관이 해롭다는 것을 인정한 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비대칭을 하나의 연구대상으로 삼아 객관적으로 토론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이 아마 선생께서 가장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일 텐데, 그 전제는 우리가 반드시 평등한 마음가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두가지 문제를 결합함으로써 반패권의 문제를 토론하고 다양화된 역사과정 문제 역시 토론할 수 있습니다.
백영서 여기서 일반 중국인이 한반도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한반도의 핵위기 등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질문을 드리고 싶어요. 물론 이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시니 한반도 관련 정부정책에 대한 지식인과 민중의 태도 그리고 한반도 인식에 대한 최근 분위기를 간단히 소개해주길 바랍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하냐면 한반도의 위기상황에서 한국 내부에서는 보수냐 진보개혁이냐에 관계없이 한반도 안정에 중국이 중요한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쑨 거 한반도에 대해 중국사회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북한의 이번 핵실험을 보고 나서야 사람들은 이것이 자신과 상관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이번 국면에 대해 중국사회는 한국정부의 태도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다시 일어날 것인지에만 촉각을 세우지요. 중국인들은 북한에 대해 항일전쟁을 함께 치른 형제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북한은 여전히 사회주의를 견지하고 있다는 일종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합니다. 동시에 북한주민의 생활상의 위기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습니다. 예를 들어 동북지방 주민 중에는 북한에 식량위기가 닥치면 변경에서 철조망 너머로 식량을 던지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인도주의적 정서의 연대는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공리주의적 색채를 띠지 않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아름다운 감정입니다. 그런 한편 현재의 언론매체는 북한에 대해 비교적 엄격합니다. 핵실험과 끊임없는 전쟁도발을 포함한 북한의 태도에 관방은 불만스러워하고 있습니다. 한국에 대해서는 우선 근대화의 수준이 중국보다 높은 국가라고 생각합니다. 또 국제관계 면에서 한국의 강렬한 반일정서에 감탄하곤 합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한국사회에 대해 여전히 호기심이 부족합니다. 이번 한반도의 혼란한 정세로 오히려 많은 중국인들이 한국과 북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백영서 이런 인식도 비대칭관계와 연관된 것 아닐까요?
쑨 거 제 생각에 비대칭의 문제는 구조라기보다 일종의 심리적 태도에 가깝습니다. 중국인에게 남한과 북한에 대한 감각은 그 내용이 다를 뿐, 비대칭이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많은 경우 이것은 자기중심적입니다. 때문에 아주 쉽게 차별의 태도로 바뀌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감각은 안정적인 것이 아니라서 때로는 역전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중국사회는 미국에 대한 북한의 강경한 태도에 대해 영웅적이라고 느끼는가 하면, 한국의 근대화를 보며 자강자립의 정신을 느끼거나 반일정서를 민족적 기개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역전은 대부분 단합하지 못하는 중국의 사회분위기에 대한 비판과 맞닿아 있습니다. 중국사회에서 남북한에 대한 상상은 윤곽이 명확하지 않지만, 일본에 대한 상상은 명확합니다. 아마도 전쟁을 경험했기 때문이겠지요. 아무튼 이러한 한국에 대한 상상을 선생이 말씀하신 대로 상대방과 자신의 서로 다른 논리를 이해하고 상대방의 역사적 발전을 이해하는 맥락으로 끌어들여야 합니다.
백영서 그런데 제가 만나본 몇몇 중국지식인들은 근대적 성취, 특히 경제발전을 기준으로 북한을 판단하며 가난하다고 무시하더군요. 폐쇄된 국제적 조건 속에서 자립하려는 의지는 어느정도 인정하지만, 그것도 중국이 개혁개방 전에 자력갱생하던 것과 비교해 비슷하다고 보는 거지요. 지식인뿐 아니라 상당수의 관료들도 마찬가지로 북한을 멸시한다는 말도 들려요. 중국의 인터넷에 나타난 여론은 더 심하게 북한을 깔본다고 하고요. 이에 비해 남한에 대해서는 한류와 경제발전 등의 이유로 긍정적으로 보기도 하지요. 그러나 남북한 모두에 대해 비대칭적 감각을 갖고 있으니, 당신 말대로 중국인의 한국 인식이 불안정하다면 그것이 앞으로 또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를 생각할 때, 일본인들이 북한에 적대적으로 반응하면서 남한의 한류 등에 호의적인 반응인 데 비해 재일한국인/조선인의 문화에 무관심하거나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현상이 머릿속에 떠올라 마음이 착잡하네요. 이 문제는 앞으로 더 깊이 분석해보시길 기대합니다.
당신은 이번 방한의 목적이 한국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요. 한겨레신문(3월 20일자)과의 인터뷰에서 ‘방법으로서의 한국’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것은 한국의 사상자원을 동아시아 사상자원의 하나로 삼기 위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간 일본, 오끼나와, 대만의 사상자원을 재인식하고 그걸 통해 중국을 다시 사고하는 거울로 삼고자 했어요. 이런 역할은, 제가 아는 한 중국지식인 사이에서 매우 독특한 것입니다. 동아시아 사상자원으로서의 한국사상 내지 한국인의 경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특히 이번 방한 기간에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는지 듣고 싶습니다.
