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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주경철 『대항해시대』, 서울대출판부 2008
폭력은 근대 유럽이 개발한 수출상품
남종국 南宗局
동국대 사학과 교수 namjk0513@dgu.edu
주경철(朱京哲)의 『대항해시대』는 근대 유럽의 해양 팽창사를 다룬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과 구성은 대항해시대에 대한 기존의 접근방식과 상당히 다르다. 이러한 차별성은 근대 세계사를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하려는 저자의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저자는 지난날의 통상적인 근대사에서 소홀히 취급되고 무시되던 이야기들에 주목하고, 더 나아가 왜곡된 역사인식들을 극복하려고 시도한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의 장점이자 독창성이다. 이를 고려할 때 세부적인 내용분석보다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주장들을 살펴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머리말에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고 본문에서 여러차례 반복되는 핵심 요지는 세가지이다. 해양세계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근대, 유럽중심주의의 극복, 폭력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근대가 그것이다.
근대 세계사를 해양세계의 발전이라는 새로운 시각에서 재해석해보겠다는 저자의 문제제기는 전적으로 합당하다. 머리말에 나오듯이 지금까지의 역사는 대부분 대륙문명의 관점, 그것도 주로 농경문화권의 관점에서 바라본 역사였다. 저자는 바다를 통한 교류와 접촉이 특히 근대세계의 형성과 발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이전까지 각 대륙을 갈라놓는 장벽이던 바다가 문명권들이 서로 만나는 소통로가 되었고, 해로를 이용하여 세계가 조우하면서 전지구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바다를 통해 온 세계가 함께 참여하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 혹은 지구사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저자는 근대사에서 바다를 통한 상호 접촉과 소통이 갈등과 지배로 이어졌고, 그것이 불균등하고 수직적인 구조의 근대세계를 탄생시켰음을 역설한다.
두번째 문제의식은 유럽중심주의 극복이다. 국내 학계에서 그러한 노력들이 이미 꽤 오래전부터 있었고, 서양사학회는 2006년과 2007년‘유럽중심주의의 극복’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저자가 극복하고자 하는 유럽중심주의적 역사해석의 핵심은 15세기말 새로운 대륙으로 진출하게 된 유럽세력이 이후 세계사의 발전을 주도했고, 나머지 지역들은 수동적인 자세로 있다가 유럽의 식민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여러 분야의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이런 주장이 틀렸음을 밝히고 유럽이 주도권을 잡고 우월한 지위를 행사하는, 즉 구조적인 변환이 이뤄지는 시기는 근대 초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후인 1750년대라고 주장한다(115면, 218면). 그렇지만 16~18세기 동안 유럽이 계속 공세적이고 다른 문명권들은 계속 수세적이었다는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부언은 자칫 유럽중심주의 극복이 유럽인들의 편견을 극복하는 방향이 아니라 때론 유럽인들이 우월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데로 나아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세번째 문제의식이자 이 책의 가장 독창적인 부분은 무엇보다 폭력이라는 렌즈로 근대 세계사를 재평가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근대는 진보와 발전이라는 시각에서 조명되어왔다. 또한 기존의 역사인식에 따르면 근대화는 합리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는 근대 이후 성립된 세계질서가 불평등의 구조화에 다름아니었고 시종일관 폭력적으로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유럽이 세계의 위계에서 상위를 차지하게 된 것도 이러한 불평등한 구조화 과정에서 폭력을 가장 유효적절하게 사용한 덕분이라고 주장한다. 『대항해시대』에서 사용된 폭력의 개념은 총, 대포로 대변되는 군사적 폭력성을 넘어선, 좀더 추상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의 폭력이다. 그런 연유로 저자는 전쟁보다 노예무역을 근대 세계사에서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대규모로 폭력이 가해진 비극으로 간주한다. 1천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음으로 내몰리거나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어야 했고, 근대세계는 이러한 희생 위에서 발전해왔다는 것이다(358면).
근대세계의 상호 접촉과 교류가 기존의 환경과 문화를 폭력적으로 변화시켰음을 보이는 7장과 8장도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7장에서는 밀, 옥수수, 담배 등의 작물들, 말, 소 등의 동물들 그리고 말라리아, 티푸스, 황열병 등 온갖 전염병을 일으키는 병원균들이 대륙을 넘어 대규모로 이동하면서 생태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했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8장에서는 유럽이 설득과 교화의 평화적인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강압적으로 상대방의 문화를 패망시키고 영혼의 개조를 강요했음을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 사용된 폭력의 개념에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근대세계의 폭력이 유럽산(産)이고, 근대로 들어오면서 유럽이 나머지 세계로 폭력을 수출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것이 근대 이전에 폭력이 없었다거나, 유럽인만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다른 문명권 사람들은 하나같이 유순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234면). 근대 유럽산 폭력의 특징은 ‘합리적’폭력이었기 때문에 더욱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고 더 파괴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말하는 합리적 폭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최대의 이윤을 얻기 위해 최대의 폭력을 집중적으로 행사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근대 유럽이 수출한 폭력은 나머지 세계인들에게는 아주 낯선 형태, 전혀 다른 방식의 전투였다고 한다. 예컨대 전쟁은 성스러운 경연으로서 그 승패는 어느 도시의 신이 우세한지를 증명하는 행위이고 따라서 싸우는 양측은 동등한 출발점에 서야 한다는 사고를 지닌 멕시코 인디언들에게 유럽식 전쟁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폭력이라는 키워드로 근대화 과정의 불행하고 어두웠던 역사를 고발하고 증언한다. 하지만 유럽이 발명하고 수출한 폭력이 유럽 고유의 브랜드이고, 근대 유럽의 폭력이 역사적 형성물로서의 특수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대항해시대』가 5백편가량의 전문 연구서들과 연구논문을 참고한 6백면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라는 사실은 일반 대중의 독서 욕구를 처음부터 앗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책 곳곳에 나오는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일화들은 이러한 부담감을 일소하고 책읽기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역사(history)의 어원이 이야기(story)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