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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박희병 『범애와 평등: 홍대용의 사회사상』, 돌베개 2013

담헌 사상 바로 읽기, 주박과 오해를 넘어서

 

 

김봉진 金鳳珍

기타큐슈(北九州) 시립대학 국제관계학과 교수 kimbongj@kitakyu-u.ac.jp

 

 

160_촌평_범애와평등_fmt세계 곳곳을 배외하고 있는 망령, 그 이름은 ‘근대의 주박(呪縛).’ 근대 특히 그 부()의 측면에 홀린 채 얽매어 있음을 뜻한다. 그 모습은 복잡다양하고 뿌리는 깊다. 따라서 그 정체를 밝히는 일은 아포리아다. 그럼에도 근대의 주박이라는 범주를 설정하고, 이를 밝혀나갈 필요가 있다. 근대의 주박을 넘어서는 일은 우리 모두의 공통과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근대의 주박은 근대주의를 포함한다. 근대주의란 구미근대를 절대화하는 경향성이라 풀 수 있다. 주의할 것은 그 바탕에는 이원사고나 이항대립사고가 깔려 있다는 점이다. 이로써 상대화를 거부한 채 예컨대 ‘근대 vs. 전통’의 대립도식을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근대와 전통의 양면성, 복수성, 중층성은 흐려진다. 특히 전통에 대한 오해나 편견이 재생산된다.

10년 전 지은이를 찾아가 만난 적이 있다. 그가 『운화와 근대』(돌베개 2003)라는 저서에서 한국사상사 연구의 근대주의적 시각을 비판했던 까닭이다. “최한기 연구는 ‘근대확인적’ 관점이 아니라 ‘근대성찰적’ 관점에서 전개될 필요가 있다”(6면)라고 말이다. 단, 그 관점을 좀더 치밀하게 전개했으면 하는 아쉬움은 지금껏 남아 있다.

지은이는 이번에도 『범애와 평등』 곳곳에서 근대주의적 시각을 비판한다. 그렇지만 이를 대신할 새로운 시각의 제시는 없다. 그의 관심은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사상에 관한 기존 연구의 수정·보완에 쏠려 있을 뿐이다. 그는 담헌 만년의 사회사상을 ‘범애와 평등’이라는 핵심어로 정리한다. 그리고 거기엔 ‘장자와 묵자가 포섭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담헌 사상과 장자의 관련성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묵자와의 관련성은 거의 거론된 적이 없다. 지은이는 “홍대용 사회사상의 숙성 과정에서 묵자는 대단히 중요한 인소”라고 주장하면서 “이 점에 대한 해명이 종전에는 없었다”(6면)라고 말한다. 그 해명을 담은 『범애와 평등』에는 기존 연구에 대한 뜻깊은 수정·보완이 담겨 있는 셈이다.

‘담헌 사상과 묵자의 관련성’에는 어느정도 공감한다. 하지만 전적으로 공감하긴 어렵다. 담헌의 ‘범애와 평등’ 관념을 묵자에게만 환원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노자, 장자나 공자, 맹자에서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불교나 천주교와도 관련시킬 수 있을 터이다. 그렇다면 ‘묵자와의 관련성’은 자칫 “기계적 환원론”(42면)이 될 수도 있다.

전통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넘어서 보면 유학 속에도 ‘범애, 평등’ 관념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천하는 ‘공()’ 즉 모든 사람의 것이다. ‘공은 평분(平分)(『說文解字』)이니 천하란 ‘평분’ 곧 ‘공평하게 나누는’ 공화세계인 셈이다. 그 안에서 사람이나 집단은 이를테면 권리와 의무를 서로 공평하게 나눔으로써 조화・공존한다. 나아가 사해일가의 ‘대동’을 꾀한다.

위에서 언급한 ‘평, 분’이란 유학, 성리학 핵심어의 하나이다. 이는 ‘균(), 제()’ 등을 함의한다. 이들 개념은 모두 평등 관념을 담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이때 평등이란 서양 근대의 개인주의적 평등을 내포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는 관념을 뜻한다. 그리고 차등 관념과 이어져—차연(差延)되어—있다. 달리 말해 ‘평등 vs. 차등’의 이원사고, 대립도식의 범주를 넘어서 있다.

주지하듯 성리학은 유학을 바탕으로 불교, 도교 등을 융합시킨 사상이다. 그 안에는 이들 여러 사상, 종교의 요소와 거기에 담긴 논리가 비판적으로 수용되어 들어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성리학 속에는 ‘범애, 평등’ 관념 역시 담겨 있다. 우리가 이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근대주의, 근대의 주박, 그리고 전통에 대한 무지 등이 있다.

예컨대 성리학의 기본 명제인 ‘리일분수(理一分殊)’의 리일은 ‘범애, 평등’ 관념을 담고 있다. 리는 앞서 본 ‘공’ 개념과 이어져 있다. 동시에 도를 비롯하여 사단(四端)의 인, 의, 예, 지, 그리고 칠정(七情) 가운데 애() 등 개념과도 이어져 있다. 그리고 ‘천리자연(天理自然)’이란 명제에서 보듯 ‘천, 자연’의 만물과 인간을 하나로 관통한다. 이때 ‘하나로’는 ‘평등하게’를 포함한다.