한국의 민주운동에서 배운다
쑨 거 저는 국경을 사고의 전제로 하지는 않지만, 모든 문화의 내재적 논리를 존중합니다. 저의 출발점은 인류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어떤 문화 혹은 국가의 형태를 빌려 이 문제를 해석할지에 대해서는 인연과 조건을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일본은 문제를 토론할 때 사용되는 매개이고, 한국과 중국 역시 또다른 문제를 토론할 수 있는 중요한 영역 혹은 매개이지요. ‘방법으로서의 한국’이란 말은 이런 뜻입니다. 하지만 저는 한국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한국을 방법으로 삼을 능력이 없습니다. 며칠 전 한국의 록밴드 ‘들국화’의 공연을 보러 갔었는데, 주로 한국의 80년대 민주운동을 기리는 공연이었습니다. 이 공연을 보면서 저는 진정한 민주운동의 깊이와 어려움을 다시 이해할 수 있었고, 과거에 관념적으로 이해하던 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한국은 민주운동의 경험이 가장 성숙하고 풍부한 사회입니다. 한국의 민주투쟁은 오늘날까지 많은 문제에 직면해왔습니다. 예를 들어 투쟁 내용의 변화 같은 전환의 문제, 민주정치의 계승방식의 문제 등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은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할 때, 한국을 매개로 하여 사고를 밀고 나가는 데 더욱 두터운 자원이 됩니다. 이처럼 피부로 느끼는 감각은 민주정치에 대한 저의 상상을 바꾸어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 학자에게 ‘민주’는 아마 일련의 단순한 절차이자 일종의 가치화된 개념일 것입니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과정에는 좌절과 실패, 나아가 곤혹, 그리고 통합을 구체적 과제로 하는 수많은 곤경 등 복잡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백영서 한국의 민주운동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셨는데,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기였다면 그런 당신의 평가를 듣고 어느정도 동의했을 거예요. 당신 말대로 하면 우리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미 실현했습니다. 그래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란 발상도 제기된 바 있지요. 말하자면 절차적 민주주의가 실현된 이후에 민주주의가 더 위기를 겪을 수 있으니 사회경제적 내실(분배와 복지 등)을 다지는 실질적 민주주의가 주요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 이명박정부 5년 동안, 그리고 특히 지난 연말의 대선을 겪고 나서, 한국 민주화운동의 경험을 높이 평가하는 외국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당혹스러운 감정도 듭니다. 지난 대선 직후 야당후보를 지지한 사람들은 ‘멘붕’을 겪었다고 말할 정도였어요. 이제 그런 심리상태에서 어느정도 벗어났으니 민주주의 문제를 좀더 정면으로 논의할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쑨 거 민주는 절차의 문제에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그 다음에도 많은 내재적인 모순과 갈등이 있습니다. 이것이 아마 오늘날 한국 민주정치의 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중국지식인의 인식은 아직 여기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민주정치에 대해 한국은 매우 복잡한 심리상태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의제들을 정리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백영서 절차적 민주주의를 상당히 훼손한 이명박정부 시기를 거치면서 우리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그후가 단계적으로 분리할 수 없는 서로 연결된 것임을 절감했어요. 그리고 한국 같은 비서구 국가에서는 보수와 중도 정당 간의 정권교체만으로 얼마나 사회적 파장이 큰 변화를 일으키는지도 확인했고요.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정당정치의 개혁뿐 아니라 그를 촉진할 사회운동의 활성화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어요. 그런데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3・11대재난 이후 자민당으로 정권이 교체된 일본에서도 일어나고 있잖아요. 민주주의라는 동일한 목표를 실현하는 과정은 한국이나 중국이나 일본이 갖가지 맥락에 처해 있어 각각 다르겠지요. 한국의 경우 분단체제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 그 과정에서 전제되어야 하듯이 말예요. 그러나 서로 같은 목표이므로 함께 새롭게 논의할 때라고 봅니다. 여기선 민주주의가 단지 일종의 원리만은 아니란 것을 강조하고 싶어요. 저는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장기과제와 중・단기과제를 동시에 사고하면서 그것을 일관된 실천으로 연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민주주의 문제도 마찬가지로 이런 태도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 관건은 민주주의를 원리 또는 장기목표로 간주하더라도 우리의 현실 속에서 추구해갈 중・단기 전략을 갖추는 데 있어요. 특히 장기와 단기 과제를 연결하는 징검다리인 중기과제를 소홀히 할 때 추상화하고 관념화하는 오류에 빠지게 됨을 간과해서는 안되겠지요.
쑨 거 중기과제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백영서 각국 국민국가 형성의 역사맥락에 따라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기본적으로 국가기구를 개조하는 과제, 즉 기존 국가에 대한 해체전략이자 한층 더 개방적이고 인간적인 국가를 만드는 창의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분단체제 극복운동을 통해 남북한의 국가연합으로 그 모습이 드러나는 복합국가가 중기과제라고 봅니다.
쑨 거 요즘의 한국 젊은이들은 민주정치를 복지사회로 이해하는 듯합니다. 큰 정치, 즉 국가정권과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는 문제에 관심을 갖기보다 일상의 정치, 예를 들면 외국인 차별, 환경보호 등의 문제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지요. 큰 정치와 생활정치의 연결이 끊어지면서, 그들은 어느 당이든 똑같다고 느끼고 투표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본의 젊은이들 사이에도 이러한 현상이 존재하고 사실 더욱 심각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어떻게 단기 목표를 세우실 건가요?
백영서 젊은 세대의 정치의식과 정치참여의 특징은 한국이나 일본만이 아니라 중국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나는 것 아닙니까? 한국의 청년세대는 당신 말대로 생활정치에 더 깊은 관심을 갖고 있기에 제가 강조한 중기과제에 무관심할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20대의 ‘보수화’가 가끔 논란이 되기도 합니다. 사실 저 같은 세대는 한국사회가 고속성장하는 과정에 있어 계층이동의 유동성이 높아 취직 걱정을 별로 하지 않던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지요. 이에 비해 지금 청년들은 성장이 둔화되고 계층구조가 매우 고정된 시기를 살기에 자신의 생활에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충분히 이해돼요. 문제는 이러한 불안감이랄까 불만을 사회구조적인 차원에서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인데, 그렇게 되도록 돕는 게 우리의 역할이 아닐까요? 한국에서 지난 연말 20대가 높은 대선투표 참여율을 보이고 그 67%가 야당후보를 지지한 데서 보듯 일본과는 상황이 다릅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 북한 핵실험으로 조성된 한반도의 위기상황도 청년층이 자기의 일상생활이 한반도 전체의 운명과 어느정도 관련된 것임을 피부로 느끼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생활세계에서 얻는 실감을 한국의 진보개혁진영 정당이 어떻게 단기적인 정치의제로 삼는가겠지요. 그런데 저는 청년을 비롯한 일반 시민과 민중의 생활정치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단기과제를 장기과제와 연결하는 일, 즉 두 과제를 매개하는 중기과제에 한층 깊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이 일을 잘 해나가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에 대한 긴장감을 팽팽하게 갖고 정당체제와 시민운동의 개혁에 도움이 되는 새로운 언어, 담론을 만드는 일이 핵심인데, 제가 과연 얼마나 긴장감을 갖고 있는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군요.
