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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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일사일언의 문법

김성대 시집 『사막 식당』

 

 

조강석 趙强石

문학평론가, 인하대 HK교수. 저서로 『아포리아의 별자리들』 『경험주의자의 시계』 『비화해적 가상의 두 양태』 등이 있음. outeast@naver.com

 

 

2031김성대(金成大)의 시에 대한 세간의 평은 전통 서정시적인 감성으로 새로운 문법 혹은 발성법을 창조해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그의 시가 감성의 쇄신이 아니라 발화형식을 무한히 생성해내는 쪽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지금이 시의 시대라면 혹자는 이 역시 ‘창조경제’의 좋은 예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의 시가 새로 구사한 발성법은 이채로웠다. 그런데 김성대의 시에 대한 이런 평가는 이번 시집에 대해서는 조금 수정될 필요가 있겠다. 감성을 다채롭게 발화하는 것은 이 시집에서 김성대의 주요 관심사는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감성의 혁신이나 기성관념의 해체를 시도하는 것 역시 시집의 주된 방향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그의 두번째 시집 『사막 식당』(창비 2013)은 일사일언(一事一言)을 완강하게 고집하는 이가 그 성공과 실패의 소산물들을 마치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자식 없다는 듯한 태도로 안아놓고 있는 형국이라고 하겠다. 그러니 두가지가 언급되어야 하겠다. 친절하지 않은 발성법을 애써 친절하게 수습하면서 전통적 정서를 추출하려는 시도는 도로(徒勞)까지는 아닐지언정 실익이 별로 없는 것이며, 거꾸로 엄밀한 원심분리법에 의해 저 방법의 비결을 기어코 정돈한다고 해도 그리 새삼스러울 것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일사일언이라 함은 하나씩의 성취와 하나씩의 절망들이 소소하게, 즉 비()유기적으로 모여 있다는 것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 실린 시들은, 물론 연작 형태의 시까지 포함해서, 저마다 하나씩의 내적 실재를 지닌 단독적 소출들로 검토되는 것이 마땅하다. 어쩌면 이 시집에 대해서라면 시집에 대한 서평보다는 개별 작품들에 대한 작품론이 좀더 절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성패의 고투가 담고 있는 열의와 경과를 최대한 성의껏 계량해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다. “언어는 뻗어버렸습니다 눅신눅신 욱신욱신/입구를 모르는데 뜻이라뇨”(「바나나와 그리고」).

생성변형은 다수의 생성에 방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성의 기저에 일정한 구문론적 구조(syntax)가 존재함을 전제로 한다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 어떤 무궁생성은 다수로 우리를 현혹시키지만 수에 매혹되지 않고 생산의 툴(tool)을 보는 이에게는 손바닥 위의 단조로운 놀음일 뿐이다. 이때 무궁과 다수는 실상 덩어리일 뿐이다. 다수를 내밀고 한사코 툴을 감추는 이는 겉모습의 화려함과는 달리 덩어리의 무게에 짓눌린 이이기 십상이다. 가볍고 날렵해 보이는 시들이 실상은 오히려 종종 무겁고 고단한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다. 이 시집에도 그 흔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다만 “서로를 실종하는 것이겠지”(「사막의 식당」), “음력이 나를 입장하기 시작한다”(「슈거블루향정신 5」) 같은 무리수는 구문론을 새로 쓰기보다는 기성의 구조에 대한 강박의 피로를 노출한다.

그러나 인용된 부분에서는 아예 툴을 공시한다. 이 시집에서 훨씬 자주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그런 공시의 현장이다. 인용된 부분은 아마도 그중 가장 ‘외설적인’ 대목일 것이다. 생성변형은 구조를 전제로 한다. 이때의 언어는 이미 발화 이전에 존재한다. 다시 말해 발화로서의 출구 이전에 구조로서의 입구를 지닌다는 것이다. 의미 역시 마찬가지이다. 도달한 의미 역시 차이로 생성되는 구조로서의 입구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이채로운 현상도 입구의 소산이다. 그런데 현상의 차원에서 부풀어 도달된 언어는 입구라는 전제가 사라지는 순간 퍼진다. 역시 이 경우에도 남는 일은 일사일언이다.

그러니 “사막을 떠도는 눈먼 사람”(「슈거블루향정신 5」) 같은 구절에 혹하지 말자. 이 구절에 담긴 짙은 정서와 시집의 배후로 짐작되는 인물의 등장을 우선은 모두 무시하는 것이 이 시집에 실린 작품들을 읽는 데 더 유익하다. 실상 이 시집에 가장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연작이다. 연작은 일사일언을 배신한다. 물론 연작 역시 일사들에 대한 일언들의 소원한 묶음이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꼭 그런 정도에서 ‘향정신사’의 인상들을 채록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이보다는 “거미가 매번 같은 집을 짓는 것은//신이라는 음률이 그렇게 동일했기 때문이다”(「π ⅱ」)나 “구름을 보면 몸 안의 잠이 먼 곳을 돌아오는 거 같아”(「목신의 오수」) 같은 구절을 담고 있는 작품들이 이 시집의 본령에 가깝다. 이 두 작품을 포함하여 「9월의 미발(未發)」 「페페 2」 「31일, 29초」 「∞의 이데아 2」 「염전」 같은 작품들은 입구를 모르는 언어가 오히려 어떻게 더 사물에 즉()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수일한 작품들이다. 이 방향에서 우리 시의 새로운 활로가 열릴지 지켜볼 이유가 충분하다.

조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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