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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상가수(上歌手)의 노래

이성복 시집 『래여애반다라』

 

 

이기성 李起聖

시인, 평론가. 시집으로 『불쑥 내민 손』 『타일의 모든 것』, 평론집으로 『우리, 유쾌한 사전꾼들』이 있음. leekisung85@hanmail.net

 

 

2031미당(未堂)의 시 「상가수의 소리」에서, 상가수는 “뒤깐 똥오줌 항아리”로 상징되는 비천한 삶의 복판에서 죽음의 소리를 길어올리는 존재로 그려진다. “뙤약볕 같은 놋쇠 요령”을 흔들며 부르는 상가수의 노래는 자신이 바라보는 “똥오줌 항아리”를 우주적 울림을 담아내는 “명경(明鏡)”으로 바꾸어놓는다. 이성복(李晟馥) 시집 『래여애반다라』(문학과지성사 2013)에서 나는 “이승과 저승에 뻗”친 상가수의 노래를 듣는다. 그는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한사코’ 혹은 ‘무작정’ 살아내려고 애쓰는 존재들의 환부를 어루만지고, 이 속절없이 누추한 생에 대한 환멸과 허무를 통과하여 서늘하고 쨍쨍한 ‘명경’의 울림을 기어코 들려주고야 마는 것이다.

이 시집의 갈피마다 우리는 생명을 가진 존재의 벌거벗은 삶을 만날 수 있는데, 예컨대 자신의 알을 품은 채 죽어가야 하는 ‘뚝지’의 모습은 죽음이라는 숙명을 타고난 존재의 괴로움과 그 속에서도 한사코 자신의 삶을 살아내려는 존재들의 서러운 몸짓을 보여준다. 곤궁한 생활 속에서 어린 자식에게 유일한 희망을 걸어야 했던 늙은 아버지, 피로한 연애의 여흥을 돋우기 위해 모가지를 잘리는 전어, 때 묻은 팬티를 걸치고 서 있는 녹슨 포클레인의 모습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시 「포크레인」에서 이 거대한 쇠붙이가 보여주는 살육과 광기마저 속절없이 우스꽝스러워지는 순간을 마주치게 되는데, 이러한 ‘우스꽝스러움’은 “슬픔의 토사물” 못지않게 우리의 생에 얼룩진 비애의 정서를 환기시킨다. 이렇게 이성복은 삶이라는 누추한 지경을 홀로 감당해야만 하는 자들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지상의 생명에 보내는 이러한 연민의 시선 이면에는 우리가 안간힘을 쓰며 붙들고자 애쓰는 삶이 기실 헛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차가운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삶에 대한 실감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으니, 시인이 삶의 징후로서 육체의 감각으로 집중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네 입술의 안쪽/(…)/내 눈엔 축축한 살코기밖에/안 보인다”(「입술」)에서 열정의 깊은 곳에 은폐된 삶의 어두운 본질은 ‘살코기’가 환기하는 섬뜩한 실물성으로 구체화된다. 나의 몸에 와닿는 차가움은 “나는 남의 순간을 사는 것만 같다”(「來如哀反多羅 3」)에서와 같이, 삶을 잃어버린 자의 상실감을 역설적으로 환기한다.

시인에게 삶이란 “오래 시든 살”(「이별 없는 세대 3」)이 느끼는 차갑고 떨리는 경련 같은 것이다. 육체의 감각이 선명하고 절실할수록 그것이 가리는 부재의 음영은 더욱 깊어진다. “음부는 세워진 허벅지 사이 끼어 있었다”(「앉아 있는 누드」)에서 보이듯, 그것은 생에 대한 모든 열망과 충동을 집어삼키면서 출현하는 검은 허공이다. 생의 허구성을 외설적으로 증명하려는 듯 이 “시든 음부”(「움직이는 누드」)는 죽음으로 향한 입구처럼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다. 살아 있는 자가 죽음을 향해 소리치는 것이 ‘초혼’(招魂)의 정조라면, 이렇듯 죽음으로부터 생을 향해 내달려오는 애절한 울음을 무엇이라 해야 할까.

이성복은 자신을 낳아준 생의 음부를 바라보는 늙은 태아처럼 노래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미 늙었으나 또한 영원히 어린 이 영매는 그 검은 구멍 속에서 새로운 빛의 이미지와 만나게 된다. “빛은 썩고 농한 것들만/찾아 다녔어/(…)/누구라도 대신해/울고 싶었던 거지”(「빛에게」)에서, 역한 냄새를 풍기는 “썩고 농한 것들”을 찾아다니던 시인의 육체에서 새로운 울음이 태어난다. 허벅지 사이에 놓인 어두운 구멍에 머리를 처박고서야 들을 수 있는 노래, 그것은 “도무지 닿지 않”는(「구멍」) 죽음의 묘혈에서 피어난 꽃이다.

삶과 죽음의 근원적 불가능성에 대한 노래는 시인의 말을 빌자면 ‘헛소리’에 다름 아니다. 이성복의 시는 ‘헛’과 ‘소리’ 사이에 발생하는 간극에서 태어나는데, 그것은 부재로서의 ‘헛’을 끌어안고자 애타게 열망하는 ‘소리’의 불가능한 꿈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창백한 간극 속에 놓인 시인의 울음은 삶을 관통하는 어떤 전율의 순간에 이른다. “놋주발에 담긴 물처럼 그 속까지 환히 비치는/생, 그 속에서 참매미가 애타도록 울고 나는 驚氣하는/아이처럼 부르르 떨며 일어난다”(「나의 아름다운 생」)에서, ‘놋주발’처럼 쨍쨍하고 투명한 ‘매미의 울음’은 죽음을 향해 고조된 생의 한순간을 환기하는데, 이 순간 생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가 모두 휘발되어 세계는 투명한 빛으로 현현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단을 펼쳐놓은()’ 지경에 이르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헛것의 시간()을 견뎌야 할 것인가. 이 모진 견딤의 운명이 끝내 서러운 자들, 부디 눈과 코와 입을 막고 이승과 저승에 뻗친 상가수의 노래를 들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