사실 이 현실과의 긴장감은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에게도 요구되는 것 아닙니까. 아까 논의하던 화제로 돌아가보면, 좀전에 말했듯이 당신이 한국에 주목하는 것은 중국을 다시 보기 위해서이지요. 그렇다면 이 기회에 지금 중국 사상지형에 대해 간단하게라도 논의하지 않을 수 없군요. 일본의 주간지 『도꾸쇼진(讀書人)』에 실린 정담에서 당신과 허 짜오티엔(賀照田)은 지금 중국사상계에서 논쟁의 중심이 ‘보편적 가치관과 중국모델의 대치’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2000년 직후부터 한동안 중국사상계의 논쟁 축은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었고, 지금도 그 구도가 존재하긴 하나 그보다는 ‘보편적 가치관과 중국모델’의 대립축이 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어떤 중국학자는 현재 ‘신삼교합류(新三敎合流)’의 추세가 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중국의 사상계 지형을 크게 삼분하는 자유주의・사회주의・보수주의가 ‘자유유학’ ‘좌파유학’ ‘정통유학’이라 불릴 수 있을 정도로 모두 유교, 곧 중화문명의 독특성을 선양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지금 문화의 재구성, 문화자각이 한창이지 않나요. 여기서 문제는 그런 노력이 어떻게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입니다. 이 지형 속에서 신좌파에 속하는 대표 지식인이라 할 왕 후이(汪暉)와 첸 리췬(錢立群)의 차이도 벌어지고 있지요. 이 대립은 한국 지식인사회에서도 반향을 불러일으키면서 한국인의 중국사상계 이해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지금 중국의 사상계는 무엇을 논쟁하는가
쑨 거 이 문제에는 중국지식계의 토론과 개혁개방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전제가 있습니다. 중국지식인의 위기감은 연원이 있습니다. 5・4운동(1919) 때부터 망국에 대한 강한 위기의식이 있었고, 지식으로 이 국가와 민족에 발전의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제 생각에 오늘날 중국지식계의 중심적인 논쟁은 사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자라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5・4시기 이래로 지식계의 논쟁과 사회현실의 방향은 역사발전 궤적과 줄곧 어긋나왔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90년대 이후 중국의 논쟁과 중국이 걸어왔던 개혁개방 사이에는 매우 뚜렷한 어긋남이 있습니다. 90년대 중반에 어떤 이들은 “중국의 개혁개방이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식인들의 말이 모두 무시당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을 사회의 정신적 불안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각종 담론으로부터, 중국모델과 보편화 추세를 포함한 이러한 대립 이면에서 우리가 오늘날 중국의 사회현실을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어떤 불안으로 이해한다면, 이 불안에는 현실의 문제가 투사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요. 중국의 사상논쟁은 그 역사적 의미가 매우 제한적이어서 그것을 연구하기보다는 차라리 지금 우리가 각 방면에서 수집할 수 있는 사회동향에 대한 정보를 관찰하는 편이 낫습니다. 관방 문건의 변화, 특히 사회에 출현한 큰 사건의 구체적인 형태를 살펴보는 것도 좋겠지요. 예를 들어 중국에선 단발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이 자주 일어나곤 하는데, 중국 민중의 기본 소양이 점차 향상되면서 이러한 부정적인 충돌은 점점 감소하고 있고, 민중의 요구가 어느정도는 정부에 의해 파악이 되는 상황이며 이에 대한 상호작용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상호관계에 대해 합리적인 해석을 내놓는 지식인이 많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현재 지식인들이 하고 있는 수많은 관념적인 토론들은, 제 생각에 중국의 사회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기본적인 사회현실은 서구모델만 따라서는 자신의 제도와 운행 씨스템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른바 신유가(新儒家)의 방식으로 다스릴 수도 없습니다. 신유가는 사실 유토피아적 이념만 제시했을 뿐 어떤 효과적인 사회통치 방안도 내놓은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보편성 서사와 마찬가지로 해석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서구모델을, 다른 하나는 전통모델을 사용할 뿐입니다. 진정한 중국의 사회형태는 제가 방금 말한 문제와 상관이 있습니다. 왜 우리가 인권 개념을 사용하여 이 사회의 동향을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가 하면, 많은 중국인들이 ‘인권’을 외친다 하더라도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서구에서 쓰는 식의 인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축적되어온 이 사회의 운영원리는 개체, 즉 공(公)에 대해 상대적인 사(私)의 영역을 기초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사실 중국인은 다수의 사적인 집합을 큰 사(大私)라고 여기며, 이 큰 사를 공(公)으로 간주합니다. 때문에 중국에서 공사 관념의 대립은 성립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단지 작은 사(小私)와 큰 사(大私)의 구별일 뿐입니다. 그런데 큰 사의 특징은 바로 균등을 이론적 전제로 하여 모든 사람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권리들의 관계를 결합하는 연대는 서구 같은 시민사회적 연대가 아닌, 자신의 역사적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지식인은 자기 사회의 특징을 토론할 때 전통적 속박을 타파하는 데 급급한 나머지 너무 조급하게 서구의 개념을 사용해왔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서구 개념의 사용으로 빚어진 다양한 문제에 직면했음을 발견하고서는 이른바 중국모델을 만들어냈는데, 이 중국모델 역시 효과적인 구조적 서술은 부족한 상태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나의 유기적인 모델이 아니라 몇몇 현상만 볼 뿐이지요. 예를 들어 중국 사회주의 역사가 축적해온 공유제(公有制)나 인민의 생활을 보장하는 메커니즘 등은 실제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에 국한해서는 유효하게 분석하기 어려운 것들이지요. 중국의 원리가 과연 무엇인가, 제 생각에 현재 많은 중국지식인들이 이 원리적인 서술을 모색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과정은 매우 느리게 진전되고 또 그 과정에서 이전에는 없었던 혹은 무시되었던 구조적 해석을 축적하고 있습니다. 아직 성숙하지 않았을 뿐이죠. 저는 한국의 중국연구가 그러한 사상논전 형태로 드러나지 않은 연구에 좀더 관심을 가져주시길 호소합니다.
백영서 누가 그런 연구를 하는지 예를 들어주실 수 있나요?
쑨 거 가령 중산(中山)대학 역사인류학의 작업 같은 것이 있습니다. 주류 지식계 안에서 목소리를 내지는 못하지만 농촌 기층민중의 생활형태를 연구하고 있고, 그 속에서 마오 쩌둥 시대의 인민공사(人民公社) 제도를 비롯하여 중국의 전통사회가 현대로 발전한 이후의 기본적인 구조방식을 찾아내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백영서 해외의 지식인들은 중국 지식인사회의 주변부보다 중심부의 담론에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지요. 예를 들면 한국의 중국연구자는 중국사상계의 중심에 있는 신좌파의 동향에 주목하고 그들을 양분해서 왕 후이를 지지하는 쪽과 첸 리췬을 지지하는 쪽이 논쟁을 벌일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두 사람 사이의 분화를 현실정치에 대한 인식 및 중국의 변혁전망과 관련된 정치적 분화라고 해석하고, 그 대립을 신좌파의 국가주의와 반국가주의의 대립, 친관방(親官方)과 반관방의 대립, 심지어는 ‘타락한 비판적 지식인’과 ‘진정한 비판적 지식인’ 사이의 대립으로까지 보는 경향이 이미 나타나고 있어요.