지은이 역시 성리학 속의 ‘범애, 평등’ 관념을 의식하고 있기는 하다. 예컨대 성리학의 선배 격인 장재(張載)의 “기일원론”(氣一元論, 32)을 거론한다. 거기에 평등의 계기가 있다고. 단, 동시에 차등의 계기가 공존한다고 덧붙인다. 이에 비해 담헌은 장재의 기철학을 그 차등의 계기는 빼고 섭취했노라 주장한다. 담헌의 ‘인물균(人物均)’ 명제는 오직 평등이란 것이다.

물론 ‘인물균’ 명제에는 평등의 계기가 있다. 전술했듯 ‘균’ 개념은 평등 관념을 담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평등은 아니다. ‘균’ 개념은 차등 관념과도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담헌 사상에도 차등의 계기는 있다. 어떤 사상, 철학도 차등, 불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으리라. 그렇다면 담헌 사상 속의 ‘균과 불균’을 함께 보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지은이는 또한 ‘천지만물일체의 인()’이라는 왕양명(王陽明)의 명제를 거론한다. 이는 성리학의 ‘범애, 평등’ 관념을 크게 부각시킨 명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은이의 생각은 다르다. 왕양명의 ‘인’은 본질적으로 차등애에 있다고 한다. 반면 담헌은 왕양명과 달리 묵자의 겸애를 받아들였고 그런 만큼 오직 ‘평등’을, 나아가 묵자를 넘어선 ‘평등’을 사유했노라고 주장한다(107면).

각설하고 ‘묵자의 겸애, 범애, 평등애 vs. 유가의 차등애’라는 지은이의 대립도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단순화의 오류와 함께 전통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범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지은이 스스로 지적한 “과장이나 왜곡”(23면)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은이는 담헌 사상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함으로써 오히려 왜곡한 부분도 있는 듯하다.

예컨대 담헌 사상이 성리학, 기존 유학을 뛰어넘는 면모를 지녔고, 혁신적 세계관을 이끌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7면). 이는 어느정도 타당하다. 단, 담헌만 아니라 다른 많은 유학자들도 그랬다. 이 책 제5장에서 거론된 허균(許均, 1569~1618), 장유(張維, 1587~1638)10여명이 (지은이는 부인할지 몰라도) 그 일부에 속한다. 서로 면모와 세계관의 내용에서 차이를 보일 뿐이다.

담헌이 인간학, 자연학, 사회철학 등 분야에서 “전혀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냈다거나, 그의 사상의 “스케일과 창의성”은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다”(7면)라는 평가는 좀 지나치다. 그래서 자칫 왜곡에 빠질 우려가 있다. 담헌 사상 속의 ‘범애, 평등’ 관념은 물론 주목할 가치가 있다. 단, 지나침은 그 본래성에 이르지 못하게 할 우려가 있다.

지은이는 담헌의 ‘공관병수(公觀倂受)’와 상대주의에 주목한다. 그렇다면 거기에 담긴 담헌의 사고나 논리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원사고, 이항대립사고를 넘어서는 사고와 논리 말이다. 이런 사고를 나는 삼원사고라고 부른다. 이를테면 하나나 둘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면서 둘, 둘이면서 하나(一而二 二而一)’를 보는 것이 삼원사고이자 그 논리이다.

지은이는 담헌의 강한 ‘평등’ 지향과 민권의식에 주목한다. 단, 이것들이 마치 담헌의 탈유교나 탈성리학 성향의 증거인 듯 논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거듭 말하나 평등 관념은 유교, 성리학에도 담겨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민권의식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논할 겨를은 없으나 민권의식 역시 유교, 성리학에도 담겨 있다.

지은이는 담헌의 ‘화이일(華夷一)’ 명제를 화이론의 “탈주술화”(173면)로 해석한다. 이는 일단 타당하다 본다. 그런데 “화이론의 부정”(182면)이나 그 “원리적 부정”(35면)이라는 해석은 지나치다. 하긴 ‘화이일’ 명제만 보면 이는 ‘화이구분’의 해체를 뜻한다. 단, 담헌 저작(醫山問答)의 이어지는 말에서 ‘화이구분’은 곧 복구된다. 담헌의 화이론은 ‘존속’하는 셈이다.

나는 담헌의 화이론을 분석하고 화이관을 밝힌 논문을 쓴 적이 있다. 「홍대용 연행록의 대외관」(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 엮음 『세계정치 12』 제302호, 2009년 가겨울)을 참조 바란다. 거기서 ‘화이일’의 의의는 화이관의 ‘부정’이 아니라 ‘상대화’에 있음을 밝혔다. 또한 화이론과 화이관은 사상사적으로 한갈래가 아니었음을 알리고, 그 갈래를 나누어 설명했다.

담헌은 ‘자기(국)중심적이자 닫힌’ 화이관을 비판했다. ‘상대주의적이자 열린’ 화이관을 지녔던 까닭이다. 거기에는 삼원사고와 그 논리가 깔려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담헌 사상을 제대로 해석하기 위해선 삼원사고와 그 논리가 필요하리라. 이는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 일반에도 해당되는 말이다.