쑨 거 저 역시 사상사를 연구할 때 특별히 시간을 들여 일본사상사 내부의 논전을 살펴봅니다. 동시대인이 볼 때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분명히 핵심적인 부분이겠죠. 하지만 일단 논전이 되면 일부로써 전체를 일반화하거나 한쪽 편으로 치우치기 쉽습니다. 이때 논전의 목적은 문제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반박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저는 이를 다룰 때 논전을 매개로 논전이 유발하는 문제를 연구하는 방법을 씁니다. 만일 논전을 핵심-중간-주변지대로 구분할 수 있다면, 가장 가치있는 부분은 종종 주변지대일 수 있습니다. 통상 이 주변지대에서는 불꽃 튀는 논쟁보다 비교적 담담한 분석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이 때문에 깊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논전을 선택하는 문제입니다. 사상사 내부에는 무수한 논전이 있고 당시에는 이슈가 되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보면 문제설정이 잘못되어 역사적으로 어떤 지위도 가질 수 없게 되기도 합니다.
백영서 당신의 이런 관점은 ‘보편성과 중국모델 문제’에도 적용되겠군요.
쑨 거 제가 보기에 현재의 토론들은 아무런 비전도 없습니다. 중국모델이나 보편성 토론은 어떤 이론적 기능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 논쟁은 보편성에 대해서 이론적 해석을 내놓지 못하고, 중국모델론에서도 핵심적인 부분을 결여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만일 중국모델을 토론하고자 한다면 중국사회와 역사적 원리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토론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중국모델 토론에는 전통사회에 대한 효과적인 분석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전통사회의 역사적 논리는 근대성과 같은 개념을 사용해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니까요.
백영서 그렇다면 간 양(甘陽)의 삼통문제(三統問題)는 어떻게 보는지요? 신좌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그는 지금 중국에 세 종류의 전통이 연속한다고 주장했지요. 첫째는 개혁개방 이래 형성된 신전통, 즉 시장 중심으로 자유와 권리를 포괄하는 것, 둘째는 마오 쩌둥 시대 형성된 전통, 즉 평등과 정의를 추구하는 것, 셋째가 유가문화를 대표로 하는 전통문명, 즉 일상생활에서 인정(人情)과 향정(鄕情)을 중시하는 특징을 말합니다. 비유하자면 마오 쩌둥, 덩 샤오핑, 공자를 합친 격이라고 할까요. 이에 대한 논란이 중국 내부에 있는 걸로 압니다만.
쑨 거 간 양의 고뇌에 대해 저는 상당히 공감하고 있고, 제가 존중하는 친구이기도 하죠. 하지만 그는 너무 성급하게 중국역사에 답을 냈습니다. 사실 그 안에는 너무 많은 일방적인 바람이 섞여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추상적 토론이 왜곡되어 이용되기 쉽다는 점입니다. 주제가 너무 크면 해석의 힘은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물론 그것이 초보적인 문제의식이라면 그 방향감각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연구가 심화된 이후 이 방향감각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독자들이 어떻게 처리할지 두고 봐야겠지요.
백영서 유가 부흥에 사회적 기초가 없을까요? 당신과 나의 친구이기도 한 장 즈창(張志强) 교수는 유가가 오늘날 중국인의 대중문화 심리상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충족시키는 면이 있다고 해석하지요. 사회주의 정신문명이 설득력을 잃은 일상생활에서 도덕적 각성을 통해 ‘생활공동체’가 건설되기를 바라는 여러가지 현상이 유교 부흥으로 나타난다고 보는 것 같던데요.
쑨 거 먼저 유학의 부흥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공자의 유학인지 주자의 유학인지, 혹은 양명학인지 아니면 예교인지는 제쳐두고, 저는 유학을 어떻게 부흥시킬 것인지, 그 사회적 기초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마주하는 중국사회는 이미 전통사회는 아니지만, 전통사회의 일부 기본적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의 중국사회는 법률 형식으로 효과적인 통제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법률의 권위를 그다지 존중하지 않습니다. 사실 중국사회는 이러한 원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조절해야 합니다. 또한 중국사회는 정치에 대해 매우 높은 도덕적 요구가 있으며, 이것은 서구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는, 확실히 전통적인 요소입니다. 그와 동시에 이 사회는 이미 전통사회가 아니므로 유가적 전통의 정치이념을 사용하여 사회기초를 다시 세우는 것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현재 유학의 부흥은 거의 형식의 차원, 예를 들면 과거의 생활방식이나 제사 등을 부흥시키는 것에 국한되어 있는 듯합니다. 이러한 형식은 현실생활과 별로 관련이 없습니다. 노약자를 존중하거나 신의를 지키는 등 유가의 윤리는 오히려 정부의 선전을 통해 추진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것들을 유학의 부흥이라고 한다면 과장된 감이 있는 듯합니다.
동아시아의 지적 자원과 ‘핵심현장’
백영서 이제 중국 내부에서 시선을 돌려, 그 바깥의 중국연구자의 연구태도에 대해 이야기 나눴으면 합니다. 연구자의 가장 중요한 태도는 타께우찌 요시미가 그랬듯이 자기(사회)를 성찰하는 거울로 삼는 게 아닐까요.
쑨 거 타께우찌 요시미는 자신의 저서 『루 쉰(鲁迅)』(1944)에서 우리가 역사를 볼 때 어떤 기본적인 법칙, 즉 역사의 한 시기를 거친 후 이전 시기의 선각자는 버려지고, 다음 시기의 사상가가 나와 역사를 다시 써야만 이 선각자들이 역사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그만의 매우 특별한 역사적 관념을 강조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장 타이옌(章太炎)이나 량 치차오(梁啓超) 같은 5・4시기 이전의 선구자들이나 5・4시기의 천 두슈(陳獨秀)나 리 다자오(李大釗) 같은 인물들 역시 모두 한 시대가 지난 후에는 더이상 호소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선구자로서 역사에 재진입할 수 있었던 것은 루 쉰이 출현했기 때문입니다. 루 쉰은 무수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 자신 역시 수많은 논쟁에 참여했지만, 그는 실제로 논쟁 속에 있지 않았습니다. 논쟁이란 그에게 있어 벗어버릴 수 있는 옷과 같은 것이었으며, 당시 사람들은 그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타께우찌가 제기한 이러한 사고방식은 우리가 외국 문화와 자기 문화의 관계를 어떻게 맺을지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는 루 쉰을 매개로 하여, 또 중국을 매개로 하여 일본의 문제를 찾는 방식을 보여주었습니다. 정확히 말해 타께우찌는 루 쉰 연구자가 아닌, 전후 일본의 사상가였습니다. 그가 일본에 관심을 기울인 방식은 바로 인류에 관심을 기울인 방식이었기에, 타께우찌가 중국으로부터 찾은 것은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담론이 아니었습니다. 타께우찌는 한번도 ‘루 쉰 모델’ 같은 틀에 박힌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루 쉰은 선생이 말씀하신 거울과 같습니다. 그 거울로써 일본 본토의 문제를 비춰본 것입니다. 저는 타께우찌를 연구할 때 그의 루 쉰 연구, 특히 1943년의 작업과 그후 일본 문학과 사상을 토론한 수많은 작업 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계속 사고했습니다. 루 쉰에 대한 타께우찌의 논의는 읽기가 매우 어려운데,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명확하지 못한 연구라고 판단하여 포기하고는 다른 텍스트로 고개를 돌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루 쉰』은 그의 원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루 쉰을 통해서 또 중국을 통해서 찾아낸 것은 해답이 아니라 문제를 사고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방법으로서의 루 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법으로서’라는 말은 타께우찌가 가장 먼저 사용했습니다. 그는 1961년 발표한 「방법으로서의 아시아」에서 “내가 말하는 방법이란 주체성”이라고 명확하게 밝혔습니다. 주체성이란 실체적인 것이 아니고 일종의 선택적 기능이기 때문에, 그에게 중국은 어떤 사용할 수 있는 모델을 제공하거나 현실적인 지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그가 이해하고 있는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이 원리에 대한 그의 논의는 매우 간단하지만, 상당히 정확합니다. 예를 들어 문혁시기의 중국에 대해 그는 요시모또 타까아끼(吉本隆明)와의 대화에서 중국사회는 노예제로부터 봉건제, 그리고 사회주의까지 인류사회의 각종 형태가 집약되어 있는 종합적인 사회라는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또 중국이 문혁기간 했던 일들은 국가기구를 강화시킨 한편 국가기구를 파괴한 것이며, 국가기구의 파괴는 중국민중이 옛날부터 지녀온 희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간단한 논술은 훗날 미조구찌 유우조오(溝口雄三)의 구체적인 자료와 역사적인 논술을 통해 증명되었습니다. 사실 중국 원리에 대한 그들의 토론은 서로 일맥상통합니다. 이러한 사고는 그들이 일본을 다시 해석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이야말로 외국연구의 성공사례이지 싶습니다.
백영서 외국 연구자가 중국을 연구할 때 가져야 할 태도로서 타께우찌 요시미의 사례가 매우 의미있다는 당신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에 부응해 제 생각을 덧붙여보지요. 외국 연구자가 중국을 자기 사회를 성찰하는 거울로 가져올 때 범하기 쉬운 오류는 루 쉰이 말한 나래주의(拿來主義, 외래문물을 취사선택해 가져오는 태도)입니다. 중국을 자기 상황에 적용하는 식으로 외국연구와 자기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다보면 중국에 대한 해설가나 소개자로 자족하기 쉽지요. 좀전에 우리가 화제로 삼은 것이기도 한데, 한국 연구자가 중국 신좌파의 분화에 대해 논의할 때 이런 잘못을 범할까봐 저는 염려합니다. 지난 세기에 한국을 포함한 해외의 좌파들이 문화대혁명을 이해할 때 비슷한 잘못을 범했지요. 모두 자신이 ‘보고 싶은 중국’을 말한 경향이 있었어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인가. 그저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연구성과를 축적해가면 된다고 주장하는 대학체제 내의 학자도 있겠지만 이것 역시 답은 아니라고 봅니다. 저는 연구자 각자가 처한 생활현장에 뿌리내려 그로부터 촉발된 사회의제를 학술의제로 바꾸려는 열정, 중국인과 한국인의 삶에 대한 깊은 흥미가 연구를 이끄는 추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와 동시에 한국의 연구자라면 중국에 관한 연구에 종사하면서도 그 문제의식을 한국의 사상자원에 뿌리내리면서 한국사상 탐색에도 기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저는 이런 연구태도를 ‘비판적 중국학’이라고 정리하고 있지요.
이런 제 관점에서 보면, 신좌파의 분화에 대한 한국 연구자의 논의가 단순한 해설이나 소개, 또는 나래주의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한국의 사상자원과 단단히 연결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창비』가 그간 제기한 주요 담론의 하나가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입니다. 당신은 이미 저와 백낙청(白樂晴) 선생의 저서에 대한 비평문을 중국, 대만 및 한국 학술지에 발표한 적이 있어 이 주제에 대해 잘 알고 계시겠지만(한국어본 「동아시아 미래에 대한 횡단적 사유」, 『동방학지』 154집, 2011), 근대의 적응과 극복이라는 두가지 성격의 과제가 사실은 단일한 과제임을 분명히한 ‘이중과제론’은 가끔 근대와 탈근대의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서는 것이라거나 양자의 절충인 듯이 오해되는 경우도 있어요. 추상도가 매우 높은 탓으로 그런 오해가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러나 양자를 동시적인 과제로 삼자는 문제의식 정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 근대에 대한 냉정한 인식과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실천적 지향이 결합된 좀더 복합적인 사고라 할 수 있어요. 이 ‘이중과제론’이라는 사상자원, 물론 이것은 하나의 예일 뿐이고 다른 어떤 한국의 사상자원이라도 좋은데, 그것과 결합시켜 중국의 사상동향과 대결해보려는 지적 긴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쑨 거 맞는 말입니다. 자기 사회 안에서 문제를 발견할 능력이 있어야만 비로소 외국연구 영역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포착할 수 있습니다. 사실 외국연구에 있어 남의 말만 좇아하는 학자들은 자국에 대해서 역시 사고할 능력이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우리가 자신의 사회 내부에 대해서 진정한 반차별 능력이 있어야 불균형한 역사관계를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논쟁 이야기로 돌아간다면, 이 역사단계에 왜 이러한 고뇌가 출현했는지, 이 고뇌 안에서 가치있는 부분은 무엇인지 등은 모두 연구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동시에 저는 논쟁 이외의 토론, 특히 사상계가 아닌 학술계의 토론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도 계속 축적되고 있는 사상자원을 서서히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중산대학 역사인류학의 토론이 좋은 사례고, 중국사회과학연구소에도 허 짜오티엔(贺照田)이 주도하는 젊은 학자들이 1949년 이후의 중국혁명사를 토론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이러한 연구들이 어느 정도까지 발전할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다양한 시도를 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논쟁은 그 자체로 매우 편파적이기 쉽기 때문에 반드시 그 특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만일 한국 내부의 문제를 중국의 사상원리와 결합시키고 중국을 매개로 한국의 문제를 논의한다면, 아마 선생이 제기한 불균형, 비대칭 같은 문제가 가장 좋은 개입점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백영서 당신이 마침 비대칭이 가장 좋은 개입점이라고 말하니까 ‘핵심현장’에 대해 말할 기회를 얻은 셈이네요. 핵심현장은 ‘이중과제론’이 구체적이고 유동적인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 아주 적절한 사례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연세대 강연에서 강조한 역사의 ‘관절점(關節點)’과도 통합니다. 시공간의 모순이 응축된 곳이 제가 말하는 핵심현장이죠. 예를 들면, 한국의 분단체제, 오끼나와, 대만 등이 요즈음 제가 주목하는 핵심현장들입니다. 중화제국, 일본제국, 미제국의 연속된 시간의 모순이 응축되었고, 현재 동아시아를 공간적으로 분리시키는 커다란 분단과 갈등이 응축된 장소라 할 수 있지요. 그 모순과 갈등이 서로 연동되어 악순환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해결해내면 동아시아에서의 선순환이 급속히 진행되는 파급력을 가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 각자의 삶에 대한 태도도 변화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이 바로 핵심현장에서부터 이뤄지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쑨 거 선생이 말씀하신 핵심현장이라는 개념은 매우 가치있는 이론적 가설입니다. 핵심현장을 설정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역사단계가 얽혀 있는 역사적 긴장을 표현하는 데 공간을 제공합니다. 오늘날 사상사 토론은 지나치게 관념화・추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역사적 맥락 가운데 개별성을 가지는 문제를 제거하고 그것을 모조리 미국식의 거대서사 속으로 집어넣어버립니다. 우리는 핵심현장 같은 공간을 사용하여 이렇게 쉽게 간과했던 역사적 개별성을 담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특정 사안에 끼워 맞춘 형이하학적 서술이 아니라 일종의 ‘형이하학적 원리’여야 합니다. 이런 원리는 그 형이하학적 특성 때문에 다른 역사에 그대로 가져다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매개가 될 수 있을 뿐이며, 이 매개를 이용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백낙청 선생의 분단체제론이 이러한 ‘형이하학적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역사상황으로 이야기한다면, 중국 대륙과 대만의 관계는 분단체제라는 개념으로 서술하기 어렵습니다. 때문에 분단체제를 직접적으로 적용한다면 양안관계를 효과적으로 해석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단체제라는 매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대륙과 대만의 관계, 대륙 내부의 관계를 사고하고, 또다른 사고의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구미의 방식으로 국민국가 형태를 구상할 필요 없이, 서로 다른 지역 민중의 요구에 더욱 부합하는 정치형태를 그려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적 과제 앞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비국가〔前國家〕의 단계를 거쳐 하나의 주권국가가 된 중국이 앞으로 어떠한 기본 과제에 직면하게 될지 다시 한번 토론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백영서 동아시아의 역사경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국만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도 간단히 ‘하나의 주권국가’로 전환하는 과정을 겪은 것은 아니란 사실이 확실히 드러납니다. 예를 들면, 핵심현장의 하나인 한반도에서의 주권은 늘 문제가 되었지요. 어떤 국제정치학자의 논의에 따르면, 식민지시기에는 주권이 상실되었고, 냉전기에 대한민국은 미국 중심의 비공식적 제국 속에서의 ‘구멍난 주권’(perforated sovereignty)을 가졌으며—그 직접적인 원인으로 분단국가인 점을 들어야겠습니다만—탈냉전기에 들어선 지금 다원화된 국제사회에서 주권의 재구성이 논의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국제정치학계의 새로운 이론에 대해 잘 모르지만, 복합국가론이야말로 바로 이 주권의 재구성이란 주제와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이 논의가 추상도 높은 ‘이중과제론’을 가지고 유동하는 동아시아 현실을 설명하는 데 유용한 매개고리로 활용될 수 있으리라고 저는 기대하고 있지요. 더 나아가 복합국가의 시각에서 다른 핵심현장과 비교하는 일은, 우리가 주권 문제를 역사적 맥락에서 좀더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믿어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오끼나와가 1945년 이후 일본 주권에 속하지 않고 미군 점령지로 있다가 1972년에 일본으로 ‘복귀(復歸)’하는 과정과 그를 둘러싼 논란, 아편전쟁 이후 영국의 식민지였던 홍콩이 1997년 중국으로 ‘회귀(回歸)’하는 과정과 그를 둘러싼 논란, 그리고 양안문제로 불리는 대만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 등이 바로 제가 말하는 비교의 대상이에요. 이런 논의는 단순히 학술적이거나 이론적인 논의에 그치는 게 아니라 동아시아의 현안인 역사와 영토분쟁을 새롭게 보는 데 유용한 시사점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백낙청 선생은 오끼나와의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영토분쟁 해결을 위해 고유영토론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므로 그 예외적 영역을 설정하여 고유영토론을 약화시키는 점진적 수정의 길을 역설했어요(『沖縄タイムス』 2012.10.24). 주권의 재구성과 연결되는 실질적으로 의미있는 주장입니다.
이제 역사・영토분쟁 논의를 할 때가 되었네요. 이 주제에 대해 우리 둘이 만나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독자들이 실망할 것 같군요.(웃음) 지금 몇개 섬을 둘러싼 갈등이 단지 영토문제가 아니라 각각의 역사문제가 응결된 것임은 우리 둘다 인식하고 있습니다. 각국에서 국가주의를 부추기는 현상을 우려하는 중국・대만・일본・한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호소문을 발표한 적도 있고요. 이런 문제에 대한 당신과 저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해보지요. 그에 이어서, 당신과 저는 상당히 긴 기간 동아시아 내부에서 국가주의를 상대화하는 동아시아적 시각을 강조하고 각기 나름으로 연대운동에 참여해왔습니다. 각자 어떤 이유로 이런 관점을 갖게 되었는지를 돌아보고, 그것이 각자의 삶의 여정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말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동아시아담론이 역사・영토분쟁의 해소에 어떻게 기여할지도 짚어볼까요.
동아시아, 전지구적 시야의 다른 버전
쑨 거 중국에서는 이러한 토론이 정치에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지금 중국지식인은 현실적인 영향력을 거의 갖고 있지 못하죠. 물론 지식인들의 토론이 실질적인 문제로부터 심각하게 멀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제 생각에 주권이란 하나의 현실적인 문제로서, 동아시아에서는 그것이 단시일에 해결될 수 없다는 공통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저는 분단체제론에서 매우 큰 영감을 얻습니다. 분단체제론은 분단이 상당히 안정적인 하나의 구조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동북아와 동남아는 상호간에, 특히 중국과의 관계에서 섬을 둘러싸고 많은 영토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주권과 관계된 문제입니다. 물론 한국과 일본의 독도 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이 섬의 주권은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모든 섬의 역사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가장 무력하지만 또한 부득이한 선택이 바로 분쟁을 유지하면서 방치해두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분쟁을 한켠에 놔두는 것은 분쟁을 해결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상식적으로 사람들의 동의를 얻기는 힘들 것입니다. 분쟁이 발생하면 해결을 해야지요. 그런데 그것을 해결하는 직접적인 방식은 전쟁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자간 혹은 다자간의 그 어떤 주권문제라도 외교적 노력을 통해서는 진정으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분쟁을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 됩니다.
제 생각에 한반도 남북대립의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로 얼마나 효과적인 방식으로 분쟁을 방치하는가에 있습니다. 동시에 분쟁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상황을 천천히 발전시키면서, 전쟁을 피하는 평화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지요. 현재로서 이것은 매우 요원한 목표입니다. 제가 보기에, 적어도 장기적 목표는 분쟁의 해결일 수 있겠습니다만, 중기적으로는 분쟁을 방치하고, 전쟁방지를 단기적 목표로 삼아 어떤 방식이든 필요한 타협 수단을 사용하여 평화를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우리가 토론하는 연대는 상당히 복잡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비판적 지식인이 연대를 이루기 위해 기울이는 노력은 물론 매우 소중합니다만, 문제는 있습니다. 이 연대에 대한 상상이 너무 단순하고, 또 이러한 민간의 연대라는 상상이 국가의 현실적 기능을 배척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에서 벗어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각 사회 민중의 국가정체성을 충분히 고려하고, 이러한 기초 위에서 연대를 토론해야 합니다. 민중의 국가정체성은 영토분쟁이 발생할 때처럼 갑자기 드러나기도 합니다. 모든 사회의 역사적 맥락이 다르기 때문에, 특히 일본정부가 아직까지 전쟁책임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보수파와 우익인사들이 여전히 침략의 역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에, 영토분쟁은 주권의 문제일 뿐 아니라 민중의 전쟁에 대한 기억 문제까지 포함합니다. 따라서 민중의 국가정체성을 민족주의의 표현이라고 단순화하기는 어렵습니다.
백영서 각 사회 민간의 국가주의나 애국주의 같은 집단정서가 국가의 대외정책에 미치는 파급력에 비해 연대운동의 영향력은 별로 크지 않지요. 그래서 저는 역사갈등이나 영토분쟁 문제의 해결을 위한 연대운동이 윤리적 차원의 호소에 그쳐서는 안되고 서로의 갈등이 초래하는 사회적 비용을 줄인다는 점에서 각 사회의 실리 차원에서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상생활이 변화하기를 기다려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제 이야기를 좁혀서 당신과 저의 개인 문제로 돌아가볼까요. 동아시아담론을 말하고 민간 연대활동을 추진해온 우리의 역할이 각자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요.
쑨 거 말로 표현하기가 상당히 까다롭지만, 요컨대 사람이 자신이 살고 있는 생활의 장(場)과 자신을 간단하게 동일시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달까요. 이것은 제가 이 장에서 이탈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활의 장에 대해, 즉 중국사회에 대해 일정한 관찰과 반성의 능력을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로부터 저는 중국사회에 대해 자각적인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 사회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이것은 제가 사상사 연구를 진행한 이래로 자각적으로 사고한 문제이며, 이러한 자각은 정체성의 자각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곧 자신을 상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특히 다양한 형태의 우월감이나 차별에 의식적으로 대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국제적 시야와 평등한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이 될 것입니다. 더 나아가, 동아시아론을 제창하는 목적은 연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평등한, 차별에 반대하는 문화들 사이의 운동을 추진하는 것에 있습니다. 거기엔 다양할 뿐 아니라 불균형할 수도 있고 심지어 서로 공유할 수 없는 정체성이 깃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평등에 대한 추구 자체가 가장 기본적인 목표가 될 것입니다.
백영서 사상사 연구가 당신의 삶에 미친 영향에 비교할 만한 것을 말한다면 제게는 동아시아담론이 그에 해당되지요.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사물을 보는 데 눈을 뜨게 된 직접 계기는 중국사 연구자로서 1990년 여름부터 일년간 하버드-옌칭연구소에 객원연구원으로 머물 때의 경험입니다. 그곳의 미국인들은 제게 중국사보다는 한국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 묻는 경우가 더 많았어요. 사실 그곳에 머무는 중국인 학자들이 많았으니 이해가 안될 것도 아니지요. 그래서 연구대상인 중국(사), 그 연구에 영향 미치는 서양에서 온 개념과 이론, 그리고 한국인의 경험이라는 세 꼭지점으로 이뤄진 삼각형의 상호작용을 긴장감있게 의식해야 독창적 시각이 가능하리라 판단했죠. 여기서 동아시아적 관점이 나오게 된 거예요. 이것은 비교적 학술적 차원의 자각이 되겠지요. 그런데 귀국한 이후 탈냉전기를 맞은 한국사회에 중국의 조선족이나 동남아 노동자들이 들어오고, 한국자본이 동아시아에 진출하는 새로운 현실에 대면하면서 ‘우리 안의 동아시아’와 ‘동아시아 안의 우리’를 사고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말하자면 실천적 차원의 자각이랄까요. 그래서 ‘지적 실험으로서의 동아시아’란 발상을 제기하게 되었지요. 그후 한국에서도 지지와 비판이 섞인 반향을 얻었고 해외에서 당신 같은 비판적 지식인들과 맺는 네트워크도 넓어졌습니다. 그 덕에 국경의 안과 밖, 제도의 안과 밖을 넘나드는 사유 전개와 실천 활동을 할 수 있었어요. 당신 표현을 빌린다면 국가를 ‘상대화’할 수 있었다고 할까요. 그런데 동아시아론을 제기한 지 근 20년이 지난 지금 그 담론은 유행하지만 과연 처음의 비판력을 유지하고 있는지, 동아시아 현실을 새롭게 보는 데 얼마나 유용한지 스스로 묻게 됩니다.
쑨 거 저에게 동아시아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시각입니다. 동아시아적 시각으로 역사의 각 단계에 진입할 때, 관심의 중점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저는 한반도 전체를 동아시아 역사 속의 중요한 관절점으로 봅니다. 거기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집결되어 있습니다. 동아시아적 시각을 갖고 나서 저는 국가의 경계를 전제로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국가의 경계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리고 차이 역시 그러하지만, 그것은 하나로 얽혀 있는 역사관계로 변하고, 동시에 그 변화로 인해 제 모든 감각은 더욱 많은 평등의 본능을 얻었습니다. 평등은 반드시 본능이 되어야 참이 됩니다. 저는 동아시아적 시각이 사람들로 하여금 맹목적인 우월감을 극복하고 평등한 인류의식을 갖게 해준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를 통해 우리의 상식 속에 있던 중심과 주변의 전제를 깨뜨리고, 역사적 원인 때문에 주변으로 여겨지던 공간을 중심의 위치로 옮겨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국제화와 보편성의 시각을 가지고 이렇게 할 순 없지만, 동아시아 같은 시각으로 우리는 평등한 가치관을 건립할 수 있으며, 특히 중국인에게 이것은 더없이 중요합니다. 일부 중국지식인들은 동아시아는 단지 지역 개념에 불과할 뿐이며 전지구적 시야를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아시아에서라면 남아시아와 서아시아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후자는 물론 맞습니다만, 전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동아시아는 지역 개념이 아니라 전지구적 시야의 또다른 버전입니다. 서구의 전지구적 시야를 당연히 동아시아적 시야에 강요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현재 서구 중심의 전지구적 시야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동아시아는 전지구적 시야의 또다른 버전으로서 다양한 의미에서의 정신적 식민, 그리고 서구세계의 비판적 이론을 온전히 보편적 이론으로 여기는 사고의 관성에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이로써 다원화된 인류 역사서술의 생산에 많은 자원을 제공할 것입니다.
백영서 물론 저도 동아시아적 관점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동아시아가 우리에게 지역학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의 문제라는 것에도 어느정도 공동인식에 도달한 상태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 자신의 동아시아담론을 돌아보면 처음 머릿속에 있던 삼각형에 일본(및 오끼나와), 대만, 동남아가 추가되면서 점차 다각형으로 바뀌고 있다고 할까요. 그 때문에 중국에 대한 관심이 약해졌다고 할 수 있어요. 또한 동아시아의 이중적인 중심-주변관계에 주목하면서 그 핵심현장의 하나인 한반도의 분단체제에 뿌리내리는 일에 중점을 두었지요. 그런데 앞으로는 저의 동아시아담론의 방향을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쪽에 좀더 집중하려고 해요. 동아시아담론이 1990년대 처음 한국에서 제기될 때 중국과의 접속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어요. 1992년 한중수교가 이뤄졌잖아요. 그런데 이제 대국화를 통해 세계사적 문제가 된 중국, 당신 표현대로 ‘일종의 종합사회’인 중국을 더 깊이 천착하면서 동아시아론의 재구성을 시도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어요. 그것은 전지구적 시야를 갖는 것이기도 하고, 좀더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인문학의 과제, 즉 보편적이고 장기적인 전망과도 통하는 문제라고 봐요. 그것이 좀전에 제가 말한 ‘비판적 중국학’이 가야 할 길이기도 하고요. 그 동력은 역시 동아시아의 연동하는 핵심현장에 대한 실천적 인식에서 나올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러한 작업을 수행해나갈 때 당신 같은 중국 학자들과 대화는 매우 소중합니다. 특히 당신은 한중 간의 대화에서 자기를 상대화하고 개방하는 것, ‘내재하는 중국, 내재하는 한국’을 강조하고 있으니 제 뜻과 잘 어울리지요.
끝으로, 한중관계의 미래, 주로 한중 지식인 간 대화의 미래에 대해 전망해보고 싶어요. 우리 두 사람은 이번에 만나 ‘한중어권(韓中語圈) 지(知)의 대화’를 정례적으로 추진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한국(즉 대한민국)과 중국(즉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국가의 지식인 간 대화가 아니라, 중국어권과 한국어권의 대화로 만들려 하고, 그래서 두 국가의 바깥 또는 그 사이〔際〕에 서 있는 지식인, 예를 들면 국경을 넘나드는 존재인 재일(在日)조선인, 화교 등의 참여도 적극 고려하고 있지요. 저는 이 프로젝트를 추진할 때 또다시 관심의 비대칭 문제에 부닥칠 것을 염려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사실 지금 당신과 저의 대화에도 비대칭관계가 발생하고 있지요. 중국어를 모어로 하는 당신과 외국어로 사용하는 저 사이의 비대칭 말이에요. 물론 우리 둘 사이에는 서툰 제 중국어를 넘어서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는 관계가 이미 형성되어 있어 소통에 별문제는 없지만요. 이렇게 보면 앞으로 우리가 추진하려는 두 언어권 지식인의 대화는 서로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한 방향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어요. 몇년 전인가 일본 시민운동가가 보여준 그림이 떠올라요. 그 그림에서처럼 서로 반대방향에서 팔을 끼고 움직이는 활동일 가능성이 크지요. 서로 방향을 부단히 조정하면서 나아가는 그런 모습 말이죠.
쑨 거 선생께서 이미 매우 매끄럽게 저의 목표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이후의 활동은 이렇게 서로 밀어주고 끌어줌으로써 문제를 가시화하고, 또한 대화로 부딪쳐가며 문제를 만들어낸 연후에 이것을 정리하는 방식이 될 것입니다.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전에는 문제해결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경계라는 틀에 갇혀서는 볼 수 없는 문제를 비대칭의 관계를 가지고 효과적으로 관찰해낼 수 있는 것이지요. 덧붙여 『창비』 여러분께 한가지 부탁드립니다. 이번 기회를 시작으로 한국사회 각 영역의 서로 다른 시각을 모두 끌어와, 다양한 충돌 속에서 더욱 많은 문제가 나타날 수 있게 해주시길 바랍니다.
백영서 우리 같은 지식인들이 동아시아 민중의 정서나 욕망에 어떻게 대응해갈 것인가라는 문제를 비롯해 더 깊이 논의할 중요한 과제가 많으나 오늘 대화는 여기서 마치려고 합니다. 앞으로도 당신이 ‘방법으로서의 한국’이란 시각에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를 더 깊이 분석하기를 바랍니다. 제가 수행하는 ‘비판적 중국학’과 당신의 ‘사상과제로서의 한국’의 성과가 서로를 새롭게 보고 변화시키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겠지요. 당신이 수행하는 작업을 『창비』 독자들과 함께 지켜보겠습니다.(세교연구소 2013.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